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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 15. 황해도 서흥 귀진사를 찾아서
오늘은 서울을 출발점으로 하여 금천군하(金川郡下)의 사암(寺庵)을 돌아보고, 다시 평산(平山)으로 갔다가 서흥군(瑞興郡)에 있는 귀진사(歸眞寺)를 찾기로 한다. 기차를 타고 문산(汶山)을 거쳐 개성(開城)에 도착하여 잠시 쉬었다가 토성을 지나서 금천역(金川驛)에 다달았다.
北韓 寺庵 紙上巡禮記
⑮ 黃海道 瑞興 歸眞寺를 찾아서
鄭泰爀 (哲博·東國大佛教大教授)
 
 
오늘은 서울을 출발점으로 하여 금천군하(金川郡下)의 사암(寺庵)을 돌아보고, 다시 평산(平山)으로 갔다가 서흥군(瑞興郡)에 있는 귀진사(歸眞寺)를 찾기로 한다.
 
기차를 타고 문산(汶山)을 거쳐 개성(開城)에 도착하여 잠시 쉬었다가 토성을 지나서 금천역(金川驛)에 다달았다.
 
금천역(金川驛)에서 서북면(西北面)쪽으로 가면 조포(助補)라는 곳이 있고,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것이 천신산(天神山)이다. 초여름 푸른빛이 온 산을 덮었는데, 가까이 갈수록 산수가 명미(明媚)하여 벌써 더위를 잊게 한다.
 
이 산에는 고려 때에는 불교가 융성하여 사찰이 많이 있었으니, 그 중에서도 승왕사(僧王寺) ∙ 현암사(縣岩寺) ∙ 용암사(龍岩寺), 천신사(天神寺) 등이 가장 웅장하였다고 한다. 특히 승왕사(僧王寺)는 신돈(辛旽)이 있었던 절이다. 지금은 이들 여러 절이 오직 초석만이 남아 있어 융성하던 당시를 어렴풋이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서남쪽으로 멀리 보이는 곳은 어디인가? 저기가 산외면(山外面)이 아닌가. 산외면(山外面)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저 산이 황의산(黃衣山)이 아니냐? 연백(延白), 평산(平山)의 군계(郡界)에 서 있어. 천봉(千峯)이 군졸(軍卒)같이 늘어섰으니 가을이 되면 단풍(丹楓)이 들어서 마치 황의병풍(黃衣屛風)을 세운 듯하다. 전설에 의하면 왕년에 황의도사(黃衣道土)가 이 산에서 수도하였음으로 이로써 황의산(黃衣山)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동쪽으로 바라보면 영파정(暎波亭)이 있다. 천지천(天地川)의 연안에 서 있는데 500 여년 전에 문절공(文節公) 이행(李行)이 여기에 은거하다가 지은 것이다.
 
현내면(縣內面) 쪽으로 발길을 돌려 원명리(圓明里)로 간다. 여기에는 원명사(圓明寺)가 있다. 이 절은 이조(李朝) 개국(開國) 345년 병술년(丙戌年)에 중건하였다고 하니 경(境)내외의 수려한 산수로 말미암아 피서지로 유명한 곳이다. 대웅전(大雄殿)에 모신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은 근엄한 표정으로 굽어보고 계신다. 승려는 보이지 않고 가끔 찾는 산림간수(山林看守)가 뜰을 쓸고 향을 피우는 듯하다.
 
금천군하(金川郡下)에서는 이만 보고 다시 기차편으로 평산군(平山郡)을 찾아야겠다. 군청소재지(郡廳所在地)인 남천역(南川驛)에 내려, 평산면(平山面)으로 거슬러 올라와 북수사(北岫寺)를 먼저 찾아본다. 조그만 암자에 지나지 않으며 이름만 남아 있을 뿐, 폐사(廢寺)될 운명에 놓여 있다. 여기서 인산면(麟山面)으로 가려면 버스 편으로 가야 하는데 여러 번을 갈아타고 여러 시간이 걸려야 한다. 이곳에는 석종사(石鍾寺), 관북사(舘北寺)가 있으리라. 그곳까지 가기 전에 남천(南川)서 동쪽으로 약 5리(里)쯤 되는 지점에 있는 주필대(駐蹕臺)를 찾는다. 선조(宣祖) 때에 임진란을 겪은 조정에서 부득이 몽진(蒙塵)하게 되실 때, 도중에 이곳에 이르러 머문 일이 있었다고 하여 그 사적(事蹟)을 적은 비석이 있다.
 
 
▶ 귀진사(歸眞寺) 극락전(極樂殿)
 
 
다시 여기서 동남쪽으로 10킬로미터쯤 가는 곳에 산성이 있다. 이것이 태백산성(太白山城)이라고 하는 것인데, 옛날에는 성황산성(城隍山城)이라고 일컬어 석축(石築)의 둘레가 7, 525척(尺)이요. 높이가 20척(尺)이며 그 안에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이 붕괴된 채 버려져 있어 가시덤불만이 우거져 있으나, 그래도 당시의 성관(盛觀)을 말하는 듯하다. 동서에 성문이 있고 그 석문(石門)은 홍예석축(虹霓石築)이요, 문 위에는 문루가 있어, 그곳에 올라 옷가슴을 펼치니 상쾌(爽快)함이 이를 데 없다. 특히 동문(東門)에 올라서 예성강(禮成江) 상류의 푸른 물을 바라보니 청류(淸流)가 기암괴석(奇岩怪石)의 단애(斷崖)를 씻어 유유히 흐르는데 돛단 배가 보일 듯도 하다마는 가끔 나타났다 없어지는 검은 배만 보이니, 세상이 변하여 메마른 인심에 무엇인들 남을소냐. 예전에는 저 강물에 고기잡이 배가 점점히 떠 있고, 예전에는 저 강물 사이로 유람선이 풍광을 즐겼건만 이제 어느 누가 꿈엔들 그려보랴. 성내(城內)를 무심코 거닐면 울창한 수목 사이에 점재하고 있는 민가 사이에 태사사(太師祠)를 찾게 된다.
 
이 태사사(太師祠)는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충절공(忠節公) 유금필(庾黔弼), 무열공(武烈公) 배현경(襄玄慶), 무공공(武恭公) 복지겸(卜智謙)의 상(像)을 모셨다.
 
길이 좁고 험하여 힘이 드는데, 인산면(麟山面)으로 가려면 어떻게 할까 걱정이 된다. 동에서 서로 가는 길이요, 게다가 교통편이 좋지 않아 간신히 차를 잡아타고 인산면(麟山面)에 도착하니 정오가 지났다. 먼저 관북사(館北寺)를 찾고, 다시 석종사(石鍾寺)를 찾는다. 모두 사암(寺庵)다운 면모를 잃고 시운에 시달려서 기진한 모습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관북사(舘北寺)는 성불사(成佛寺)의 말사(末寺)로서 거금(距今) 1, 400년 전 신라(新羅) 때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불수산(佛首山)에 절을 세우고 석종사(石鐘寺)라고 했는데, 그 후에 관북사(舘北寺)라고 사명(寺名)을 바꿨다고 한다.
 
시간도 많이 흘렀고 서흥군(瑞輿郡)까지 가야 하겠기에 올 때 타고 온 차를 다시 돌려 타고 남천읍(南川邑)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잠시 쉬고 싶으나 쉴만한 곳이 없어, 읍내에 있는 남천사(南川寺)를 찾는다. 사우(寺宇)는 오래지 않아 50여 년쯤 된 듯하나 공회당(公會堂)으로 사용하고 있다. 경내에 있는 샘물로 목을 추기니, 그래도 불은(佛恩)이 지중(至重)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서흥군(瑞興郡)에 있는 귀진사(歸眞寺)로 가려면 남천역(南川驛)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신막(新幕)으로 가서 버스로 율리면(栗里面)까지 가야 한다. 숭덕산(崇德山) 중복에 자리 잡은 대찰(大刹)이다. 이 절은 800여 년 전에 세워진 절로서 불경판(佛經版) 2, 000여(餘)를 소장(所藏)하고 있고, 불교자전(佛敎子典)이라고 말할만한 용감수감(龍龕手鑑)의 판목(版木)이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소중히 봉안할 줄 모르고, 다만 형식만으로 승려 아닌 승려가 지키고 있을 뿐이다. 불보(佛寶) · 법보(法寶) · 승보(僧寶)는 지키는 것만으로 족한 것이 아니고, 잘 받드는데 그 뜻이 있나니,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주인을 만나야 빛을 발하건만, 어찌된 인연으로 이러한 보물이 이렇게 비운 속에 놓이게 되었는가? 여기는 율리면(栗里面) 송월리(松月里)라고 하는 곳인데, 서흥읍(瑞興邑)서 4킬로미터쯤 되는 지점이다.
 
지금은 귀진사(歸眞寺)라고 부르나 일명(一名) 귀진사(歸進寺)라고도 하며, 창건(創建) 당시에는 성수사(星宿寺)였다. 따라서 지금의 이 숭덕산(崇德山)도 예전에는 고덕산(高德山)이라고 불렀었다고 기록에 나온다.
 
지금부터 400여 년 전에 보우화상(普雨和尙)이 여기에 머물며 불교(佛敎)의 중흥을 위해서 애쓰니 당시에 장경(藏經)을 모실 경전(經殿)과 많은 불각(佛閣)을 세운 것이 지금은 모두 찾을 수 없다. 보우선사(普雨禪師)가 그때 여기에서 불교경판(佛敎經版)을 간행(刊行)하였는데, 특히 불교(佛敎)의 보전(寶典)인 용감수감(龍龕手鑑)은 보우화상(普雨和尙)의 명으로 당시의 귀진사(歸眞寺) 주지(住持) 석희(釋熙)의 감독으로 개판(開版)하였었다.
 
또한 용감수감(龍龕手鑑)과 전후하여 중간(重刊)한 법화경(法華經), 화엄경(華嚴經), 십지론수륙문(十地論水陸文),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의 판본(板本) 2, 000여매(餘枚)가 있어 귀중한 법보원(法賓院)이다.
 
이와같이 법보(法寶)를 소장(所藏)한 이 절이기에, 임진란(壬辰亂)에도 병변(兵變)를 면하였고, 아직까지 이조초엽(李朝初葉)의 건축양식(建築樣式)을 보존하는 것으로서는 북한 땅에서는 더욱 보기 드문 귀중한 문화재이다. 더구나 극락전(極樂殿)의 목조(木彫)는 그 섬숙(爓熟)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동구(洞口)로부터 이 절에까지 이르는 계곡도 기승(奇勝)을 극(極)하니, 더욱 경관(景觀)이 거룩하다.
 
율리면(栗里面)과 도면(道面)과의 경계인 성현(城峴)에 성채(城砦)가 보인다. 또한 도면(道面) 송화리(松花里)에는 20여(餘)의 지석(支石)이 있고, 송화리(松花里)에는 천자(天子)가 태어난다는 천자산(天子山)이 우뚝 솟아 우람하게 보인다. 천자봉상(天子峯上)에 오르니, 봉정(峯頂)에 天子山이라고 새긴 글자가 있는 마애비(磨崖碑)가 반가히 맞아준다. 서쪽으로 보이는 저 산이 나장산(羅帳山)이 아니냐? 저 산정에 가면 옛 사지(寺趾)가 있으리라고 마음을 채찍하여 산정에 오른다. 과연 주초(柱礎)가 세 개 서있는 사이에 기왓장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서흥면(瑞興面) 오운리(五雲里)로 다시 발길을 돌린다. 오운산(五雲山)이 청아(淸雅)한 자태로 서 있는데, 중복(中腹)으로 오르면, 또한 옛 사찰이 있으니, 이것이 속명사(續命寺)이다.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16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다고 하니 당시의 사명은 흥사(興寺) 또는 흥풍사(興楓寺)라고 하여 매우 융성하던 대찰이다. 그 후에 사세가 점차로 퇴폐하게 되어 지금에 이르른 것이다. 속명사(續命寺)에는 이조초(李朝初)의 재상(宰相) 조반(趙胖)과 깊은 인연담이 있다. 곧 태조(太祖)가 고려조(高麗朝)를 멸하고 개국(開國)하려 할 때에, 재상(宰相) 조반(趙胖)으로 하여금 명조(明朝)에 국호를 하사받기 위하여 입명(入明)토록 하였다. 그런데 명조(明朝)는 태조(太祖)가 신하로써 임금을 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하여 그의 목을 자르게 하였다. 하늘을 대신하여 노(怒)한 명제(明帝)가 재차 목을 치나 베이지 않는지라, 이것은 천명(天命)이라고 하면서 국호를 조선(朝鮮)이라고 하여 하사하니, 조반(趙胖)이 귀로에 옥곡(玉谷)[서흥(瑞興)의 고읍(古邑)]에 머물게 되자, 꿈에 산승(山僧) 3인(人)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오운산(五雲山)의 석불(石佛)이다. 이제 명제(明帝)가 너의 목을 베었으나 베이지 않았노라. 이것은 우리들이 너의 목숨을 대신한 것이니라. 이제 우리들은 오운산(五雲山)의 바위 밑에서 밤낮으로 비바람을 맞고, 목이 떨어져 있다. 그러니 우리들의 목을 황토(黃土)로 다시 만들어 붙이고 절을 세워라. 」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조반(趙胖)이 꿈에서 깨어보니 이것은 매우 괴이한 일인지라, 곧 오운산(五雲山)으로 가서 보니, 과연 목이 없는 석불(石佛)이 바위 밑에 있다.
 
급히 절을 세우고 석불(石佛)의 목을 붙여서 이 절에 봉안하였다. 그럼으로 이 절의 이름을 속명사(續命寺)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진위는 따질 것이 아니라, 실로 이런 일이 사실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순수한 인간성을 되찾게 된다. 이 얼마나 거룩한 일이나. 불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나라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바치려고 명(明)나라로 간 사람이나, 또한 그 사람을 위해서 보다,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일은 그것이 바로 불교의 진면목(眞面目)이 아니고 무엇이랴. 또한 이 이야기는 이조(李朝)의 건국(建國)이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절은 그 후에 심히 훼폐되었음으로 갑신년간(甲申年間)에 왕실에서 개수토록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이 절에 대해서
 
김처례(金處禮)의 시라고 하여
 
萬大塵中提寸胸 (만대진중제촌흉)
求名求利竟何窮 (구명구리경하궁)
月明孤客驚殘夢 (월명고객경잔몽)
山外招堤半夜鍾 (산외초제반야종)
 
이러한 시(詩)가 있다. 인간이 벼슬도 좋지만, 덕을 쌓고 복을 닦아야 하나니, 이름과 이로움이 극하였을 때, 꿈에라도 경각심을 일으켜 불보살(佛菩薩)의 자비(慈悲)를 널리 베풀어야 하거늘, 인간이 어리석어서 명리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잠겨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꿈에 부처님께 합장하여,
 
『부처님이시여,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중생(衆生)들이 어리석기 그지없어, 명리(名利)만을 추구하옵니다. 김일성(金日成)의 잠을 깨워주시어, 마음속에 불종(佛種)을 심어 주소서』
 
라고 빌었다. 그때, 머리 없는 부처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내 이제 다시 머리를 떼어 버린 지 오래이다. 차마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는 꼴만 일어나는 이 땅에 맘만 남겨둔 지 오래이다. 그러니 너는 지금부터 도면(道面)의 신전리(新田里)에 있는 성인봉(仙人峰)로 올라가서 저 대동강(大同江)쪽을 바라 보아라. 그러면 무슨 소리가 들리리라. 』 하시는 것이었다.
 
문득 깨어보니 삼매(三昧)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도면(道面) 신전리(新田里)가 어디에 있는가? 행인에게 물어서 선인봉(仙人峰)이라는 데로 올라가니, 정상에 제법 넓직하여 멀리 군봉(群峯)이 눈 아래에 보이는데, 아득히 반짝이는 물이 있다. 저것이 大同江이 아니냐.
 
이곳은 옛날에 신선(神仙)이 내려와서 노닌 곳인지라, 신선(神仙)이 밥을 지었다는 솥 모양을 한 돌이 있는데 또한 신선(神仙)이 사용했다는 우물은 보이지 않는다. 옛날에 이 물에 무엇을 던지면 5년 6개월 만에 대동강(大同江) 물 위에 떠오른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느 것인지 찾을 수가 없다. 꿈속에 보인 부처님의 분부대로 대동강(大同江)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천공(天空)에 울려오는 금언성(金言聲)이 완연하다. 부처님이 대동강변(大同江邊) 큰 나무 밑에 앉아서 방광설법(放光說法)하시는 것이 아닌가.
 
제아무리 무딘 적도(赤徒)들의 귀인들 저 범음(梵音)을 들으면 언젠가는 인간의 본성을 찾으리라.
 
날이 이미 기울었다. 까막까치가 요란스럽게 지저귄다. 저들도 어떤 경각(驚覺)을 얻었는가.
 
여기서 신계(新溪)로 빠져서 시변(市邊)으로 나가면 토산(兔山)을 지나서 연천(漣川)으로 갈 수 있다. 귀로에 오르니, 신계군(新溪郡) 마서면(麻西面)에 있는 월은사(月隱寺)가 머리를 스친다.
 
월은사(月隱寺)는 무고리(武庫里) 사모막하(沙暮幕河)에 있는 화개산록(華蓋山麓)에 있다. 고려(高麗) 때에는 매우 은성(殷盛)하던 절인데, 지금은 작은 사우(寺宇)에 석불(石佛)이 5, 6기(基) 뫼셔 있을 뿐이며, 아무런 유물(遺物)도 없다.
 
신계(新溪)에는 신수굴(神水窟)이라는 굴(窟)이 있으니, 그곳에 가서 땀을 씻어 볼까 생각한다. 神水窟은 적여면(赤餘面) 대평읍(大坪邑)에서 서남(西南)쪽으르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중암리(中岩里)에 있다. 굴속으로 들어가니, 입구가 높이 3미터는 폭이 5미터는 될듯하여, 맑은 물이 흐른다. 우선 땀을 씻고 잠시 쉬었다가 굴(窟)안을 살피니 기암괴석(奇岩怪石)이 둘려있고, 변화가 무쌍하여 지하의 금강(金剛)인 듯 하다.
 
암에서 나와 신계읍(新溪邑)으로 들어가니, 북으로 등 뒤에 기암이 삐쭉 서서 나를 반겨준다. 저것이 강선대(降仙臺)이다. 옛날 저 바위 위에 내려왔다는 선인이 또 다시 나타났는가. 옛날에 내려왔던 선인은 모두 어디로 갔느냐? 언제나 다시 인연이 맞아 이 봉우리 저 뫼 위에 神仙(신선)이 훨훨 춤을 출 때가 오려는지.
 
서쪽에 보이는 저 뫼는 학소봉(鶴巢峰)이다. 지금도 봉우리 위에 한 소나무가 있는데, 저 소나무에 흰 학이 둥우리를 만들어 새끼를 깠다고 하여 학소봉(鶴巢峰)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것은 서조(瑞兆)라고 하여 이 산록(山麓)에 인가가 모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봉상(峯上)에 오르니 읍내가 한눈에 보이고 반짝이는 등불이 어둠을 재촉한다. 비스듬히 누운 늙은 소나무는 저 옛날, 학이 만든 둥우리를 어찌하였는가? 둥우리도 없고 새끼도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 신성(神性)을 떠났으나 이 땅에 이 땅에 선학(仙鶴)이 새끼 칠 수 없지 않은가.
 
금수강산(錦繡江山) 어딜 가나 산수목청(山秀木淸)하야 인심이 맑고 깨끗할 때는 신선(神仙)도 찾아 왔고, 선학(仙鶴)도 날라왔건만 땅에서는 이리가 울부짖고, 하늘에는 독기(毒氣)가 가득하니 어찌 다시 올 수 있으랴.
 
신계(新溪)에서 국도를 따라 귀로에 오르는 발길이 오늘은 왜 이리 무거운가. 천지의 주인은 인간이요, 인간의 길흉은 마음 먹기에 달렸으니, 현재의 불운을 비관할 필요는 없다. 이 땅에 인간이 제정신을 잃지 않고 한결같은 염원을 세워 불보살(佛菩薩)께 기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다시 이 강산에 선학(仙鶴)이 새끼 치고 신선(神仙)이 노닐게 되기를 기원하니, 무겁던 발길이 하늘을 둥실 뜨면서 훨훨 날라 서울로 향하는 것이다.
 
 
- 북한 1978년 07월호(통권 제79호)
【문화】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 16. 황해도 금천 원명사를 찾아서
• 15. 황해도 서흥 귀진사를 찾아서
• 14. 황해도 재령 묘음사를 찾아서
(2024.07.04. 11:47)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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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