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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궁인창의 지식창고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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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 54. 정주 심원사를 찾아서
이제 나는 정주(定州)로 가려고 선천역(宣川驛) 앞에 섰다. 처서(處暑)가 지난 요즈음은 제법 산들바람이 아침저녁으로 일어나 풀숲에서 사는 벌레들에게 가을 소식을 전한다. 아침 일찍 정주(定州)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쪽에서 바닷바람이 불어 스치면 이따금 비린내가 섞인 더운 바람이 차창으로 덮친다.
北韓寺庵紙上巡禮記
54. 定州 深源寺를 찾아서
鄭泰爀 (哲學博士,東國大敎授)
 
 
이제 나는 정주(定州)로 가려고 선천역(宣川驛) 앞에 섰다.
 
처서(處暑)가 지난 요즈음은 제법 산들바람이 아침저녁으로 일어나 풀숲에서 사는 벌레들에게 가을 소식을 전한다.
 
아침 일찍 정주(定州)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쪽에서 바닷바람이 불어 스치면 이따금 비린내가 섞인 더운 바람이 차창으로 덮친다.
 
적유산맥(狄瑜山脈)이 이곳에 와서 맺혀져서 구릉(丘陵)의 산지(山地)가 여기저기에 기복(起伏)하며, 완만히 경사진 땅도 대체로 평탄하고 서해안(西海岸)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 평북정주 심원사 전경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원판번호 NO無58-2. 심원사 전경. 평북 정주군 동주면 봉명동.
 
 
강물은 바다로 쏟겨 남쪽으로 흐르는데 기차가 동쪽으로 달린다. 이제 나는 달래강을 건너느라고 덜컹덜컹 기우뚱거리는 차창에 기대어 깊은 상념 속에 잠겨 있다.
 
먼저 생각나는 것은 이 정주(定州) 땅의 인물들이다.
 
산은 여전히 푸르며 강물은 말없이 흐르는데 지나간 많은 사람들의 그림자만이 내 머리에 떠오르니, 내 어찌 울적하지 아니하랴?
 
앞자리와 옆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지 알 바 없어 이 고장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뛰어다니던 옛 인물들을 생각해 본다.
 
제일 먼저 내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홍경래(洪景來)이다.
 
기차가 달천강(㺚川江) 위로 서서히 지나가기에 물 위를 굽어보니 고기 떼가 이리 몰려고 저리 몰리며 노닐고 있다.
 
멀리 동쪽 언덕에는 달천원(㺚川院)이 더위를 식히며 졸고 있다.
 
원(元)나라 순제(順帝)가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우리나라를 침공해 왔을 때에 고려(高麗)의 공민왕(恭愍王)이 이성계(李成桂)에게 이를 막아 싸우게 하였다. 이때 이성계(李成桂)는 여기에서 그들을 격멸했다고 한다.
 
예겸(倪謙)1)이 읊은 시(詩)에
 
 
“신안(新安) 주막에서 날이 밝아 길 떠나니
“말을 달려 채찍하여 옥가(玉珂)를 떨쳤도다.
“이제 달천(㺚川) 다리 위를 건너가는데
“백척(百尺)의 무지개가 창파(蒼波)에 누웠구나.
 
 
이렇게 읊었듯이 옛 선인(先人)들의 애타는 정념이 맑은 물결에 섞여 끊일 줄을 모른다.
 
이 달천강(㺚川江)은 속칭(俗稱)으로는 달래강이라고 한다. 이 강에는 홍경래난(洪景來亂)과 깊은 인연담이 있다.
 
순조 11년(辛未年, 1811년) 12월의 일이다. 본래 용강(龍岡) 사람인 홍경래(洪景來)는 가산(嘉山) 다복동(多福洞)에서 난(亂)을 일으켰다. 잘 훈련된 부하 장졸이 2,000명이나 되었고, 각지에서 모여든 젊은 사람들이 이곳 정주(定州)로 와서 같이 싸우다가 드디어 항복하고 만 곳이 이곳이요, 또한 달래라는 아릿다운 젊은 여인이 세도가(勢道家)에게 항거하다가 치마를 뒤집어 쓰고 푸른 물에 몸을 던진 곳이 또한 여기이다.
 
애처로운 반항의 역사를 간직한 이 강은 예나 다름 없이 지금도 말없이 흐르고 있다.
 
달래가 몸을 던진 후부터 고을 사람들은 이 강을 달래강(達來江)이라고 불러, 그 고결(高潔)한 뜻을 추앙하여 이 강물에는 몸을 씻거나 빨래를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제는 모두 다 잊혀지고 있지 않은가?
 
기차는 쉬지 않고 동으로 달린다. 정주(定州)의 중앙에 위치한 달천(㺚川)을 지나 정주읍(定州邑)에 닿았다. 나는 기차에서 내려 역 앞에 서 있는 큰 느티나무 밑으로 갔다.
 
잠시 쉬면서 이 고장에서 태어난 많은 인물들을 두루 머리에 떠올린다.
 
일찌기 독립운동을 하다가 비명에 간 분으로 이승훈(李承薰, 1864~1930), 김병조(金秉祚, 1876~1947), 승영제(承永濟, 1896~1928). 승치현(承致賢, 1883~1920)이 고장 사람이었고, 문인(文人)으로는 이광수(李光洙)를 비롯하여 김소월(金素月)도 이 고장에 태어나서 여기서 자란 분이요, 교육자로서 현상윤(玄相允)도 여기서 태어났고, 언론인으로서 서춘(徐椿), 방응모(方應謨) 제씨(諸氏)들도 여기서 태어났다. 이뿐이 아니라 납북된 의사(醫師) 백인제(白麟濟, 1898~?) 씨(氏)도 정주(定州) 출신이다. 이런 많은 인물을 낳은 이 정주(定州)에 내가 온 것은 우연한 인연이 아닌 듯 싶다.
 
정주(定州)에는 사찰(寺刹)도 많이 있었다. 읍부면(邑部面)에 보현사(普賢寺), 봉명사(鳳鳴寺)가 있었고, 만산면(萬山面)에 제석사(帝釋寺)가 있었고, 대전면(大田面)에 극락사(極樂寺)가 있었고, 동천면(東川面)에 심원사(深源寺)가 있고, 곽산면(郭山面)에 자운사(慈雲寺), 옥천면(玉泉面)에 개원사(開元寺)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정주역(定州驛)에서 잠시 쉬고 곽산면(郭山面)으로 간다. 서쪽 해안(海岸)을 멀리 두고 넓게 펼쳐져 있는 곽산면(郭山面)에는 자운사(慈雲寺)가 있다. 정주읍(定州邑)에서 서쪽으로 15리(里)쯤 가니 당어령(堂於嶺)2)이라는 재가 나온다. 이 령(嶺)을 넘어가면 곽산(郭山) 땅이다.
 
숨가쁜 고갯길을 허위덕거리며 오르니 큰 바위들이 범처럼 엎드려 길이 험한데, 앞에는 누누히 싸인 뫼뿌리들이 끝없이 이어져 굽어 엎드렸는데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씻어준다.
 
예겸(倪謙)의 시(詩)에서도 바로 지금의 모습이 보인다.
 
 
“당어령(堂於嶺)에 굳이 올라오니
“작은 돌 큰 바위가 너무도 험하구나,
“말달려 마추에 올라 눈앞을 바라보면
“천겹 만겹으로 이어진 산(山)이 있다.
“내 갈길 아득하여 바다로 이어지니
“잠간 평야를 가더니 또 언덕에 오른다.
 
 
당어령(堂於嶺)에 올라 서쪽으로 옥천면(玉泉面)이 눈앞에 있다. 저 옥천면(玉泉面)에 개원사(開元寺)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령(嶺)을 넘어 곽산(郭山)으로 들어간다. 이 곽산(郭山)은 3·1운동 당시에는 독립된 군(郡)이었는데, 그 뒤에 정주군(定州郡)으로 편입된 곳이다. 원래는 고려(高麗)의 장리현(長利縣)이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보면 북쪽으로 23리(里)쯤 가면 개원사(開元寺)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 개원사(開元寺)가 바로 지금의 옥천면(玉泉面)에 있는 절이다. 곽산령(郭山嶺)이 또 눈앞에 버티고 있기에 고개를 올라 시원한 바닷바람을 흠뻑 마시고 아래로 내려가면 옛 운흥(雲興) 땅이 나온다. 이곳은 이제는 안흥면(安興面)으로 되었다. 두루 사면(四面)을 살펴보니 지세(地勢)가 온후하여 높고 낮은 비탈길에 층층이 밭인데 뭍벼를 심었다.
 
자운사(慈雲寺)를 찾아서 촌부(村婦)에게 물으니 숲이 우거진 산경(山徑)을 올라가라고 한다. 이 산은 장경산(長境山)이라고 하는 산으로 옛날에는 장경사(長境寺)라고 하였다.
 
노변(路邊) 왼쪽에 3척(尺)은 됨직한 넓고 큰 돌이 하나 서 있다.
 
자세히 보니 석표(石表)가 아닌가? 이것이 유명한 효녀의 비석이다. 여기에 새겨진 비문(碑文)은 당나라의 이우(李祤)가 지었다고 하는데 비문(碑文)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이제 풍우(風雨)에 마멸될 지경에 이른 비문(碑文)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 효녀(孝女)는 착하고 아름답도다.
“유순(柔順)하고 준수(俊秀)함이 완전함을 이루도다.
“학문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천 가지 가르침을 알았으니
“효경(孝經)이 마음에서 나와 몸을 끊었네.
“자식의 몸은 어미에게 있게 되는데
“어미가 병(病)을 앓아 고치지 못하면
“어미 죽고 자식 살아 어찌 의지할고.
“자식 죽고 어미 살면 자식 또 있으리라.
“칼날이 손에 있어 그 끝이 날카롭다.
“다만 어미만 있고 내 몸 없도다.
“한번 휘두르매 손가락 떨어지니
“어지러이 피 떨어져 옷이 붉었네
“한 그릇의 국물을 비로소 드시니
“어미 마음 기쁘고 곧 따라 일어났네.
“오오! 천도(天道)는 멀지 않고 가까이 있도다.
“밝음이 여기 있으니 어찌 너와 내가 있으랴?
“임금이 돌을 세워 마을문에 정표(旌表)하여
“교화(敎化)가 떨쳐서 두루 순후(純厚)하도다.
“길 곁에 한번 보면 심신(心身)이 즐거워
“여기에 직필(直筆)함은 사문(斯文)을 위함일세.
“효녀(孝女)여! 참으로 귀(貴)하다 하겠노라.
 
 
이 비석(碑石)은 「효녀사월지문(孝女四月之門)」이라고 하는 것이다. 김말건(金末巾)이라는 이에게 딸이 있어, 이름이 사월(四月)이요, 나이 19세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순직하여 효성으로 부모를 받들었다. 어느 날 아침에 어머니가 광질(狂疾)을 일으켜 숨이 여러 번 막혀 어쩔 줄 모르니, 의사가 말하기를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 병이 낫는다고 하자, 딸이 이 말을 듣고 차라리 자기 몸을 베어 드리겠다고 칼로 손가락을 끊어 피를 태운 재로 탕약(湯藥)을 만들어 드리니 한번 마시매 눈 녹듯이 나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지극한 효성이 신명(神明)에게 통한 것이다.
 
이런 거룩한 효녀(孝女)가 이 고장에 있었으니, 그의 풍성(風聲)이 이젠들 없을소냐?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지나가는 아낙네들의 표정이 모두 순후(純厚)하다.
 
자운사(慈雲寺)로 오르는 길에 북쪽을 바라보니 구름은 하늘에 막막하고 바다 멀리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저 구름도 이곳에 오면 그냥 지나가지 못하리라! 한 줄기 비라도 뿌려 이 석표(石表)를 깨끗이 씻어주겠지!
 
자운사(慈雲寺)에 이르렀다. 거의 쓰러져가는 작은 사암(寺庵)인데 불상(佛像)은 없으나 암벽(岩璧)에 새겨진 관음상(觀音像)이 미소(微笑)를 짓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하여 문을 두드리니 한 노파가 있어 빙그레 웃으며 맞아 준다. 이 노파가 바로 김사월(金四月)의 화신이 아니랴? 아니면 그의 어머니의 화신이 아니랴? 나는 합장(合掌)하여 예배하고 이곳에 온 인연(因緣)을 말했다. 어서 들어오라고 친절히 맞아준다. 그리고는 이 절의 내력을 이야기한다.
 
곽산(郭山) 고을 효녀(孝女)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곽산(郭山) 고을의 효녀(孝女)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 노파로부터 듣는 이야기는 이제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이 실감이 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절에 예전에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의 경판(經版)이 있었는데 현금(現今)은 없어졌다고 하며 자못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동안에 시간이 쉬지 않고 흘렀다.
 
나는 석별(惜別)의 정을 간직하면서 하산(下山)하여 옥천면(玉泉面)으로 향하여 북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여기에 개원사(開元寺)가 있다.
 
옥천면(玉泉面)으로 들어서자 마자 개원사(開元寺)를 알아보려고 한 촌가(村家)에 둘러 개원사(開元寺)를 아느냐고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다. 지도(地圖)에도 나오지 않으니, 내 어찌 찾아갈 수 있으랴. 그러나 독장산(獨將山, 545m)을 목표 삼고 가면 거기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독장산(獨將山)으로 향한다. 질펀히 펼쳐진 구릉(丘陵)을 몇 번이고 오르고 내려 독장산(獨將山)에 이르렀다. 숲에 덮인 산길을 올라가다가 산에서 내려오는 촌부(村婦)를 만났다. 그는 약초를 캐러 올라왔던 사람인데 무엇을 캤느냐고 물으니, 말없이 바구니를 보여만 준다. 그에게 개원사(開元寺)가 어디냐고 묻자, 그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지령산(地靈山)으로 가라고 하면서 옥천면(玉泉面) 상서동(上端洞)을 찾으라고 하면서
 
『아마 그 절이 없어졌으리다.』
 
하고 머리를 갸웃둥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동주면(東州面)의 심원사(深源寺)로 직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동주면(東州面)에 있는 심원산(深源山) 쪽으로 간다. 이 심원산(深源山)을 봉명산(鳳鳴山)이라고도 한다. 높이가 560미터쯤 되니, 그리 높은 산은 아니다.
 
석굴암(石窟庵)이라고 하는 암자(庵子)도 이 산에 있으리라고 기대하면서 그리로 향한다.
 
옛날에 봉(鳳)새가 울었다고 하여 봉명산(鳳鳴山)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제는 봉(鳳)이 울지 않으려나. 하기야 봉(鳳)은 길조(吉鳥)이니 세월이 좋아질 서조(瑞兆)가 보여야만 울 터이니, 그 새가 울 날은 언제인가?
 
봉명산(鳳鳴山)에 이르러 심원사(深源寺)로 들어갔다. 대웅전(大雄殿)이 중앙에 위치하여 멀리 천동현(泉洞峴)을 바라보고 있다. 준수한 솜씨로 세워진 이 대웅전(大雄殿)은 인근 사암(寺庵)에서는 볼 수 없이 정교하게 꾸며져 있어 지정문화재(指定文化財)로 등록된 절이 있었다. 추녀 끝에서 울려 오는 풍경소리가 그윽한데 몸을 스치는 바람도 향기롭다. 문을 열고 전내(殿內)로 들어갔다, 불교예술(佛敎藝術)을 한 자리에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하고 뛰어나게 지어진 전당(殿堂)은 과연 문화재(文化財)로 지정될 만한 뿐만 아니라, 그 장엄하던 옛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어 찾는 이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하고도 남음이 있어 보인다.
 
현금(現今)에 불상(佛像)은 없으나 좌대(座臺)만은 그대로 으젓이 앉아서 당래불(當來佛)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불상(佛像) 없는 법당(法堂)에 앉아 명상(溟想)에 잠긴다.
 
「뎅그렁」 울리는 풍경소리에 다시 자아(自我)로 돌아온 나는 벌떡 일어난다. 너무도 적막한 곳에서 듣는 풍경소리는 고요함을 깨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고요함을 더하니, 언제까지나 나도 이렇게 입정(入定)한 채 스러질 것만 갈구나. 아니다, 갈 길이 머니 어서 일어나야 한다. 저 대전면(大田面)에 있는 극락암(極樂庵)에 들러서 갈산면(葛山面)에 있는 제석사(帝釋寺)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심원사(深源寺)를 뒤로 하고 동쪽으로 향해서 대전면(大田面)쪽으로 가다가 생각하니, 갈산면(葛山面)의 제석사(帝釋寺)를 먼저 찾아야 하겠다. 왜냐하면 제석천(帝釋天)을 제도(濟度)해서 극락(極樂)에 안주케 해야겠기에 갈산면(葛山面)에 먼저 가야하겠다.
 
갈산면(葛山面) 칠악산(七岳山, 365m)을 옆에 두고 서해(西海)에 임해 있다. 칠악산(七岳山) 옆에 목우산(牧牛山)이 솟아 있어 준수한 산용(山容)과 넓은 평원은 가히 인걸(人傑)이 많이 날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남강(南崗) 이승훈(李昇薰)이 살았고, 오산학교(五山學校)3)가 여기에 있었으니 그리로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정주(定州)서 기차를 탔다.
 
경의선(京義線) 고읍역(古邑驛)에서 하차하여 2킬로미터쯤 가니 넓은 평야에 누렇게 익기 시작한 벼가 넘실넘실 춤을 춘다. 옛날 오산학교(五山學校)가 있던 익성리(益城里)로 가려 한다.
 
이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던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선생(先生)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당시 있던 용동교회(龍洞敎會)와 오산학교(五山學校)는 일제(日帝) 때 불탔으나 지금은 어찌 되었는가 하고 궁금한 나머지 제석사(帝釋寺)로 가지 않고 익성리(益城里)로 갔다. 당시의 면모(面貌)는 찾을 수 없으며 옛날 같은 학원도시(學園都市)가 이제는 쓸쓸한 마을로 변해 버렸다.
 
고당(古堂)이 왕래하던 길을 걸어 보고 싶어 그 길을 찾아보았으나 도무지 찾을 수 없다. 홀홀히 익성리(益城里)를 떠날 수 밖에 없어 제석사(帝釋寺)로 가자 하고 납청정(納淸亭)4)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가마천(加麻川)의 맑은 물이 흐르고 앞에 효성산(曉星山)이 반긴다. 제석사(帝釋寺)는 효성산(曉星山)에 있으리라 생각하니 옮기는 발길도 가볍다. 제석사(帝釋寺)로 가는 길에 납청정(納淸亭)에 오른다. 신사년(辛巳年)에 중국(中國) 사신(使臣) 당고(唐皐)5)가 이름 지었다는 정자(亭子)이다.
 
누가 한가로운 정자(亭子)를 여기에 지었는가? 밤에 이곳에 올라 칡덩굴에 걸린 달을 보고 읊었다는 당고(唐皐)의 시(詩)가 생각난다.
 
 
“가마천(加痲川)은 효성산(曉星山)에 닿았는데
“누가 한가로운 정자(亭子)를 여기 지었는가?
“칡덩굴에 걸린 달이 물결에 비추니
“밤에 짝이 있고 소나무에 바람분다.
“바람이 고개를 넘는데 관원(關員)은 없고
“떠있는 처마에 푸른 안개 머무른다.
“동자(童子) 불러 차 다리며 푸른 여울 굽어보면
“아득한 경치가 맑은 뜻이 족하니
“새로운 현판 좋게 달아 정자(亭子) 모양 새로 났네?
 
 
가마천(加麻川) 맑은 물이 질펀히 흘러 잔잔히 빛나고 효성산(暁星山) 봉우리는 뾰죽하게 솟았으나, 그 용자(容姿)는 맑고 깨끗하고 조촐하다. 그야말로 이 정자(亭子)는 이런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제석사(帝釋寺)로 총총히 올라가서 뜰에 섰다. 폐사(廢化)된 초라한 사우(寺宇)는 절이라고 할 수 없으니, 제석(帝釋)님이 어디로 가셨는가? 불보살(佛菩薩)을 외호(外護)하는 제석(帝釋)님이기에 극락세계(極樂世界)로 가셨는가? 칠악산(七岳山) 위에 있는 용지(龍池)로 목욕(沐浴)하러 가셨는가?
 
나도 칠악산(七岳山)에 올라 용지(龍池)에 목욕하고 극락사(極樂寺)에 머물렀다.
 
 
- 북한 1981년 10월호(통권 제118호)
 

 
1) 예겸(倪謙) : 명나라 학자 예겸(1415~1479)은 세종 32년(1450) 사신 반등극조사(頒登極詔使)로 조선에 왔을 때 공조판서 정인지의 원접을 받았다. 한명회의 부탁으로 정자의 이름을 압구정(狎鷗亭)이라 지었다.
2) 당어령(堂於嶺) : 능한산성이 당어령에 있었다, 능한산성은 412m의 능한산에 있는 산성으로 993년 거란 침공 후 축성하였다,
3) 오산학교(五山學校) : 민족운동의 인재와 국민 교육의 사표(師表)를 양성할 목적으로 신민회의 노선에 따라 1907년 12월 정주에 개교하였다.
4) 납청정(納淸亭) : 납청정은 평북 가산군의 정자로 가산은 박천군의 옛 지명이다. 중종 때 문신 엄흔(嚴昕, 1508~1543)의 시 문집 『十省堂集』에 소 찬성의 시에 차운한 시 「납청정의 옛 감회 소 찬성의 시에 차운하다.(納淸亭感舊 次蘇贊成韻)」가 있다.
5) 당고(唐皐) : 당고는 명(明)나라 흡현(歙縣) 사람으로, 자는 수지(守之)이고, 호는 심암(心庵), 신암(新庵), 별호는 자양산인裝陽山人)이다. 나이 50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문화】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 55. 박천 천황사를 찾아서
• 54. 정주 심원사를 찾아서
• 53. 구성 굴암사를 찾아서
(2024.09.02. 11:48)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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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