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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韓寺庵紙上巡禮記 55. 博川 天皇寺를 찾아서 鄭泰爀 (哲學博士,東國大敎授)
평안남도(平安南道)를 두루 돌아 마지막 길에 박천(博川) 땅을 찾게 되었다.
초가을 하늘이 높게 트여 인심도 쾌락하니 정주(定州)에서 기차를 타고 박천(博川)으로 가려 한다.
▶ 박천군(博郡) 지도 (사진 출처: 나무위키)
차창(車窓)에 빗대 앉아 박천군내(博川郡內)에 있던 옛 사암(寺庵)을 헤아리니 화악산(華岳山)에 금계사(金鷄寺), 봉린산(鳳鱗山, 217m) 극락사(極樂寺), 서공사(西孔寺)가 있었고, 송림산(松林山)에 송림암(松林庵), 효성령(曉星嶺)에 남산사(南山寺)가 있었으며 대장산(大藏山)에 대장사(大藏寺)와 성전암(聖殿庵), 오은농산(吾恩弄山)에 백운암(白雲岩), 보혈사(普穴寺), 와룡산(臥龍山)에 영천사(靈泉寺), 청룡산(靑龍山, 323m)에 청룡사(青龍寺)가 있었으며, 효성산(暁星山)에 관음사(觀音寺), 은선암(隱仙庵)이 있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런데 8·15 해방을 전후해서 이들이 모두 폐사(廢寺)되어 지금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은 그의 봉린산(鳳鱗山)의 심원사(深源寺)1), 서공암(西孔庵)과 봉두산(鳳頭山, 394m)의 천황사(天皇寺)뿐이다. 그러나 이들 몇몇 사암(寺庵)도 오늘날 어찌 되었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기차는 박천역(博川驛)에 닿았다. 싱그러운 가을바람을 듬뿍 들이마시며 역전에 섰다. 두리번거리며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갈 길을 잡아 본다.
서북(西北)쪽으로 대령(大寧)과 맑은 물을 끼고 서 있는 태봉산(台峰山) 높은 뫼가 가을 안개 속에 묻혀 있는데, 기암괴석(奇岩怪石)으로 이루어진 절벽 위에 자리잡은 정자(亭子)가 보인다. 저것이 영파정(暎波亭)이다. 눈을 돌려 대령강(大寧江)2) 강 건너 백사장(白沙場) 저편을 보면, 푸른 초원(草原)이 질펀히 뻗어 있고 원수봉(元帥峰), 연비대(燕飛臺)의 황홀한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있다. 심원사(深源寺)와 서공암(西孔庵)은 동면(東面)에 있는 봉린산(鳳鱗山)이 자리잡고 있으니 먼저 동면(東面)으로 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천황사(天皇寺)가 있는 갈산면(葛山面)으로 갈 것인가? 한참 망서리다가 가산면(嘉山面)으로 가 봉두산(鳳頭山)을 찾기로 한다.
박천읍(博川邑)에서 가산(嘉山)으로 가려면 서쪽으로 가야 한다. 가는 도중이니 영파정(暎波亭)애 오르자.
태봉산(台峰山) 기슭에 있는 영파정(暎波亭)은 대령강(大寧江) 맑은 물에 그림자를 드리워 출렁대는 물결 따라 육각(六角)으로도 보이고 팔각(八角)으로도 보인다.
기암괴석(奇岩怪石)으로 이루어진 절벽으로 올라간다. 팔각(八角)의 단아(端雅)한 정자(亭子)이다. 그 옛날 기순(祁順)이 이곳에 와서 지은 시(詩)가 생각난다.
「지척(指尺)의 맑은 강(江)물 두 길을 갈라 놓아 강가의 정자(亭子)는 흰 구름 속에 솟았네! 그림자가 어지러이 거울 속에 들어오고 호탕한 봄물은 옥호(玉壺)이 담기누나!」
기순(祁順)은 아마도 봄에 이곳으로 왔던가보다. 그런데 가을에 이곳으로 온 나는 또 다른 시상(詩想)이 없을 수 있으랴? 나도 한 줄 시(詩)를 써서 물 위에 던진다.
대령강(大寧江) 맑은 물에 그림자 드리워져 영파정(暎波亭) 팔각(八角)모가 몇 각(角)으로 보이느냐? 정자(亭子) 밖에 소나무는 하늘가로 이어지고 원수봉(元帥峰) 높은 뫼로 제비가 날라가니 연비대(燕飛臺) 푸른 모습 누구의 기상인가? 강감찬(姜邯贊) 높은 뜻이 뫼뿌리에 맺혀있고 홍경래(洪景來) 붉은 마음 붉다 못해 푸르렀네.
정자(亭子)를 뒤로 넓은 풀밭을 헤치고 원수봉(元帥峰)에 오른다. 이 원수봉(元帥峰)은 고려(高麗) 때에 강감찬(姜邯贊) 장군이 거란군(契丹軍)을 맞아서 싸우면서 이곳에 주둔했었기 때문에 원수봉(元帥峰)이라고 이름했다고 한다. 봉두(峰頭)에 서서 아래를 굽어본다. 청룡면(靑龍面) 대화동(大化洞)이 눈앞에 보인다, 저기에 청룡사(靑龍寺)가 있었다. 청룡사(靑龍寺)는 홍경래(洪景來)와 우군칙(禹君則)과의 결록지(結綠地)로도 이름난 곳이다. 그 옆의 인덕동(仁德洞)은 홍경래군(洪景來軍)이 오랫동안 진(陣)을 치고 있던 곳으로 이름난 곳이다.
가산면(嘉山面)에 발을 들여놓으니, 흙이 유난히 검다. 아마도 흑연(黑鉛)이 많이 나는 곳이기에 그런가 보다. 이 가산(嘉山)에서는 흑연(黑鉛)만이 아니라 금운모(金雲母)가 나기로도 유명(有名)하다. 매장량(埋藏量)이 세계적(世界的)이라고 한다.
그리 높지 않은 봉두산(鳳頭山) 기슭으로 발길을 옮긴다. 마치 봉(鳳)의 머리와 같이 생긴 봉우리가 나를 듯이 솟아 있는데 백구(白鷗)가 외로이 나르고 있다.
「백구(白鷗)야, 너도 어찌 나와 같이 홀로 나느냐? 길동무가 없느냐? 하기야 나는 새야 얼마든지 있건마는 너의 벗이 없구나.」
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나도 이 북한(北韓) 땅을 오래도록 두루 다니면서도 너와 같이 외롭게 홀로 다니고 있다.
의로운 사람이 있으면 벗이 되련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 찾기가 어렵구나! 이 지방에 이런 민요(民謠)가 있다.
어화 벗님네여 이내 말쌈 들어보소 혼자 있기 적적하여 문밖에 잠간 나가 사면을 살펴보니 상종할 이 누구던고
다시금 살펴봐도 상종할 이 전혀 없네 세월 광풍 좋은 때에 삼척단금(三尺矩琴) 옆에 끼고 벌목시를 외우면서 어딘 벗을 찾아가니
은근히 하는 말이 심덕(心德)으로 사귄 벗은 절절시시 일을 삼아 모딘 행실 경계하며 선한 일로 인도하네
옳은 도리 점점 알고 어딘 이름 돌아오니 세상에 좋은 벗은 의벗밖에 다시없네
옛날에는 이 땅에 그래도 의벗은 있었기에 삼척단금(三尺矩琴) 둘러메고 세월을 즐기기라도 했었는데, 이제는 사람이 사람을 기피하게 되었으니 저 하늘을 나는 백구(白鷗)나 벗 삼을까?
어느덧 천황사(天皇寺)에 이르렀다. 송림(松林)이 우거진 기슭에 자리잡은 작은 절이다. 매우 오래된 듯한데 황량하여 스님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부터 이렇게 주인없는 절로 버려져 있었던가? 기순(祁順)의 시(詩)에
「삼월(三月) 강가에는 벌써 얼음이 녹아내려 한 조각 작은 배에 그대 함께 오르노라. 빈 산 고요하여 새소리 들리는데 옛 절은 황량하여 중도 아니 보이네.」
이렇게 읊었으니, 어찌 된 비운(悲運)이냐? 그래도 8·15해방 전에는 이 절에 스님도 있어, 지방 사람들의 귀의처(歸依處)가 되었건만 또다시 황폐하여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것인가?
봉린산(鳳鱗山)으로 심원사(深源寺)와 서공암(西孔庵)을 찾자.
심원사(深源寺)는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에 세워진 고찰(古刹)이다. 그동안 몇 번이고 개축(改築)되었으면서도 옛모습을 되찾으려고 애썼는지 전당(殿堂)의 배치며 건조양식(建造樣式)이 근세의 것이라고는 하기 어려울만치 어딘가 고풍(古風)이 보인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아무런 손질을 가하지 않고 내버려 둔 탓으로 단청(丹靑)은 물론이고 사우(寺宇)가 폐허(廢墟)되니, 그 옛날 창건(創建)한 이들의 마음과 내버려 두는 마음 사이에 얼마나 큰 거리가 있느냐? 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물결 같은 마음이면서 저 마음은 일체(一切)를 창조하는데 이 마음은 일체(一切)를 파괴(破壞)하니 어찌 이 마음을 다스리지 않을 수 있으랴?
서공암(西孔庵)은 어디에 있느냐? 심원사(深源寺)에서 서쪽으로 뚫린 좁은 석경(石徑)을 기어올라 산정(山頂) 가까이 까지 올라가면, 암벽(岩壁)이 용립(聳立)한 그 밑에 서공암(西孔庵)이 있다. 이 암자(庵子)는 바위를 지붕으로 한 동굴(洞窟)이다. 천연동굴(天然洞窟)이면서도 교묘하게 생겼으니, 원당(遠唐) 스님이 이곳을 알았더라면 여기서 8년 면벽(面壁)을 사양치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나는 넙적한 돌을 하나 집어다가 방 한가운데 놓고 결가부좌(結跏附坐)하고 앉았다. 눈 앞에 펼쳐진 서해(西海)가 한 눈에 들어온다. 넘실대는 물결을 타고 해수관음(海水觀音)이 미소지으며 나를 맞으며 다가오는 듯, 한가히 날으는 백구(白鷗)가 관음(觀音)의 앞뒤로 소요(逍遙)한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삼세(三世)를 초월(超越)하여 시공(時空)이 또한 일념중(一念中)에 사라지니, 최멸(蕞滅)의 즐거움에 취할까 두렵다. 한 생각 문득 일으켜 산하(山河)를 두루 살핀다. 와룡산(臥龍山)은 어디에 있는가? 봉린산(鳳鱗山)에 와서 봉(鳳)을 못보니 와룡산(臥龍山)으로 들어가서 와룡(臥龍)이나 되어, 때를 기다릴 것인가.
아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차라리 홍경래(洪景來)가 혁명의 깃발을 든 다복동(多福洞)으로 가자.
다복동(多福洞)은 가산(嘉山)과 박천(博川) 사이에 있는 요지다.
의주(義州)로 통하는 큰 길로 나가서 그 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다복동(多福洞)이 있으리라. 홍경래(洪景來)의 넋이 잡힌 나의 발길은 한결 가볍다.
대령강(大寧江) 물을 건너 원시림(原始林) 같이 우거진 숲으로 된 산봉(山峰)을 몇 번이나 넘고 넘어 비경(秘境) 다복동(多福洞)에 이르렀다.
홍경래(洪景來)가 전국을 순례(巡禮)하면서 요지란 요지를 두루 다 보았으나 이곳 만한 곳이 없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과연 이 다복동(多福洞)만큼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춘 곳이 없을 듯하다. 더구나 홍경래(洪景來)의 거사(擧事)3)는 어디까지나 평안도(平安道)를 근거지로 해야 했으니 평안도(平安道)에서도 이곳은 박천(博川), 춘천(春川), 곽산(郭山), 정주(定州), 선천(宣川), 철산(鐵山), 영변(寧邊), 안주(安州)의 혁명세력을 일시에 손안에 넣을 수가 있는 곳으로 알던 것이다. 또한 이것이 성공하면 북(北)은 의주(義州)에서 남(南)은 서울에서 동시에 진공할 수 있는 곳이다.
이뿐만이 아니였다. 이곳은 사방이 울창하여 나무가 우거진 산이 둘러있어 밖에서는 쉽게 이 속을 염탐할 수 없는 비경(秘境)이다. 검푸른 바위와 억센 가시덤불, 돌 하나 풀 하나가 모두 당시의 넋이 이어진 듯,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서 들려 오는 새소리, 물소리는 군졸들의 고함 소리가 아닌가?
한 넙적한 바위 위에 올라갔다. 20여 명은 앉아 있을 만한 바위이다. 이 바위가 홍경래(洪景來)를 돕느라고 달려온 여인들이 군복과 기폭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던 곳이 아닌가? 저 언덕은 참모들이 모여서 작전(作戰)계획을 짜던 장소가 아닌가?
첩첩산중(疊疊山中)에 신미년(辛未年)의 가을이 저물기 시작하니 모든 준비가 끝나게 되어 거사(擧事)의 시기가 눈앞에 닥쳤을 때 홍경래(洪景來)는 거두(巨頭)들을 이끌고 어디로 갔던가? 그곳이 바로 대령강(大寧江) 물 가운데 있는 한 섬이 아니였던가? 그렇다! 나는 그 섬으로 가야겠다. 다시 발길을 돌려 대령강(大寧江) 물줄기를 타고 올라간다. 이제 나는 신도(薪島)로 가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피로 맹세했던 것이었다.
울창한 송림(松林) 넘어로 맑게 흐르는 대령강(大寧江)을 바라보니, 그 가운데에 큰 섬이 있다. 이것이 신도(薪島)이다.
나는 강가에 매여져 있는 나룻배를 타고 신도(薪島)로 갔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아늑한 섬이다.
숲이 우거진 길을 헤치고 탁 트인 능선(陵線) 위에 올랐다. 멀리서 들리는 침도(沈濤)소리가 그 옛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외로이 떠도는 백구(白鷗)가 이리저리 배회하니, 피에 맺힌 굳은 넋이 무엇으론들 환생(還生)하지 않을 소냐?, 문득 옆을 보니 큰 바위가 하나 있다.
홍경래(洪景來)를 중심으로 좌우(左右)에 쭉 둘러앉았던 동지(同志)들이 하늘에 제사드리던 제단(祭壇)이 아니랴? 그렇다. 그때의 그 제단(祭壇)이다.
『이제 우리는 구국(救國)의 대사를 의논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 큰 일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천지신명(天地神明)의 특별한 가호(加護)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일동은 우선 하늘에 제사하고 중대사를 의논하기로 합시다.』
이렇게 발언한 홍경래(洪景來)의 심중(心中)에는 무엇이고 이루고 말겠다는 굳은 결심이 있었다.
인간의 힘은 한계가 있으므로 인간 이상의 천지신명(天地神明)에 비는 마음에서 그의 원대한 포부와 초인간적인 힘을 찾을 수 있지 않으랴!
그들이 엎드려 빌던 이 제단(祭壇) 앞에 서 있는 나는 한줄기 붉은 피를 발견했다.
『아, 이것이 무슨 피냐?』
하고 깜짝 놀라 다시 보니, 그것은 붉은 피와 같이 생긴 바위가 깔려 있는 것이 아니랴? 그렇다. 그들이 하늘에 명세하며 제사 드릴 때에 이 바위에 엎드려 차례로 피를 마셨던 것이다. 서로 배반하지 않기를 굳게 맹세하며. …… 그의 붉은 충정(衷情)이 바위인들 꾀뚫어 스미지 못하랴? 이렇게 붉고 이렇게 뜨거운 구국(救國)의 넋이 여기에 영구히 살아있는 것이다.
홍경래(洪景來)가 이 바위에 올라서서 크게 외치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서북(西北) 지방은 기자(箕子), 단군(檀君) 때부터 천하 내 이름을 떨치던 구성(舊城)으로, 옛부터 의관문물이 빛났었고, 임진(壬辰), 병자(丙子)의 두 국난(國亂)에 있어서도 그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조정에서는 우리 관서(關西) 사람을 평한(平漢)이라 잡시(眨視)하여 400년 동안 버려두었다. 더욱 지금에 이르러서는 김조순(金祖淳), 박종경(朴宗慶)의 무리들이 국권을 능간하여 정치는 어지럽고 인민은 도탄에 빠져서 헤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선천군(宣川郡) 검산(劍山) 일월봉(日月峰) 밑 군왕포(君王浦) 위에 있는 홍의도(紅衣島)에서 이인(異人)이 나타났으니, 이분은 일찍 중국(中國)에 들어가 도술(道術)을 배워가지고 조선(朝鮮)에 나왔는데, 지금 철기(鐵騎) 10만을 일으켜 드디어 동국(東國)의 악폐(惡廢)를 말끔히 씻을 뜻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서북(西北) 땅은 고향(故鄕)이라 차마 병마(兵馬)로 함부로 짓밟게 할 수가 없어서 아북(亞北)의 영웅호걸을 시켜서 만백성을 구하고자 하니, 이 의군(義軍)의 깃발이 이르는 곳마다 모두 이 명령을 들어 순종하라.』
이런 소리가 분명히 내 귀에 들리는가 하더니, 천하를 뒤엎는 함성소리가 난다.
아! 저 때의 그 모습, 그 격문(檄文)이 이제 다시 일어나니 이 어쩐 일이랴!
대령강(大寧江) 물줄기4)는 무심(無心)히 흘러 서해(西海)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가산(嘉山)땅에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었다. 지평선상(地平線上)에 뭉게뭉게 떠 있는 구름은 청색 복장에 붉은 천을 가슴에 붙이고 호피관(虎皮冠)을 쓰고 홍건(紅巾)을 질끈 동여맨 군졸들과 같구나!
나도 어느덧 주먹을 불끈 쥐고 큰소리를 호통하더니, 가지고 간 소주병을 단숨에 비우고는 바위 위에 우뚝 섰다. 백구 한 마리가 내 앞으로 오는 듯하더니 서쪽으로 날아간다.
나에게 어디로 가라는 말인가? 차라리 물고기를 불러서 이 강(江)에 다리를 놓았다오!
주몽(朱蒙), 부여(扶餘)로부터 남쪽으로 도망해서 여기에 왔을 때, 물고기들이 다리를 만들어서 건너게 하지 않았더냐?5)
그렇지 않으면 네가 나를 업고 훨훨 날라서 서울로 데려다 주려무나?
- 북한 1981년 11월호(통권 제119호)
1) 심원사(深源寺) : 심원사의 창건은 현욱국사(786~868)가 하였고, 1718년 심원사 보광전를 수리할 때 용마루에서 나온 묵서(墨書)에 1316년에 중건했다는 글이 발견됐다. 2) 대령강(大寧江) : 대령강은 청천강 서북쪽의 한 지류로 168.8km이며, 발원지는 천마산(1,169m)의 북동쪽 비탈면이다. 3) 홍경래(洪景來)의 거사(擧事) : 순조 11년(1811) 12월 관서지방에서 홍경래의 난이 다복동을 근거로 우군칙, 이희저, 김창시 등과 모의하여 일어났다. 4) 조선총독부는 1915년~1928년까지 14개 큰 하천을 조사했다. 당시 조사 인원은 60명으로 조사를 주관 사람은 기사(技士) ‘가지야마 아사지로(梶山淺次郞)’이다. 5) 물고기가 다리를 만들었다는 전설의 대령강은 진강(鎭江), 개사강(蓋泗江), 박주강(博州江)이라고도 불렸다. 천방강, 창성강, 동창강을 비롯한 230개의 지류가 있으며, 5km 이상 하천이 117개나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