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회군로 이성계李成桂 황산대첩黃山大捷 천명天命으로 여겨
이성계의 황산대첩 회군로를 찾아
헬리콥터를 타고 성수산을 내려다보면 참으로 절묘한 산세를 발견하게 된다. 장수 팔공산의 준령이 치달아 우뚝 멈춘 성수산을 중심으로 세 가닥의 힘찬 맥이 뻗어 나아가고 있다. 남동방향으로는 지사면을 거쳐 지리산 천왕봉으로 맥이 통하고 서남쪽으로는 임실의 두만산을 휘어 감다가 강진의 백년산과 덕치면의 회문산으로 뻗어 나아갔다. 그리고 동북쪽으로는 진안 마이산을 거쳐 조라치(鳥羅峙)에 이르는데 이곳은 금강, 만경강, 섬진강 셋의 분수령이다.
그런데 신라의 대선사(大禪師)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전국의 많은 산을 두고 하필이면 왜 이곳 성수산을 찾아 그 주봉아래 암자를 지었을까.? 도선(道詵)이야말로 우리나라 풍수지리계의 태두(泰斗)이자 대가(大家)였다는 사실은 그냥 넘길 일은 아닌 것 같다. 이런 풍수지리상의 길지(吉地)는 항시 큰 뜻을 품은 영웅호걸들은 관심을 두게 마련이었다.
일찍 고려태조 왕건이 이곳 환희담(歡喜潭)에서 기도를 드린 뒤 고려 창업을 이루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역시 젊은 시절 이곳에서 무학 대사를 만나 상서로운 꿈에 대하여 시원스레 해몽을 듣고 그의 인도로 500일 기도를 드린 뒤 왕건이 목욕을 하였다는 환희담에서 목욕재개하고 홀연히 이상한 길조를 얻어 공중에서 성수만세를 세 번이나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따라서 태조 이성계는 삼청동(三淸洞)이라는 글씨를 작은 바위에 각자(刻字)를 하였다. 삼청(三淸)이란 공기도 맑고, 물도 맑고, 정신(氣)도 맑다고 하여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이런 사실들이 이성계의 머릿속에는 항상 떠나지 않고 맴돌았으나 고려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남원 운봉의 황산벌에서 왜군(倭軍)인“아지발도”군(軍)을 물리치고 의기양양해진 이성계는 휘하 장병들을 거느리고 개선하는 길에 설레는 마음으로 무학 대사를 그리며 조선개국의 꿈 성수만세를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팔공산 도선암(현 성수산 상이암)을 찾았다.
호남은 조선개국의 발판이었다.
북으로는 강을 경계로 대륙과 연결 지어져 있고 남으로는 해협을 끼고 일본열도와 인접해 있는 우리 한반도는 그 지리적 조건으로 볼 때에 항상 “사대교린”을 표방하며 그 틈바구니 속에서 민족자존을 세우며 끊임없이 성장해 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대륙의 절반을 휩쓸며 호기 당당하게 살아온 고구려의 옛 전통을 이어받아 국호까지도 “고려”라고 불렀던 그 시대에 있어서의 우리 민족의 형편은 어떠하였던가.? 더 이상 말할 나위 없이 39년간의 몽고 침략으로 사실상 고려는 한때에 저들의 부마국이 되었고 그 이후에는 왜구의 끊임없는 발호로 말미암아 한반도 전체는 크나큰 몸살을 앓고 있어서 국세는 날로 피폐일로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고려조가 청산되고 새로운 조선조가 개국되기 12년 전 있었던 “아지발토”의 침략은 가뜩이나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고려조가 망하느냐 다시 일어나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일대 사건이었다. 이때에 이를 최무선이 왜구를 맞아 화약무기를 써서 크게 무찌른 진포대첩에 연이어 내륙 깊숙이 쳐들어온 왜구를 운봉황산에서 맞아 일망타진하였던 황산대첩은 오천년 역사상 보기 드문 민족자존의 자랑이 아닐 수 없으며 기진맥진한 고려조가 청산되고 새로운 아침의 나라 조선개국의 발판이 되었다.
왜구는 쌀농사가 잘되는 호남 침략을 목표로 하였다.
어찌하여 왜구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아 때때로 반도 조선을 괴롭혀 왔던가.? 그 까닭은 물론 저들도 저들 나름대로의 생존이 있기 때문에 코밑에 가로 놓인 포도청을 달래기 위해 조선을 괴롭혔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저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식량부족에서 오는 쌀이었기 때문에 왜국침략의 최대 목적은 쌀 도둑질이요 그 도둑질의대상지는 언제나 저들과도 거리상 가깝고 쌀농사가 가장 성한 곡창 호남일 수밖에 없었다. 도둑들이 즐기는 마당은 곧 주인에게도 귀중한 마당일 수밖에 없었으니 농업이 주산이었던 그 때에만 볼지라도 호남이 휘청거리면 민족 생존이 휘청거리고 호남이 풍성하면 민족 전체가 탈 없이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로 “호남이 없었다면 이 나라도 없다”는 충무공의 말은 하필 저 임진왜란 당시의 속사정만을 나타낸 말로 받아 들리기 보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왜구의 호남침공을 운봉 황산에서 때려잡은 그 날의 그 큰 승리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기 그지없던 고려의 사직을 누란의 위기에서 건져낸 구국의 승리였으며 나아가 호남을 조선국의 발상지로 끌어 올릴 수밖에 없었던 주요 발판이었다. 물론 하나의 전쟁이 승리로 장식 되려면 그 원인 중에는 상대를 앞지를만한 유리한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인데 그 기본적 조건을 간추려 보면 천시가 옳아야 하고 지리가 맞아야 하고 인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이 세 가지 조건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명장 이성계가 지녔던 이 세 가지 조건은 각각 어떠하였던가? 첫째 남정북벌로 튼튼하게 단련된 백전필승의 노련한 지략과 지모는 허술할 만한 흠집을 이미 다 털어버린 나머지였기 때문에 자칭 소년장수라고 뽐내며 거만을 떠는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무찌르기에 이미 충분한 조건을 갖췄다 해도 좋다. 게다가 우선 “명산은 명장과 같고 대천은 정병과 같다.” 는 말처럼 명산 지리산과 거산 덕유산의 맥이 바짝 닿아 고원위의 분지를 이루고 있는 인월 ― 운봉간의 목 황산에 자리 잡고 겁 없이 달려드는 왜구를 유인 할대로 유인하여 놓은 그 솜씨가 벌써 지리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를 알고 남을 알면 백전백승을 거두는 법이다. 그렇기로 밝은 쪽에 적을 두고 우리는 어둠속에 가려 있다면 이미 그 싸움은 결판난 싸움이나 다름이 없고 팔뚝 힘에 바람 힘을 보태어 화살을 쏘아대면 그 화살은 “흥”소리를 내며 사반공배의 힘을 발휘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찌했던가? 고원 위에 뜬 달빛을 끌어다가 적을 비치면 그 날의 도둑떼들은 낱낱이 헤아리며 죽였으니 그래서 오늘날 그 날의 격전지를 인월(引月)리라 하고 팔랑재 바람 구멍사이로 불어오는 센바람을 끌어다가 화살에 힘을 붙여 그 때 그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들을 여지없이 무찔렀기로 지금도 인풍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흘러간 역사에 가설을 둘 수 없다 하지만은 만약 그 때 그날의 소년장수 아지발토에게 당시 어느 고려장수의 주장대로 저들이 원하는 국토의 일부를 그대로 내주었더라면 그들은 반듯이 호남을 원했을 것이요. 만약 호남을 그들에게 내주었더라면 지금 우리는 어찌 되었을까?
딴에 우리 국토는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모양이요. 백두대간은 그 척추요 지리산은 단전이며 예부터 우리 호남천지 53향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대로 삶에 불가결한 먹이를 생산하는 보배로운 곡창 호남을 저들에게 내 주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도둑떼 아기장수를 달래기 위한 말이었다 할지라도 너무나 경솔한 발언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으며 꿈속에서라도 그런 민족자존을 해치는 말은 아예 탓할 가치조차 없는 망언 중에 망언이다.
잔뜩 푸르렀던 지리산도 이제는 늦가을 첫눈으로 머리가 희고 달마다 고원 운봉에는 의례히 보름달이 완연하게 밝으며 팔랑재 구멍사이로 여전히 저 동해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은 겨울로 접어들수록 세차게 불어온다.
가뜩이나 그 때 그 쌀 도둑떼들이 이 땅에 쳐들어와 우리네 재산을 마구 사르고 우리네 목숨을 제멋대로 빼앗던 되게 버르장머리 없던 그 만행의 슬픔이 황산대첩의 기쁨으로 상쇄 된지 만 630년이 된 오늘에 다시 그 날을 기리고 그 뜻을 되새기는 참다운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물론 역사는 거울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그 거울에 비춰가며 삶의 방향을 올바르게 지어가야 할 필요가 있기에 우리는 항상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는 것이며 같은 역사 중에서도 그 역사의 진실을 실증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큰 문제가 하나 가로 놓여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과거 일제에 의해 저들에게 불리한 역사는 인위적인 힘을 가해서라도 축소 왜곡시키기도 하고 또는 물리적인 힘을 가해서라도 인멸시키기에 급급하였다는 점이 너무나도 컷 다는 점이다.
승전을 자랑하는 대첩비를 폭파한 것이 그 중요한 실 예이며 황산대첩으로 인해 얻어진 우리의 지명을 낱낱이 바꿔버린 것이 또 하나의 예이고 오늘날에 널리 통용되고 있는 국사 대사전에 까지도 황산대첩에 대한 풀이는 너무나도 축조 설명되어 있는 것이 또한 일제 잔재가 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는 부끄러운 한 예이다.
황산대첩 후 회군로를 정리하다.
아무튼 황산대첩에 대한 뜻을 설명하는 과정에 진군로(進軍路)는 설명을 생략하고 남원 운봉의 황산대첩관련내용과 회군로(回軍路)에 대한 것 중 임실과 관련 있는 사항들만을 모아서 정리하고자 한다.
장수에서 인월로 가는 지름길은 번암을 거쳐 가는 길뿐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왜구들의 동정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면 모르나 “장차 남원을 거쳐 광주로 향하리라.”며 “자세히는 몰라도 이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척후의 보고를 세밀히 분석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단지 급한 마음에 저들을 빨리 소탕해 버릴 요량으로 지름길만을 택하여 가는 것은 아무래도 왜구의 음흉한 전략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으로 자칫 만용이 될 수도 있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여러 정황을 분석하는 한편 저들의 호언장담에서 그 실마리를 풀고자 했다. 과연 왜구들이 장차 남원을 거쳐 광주로 향하려는 것인가. 그런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저들이 호언장담하는 이면에는 진군의 목표가 다른데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 이르자 이성계는 갑자기 눈에 별이 쏟아지며 가슴이 확 트이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그 도 그럴 것이 애시당초 저들이 쳐들어온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곡창 호남을 샅샅이 누비며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식량을 약탈해 가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미 함양에서 잔뜩 당당해질 대로 당당해진 기세를 슬그머니 접어 남원에서 광주로 갈 리가 없는 것 아닌가. 기운이 꽉 차면 누구나 교만해지고 기운이 빠지면 누구나 인색스러운 법이며 말 타면 경마 잡고 싶은 것이 사람마다 지닌 속성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교만해질 대로 교만해진 왜구들은 남원을 놓아두고 인월에서 곧장 전주를 향해 갈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성계는 패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측 군사들로 하여금 곧장 전주를 향해 떠날 채비를 갖추게 하면서 교만한 왜구를 일망타진할 작전을 세웠다.
즉 인월에서 전주로 가는 지름길은 남원 산동 목동에서 고개를 넘어 보절을 통과해야 하는데 보절로 접어들면 일단 산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어서 이곳이야말로 쳐들어오는 왜구를 맞아 싸우기에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요새지역이다. 이성계는 이미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고 장수에서부터 일부 군사를 이곳으로 보내 함미산성을 쌓고 진지를 구축하는 등 모든 준비를 해놓은 상태여서 이제는 전 주력 부대가 선발대와 합류해 왜구를 소탕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때 쌓았던 함미성의 흔적이 지명까지 남아있고 진을 쳤던 터도 진기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진기리는 본래 진기리(陣基里)로 불렀던 것이었는데 일제강점기 슬며시 진기리(眞基里)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니 조선 종자를 왜놈들의 종자로 바꾼 이른바 창씨개명만을 욕할게 아니지 않은가. 아니라 다를까 산서 고개를 넘어 부랴부랴 보절 진기리에 도착하자 마침 왜구들이 횃불을 밝힌 채 산동의 목동 고개를 삼삼오오 떼를 지어 넘어오는 것이 포착되었다. 이미 예견된 일이라도 자신의 판단이 맞아 떨어졌을 때에 느끼는 희열이란 마치 수도자가 많은 고생 끝에 어느 날 문득 진리를 깨달았을 때에 얻는 법열과도 다를 바 없으리라. 더욱이 다른 길을 타고 산동의 목동고개 넘어 까지 귀신도 모르게 우리 군사를 보내 잠자코 숨어 있다가 왜구들이 다 넘어 왔다 싶으면 나팔을 불라고 단단히 일러둔 일까지 있었다는 사실까지를 포함시켜 보면 당시 이성계가 느꼈던 기쁨이 어느 정도였을 것이라는 점은 상상되는 바 크다. 아무것도 모른 채 지껄이며 점점 왜구들이 앞으로 다가오자 난데없이 이성계는 큰 소리를 명령하기를 “횃불을 밝히라”고 소리쳤고 횃불잡이 군사들은 명령대로 미리 준비했던 횃불을 일제히 밝히니 당황한 왜구들은 기겁하여 반사적으로 오던 길로 너나없이 몸을 돌려 헐레벌떡 줄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왜구들은 허겁지겁 달아나다.
이와 같이 왜구들이 작살 맞은 뱀이 달아나듯 전후좌우 살필 틈도 없이 횃불을 든 채 한참 달아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저 고개 마루에서 ‘뛰--’하는 소라나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정신없이 달아나는 왜구들인지라 어느 곳에서 나는 소리인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우왕좌왕하며 달아나는 꼴이 실로 가히 볼만한 눈요기꺼리였다. 마치 독안에 든 쥐가 힘써 빠져나갈 구멍을 애써 찾는 것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진풍경이 횃불아래서 연출되는 동안 대부분의 왜구들은 맞아죽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왜구는 겨우 몇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여기서 살아 돌아간 왜구들은 횃불에 비친 우리 군사들의 진지를 보고 그대로 아지발도에게 알려 끝내 왜구의 전주 침공 루트를 포기 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우리 군사들은 사생결단하고 달아나는 왜구를 쫓다 다녔던 소리나팔을 잃게 되는데 날이 밝아서야 다시 찾게 됐다. 이런 일로 인해 산동의 목동에서 보절의 진기리로 넘어오는 고개 이름을 ‘잃었던 나팔을 다시 찾은 곳’이라는 뜻에서 지금까지『구라치』라 불러오고 있다.
帝王峰에서의 天祭를 지내다.
전주침공을 위해 구라치를 넘어오던 왜의 척후를 한밤중부터 새벽까지 진기리에서 박살낸 이성계는 몇 명 살아남지 않은 적의 줄행랑을 먼발치로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곧장 발길을 남원으로 옮겼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번 전투를 위해 개경으로부터 천리를 행군해 오는 동안 왜구에게 당한 우리 백성의 시체가 가는 곳마다 즐비하였던 그 참혹스러운 광경을 쉽사리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원에 도착한 이성계는 일단 우리 군사의 환영을 받고난 뒤에 그동안 왜구와 싸웠던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놓고 장차 왜구소탕을 위한 작전에 들어가 의견을 청취하였는데 그들 대부분이 “왜구들은 운봉황산의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진을 치고 있기로 공격에 어려움이 많으니 다시 남원으로 진출하기를 기다렸다가 치는 것이 옳다.”고 입을 모았다. 일찍이 사근내 전투에서 크게 패한 장수들은 잔뜩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의견들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이성계는 호통 치듯 말하기를 “왜구토벌을 목적으로 천리 길을 달려온 군사가 왜구를 찾아 공격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거늘 왜구를 보고서도 공격하지 않는다면 어찌 옳은 일인가? 여러 장수들은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여 한 치의 착오 없이 작전에 임할 수 있도록 하시요. 내일 아침 우리는 여원 치를 넘어 운봉으로 진군 하겠소” 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