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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이성계 회군로
◈ 3. 황산에서의 대첩
인풍리와 인월리에서 각각 바람과 달을 끌어내 수많은 왜구를 물리치면서 승전의 기반을 마련한 이성계였으나 막상 황산의 일대 접전을 앞두고는 승리를 예측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저들이 하늘처럼 믿는 대장 아지발도가 아직 건재한데다 우리측 군사들도 많이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계 회군로 (3)
황산에서의 대첩
 
인풍리와 인월리에서 각각 바람과 달을 끌어내 수많은 왜구를 물리치면서 승전의 기반을 마련한 이성계였으나 막상 황산의 일대 접전을 앞두고는 승리를 예측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저들이 하늘처럼 믿는 대장 아지발도가 아직 건재한데다 우리측 군사들도 많이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 기필코 이겨야 하는 왜구와의 싸움을 목전에 둔 황산벌은 이상하리 만큼 고요한 정적이 흐르면서 병사들의 긴장은 높아가건만 우리측이나 왜구측은 피아간에 먼저 싸움을 걸지 않았다. 이때 천지를 흔들 듯한 이성계의 포효가 무거운 정적을 깼다. “겁먹은 자들은 물러가라. 나는 싸우다가 적에게 죽겠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자는 나를 따르라”며 이성계가 비호같이 말을 몰아 적진을 향해 돌진해 나가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까지 겁을 먹고 있던 우리측 군사들은 이성계의 이러한 결연한 의지에 감동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용기백배해 죽을힘을 다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왜구의 사기도 만만치는 않았다. 나이 겨우 십오륙세 되는 소년 장수 아지발도는 백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데 빠르고 날쌔기가 나르는 호랑이와 같았다. 우리 군사들은 아지발도의 창을 막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阿只拔都 잡은 피바위
 
백전노장 이성계는 그동안 갖가지 전투를 통해 얻은 경험에 비추어서 이번 황산 전투는 분명히 이길 것으로 확신했다. 따라서 그는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아지발도를 사로잡아 잘 달래면 좋은 인재로 써먹을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이런 이성계의 내심을 들은 장수 이두란은 “아지발도를 생포하려면 우리 군사의 희생이 너무 클 것이므로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며 그냥 죽일 것을 주장했다. 이성계는 이두란의 이러한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전신을 투구와 갑옷으로 감싼 아지발도는 날래고 용맹해 활을 쏘아 죽일 수 있는 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성계는 잠시 생각하는 뜻 하더니 이두란에게 “그러면 내가 화살로 투구를 쏠터이니 투구가 땅에 떨어지거든 그대가 곧 저놈의 목을 쏘라”고 말하고는 곧바로 말을 몰아 내달리며 아지발도의 투구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이성계의 화살은 아지발도의 투구 꼭대기 한 가운데를 명중 시켰다. 화살에 맞은 아지발도의 투구 끈이 떨어지면서 투구가 갸우뚱하자 놀란 그는 투구를 황급히 고쳐 쓰려고 했다. 이두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지발도의 목을 향해 살을 날렸다. 이두란의 화살은 아지발도의 목을 정확히 뚤었다.
 
펄펄 날든 아지발도의 입에서 폭포수처럼 시뻘건 피를 쏟으면서 백마에서 곤두박질쳐 순식간에 시체로 변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우두머리를 잃은 왜구들은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성계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북을 울려 총공격을 명령했다.
 
사기충천한 우리군사들은 북소리를 천둥처럼 울리면서 우르르 달아나는 왜구들을 닥치는대로 쳐나갔다. 마치 수만마리의 황소떼가 울어대는 것처럼 처참히 울며 달아나는 왜구들.
 
실로 교만할 대로 교만했던 저들의 침략이 청산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죽은 왜구는 우리 군사의 거의 10배나 됐고, 덕둔산과 지리산 쪽으로 달아나 살아난 왜구는 겨우 70여명에 불과했다. 시체는 산더미처럼 쌓였고 피는 황천을 가득차게 흘러 7일간이나 물을 마실 수 없었다. 1,600여필의 말과 산더미 만큼의 병기와 수급을 노획했다. 생포된 왜장들은 잔뜩 겁을 먹은채 이성계 앞에 무릎을 끓고 머리를 땅에 부딪히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대첩. 이것이 바로 고려의 사직을 보전함과 동시에 교만한 왜구를 통쾌하게 섬멸한 이성계의 황산대첩이었다. 이 치열한 전투 당시 강처럼 피가 넘쳐흘렀던 황천 가상자리 넓은 바위는 지금도 피를 머금은 채「피바위」라는 이름을 달고 말없이 그 자리에 박혀있다.
 
피 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帝王峰 아래의 權布里
 
황산벌 싸움에서 도원수 이성계를 제외하고 공이가장 큰 사람은 외방출신의 이두란 이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외방출신의 처명에 대하여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처명은 이성계가 1369년 12월 요동을 정벌할 때 사로잡은 장수로 처형하지 않고 살려 주었다. 이두란은 이성계의 관대한 처분에 깊이 감사한 나머지 그는 항상 이성계의 곁을 떠나지 않고 충성을 다하였는데, 이번 싸움에서도 목숨을 바쳐 싸움으로써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아지발도 또한 용감무쌍한 소년장수였다. 그는 용기와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나 나이가 어린 탓에 두려움을 몰랐다. 아지발도에게는 출정하기 전부터 사랑하는 애첩이 있었다. 예지가 뛰어났던 그의 애첩은 아지발도의 고려 출정을 한사코 말렸다. 그러나 아지발도는 다리를 붙잡고 말리는 애첩의 간청을 물리치고 끝내 출정길에 나섰다. 이에 애첩은 통곡을 하면서 “정 이번 출정을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면 저의 간곡한 소원을 들어 주옵소서, 부디 고려에 가시거든 제발 황산이라는 곳에 진을 치지 마옵소서, 장군님께서 크게 불리한 곳입니다.”고 신신당부했다. 이러한 애첩의 부탁을 성가시게 여긴 아지발도는 장수들이 보는 앞에서 칼을 뽑아 애첩의 목을 쳐 죽이고 자신만만하게 고려 출정을 단행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전투의 승리는 어떻게 이뤄진 것인가. 바로 한 전투를 이끄는 주장의 교만과 자중에서 그 성패의 갈림길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여원치에서 만난 길할미의 지시를 겸허하게 받아들인 이성계는 승리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고, 애첩의 지극한 간청을 잊은 아지발도는 스스로 이역만리의 객귀가 되었던 셈이다. 정도전은 이 대첩의 원인을 제천봉의 천제로 상징하여 제천봉을 태조봉(太祖峰)이라 불렀고, 이 곳의 기운을 얻어 널리 왕권을 잡을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봉 아래 마을 이름도 권포리(權布里)라 불러 지금도 그 이름이 그대로 불려오고 있다. 또 이성계는 황산대첩을 마친 그 이듬해에 황산에 들려 당시의 대첩은 자신의 노력만이 아니라 생사고락을 함께한 8원수 4종사라 하여 그 이름을 바위에 새겼다. 이를 어휘각이라 하여 황산대첩비지 서쪽모퉁이에 전해져 오는데 다만 일정 말에 일본인들이 뭉겨버린 그 정확한 명단을 해독할 길이 없음이 아쉽다.
 
 
勝利로 이끈 세 가지 조건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서는 예부터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기본적인 조건을 필수적으로 갖춰져야 하는 것으로 일러져 오고 있다. 첫째 때가 맞아야 한다는 天時요, 둘째는 피아간에 있어서 보다 작전수행에 유리한 지세를 재빨리 차지해야 한다는 地利며, 셋째는 핀 주먹보다는 꽉 쥔 주먹이 힘을 지니 듯 일치단결된 군사력이어야 한다는 人和가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측의 10배나 되는 엄청난 왜구를 통쾌하게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남정북벌을 통해 탁월한 지략과 용기를 쌓은 백전노장 이성계의 뛰어난 전술 감각 이 세가지 조건을 두루 갖출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그 승리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용계리에서 울어준 초저녁 닭의 울음을 신호로 전주로 통하는 길을 구라치에서 막은 슬기, 天時, 격전에서 앞서 서두르지 않고 고남 산에 들러 하늘에 승전을 비는 제사를 올림으로서 얻은 단결력, 人和력, 그리고 또 “험한 고지에 웅거한 왜구를 치기에는 벅차니 그들이 그 곳을 빠져 나오기를 기다려 치자”는 배극렴의 제언을 묵살하고 오히려 그곳의 지형지물을 잘 활용하며 이미 왜구는 독안에 든 쥐와 다름없다는 판단아래 바람을 잡고 달빛을 끌었던 전술전략地利등이 모두 위의 세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준 것들이었다.
 
 
위엄 과시한 太基里 말무덤
 
그런데도 이성계의 용기와 지략을 미처 몰랐던 휘하의 군사들은 처음부터 겁을 잔뜩 집어먹고 출정을 몹시 두려워했던 나머지 전투에 능동적인 대처를 하지 않았던 사실 또한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이때마다 이성계는 탁월한 용인술을 발휘하여 휘하 군사들을 덕으로 감화시키기도 했고, 또한 덕화만으로 다스릴 수 없는 경우에는 자신의 무예를 과시하며 장수로서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 그 하나의 예가 산동면 태기리에 있는 말무덤 이야기이다.
 
즉 이성계가 제왕봉에서 출정에 앞서 활을 쏘았는데 그의 말이 화살을 따라 잡지 못하자 이성계는 자신의 말을 단칼에 목베어 죽였다. 그러나 말을 죽인 뒤에야 화살이 뒤늦게 날아와 떨어졌다, 그러나 이성계는 말을 죽인 것을 깊이 뉘위치고 후히 장사 지내주었다. 또 전쟁터에서의 민폐는 곧 군사의 교만이며, 군사의 교만은 자칫 패전의 주요 원인이 된다. 때문에 이성계는 이를 극히 경계하여 추호도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엄히 군율로 단속했다. 이에 대한 기록이(동국전사)권3에 다음과 같이 남아있다. ‘행군에서 군사들은 장막의 기둥을 모두 대나무로 바꿨는데 때에 이성계는 군사들에게 “대는 나무보다 가벼워 널리 운반하기에 편하다. 그러나 역시민가에서 심은 것이지 우리가 거지고 온 물건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의 묵은 물건을 잃지 않고 가져가면 족하다.” 하니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 탄복하여 모두 대나무를 쓰지 않았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처럼 이성계는 때와 장소, 또는 상황에 따라 적절하고도 정확한 판단으로 군사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대동단결 다짐한 斧節里
 
흔히 명산은 병장과 같고 대천은 정병과 같다(名山如名將 大川似精兵)는 말이 있다. 이 말대로 끊임없는 외침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래도 우리네 땅을 묵묵히 우리네 땅으로 고스란히 지켜준 것은 바로 말없는 푸른 산이요, 유유히 흐르는 냇물이었다는 점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전투가 바로 황산대첩이다. 왜냐하면 지리산이 크게 한쪽을 막아주었고, 그 줄기에서 뻗은 크고 작은 뫼들이 겁 없이 달려든 왜구를 중간 중간에서 그대로 막고 있었기 때문에 용장 이성계는 용기백배하여 일당백의 힘으로 그 속에 든 섬 도둑떼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반드시 지나쳐서는 안될 특기할 만한 사실은 왜장 아지발도가 죽자 완전히 사기를 잃은 왜구들이 우왕좌왕하며 아비규환의 형상으로 허겁지겁 살길을 찾아 각자 도망하는 모양을 본 이성계가 군사들에게 큰소리로 “싸움을 그쳐라, 예로부터 싸울 뜻을 잃고 각자 도생의 길을 찾아 도망치는 적을 모조리 죽이는 일은 마땅히 취할 일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는 점과 군사를 독려할 때에는 매섭게 몰아쳤으나 승리를 얻은 후 논공행상을 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자신이 관여하지 않고 조정의 지분을 맡겼다는 점이다.
 
이는 곧 이성계의 인품을 증명해주는 대목이다. 남원으로의 개선 도중 여원치를 넘을 무렵 앞서 전투에서 겁에 질려 뒷전에서 목숨을 아꼈던 군사들이 자청해 이성계에게 처벌해 줄것을 원했는데도 그는 이는 모두 용서해 주었었다. 여원치를 막 넘은 재밑에 있는 이 마을은 그래서 전쟁뒤에는 으레히 장수가 행해야할 노공행상을 거두었던 곳, 곧 이성계가 부절(斧節, 또는 儀仗)을 거둔 곳이라 하여 지금까지 부절리(斧節里)라는 지명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東忠里와 王亭里 萬福寺
 
전쟁이란 그 원인이나 명분이 어떻건 간에 피아간의 다툼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양측 모두의 손실일 뿐이며, 그 중 가장 큰 손실은 뭐니 뭐니 해도 인명을 잃는 일이다
 
때문에 ‘一將功成萬祮骨’이라는 옛말처럼 전혀 인명의 손실이 없는 승리는 찾아볼 수 없다. 즉 용감한 군졸들의 충정없이 우연히 장군에게 안겨지는 영광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그런 전쟁의 특성에 빛춰 볼 때 격전에서 살아남은 군졸을 이끌고 개선하는 장수로서는 당연히 살아남은 군졸들에게 너그러울 수밖에 없는데 그런 너그러움이 나올 수밖에 없는 까닭은 곧 이미 승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의로운 영령들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추모의 정이 마음깊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쩌면 개선의 기쁨은 곧 죽은 이들에 대한 슬픔보다 결코 더 크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 황산대첩을 가능케 한 충의로운 희생은 구체적으로 어느 누구였던가?
 
물론 사근역 전투에서 희생당한 박수경이나 배언의 죽음도 그중 하나였고, 그보다는 이진에서 사로잡아 자신의 그림자가 된 장수 處明(이두란)의 희생이 더욱 큰 것이었으나, 겁에 질려 주저했던 배극렴 휘하의 군졸보다는 남원에서 단지 의를 위해 따라 나선 이름 모를 군졸들의 희생이 승전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역사적인 이유로 해서 황산전투 당시 가장 많은 청년들이 의병으로 지원했던 곳을 東忠里, 개선의 기쁨과 희생된 충의로운 영령들에 대한 추모의 정을 동시에 느끼며 전투에서 얻은 상처와 피곤을 풀었던 곳을 王亭里라 이름지어 지금까지 불러오고 있다.
 
다만 이성계가 머물렀던 남원 왕정동엔 만복사라는 99칸의 절이 있었는데, 죽음의 순간을 넘나들며 싸우는 군사들과는 달리 승려들은 그저 한가로히 지내고 있었다.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구국의 병장 이성계가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저 같은 불교에서는 더 이상 호국정신은 기대 할 수 없다는 사실’ 그것뿐이었다.
 
조선 개국 후 이뤄졌던 억불숭유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대목이다.
 
 
李成桂의 黃山大捷은 天命으로 여기다.
 
남원은 예부터 오소경(五小京)의 하나로 군사 전략상 중요한 요새지이다. 때문에 만약 이번 전투에서 남원이 아지발도(阿只拔都)의 손아귀에 들어갔더라면 고려의 사직은 물론이요 저처럼 환호하는 이곳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 전투는 이성계로서도 승패를 쉽사리 예측할 수 없어 때로는 모든 것을 천명에 맡기고 행여나 왜구가 연거푸 실수라도 저질러 주기를 바란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승리를 이룰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 같은 기대를 신념으로 굳혀가며 차분히 전투에 임해온 결과 급기야 일당백의 성과를 이루어 황산대첩이라는 크나큰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첫째 비몽사몽간에 여원치에서 나타난 길 할미의 지시가 그대로 적중한 것과 둘째 그에 앞서서 이미 개성을 떠나 남하해 오는 도중 장단에 이르렀을 때 대낮인데도 흰 무지개가 나타난 길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인가의 길흉이나 나라의 흥망성쇠도 모두 이미 하늘이 정한일이라는 것이다. 대첩을 거둔 후 이성계가 취한 태도에서도 그러한 이성계의 믿음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전투에서의 공과도 묻지 않고 다만 조정의 지분으로 맡겨 마음을 비울대로 비워버린 것은 이번의 승리만큼은 틀림없이 자신의 노력보다는 그런 노력을 가능케 한 하늘의 뜻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 하늘 요천수 맑은 물을 바라보며 개선해 들어오는 자신을 열광적으로 환영해주는 남원 백성들의 환호성을 듣고 한껏 기쁜 것도 하늘의 뜻이며 기린산 기슭에 자리 잡은 만복사를 바라보며 치솟은 당간지주, 장엄한 가람, 그리고 그사이를 한가롭게 왕래하는 스님들의 모습을 보며 이제 더 이상 저 같은 불교로는 호국을 기대 할 수 없다는 생각들이 한심스런 생각을 넘어 격한 분노심 마저 치솟는 까닭도 또한 하늘의 뜻이 아닌가 싶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불현 듯 지난날 무학 대사와의 만남이 떠올랐다. 이성계는 열광적인 남원 백성들의 환호성을 뒤로 두고 이제 개경으로 돌아가야 할 판인데도 그길로 무학 대사를 만났던 팔공산 도선암을 찾았다.
 
무학 대사 찾아 道詵菴으로 가다.
 
개선장군 이성계의 행렬은 여덟 장수와 네 종사를 비롯한 수많은 군사들 그리고 황산대첩을 전후해 그가 탔던 여덟 필의 헌걸산` 명마들이 뒤를 따랐다. 붉고 푸른 각종 깃발을 휘날리며 승리의 기쁨을 안고 풍악을 울리며 질서정연하게 돌아가는 개선 길은 위엄이 넘쳤다. 높은 구름을 뚫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나르는 새매 같은 황운골, 목이 길며 갈기가 유난히 푸르르 기린 같은 유린정, 바람을 앞지르듯 빠른 검정 가마귀 같은 추풍오, 번개처럼 거침없이 달리는 붉은 멧돼지 같은 발전 저, 그리고 모든 동물의 가장 잘생긴 부분을 모아 놓아 자색 용 같은 용 등자가 앞서고 그 뒤에 목과 네다리에 하얀 서릿발을 띤 백마 응상백을 탄 이성계의 당당한 위풍 게다가 수천 수백의 군사들이 풍악에 맞춰 앞서거니 뒷 서거니 하며 이룬 장사지에 높은 산과 깊은 물을 가르며 지나는 모양은 가히 일대 장관이었다. 우리의 자랑스런 국토임과 동시에 또한 말없이 우리 백성을 돌보고 우리네 목숨을 묵묵히 지켜준 산과 들은 더 없는 명장이며 정명이 아닐 진데 저 높은 지리산이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이성계는 그 절대 절명의 순간들을 기지로 헤치며 왜구를 섬멸한 그 곳들을 바라보며 장엄한 개선행군을 하고 있는 것이다.
【향토】 이성계 회군로
• 2. 길 할미 만난 여원치(女院峙)
• 3. 황산에서의 대첩
• 4. 아! 천명(天命) 일 뿐
(2024.06.13.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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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