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회군로 (4)
승리함을 뒤로하고 무학대사 찾아 도선암道詵庵 行 지사면只沙面 영천寧川은 작은 내라며 현계玄溪로 지명 바꿔 팔공산 도선암道詵庵을 찾아
아! 천명天命 일 뿐
남원은 예부터 오소경五小京의 하나로 군사전략상 중요한 요새지였다. 때문에 만약 이번 전투에서 남원이 아지발도의 손아귀에 들어갔더라면 고려의 사직은 물론이요. 저처럼 환호하는 이곳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 전투는 이성계로서도 승패를 쉽사리 예측 할 수 없어 때로는 모든 것을 천명에 맡기고 행여나 왜구가 연거푸 실수라도 저질러 주기를 바란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꼭 승리를 이룰 것이라는 기대를 져 버리지 않고 그 같은 기대를 신념으로 굳혀가며 차분히 전투에 임해 온 결과 급기야 일당백의 성과를 이루어 <황산대첩>이라는 크나 큰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첫째 비몽사몽간에 여원치에서 나타나 길할미의 지시가 그대로 적중한 것과 둘째, 그에 앞서서 이미 개성을 떠나 남하해 오는 도중 장단에 이르렀을 때에 대낮인데도 흰 무지개가 나타나 길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인간의 길흉이나 나라의 흥망성쇄도 모두 이미 하늘이 정한 일이라는 것이다. 대첩을 거둔 후 이성계가 취한 태도에서 그러한 이성계의 믿음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만 조정의 지분으로 맡겨 마음을 비울대로 비워버린 것은 이번의 승리만큼은 틀림없이 자신의 노력보다는 그런 노력을 가능케 한 하늘의 뜻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 하늘
요천수 맑은 물을 바라보며 개선해 돌아오는 자신을 열광적으로 환영해 주는 남원 백성들의 환호성을 듣고 한껏 기쁜 것도 하늘의 뜻이며 기린산 기슭에 자리 잡은 만복사萬福寺를 바라보며 치솟은 당간지주, 장엄한 가람, 그리고 그 사이를 한가롭게 왕래하는 스님들의 모습을 보며 이제 더 이상 저 같은 불교로는 호국을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한심스런 생각을 넘어 격한 분노심 마저 치솟는 까닭도 또한 하늘의 뜻이 아닌가 싶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불현 듯 지난날 무학대사와의 만남이 떠올랐다. 이성계는 열광적인 남원백성들의 환호성을 뒤로 두고 이제 개경으로 돌아가야 할 판인데도 그 길로 무학대사를 만났던 팔공산 도선암을 찾았다.
응상백凝霜白이 건넌 가무내
개선장군 이성계의 행렬은 여덟 장수와 네 종사를 비롯한 수많은 군사들, 그리고 황산대첩을 전후해 그가 탔던 여덟 필의 헌걸산 명마들이 뒤따랐다. 붉고 푸른 각종 깃발을 휘날리며 승리의 기쁨을 얻고 풍악을 울리며 질서정연하게 돌아가는 개선 길은 위엄이 넘쳤다.
높은 구름을 뚫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나르는 새매 같은 황운골, 목이 길며 갈기가 유난히 푸르르 기린 같은 유린정, 바람을 앞지르듯 빠른 검정 가마귀 같은 추풍오, 번개처럼 거침없이 달리는 붉은 멧돼지 같은 발전저, 그리고 모든 동물의 가장 잘 생긴 부분을 모아 놓아 자색용 같은 용등자가 앞서고 그 뒤에 목과 네다리에 하얀 서릿발을 띤 백마 응상백凝霜白을 탄 이성계의 당당한 위풍, 게다가 수천 수백의 군사들이 풍악에 맞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룬 장사지에 높은 산과 깊은 물을 가르며 지나는 모양은 가히 일대 장관이었다. 우리의 자랑스런 국토임과 동시에 또한 말없이 우리 백성을 돌보고 우리네 목숨을 묵묵히 지켜준 산과 들은 더 없는 명장이며 정명이 아닐 진데 저 높은 지리산이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이성계는 그 절대 절명의 순간들을 기지로 헤치며 왜구를 섬멸한 그 곳들을 바라보며 장엄한 개선행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팔공산 도선암을 향해 가면서 이성계의 개선군은 마침 남원과 임실의 경계를 두고 흐르는 영천(寧川:임실군 지사면 계산리)을 건너게 되었다. 행군의 맨 앞에서 그동안의 감회에 젖어있던 이성계는 한 장수에게 그 천의 이름을 물었다. 장수는 이곳이 영천(寧川)이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이성계는 이름과는 달리 그 규모가 작은 냇물이니 川자를 溪 자로 고쳐 가무네 즉 현계(玄溪)라 부르도록 했다. 여기서 밝힐 일은 왜 寧川을 굳이 玄溪라고 고쳐 불렀던가 하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곧 溪는 川을 이루는 작은 흐름이라. 적을 물리치는데 소용되는 요새지로써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만약 가무내를 영천이라고 그대로 부르면 뒷날 다만 지명만을 믿고 이를 요새로 여긴 나머지 자칫 낭패가 뒤따를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임실군 지사면의 현계는 그래서 그때 고쳐진 이름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정해져 내려오고 있다.
하룻밤 묵었던 관기리館基里
이성계의 개선 군이 가무내를 건널 무렵엔 해는 서산으로 기울어져 어두워져 갔으나 도선암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더구나 앞에는 큰 고개가 가로막혀 그날은 할 수 없이 그곳에서 머물며 하루의 노독을 풀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전, 후 좌, 우를 살펴보니 오직 첩첩산중 고개 밑에 제법 큰 마을이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성계 군은 그곳을 찾아 일단 하루의 노독을 풀기로 했다. 이성계는 또한 행군으로 잔뜩 지친 말에게도 준비했던 꼴을 먹이도록 명령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가 특히 말에 대한 신경을 썼던 것은 전투와 행군에서 말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전에 무학 대사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때에 사람이 귀하고 말은 사람보다는 천하기로 마굿간에 불이 났다는 전갈을 듣고 사람의 안부만을 물었다던 공자의 옛 일은 다만 인간을 소홀이 여기던 그 시절에 인간 사랑의 긍지를 심어주기 위한 가르침이었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그 한마디를 음미하며 사람의 중요성을 새삼 깊이 느낀 이성계는 그 집에서 하루의 노독을 말끔히 풀 수가 있었다. 이처럼 무학 대사와 만났던 지난날의 팔공산 도선암을 찾기 하루 전 단잠을 잤던 마을을 이후로 館基(지사면 관기리) 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고스란히 전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은 자못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학대사 그리며 ‘아침재’ 넘어
왕방리 짙은 안개 속 길 찾느라 우왕좌왕, 이성계李成桂 반나절 고생 끝 도선암道詵庵 입구 당도, 이곳에서 황산까지 수 천리나 된다 하여 수천리數千里 지명 얻어
아침에 넘은 아침재
산골마을 관기리에서 하룻밤을 묵은 이성계는 아침밥을 일찍 먹고 군사들을 독려해 팔공산 도선암을 찾아 길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어제 밤의 편안한 휴식으로 장병들의 피로와 노독은 거의 풀린 듯싶었고 더욱 반가운 일은 원수인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져 장졸 간에 지켜야할 예의 이상의 그 어떤 깊은 신뢰를 퍼부어 주는 듯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자신이 휩싸여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안정된 분위기가 느껴지자 이 시점에서 자신이 팔공산 도선암을 애써 찾는 이유를 여러 군사들에게 장광설로 자세한 설명까지 하지 않더라도 대강 귀띔은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일었다. 그러나 이를 즉시 말하지 않고 망설이는 참에 마침 길을 안내하던 비장이 “합하” 오늘의 행군은 마땅히 저 고개를 만마관萬馬關을 거쳐 전라 감영으로 입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이성계는 “아니다. 내 개선의 영광을 안고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지나쳐서는 아니 될 곳이 있으니 그곳이 곧 팔공산 도선암(道詵庵)이다. 여기에서 그리 멀지않은 도선암 팔공산으로 가자” 라고 대답했다. 군사들은 이 말이 의아해 하면서도 도원수의 명령이라 그대로 따를 수 밖에 없어 지체 없이 불각지차로 떠오는 해를 바라보며 관기리 마을 뒤에 있는 재를 넘어 팔공산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따라서 도선암으로 향하여 넘어가는 고개 이름을 이성계가 아침에 넘어서 아침재(조치:朝峙)라고 불러 지금까지 이름이 변하지 않고 있다.
안개 속에 길 찾아 헤맨 왕방리(枉訪里)
지금도 마찬가지 이지만 팔공산 도선암은 신라 말에 도선(道詵)에 의하여 창건된 고찰이기는 하나 첩첩산중에 들어앉은 작은 암자여서 수행하는 스님도 이름을 피해 혼자서 독불공을 하거나 은밀한 기도처로 삼아오던 터였기에 당시로써는 쉽사리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장병 중 누구를 앞 세워도 쉽게 찾을 수 없을뿐더러 또 섣불리 아무 영문도 모르는 낮 모를 백성을 앞세워 찾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 때문에 이성계는 다만 팔공산 도선암을 팔공산에 있으리라는 가능만으로 도선암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아침재를 넘어서자 마침 안개가 잔뜩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성계 일행은 이처럼 짙은 안개에 묻혀 자취를 쉽사리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 도선암을 찾느라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계는 자비로운 무학 대사의 얼굴을 그리며 장사진을 이끌고 그저 전에 본 듯한 계곡 길만을 따라 올랐다. 그때 이성계의 앞에 어슴푸레 무엇이 보이는 듯 했다. 그는 안개를 헤치며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뿔사! 그것은 바로 자신이 애써서 찾던 도선암이 아니고 무학 대사의 모습이었다. 순간 기이한 생각이 든 이성계가 안개를 조금 더 젖이고 앞을 주시해 보니 그것은 무학 대사의 모습이 아니고 낮 익은 군사들의 모습이었다. 잠시 후 안개가 제법 걷히자 이런 순간적인 일들이 틀림없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성계는 그때서야 자신이 여태껏 안개 속에서 무학 대사만을 그리며 헤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짙은 안개 속에서 가늠만으로 도선암을 찾으러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마음속으로 지재차산중只在此山中 운심불지처雲心不知處를 여러 번 반복하며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팔공산 도선암을 찾다가 산만 한 바퀴 돈 채 한동안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그 곳을 그르칠枉에 찾을 訪자를 붙여 왕방枉訪:지금의 왕방리 임실군任實郡 성수면聖壽面 왕방리枉訪里라 지금도 불러지고 있다. 오봉제가 축조되어 옛 마을이 물속에 잠기고 산 위쪽으로 옮겨 작고 평화로운 마을을 이루고 있다.
고생 끝에 수천리(數千里) 찾아 지명 얻어
이성계는 안개 속에서 헤매었던 왕방리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실 묻지 않아도 가히 알 수 있다는 말은 오직 탁 트인 길을 불을 보듯 훤하게 볼 수 있는 사람, 즉 도를 한사람만이 가까스로 조심스럽게 내놓을 말이라는 점을 익히 깨달았다. 그는 이런 실수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심심산중에서 다시 기억을 더듬어 기어이 도선암을 다시 찾아 나서게 되었고 영문을 모르는 휘하 장졸들은 그저 원수의 뜻이라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따를 수 없이 그대로 따를 뿐 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휘하의 군졸들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 하면 팔공산 도선암은 고려의 태조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뿐 아니라 팔공산이란 이름은 이미 도참을 제대로 공부하여 알만 한 사람에게는 다소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만 원수가 이처럼 애써 찾는 정확한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장졸들은 섣불리 이를 알아차린 듯한 태도를 취할 수도 없었던지라 너나없이 그저 뒤만 따를 뿐이었다. 하늘은 이미 가을로 접어들었는데 땅은 아직도 여름기운이 가시지 않아 일어나는 안개는 밤부터 서서히 일어났다가 새벽까지 짙게 깔려 있다가 차츰 해가 중천으로 오르면 어김없이 걷혀지는 법이다. 때에 반나절이 지나 태양이 은빛을 발하는 시점에서 그 빛을 타고 다시 도선암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성계의 일행들은 그 날 오후 새참 때 쯤 도선암 입구에 이르렀다. 비로소 이성계는 약간의 피로를 느끼며 부하 장수를 향해 “황산에서 여기가지가 몇 리나 될꼬? 하고 물었다. 그러자 어느 장수하나가 엉겁결에 ”수천리(數千里)나 되는 듯 하옵니다.“ 라고 대담을 했다. 수천리는 이때부터 불러왔는데 오늘날에는 수철리(水鐵里)라고 적고 있으니 아마 멀다는 뜻을 피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어 이해는 되나 그래도 애당초로 돌아가 역사 따라 지명 따라 그대로 적는 것도 또한 무방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