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회군로 (5) 천년千年 세월 풍파 견디어낸 ‘환희담歡喜潭’
고려태조 왕건이 목욕 후 왕기를 얻은 기쁨을 새긴 환희담에서 조선태조 이성계도 목욕 제계
신라 헌강왕 원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고찰古刹 李成桂 꿈 해몽한 무학대사와 인연 맺은 곳
짙은 안개 속에서의 방황 끝에 애써서 찾은 팔공산 도선암의 입구 수천리에서 굳이 또 깊은 계곡을 따라 첩첩산중의 암자를 찾는 까닭은 어디에 있었던가.
첫째, 팔공산은 해동천지 여러 산중에서 十二대 명산중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장안산 줄기로써 장수와 임실을 경계 짓고 있는 호남정맥의 웅산임과 동시에 예로부터 삼한천지를 번갈라 다스린 새 왕조의 창업주에게 거듭하여 여덟 번이나 왕기를 내려 줄 천하의 명산이라 일러온 산으로 실제 고려태조도 도선의 인도로 이곳을 찾아 목욕재개에 왕기를 얻어 고려왕조를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이 산 중턱에 자리한 아담한 도선암은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도참의 대가인 도선이 창건한 고찰로 이미 이성계 자신이 젊었을 적에 이 암자에서 이승 무학 대사를 만나 상서로운 꿈에 대하여 시원스런 해몽을 얻고 백일치성을 드린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내용은 조선 초 태조3년(1394)에 기록되어진 성수산 상이암 사적기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 내용의 대략을 중심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왕건이 목욕했던 환희담歡喜潭
신라 말에 도선 국사가 중국으로 건너가 도참풍수의 대가인 일행 선사 밑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스승으로부터 “불교가 장차 해동海東에서 성하리라.”는 예언과 함께 “7년 뒤에 열어보고 곧 비밀리에 王씨댁에 이를 전해주어라.”는 말씀을 듣고 돌아왔다. 그 후 스승과의 약속대로 도선 국사는 송도에 사는 왕륭을 찾아 이 참서를 전하며, 그에게 당부하기를 “명년에 반듯이 귀한 옥동자를 얻을 것이니 그 아들이 자라면 이 글을 전수하라.” 하였다. 도선국사의 말대로 왕륭은 이듬해에 아들을 얻었는데 이가 곧 뒷날 고려태조 왕건이었다. 왕건이 청년이 된 어느 날 임실 팔공산 봉우리에 오른 도선은 왕건에게 말하기를 “아름답도다. 이 산이어 주봉이 빼어나니 천자가 가히 만조백관의 조화를 받는 형상이요. 어린 봉우리가 좌우로 아름답게 뻗혔으니 여러 신하가 머리를 숙이고 하례하는 모습이로다.” 하며 크게 칭찬하고 또 “산 이름이 팔공八公이라 여덟 성만이 차차 나타날 것이며 이산이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이산이 망하면 나라도 또한 망하리라. 이제 왕공은 여덟 성인의 비롯이니 이 산에 의지하여 정성껏 기도를 올리면 장차 큰일을 이룰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이후 도선 국사는 왕건을 위해 암자를 일으켰고 왕건은 도선 국사의 지시대로 이 산에 의지하여 백일기도를 정성껏 올렸으나 아무런 증험이 없자 다시 3일 동안 치성을 정성껏 올린 뒤에 암자 앞의 못에 들어가 목욕을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동자가 못가에서서 목욕하는 왕건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지라. 왕건이 그 동자를 향해 ”동자는 대관절 누구인데 이 같은 첩첩산중에 들어 하필 목욕하는 나를 그토록 물끄러미 바라보는가?“ 하고 예사롭게 물었다. 그러자 그 동자가 하는 말이 “제성을 굳이 말하자면 부처인데 부처는 본래 성은 없는 것이며, 살기도 아무도 모르는 저 높은 곳에 삽니다.” 라고 하더니 문득 층암절벽 위로 올라가 노래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하늘이 한 땅을 지었는데 형상도 없고 모습도 없도다. 한 땅을 몸에 지니고 태어났으니 아무리 지우고자 할지라도 지워지지 않으리로다. (天造一土無形無體 土塗身欲不)洗涤) 노래를 마친 뒤에 그 동자는 문득 사라져 버렸고 그 같은 노래 소리를 들은 왕건은 가사 중에 “土”라 하는 말이 곧 임금 王자가 써 있다는 사실을 찬양한 내용이라 짐작하고 크게 기뻐하며 못 가에 있는 큰 돌에 이 사실을 찬양한 내용이라 짐작하고 크게 기뻐하며, 못 가에 있는 이 사실을 남기기 위해 환희담歡喜潭 이라는 세 글자를 새겨두었다. 임실군 성수면 성수산 골짜기 상이암 바로아래 계곡 조그마한 바위에 새겨진 이 세 글자는 수백 년 동안 풍마우세風磨雨洗를 거친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 오늘날에도 그대로 알아 볼 수 있으니 이 또한 매우 흥미롭고도 자랑스러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해몽解夢 얻은 도선암道詵庵
조선태조朝鮮太祖 李成桂도 젊었을 적에 팔공산 근처 어느 외딴 집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어느 날 밤 기이한 꿈을 꾸고 부근에 해몽을 잘 하기로 소문난 노파를 찾아가 꿈 해몽을 부탁했다. 그러자 노파는 꿈 해몽대신 “여기서 멀지 아니한 산 밑에 도사님이 계시니 친히 찾아가서 물어 보시오” 하며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이성계는 노파의 지시대로 산길을 헤치고 암자를 찾아가니 스님이 있기로 정중히 예를 올리고 꿈 이야기를 한 후 해몽을 부탁하니 다음과 같이 꿈 해몽을 하여 주었다.
첫째 일천집의 닭이 일시에 운 것은 군계일학(群鷄一鶴)으로 닭이 천이면 봉이 하나라고 여러 사람들 중에 고귀하다는 뜻이요.
둘째 다듬이소리가 난 것은 많은 사람이 장차 호응해 주리라는 뜻이요.
셋째 꽃이 떨어진 것은 반듯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요.
넷째 거울이 깨지고 몸이 부서진 것은 팔도에 이름을 떨치리라는 뜻이요.
다섯째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진 것은 왕이 되리라는 뜻이요.
여섯째 솥과 관을 머리에 이고 바다로 들어간 것은 장차 용상에 오른다는 뜻이다. 라고 풀더니 한참동안 물끄러미 이성계를 쳐다본 뒤에 말을 이어 당부하기를 “그러나 이는 천기를 얻은 꿈이라 두고두고 삼가하고 삼가 할 것이나 이제 지기를 얻지 않으면 안 될 것인즉 공께서는 이 산을 의지하여 정성껏 치성을 올리고 말없이 때를 기다리시지요” 라고 하였다.
이처럼 기이한 이성계의 꿈을 거침없이 풀이해준 스님은 바로 뒷날 태조를 도와 조선창업에 많은 공을 세운 바로 무학 대사였다. 이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때는 바로 고려 공민왕 초기로 무학이 요승 신돈의 화를 피해 일시 은둔해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니 왜구 아지발도 군을 물리치고 더욱 의기양야해진 이성계가 휘하 장병을 거느리고 개선하는 길에 설레는 마음을 달래며 그리운 무학대사를 찾듯 애써 이곳을 찾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