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이성계 회군로
저작물 (목치)
【향토】 이성계 회군로
◈ 6. 고려(高麗), 조선(朝鮮) 태조(太祖) 머물렀던 역사의 현장
도선암이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이성계는‘일천一千 집의 닭이 일시에 운 것은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상像이요 장안 만호가 일제히 두드리는 다듬이 소리는 산오속응山嗚俗應의 세勢이며 꽃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은 결結과 자연自然의 운運, 거울이 깨진 것은 명진서해名振西海의 성聲,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진 것은 국조창업의國朝創業의( )를 뜻하며
이성계 회군로 (6)
고려高麗, 조선태조朝鮮太祖 머물렀던 역사의 현장
 
천상天上에서 울려 퍼진 ‘성수만세聖壽萬歲’ 삼창 새나라 태동 암시
 
《삼청동三淸洞》산 맑고山淸, 물 맑고水淸, 하늘도 맑은氣淸 환희담 주변
《성수산聖壽山》성수만세‘聖壽萬歲’외침소리들렸다하여 八空山지명고쳐 불러
 
 
팔공산 도선암道詵庵을 찾아
 
도선암이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이성계는‘일천一千 집의 닭이 일시에 운 것은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상像이요 장안 만호가 일제히 두드리는 다듬이 소리는 산오속응山嗚俗應의 세勢이며 꽃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은 결結과 자연自然의 운運, 거울이 깨진 것은 명진서해名振西海의 성聲,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진 것은 국조창업의國朝創業의( )를 뜻하며 또한 솥과 관을 머리에 이고 바다로 들어간 것은 용비어천龍飛御天의 명命이라고 해몽해준 무학대사의 자비스런 모습을 떠 올렸다. 그 꿈이 익어가는 오늘 천하 대 원수가 되어 천군만마를 이끌고 팔공산 도선암 八空山 道詵庵을 찾는 이성계의 감회는 그 어느 때 보다 상쾌하고도 가뿐했다. “산은 어디에 감출 것이요? 산은 산 속에 감춰들 수밖에 없고 먼 항해를 앞둔 배는 다만 깊숙한 골짜기에 감춰두어야 하오”라고 일러준 뒤 “하늘이 장차 좋은 때를 줄 것이나 만사는 오지 유비무한이오, 장차 삼한의 너른 강토를 새롭게 추슬러 갈 강한 힘을 기르고 얻자면 이만한 골짜기도 없소.”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넌지시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던 무학대사의 얼굴, 그 얼굴이 새삼 더욱 그리워지는 까닭은 다만 도선암이 가까워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산山·수水·기氣 맑은 삼청동三淸洞
 
태조太祖 이래로 산고수려일고려山高水麗日高麗 라 하지 않았던가. 산이 높으면 반드시 물이 맑을 수밖에 없고 골이 깊으면 물의 흐름이 길 수밖에 없기로 팔공산八空山을 두고 동쪽은 산고수장山高水長이오, 서쪽은 운심수청雲深水淸의 운수雲水가 아닌가. 산은 언제나 땅을 사방으로 가르지만 물은 항상 사방의 것을 하나로 모아 끊임없이 흐른다. 이는 저절로 흐르고 가르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자 또한 우주안의 무한한 기운이 역연히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산은 솟고 물은 유유히 흐르는 것이다.
 
이 무한한 자연의 호연지기를 내 몸속에 축적하여 솟을 자리에서는 한없이 솟고 자취 없이 흘러야 할 자리에서는 유유히 흐르는 힘을 내 몸속에 함축해 두자는 것이 지난날의 내 꿈이 아니던가. 이성계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불현 듯 지난날 자신이 실제 꾸었던 꿈들이 되살아나면서 새로운 결단이 필요하다는 다짐이 그의 가슴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結果自然의 운運을 타고 났고 용비어천龍飛御天의 명을 받을 群鷄一鶴의 상을 지녔다 하더라도 기운이 없으면 그것은 허상일 뿐이요, 명진서해名振西海의 성聲과 산오속응山嗚俗應의 세勢를 지녔을지라도 다시 하늘로부터 이미 얻어진 성세를 곱게 비춰주는 빛이 없다면 안 될 것이다. 이런 생각과 함께 그의 뇌리腦裡에는 지난날 백일치성을 마치고 환희담에서 목욕하던 그때의 기쁨도 기쁨이지만 왠지 온 몸에 충만한 상쾌함에 이끌려 신선이 된 기분으로 ‘산도 맑고 물도 맑고 하늘마저 맑구나’ 하며 외쳤던 그 짧은 순간의 기억이 번개처럼 되살아났다.
 
 
천상의 소리 ‘성수만세聖壽萬歲’
 
이성계는 그때 강렬하게 느꼈던 그 상쾌한 기분을 山淸,水淸,氣淸이라 하여 삼청이라 했고 하늘 바라 뵈기로 아늑한 못 환희담歡喜潭 주위를 신선이 내린 곳이라 하여 삼청동이라 명명하였고 성큼 코앞에 다가선 암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 옛날 그가 젊은 시절 무학대사를 만났던 때에 그 아늑한 터전에 안개가 말끔히 걷히고 오색구름이 영롱한 빛을 발하며 감돌았던 기억이 역력히 되살아났다. 그런데 이성계가 이런 기억을 되살리며 환희담歡喜潭 앞에 이르자 이날도 역시 안개 걷힌 말끔한 하늘아래 지난날 자신이 치성을 마치고 정성껏 쌓았던 돌무더기가 이름 모를 들꽃에 쌓인 채 살며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그는 하늘을 올려다 본 후 땅을 굽어보았다. 그때였다. 유난히도 맑은 가을하늘에 오색구름이 팔공산 전체를 덮더니 그 가운데서 한줄기 영롱한 빛이 뻗히는 게 아닌가. 그것을 본 이성계는 “하늘이 무슨 말을 하랴. 그러나 사계四季는 어김없이 순환하고 만물은 때를 따라 영고성쇄를 반복 하나니”라며 무한한 기쁨을 속으로 안고 한걸음에 도선암에 올랐다. 그러자 난데없이 오색구름이 갈라지면서 더없이 맑은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아! 성수만세! 성수만세! 대명천지 해동 땅에 높고 귀한 성수만세!~”
 
역력히 귓가에 울려오는 이 소리는 그가 젊었던 시절 가냘프게 들었던 바로 그 소리였다. 그 울림은 마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광풍에 흔들려 ‘쨍그렁 쨍그렁’ 하며 울리는 듯 심히 요란하고도 역력하였다.
 
순간 그는 “아! 저 빛! 이른 아침도 아닌데 꼭두새벽에 어둠을 가르는 저 밝은 새벽 빛! 하며 문득 조명早明이라는 두 글자가 떠올리는데 언뜻 산고수려일고려山高水麗日高麗에 장차 새벽빛을 비치리라”는 새로운 다짐이 가슴에 불현 듯 박혀왔다. 이런 연유로 태조 이성계는 등극한 바로 그때에 ‘삼청동三淸洞’ 이라는 세 글자를 내렸는데 지금까지 이 글씨는 어필각에 각자로 모셔져 있다. 동시에 八空山을 聖壽山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이때의 그 자세한 전말이 성수산 상이암 사적기에 적혀 있는데 여기에 그 일단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상이암사적기
 
신라新羅 僧 도선道詵이 고려태조 왕건과 함께 운수雲水(임실지방의 옛 이름)의 팔공산에 이르러 대업을 이루기 위한 기도를 올리고 못에 들어 목욕을 하였는데 때에 부처의 영험을 얻어 기쁜 마음으로 이 못을 환희담이라 하여 돌에 새겼고 암자의 이름도 도선암道詵庵이라 하여 도선이 창건한 것이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태조 고황제高皇帝께서도 기이한 꿈을 꾸고 이 암자에 있는 승僧 무학을 찾아서 해몽하고 그의 인도引道로 이 산에서 기도하고 또 못에서 목욕하였는데 홀연히 이상한 길조를 얻어 삼청동이라는 각자를 하였다. 또 공중에서 성수만세를 세 번이나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 후 태조가 보위에 오르자 팔공산을 성수산이라 하고 도선암을 상이암이라 불렀다. 진실로 상上의 귀에 까지 들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산에는 고려태조高麗太祖와 조선태조朝鮮太祖가 머물렀던 곳인 즉 일초일목一草一木도 차마 벨 수 없으며 하물며 돌 위에 새긴 각자가 일월과 더불어 다투며 휘황하고 또 산 이름과 암자 이름으로 그 사적이 소상히 남아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으니 지금도 두 대왕이 계신 듯 하다. 그러니 어찌 숙연한 공경심이 일어나지 않으리오.
 
 
이성계 천명 게시 받은 마이산 찾아
 
산도 맑고, 물도 맑고, 기도 맑은 성수산 도선암에서 젊은 날에 이미 기도의 영험을 얻었고 황산대첩을 마치고 개선하는 길에는 하늘로부터 분명히 성수만세라는 천명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이성계는 조선개국 이듬해에 이곳에 삼청동이라는 세 글자를 내렸던 것이다. 따라서 뒷사람들은 바른 돌에 어필을 새기고 상이암(도선암)에 어필각을 세워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어필각에 대한 역사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인들에 의한 의도적인 역사의 왜곡과 은폐가 첫 번째 원인일 것이며, 두 번째는 식민사학자들의 몰상식한 소치라는 점 또한 부인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가다듬어 시대를 조금만 올라가 보면 고적 선양에 대한 열정이 곧 자주 독립의 긍지라 여긴 한말에 있어서는 태조대왕의 사직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이 같은 객관적 흔적은 바로 어필각을 감싸고 있는 바위에 새겨진 수많은 명인 달사들의 방명이 이를 잘 증명해 준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제 상이암 골짜기를 살며시 빠져나와 개선 길을 따라가면서 그 역사의 현장을 하나하나 살펴봄으로써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삼청동의 환희담과 상이암, 그리고 자신이 지난 날 열심히 기도를 올렸던 상이암 뒤의 기도터를 둘러본 이성계는 성수만세의 감응을 마음속 깊이 새긴 채 개선 길을 곧장 용출산(마이산)으로 향했다. 용출산湧出山은 그가 소년시절 꿈에 신인으로부터 금척을 받았던 곳, 따라서 그는 그 꿈이 새 왕조창업의 게시임을 굳게 믿어왔고 이제 그 꿈을 실현할 시점이 가까워 왔음을 분명히 느낌에 따라 서둘러 용출산湧出山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이성계의 개선군은 상이암 골짜기를 빠져나와 용출산湧出山이 있는 진안 쪽을 향해 힘찬 행군을 시작했다. 상이암에서 진안으로 가려면 반듯이 넘어야 할 고개가 있다. 이 고개는 임실과 진안을 경계 짓는 곳으로 앞서 소개한 아침재 보다는 훨씬 높은 고개이다. 개선 군이 고개 마루에 다달았을 무렵 이성계는 잠시 행군을 멈추게 한 후 옆에서 동행하는 포은 정몽주에게 “옛말에 山重水復疑無路 라더니 호남에는 평야 뿐 아니라 이같이 첩첩한 산도 있고 첩첩산중을 넘나드는 높은 고개도 있구려. 구름이 항상 터 잡고 있는 이 고개를 넘어 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또 무엇이 있겠소이까” 하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러자 포은 정몽주는 맞장구를 치듯 “그야 유음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이라하였으니 버들이 그늘지고 꽃마저 활짝 핀 그 곳에 한 마을이 있겠지요” 라는 말로 이성계가 건네준 은근한 정을 글귀로 되받았다. 그러나 언감생심 넌지시 건너는 포은의 안색은 심히 당황하는 모습이 역역했고 그러한 태도를 이성계는 놓치지 않았다. 일단 태속 깊숙히 담겨져 있었던 뜻을 은연중 내뱉었던 포은은 뒤늦게 이를 후회 했으나 한번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어색할 수밖에 없었고 더구나 그처럼 어색스러움을 상대방에게 보이고 나니 약간은 자신의 경솔함에 부끄러움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포은의 그러한 계면쩍은 감정을 고개를 한번 끄덕이는 정도로 지나쳐 주었다. 이성계로서는 기세등등하게 자신을 따르는 천군만마가 장사진을 이룬 채 산골을 가득 메워 나아가고 있는데 성수만세의 메아리가 여전히 귓가에 가득하고, 이미 소년시절에 받았던 금척이 역력히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는 한 포은의 말 한마디에 그리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이 그것을 덮게 해준 것이었다.
 
또한 이성계와 정몽주가 행군을 잠시 멈추고 이야기를 나눴던 임실과 진안 사이의 고개를 후에 사람들은 구름이 항상 터 잡고 있는 고개라는 이성계의 말을 본떠 “垈雲峙”라 불렀는데 그 후 수 백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속칭 대운이재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이성계가 대운이 재에서 포은과 이야기를 나눈 후 갈증을 참으며 행군을 시작했을 때 그의 머리에는 불현 듯 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고개가 제 아무리 높더라도 이미 길이 나 있는 바에야 어찌 그 고개를 넘지 못하며 구름이 아무리 앞을 가렸을지라도 나가고자 할 바에야 어찌 나아가지 못할 것인가. 이제 구름을 젖이고 트인 길에 들었으니 앞길은 밝다. 그렇다면 내가 장차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다만 산수간山水間에 흩어져 있는 포은과 같은 훌륭한 인재들을 찾아내 천명天命을 이루는 일이다.
 
이상과 같이 전주일보에 연재된 「역사따라 지명따라 」제하의 황안웅 선생의 글 중에서 팔공산 상이암에 관련된 부분을 발췌하여 정리하였다. 그 중에 잊혀진 역사를 되새기며 잃어버린 지명을 재발견하게 된 것이다.
 
역사란 세월 따라 흐르고 역사의 흐름 따라 새로운 문물과 제도가 만들어지는 가운데 지명도 덧붙여지는 것이 어김없는 역사적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우선 역사를 이끄는 주인공이 있게 마련이고 그 주인공이 이룬 일이 있으며, 마치 땅을 밟고 걸어가면 반듯이 발자국이 생기듯 역사적 사건이 지나가면 의례히 그 역사를 말해주는 그 터에 그에 걸 맞는 이름이 지명으로 남는 법이다. 이곳 상이암에 관련된 역사의 흔적 흔적들은 그 어느 지역보다 많이 남아 전해지고 있으나 아직 그런 역사적 사실들을 조사하고 연구 해 본적도 없다는 사실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 일예로 태조 이성계가 잠시 이곳 도선암에서 성수만세를 세 번이나 외치는 소리를 들었기로 등극 후 팔공산을 성수산으로, 도선암을 상이암으로 부르게 하고 조선개국 이듬해에 삼청동(三淸洞)이라는 세 글자를 내렸다 하며 따라서 뒷사람들은 이 글씨를 바른 돌에 새기고 어필(御筆) 비를 보존하여 오다가 상이암 경내에 어필각을 세워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이 어필을 몇 년 전부터 문화재로 지정하도록 신청을 한 바 있으나 당시 문화재 위원들은 정확한 검증도 없이 어필이 아니라고 부결시켜 버렸다하여 아쉬움으로만 남아있다. 삼청동(三淸洞)이란 글씨가 어필이 아니라면 삼청동 글씨를 새기고 어필각을 세운 주체가 전주이씨 종친들이란 사실과 민중들이 그동안 어필이라고 불러 전해오고 있었다면 당시 조선시대에 조정에서 내버려 두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며 뒤집어서 당시 임금과 관련된 용어를 서민들이 마음대로 사용했을 때는 조정에서 그냥두지 않았던 시대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동안 삼청동 비는 태조 이성계의 친필이라는 사실로 전해오고 있었으니 이번 조사를 통해 황산대첩 진군로(進軍路)와 회군로(回軍路) 등을 통해 상이암사적기 등 많은 역사적 자료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제라도 삼청동 어필은 심도 있게 연구하여 문화재로 지정되도록 추진하여 임실지역의 자존심을 세워야 할 것이다. -상이암 사적지-
 
 
용출湧出 마이산馬耳山을 찾아
 
산도 맑고 물도 맑고 기도도 맑은 성수산 도선암에서 젊은 날에 이미 기도의 영험을 얻었고 황산대첩을 마치고 개선하는 길에는 하늘로부터 분명히 ‘성수만세’라는 천명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이성계는 조선개국 이듬해에 이곳에 삼청동이라는 세 글자를 내렸던 것이다. 따라서 뒤 사람들은 바른 돌에 어필을 새기고 상이암(도선암)어필각을 지어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어필각에 대한 역사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일제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의도적인 역사의 왜곡과 은폐가 첫 번째 원인일 것이며 두 번째는 식민사학자들의 몰상식의 소치라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생각을 가다듬어 시대를 조금만 올라가면 고적선양에 대한 열정이 곧 자주독립의 긍지라 여긴 한말에 있어서는 태조대왕의 사직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이 같은 객관적 흔적은 바로 어필각을 감싸고 있는 바위에 새겨진 수많은 명인달사들의 방명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제 상이암 골짜기를 살며시 빠져나와 개선 길을 따라가면서 그 역사의 현장을 하나하나 살펴봄으로써 확연히 알 수 있다.
 
 
대운치와 어수정 垈雲峙와 御水井
 
삼청동의 환희담과 상이암 그리고 자신이 지난날 열심히 기도를 올렸던 상이암 뒤의 기도터를 들러본 이성계는 ‘성수만세’의 감응을 마음속 깊이 새긴 채 개선 길을 곧장 湧出山(지금의馬耳山)으로 향했다. 용출산은 그가 소년시절 꿈에 신인으로부터 금척을 받았던 곳 따라서 그는 그 꿈이 새 왕조 창업의 게시임을 굳게 믿어왔고 이제 그 꿈을 실현할 시점이 가까워 있음을 분명히 느낌에 따라 서둘러 용출산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이성계의 개선군은 상이암 골짜기를 빠져나와 용출산이 있는 진안 쪽을 향해 힘찬 행군을 시작했다. 상이암에서 진안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고개가 있다. 이 고개는 임실과 진안을 경계 짓는 곳으로 앞서 소개한 아침재 보다는 훨씬 높은 고개다 개선군이 고갯마루에 다 달았을 무렵 이성계는 잠시 행군을 멈추게 한 후 옆에서 동행하는 포은 정몽주에게 “山重水復疑無路(산중수복의무로)옛말에 호남에는 평야뿐이 아니라 이같이 첩첩한 산도 잇고 첩첩산중을 넘나드는 높은 고개도 있구려, 구름이 항상 터 잡고 있는 이 고개를 넘어 길을 따라 가다보면 또 무엇이 있겠소이까.” 하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러자 포은이 맞장구를 치듯 “그야말로 柳暗花明又一村이라 하였으니 버들이 그늘지고 꽃마저 활짝 핀 그곳에 한마을이 있겠지요.” 라는 말로 이성계가 건네준 은근한 정을 글귀로 되받았다. 그러나 언감생심 넌지시 건너는 포은의 안색은 심히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고 그러한 태도를 이성계는 놓치지 않았다. 일단 태 속 깊숙이 당겨져 있었던 뜻을 은연중 내뱉었던 포은이 말을 다시 주어 담을 수 없으니 어색할 수밖에 없었고 더구나 그처럼 어색스러움을 상대방에게 보이고 나니 약간은 자신의 경솔함에 부끄러움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포은의 그러한 계면쩍은 감정을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정도로 지나쳐주었다. 이성계로서는 기세등등하게 자신을 따르는 천군만마가 장사진을 이룬 채 산골을 가득 메워 나가고 있는데 성수만세의 메아리가 여전히 귓가에 가득하고 이미 소년시절에 받았던 금척이 역력히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는 한 포은의 말 한마디에 그리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이 그것을 덮게 해 준 것이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그 순간부터 갑자기 심한 갈증을 느끼기 시작 그러다 방금 다시 시작한 행군을 곧 바로 멈추는 것도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어서 그는 갈증을 참으며 얼마쯤 행군을 계속하다가 용출산 가까운 산 밑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샘물을 찾아 물을 마셨다. 이때에 이성계가 마셨다는 샘물이 이른바 어수정 御水井(진안읍 은천리)이다. 지금도 진안읍 은천리 마을 앞 숲속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유래는 아는 이는 드물고 다만 메워져 가는 웅덩이로 방치되어 잇을 뿐이다. 무상한 세월 탓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이성계와 포은이 행군을 잠시 멈추고 이야기를 나눴던 임실진안 사이의 고개를 뒷사람들은 구름이 항상 더 잡고 있는 고개라는 이성계의 말을 본떠 대운치垈雲峙라 불렀는데 그 후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속칭‘대운이재’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충신 구한 구신리 忠臣 求한 求臣里
 
이성계가 대운재에서 포은과 이야기를 나눈 후 갈증을 참으며 행군을 시작했을 때 그의 머리에는 불현 듯 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고개가 제 아무리 높더라도 이미 길이 나 있는 바에야 어찌 고개를 넘지 못하며 구름이 아무리 앞을 가렸을지라도 나가고자 할 바에 어찌 나가지 못할 것인가. 이제 구름을 젖히고 트인 길에 들었으니 앞길은 밝다 그렇다면 내가 장차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다만 산수간山水間에 흩어져 잇는 저 포은과 같은 훌륭한 인재들을 찾아낸 천명을 이루는 일이다. 神人으로부터 금척을 받은 꿈이 하늘이 나에게 천명을 은근히 보여준 것이라면 하늘로부터 내 귓속에 밝혀준 성수만세의 소리는 나에게 천명을 은근히 알려준 것이다. 그렇다면 인사를 다하고 천명을 기다리기 보다는 이제 나의 꿈과 하늘의 소리를 통해 보여준 천명의 암시와 천명의 게시를 실현시킬 구체적인 노력을 수행해야 할 때에 이른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성계는 순간 고개 밑 첫 마을을 가리키며 넌지시 포은에게 “인걸은 지령이라 했소, 그래 이 같은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충신을 구해 쓰러져가는 나라를 함께 일으켰으면 오죽이나 좋겠소” 라며 말을 건넸다. 이 말에 포은은 안색이 갑자기 변하면서 당황하는 모습으로 한참이나 대답을 못한 채 말을 몰아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충신을 구한다는 말은 임금이 외에는 누구도 입 밖에 내놓을 수 없는 것인데도 이성계의 입에서 그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속셈을 그는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포은은 여기서 어떤 대꾸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 같은 포은의 태도를 본 이성계도 태연 현할 수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포은이야말로 신진학자로 개혁적인 사상을 지닌 진취적이 이물이며 외교적 능력도 뛰어난 보기 드문 인재였기 때문에 무관인 자신에게는 가장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 사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하여 그 후로부터 임실성수를 넘어 진안백운으로 넘어 고개 밑 첫 마을을 오늘까지 구신리求臣里라 불러오고 있으니 이 또한 매우 흥미로운 이름으로 여겨진다.
 
 
天命되새기며 성대한 개선산지
湧出(馬耳)山을 찾아
 
용출산 바로 밑에 있는 샘물로(御水井)로 심한 갈증을 풀어버린 이성계는 이 샘물의 근원이 곧 용출산이라는 것을 깨닫고 장엄하게 솟은 용출산을 다시금 바라보며 용출산 제일봉 아래에서 자신이 젊었을 시절에 정성껏 기도를 올렸던 일과 은빛처럼 맑은 물을 지성껏 하늘에 바쳤던 생각을 펼치게 되었다. 아- 섯다산! 이 산처럼 우뚝 솟은 산이 어디에 또 있으랴 그래서 삼한 이래로 이 산을 섯다산(西多山)이라 불렀던 게지 그렇다면 저처럼 산이 우뚝 솟아 푸른 하늘을 뚫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산은 그저 솟은 것이 아니다. 오직 솟을만한 힘이 있기 때문에 저처럼 항산 푸른 하늘을 뚫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솟을 대로 힘차게 솟은 저 산을 이름 하여 용출산이라 부르고 있지 않은가.
 
아 ! 나무광대원만대다라니(南無廣大園滿大多羅尼)! 이미 삼한 강토 전체가 청정법신비로자나불(淸淨法身毘盧蔗那佛, 대자연불大自然佛) 바에야 이 용출산은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수미산須彌山(베레스트)을 닮은 (안습박갈라安濕縛竭拏의 말귀처럼 생긴 산으로 세계를 얽고 있는 구신중의 하나로) 부처의 최고 가르침인 화엄일승법이 주야로 솟아나는 광대원만대다라니 화엄도량華嚴道場이 아닌가. 그래서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화상도 출가 직후에 이 산 암굴(古金堀)에 들어 수행 끝에 이미 도를 이루어 왕사가 되었고 원효의 스승인 보덕화상의 제자 무상과 김취도 이 산에 古金堀들어 정진 끝에 열반묘리를 얻었던 게 아닌가.
 
 
용출산의 은수샘(湧出山의銀水泉)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행차길이 용출산골 으슥한 곳에 이르자 이성계는 또 포은 정몽주를 향해 “용출산은 삼한 이래로 해동의 명산이라 일러오지요. 이 산중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를 광대봉廣大峰이라 이르고 저편 너머 끝에는 다라니 절이 있소 그리고 또 용출산 두 봉우리 사이를 화엄굴이라 하오, 그러니 광대원만대다라니 화엄도량이 아니겠소, 일찍이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화상도 이 산 암굴에 들어 도를 얻었다. 일러오지요” 하며 마치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이가 따라온 손님에게 안내하듯 자세한 설명을 하였다. 또 설명하는 중에 “용출산 동봉화엄굴 아래에 단 샘이 있소, 그런데 그 샘물이 은빛처럼 맑기로 젊어서 내가 이 산에 들어 기도를 드릴 때에 그 샘 이름을 은수샘銀水泉이라 불렀다오.” 라는 말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러나 포은은 이성계의 자세한 설명에도 아무런 대꾸 없이 그저 묵묵히 갈 길만을 함께 나아갔고 이미 포은의 마음을 알아차린 이성계는 포은의 태도가 어떠든 간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마음을 비운 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서슴없이 털어놓았다. 이처럼 어수정의 물로 갈증을 푼 뒤 용출산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대화가 다시 화엄굴 아래 은수천에 까지 이르자 이성계 휘하의 선두는 하늘만이 빤히 바라 뵈는 제법 평평한 동천洞天에 이르게 되었고 이곳에 이르러 일단 군사를 멈추게 한 뒤에 자신의 옛일을 되새기며 비로소 아지발도를 물리친 개선잔치를 베풀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이성계가 젊었을 때에 큰 꿈을 이루기 위한 기도를 올리면서 사용했던 용출산 동봉아래의 맑은 샘을 두고 은수천銀水泉이라 불렀는데 이 단 샘은 지금 은수사 대 법고 밑에 남아 모처럼 산을 찾는 수많은 관광객의 갈증을 달래주는 이름 모를 샘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막상 은수銀水라는 샘 이름은 ‘은수사’라는 사찰 이름으로만 남아 있으니 다소 아쉬운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마이동천주필대馬耳東天駐㻫臺
 
거대한 암석이 울을 지은 하늘 뵈기 동천에 든 이성계는 휘하장병들에게 일단 장막을 치고 음식을 장만하도록 하도록 권하는 한편 흥겨운 풍악을 울려 모든 군사들에게 잔뜩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돋구어놓았다. 그리고 그 기쁨이 절정에 달한 틈에 자신은 자신의 팔준마 중에 가장 아끼는 상제마霜蹄馬를 타고 동천암벽에 올라 눈앞에 마주한 용출산 두 봉우리를 바라보며 지난날에 자신이 이 산에서 얻었던 꿈을 연상하며 무심코 다음과 같이 혼자 중얼거렸다. “음, 그때에 바로 저 동쪽 봉우리 밑에서 비몽사몽간 꿈을 꾸었지 봉우리에 둘러져 있었던 오색구름이 걷히더니 신인이 나타나 나에게 금척을 건네 보이며 이르시기를 ‘장차 이 금척으로 삼한강토를 척량토록 하라. 경시중 홍방은 청백하기는 하나 늙었고 최삼사 영은 정직하기는 하나 너무나 어리석도다, 그런데 그대는 장차 문무를 겸비하고 덕망과 지식도 훌륭하여 백성의 바램도 크게 이를 것이다. 그러니 부디 이 금척으로 삼한강토를 척량토록 하라’ 하며 분명히 금척을 나에게 건네주었지.” 하고 자문자답하며 시원스럽게 솟은 두 봉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뿔사! 어인일인가. 눈앞에 마주한 용출봉이 갑자기 오색구름으로 덥혔다가 서서히 걷히더니 갑자기 그 속에서 거대한 금척의 다발이 번득 비쳐왔다. 순간 너무나도 휘황찬란한 금빛이 눈을 꼭 찌르듯 비쳐왔기 때문에 이를 본 이성계는 도저히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만에야 겨우 눈을 뜬 이성계는 뇌리를 스치는 어떤 영감에 이끌리어 상제마를 탄 채 조용히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天馬東來勞己窮 천마가 동에서 오다가 힘이 다해
霜蹄未莎蹶送中 상제마 도중에서 지쳐 쓰러졌네
涓人賣骨遺其耳 연인이 뼈만 팔고 두 귀를 남겨
化作雙峰屹半空 두 봉우리 그대로 하늘을 뚫는 듯
 
 
이상과 같이 때에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마치고 개선하는 길에 들러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던 곳은 마이동천의 주필대로 각각 마이동천주필대馬耳東天駐㻫臺라는 각자가 암벽에 남아 있어 옛일의 자취를 잘 전해왔다. 그런데 여기에 1925년 이후 이와 같은 사적에 근거하여 국조이신 단군, 조선조의 태조, 태종, 고종, 등 4위 향족조40위, 한말의병독립투사34위를 모신 대한이산묘가 건립되어 토왜개선討倭凱旋의 사적을 실답게 비춰주고 있으니 매우 다행스런 일이요. 최근에는 주필대 밑 묘정 동편에 위에 적은 태조고황제(이성계)의 詩碑까지 세워져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으니 매우 흐뭇한 일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향토】 이성계 회군로
• 5. 천년(千年) 세월 풍파 견디어 낸 ‘환희담(歡喜潭)’
• 6. 고려(高麗), 조선(朝鮮) 태조(太祖) 머물렀던 역사의 현장
• 7. 조선(朝鮮) 왕조 창업 주도한 역사의 현장 용출산(湧出山)을 찾아
(2024.06.13. 21:57)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로그인 후 구독 가능
구독자수 : 0
내서재
추천 : 0
▣ 다큐먼트 작업
지식지도
알림∙의견
모든댓글보기
▣ 참조 지식지도
▣ 다큐먼트
◈ 소유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