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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이성계 회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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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이성계 회군로
◈ 7. 조선(朝鮮) 왕조 창업 주도한 역사의 현장 용출산(湧出山)을 찾아
天馬가 東에서 오다가 힘이 다하여 그 상제마霜蹄馬가 도중에서 지친 채 이 용출산湧出山에 쓰러져 있구나, 연인이 뼈만 팔고 두 귀를 남겼더니 그 두 귀가 용출해 두 봉우리로 화하여 하늘을 뚫고 있구나. 라는 詩는 이성계가 용출산주필대 큰 바위 위에서 말을 탄 채 읊었던 시로 전해진다.
이성계 회군로 (7)
朝鮮왕조 창업 주도한 역사의 현장 湧出(馬耳)山을 찾아
 
용출산湧出山을 동금산東金山으로
 
 
이성계 꿈에 神人 금척을 받고 천명 내린 것 확신
개국 후 궁중무용으로 제작, 국가 행사 때 공연,
84년 이후 매년 진안 군민의 날에 재연
 
 
天馬가 東에서 오다가 힘이 다하여 그 상제마霜蹄馬가 도중에서 지친 채 이 용출산湧出山에 쓰러져 있구나, 연인이 뼈만 팔고 두 귀를 남겼더니 그 두 귀가 용출해 두 봉우리로 화하여 하늘을 뚫고 있구나. 라는 詩는 이성계가 용출산주필대 큰 바위 위에서 말을 탄 채 읊었던 시로 전해진다. 시를 읊고 난 순간 이성계는 젊은 시절에 꾼 꿈에서 神人으로부터 받았던 금척이 두 봉우리에서 묶음으로 나타나는 것을 다시 한 번 완연히 보면서 그는 천명이 자신에게 내려졌다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그러자 이성계는 당장 그 자리에서 용출산을 동금산東金山이라 명명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金尺과 東金의 뜻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예부터 金은 불변을 상징하며 자尺은 만물을 가늠하는 유일한 도구로 여겨왔다. 따라서 하늘이 새삼스레 金尺을 내렸다는 것은 변하지 않은 새로운 자尺로 새로운 제도를 만들 때 새 왕조를 세우라는 천명의 계시라는 의미다. 여기에 五行을 덧붙여 보면 이성계는 木에 해당된다. 때문에 금척金尺을 받은 이성계가 새 왕조를 일으키는 木에 해당된다. 때문에 금척을 받은 이성계가 새 왕조를 일으키는 대역사를 차질 없이 전개해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극목金克木의 원리에 따라 金을 묶어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옮긴 후 북악산 밑에 세워진 景福宮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남산을 목멱산木覓山이라 고쳐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속설에 따르면 이성계는 이미 조선 개국 이전에 나라 안의 땅 이름 중 金자가 든 것은 모두 바꾸기로 작정하고 우선 금강산을 봉래산이라 바꿔 부르려고 했으나 워낙 빗발치는 여론을 감내치 못해 포기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때 용출산을 동금산으로 고쳐 부르도록 한 것은 서울 南山을 木覓山이라 바꾼 것과 같이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봉래산으로 바꾸지 못한 한을 속금으로 가름하여 삭혀낸 것이라 이를 수 있다. 아무튼 속금산이라는 이름은 조선왕조 창업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이름으로 금척과도 무관한 이름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놀라운 것은 조선개국 이등 해 (1393년) 7월에 삼봉 정도전에 의해 올려 진 궁중정재 제1호 몽금척夢金尺이 속금束金에 얽힌 천명수수설(天命授授說)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조선왕조 오백 년 동안 나라의 경사 때마다 왕을 비롯한 문무백관 앞에서 어김없이 공연되었던 몽금척이 어떤 형식으로 꾸며져 있는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궁중정재宮中呈才 제1호 - 몽금척夢金尺
 
조용한 아침에 오색찬란한 상서로운 구름이 열리는 장면에서부터 춤은 시작된다. 무녀舞女들이 음악에 맞춰 차례로 등장하면 몽금척의 내용이 적힌 족자를 든 사람과 죽간자를 든 두 사람이 나란히 춤을 추면서 조금 앞으로 나와 서고 음악이 그치면 다음과 같은 구호를 합창한다. 정고한 부록의 영이함을 받들어 성덕의 형용을 미화 하도다. 바라건데 너그러이 받아들여서 잔치를 미덥게 하소서,
 
구호가 끝나면 은은한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일정한 형식으로 춤을 추는 무녀들의 배열이 장중하게 전개도다가 금척을 받은 사람과 황개를 든 사람이 함께 나와 서면 음악이 그친다. 이때 금척을 든 사람이 다음과 같은 치어致語를 한다. “금척을 꿈꾼 것은 천명을 받으려는 상서이옵니다. 태조께서 왕 위에 오르시기 전 꿈에 神人이 금척을 받들고 하늘로부터 내려와 말하기를 경시중은 정직 하나 어리석도다, 하시면서 태조에게 이르기를 문무를 겸하고 지덕을 갖춘 그대에게 인심이 돌아가리라 하고는 곧 금척을 주었습니다” 이같은 치어가 끝나면 다시 음악에 맞춰 원을 그리며 한참동안 회무가 이뤄지다가 다시 처음대열의 상태로 돌아가 임금에게 헌수를 드리고 마지막으로 “즐거움이 극치에 이르기 전에 빨리 경계하는 마음을 품어 천명을 길이 보존하시옵소서” 하는 하직 인사를 하는 것으로 모든 정재는 끝을 맺는다.
 
 
최고대동장最高大動章 - 금척장金尺章
 
주로 궁중의녀 40명으로 구성된 이 몽금척은 조선조 오배년 동안 천명에 입각한 속금의 뜻을 일깨우고 항상 “천명을 길이 보존하옵소서” 하는 활로 끝을 맺으면 조선의 무궁한 발전을 기리는 최고의 예술로 기림을 받았다. 그렇다면 다만 이 같은 무용과 이태조 자신만의 속금사과 관계가 있던가.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부왕의 창업을 곁에서 성실하게 도운 제2대 정종도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 산에서 무예를 익혔다. 사실이 택리지에 기록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제3대 태종이 즉의 한지 13년(1413년)이 되던 해에 임실에서 꿩 사냥을 하다는 핑계로 남행하여 친히 속금산 밑에 이른 후 예관을 보내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대한이산묘지>에 기록되어 있는 계룡천도鷄龍遷都의 가부를 속금산신에게 물었다는 내용은 크게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말에 일어난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인해 종래의 공신제도가 폐지되고 훈장제도로 바꿔질 때 고종황제는 금척대훈장을 나라의 최고 훈장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다. 이 외에도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나라 형편은 피폐일로로 치닫게 된데다 외척의 발호는 극에 달해 왕권이 몹시도 흔들리던 순조 때에는 조선조 발상의 근본지인
 
전주 덕진에 금극목을 재 다짐하는 승금정勝金亭을 세워 정자가 준공되던 날 호남 선비들이 구름같이 모여 백일장이 열렸던 일도 속금사과 결코 무관한 일은 이날 것이다. 아무튼 그저 섯으니 섯다산이오. 그 솟은 기운이 밤낮으로 넘쳐나니 용출산이며 금척을 받아 금을 묶고 나라를 세웠으니 속금산 생긴 모양이 흡사 말귀라도 같으니 마이산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속금은 어디가고 다만 마이라는 이름만 남았으니 아무리 역사 따라 지명도 바뀐다지만 모양만 남기고
【향토】 이성계 회군로
• 6. 고려(高麗), 조선(朝鮮) 태조(太祖) 머물렀던 역사의 현장
• 7. 조선(朝鮮) 왕조 창업 주도한 역사의 현장 용출산(湧出山)을 찾아
• 8. 조선왕조(朝鮮王朝) 무궁한 발전 염원(念願) 용출산을 찾아
(2024.06.13.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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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