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王朝 무궁한 발전念願 용출산을 찾아
帝王三代가 찾은 산
용출산이 속금산으로 바뀐 것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금극목金克木의 원리에 따라 조선왕조의 무궁한 발전을 염원하는 도참적 성격에서 연유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다시 “산의 사면四面은 온 돌이 깍은 듯 높고 돛대처럼 우뚝 솟아 철따라 아름다운 경치를 드러낸다. <山之四面 前石( )立然如초四時佳景>는 <태조묘악가太祖廟樂歌>에서도 확인된다.
또 金尺을 받은 사적과 束金의 역사가 얽혀있는 산이 바로 용출산이기 때문에 조선조2대 임금인 정종이 등극이전에 이 산에 들어 무예를 연마 했다는 대목이 택리지에 나타나 있고 이어 3대 太宗이 임실현 들녘의 꿩사냥을 핑계로 남행하였을 때에 이 산 밑에 까지 이르러 예관을 보내 馬耳山神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 34권>에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들, 다시 말하면 조선개국을 전후해 역대제왕이 모두 이 속금산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왕 이하 많은 다라들의 심방이 끊이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익히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며 그 좋은 실례를 점필재, 김종직의 다음과 같은 詩에서 찾을 수 있다.
偶蒙重瞳顧우몽중동고 佳命傳萬祀주명전만사 中原赤有之중원적유지 名實尙相疑명실상상의
우연히 두 번이나 임금님의 행차하심을 입어 아름다운 이름이 만년토록 전해지리
중원 땅에도 또한 이 같은 이름이 있으니 명실이 서로 비슷하도다.
太宗 束金山서 祭올려 鷄龍천도 쐐기 ...馬耳山 命名 金尺大動章, 天命증명... 역사 따라 무수한 별호 붙여져
太宗이 이름 한 馬耳山
태종13년(1413년) 9월에 있었던 왕의 진무 겸 사냥은 임실순행이 주목적이었다는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아무래도 향토사를 무시하는 통례적인 해석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대게 국왕의 의례적인 원지 순행은 농사철이 아닌 12월에 행해졌던 것들이 통례였다.
그러나 조영무 등 많은 측신들이 적극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농사철에 남행을 결행하게 된 뜻은 아무래도 그 목적이 단순히 임실지방에서의 꿩 사냥이었다고는 이해할 수는 없다. 특히 태종은 조선왕조의 창업을 기리는 궁중정재인 몽금척과 수보록의 가치를 겉으로는 비하 시키는 체 하면서도 한편 꿈의 현장인 속금산을 찾아 비로소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냈는데 다만 제사를 올린 그 배경에는 그 당시까지에도 무시 할 수 없는 계룡천도의 여론에 쐐기를 박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말 할 것도 없이 속금에 얽힌 도참적 사실을 내심 신봉한 나머지 국가의 중대사에 대한 결정을 바로 이 산에서 얻어내려고 했던 의도였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같은 추론을 여실히 뒷받침해주는 증거는 태종 자신이 남행하는 길에 명산대첩에 들러 제사를 지낸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 간단히 기록되어 있고 다른 기록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데 성종 대에 이룩된 <동국여지승람>에는 馬耳山을 찾아 제사를 올렸다는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적혀 있다는 점이다.
이와 동시에 태종은 부왕인 태조의 시를 그대로 받들어 湧出山, 束金山을 다시 馬耳山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바로 太宗의 남행 사실이 결코 대수로운 일은 아니라는 점을 익히 이해 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좋은 증거이다. 아무튼 이후로 마이산에는 맣은 시인묵객들의 내방으로 인해 철따라 다른 고운 이름이 붙여지면서 그 아름다움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니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봄에는 온 산하가 푸른데 오직 그 속에 산이 돛대처럼 솟았으니 ‘돛대봉’, 여름에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 수목이 제법 울창하여 마치 용 뿔을 연상케 하니 ‘용각봉’, 가을에는 용각에 단풍이 들어 흡사 쫑긋한 말귀와도 같은 모습으로 비치니 ‘마이봉’, 겨울에는 백설이 만건곤한데 유독 눈을 젖힌 채 붓끝처럼 검게 솟았으니 ‘문필봉’이라 일렀다.
속금산에 탑중중束金山에 塔重重
명인에게는 많은 별호가 따라 붙듯이 명산에는 많은 별명이 내려져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처럼 역사 따라 많은 이름이 붙여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문 것은 오늘의 현실이요, 알만한 이는 더 이상 알려들지 않으니 큰일이다. 섯으니 섯다산이요, 솟는 듯 기운이 넘치니 용출산이요, 금극목의 원리대로 이 산에 금 기운을 몽땅 묶었으니 속금산이며 연인이 뼈만 팔고 두 귀를 남겼으니 마이산이라는 지명은 예사로운 이름이 아니요. 이 같은 이름의 변천이 곧 이 사의 역사다. 그러니 역사와 지명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딴에 ‘속금’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조선왕조 창업에 얽힌 도참설에서 연유된 이름이며 이같이 왕조창업에 관계된 천명설에 대해서는 극히 신성시하였기로 조선왕조 오백년간에는 섣불리 그 지부를 놀란 한다거나 경솔하게 어떤 관련 사실을 공표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망국의 와중에서 도참에 관련된 천명사실은 ‘금척대훈장’으로 은연중에 여실히 나타났고 이미 이백년 전 진안에 살았던 선비 담락당 하립은 속금산 속에 탑들이 중중하다(束金山에 塔重重)는 칠언시를 지었기로 함경도 부춘산으로 귀양 보내졌던 일도 있었다. 고금 천하에 아무 군데에 갔더니 탑들이 많더라는 말을 하였다고 해서 귀양 보내졌다면 누구나 그 귀를 의심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스님의 말씀 따라 왼 종일 신선 찾아 산속을 헤맨 한 시인 전혀 벼슬살이도 하지 않았던 진짜 처사가 많은 탑을 보고 많다고 했는데 이것이 귀양 갈 일이었다면 오직 상식을 뛰어넘는 그 어떤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귀양을 보냈을까?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탑도 탑 나름이지 속금산속의 탑을 중중하다 하였으니 이는 분명코 도참에 관련된 천기를 만천하에 누설한 천기누설죄 바로 필화筆禍였던 셈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마이산속에 있는 많은 탑의 유래는 속금이라는 단어를 제쳐놓고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서의 속금산 속의 탑은 어떤가? 한마디로 어느 한 개인의 노력에 의해 축조된 20세기 초유의 불탑이라는 식으로 둔갑되어 있고 버젓이 지방사적35호로 지정되어 수많은 관광객들의 기림을 받고 있으니 역사에 대한 왜곡치고는 걸작이요, 무지치고는 너무나 심하다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잊혀진 역사 따라 잃어진 지명을 찾자는 우리의 노력이 숨 쉬는 한 지금의 마이산 탑은 오직 속금산속의 탑이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