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회군로 (9) 민족자존의 정기어린 명산 智異山
智異山과 木子得國說
과거 전통사회에 있어서 한 왕조의 창업에 관한 도참은 아마 절대 필요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용출산(마이산)이나 팔공산(성수산)만이 도참에 관련된 명산이었던가.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조선조 창업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나머지 도참으로 등장되고 있는 곳으로 서울 목멱산(남산)이나 개성의 송악산을 비롯하여 전국 각처에 많이 흩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남녘의 최대 명산인 지리산을 빼놓을 수 없다. 즉 이미 젊었을 시절에 왕기를 받았기로 성수만세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곳은 성수산, 천상의 시인으로부터 금척을 하사받아 새로운 문물을 짜도록 허락받고 금극목의 원리에 따라 금 기운을 묶어버린 곳은 속금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 지리산은 도참상 조선왕조 발상에 어떤 몫을 하였던 남녘의 명산이라고 불러오고 있는가. 한마디로 말해 木子得國說이 흘러나온 곳이 곧 지리산 석굴이었다 하니 그 내용인즉 ‘지리산 석굴의 석벽에서 이승 한 사람이 돼지를 탄 이씨가 다시 삼한의 땅을 경계 지을 것이다. 이라는 글이 적힌 참서를 얻어 이성계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木子는 틀림없이 이성계를 말한 것이고 돼지는 곧 돼지띠를 띤 사람을 말하니 돼지를 탄 李氏는 분명코 乙亥生 李成桂일뿐이라는 것이며 이를 도울 자는 오직 조준趙浚과 배극렴裵克廉 그리고 三峯鄭道傳이라는 암시도 얻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말들은 조선왕조의 창업과 매우 관련이 깊은 도참설로 오늘날 그 진위여부를 따지는 일은 별 의미가 없다. 다만 운봉의 황산대첩으로 이성계가 비로소 중앙정계에 크나큰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고 대첩을 이룬 10년 후 고려를 뒤엎는 위화도회군도 가능했을 것이었기로 조선왕조창업의 도참에 지리산이 등장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라 이해하는 편이 옳다. 그래서 조선조 창업과 더불어 몽금척과 같이 등장된 궁중정재의 또 하나가 한 수보록(受寶錄)이니 이에 대한 형식과 내용을 잠깐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궁중정재 제2호-수보록 宮中呈才 第2號-受寶籙
악관이 음악을 연주하고 행사를 알리는 박수를 치면 수보록의 내용이 적힌 족자를 든 사람과 죽간자를 든 두 사람이 나란히 줄을 지어 춤추며 조금 앞으로 나아서고 구호를 읊는다.
하늘이 내린 부록의 상서를 받아/ 대오의 영묘함과 장원함을 열다/ 온 백성은 모두 기뻐하며/ 곧 축하를 올리는도다/ 박을 치면 일정한 형식에 의해 춤을 추다가 다시 다음과 같은 치어致語를 한다. ‘보록을 받은 것은 이서를 얻은 것입니다. 태조께서 왕위에 오르시기 전에 어떤 사람이 지리산 석벽 속에서 이서를 얻어다가 드린 후 임진년(1392년)에 그 말이 징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수보록을 지었습니다. 박을 치면 다시 일정한 형식에 따라 6대 18인이 춤추다가 음악에 따라 다음과 같은 수록사를 부른다.
저 높다란 산이여/ 석벽이 하늘과 가즈런한데/ 그 석벽을 깨트려서 / 이상한 글을 얻었도다./ 굳세고 용감한 목자가/ 때를 타고 일어나거니/ 그를 도울 자는 누구인가./ 덕망을 갖춘 조준과 / 배극렴 같은 군자가/ 금성으로부터 올 것이요/ 정도전이 도와 이루리로다./ 새로 도읍을 정하여/ 왕위 팔백년을 전하리/ 우리가 우러러 받았으니/ 오직 이 보록이로다.
이에 박을 치면 음악에 맞춰 원을 그리며 춤을 추다가 음악에 맞춰 다시6대 18인으로 돌아가 다음과 같은 구호를 읊는 것을 마지막으로 춤을 접는다.
구곡을 연주하여 이뤄짐을 고하고/ 천세를 빌어 영원함 기하도다/ 다행히 태평한 날을 만나서/ 감히 즐거운 마을을 펴도다/ 이 빛난 자리를 하직하니/ 곧 편안히 쉬시길 바라도다.
의사방과 창의동맹길성지 義士坊과 倡義同盟吉城地
이상과 같이 용출산에서 금척을 꿈꾸어 천명을 얻었고 성수산에서 성수만세의 소리를 똑똑히 들어 자신에게 내려진 천명을 확인하였고 다시 용출산을 찾아 금을 묶어 새 왕조 창업의 의지를 굳혔으며 나아가 또 지리산 석벽에서 木子得國의 참서를 얻었다는 도참설은 무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호남이야말로 조선왕조발상의 근본이며 허약한 고려정권을 뒤엎고 역성혁명을 일으키게 된 역사적 계기는 곧 운봉에서의 황산대첩에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때문에 유한반만년 이레 단 한 번도 싸워보지 못하고 얼토당토 않는 계약을 앞세워 잠식해오는 일제의 무모한 침략에 대항하여 일어난 호남창의동맹지의 최초 결성지가 다름 아닌 속금산이었다는 점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옥구에서 해남까지 호남53향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의병봉기를 마치 멸치잡이 저인망이 바다 밑을 휩쓸 듯 일본 헌병대가 호남대토벌작전을 감행하여 무자비한 살 상극을 벌렸을 때에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우리의 의로운 선비들이 쫒기고 쫒긴 나머지 한 둘 모여들어 와신상담의 한을 익혔던 곳이 바로 지리산 석벽 밑 의사방義士坊이었다는 사실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성계에 의해 창업된 조선왕조는 비록 대륙 밑에 붙은 자은 나라로 위화도회군이라는 일대 사건을 계기로 이룩된 나라지만 사대교리의 입장에서 항상 민족자존의 뿌리는 ‘황산대첩’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일제에 맞선 의병동맹도 속금의 뜻이 어린 곳을 찾아 모였고 저들을 피해 국권회복의 뜻을 익힐 자리도 찾았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