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태동 알리는 잔치 터
이성계장군 황산대첩 승리로 벼랑 끝 고려사작 구원 시조 이한공서부터 목조까지.... 전이씨 옛터 오목대에서 일가 모여 ‘대풍가’ 불러 새 왕조 탄생 암시
전주오목대 全州梧木臺
속금산束金山에서 곧바로 금산을 거쳐 개경으로 향하여 반드시 우왕에게 황산대첩의 전말을 소상히 보고해야 할 책임이 있었던 당시 도원수 이성계는 방향을 바꿔 자시의 고향인 전주에 들러 李氏종친들을 오목대에 불러놓고 거창한 개선자치를 벌리게 된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것인가? 물론 자신의 전공戰功을 우왕에게 보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천명에의 확신이 깊었기로 우왕을 찾아 그 동안의 전말을 알리는 공식적 의례보다는 오히려 장차 자신을 도와줄 인재를 구하는 것이 급하며 나아가 그 같은 인재는 일단 관향에서 자연스럽게 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으리라. 게다가 전주는 장군수와 호운석에 얽힌 목조의 옛 사직(5대조 이안사의 옛집)이 있었으니 완산지에 전해오는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목조가 어렸을 때에 아이들과 발산 기슭 아래에서 폭우를 만나게 되자 바위 아래에 피신하고 있었는데 큰 호랑이가 앞에서 으르렁 거리는지라 목조가 어린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호랑이는 사람을 물지 아니하고 다만 한 사람만 해칠 것이니 옷을 벗어 던지어 시험해 보자”고 했다. 이에 어린 아이들은 말하기를 “그대는 나이가 제일 많으니 그대 먼저 옷을 벗어 던져 시험해 볼 수밖에 없다” 했다. 그랬더니 호랑이가 덥석 받아 무는지라 여러 아이들이 목조를 끌어 내렸더니 호랑이는 달아나버리고 갑자기 벼랑이 무너지는 바람에 여러 아이들은 그대로 깔려 죽고 오직 목조만이 살아남았다. 또 발산 남쪽 자만동에는 장군수라는 나무가 있었다. 목조가 어릴 적에 아이들과 노닌 곳이다. 그는 여러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 큰 나무 아래에서 진법을 익힌 곳이니 때에 이 나무를 장군수라 했다. 비록 나무는 없어졌으나 그 터는 그대로 있다.
대풍가와 망경대 大風歌와 望景臺
슬치(임실과 완주의 경계)에서 발원한 전주천이 승암산을 돌아 흐르는 바로 그 언저리에 호운석에 얽힌 설화가 감돌아 있고 그 위로 오동나무 숲이 빽빽했던 발산의 작은 봉우리에는 오목대梧木臺가 있다. 이 근지는 조선발상의 두 과정을 알리는 오목대와 이목대가 있으며 각각 고종 광무4년(1900년)에 썼다는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와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비각이 있다. 망국의 와중에서 고종 자신이 일본을 이겨야 할 까닭과 조선발상의 터를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기로 새삼스럽게 시대를 건너뛰어 세운 역사의 표적물이다. 즉 오목대는 황산대첩 이후 개선자치를 벌렸던 곳이요. 또 하나는 시조 이한공 이래 목조 이안사에 이르기까지 전주이씨의 옛 터가 바로 여기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기념비다. 전해오는 바에 의해 따르면 이성계는 이 오목대에 일가들을 모아 놓고 개선잔치를 하는데 한참 술자리가 질펀하게 벌어지고 모든 이들의 흥이 오를 대로 오른 자치의 절정에 그는 한고조가 천하통일의 이상을 노래로 불렀던 대풍가大豊歌를 자신만만하게 불렀다 하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풍가大豊歌
큰 바람이 일어남이여! 구름이 날리며 오르도다. 위력이 천하에 떨침이여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어찌 용맹스런 자를 얻어 천지사방을 지킬꼬.
참으로 자신만만한 일이기도 하였다. 거침없이 취흥을 벌여 한고조 유방의 대풍가를 부른 뜻은 틀림없이 자신을 은근히 한고조로 비하고 장차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자 하는 뜻으로 노래로 좌중에게 비친 것이다. 한편 이 노래를 듣다 못한 포은 정몽주는 때에 말을 달려 전주천을 거쳐 남고산 망경대에 올라 멀리 개경을 바라보며 비분강개한 마음을 다음과 같은 한 수의 시로 읊었는데 이 시는 지금까지도 당시 석벽에 새겨져 전해오고 있다.
천길 바위머리 돌길 비껴/ 올라서니 이 맘 잡을 길 없네/ 청산은 부여국을 다짐했건만/ 황엽만 백제성에 흩날리네/ 가을바람에 내 맘은 괴롭고/ 백년호기는 이제 다 틀렸네/ 하늘가에 해는 저물고/ 뜬 구름이 합쳐지는 이때 /고개 돌려 속절없이 바라만 볼 뿐이네.
황산전우년작 完山戰于年祚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롭기 그지없었던 고려의 사직을 황산의 한 싸움에서 구한 이성계는 전주 오목대에 이르러 재삼 조선개국을 결심하였고 이에 뜻을 달리한 포은 정몽주는 망경대에 올라 뜬 구름 합쳐지는 이때를 오직 고개 돌려 속절없이 바라 볼 뿐이라 하였다. 흔히 고려 충절을 말 할 때에는 만수산 두문동을 든다. 그러나 선죽교에 혈흔이 비쳐지기 이전에 이미 전주망경대가 있었고 태종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에 의연히 ‘혼백가魂魄歌’로 화답 할 수 있었던 포은의 기개는 벌써 망경시(望景詩)에 의연히 어리어 있음도 알아야 한다. 한 대에 좌중에서 젊은 이성계가 ‘석자 칼머리에 사직을 평안케 하리라.(三尺劍頭安社?) 하니 모든 이들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오직 노장 최영만이 분연히 일어나 ’한 가닥 발 체 끝으로 건곤을 인정하리라 末定乾坤?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어찌 두 별들의 글자랑에 불과하리.
아무래도 이성계는 석자 칼머리로 사직을 편안하게 하리라는 안사(5대조의 힘)에 이 전주 오목대에서 얻었기 때문에 아니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