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회군로 (11) 전북은 조선개국의 발상지
황산대첩에 얽힌 대소지명 40여 곳 경기전 등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현장 유적지 문화관광지로 개발 서둘러야
황산대첩 길을 마치며
역사는 세월 따라 흐르고 역사의 흐름 따라 새로운 문물과 제도가 만들어지는 가운데 지명도 덧붙여지는 것이 어김없는 역사적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우선 역사를 이끄는 주인공이 있게 마련이고 그 주이공이 이룬 일이 있으며 마치 땅을 밟고 걸어가면 반드시 발자국이 생기듯 역사적 사건이 지나가면 의례히 그 역사를 말해주는 그 터에 그에 걸 맞는 이름이 지명으로 남는 법이다. 그동안 황산대첩과 관련된 지명을 찾아 소개한 것만도 꽤나 많다. 좁은 길을 넓히고 지나간 ‘새벼리’(진안정천)를 비롯하여 구사를 훈련시켰던 습진번덕(장수)과 새벽 닭 울음을 신호로 출정 길에 나설 수 있었던 용계리(장수), 그리고 밤중에 나팔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는 ‘구라치’(남원보절) 등 황산을 향해 나섰던 진군 길은 지금도 역력하지만 역사의 흐름 따라 까마득히 잊혀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뿐인가. 길 할미의 안내로 호랑이가 물어갈 위기에서도 정신을 차려 오직 인화단결로 수많은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여산신(女山神)의 설화가 여원치(남원이백)라는 이름으로 고스란히 남아있고 달빛과 바람을 끌어 분기탱천의 기세로 일당백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는 대첩의 격전지에 각각 인월리(남원인월)와 인풍리(남원아영)가 있다. 적을 무찌르기 위해 물 샐 틈 없이 적재적소에 군사를 배치했었다는 중군리(남원산내)와 교만하기 그지없고 포악무도하기 싸기 없던 아지발도를 치고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는 피바위(남원인월)가 자랑스럽게 남아 있다. 그러나 막상 대첩을 기념하는 옛 빗돌은 일제의 폭파로 파손된 채 한 때에 우리의 슬펐던 역사가 있었음을 여실히 말해주고 적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었다는 이른바 ’동무덤과 서무덤‘으 저들에 의해 터무니없는 한자 이름으로 바꿔져 버리고 말았다.
승리의 기쁨을 안고 개선하던 그 길에는 어떤 이름이 자국으로 남아 있는가? 배불숭유를 결심하게 된 동기로 알려진 승방 천여간의 만복사는 옛터로 남아 있으나 다만 동네 이름은 왕정리로 남아 있고 무학을 만났던 팔공산을 찾다가 안개 속에 한 나절을 헤매었다는 당시의 설화는 왕방리(임실성수)라는 지명 속에 녹혀져 있다. 이처럼 황산대첩에 얽힌 대소 지명들은 대략 40여 곳에 흩어져 있다.
천명 받아 세운 조선
하늘은 우리 인간에게 길을 열어주며 선악을 밝혀주는 가장 큰 거울이다. 그렇기로 흔히 하늘을 믿어 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뤄주는 것은 오직 하늘이라 하였다. 인간만사 크고 작은 일들이 다 그렇거늘 하물며 한나라를 여는 막중한 일이 어찌 천명이 아니랴.
허공에서 터진 ‘성수만세’소리가 귓속에 역력히 꽂혔던 것도 천명이요. 꿈에 금척을 받았던 일도 불변하는 새 자로 새 나라를 새롭게 열라는 천명의 계시였으니 이런 천명을 얻고 어찌 목성의 번영을 위해 속금하지 않으랴. 농본주의를 표방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에 있어서의 호남이야말로 계란으로 치면 노른자위만큼이나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풍요로운 호남을 다만 곡창호남으로 여길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 대접을 적당히 해야 할 필요가 잇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려 이후 차령 이남의 땅으로 인재등용에 많은 제한을 두었으나 조선개국과 더불어 약간 그런 제한은 풀어지는 듯 했더니 끝내 소망대로 이뤄지지는 않았고 비보裨補가 다만 속금으로 바꾸어져 버린 감이 다분하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황산의 정인지의 싯귀 처럼 조선개국의 상서는 아지발도를 꼼짝 못하도록 가두어 놓은 지리산의 덕택이요. 백성들의 신망도 두텁고 문무도 겸비한 이성계에게 금척을 내려준 속금산의 도움일 뿐이다. 이런 까닭에 조선이 개국 된 그 이듬해에 삼봉정도전은 몽금척과 수보록을 각각 궁중정재1호와 수보록을 2호로 바쳐 올렸으니 이미 이때부터 오백년 국운이 다하고 어둠을 지나 민주사회 지방자치시대가 되면 궁중에서만 볼 수 있었던 정재(呈才)를 너희가 계발하여 문화상품화 시키라고 물려준 셈이다. 용케도 저주에는 도립국악원이 있으니 조선이 망한 백 여 년이 지난 이 시점에 이르러 어찌 하필 경기전, 오목대, 망경대, 이목대, 풍남문 등만을 손꼽아 전주야말로 호남의 제일로 53향을 호령하였던 전라감영이라 이를 것인가.
숱한 내우외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형문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도 물론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문화재는 그 유형을 유형답게 만든 무형의 뿌리가 있는 법이다.
국난극복의 표본
누구나 21c를 앞두고 무한경쟁 시대니 문화경쟁 시대니 국제화 시대니 지방자치 시대니 하면서 제각기 신통한 점을 친다. 그렇지만 막상 이런 시대를 맞아 반드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화상품을 개발 발전시킬 생각에 이르러서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일본이 어떻고 미국이 어떻고 하면서 외국의 예는 마치 외국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인 냥 낱낱이 꿰고 이들을 닮은 것만이 선진하는 길인 양 떠들어 대는 자가 많다. 그렇다면 반드시 그들을 그대로 답습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따라도 좋은 부분이 있고 따라서는 안 될 부분도 있고 또 저들에게는 도저히 없는 우리의 보물도 있는 법이다. 아무리 부강한 나라라 할지라도 역사의 축적이 짧은 나라는 그 나름대로 흔적이 있고 문화적 특질의 본류가 우리였던 민족자존마저 저버린 채 무조건 남을 따르는 일은 애당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일들은 무엇인가. 적어도 조선개국의 상서를 열게 된 바탕에는 왜적을 이겼던 자랑스런 역사가 있음을 높이 받들어 항상 민족자존의 긍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점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이 뻔하다. 태조이성계의 진영을 모신 경기전이 연중행사만 치루는 적막강산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현장으로 생명력 있게 이어 가려면 많은 탈바꿈이 필요한데 그 하나의 좋은 아이디어로 ‘몽금척’이나 수보록 같은 궁중정재의 정기공연장으로 활용하는 것도 좋다. 그리하여 경기전, 오목대, 망경대, 이목대, 조경단, 등과 하나의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이미지로 옛 도시 저주를 가꾸는 것도 바람직하다. 게다가 년 간 수십만이 찾는 마이산과 연계하여 개발하여도 좋다. 그저 산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름의 역사가 숨어 있고 그 역사의 숨결 속에 실은 우리의 버젓한 얼굴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역사 따라 생긴 지명만 해도 그렇다. 몸 어딘가에 남다른 점이 있기에 점순이요, 삼월에 낳았으니 그 이름이 다만 삼월이라는 식으로 임금이 물을 마셨으니 어수정이요. 안개에 속아 길을 잘못 들었으니 왕방리요. 이런 역사 따라 생긴 자랑스런 지명이 있는 곳에 안내판이라도 세워야 할 일 아니겠는가?
이성계 회군로 대운재에서 정몽주대화
정몽주 1337 ~ 1392(공양왕). 고려 말 학자이며 정치가다.
황산대첩에서 크게 승리를 하고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상이암에 들러 대운재를 넘어 가면서 이성계는 정몽주에게 말을 건냈다. 옛말에 산중수복의무라 하더니 이같이 첩첩한 산도 있고 첩첩 산중을 넘나드는 높은 고개도 있구려, 구름이 항상 터 잡고 있는 이 고개를 넘어 길을 따라가 보면 또 무엇이 있겠소이까. 하니
정몽주는 그야 “柳暗花明又一村유암화명우일촌이지요, 버들이 그늘지고 꽃마저 활짝 핀 그곳에 한 마을이 있겠지요”. 했다. 이성계는 고개가 제 아무리 높더라도 이미 나 있는 길이거늘 어찌 그 고개를 넘지 못하며 구름이 아무리 앞을 가렸을지라도 나가고자 할 바에야 어찌 나아가지 못할 것인가. 이제 구름을 젖히고 트인 길에 들었으니 앞길이 밝다. 그렇다면 장차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다만 산천에 흩어져 있는 포은과 같은 훌륭한 인재들을 찾아내 천명을 이루는 것이다. 했다. 그때부터 정몽주는 이성계의 걸림돌이었다. 진안 마이산을 들러 전주 오목대에서 종친들을 불러 크게 잔치를 하고 대권에 꿈을 밝힌다.
오목대
오목대는 태조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친 뒤 돌아가는 길에 조상들의 고향인 전주에 와서 오목대에서 잔치를 베풀면서 호기 있게 “세상을 평정 하고 싶다” 라는 시를 읇었다. 이성계는 한나라를 창업한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를 읊으며 자신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종친들 앞에서 은근히 밝힌다.
이성계가 오목대에서 읊은 시 대풍가
풍운속을 일어섰나 위세 천하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오니 모두 수그려 우러러 맞네.
정몽주가 개성 쪽을 보면서 절을 하고 이제는 고려의 국운이 기울었구나 하면서 한숨을 쉬던 곳이 바로 오목대이다. 대풍가를 통해 이성계는 흉중에 묻어두었던 천하제패의 꿈을 은연중 드러냈다. 이에 정몽주가 격분한 마음에 한달음에 말을 달려 남고산성 만경대에 올라 북쪽 개경을 바라보며 그 심정을 노래로 읊었으니 지금도 만경대에 그 시가 새겨져 있다.
천길 된 바윗 머리 돌길로 돌고 돌아 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시름이어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하던 부여국은 누른 잎이 휘휘 날려 백제성에 쌓였네 9월 바람은 높아 나그네 시름 깊고 백년의 호탕한 기상 서생은 그르쳤네 하늘가 해는 기울고 뜬구름 마주치는데 열없이 고개 돌려 옥경만 바라보네
이목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가 살았던 곳이다. 그러한 내용이 용비어천가 제3장에도 나타나 있다. 정도전, 조준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 신진 사대부와 3은(포은, 목은, 야은) 정몽주, 이색, 길재 등의 온건 신진사대부가 있었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 사대부들은 이성계와 연대해서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려고 했고 온건 사대부들은 고려라는 바탕위에서 개혁을 시행하면 된다 라고 주장했다. 위화도 회군 2차 정벌 이후 최영 일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잡는다. 이방원(후일 태종)이 잔칫날 정몽주를 불러 하여가를 부르며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게 되고 여기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하면서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고려를 지키겠다는 마음을 들어 낸 것이다. 이에 이방원은 부하인 조영규를 시켜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철퇴로 쳐 죽인다.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 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일이 있으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