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고찰 궁인창 ∥ 생활문화아카데미
임진왜란 해전지 답사를 통해 과거 역사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방파제나 항구가 있어 쉽게 배를 정박하지만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고, 갯벌이 발달한 지형에서는 배를 안전하게 정박하고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무척 힘들었다. 해전지를 돌아보면서 해양수산부 국립해양측위정보원에서 제공하는 해로드 앱를 통해 해전 지역의 수심과 배의 접안 가능성 및 안전도 여부를 계속 확인했다. 우리나라 해역은 여름 한 철만 바다가 평안하고 1년 내내 파도가 거칠어 배들이 항해하기 정말 어렵다. 매년 1년에 태풍이 7~8개가 다가오고, 긴 장마와 폭염이 계속되어 지휘관은 배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킬만한 항구를 항상 찾고 병사들의 안전을 고려했다.
해전지 항해 답사를 마치고 돌아와 조선, 일본, 명이 관련된 국제전쟁을 연구한 선행 연구자1)들의 방대한 자료와 『난중일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등 많은 책을 읽었다.2) 일본 근대사를 전공한 기타지만 만지 교수는 201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 침략관계 사료집』 3권을 저술해 히데요시와 전쟁을 재조명했다.3) 필자는 임진왜란을 명, 조선, 일본의 개별 국가의 입장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적 넓은 시각에서 국제전쟁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선조 24년(1591) 3월에 일본에 갔던 통신사 황윤길(黃允吉)과 부사 김성일이 돌아와 황윤길은 일본의 실정과 형세를 말하면서 “필히 병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마도주 소오요시도시도 왜란이 발생할 조짐이 있다고 미리 알려왔다. 선조는 비변사를 가동하며 영의정 이산해, 유성룡과 전쟁대비책을 강구하고, 무신에게 불차채용(不次採用) 제도를 시행했다. 정유재란 때 선조는 거제도가 사방이 훤하게 뚫려있어 조선 수군의 군선을 안전하게 보전하기가 힘든데, 왜 조선 수군의 핵심인 한산도 본영을 거제도로 전진 배치하려고 했는지 하는 의문이 들어 조사하였다. 조선 조정은 고니시의 부하 요시라의 간계와 음모로 잘못된 정보를 받아들여 계속 오판을 하였다. 선조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에게 조선 수군이 출정하여 사전에 일본 해군의 조선 상륙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선조와 비변사는 일본 군선의 규모와 일본 군사력을 과소평가하고 조선 수군의 어려움과 고충을 전혀 몰랐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 수군이 일본 군선을 맞아 승리하게 된 것은 남해의 물길을 잘 아는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덕분이었다. 광양현감이 향도(嚮導)하는 대로 이순신은 조선 수군을 지휘하여 옥포, 합포, 당항포, 율포해전에서 모두 승리했다. 어영담은 전염병에 걸린 지 한 달 만에 1594년 4월 9일 한산도 통제영에서 세상을 떠났다. 매년 되풀이되는 기근과 전염병은 조선 수군을 항상 괴롭혔다. 이순신은 전쟁 기간 내내 일본 해군과 대치했지만, 심각한 전염병과 식량 부족에 어려움을 겪었다. 월동하며 수군 병력을 유지하는 것도 벅찬 일이었다. 전쟁 기간 중의 이순신의 막하에서 활동했던 장수들과 의병장, 수군의승을 함께 조사했다.4)
일본은 국네에 내란이 생길 때마다 왜구들이 창궐하여 고려 연안을 침탈하여 고려사회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5) 고려말 정지 장군은 “왜구와 해적이 육지에 오르기 전에, 바다에서 물리쳐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최초로 해군의 창설을 주장했다. 정지 장군은 “수군 병사를 농민이 아닌 바닷가 사람들 가운데서 모두 뽑아야 한다, 바다와 배를 잘 아는 사람만이 수군이 되기에 적합하다.”라고 말했다.6) 고려말에 이성계, 최영 장군 등이 왜구를 격퇴했다. 조선 초 중종 5년(1510)에는 전쟁에 버금가는 삼포왜변이 발생하여 14일 만에 진압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 을묘왜변도 임진왜란 발발과 깊은 연관성이 있어 글에 포함했다. 일본과 명의 4년 동안의 강화회담 과정을 살펴보고, 일본이 조선을 2차 침공한 정유재란의 근본 원인을 재조명하며, 후대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려고 한다.
1) 김성칠, 『조선역사』, 1946년에 학술적 역사용어로 ‘임진왜란’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북한에서는 ‘임진 조국전쟁’, 일본에서는 ‘가라이리(唐入り)’, ‘朝鮮陣’, ‘高麗陣’, ‘征韓’, ‘朝鮮征伐’, ‘朝鮮役’, ‘분로쿠게이초노에키(文祿慶長の役)’, 중국은 ‘萬曆의 役‘,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항왜원조(抗倭援朝) 등 서로 다른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2) 박재광, 「임진왜란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2009. 3) 北島萬次, 『豊臣秀吉朝鮮侵略関係史料集成』 3권, 平凡社, 2017. 4) 제장명, 「충무공 이순신의 幕下 인물 연구」, 석사논문, 2003. 이순신의 막하 인물로 李鳳壽, 金世浩, 신호, 황정록, 김득광, 김완, 배대성, 송여종 등 수군 장수 110명이 있고, 의병은 150명에 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