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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정유재란 고찰
◈ Ⅱ. 임진왜란 전후
조선 명종 10년(1555) 5월 11일 일본 오도(五島)에 근거를 둔 명나라 왕직과 왜구 6,000명이 70여 척의 배를 타고 영암의 달량포(達梁浦)에 상륙한 후 영암, 강진의 마도진, 장흥 회령포, 고흥, 진도의 남도포와 금갑포, 완도의 가리포, 전라병영을 1달 보름 동안 약탈하며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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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고찰
궁인창 ∥ 생활문화아카데미
 
Ⅱ. 임진왜란 전후
 
 

1. 달량포해전과 조선 봉수 제도

 
 

1-1. 달량포해전

 
조선 명종 10년(1555) 5월 11일 일본 오도(五島)에 근거를 둔 명나라 왕직과 왜구 6,000명이 70여 척의 배를 타고 영암의 달량포(達梁浦)에 상륙한 후 영암, 강진의 마도진, 장흥 회령포, 고흥, 진도의 남도포와 금갑포, 완도의 가리포, 전라병영을 1달 보름 동안 약탈하며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이때 전라병마절도사 원적(元績), 장흥부사 한온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은 포로가 되었다. 조정은 왜변 소식을 접하고는 급히 이광식에게 병력을 주어 남도로 내려가게 하여 진도, 해남 등의 해안으로 들어오는 일본 해적들과 교전을 벌였고, 나주를 거쳐 북상하던 해적들은 이흠례에 의해 격퇴되었다. 신진학자들은 을묘왜변을 임진왜란의 전조로 보기도 한다. 육지에서 노략질을 한 왜구들은 6월 21일에 제주 화북포구 해상에 왜구 1,000명이 40여 척의 배를 타고 나타나 정박하였다가 6월 27일에 상륙을 시도했다. 이때 제주 목사 김수문이 군사 70명을 이끌고 나가 왜구를 물리쳤다.7) 제주인은 이 사건을 ‘을묘왜변 제주대첩’이라고 부른다. 제주는 고려 충숙왕 때부터 조선 명종 때까지 250년간 43차례 왜구 침입을 받았다.
 
 
 

1-2. 손죽도 이대원장군

 
임진왜란 발발 5년 전인 1587년에 일본 군선 18척이 녹도 근처에 침범하자, 녹도보장 이대원(李大源, 1566~1587)은 보고할 여유가 없어 그냥 나가 왜적을 물리치고 적장을 잡아 수사에게 갔다. 좌수사 심암은 공을 자기에게 돌리라고 했는데, 이대원이 거절했다. 2월 17일 일본 오도의 수군이 다시 손죽도를 침범하자, 좌수사는 이대원에게 병사 100명을 이끌고 출전하게 하였다. 이대원은 좌수사의 지원을 믿고 배에 올라 바다로 나가 손죽도 해상에서 싸우다 포로로 잡혀 죽었다. 좌수사는 이대원이 전몰할 때 이를 육지에서 관망하며 지원하지 않았다. 일본 군선들은 고려 말부터 배를 크게 만들어 조선 수군의 배가 70명 승선하는 데 비해 한 척에 140명씩 올라탔다. 조정에서는 많은 수군 병사가 죽은 이유가 수상해 심암을 불러다 심문하니 지원병을 보내지 않아 병사들이 죽은 것이다. 이대원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으로 손죽도 충열사, 여수시 국동어항단지 영당, 고흥 쌍충사, 경기도 확충사 4곳에 있다. 임진왜란의 신호탄인 을묘왜변과 명나라 상인 왕직은 깊은 연관이 있다.8)
 
 
 

1-3. 정언신의 부장

 
정언신은 함경도 관찰사로 북쪽 변방을 방비하다 병조판서가 되었다. 일본 해군의 조선 침탈과 전쟁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을 감지한 선조는 무신을 중용하려고 출신 성분에 구애하지 않는 불차채용(不次採用)을 주장했다. 이는 지금까지 관례를 뛰어넘어 능력이 있는 무신들에게 벼슬을 주는 제도다. 선조 22년(1589) 1월 비변사에서 무인을 불차채용 한다고 하여 우의정 이산해와 병조판서 정언신이 이순신을 추천했다.9) 이순신은 정여립 사건으로 옥의 갇힌 정언신(鄭彦信)을 찾아가 위로했다. 정언신은 나이 40세에 명종 21년(1566)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영이 되고, 선조 4년에는 호조좌랑으로 춘추관이 되어 『명종실록』 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 뒤 전라도도사, 장령, 동부승지를 거쳐 가선대부에 올라 함경도병마절도사로 변방의 가난한 백성들을 잘 보살폈다, 특히 녹둔도(鹿屯島)에 둔전을 설치하여 군량미를 비축하였다. 이후 대사헌이 되고 부제학이 되었다. 선조 16년(1582)에 여진족 니탕개가 쳐들어오자, 우참찬으로 함경도도순찰사가 되었다. 정언신 휘하에는 이순신, 신립, 김시민, 이억기 등 쟁쟁한 장수들이 있어 여진족을 물리쳤다. 정언신이 이순신을 추천하였지만, 발탁되지 않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조정에 요청하여 낙향해 있는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 및 조방장(助防將, 종 4품)으로 삼았다. 이광은 1583년 함경도에서 함경도도사(都事)로 근무할 때 이순신의 군사적 재능을 눈여겨보아 이순신을 잘 알았다. 이순신은 11월 임금의 호위부대 선전관이 되고, 12월에 정읍현감이 되었다. 1590년 7월에 평안도 고사리진 병마첨철사로 임명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가지 못했다. 다음 해 2월에 진도군수로 발령받았으나, 바로 가리포 수군첨절제사로 전보되었고 대간의 반대로 가지 못했다. 임진왜란 발발 10개월 전 1591년 7월 비변사에서 국방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참석자들은 왜적이 수전에는 능하지만, 육지 전투에서는 민첩하지 못하다고 모든 군사가 육지 방어에 주력하자고 주장했다. 신립 장군은 수군 폐지론를 주장했다. 이순신은 해양 방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적극적인 수군 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4. 조선의 봉수체계

 
조선시대 통신체계는 외적의 침입을 신속하게 중앙에 알리기 위해 약속된 신호 전달 체계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알렸다. 조선의 봉수는 성과 함께 중요한 관방(關防) 유적으로 취급해야 하지만, 그동안 관리가 소홀하여 많은 봉수가 사라졌다. 국가유산청은 조선시대 수군의 해안 경계 봉수 유적 16곳을 2023년 11월 22일 사적으로 지정했다. 여수 돌산도에서 시작하여 서울 목멱산 노선인 ‘제5로 직봉상’에 있는 61개소의 봉수 유적 중에서 역사적, 학술 가치가 매우 높고 상태가 양호한 곳을 골라 선정했다. 국가사적으로 선정된 곳은 여수 돌산도 봉수, 고흥 마북산, 고흥 장기산, 장흥 전일산, 해남 좌곡산, 해남 달마산, 진도 첨찰산, 무안 고림산, 영광 고도도, 부안 점방산, 논산 황화대, 논산 노성산, 천안 대학산, 평택 괴태곶, 강화 망산 봉수 유적이다. 이 지역은 바닷길을 감시하는 탁월한 위치에 있다. 문헌에는 조선 후기에 5개의 직봉, 23개의 간봉 노선이 운영되고, 전국에 622개의 봉수가 있다고 기록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군선의 침입을 최초로 발견한 봉수는 가덕도 연대봉(459m) 봉수이다, 이순신 해전지 답사 대원들은 안골포해전지와 웅포해전지를 항해하고 가덕도 대항항으로 가려고 했으나 항해 금지 구역이라 부산항신항 서방파제를 통과하며 가덕도가 조선 수군의 활동 중심지로 해상방어에 기장 중요한 위상을 가진 곳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수군의 활약상을 논의했다.10) 『난중일기』 1592년 2월 4일 일기를 보면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동헌에 나가서 업무를 본 다음에 여수 전라좌수영 뒷산인 종고산 북봉 연대를 점검하는 글이 있다. 이후 좌수사는 순시 경로를 봉수가 있는 백야곶 봉수, 장기산 봉수, 마북산 봉수, 돌산도 봉수 지역을 주로 순시했다. 2월 19일에는 배를 타고 여도로 바로 가지 않고, 백야곶 봉수가 있는 백야곶을 들렸다 여도로 갔다. 2월 24일에 사도로 가는데, 걸어서 마복산 봉수가 있는 곳까지 갔다가 배를 탔다.
 
 
 

1-5. 감감술래

 
통제사 이순신은 전투에 지친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부녀자를 동원하여 마한시대부터 내려오는 민속놀이 감감술래를 하게 했다.11) 감감은 순수 우리말로 ‘감고 둥글게 원을 돈다.’라는 뜻이다. 감감술래는 경음화현상으로 강강술래가 되었다. 옛사람들은 밝은 달이 뜨면 모여서 원을 그리며 빙빙 돌고 뛰며 춤추는 도월(跳月) 놀이를 하였다. 88 서울올림픽 폐회식 때에 강강술래를 선보인 것은 세계인이 공감하는 민속놀이로 흥겹게 어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통제사는 병사들을 위로하려고 세시풍속 놀이를 활용했다. 옛날부터 전통놀이를 통해 승전을 기원하고, 항해와 장졸 등의 안전을 기원했다. 일본군에게 군사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이용했다. 통제사는 해전을 떠나기 전에는 조선 수군의 운명을 들여다보기 위해 점을 쳤다.12)
 
 
 

2. 의병과 수군의승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여수 본영과 진에는 잘 조련된 전라좌수영 수군이 있어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일본군을 방어하고 무찔렀다. 수군은 사기가 높아 옥포, 합포, 당항포, 율포, 노량, 한산도, 사천해전에서 일본의 군선을 크게 무찔렀다. 해전에는 전남 지방 각처의 수령과 만호가 함께 출정했고, 양민들의 지원이 이어졌다. 낙안군수 신호, 흥양현감 배흥립, 광양현감 어영담, 보성군수 김득광, 녹도만호 정운, 방답진첨사 이순신, 사도첨사 김완, 여도권관 김인영 등이 모두 해전에 나섰다. 그리고 일본군을 조선 땅에서 격퇴하고자 하는 수많은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났다.13)
 
1592년 7월 말 경상도 북부 봉화 지역에서 문신 유종개가 이끄는 삼백 명의 의병부대는 일본군 제4군을 3일간 저지했다.14) 1593년(선조 26) 7월 이순신은 여수에 통제사영을 설치하였다. 이순신은 여수가 지리상 해전을 벌이는 데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본영은 그대로 남겨둔 채 한산도로 본진만 옮긴다. 한산도는 서해로 진출하려는 일본 군선의 배들을 감시하기에 좋은 곳이며 조선의 판옥선을 감추어 놓기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가졌다. 무신 정철은 정린, 정춘, 정대수와 함께 많은 재산을 내놓고 의병을 모집했다. 창원 정씨 사람들은 전라좌수영 이순신의 휘하로 들어가 진주 제석당 산성에 주둔하며 일본군을 무찔렀다.15)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1592년 8월에 수영 관내 여러 고을에 격문을 띄어 한 달 만에 순천, 흥양, 광양 등지에서 400여 명의 승군을 조직했다.16) 자운대사는 좌수사에게 일본군의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을 물리칠 거북선 건조를 건의했다.17) 좌수사가 승낙하자 자운은 흥국사 등 인근 절에 비축한 절을 지으려고 모아둔 목재를 모두 운반해 오고, 인근 산과 섬에서 벌목을 하였다. 이순신은 여수 선소에서 500명 의승수군과 함께 거북선 본영귀선(本營龜船)을 건조했다.18) 이순신은 수군의승들의 탁월한 해상 전투력에 고무되어 의승군을 별도로 운영하였다.19) 오경후는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20)
 
조선왕조 초기부터 불교 승려 승려들은 산성 축조와 방비, 종이 생산, 잡역, 산릉(山陵) 공사, 도토리 채취, 석재 운송, 전염병 환자 치료 구제 및 매몰 작업에 동원되었다. 승군 동원은 임진왜란 당시부터 이루어졌고 강화되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승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완화되어 탄압의 정도가 조금 완화가 되었지만, 변한 것이 전혀 없었다.
 
또한 정병삼은 임진왜란 당시 호남의 승군 활동에 대해 다음의 견해를 내놓았다.
 
뇌묵처영(雷黙處英), 중관해안(中觀海眼), 제월경헌(霽月敬軒), 기암법견(奇巖法堅), 소요태능(逍遙太能) 등의 승군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21)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관직 및 명단을 비롯하여 의승들의 주요 활동은 아래와 같다.
 
 
등급 - 관직 및 승명(僧名)
1등
동지(同知) 유정(惟政), 승장(僧將) 영규(靈圭), 삼행(三行)
2등
상호군(上護軍) 설헌(雪軒), 호군(護軍) 영오(靈悟), 부호군(副護軍) 처영(處英), 사과(司果) 희식(希式), 사과(司果) 처묵(處默), 의병장(義兵將) 홍정(弘靖), 해명(海明), 육정(六精), 혜근(惠根), 종인(宗印), 승보(勝寶), 도암(道庵), 한석(閑石), 사의(思義), 법관(法寬), 태원(太元), 옥준(玉俊), 덕응(德應), 의원(義元), 희인(希印), 호월(浩月), 호철(浩哲), 묘혜(妙惠)
3등
부호군(副護軍) 사묵(思默), 사과(司果) 법근(法近), 사과(司果) 보훈(寶訓), 사용(司勇) 태헌(太軒), 도의(道義)
표1. 선무원종공신의 승려 명단, 선조 38년(1605)
 
 
김대인은 승려로 순천 별량 출신이다. 충무공의 막하에서 큰 전과를 올리고 부장으로 승진하여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이후에는 의병을 모집하여 예성산에서 웅거하면서 부근 일대를 수호하고 왜적을 무찔렀다. 명나라 장수 이여매(李如梅)22)가 김대인의 전공을 선조에게 진언하여 1600년(선조 33) 당상관에 올라 검미포, 법성포, 다경포, 목포, 어란포, 군산포, 남도포, 금갑도 등 8개 수군 만호진을 담당하는 임치진첨절제사로 임명되었다. 의승장 성휘(性輝)는 우돌격장으로 군량 보급을 담당하고 광양을 방어했다. 「분송의승파수요해(分送義僧把守要害)」라는 장계에 의하면 의승들의 활약은 관군보다 월등하여 영호남 관문인 구례의 석주관과 광양의 섬진강, 두치, 석주, 팔양재 등 요해지에 배치되고 돌격대에 편성됐다.23) 여엄대사는 승려 1,500명을 지휘하며 평안도 직할대장을 하였다. 의승장 삼혜(三慧)는 시호별도장으로 순천을 지켜내며 전선 수리, 군량 보급에 뛰어났다.24) 의승장 의능(義能)은 흥양에서 유격별도장으로 좌수영의 전선 수리, 군량 보급을 담당했다. 좌돌격장 신해(信海)는 구례를 방어했다. 지원(智元)은 양병용격장으로 팔양재(남원)을 방어했다.25) 의승장 수인은 유격별도장이었다. 이순신은 노를 젓는 수군이 모자라 바다로 향할 때마다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지켜본 흥국사 의승장이 의승수군을 동원해 통제사를 지원해 많은 승려가 거북선의 노를 저었다.26) 여수 흥국사 ‘의승수군유물전시관’에는 의승수군 관련 자료가 많다. 의승들은 정철총통 제작에 필요한 철을 모아오기 위하여 각 마을로 돌아다니며 고철, 식기류 등을 수집하였다. 통제사 이순신은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조총을 가지고 수군에게 맞는 우수한 조총을 개발하려고 애썼다. 정사준은 순천 출신으로 선조 17년(1584)에 무과 별시에 급제하여 통제사의 온갖 일을 도맡았다. 정사준은 정철총통 만드는 방법을 터득하고는 대장장이, 낙안 수군 이필종, 순천 사노비 안성, 김해 절 노비 동지, 거제 절 노비 언복과 함께 정철을 두드려 일본군이 사용하는 조총을 1593년 9월 13일 만들었다.27) 통제사는 수군 각 진영에서 조총을 만들게 하고, 조총 1개를 전라도관찰사 권율에게 보냈다. 선조에게 5개를 진상하며 장계 봉진화포장(封進火砲狀)에 그 공을 대장장이에게 돌리며 이름을 남겨 포상을 청했다. 김삼영 교수는 최소 1만 명 이상의 의승이 순국했다고 분석했다. 황인규 교수는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스러져간 의승을 발굴하는 작업은 종교적인 사안이 아니라 역사적인 문제라고 강조했다.28)
 
 
 

3. 흥양군 발포만과 거북선

 
1914년 4월 1일에 흥양군 일원과 완도군의 득량도를 비롯하여 인근 면을 흡수하여 고흥군이 되었다. 현재 고흥군에는 230개의 섬이 있고 외나로도에 우주센터가 있다. 발포(鉢浦)는 이순신 장군이 1580년 충청병영 해미군관으로 근무하다 37세 때 수군 발포진 만호가 되어 18개월간 근무하며 바다를 처음 접한 곳이다. 발포항 앞에는 오동도가 있어 파도를 막아준다. 발포라는 이름은 항구가 승려들이 식기로 사용하는 발우와 흡사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발포만의 뒤쪽에 있는 발포 만호성은 높이가 4m, 둘레가 560m로 도제산 남쪽에 위치하며 현재 동·서·남문의 터, 동헌, 객사, 무기고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발포 만호성 성벽은 옹형에 가까운 사다리꼴 형태로, 전라좌수영 산하의 오관(五官: 順天, 樂安, 寶城, 光陽, 興陽)과 오포(五浦: 蛇渡, 呂島, 鹿島, 鉢浦, 防踏) 중 수군만호가 다스리던 수군진성(水軍鎭城)으로서 성종 21년(1490)에 축성되었다. 고흥 발포는 이순신이 바다를 이해하게 된 중요한 포구이다. 발포는 임진왜란 때 거북선이 정박했던 수군 기지이다. 굴강은 발포 만호성의 남동쪽 해안에 병선을 정박시킨 시설로 동서 길이 40m, 폭 23m, 입구 폭 11m이다. 고지도를 보면 발포진 굴강에 병선 3척이 정박해 있고, 북측 언덕에 이를 관리하는 선창 건물 1동이 있었다. 학자들은 고흥 도화면 덕흥리 지역이 방조제로 막혔지만, 옛날에는 봉산이 있고 배를 건조하는 선소로 판옥선을 만들었던 곳으로 추정한다.
 
이순신은 여수 선소에서 거북선을 건조하고, 여천 돌산(突山) 방답선소에서 거북선을 건조해 이 배를 방답귀선이라 하였다. 쌍봉(雙鳳)선소에서 만든 배를 순천귀선이라 명명했다.29) 이순신은 군관 나대용에게 거북선에 포를 탑재하도록 지시하여 나대용은 거북선에 포 12문을 설치했다. 이순신은 조정에서 지원해 준 것이 없어도 봉영의 군민이 똘똘 뭉쳐 거뜬하게 거북선 3척을 마련하고, 판옥선 29척을 건조했다.30)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거북선 진수는 선조 25년(1592) 음력 3월 27일로 기록되어 있다. 4월 12일 일기에 거북선에서 지자(地字)포, 현자(玄字)포를 실전용으로 시사(試射)하였다고 기록했다. 거북선이 완성된 것은 일본 해군의 침략 하루 전이었다. 해전에 출전한 거북선은 본영귀선(本營龜船), 방답귀선(防踏龜船), 순천귀선(順天龜船) 3척이다. 2차 해전인 당포해전 때 거북선 한 척이 출동했고, 한산도 해전 때는 두 척이 출전했다. 선장은 군관 이기남(李奇南)과 급제 이언량(李彦良)이다. 다음 해에는 이언량, 박이량, 김축, 조의도, 이여념이 거북선의 돌격장이 되었다.
 
흥양 출신의 정걸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각종 총통을 제작하고, 이순신의 군사 참모 조방장으로 참전했다. 발포진전시관에서 박상훈 향토사학자가 엮은 『발포향토사』는 정말 소중한 자료였다. 책에 무신 송덕일은 정유재란 때 진도군수로 있을 때 거북선을 중수하였고, 흥양현감이었던 최희량의 『임란첩보서목』31)에는 흥양에서 판옥선 등 전선과 천자총통, 승자총통 등 화약 무기류를 직접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순신은 해전에서 화기 승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으로 일본 군선을 물리쳤다.32) 전라좌수영은 여수 진남관에 본진이 있지만, 예하 수군진의 절반이 흥양 지역에 있었다. 최희량은 명도, 첨산, 순천 해룡면에서 일본 군선의 침입을 막고 승첩을 거두었다. 흥양 출신 무관은 진무성, 송희립, 사도군관 김붕만, 수군절도사 신여량 등이다.
 
 
 

4. 척계광 『기효신서』와 원앙진

 
명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 1528~1588)은 산둥성 엔타이 등주위(登州衛) 출신으로 푸젠성과 광둥성 연안에서 활개 치던 왜구와 1555년부터 1567년까지 10여 년 동안 80여 차례 전투하여 모두 토벌 평정하였다. 장군은 농부 광부 4,000여 명의 의용군을 조련해 왜구 토벌의 주력군으로 삼고 조총과 검을 가진 왜구들을 제압할 수 있는 원앙진을 개발하여 적극적으로 토벌에 나섰다. 원앙진은 총 12명으로 구성되어 전투 중 대장이 전사하면 분대원 전원을 모조리 처형했다. 병사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죽기 살기로 전투했다. 척계광은 중국 연안 지형을 감안해 새로운 전법을 개발하고 젊고 활달한 병사로 맹훈련하여 긴 총과 일본도를 가지고 설치는 왜구들을 완전히 제압했다. 장군은 이때 경험을 토대로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저술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건너온 명나라 장수들은 조선 장수에게 기효신서에 나오는 병법을 알려주어 조선의 군사들은 일본 육군 병사들에게 절대로 물러나지 않았다.33)
 
 

 
5) 이영, 『왜구, 고려로 번진 일본의 내란』, 보고사, 2020.
6) 송정현, 「정지장군 연구」, 『호남문화연구 제25집, 1997.
7) 『명종실록』 19권, 명종 10년 7월 6일 무술 4번째 기사
8) 왕직은 1540년부터 서유학(徐惟學), 섭종만(葉宗滿)과 협력하여 광둥에서 큰 배를 건조하여 유황, 명주, 목면을 싣고 일본, 섬라(暹羅, Siam)에 왕래하며 부를 축적했다. 그리고 일본 오도(五島)에 거점을 마련하고 多郞, 次郞, 四助四郞 등 왜인과 협력하여 큰 배를 건조했다. 왕직은 1542년 히젠국 센코쿠 다이묘인 마쓰라 다카노부(松浦隆信, 1529~1599) 초청으로 규슈 북단 시라도(平戶島)에 해상무역 근거지를 마련했다. 1543년에는 왕직의 배가 폭풍으로 일본 규슈 남쪽에 있는 다네가시마에 표착했다. 명조가 해금 정책을 강화하자 포르투갈 상인들은 푸젠성 오서항과 월항에서 왕직과 거래했다.
9) 『선조실록』 23권, 선조 22년 1월 21일 기사
10) 제장명, 「임진왜란 시기 가덕도의 위상과 조선 수군의 활동」, 『항도부산』 제42호, 2021.
11) 진수, 『삼국지 위지동이전(三國志 魏志東夷傳) 』, 마한조(馬韓條)에 “5월에 씨를 다 뿌리고 귀신을 제(祭)하는데, 남녀가 떼를 지어 한데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신다. 밤낮을 쉬지 않고 수십 명이 함께 춤을 추는데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며 가락에 맞춰 손발을 맞추며 몸을 낮췄다 높였다 하면서 땅을 밟는다. 이와같이 탁무(鐸舞)와 같은 춤을 10월 농사를 끝낸 후에 다시 춘다.”
12) 박종평, 『이순신, 꿈속을 걸어 나오다』, 이매진, 2010.
13) 2012년 임진왜란 7주갑(420년)을 맞이하여 사단법인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는 지역 의병장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임진란 연구총서』 4권을 2014년 발간했다.
14) 노영구, 「임진왜란 초기 봉화 小川 전투의 전개와 전쟁사적 의미」, 『영남학 제62호』, 2017.
15) 정철은 선조 26년(1593) 진주 제석당산성에서 일본군을 무찔러 이순신의 추천으로 초계군수가 제수되었다. 동년 9월 부산포해전에 참전했다가 총상을 입어 동생 정린, 조카 정언신과 함께 순절하였다.
16) 양은용, 「全羅左水營의 義僧水軍에 관한 硏究」 , 『全南文化財』 3, 1991.
17) 자운윤눌(慈雲潤訥)대선사는 화엄사 승려로 연기조사가 타고 온 연(鳶)의 모습을 한 거북선 그림을 통제사에게 그림으로 보여주고 거북선 제작에 앞장섰다. 자운대사의 부도는 화엄사 부도전에 있다.
18) 디지털 「한국불교문화포털 디지털사지」,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19) 디지털 「호남학산책」, 한국학호남진흥원. 2022.
20) 오경후, 「朝鮮後期 僧役의 類型과 弊端」. 『국사관논총』 제107호, 2005.
21) 정병삼, 『조선시대의 호남불교 연구의 성과와 전망』. 『불교학보』 제59집, 2011.
22) 이여매는 요동총병으로 당시 참장(參將)으로 참전했다. 이여송의 친동생으로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우고 형과 명에 돌아갔다가 정유재란 때 부총병으로 다시 참전하여 울산 전투에서 선봉을 섰다. 그의 선조는 조선의 이산군(理山郡) 출신으로 두만강 강변에 살다가 동령위(東令衛)로 옮겨 살았다. 이여매의 손자 이성룡은 조선의 장수 장만에게 몸을 의탁하여 조선에 들어와 강화도에서 살았다.
23) 양은용, 「壬辰倭亂과 湖南의 佛敎義僧軍」 , 『韓國宗敎』 19, 1994.
24) 의승장 삼혜의 속명은 윤눌(潤訥), 법호는 원정(圓正), 사호(賜號)가 자운(慈雲)이다. 실록에 3건의 기록이 있는데 “전라좌수영 산하 의승수군 팔도도총섭 승대장이었던 慈雲三惠”였다. 『이충무공전서』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 휘하에 시호별도장으로 順天寺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義僧水軍이었다.
25) 『이충무공전서』 권3, 分送義僧把守要害狀.
26) 문신 박동량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 거북선 3척이 등장한다. 이 책은 임진왜란 전후를 연구하는 중요한 기초자료이다.
27) 정사준이 만든 조총 사정거리는 110m로 활의 거리보다 2배였다.
28) 황인규, 「서산대사의 승군활동과 조선후기 추념사업」, 『불교 사상과 문화』 1호, 2009.
29) 김정진, 『거북선, 신화에서 역사로』, 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30) 『亂中日記』 癸巳年 6월 22일에 의하면 전선을 만들기 위하여 동원된 목수는 모두 214명이었다. 지역별로 보면 본영 72명, 방답 35명, 사도 25명, 녹도 15명, 발포 12명, 여도 15명, 순천 10명, 낙안 5명, 흥양 10명, 보성 10명이다.
31) 국가유산청 보물 제660호로 국립나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나주목 초동리(현재 다시면 가흥리)에서 태어난 최희량(1560~1651)은 선조 19년(1586) 27살에 무과에 급제했다. 본관은 수성(遂城), 자가 경명(景命) 호가 일옹(逸翁), 와룡(臥龍)이며 시호가 무숙(武肅)이다. 최희량은 통제사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순절하자, 관직을 버리고 나주로 돌아와 50년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32) 유은선, 「임진왜란시기 조선군의 화기 연구」, 석사 논문, 2007.
33) 이조희, 「임진왜란 시기 紀效新書의 전래와 軍事上의 변화」, 『한국학연구』 제63집, 2021
【역사】 정유재란 고찰
• Ⅰ. 머리말
• Ⅱ. 임진왜란 전후
• Ⅲ. 정유재란
(2024.08.23. 20:56)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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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