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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정유재란 고찰
◈ Ⅲ. 정유재란
태합(太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 130년 전쟁을 마감하며 통일 과정에서 쌓인 다이묘와 일반 무사들의 불만을 해외로 돌렸다. 히데요시는 가정 2년(1523)에 영파에서 일본 호소카와 가문과 오우치 가운이 서로 다투다 감함선에 방화하여 명의 관헌까지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진 영파의 난(寧波之亂) 이후 감합무역이 단절된 닝보 지역에 발판을 마련하고 싶었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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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고찰
궁인창 ∥ 생활문화아카데미
 
Ⅲ. 정유재란
 
태합(太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 130년 전쟁을 마감하며 통일 과정에서 쌓인 다이묘와 일반 무사들의 불만을 해외로 돌렸다. 히데요시는 가정 2년(1523)에 영파에서 일본 호소카와 가문과 오우치 가운이 서로 다투다 감함선에 방화하여 명의 관헌까지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진 영파의 난(寧波之亂) 이후 감합무역이 단절된 닝보 지역에 발판을 마련하고 싶었다. 히데요시는 전국을 평정하고 난 후 해적단속령을 내려 일체 해적 행위를 금지했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 무역을 뒷받침하려고 상인을 보호하면서, 1587년에 국내 통일에 방해가 되는 기독교 세력을 차단하려고 선교사추방령을 내렸다. 히데요시는 통일 과정에서 전국 토지조사 검지(檢知)를 시행하였다.34) 이를 통해 임진왜란 참전을 준비하면서 다이묘별로 인원을 할당했다. 직접 작성한 작전명령서에 일본군 총수를 284,840명으로 기록했다. 이후 대마도주의 부대가 참전하여 병력은 289,840명으로 산출되었다.35) 이현창 경제학자는 메디슨의 세계 경제 역사통계와 국내 연구를 통해 이 당시 일본 인구는 약 1,800만~2500만 명 정도였고, 조선은 약 650만~750만 명, 명나라는 약 1억 6,000만 명으로 추정하였다. 선조 25년(1592) 11월에 류성룡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 시무차(時務箚)를 보면 조선의 군사력이 정병 47,820명, 보인 97,800명으로 14만 5천 명 수준임을 알 수 있다.36)
 
일본 해군의 규모는 구키의 부대 1,500명,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2,000명,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1,500명, 가토의 750명, 구루시마 형제의 700명, 칸노의 250명, 구와야마 시게가츠의 1,000명, 호리우찌의 850명, 스기와카 덴사부로의 650명 등 9,200명으로 이들은 500여 척의 전함에 일본 육군 장수 28명과 병력 136,900명을 싣고 2주 후인 4월 27일에 부산포에 모두 상륙시켰다. 일본 해군은 나고야와 부산포를 오가며 군수물자를 수송했다. 히데요시의 양자 우키타 히데이에는 20살 나이에 일본 제8군 사령관으로 조선에 와서 행주대첩에서 패했지만, 히데요시는 히데이에를 조선 통치자로 삼으려 했다. 히데이요는 태합의 사망 후에 이에야스와의 전투에 져서 태평양 하치조마치에 보내져 55년 동안 갇혀 살다가 83세에 죽었다. 전쟁 초기에 장수 사야가를 비롯한 많은 항왜인이 발생했다.37)
 
 
 

1. 명· 일 강화회담

 
명나라의 병부상서 석성은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을 물리칠 방안을 공모했다. 심유경은 “일본의 허실을 먼저 정탐하여 대책을 세우자.”라는 의견을 제출해 석성이 심유경을 발탁해 선조 25년(1592) 7월에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조선에 보내 전쟁과 강화회담을 병행했다. 유성룡은 전쟁 책임으로 좌의정에서 물러나 명군을 맞는 일을 하였다. 서애는 10월경에 명군이 지니는 길목에 5만의 병력이 50여 일 동안 운영할 수 있는 쌀, 좁쌀, 콩 3만 섬을 준비했다. 유성룡은 평양성 전투를 할 때 김순량, 서한룡 등 간첩 40명을 미리 찾아내어 정보 유출을 막았다. 조선 평양성 전투에 참전한 명군은 절반이 기병인데 평양성전투를 끝나고 1593년 1월 말경에 마역(馬疫)이 돌아 12,000여 필이 병사했다. 말들이 죽은 원인은 평소 들판에서 먹던 마초 대신 조선에서 제공한 콩을 먹고, 장거리 이동으로 피곤한 상태에서 풍토병이 돌아 죽은 것으로 명 장수는 추측했다. 말이 없는 기병은 전투력이 반감되었다.
 
심유경은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강화회담을 진행하였다. 고니시는 감유경과의 회담에서 “명의 황녀를 일본에 후비로 보낼 것, 무역을 재개할 것,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조선 왕자 및 대신 한 두 명을 인질로 삼게 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에 심유경은 조선에서 완전 철수와 조선 왕자 소환 및 히데요시의 공식 사죄 등을 요구했다. 조선에서 강화회담 내용을 병부상서로부터 들은 명 신종(明神宗)은 일본의 제안을 한 번에 거절했다. 그리고 경략 송응창에게 상대를 모두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라(相机剿除 以绝后患)는 지령을 내렸다.38)
 
송응창은 처음에 부산과 웅천 지역이 일본 영토라고 문서를 오인해 조선 남부에 일본군의 주둔을 묵인했다. 일본군은 평양 등에서 후퇴해 조선 남부로 내려갔다. 조선 조정은 송웅창에게 웅천이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항변했다. 명의 사절인 사용재(謝用梓), 서일관(徐一貫)이 일본 규슈로 건너가서 태합 히데요시와의 직접 협상을 했다. 명 사절은 일본의 사절 조공을 영파(寧波) 경유의 코스로 안내했다. 심유경이 왕경에 들어간 후, 일본 측이 포로가 된 조선의 왕자와 신하를 돌려주고 명은 일본 측에 「小将」을 인질로 낼 것을 요구했다. 가토 기요마사가 2만 량의 은을 왕자 석방의 몸값으로서 징수했다. 강화회담 의제 내용이 자꾸 변하면서 명의 사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외교대표인 난젠지 주지 구로마타 레잔(玄圃霊三)과 정식 담판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 모아진 오제 호안(小瀬甫庵, 1564~1640)의 『태합기(太閣記)』에 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5월 24일에 두 명의 명나라 사절과 회견하고 외교 승려 현소(玄蘇)에게 그들과 비공식 필담을 하도록 지시했다. 필담은 그림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되고 점차 명과 일본의 평화조건에 언급했다. 현소가 필담으로 일본의 조선 출병에 대해 “조선이 일본을 속였다,”고 설명했다. 조선은 일본의 ‘중국과 관계 수교’의 의사를 중국에 전한다고 승낙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약속을 어겼다. 일본의 조선 출병은 명을 침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현소는 “명과 인척 관계를 맺고 싶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청을 강조하고, 명과 ‘속국의 조약’을 맵고 싶다는 일본 측 의사를 전했다. 그리고 타타르의 구제에 조력하고, 몸을 가루로 되도록 대명황제에게 공헌하고 싶다.”라고 하였다. 명의 사절은 처음에 일본의 「贵国欲通中国」를 통상 요청이라고 이해했지만, 담판이 진행됨에 따라 현소가 이야기한 ‘화친’은 인척 관계를 맺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일본이 명의 사위국이 되는 것을 꿈꿨다. 동아시아의 조공 시스템에 있어서, 명이 타국과 인척 관계를 이은 전례가 없었으므로, 국제적 지위가 크게 향상되고 명의 다른 속국을 상회한 지위를 얻게 된다고 생각했다. 심유경은 여러 차례 명 조정과 황제를 속였다. 심유경은 “도요데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왕으로 책봉할 것과 명에 대한 조공을 허락해 달라.”라고 거짓으로 보고했다. 명 조정은 심유경이 일본에 망명할 우려가 있어 체포해서 처형하고, 심유경을 추천한 병부상서 석성을 옥에 가두었다. 석성은 옥에서 병사했다.39) 강화회담 말기에는 영토 등 거론되었던 조건이 모두 사라지고, 히데요시는 조선 왕자와 신하가 일본에 체류하는 것 하나만 요구했다. 조선은 일본에 속국이 되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라 히데요시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지 않았다. 한명기 교수는 “임진왜란의 강화과정에서 조선은 명·일 양국에게 휘둘렸다. 과거 전철(前轍)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적 교훈이다.”라고 말했다.40)
 
 
 

2. 일본군 2차 조선 출정

 
4년간 끌어오던 명과 일본의 화의 교섭이 선조 30년(1597) 1월에 결렬되자 히데요시는 곧바로 2차 조선 침공을 구상하고 다이묘에게 군사를 조선에 보내라고 명했다. 조선은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기간에 전력을 강화하려고 했지만,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크게 돌아 군선 건조 및 전력 전술의 개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조선 조정은 1596년 11월 6일 황신의 비밀 서계가 도착하여 일본군의 재침 사실이 알려지자 해로 차단과 청야전술(淸野戰術)41) 2개를 수립했다. 청야전술은 적이 침공했을 때 적군이 사용할 만한 식량과 군수물자를 모조리 없애 상대방을 지치게 하는 전술로 일명 견벽청야(堅壁淸野)라고 부른다. 이것은 군사 작전으로 방어군이 자발적으로 자기가 비축한 군수물자를 없애는 전술이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쳐들어 왔을 때 을지문덕이 이 전술을 실행하여 효과를 보았다. 손자병법에는 “적에게서 강탈한 식량은 아군 식량의 20배의 값어치를 한다.”라고 적혀 있다. 오히려 1597년 2월에 이순신은 일본군의 간계와 조선 조정과 비변사, 대간의 모함으로 의금부에 투옥되고 삼도수군통제사가 원균으로 바뀌는 일까지 벌어졌다.
 
 
 

3. 원균의 칠전량 해전(음력 1597.7.15.~7.16)

 
원균은 선조 24년(1591)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대간이 거제현령 시절에 무능함을 이유로 탄핵하여 파직되었다. 그러나 전투력이 인정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선조 25년(1592) 2월에 경상우수사로 부임하여 거제 오야포(烏兒浦)에 부임했다. 조선시대 가베리에는 오아포, 소비포, 가배량이 함께 있었다. 거제고전문학연구가 고영화 선생은 “오아포는 고대 우리말로 ‘오아’는 온전하다, 완전하다는 뜻이다.”라고 설명한다. 경상우수영 뒤로 거제 영봉 노자산(557m)이 뒤를 지켜주었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수영에는 73척의 함선이 있었으나 8관 16포에 흩어져 있었다.42) 원균은 부임하자마자 수군을 모집해 군대를 새롭게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달이 되었을 때 일본 군선이 쓰시마를 건너 20만 대군이 계속 부산 지역에 상륙했다. 구로다 나가사마가 이끄는 제3군이 경상우수영으로 밀고 들어왔다. 당시 경상좌수영은 동래로 박홍이 담담했다.
 
원균의 ‘일본 군선 침략’ 통보를 받은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의 병력과 판옥선을 출전시키는 데 15일이나 걸렸다. 전라좌수영보다 규모가 2배가 큰 전라우수영은 병력과 전선을 모으는 데 실패해 동반 출정이 힘들었다. 이것이 임진왜란 초기 조선 수군의 실제 드러난 모습이다. 원균과 이순신은 힘을 합쳐 한산도대첩을 이룩했다.
 
1597년 2월 원균은 선조의 명에 따라 삼도수군절제사가 되었다. 이순신은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에게 지금까지 공들여 비축한 군량미 9,914섬, 화약 4,000근, 총통 300자루 목록과 현품을 인계하고 본영을 떠났다. 비변사와 선조는 이순신이 일본 군선과 교전을 회피한다고 계속 의심하여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하고 한성 의금부로 초치했다.43) 이때는 이미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군이 부산포에 상륙한지 13일이 지난 뒤였다. 이순신을 옹호하고 목숨을 구하려고 적극적으로 나선 정승이 정탁과 우의정 이원익이다.44)
 
고광섭 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는 “선조가 이순신에게 정유재란 초기에 적의 침공을 막지 못한 원인이 조정에서 원한 한산도 수군의 거제도 전진 배치에 대해 이순신이 본인의 의지대로 거제도 이진을 시행하지 않은 점을 거론했다.”45)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을 당한 것은 선조를 ‘기망(欺妄)’했다는 부분으로 선조는 수군 본영을 한산도에서 거제도로 전진 배치해 일본군이 마음대로 준동하지 못하게 하자는 제안인데, 통제사 이순신이 비변사 정책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가토 기요마사 군대가 자유롭게 쓰시마를 건너와 거제도 가덕도 다대포로 진입했다는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바다 날씨가 안 좋아 부산 절영도 출전의 어려움을 연속 상소하고, 출전을 계속 늦추고 반대했다. 그러나 병권을 쥔 권율과 선조는 부산 앞바다로 나아가 조선으로 도해하는 일본 배들을 차단하고 분쇄 저지하라고 왕명을 내렸다. 이것은 고니시 진영의 요시라가 안면이 있는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일본 육군 동정을 일부러 흘려주었고, 김응서는 요시라가 말한 내용을 조정에 보냈다. 도원수의 명령에 따라 조선 수군은 7월 12일 160척의 수군을 이끌고 부산 다대포 쪽에 있는 일본 수군을 공격하려고 출전했다. 칠천량과 옥포를 경유한 후 7월 14일 부산 앞바다에서 일본 군선을 만났지만, 일본 군선은 태합(太閤) 히데요시의 명령대로 조선 수군을 보고는 무조건 교전을 피하고 멀리 쓰시마로 달아났다. 조선 수군은 전투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부산 가덕도와 거제 영등포를 거쳐 수군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지역으로 항해했다. 날이 어두워져 7월 15일 밤 10시경 칠천량 해역에 도착했다. 일본 수군은 교전 기피 및 기만전술로 일관하며 조선 수군을 칠 기회를 항상 엿보며 정탐했다. 밤에 일본 군선이 조선 수군을 공격해 배 4척이 침몰했다. 동이 틀 무렵에 조선 수군의 배에서 아침밥을 짓던 중에 혼란이 났다. 당시 배들은 태풍권 영향으로 강한 파도에 배 흔들림을 방지하려고 서로 결박하고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자 불이 크게 번져 조선 수군은 혼란에 빠졌다. 이 장면을 목격한 일본 수군 첨병은 신속하게 왜장 적장 도도 다카토라에게 상황을 알렸다. 적장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부하들에게 조선 수군을 총공격하라고 명령해 전선 1,000여 척과 군사 6만 명이 칠천량 바다와 섬에 집결했다. 조선 수군은 전투 초기에 응전하며 잘 대응했다. 그러나 일본 군선과 병사가 너무 많아 후퇴를 거듭했다. 일본 해군 병사들은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로 무조건 조선 배에 올라 육박전을 감행했다. 원균과 선전관 김식이 탄 배는 추원포로 상륙했지만, 일본 병사에게 원균은 살해당하고 선전관 김식은 탈출에 성공하여 선조에게 참상을 알렸다.46) 전라좌우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많은 장병이 전사했다. 7월 16일 아침에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판옥선과 거북선을 모두 잃고 궤멸당했다. 이순신 장군이 오랜 기간 공을 들여 키운 수군 전력이 바닷물 속으로 모두 사라졌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판옥선 12척을 이끌고 전장을 빠져나와 한산도 본영으로 갔다. 일본 수군 병사들은 섬진강을 따라 구례, 운봉, 남원을 지나 내륙까지 진출하였다. 선전관 김식은 칠천량해전에서 일어난 일을 선조에게 자세하게 보고해 『선조실록』에 그 내용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 그가 전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5일 밤 9~11시에 왜선 5~6척이 내습해 불을 질러 우리 전선 4척이 침몰당하자, 장졸이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다. 닭이 울 무렵에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왜선이 몰려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적들이 끝없이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듯하여 마침내 우리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하고 여러 장군과 군졸 대부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 및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았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뒤를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우수사 배설과 옥포, 안골(安骨)의 만호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가 불에 타서 연기가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조선 조정은 일본 군선이 예전보다 전력이 더 강화된 것을 몰랐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과의 5년간에 걸친 해전 경험을 통해 조선 수군의 해전 전법을 연구하고 이를 역이용할 수 있도록 야간기습작전과 포위협격전술을 새롭게 창안하고 기동력 훈련을 강화했다. 일본군은 거제도와 가덕도왜성(눌차도), 성북왜성, 왜성지성(가덕도)47)에 많은 첨병을 배치하여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조선 수군의 활동 상황을 손바닥 보듯이 알고 있었다. 반면에 통제사 원균은 권율 장군이 약조했던 육군의 정보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한 채 바다 위를 마냥 떠돌았다.
 
허균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년 후인 1595년에 문과급제를 하였다. 허균이 등과한 후 한 첫 벼슬이 외교문서를 맡아보는 숭문원이었다. 허균은 자기의 지은 시를 모두 시문집 『성소부부고』에 담았다. 시문집 제1권 시부에는 〈우리 수군통제사 원균, 수사 이억기와 최호가 패전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란 시가 있다.48)
 
나라 소식 들어보니 동쪽 왜놈이 바다에 목을 지켜 수군을 쳐서
병선(兵船)이 파도 속에 뒤집어지니 통제사라 수사가 다 죽었다는군
한장은 능히 월을 베었지마는 주나라는 기산(岐山)으로 도읍 옮겼네
한밤중에 홀로 앉아 눈물 쏟으니 이 분통을 어느 뉘 알아주리요.
 
허균은 정유재란이 발생했을 때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는 사신의 수행원으로 1957년 7월 연경에 다녀왔다. 그는 선조 옆에 있으면서 선조의 말을 기록하고 전쟁에서 있었던 많은 것들을 들었다. 이실지가 작성한 <이순신 공신녹권>을 다시 지으라고 명 받아 공신녹권 작성에 관여했다. 허균은 1603년 8월에 벼슬을 그만두고 금강산을 다녀와 고향 강릉에 머물며 강릉부사 유인길을 사귀었다. 부사는 임기를 마치면서 지역 유지로부터 받은 전별금과 명삼(明蔘) 32냥을 허균에게 주며 좋은 일에 사용하라고 하였다. 허균은 전별금으로 연경에서 책을 사들여 호서장서각(湖墅藏書閣)을 건립하여 선비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했다. 허균은 송나라 이상(李常)이 세운 ‘이씨산방’을 생각했다.49)
 
이순신은 임진왜란 1년 전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이듬해인 1592년 충청도 지방이 전란에 빠져들자 어머니 초계 변씨와 가족을 전라도 순천부로 이주시켰다. 가족은 순천도호부 관내 고음천(여수시 웅천동)에서 집성 촌락을 형성해 살던 창원 정씨 집안의 도움을 받아 1593년 5월부터 1597년 4월까지 살았다. 아들 이순신이 옥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웅천에서 서해로 나가는 배를 타고 상경하다가 안개와 강풍, 뱃멀미 속에 6일간 표류하다 지병이 깊어져 4월 11일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칠순이 넘은 어머니를 본가에서 맞이하려고 해안으로 가던 이순신은 4월 13일 외가 친척 변흥백 집에서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처음 접한다. 이순신은 하늘이 무너짐을 느끼면서 아산시 인주면 해암 포구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맞이하여 배에서 입관했다. 4월 16일 배를 아산 중방포까지 끌어와 영구를 상여에 옮겨 실었다. 이순신은 어머니의 초상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4월 19일 금부도사의 재촉을 받아 금곡을 떠났다. 합천 초계 도원수부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7월 14일부터 조선 수군이 불리한 상황인 것을 알고는 너무나 분통했다. 칠천량 수로는 태풍 등 악천후를 피하기는 좋지만, 전술적으로 적군이 앞뒤로 배가 막아서면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곳이다. 마치 항아리 속에 우리 조선 수군이 들어가 있고 항아리 위에 일본 군선이 나타나 내려다보는 험지 형세이다. 일본군은 거제 지역을 오래전부터 관찰하여 조선 수군의 숙영지를 항상 노리고 있었다. 조선 수군은 부산 절영도까지 항해했다가 일본 군선을 만나 싸우지 못하고 회항하였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 항해가 어려워 한산도로 돌아가는 도중에 칠천량에 들어갔다가 일본 군선의 집중적인 기습 공격을 당한 것이다.
 
7월 18일 오후에 칠천량해전의 패배 소식을 들었다. 이순신은 방책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도원수 권율에게 자신이 직접 해안으로 가서 상황을 파악하고 방책을 구한다고 제안한 후 군관 9명과 아병(牙兵) 6명을 이끌고 연해 지역을 답사했다. 이순신은 장흥, 회령, 포진 등에 흩어져 있던 전선과 병사를 모아 빠르게 수군을 재건했다. 삼가, 단성, 진주, 곤양을 거쳐 7월 21일 노량에 도착하여 거제현령 안위,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을 만나 칠천량 패전의 당시 상황을 전해 들었다. 7월 22일에 경상우수사 배설을 만났다. 이순신은 진주 정개산성에서 머물며 향후 대책을 구상하였다. 조선 바다에서 위용을 떨치던 수군의 참패 소식을 보고 받은 조선 조정은 크게 실망했다. 선조 30년(1597) 7월 22일자 『선조실록』에는 이날 비변사50) 회의 내용이 있다.
 
항복이 아뢰기를 “지금의 계책으로는 통제사와 수사(水使)를 차출하여 계책을 세워 방수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또 이르기를, ”적의 수가 매우 많았으니 당초에 풍파에 쓸려 죽었다는 설은 헛소리였다. 그들을 감당하지 못하더라도 한산으로 후퇴했더라면 형세가 극히 적고 막아 지키기에도 편리하였을 것인데 이런 요새를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니 매우 잘못된 계책이다. 원균이 일찍이 절영도(絶影島) 앞바다에는 나가기 어렵다고 하더니 이제 과연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전에 말했거니와 저 왜적들이 6년간 버티고 있는 것이 어찌 한 장의 봉전(奉典)을 받기 위해서 였겠는가? 대체로 적의 배가 전보다 대단히 크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김용남이 아뢰기를 “그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포와 화전(火箭)도 배에 싣고 왔는가?” 하니 명원이 아뢰기를 “이는 알 수 없고 김식의 말에 의하면 왜적이 우리 배에 접근하여 올라오자 우리 장사들은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패몰되었다고 합니다.”
 
8월 3일 아침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은 정개산성에서 선전관 양호가 가져온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한다는 선조의 교지와 유서를 읽고 사은숙배하는 의식을 행했다. 이순신은 통제사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전라도로 이동하여 순천에서 여러 날 머물고 흥국사 등 호남 의승장과 연락하여 군사와 무기를 모았다. 보성의 조양창에서 며칠 머물며 10일에는 배흥립을 만나고, 11일에는 송희립, 최대성, 안위 등 수군 장수들을 규합했다. 12일에는 거제현령과 발포만호가 찾아왔다. 13일에는 여러 장수가 있는 곳에 대해 들었고, 오후에 부사령관 이몽구가 왔다. 통제사는 이튿날 이몽구가 본영의 군기를 하나도 싣고 오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곤장 80대의 중벌을 내렸다, 일본 군선은 칠전량 해전이 끝난 후 섬 주변 해역을 돌며 약탈에 몰두해 이순신은 강력했던 수군을 부활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와 시간을 벌었다.
 
장군이 수군통제사가 되어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피난을 떠났던 많은 주민이 되돌아왔다. 8월 8일 순천에 도착했을 때 군사가 60명이었고, 8월 9일에 보성에서는 120명뿐이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식량을 조달하고, 병기를 손보고, 부상자를 치료했다. 오랜만에 조선 수군 진영에 웃음소리가 들렸다. 15일에는 보성군에서 선전관 박천봉을 만났는데 선조의 편지를 전했다. “지난 해전에서 패한 결과로 해전이 불가능 할 때는 육지로 올라 도원수를 돕는 것도 가하다.”라는 내용이었다. 이순신은 임금에게 장계를 보내 “신에게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음”을 알렸다. 8월 16일 활을 만드는 이지, 태귀생과 선의가 왔다. 8월 17일 군사 120명을 이끌고 백사정을 거쳐 군영구미에 도착했다.51) 8월 19일 회령포에서 배설로부터 12척의 전선과 병사 150명을 인수하였다. 8월 20일, 회령포 포구가 너무 좁아 함대를 이진 만호영으로 이동시켰다. 통제사는 이날부터 몸이 불편해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근무가 힘들었다. 21일 새벽에는 곽란이 발병해 3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23일에는 배에서 내려 민가를 찾아 들어가 쉬었다. 8월 24일에 함대와 진영을 어란포로 옮겼다. 26일 신임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전선 한 척을 이끌고 합류했다. 정탐을 나간 임중영이 일본 수군이 이진에 도착한 사실을 보고했다. 8월 28일 새벽 6시경 일본 군선 8척이 어란포 입구로 돌입해 조선 수군은 칠천량 패전 이후 처음으로 일본 군선과 마주치게 되었다. 장졸들이 겁을 먹고 당황할 때 통제사는 병사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동요하지 말고, 싸우라고 격려했다. 수군은 일본 군선을 추격하여 갈두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갈두는 해남 땅끝마을 해역이다. 통제사는 진영을 어란포와 벽파진 사이에 있는 장도로 이동했다. 8월 29일 아침에 진영을 진도 입구인 벽파진으로 이동해 약 보름간 머물렀다. 9월이 되자 날씨가 쌀쌀해져 바다가 매우 추웠다. 9월 9일 중양절에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려고 소 아홉 마리를 잡았다.
 
 
 

4. 이순신의 명량 해전

 
 

4-1. 이순신의 지략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을 빨리 제압하고 서해로 나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일본 군선은 1597년 9월 14일 1진 55척이 어란포에 집결했다. 이순신은 9월 15일에 물때를 살펴 수군 진영을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이동하면서 병사들에게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는다.”라고 강조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벽파진에서 울돌목으로 진영을 바꾼 것은 전선 규모와 병력이 적은 수군으로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일본 수군은 50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울돌목을 향해 급하게 밀고 내려왔다. 이순신은 9월 16일 아침 별망군의 긴급 보고를 받았다. 울돌목에서 판옥선 13척과 작은 어선 32척을 총동원하고 뒤에 100척의 배들을 놓아 위세를 부렸다.52) 일본 군선은 해남 어란진을 출항해 서해로 진출하려고 500여 척이 함께 항해했다. 진도와 해남군의 화원반도 사이의 좁은 수로는 길이가 2km, 폭이 좁은 곳은 300m에 불과해 이순신은 오래전부터 해전에 이용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최저 수심이 약 1.9m, 조류의 속도는 최대 11.5노트로 매우 빨라 배들이 다닐 때 무척 신경을 써서 항해해야 하는 곳으로 주로 정조(停潮) 시간에 물때를 보고 건넜다. 일본 군선은 좁은 명량해협의 빠른 물살을 통과하기 위해 중소형 전선 세키부네(關船) 133척을 먼저 투입하고, 주력선 안택선(安宅船)을 뒤로 배치했다. 수군은 조류를 등에 업고 빠르게 전진했다. 이날은 오전 7시경에 물의 흐름이 바뀌는 정조를 맞이했다. 그리고 물의 흐름이 일본 군선에 유리한 쪽으로 흘러 일본 군선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항해를 시작해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어란포에서 울돌목까지 군선이 도달하는데 약 4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조선 수군과 일본 군선이 처음 만나 해전이 벌어진 시각은 오전 11시경이다. 통제사의 대장선이 일본 군선과 만나 힘겹게 해전을 벌이는데 뒤에 있는 함선들은 어떤 이유인지 앞으로 나서지를 못했다. 이순신이 함대기를 부르는 초요기를 올리며 휘하 모든 전선에게 전진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그때 처음으로 중군인 미조함 첨사 김은함과 거제현령 안위가 대장선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판옥선 13척이 합세하여 세키부네 전선과 전투를 벌이던 도중에 조류의 방향이 남동쪽으로 바뀌자, 일본 수군은 배가 서로 엉키고 바람마저 역풍이 불어오자 할 수 없이 왔던 어란진으로 후퇴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화력을 이용해 일본 군선 31척을 물리쳤다. 통제사는 울돌목의 빠른 조류와 해안 양쪽의 수심이 5m 이내 급경사인 것을 전투에 이용했다. 조선 수군은 일자진(一字陣) 전술로 일본 수군을 유도하여 수로가 좁은 울돌목에서 1시간도 채 안 돼 군선 31척을 침몰시키고, 상당수 선박을 대파하였다. 일본 해군은 해적 출신의 선봉장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죽고, 총사령관인 도도 다카토라가 팔에 화살을 맞았다. 일본 군선은 피해가 너무 커서 파악이 안 될 정도로 손상을 입었다, 오후 한 시경 병사 3,500명 이상이 물에 빠져 일본 군선은 해전을 중지하고 서서히 물러났다.53) 오후 두 시경 두 나라 함선은 서로 마주 보고 대치하다가 이순신과 여러 번 싸운 적장 도도 다카토라는 조류가 바뀌어 조선 수군과의 해전이 힘들다고 판단하고는 빠른 조류를 타고 일시 후퇴하였다. 명량해전에서 큰 피해를 본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뛰어난 지략에 놀랐다. 이순신은 이날 일기에서 “이는 실로 하늘이 도운 것이다(此實天幸)”라고 적었다. 이날 승리는 병력의 보충과 군량 등 군수 문제를 제때 해결한 의승수군과 사공과 연안 어민 덕분이었다.
 
 
 

4-2. 마하수 형제

 
이순신 장군 밑에는 충성스러운 장수들이 많다. 마하수(馬河秀, 1538~1597)는 강진병영성을 축조한 마천목 장군의 후손으로 당시 벼슬은 선공주부였다. 마하수는 거북선 건조에 참여하고, 장군이 위급한 상황에 빠지면 장군을 구하려고 뛰어들었다.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마치고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할 때 민간 배 10척을 끌고 회령포로 찾아왔다. 마하수는 명량해전에서 아들 4형제와 함께 싸우다 일본 병사가 쏜 탄환에 아들 성룡과 함께 전사해 장흥 충현사에 배향되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4-3. 사호공 오익창

 
명량대첩에는 숨은 의병장이 많이 있다. 고창군 출신 사호공 오익창은 사대부들이 해상으로 도피하려고 준비한 배들을 설득하여 모두 끌어와서는 13척 판옥선 뒤로 엄청나게 많이 배치했다.54) 사호집(沙湖集)은 2011년에 여해고전연구소의 노승석 소장이 발굴한 자료로 명량대첩 당시 전투내용이 소상하게 적혀 있다. 통제사는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얻어와 물에 담가 푹 적혀 판옥선 곳곳에 걸게 하여 일본 군선에서 날아오는 조총 탄환이 솜이불을 뚫지 못하도록 하였다. 농가에 흔한 동아를 구해 배로 운송해 수군들이 목이 마를 때마다 충분하게 먹도록 조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4-4. 의병장 송제민

 
토정 이지함의 문하에서 글을 배운 해광(海狂) 송제민(宋濟民, 1549~1602)은 학자로 벼슬을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2,0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김천일과 김덕령의 막하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송제민은 배를 몰고 제주도로 건너가 군마를 구해 김덕령에게 주었고, 남원성전투에 참여하였다가 극적으로 살아났다. 아들 3명은 일본군에 납치되었다. 『대굴포 전라도 수영고찰』에 따르면 “무역 선단의 대선주인 송재민은 스승인 정개청(鄭介淸)55)의 요청에 따라 상선 29척을 통제사에게 주어 병선으로 개조하여 사용토록 하였다.”라는 글이 있다. 의병장은 백성을 구제하라는 이름 제민(濟民)을 실천하지 못하자 스스로 재민(齋民)으로 고쳤다. 숙종 34년 무등산 자락인 광주 북구 운암동 운암서원에 배향되었다. 해광의 묘표는 송시열이 썼다.
 
 
 

4-5. 해난 사고

 
필자는 남해안 바닷길과 명량해협을 조사하려고 연안에서 운행하는 여러 형태에 배를 탔다. 2015년 8월에는 목포 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제작한 조운선에 승선해 목포항으로 가려고 여수신항에서 홍순재, 강원춘 학예사와 함께 한려수도를 지나 벽파진까지 항해했다. 조운선은 뱃사공이 없어 예인선에 의해 이동했는데 예인선 선장이 고향인 벽파진에서 하루 자고 다음 날 아침 출항한다고 해 오후 3시경에 운항을 일찍 끝내 할 수 없이 벽파진에서 내려 시내버스를 타고 목포로 향했다. 다음날 배가 잘 출항했나 궁금해 학예사에게 물어보니 조운선 상부 나무가 많이 부서졌다고 알려주었다. 선장이 예인선과 조운선을 방파제 부두에 배를 묶어 놓고 숙소로 갔는데, 아침에 부두에 나와 배를 보니 파도로 인해 배가 방파제와 부딪쳐 목재가 많이 부서졌다. 벽파진의 위치는 남해와 서해로 연결되는 중간에 위치해 파도의 위력은 정말 대단했다.
 
2015년 10월에는 2015다도해국제요트대회56)에 참가해 통영에서 요트 아울렐리아호(스키퍼 김신환)에 궁인창, 김용수, 천주만, 유창석 5명이 승선해 여수 초도에서 1박하고 새벽에 출항하여 벽파진 해상에 이르러 여객선 2척이 다가와 잠시 기다리다 앞으로 나갔는데 20분 지나 여객선이 일으킨 물살에 바닥에 있던 대형 꾸럭이 스크루를 감았다. 요트 엔진 시동이 갑자기 꺼져 세일링으로 벽파진에 이동하여 해양경찰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벽파진에 도착한 해경은 칼을 하나 건네주며 도움을 줄 수 없다고 업체를 부르라고 하고는 떠나버렸다, 업체에 전화하니 잠수부가 없어 올 수가 없다고 했다. 천주만 대원이 요트 밑에 들어가 스크루에 감긴 그물을 칼로 끊어내는데 1시간을 작업해도 별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필자가 그물을 잘라낼 방법을 생각하다 마을 이장댁에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낫을 빌려와 친구에게 주었다. 친구는 2시간여 물속에서 작업하여 감긴 그물을 모두 제거했다. 벽파진 바닷물에 들어가서 작업한 천주만은 특전사 출신으로 정말 강인했다. 작업을 마친 친구는 울돌목으로 가면서 여기 바닷물의 유속이 너무 심하고 아무것도 안 보여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요트는 명량해협을 잘 통과하며 늦게 목포마리나에 입항했다. 울돌목은 자주 다녔지만, 이날은 사고로 종일 조류(潮流) 속도를 관찰할 수 있었다.
 
 
 

5. 노량 해전(음력 1598. 11. 19.)

 
삼도수군통제사는 명량해전의 승리 후 본영을 정비하기 위하여 당사도, 어의도, 칠산도를 지나 19일에 법성포를 돌아보고 홍농 바닷가에 정박했다. 20일에 위도, 고차도, 21일에 고군산도에 도착해 병사들을 쉬게 하였다. 일본군 적장 도다 다카토라는 명량 울돌목에서 크게 패한 후 다시 본대를 꾸려 9월 20일 이순신의 함대를 분쇄하려고 명량해협 울돌목을 지나 진도와 통제영을 파괴하고 서해로 진출하여 눈에 불을 켜고 조선 수군을 찾아 무안 앞바다와 위도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조선 수군을 찾지 못했다. 일본 육군은 영광에서 양민을 학살하고 약탈했다. 일본군 수뇌부는 정읍에서 모여 작전 회의를 개최하여 주둔할 곳을 정하고 성을 쌓기로 하였다.57)
 
조선 수군은 일본 군선이 추적하는 것을 알고 기만전술을 활용하여 항상 빠르게 북상했다. 일본 군선은 해무가 끼고 날씨가 안 좋아 바다에서 조선 수군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월동 준비하러 남해로 복귀했다. 조선 수군은 정비를 마치고 고군산열도를 출항해 선조 30년(1597) 10월 29일 고하도(高下島)에 상륙하여 월동을 준비하며 통제영 본영을 설치했다. 류형(柳珩)58)은 고하도 주변의 피난민을 군사로 활용하자는 건의를 해 수천 명의 군사를 확보했다. 흥양현감 최희량은 고하도에서 다른 지역의 목수를 불러들여 100일 만에 군선 40척을 건조했다.59) 이때 이언적의 손자 이의온이 통제사에게 둔전과 함께 많은 수군의 식량을 해결하려고 ‘해로통행첩’을 제안하여 군량미를 해결했다.60) 11월 초에는 배 한 척이 암초에 걸려 부서졌다. 다음 해 2월 18일 병력 8,000명을 고금도로 이동시키고 수군을 훈련하고, 판옥선을 건조하고 수리하였다.61) 최희량은 고금도에서 군선 10척을 추가 건조했다. 정사준의 동생 정사횡과 정사정은 수백 명의 하인을 데리고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가 군량 조달에 크게 활약했다. 임준영은 일본군의 동태를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했다.62)
 
 
 

5-1. 등자룡 장군

 
등자룡 장군의 절강 수군 3,154명은 만력 26년(1598) 3월경에 중국 산둥성 더저우(德州)를 지나 조선 수역에 들어왔다. 당시 조선에 파병된 명 수군은 계금 장군이 이끄는 3,000명이 있었다. 명장 등자룡은 은퇴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병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신속하게 조선에 출전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아 노구를 이끌고 과거 전투에서 함께 활약했던 부장들을 규합하고, 어렵게 절강성 수군 인수인계를 마쳤다. 그러나 전쟁 물자가 조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출전이 계속 지연되어 명 조정의 대신들은 조선 해역의 상황이 아주 급한데 장수들이 계속 물자를 핑계로 출전을 피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장보지(科臣 張輔之)는 등자룡 장군을 탄핵했다. 중군 방일신(方日新)은 절강성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해로로 의주에서 양곡을 싣고 조명연합 수군의 주둔지인 고금도로 향했다. 9월 29일 충청도 구룡도(九龍島)에 도착할 때 갑자기 돌풍이 일면서 파도가 솟구치는 바람에 배 선두와 선미가 모두 부서졌다. 작은 배로 갈아타고 간신히 뭍 근처에 도달했으나 선체가 뒤집혀 모두 몰살했다. 지금도 구룡도가 어딘지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등자룡 장군은 바다에 빠진 수군을 수습하며 항해를 계속했다. 등 장군의 동생인 등용신이 작성한 『등유신등보』을 통해 명 수군의 고금도 도착일이 10월 12일에 해로를 통해 임지인 고금도에 도착했고, 11월 17일에 순천 광양만에 도착, 18일 삼경에 조명연합 수군 군사가 출발하여, 11월 19일 날이 밝을 때 조명연합군의 일원으로 조선 판옥선을 빌려 출전하였다. 해전이 시작되어 아군이 쏜 포에 등자룡 장군이 탄 판옥선에 불이 나자 일본군이 몰려와 선상에 올라타서 싸우다가 장군의 머리를 전리품으로 탈취해 달아났다. 바다에서 이를 지켜보던 이순신 장군이 등자룡 장군을 구하려 앞으로 나아가다가 그만 왜군의 총에 맞아 절명했다. 등용신은 장군의 잃어버린 목을 대신하여 침향목을 손수 깎아서 목을 만들어 유해를 고정하고 육로를 통해 고향에 운송했다. 중국 시진핑 주석은 2014년 7월 14일 서울대를 방문하여 <한국과 중국은 발전의 동반자>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면서 양국 역사에 공통되는 인물로 서복, 김교각, 최치원, 고려에 귀화해 정착한 공자의 후손 공소(孔紹), 김구, 정율성, 등자룡 장군을 거명하며 ‘아시아 꿈을 위한 동행’을 강조했다.
 
 
 

5-2. 적장 시마즈 요시히로

 
관음포 해상에서 관음포전망대 정자가 보였지만 수심이 낮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시마즈 부대와 다치바나 시게토차와 남해에 주둔하던 소 요시토시는 갇혀있는 고니스 군을 구출해 본국으로 돌아가는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음력 11월 18일 500여 척의 함선과 군사 6만 명을 이끌고 노량으로 향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임진왜란 초기에 제4군에 속해 강원도 쪽을 공격하다 후계자를 잃었다. 시마즈 부대는 남원성을 공격하여 양민을 학살하고 부여까지 북상하여 공격하고 해남까지 이르렀다가 10월 말에 사천 방어에 나서 사천 선진리성을 새로 쌓았다. 1598년 봄 시마즈 부대는 병력 8,000명으로 조명연합군 40,000명을 물리쳤다. 시마즈는 노량해전 사령관으로 나서 500척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겨우 50척만 남았다. 이곳은 팔만대장경이 판각된 곳으로 관음(觀音)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노량해전지를 답사하는 동안 가슴이 너무나 떨리고 아팠다.
 
조명연합군 함대는 노량 수로에 먼저와 자리를 잡았는데 마침 바람이 풍상이어서 진무성이 통제사에게 화공작전을 건의했다.63) 조선 수군과 일본 해군이 서로 뒤섞여 근접전을 펼칠 때 이순신은 일본 군선을 관음포로 유인했다. 일본군은 넓은 바다로 빠져나가기 위해 관음포로 향했는데 수심이 낮고 퇴로가 막히고 좁은 수로에서 조선 수군에게 패전했다. 이때 왜교에 있던 고니시 부대는 배를 타고 몰래 남해도 남쪽으로 항해하여 시마즈 부대와 부산에서 합류하여 쓰시마로 향했다. 노량해전에서 조명연합수군은 일본 해군 전함 1백여 척을 포획하고, 2백여 척 이상을 포격하여 불에 태워 가라앉혔다. 조선 수군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초계군수 이언량, 흥양현감 고득장 등 10여 명이 전사하고, 명 수군은 등자룡 장군과 중군 도명재가 전사했다.64) 류형은 해전에서 총알을 여섯 발이나 맞고도 계속 싸웠고 운좋게 살아나 훗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순신의 유해는 고금도 월송대에 머물다 아산으로 운구했다. 이수경은 장군의 유해가 머문 기간을 당시 전통 상례로 보아 10일로 추정했다.65)
 
 

 
34) 히데요시는 영지 수확량을 측정하기 위하여 1582년부터 측량을 시작하여 1598년까지 시행했다. 이는 군역이나 징발 동원령의 기초가 되었다.
35) 박희봉 「임진왜란에 관한 새로운 증거와 의미: 참전 일본군 및 손실자 수」, 『국가정책연구』 제28권 제4호, 2013, 일본군 합동참모본부가 1924년에 출간한 『일본전사 조선역』 임진왜란 편에 의하면 일본군은 최소 22만 4천 명이 넘는 병력이 참전했고, 약 14만 명이 조선 땅에서 사망했거나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일본으로 후송됐다.
36) 류성룡 필 진시무차 초고(柳成龍 筆 陳時務箚 草稿),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유산, 2012년 5월 17일.
37) 샤야가(沙也可)는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으로 철포수 3,000명의 부하를 이끌었다. 장수는 명분 없는 전쟁에 살인 약탈에 나서는 것에 수치심을 느껴 경상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순 의사를 밝히고 부하 500명을 이끌고 귀순했다. 그때 나이가 21살로 선조가 성을 하사하여 김충선이 되었다.
38) 정 지에시(鄭潔西). 「기만인가 타협인가—임진왜란 시기의 외교교섭」, 2018.
39) 병부상서 석성은 조선에 군사를 보내 도왔다. 명 만력제는 조선에서 많은 군비를 지출했지만, 강화회담에서 성과가 없어 대국의 체면을 깎여다고 석성을 감옥에 보내 1599년 옥사했다. 석성의 두 아들은 조선에 망명했다.
40) 한명기, 「임진왜란기 明․日의 협상에 관한 연구-명의 강화 집착과 조선과의 갈등을 중심으로-」, 國史館論叢 第98輯,
41) 문형진, 「東國兵鑑」에 나타난 전투 현황과 전술 형태 분석, 군사연구 제122집, 2006.
42) 임진왜란 시기에 수군이 편성된 고을이 포함된 8관(하동, 곤양, 남해, 사천, 고성, 진해, 거제, 웅천), 16포(가덕진, 천성포, 제포, 안골포, 영등포, 율포, 옥포, 조라포, 지세포, 가배량, 당포, 사량, 소비포, 적량, 미조항, 평산포)로 구성되었다.
43) 卞洪州, 丁景達, 金澤南, 卞弘願, 宋希立, 黃大中, 卞延壽 등이 이순신 구명에 앞장 섰다.
44) 방상석, 「이순신을 구원한 정탁의 신구차에 관한 연구-역포집을 중심으로」, 『이순신연구논총』 제24집, 2015.
45) 고광섭 외, 「정유재란 발발 전·후 한산도 수군의 거제도 전진배치 전략 이견 재조명」, 『Journal of the KNST』, 2023.
46) 『선조실록』 90권, 선조 30년 7월 22일
47) 2015년 10월 18일 <한겨레>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시리즈’ 취재팀은 가덕도 갈마봉(155.7m) 북서쪽 아래에서 학계에 보고 안 된 총길이 750m, 높이 2~3m, 너비 3m의 고려 성벽을 새로 발견했다.
48) 허균, 「傳通抹桑寇 潛邀下瀨師 戈舡俄渰水 都護摠與屍 漢將能誅粤 周居恐邑岐 中宵坐垂涕 憂憤有誰知。」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는 조선 중기 문신 허균(許筠)의 시문집이다.
49) 소식은 친구 이상(李常)이 여산 오로봉 아래 백석암에서 공부하다 과거에 급제해 암자를 떠나면서 책 9,000권을 집으로 가져오지 않고 누구나 보게 했다. 사람들은 이방을 ‘이씨산방’이라 칭송한다. 이상은 황정견(黃庭堅)의 숙부이다.
50) 선조 30년 7월 22일 비변사 회의에 영의정 유성룡, 행 판중추부사 윤두수, 우이정 김응남, 행 지중추부사 정탁, 행 형조판서 김명원, 병조 판서 이항복, 병조 참판 유영경, 행 상로군 노직, 좌승지 정광적, 주서 박승업, 가주서 이성, 검열 임수정, 이필영이 입시하였다.
51) 이수경, 「『난중일기』의 백사정과 군영구미」, 『군사』, 2020. 이수경은 군영구미(軍營仇未)를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군학마을이 아닌 현재 장흥군 안양면 해창마을로 주장한다. 이는 ‘조선 수군 재건로 구간’이 달라지기 때문에 학자 간에 주장하는 설이 다르다.
52) 백진남, 김성원, 문영개, 변홍원, 백선명, 김택남, 임영개 등이 피난선을 가지고 합류했다.
53) 변도성, 이민웅, 이호정, 「명량 해전 당일 울돌목 조류․조석 재현을 통한 해전 전개 재해석」, 『한국군사과학기술학회지』 제14권 제2호, 2011.
54) 유학자 沙湖公 吳益昌(1557~1635)의 문집 사호집은 영조 49년(1773)년에 후손 오성열이 간행하였다. 병조참판 이태화가 오익창의 충절과 학문에 감복하여 사호집 서문을 기꺼이 작성했다. 2016년 전라북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김정호 「대동지지」에 “사호강은 영산강 동쪽 20리에 있다.”
55) 정개청은 호남의 명유로 이산혜의 추천으로 관직을 하여 곡성현감을 지냈다. 문하생이 400명에 이르렀으며,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제자 50명이 죽고 정개청은 62세에 함경도 경원 아산보로 이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문집으로 『우득록(愚得錄)』이 있고, 전남 함평 자산서원에 배향되었다.
56) 2015다도해국제요트대회는 10일 보길도-여서도-거문도 수역에서 오프쇼어 1경기. 11일에는 거문도-백도-문도-거문도 수역에서 오프쇼어 2경기를 치렀다.
57) 오호성, 『임진왜란과 조명일의 군수시스템』, 경인문화사, 2017.
58) 류형은 선조 35년(1602) 제4대 이시언에 이어 제5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59) 한 예로 『亂中日記』에 癸巳年(1653) 6월 22일 일기에 의하면 전선을 만들기 위하여 동원된 목수는 모두 214명이었다. 지역별 동원상황을 보면 본영 72명, 방답 35명, 사도 25명, 녹도 15명, 발포 12명, 여도 15명, 순천 10명, 낙안 5명, 흥양과 보성 각 10명으로서 전라좌수군의 연해민들이 모두 동원되고 있다.
60) 『징비록』에 “3도(경상, 전라, 충청)의 연해를 통행하는 공사(公私) 선박으로 통행첩이 없는 것은 간첩선으로 인정하고 통행할 수 없게 한다고 하였다. 난을 피하여 배를 탄 사람들은 다 와서 통행첩을 받았다. 사람들은 재물과 곡식을 다 싣고 바다에 머물러 쌀 바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며 통행을 금하는 일이 없는 것을 기뻐해 10여 일 만에 군량 1만여 섬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61) 최학삼, 「이순신의 수군 재건과 특별조세 징수에 관한 연구」, 『The Journal of the Convergence on Culture Technology (JCCT)』, 2018.
62) 『난중일기』. 정유년(1597) 11월 10일, 11월 20일.
63) 진무성(陳武晟, 1566~?)은 흥양 출신으로 임진왜란 초기부터 이순신 휘하에 있으면서 6월 당포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34살인 1599년에 무과에 급제했다.
64) 박현규, 「명 장수 등자룡(鄧子龍)과 부장(副將)의 정유재란 참전 기록 고찰」, 『중국사연구』 제142집, 2023.
65) 이수경, 「이순신 장례기록과 장례과정 검토」, 『이순신연구구논총』 제30호, 2018.
【역사】 정유재란 고찰
• Ⅱ. 임진왜란 전후
• Ⅲ. 정유재란
• Ⅳ. 임진왜란 외국 기록물과 피로인
(2024.08.23. 21:09)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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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