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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정유재란 고찰
◈ Ⅳ. 임진왜란 외국 기록물과 피로인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신들 외에 불교 여러 종파의 승려들을 동원해 자신을 보좌하게 하였다. 히데요시를 보좌한 승려로 임제종 상국사(相國寺) 사이쇼 죠타이, 남선사(南禪寺) 겐포 레이산, 동복사(東福寺) 이쿄 에이테츠가 대표적인 승려이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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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고찰
궁인창 ∥ 생활문화아카데미
 
Ⅳ. 임진왜란 외국 기록물과 피로인
 
 

1. 일본 종군 승려와 유럽 신부의 기록물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신들 외에 불교 여러 종파의 승려들을 동원해 자신을 보좌하게 하였다. 히데요시를 보좌한 승려로 임제종 상국사(相國寺) 사이쇼 죠타이, 남선사(南禪寺) 겐포 레이산, 동복사(東福寺) 이쿄 에이테츠가 대표적인 승려이다. 이들은 모두 선종의 명망 높은 승려로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정치 자문이나 외교문서의 기초를 담당하거나 사신으로 활동했다. 승려들은 히데요시를 따라 침략 전진기지인 나고야에 머무르며 자문 역할을 담당했다. 평민 출신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아 밑바닥부터 올라와 글을 전혀 배우지 못해 정치·외교 문서 작성에 능하고 주자학에도 밝았던 사람들이 꼭 필요했다. 불교 승려와 기리시탄 신부가 조선 전장에서 왜장의 참모로 종군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 승려들이 남긴 기록과 종군 화가들이 그린 삽화로 정말 충격이었다.
 
명대 연구가인 루오 리신 교수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기리시탄 신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스페인 선교사 세스페데스와 일본인 수사 레온을 초청해 웅천에서 1년간 활동하게 했다고 주장했다.66) 왜장 고니시는 아우구스티노스라는 세례명을 받아 조선에 건너온 제1군 중에 기리시탄 신자인 장수와 병사가 많아 비밀리에 베드로 고메스 신부에게 초빙 신부를 부탁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1551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살라망까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고 인도 고아에서 서품을 받고 일본에 들어와 히라도, 오사카, 교토에서 30년간 선교 활동을 했다. 조선에는 임진왜란이 벌어진 다음 해인 1593년 12월 27일 제포(진해 웅천)에 첫발을 디뎠고, 1년 6개월 정도 순천왜성에서 복음 선교 활동을 하다 히데요시에게 알려져 일본으로 돌아갔다. 조선에서 선교한 3명의 신부는 4회에 걸쳐 서간문 형식으로 조선 전쟁터에서 실제 경험한 내용을 교구청에 보고했다. 보고 내용은 왜군이 약탈하여 벌어진 조선의 참상, 기후, 생활상, 질병, 거북선과 해상에서 조선 수군 승리, 고아 등을 자세히 적었다. 그들은 종군 신부는 아니지만, 종교 행사를 집전했다.67) 스페인 정부는 1993년 9월 세스페데스 신부 방한 400주년을 기념해 청동기념비를 보냈다. 창원시는 2016년 세스페데스 공원을 조성했다.
 
포르투갈의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는 예수회 소속 신부로 1563년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한 후 1597년 일본에서 사망할 때까지 28년 동안 전국시대의 정치적 격변기를 모두 경험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계획하고 치르는 모든 과정을 모두 지켜본 외국인이다. 그는 냉정하게 국제전쟁을 지켜보면서 『일본사』를 기록했다. 이 책에는 전쟁 준비 과정, 부산에 도착하는 모습, 조선의 성을 함락하고 평양성을 공격하는 상황, 명군의 등장 및 강화 협상, 일본 군부 내부 정황, 조선의 국방 상황, 조선의 위치와 지형, 기후, 주요 생산물과 특산물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원본 『일본사』가 20세기에 발견되고 나서 번역본은 1976년에 발간되었다.
 
포르투갈 상인은 일본에 조총을 전해 일본 열도 평정에 이용되고 조선 침공시 최신 무기로 등장해 승리로 이끈 원인이 되었다. 인도 고아에서 제작된 조총은 일본에서 개발되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주력 병기가 되었다.68) 명 군대가 조선을 구원하러 왔을 때 포르투갈의 특수잠수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잠수병의 임무는 일본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파괴하는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2. 명나라 전쟁 기록

 
이 전쟁은 처음부터 명나라와 직접적인 깊은 관계가 있었고, 자연히 전쟁 양상은 명나라, 조선, 일본이 싸운 국제전으로 흘러갔다. 명나라에서는 이전부터 여러 신하가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고,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일본의 대륙침략에 관한 정보를 탐지하고, 일본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연안에 주민들을 내륙으로 대피시키고, 해안에 있는 성들을 보수하고, 양식을 보충하고, 물자를 보강하고, 군사를 조련하였다. 명은 일본이 조선에서 전쟁을 일으킨 속셈이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것을 알기에 해안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일본은 인구가 늘어나면 식량이 모자라 항상 인접국을 몰래 쳐들어가 해적질을 하며 곡식을 약탈했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지 얼마 안 돼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성까지 차지했다. 선조는 의주로 몽진하여 명나라에 급하게 원조를 청했다. 명은 긴급한 상황을 인식하고, 일본군이 명에 상륙하기 전에 격퇴하기 위한 본격적인 계획을 세우고 이를 담당할 책임자인 경략으로 송응창을 협의 끝에 임명한다. 송응창은 경략 시절의 일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2-1. 송응창의 『경략복국요편』

 
송응창69)의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偏』)에 대한 역주서 다섯 권이 『명나라의 임진전쟁』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 출간했다. 임진전쟁 초기에 있었던 명나라 조정의 조선 파병 과정과 전투 상황, 자신이 명나라에 소환되는 과정 등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병부우시랑 송응창은 임진전쟁 초기부터 1593년 연말 12월까지 명나라 군대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던 시기에 명군을 총지휘한 인물이다. 그는 명나라 군대 총사령관이었던 이여송이 중국 닝샤에서 몽골 장군 보바이가 일으킨 난을 진압하느라 조선에 오지 못하고 계속 있자, 빠른 기일 내 조선으로 이동하라고 계속 독촉했다. 조선에서의 빗발치는 병력 요청과 물자 지원 요청을 처리하는 등 조선으로 건너간 군사의 운명과 조선의 운명을 책임졌다. 경략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향배를 책임져야 하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경략 송응창은 북경의 황제와 고관들, 후방인 요동과 산둥의 지방관, 전선의 사령관 이여송과 부하에게, 조선의 국왕과 관료들에게 하루에 많게는 10여 통의 공문서와 사적인 편지를 보내 전쟁 수행의 모든 과정을 조율하였다. 명나라에서 병력과 물자를 최대한 끌어당기고, 전장의 장병들을 격려했다. 요동에 머물면서 조선 조정과 협력을 끌어내는 일도 하였다. 경략 송응창은 선조에게 “조선 수군의 용맹성은 정말 대단하다. 거북선이 대단히 견고하고 우수해 모든 함선을 이용하여 해구를 봉쇄하는 작전을 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명 장수와 지휘관들은 선조를 만난 자리에서 조선 수군의 우수함과 활약상을 자주 칭찬했다. 필자는 항저우 서호가 조선을 어려운 전쟁에서 구해준 경략 송응창의 묘가 고향인 항주 서호 근방에 있는 고산 묘역에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조선 사람들은 평양과 서울 등에서 전투를 진두지휘했던 이여송이나, 명군의 참전을 앞장서서 주장했던 병부상서 석성을 찬양하며 그들을 위한 생사당을 세웠지만, 정작 송응창은 조선 조정과의 갈등으로 건립을 안 했다. 송응창의 자식은 부친 사망 후, 명나라 조정에 부친에 대한 충분한 대우를 거듭 요청하며 15년간 장례를 치르지 않았으나 아무런 답이 없었다. 송응창이 기록한 책을 번역한 『명나라의 임진전쟁』을 읽어 보면 송응창 한 사람뿐만 아니라 명나라가 짊어져야 했던 ‘임진전쟁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온다.
 
명 조정은 조선에 군대를 보내 상국으로서의 체면을 세우고, 재조번방의 명분을 획득하여 천조의 영향력을 유지하며 전쟁이 명나라 국경까지 번지는 것을 막을 전략이었다.
 
 
 

2-2. 왕사기의 『장안왕씨족보』

 
명 왕사기(王士琦)는 임진왜란 때 참정70)의 신분으로 선조 31년(1598) 6월에 조선에 들어와서 8월 17일 선조와 태합 히데요시의 사망과 군량 문제를 상의하고 남으로 내려가 순천 왜교(倭橋), 노량해전 등 전투에 나서는 서로군(西路軍) 유정(劉綎)과 수로군(水路軍) 진린을 감군(監軍)하는 임무를 맡았다. 왕사기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조선에서 취득한 각종 문헌을 1599년 4월에 자기 나라로 가지고 가서 문서로 정리해 『장안왕씨족보』에 수록했다.71) 족보에는 임진왜란 때 왕사기가 선조와 이덕형이 주고받은 간찰과 이순신이 이덕형에게 보낸 ‘남해 선공작전 검토’ 간찰 1통 등 조선 군신으로부터 받았던 간찰 8통이 수록되어 있다. 명나라 군사는 1600년 9월에 철수했다. 박현규 교수는 2013년에 저장성 타이저우(台州) 린하이(臨海)시박물관에서 오아사기의 자료를 입수하고 간찰 중 7통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전쟁의 흐름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사료 가치가 높은 문헌으로 보았다.72)
 
 
 

2-3. 교토의 이총(耳塚)

 
교토의 히데요시를 모시는 풍국신사 앞 야마토 대로변에 높이 7.2m의 거대한 무덤이 있다. 필자는 일본 교토 방문시 제일 먼저 이총을 방문하여 참배한다. 히데요시는 정유재란 때 조선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코를 베어 보내라고 명했다. 이에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살해한 조선인의 코를 베어 소금과 술에 넣어 일본으로 보냈다. 이총은 1597년 9월에 축조되어 2만 명의 코를 묻었다. 에도시대의 유학자 하야시 라잔(林羅山, 1603~1867)이 코무덤은 너무 야만스럽다고 해서 나중엔 귀무덤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일본은 코무덤을 전쟁 전리품으로 널리 자랑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후 조선통신사가 올 때마다 꼭 이곳을 지나가도록 했다. 오사카성 천수각에는 1597년 9월 1일 전라도 지역에 출정한 나베시마 가츠시게 부대가 금구, 김제 지방에서 양민을 죽이고 모은 코 3,369개를 바치고 받은 영수증이 남아 있다. 이총은 일본 여러 곳에 있으며, 규모가 제법 큰 것이 교툐 이총이다. 무덤 위에 혼을 위로하는 오륜탑이 서 있다.
 
일본군은 조선의 의병들과 농민들이 적극 전쟁에 참여하여 일본 육군과 싸워 그 예봉을 꺾으려고 전투에서 전사자의 코를 베기 시작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부하들이 코 1,300개를 잘랐다고 기록했다. 일본 오카마야현 쓰야마시 미미즈카에도 코무덤이 있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아이들이 울면 “울면 안돼, 에비”라고 말한다. 이 말은 울면 코나 귀를 일본군이 잘라간다는 이비(耳鼻)였으나 나중에 에비로 변형됐다. “눈을 뜨고 있어도 코 베어간다.”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됐다.
 
코무덤은 한동안 방치되다가 메이지시대에 들어와 히데요시가 복권되고, 풍국신사가 복원될 때 재단장되었고, 1915년에 다시 고쳐졌다. 히데요시를 존경하는 오바 이와지로가 히데요시의 공을 치하하기 위하여 시주금을 낸 사람 이름을 돌기둥에 넣었다. 현재 전국에서 관광객과 수학여행단이 버스를 타고 찾아와 코무덤을 보고 간다.
 
 
 

3. 도도 다카토라의 『고산공실록』

 
일본 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와 가토 요시아키, 구루시마 미치후사 등은 간몬해협의 빠른 물살과 오랜 기간 명나라 연안을 휩쓸며 약탈하고 해상전투 경험이 풍부해 조선 수군의 전력을 우습게 생각하고 힘으로 제압하려다 큰 낭패를 보았다.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 4명의 지휘관과 4,500명의 수군 병력은 초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서 부대 편제에는 없으나, 1차 침공부대를 부산에 수송한 수군으로 나타나 있다. 다카토라는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에게 대패한 적이 있다. 그는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한 번에 물속에 수장시킨 장수로 기만전술에 아주 능했다.73) 그는 일본에서 성을 19개나 쌓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큰 신임을 얻었다.
 
『선조실록』 97권, 선조 31년(1598) 2월 11일 병인 4번째 기사에는 왜적의 진중에서 도망쳐 온 진해의 전풍상이 왜적의 상황을 상세하게 아뢰는 글이 실려 있다.74)
 
도도 다카토라는 법명이 도모요시로 센코쿠시대부터 활약한 노련한 장수였다. 도도는 주군을 아홉 번이나 바꾼 변절자이지만,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여겨 히데요시가 무척 아꼈다. 다카토라는 축성술이 뛰어나 일본의 우와지마성, 이마바리성, 사사야마성, 쓰서이가성, 우네노성, 제재성 등 19개 성을 축성했다. 순천왜성을 쌓은 사람이 도도 다카토라이다. 정유재란 당시 육전에서 크게 진 왜군 선봉장 우끼다히데이와 도다 다카토라는 전라도 지역을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3개월간 성을 쌓았다. 이후 이성은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끄는 14,000명의 왜병이 주둔하며 조명연합군과 두 차례 전투를 벌인다. 다카토라 부대는 남원성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양민을 죽였다.75) 남원성전투에는 명나라 부총병 양원이 이끄는 명군 기병 3,000명과 남원부사 임현이 이끄는 7,000명의 군민이 성을 굳게 지켰다. 양원은 남원성에 주둔하며 성벽에 성가퀴를 올리고 참호를 파 전투에 대비했다. 8월 12일 일본군 선봉장 유키나가가 남원 근교에 도착해 주둔했다. 전라병사 이복남도 군사 1,000명을 이끌고 남원성으로 달려가 남문으로 입성해 북문에 배치되었다. 다음날 일본군 본대가 도착하여 일본군의 숫자는 56,000명이 총집결하여 공세를 펼쳤다. 전투가 치열해지자 명나라 기병 1,000명은 성 밖으로 나갔으나 조총에 밀려 후퇴했다. 다급해진 양원은 왜장 유카키나가에게 휴전 강화를 시도했으나 거절당한다. 남문과 서문이 일본군 수중에 넘어가자 양원은 휘하 기병 50명을 데리고 남원성을 탈출했다. 성안에 남은 조선군은 전라병사 이복남의 지휘로 끝까지 싸우다 화약창고를 불태워 오웅정, 임현, 김경로가 자결하고, 성안에 남은 명 군사들과 조선군 및 주민들은 항전하다 모두 전사했다. 당시의 남원성 전투 상황은 일본군에 종군하여 따라다녔던 승려 케이넨의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 자세히 기록되었다.76)
 
다카토라의 축성 기술은 석벽을 높이 쌓고 해자 설계에 뛰어났다. 그는 축성의 쌍벽을 이루는 가토 기요마사가 석벽의 휨을 중시하는 것에 대비가 되는 장수이다. 도도 다카토라 가문은 선조 대대로 영주였지만 다카토라가 태어날 즈음에는 몰락하여 일개 농민에 불과했다. 여러 영주를 모시다가 시즈카타게 전투에서 무공을 크게 세워 히데요시로부터 상을 받아 1만 석의 다이묘로 승진했다. 덴쇼 15년(1587) 규슈 정벌에도 종군했다. 덴쇼 19년(1591) 히데나가가 죽자, 그의 조카 하시바 히데쓰구를 주군으로 모시고 임진왜란 때 수군 9,000명을 이끌고 대리 출전해 옥포해전에서 조선 수군에게 패전했다. 분로쿠 4년(1595)에 주군 히데쓰구가 처형당하자 다카토라는 천태종 고야산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된다. 다카토라의 재능을 아까워한 히데요시가 다카토라를 소환하여 환속시키며 7만 석 다이묘로 승진시켜 현재 시코쿠 에히메현 우와지마시를 주고 니혼마루 전함을 선물로 전한다. 우와지마시는 거친 태평양 바다에 접한 해양도시로 이곳 사람들은 해전과 노 젓기에 아주 능숙했다. 다카토라는 게이초 2년(1597) 정유재란 때 수군을 이끌고 참전한다. 다카토라는 히데요시의 명령대로 조선 수군을 격파시킬 방안을 모색하며, 조군 수군이 나타나면 전투를 안 하고 항상 도망쳤다. 다카토라는 성을 축성할 때처럼 해전 계획을 세우고, 조선 수군의 동태를 파악했다. 조선 수군이 전 함대를 이끌고 절영도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가게 만들고는 뒤를 계속 추적해 기습작전으로 칠천량에서 승리했다. 다카토라는 1598년 음력 7월 19일 조선 수군통제영이 있는 고금도를 기습 공격했지만 절이도 해상에서 50여 척의 군선을 잃었다. 다카토라는 용맹한 우와지마 수군을 이끌고 서해로 진출하려고 나섰지만, 하루 물살이 4번 바뀌는 울돌목 수로에서 치열하게 전투하다 팔에 화살을 맞고 배 133척을 잃어버리고 명량해전에서 패전했다.
 
일본군은 1598년 11월 17일~19일 사이에 노량해전에서 패하며 대부분 철수하였다. 도도 다카토라는 일본군의 철수를 보고하고, 12월 말 태합 히데요시의 죽음과 유언이 공개되었다. 이로써 일본의 7년 전쟁은 종결되었지만 많은 과제가 남아 피로인을 쇄환하기 위한 회답겸쇄환사가 1607년 1월에 일본에 도일했다.
 
고산공실록은 다카토라의 가신이나 부하가 명량해전의 내용을 상세하게 적어 보고한 문서이다.77) 원래는 일본의 좌군 행정관 모이민부 대부가 작성해야 하나 전투 중 바다에 빠지고 화살을 7발이나 맞아 다른 사람이 작성했다. 다카토라는 귀국 후 8만 석의 다이묘가 되어 사카지마 마루토키성을 개축해 우와자마성으로 개명한다. 다카토라는 게이쵸 3년(1598) 8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어 히데요시의 가신단이 무단파와 문치파로 분열하는 것을 간파하고 재빨리 무단파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측에 가담한다. 게이초 5년(1600) 이에야스가 거병하자 병력을 이끌고 종군한다. 이에야스는 전쟁이 끝난 후 도도 다카토라에게 20만 석 영주로 봉한다. 이에야스가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운 다카토라를 은상하고는 “국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다카토라의 손을 빌리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알렸다. 이에야스가 임종할 때 다이묘로는 유일하게 다카토라가 참석했다. 그러나 불교 종파가 달라 이에야스의 침상 곁에 있는 것을 이에야스가 허락되지 않자, 바로 불교 종파를 개종하고 주군의 침상을 지켰다. 이에야스 사후에는 쇼군 히데타다를 섬겼다. 말년에 눈병을 크게 앓아 실명하고, 간에이 7년(1630) 음력 10월 5일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다카토라는 생전에 문학과 다도에 뛰어났으며 무용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재주가 많았다. 그는 “항상 죽기를 각오하면 마음에 동요가 없는 법이다.” “무사는 주군을 7번 바꾸지 않는다면 무사라고 말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4. 조선 피로인과 기술 약탈

 
 

4-1. 도조(陶祖) 이삼평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공 시 정규군 편성 외에 도서, 공예, 포로, 금속, 보물, 축부를 담당하는 부대를 편성해 집중적으로 약탈하고 여러 방면의 기술자를 납치했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일명 ‘도자기 전쟁’이라고 한다. 기술자를 일본에 데려오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일본군은 계획적으로 400여 명의 조선 도공을 비롯한 각종 기술자를 납치했다. 제2군에 소속되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제일 유명했다. 제2군은 웅천, 진주, 김해, 울산, 경주 지역에서 도공을 끌고 갔다. 조선에서 끌려간 도공들은 집단을 이루며 한 곳에 살았는데, 그 대표적인 지역이 나베시마의 영지였던 규슈의 아리타(有田)였다.
 
2016년 나가사키에 거주하는 히데토 기무라 선생님의 안내로 이마리야키의 중심 마을인 오오가와치야마(大川內山)의 도자기공장을 구경했다. 오오가와치야마의 도자기역사는 400년 전으로 올라간다. 일본 최초로 자기를 생산했던 나베시마번(鍋島藩)은 보다 양질의 도자기와 기술유지를 위해 1675년에 아리타로부터 오오가와치야마로 번요를 이전하고 그 기술과 기법이 밖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보호하였다. 도산신사는 도조(陶祖) 이삼평을 모시는 신사로 이삼평 백자 생산 300주년을 기념하여 1916년 아리타 산정에 건립되었다.78) 이삼평은 진주성을 공격한 나베시마의 병사들에게 1594년 피랍되어 일본에 온 도공 중 한 명이다. 그를 포함한 도공 18명은 외부와 단절된 채 일본 황실에 바치는 도자기를 생산했다. 이삼평은 더 좋은 고령토를 찾기 위하여 주군의 허락을 얻어 사가현을 전전하다 1616년 아리타 동부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양질의 고령토를 발견하고 단다구니에 가마를 세워 첫 백자를 구웠다. 아리타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1661년부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거쳐 유럽에 수출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아리타 주민 가운데 마쓰모토, 후루타, 이와나가, 히사토미 등의 성씨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조선 도공의 후예라고 한다. 1959년에 도조의 비석 일부가 발견되어 시로카와 묘지에 옮겨지고 아리타의 사적으로 지정했다. 2016년이 백자 생산 400주년이 되는 해로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4-2. 심수관家

 
시조 심당길은 본명은 심찬이다. 400년 전의 일이라 자료도 부정확하고 문헌이 별로 없지만 전해오는 내용은 1598년 정유재란 때 사쓰마(가고시마)국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 병사가 남원과 순천 성에서 도공 80명을 납치해 사쓰마국으로 데려왔다. 그 당시 심당길이 청송심씨 출신으로 왕자를 모시던 무관인지, 의병인지, 일본에서 살기 위하여 도공이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규명이 되지 않고 있다, 사쓰마에 간 도공들은 조선식 가마를 만들어 도자기를 생산하였으나 현지 주민과 언어가 통하지 않아 마찰이 잦았다. 1603년 도공들은 와오키 군(日常郡) 나에시로가와로 이주하고 1604년부터 조선식 가마를 만들어 구로몬(黑物)이라는 조선 분황사기를 만들었다. 나에시로가와에 옥산궁(玉山宮)을 지어 단군을 모시고, 음력 8월 15일이면 제사를 지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메이지시대까지 한복을 입고, 조선말을 하였으며, 결혼도 조선인끼리만 하였다. 도자기의 중요성을 아는 규슈 사쓰아번의 영주(領 호) 시마즈는 심당길 등 이 마을 도공에게 사무라이 대우를 하였다. 1614년 심당길 등은 시로사쓰마(白物, 시로몬)를 생산하였다. 1615년 박평의와 함께 황실도자기 총책임자가 되어 1628년까지 종사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12대 장인 심수관(1835~1906)은 근대 공장 제조방식을 도입하여 대형 도자기 생산에 나섰다. 장인이 만든 창조적인 매화병은 전면에 화려한 금박 채색을 하고 일본 고유의 은은한 자연풍경과 전통복식을 한 인물상, 풍속, 동물 등을 화병에 꽉 채워 넣어 유럽인들은 감탄했다. 정교한 투각 기법과 화려한 금채 기법이 돋보이는 매화병은 인기가 높았다. 심수관은 1873년 오스트리아 비인만국박람회에서 호평을 받고 천황가의 관심 속에 귀족층에 사랑을 받았다. 1901년 일본제국 녹수훈장과 공로상을 받았다. 미국과 독일 국제박람회에서 상을 수상하고 도자기가 대량으로 유럽에 수출돼 선풍을 이어가면서 심수관가는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그래서 후대 장인들은 모두 그의 이름만 사용하며 사쓰마야끼를 보전하고 있다.79) 심수관은 가문에서 소중하게 보관하던 도자기 명품 몇 점을 남원에 기증하였다. 청송군은 2014년 심수관 도예전시관을 건립하여 도자기 151점을 소장하고 있다.
 
일본 땅에서 조선 도공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불렀다는 노래는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오난 날이나 오나리나 나루마따 오나리라, 나른 쪼물로또 세또로꾸 오나리라,” 노래를 해석하면 “오는 날이나 오늘이나 날마다 오늘이라, 날은 저물어도 새도록 오늘이라.”이다.
 
 
 

4-3. 몽유도원도

 
임진왜란 당시 일본 병사들이 약탈한 문화재는 대부분 개인 소유로 소재지 파악이 어렵다, 당시 일본에 건너간 대표적인 작품이 안견의 「몽유도원도」이다.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경상도 지방의 많은 전적과 탑, 불국사의 불상과 불경 등을 약탈하였다.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특별전으로 ‘여민해락(與民偕樂)’ 전시회에 일본 나라현 덴리(天理) 대학에서 「몽유도원도」를 빌려와 공개했다. 발문은 안평대군, 신숙주, 정인지, 박팽년, 성상문 등 22인이 쓴 찬사의 글 23편이 있다. 여민해락은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뜻이다. 이 작품은 1447년 제작된 작품으로 11.2m와 8.57m 두루마리 형태이다. 1893년에 일본 규슈 가고시마에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가 1939년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림은 처음에 상당히 컸으나 표구하는 과정에서 38.6cm×106.2cm로 변했다. 3번 국내에서 전시되었다.
 
 
 

4-4. 조선인 노예

 
1598년 일본 나가사키에 머물던 이탈리아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Francesco Carletti)는 『나의 세계 일주기(My Voyage Around the World)』에서 조선에서 건너온 노예들의 실상을 자세히 기록했다. 필자는 1965년에 출간된 53쪽 분량의 책을 읽으면서 당시의 참상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조선에서 모든 연령대의 수많은 남녀가 노예로 몰려왔다. 그중에는 아름다운 여인들도 있었다. 나도 조선인 노예 5명을 겨우 12 이스쿠두80)에 살 수 있었다”라고 할 정도로 무역업이 활발했던 항구 나가사키에는 중국인, 벵골인, 일본인, 조선인, 흑인 등 다양한 노예들이 거래되었고, 노예시장이 대단히 번창했다. 도쿄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학부 교수인 루시오 데 소우사(De Sousa, Lúcio) 교수는 포르투갈인으로 대항해 시기인 1555년부터 1590년까지의 포르투갈 등 서구 식민제국들에 의해 이루어진 중국, 일본, 필리핀 등 아시아인들의 노예 실태를 조사하여 책으로 발간했다. 책에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멕시코로 팔려간 일본인 노예기록도 담겨 있다. 400여 년 전 일본인들의 노예무역의 희생양으로 마카오, 인도 등지로 팔려나간 조선인이 많았다.81)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은 약 10만 명으로 추정되며, 여러 지역에 조선인이 거주하는 부락과 정착촌이 있었다. 일본 학자들이 임진왜란 피로인(被擄人, 포로)을 발표한 논문은 수량이 많다, 노성환 교수는 『임란포로,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 책을 2015년 출간했다.
 
 
 

4-5. 수사 권 빈체시오

 
선교사 세스페데스가 순천왜성에서 선교하다 들통나 일본으로 돌아갈 때 조선인 소년 2명에게 세례를 주고 일본에 데려갔다. 그중 한 명의 이름이 빈센트 카운(Vincent Caun)이다. 카운은 권씨 성을 가진 13살 아이로 조선 무신의 아들로 알려졌다. 고시니는 이 아이를 자신의 딸인 마리아에게 보냈다. 독실한 가리스탄 신자인 마리아는 소년을 예수회에서 세운 신학교에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예수회는 권 빈체시오(1580~1626)를 조선 전교를 위해 1614년 연경으로 향했다. 그러나 조선 국경이 예전보다 더 강화되어 조선으로 가지 못하고 1618년 일본으로 돌아왔다. 일본에 돌아온 후 그는 조선인 포로를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해 나가사키 고려정이라는 마을에 급속도로 복음이 퍼졌다. 에도막부가 기리스탄 박해를 시작하여 신자들은 1625년 체포되어 시마바라 감옥에 끌려가 온갖 형벌을 당했다. 1626년 나가사키 니시자카 언덕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나가사키 26위 성인기념관 고문헌에는 빈첸시오 흔적이 남아 있다. 권 빈첸시오 수사는 1867년 비오 9세 교황이 일본인 순교자 205명을 복자로 선포할 때 조선인 10명 중 1명이다.
 
 
 

4-6. 일요상인 여대남

 
하동에서 끌려온 13살 여대남(余大男)은 어릴 적 이름이 호인(好仁)이다. 호인은 경남 하동군 양보면 출신으로 전쟁을 피해 쌍계동 보현암으로 피신을 했다. 그런데 진주성을 차지한 병사들이 인근 절에 숨에 있는 어린아이를 잡아 1593년 포로로 일본에 데려왔다. 13세 아이가 매우 총명하여 이를 전해 들은 가토 기요마사는 호기심에 한마디 말을 하였다. 그러자 아이는 붓을 들어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 803~852)이 지은 산행(山行)이란 시 구절을 써 내려갔다. 「獨上寒山石逕斜 白雲生處有人家」
 
홀로 깊은 산에 올라 돌길을 걸어가니 흰 구름이 피어오르는 곳에 인가가 있네.
 
글을 받아본 가토 기요마사는 아이가 글을 알고 시를 쓴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 가토를 따라 종군한 일련종의 고승 니쓰신(日眞)은 여대남을 본 순간 훌륭한 승려로 키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자기 절로 데려왔다. 니쓰신은 가토와 사명당이 회담할 때 필담으로 통역을 했다. 일본 승려는 사명당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담대함과 지략을 지녔음을 알았다. 가토가 글씨를 받으려고 부채를 보냈을 채 유정은 “진실로 내 것이 아니라면 비록 티끌 하나도 취하지 말라.”고 써주었다. 니쓰신은 가토를 설득해 여대남이 출가할 수 있도록 권유했다. 호인은 일요(日遙, 니치요)라는 법명을 주고 일본 최고의 불교대학인 교토 육조강원(六條講院)에 유학시켰다. 일요는 강원을 졸업한 뒤에도 계속 학문과 수행에 매진했자. 1609년에는 혼묘지 초대 주지였던 니쓰신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31살에 혼묘지(本妙寺) 3대 주지인 일요상인(日遙上人, 1580~1659)이 되었다. 일요는 혼묘지 주지를 맡은 뒤 묵묵히 10여 년간 전법에 힘을 쏟았다. 쇼닌(上人)은 고승을 뜻한다. 그는 조선 출신의 훌륭한 고승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 지역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고려상인(高麗上人)이었다.82) 40세 때인 1620년 10월 3일 고향 하동에서 아버지 여천갑이 보낸 편지를 받은 후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읽었다. 백방으로 노력하여 조선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했으나 귀국을 허락받지 못해 매일 “부모님! 제가 돌아갈 때까지 부디 천수 누리며 기다려주십시오.” 하고 부처님께 기도했다. 일요상인은 혼묘지에서 79세로 입적했다. 사찰에는 부자지간에 오고 간 편지가 보관되어 있다.
 
 
 

4-7. 유학자 이진영과 아들 이매계

 
1593년 경상도 창녕군 영산에 살며 곽재우 장군 휘하의 의병으로 활동하다 왜장 아사노 유키나가가 이끄는 병사들에게 포로로 잡혀 끌려간 22살의 이진영은 부산항에서 왜구의 배 선창에 실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9일 만에 오사카에 도착 후, 이름도 모르는 농촌에 끌려가 혹독한 노예 생활을 했다. 그러다 와카야마시에 사는 니시유 에먼에게 팔려갔다, 이진영은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발음이 이상한 조선 출신의 승려 사이요를 우연히 만나 도움을 청한다. 사이요는 이진영의 유식함을 보고는 자기가 거주하는 해선사 주지에게 사정을 말하고 도움을 간청한다. 주지의 도움으로 주인에게 몸값을 치른 후 노예 신분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일본 승려가 되었다. 절에서 수도하다 나이 40세에 환속하여 46세에 일본 여인과 결혼하고는 이매계를 낳는다. 이진영은 서민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일본인들에게 조선 유학을 가르쳤다. 그는 1619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열 번째 아들 요리노부가 와카야마의 초대 번주로 부임하자 1,336자로 된 장문의 글을 써 요리노부에게 보낸다. 유학자 이진영은 글에서 번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자세히 언급했다. 덕목의 내용은 “번주는 천하에 누구보다 걱정을 먼저 하고, 즐거움은 나중에 느껴야 한다. 시정할 때는 마음을 넓게 쓰고 도량을 넓혀라. 계율을 정해 모범으로 삼고 현인을 중용해야 나라와 백성은 행복해진다. 정의를 가지고 부정하지 않으며, 번정은 백성을 기본으로 하고, 근본을 지키면 나라는 태평해진다, 정치는 덕으로써 하면 그 덕은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진다.”이다. 글을 다 읽은 번주는 유학자 이진영에게 신하가 될 것을 거듭 요청했다. 이진영은 “나에게는 조선 왕이 있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라고 완곡하게 거절한다. 번주는 이진영에게 신하 대신 학문을 강의하는 시강을 요청해 이진영은 승낙했다. 이진영은 1626년부터 2년간 대마도에 머물며 조선국 사신을 응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매계는 아버지에게 유학을 배워 와카야마의 도덕 규범이 되는 부모장(父母壯)을 짓는다. 와카야마 번주는 에도막부 250년 동안 이를 번정의 기본 지표로 삼았다. 이런 기구한 운명의 이진영·이매계 부자의 묘비가 있는 곳이 바로 해선사이다. 이 이야기는 일본 초등학교 5학년과 6학년 교과서에 실려 있다.83) 필자는 와카야마시의 해선사 이진영 묘비를 보려고 방문했지만, 문이 잠겨 있어 밖에서 합장했다. 와카야마성 천수각에는 유학자 이매계의 글씨가 걸려있다.
 
 
 

4-8. 외교관 손문욱

 
임진왜란 해전지를 답사하면서 남해현감을 지낸 손문욱(孫文彧) 이름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손문욱은 임진년에 포로로 일본에 잡혀가 히데요시의 양아들이 되었다가 조선에 파병된다. 그는 고시니 유키나가의 부장이 되어 남해에 머물면서 눈치를 보다가 조정에 귀순 의사를 표명해 선조 30년(1597) 조선에 귀순한다. 조정에서 요청하는 일을 하다가 이순신의 요청으로 1598년 11월 명나라 진린의 진영에 들어가 순천왜성을 공략할 계책을 논의한다, 손문욱은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통제사 이순신의 배를 타고 있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일본 병사가 쏜 총탄을 맞아 절명할 때 장군의 옆에 있었다. 그는 조선 수군을 지휘하여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이 종결된 후 전투 공로를 인정받아 첨사에 임명되었다.
 
일본은 히데요시 사후 동군과 서군으로 분열되어 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전투가 벌어져 내전이 계속 이어졌다. 쓰시마가 1601년 6월에 피로인 250명을 돌려보내며 교섭 요구를 해오자, 일본 내부 실정을 파악하려고 1602년 2월 전계신과 손문욱을 정보 수집과 강화 제의 여부 확인을 위해 쓰시마로 파견하였다.84) 선조 37년(1604) 6월 사명대사가 일본에 탐적사(耽謫使)에 갈 때 대사를 수행하여 조선과 일본이 강화회담을 맺고 국교를 재개하는데 공헌했다.85) 손문욱은 광해군 2년(1610) 11월에는 쓰시마 사신 다치바나 도모마사를 영접하러 박대근과 함께 부산에 파견되었다. 손문욱에 대한 기록은 광해군 9년(1617)까지 기록은 있으나 이후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경주세보손씨』에 따르면 “손경원의 8세손으로 원래 이름은 손요인(孫要寅)이며 무과에 급제해서 흥양현감, 순천 병마절제도위를 지내고, 무덤은 파주에 있다,”고 한다.
 
 
 

4-9. 임해군의 아들과 딸

 
일본 육군의 빠른 공격으로 분조를 이루고 함경도로 피난을 떠난 선조의 큰아들 왕자 임해군과 6번째 왕자 순화군(順和君), 김귀영, 윤탁연 등은 1592년 9월 의병을 모집하러 회령에 갔다가 국경인(鞠景仁) 등의 반란으로 왜군에 넘겨졌다. 함경도로 진출한 왜군은 계속 올라가면서 호랑이를 사냥했다. 함경도 의병과 승려들의 의승군이 활약하고 명나라 군대가 참전을 결정하자, 위기를 감지한 가토 기요마사 군대는 남하하여 울산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을 쌓고 주둔하며 온갖 횡포를 부렸다. 사명당은 1593년 서생포왜성에서 가토 기요마사를 만나 강화회담(講和會談)을 하였다. 임해군은 명나라 심유경과 가토의 협상으로 2만 량의 은을 왕자 석방의 몸값으로 지불하였다. 가토는 1593년 7월 왕자를 풀어주었으나 선조의 맏손자로 태어난 임해군의 4살 어린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누나와 함께 포로가 되어 일본에 남게 되었다.
 
일본에 남게 된 어린 왕자는 13살이 되던 해 1601년에 일련종 법성사(法性寺)에서 출가하여 태응(台應)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왕자는 성장하여 3년 뒤 교토의 본국사(本國寺) 구법단림(求法檀林)에서 3년간 불교 교리를 공부한 후 정식 학승(學僧)이 되었다. 21세 되던 해 승려 일연(日延, 1589~1665)은 아버지 임해군이 1608년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1609년 강화도에서 35세 나이에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일연은 포교와 수행에 더욱 몰두하여 26세의 나이에 관동 치바(千葉) 반고사(飯高寺) 반고단림(飯高檀林)에서 심도 있는 교육과정을 마친 후 가관원(可觀院)이라는 당호 및 일연상인(日延上人)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일연은 치바의 탄생사(誕生寺) 제18세를 역임하면서 일연종을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하여 포교와 계율 정신 전달에 온 힘을 쏟았다. 일연상인은 1614년 후쿠오카에 용잠사(龍潛寺)를 건립하면서 불교의 가르침을 대중화하며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도록 교화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후쿠오카 3대 번주 쿠로다 미츠유키(黑田光之, 1628~1707)가 불교에 귀의해 향정사(香正寺)를 지어 일연상인은 그곳에서 20여 년간 수행과 교화에 전념하고 민중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일연상인은 72세에 “조선 땅이 보이는 땅에 거주하고 싶다.”라는 뜻을 번주에게 전했다. 쿠로다 번주는 일연상인(日延上人)이 주석할 곳을 해복산(海福山)에 정하고 1660년 묘안사(妙安寺)를 건립해 주석하게 했다. 일본 후쿠오카에는 쿠로다가 바둑 애호가인 일연상인을 만나기 위해 만든 상인교(上人橋)가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 있고, 묘안사를 비롯한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는 고려일연상인(高麗日延上人) 표식이 있다. 일연이 창건한 후쿠오카 향정사(香正寺) 문서인 『향정사 연기(緣起)』에 자세한 기록이 있다. 일연상인은 조선 땅을 바라보며 1665년 1월 26일 77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4-10. 조선 금속활자 약탈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에 건너간 문물은 성리학, 금속활자, 전적(典籍), 도자기 제조기술, 한의학, 두부제조법, 석루축조술이고, 반대로 일본에서 조선에 건너온 것은 고추, 담배, 조총 등이 있다.86) 중세 유럽에서 국가의 문화 수준 척도는 인쇄술로 여겼다. 1590년 유럽에 갔던 덴쇼 소년사절단이 귀국하면서 구텐베르크 활자인쇄기를 도입하였다. 히데요시는 소년사절단을 만나고 유럽의 인쇄 소식을 들었다. 나가사키와 아마쿠사에서는 기리스탄 도서 인쇄를 하여 선교를 하였다. 금속활자의 출현은 인류 문화사에 가장 커다란 사건이다. 오늘날 금속활자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출판과 지식의 축적은 없었다.
 
서울 중구 주자동은 조선시대 활자를 만들던 주자소(鑄字所)가 있어 유래된 지명이다. 태종 3년(1403)에 설치된 주자소는 활자를 대량으로 주조하여 서적을 간행하고 학문을 진흥하기 위해 만든 관청이었다. 태종은 활자제작에 관심이 있어 열정을 보이며 ‘계미자(癸未字)’라 불리는 10여만 개의 금속활자를 주조하였다. 이렇게 주조한 활자로 시전(詩傳),서전(書傳),좌전(左傳)등을 간행하였다. 당나라에서 목판 인쇄가 크게 성행한 것은 재상으로 있던 풍도가 목판 인쇄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개량하여 많은 불경을 950년경에 인쇄해 둔황 유적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중국 사람들은 풍도를 인쇄물의 발명자로 여긴다. 송나라 때는 필승(畢昇)이 1040년에 찰흙을 재료로 육면체를 만들고 문자를 새긴 뒤 구워 활자로 사용해 인쇄하였다.
 
1435년에 세종이 형조참판 남지(南智)를 성절사로 명나라에 파견하여 금속활자 인쇄에 대하여 조사하고, 서적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음주자치통감(音註資治通鑑)』 1질을 받아왔다. 조선은 한글이 창제되어 문자가 대중화하면서 인쇄문화는 유례가 없는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일본의 적장 우키다 히데이에나 고나시 유키나가는 임진왜란 당시 대량의 동활자와 인쇄에 필요한 도구를 전리품 목록으로 정하고 20만 본 이상의 활자를 약탈해가 조선은 70여 년 동안 조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 본광국사일기에 따르면 “『군서치요』87)를 다시 찍는데 사용한 활자는 조선에서 가져온 100상자에 들어있던 크고 작은 동 활자 8만 9,814자였다.”라고 기록했다. 히데요시는 1593년 고요제이 천황(後陽成天皇)에게 동활자를 바쳤다.
 
 

 
66) 羅麗馨, 「豐臣秀吉侵略朝鮮—日軍軍中的傳教士與僧侶」, 國立中興大學歷史學系教授, 『漢學研究第』 33卷 第1期, 2015,
67) 야마구치(山口正之), 「세스페데스의 서간문 연구」, 종군 신부 주장, 1930,
68) 다네가시마 도주는 표착민을 절에 6개월간 머물게 하고 포르투갈인 페르낭 멘데스 핀투(Fernao Mendes Pinto, 1509~1583)에게 철포의 사용법을 배우고, 철포를 돈을 주고 사들였다. 핀투는 1524년 범선을 타기 시작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탐험하다 13번 붙잡혔고, 17번 상인에게 팔렸다. 핀투는 1558년 리스본 고향에 돌아가서 『핀투여행기』를 남겨 1614년에 출간되었다.
69) (明) 宋應昌, 萬曆 21(1593) 『經略復國要編』 「壬辰之役史料滙輯」 권2, 660쪽 「李提督書」 朝鮮所備龜船甚堅且夥 不侫早已行牌本國 火遠差委能將 率兵列船 阻截海 大將軍亦須遣兵繼後.
70) 禦倭西路監軍 山東布政使司右參政.
71) 『(嘉慶)章安王氏宗譜』는 1816년(청 가경 21)에 절강 타이주(台州)와 그 일대에 거주하는 장안(章安, 현 台州 椒江 북부) 왕씨의 집안에서 편찬된 족보이다.
72) 박현규, 「(嘉慶)章安王氏宗譜에 수록된 宣祖, 李德馨, 李舜臣 간찰 고찰」, 『군사』 제101호, 2016.
73) 오대석, 「손자병법의 詭道로 본 칠천량 해전 연구」, 『군사연구 126집』, 2023.
74) 전풍상은 임진년 8월 산골로 피란했다가 적병에서 잡혀 왜장 산도의 진중에 소속되어 안골포에 머물다 산도를 따라 일본을 건너가고, 부장 우다능기의 종이 되어 복역하면서 이따금 문서를 선소(船所)에 전달하는 일을 담당했다.
75) 정영태, 「정유재란시 남원성전투와 만인의총」, 『역사학연구』 제56호, 2014.
76) 국립진주박물관은 2024년 국역사업으로 『朝鮮日日記』 1종 91면, 원문 글자 수 47,775자를 국역하고 있다.
77)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은 도도 다카토리의 문서를 모아 만든 전기이다.
78) 이미숙, 「조선사기장 李參平의 피랍 과정과 활동에 관한 연구」, 『인문과학연구』 제26집, 2010.
79) 정영구, 「沈壽官家의 기억, 그 변화와 활용‒ 청송 심수관 도예전시관이 갖는 의미와 관련하여」, 『東洋學』 第82輯, 2021.
80) 이스쿠두(escudo)는 포르투갈에서 쓰이던 통화단위로 ‘방패:를 뜻하는 낱말이다.
81) 루시오 데 소우사, 오카 미요코, 신주현 역, 『대항해시대의 일본인 노예』, 산지니, 2021.
82) 노성환, 일본 구마모토의 임란포로 여대남에 관한 연구, 일본어문학 제46호, 2009
83) 김충식, 「와카야마 유학의 비조(鼻祖) 이진영 父子-야만의 왜인들에 사람의 도리 가르치다」, 『신동아』, 2005.
84) 김문자, 「임진왜란 이후 朝·日간의 국내 사정과 통신사 파견-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 파견을 중심으로」, 『항도부산』 제38호, 2019.
85) 荒木和憲(아라키 가즈노리), 「임진전쟁의 강화교섭」, SGRA 제59회 포럼, 2018.
86) 이장희, 『임진왜란사 연구』, 394쪽.
87) 『군서치요(群書治要)』 당 태종이 전대 군주들의 득실을 열람하고 싶어 위징, 우세남, 저량, 소덕언에게 명하여 631년에 편찬한 책이다. 50권이다.
【역사】 정유재란 고찰
• Ⅲ. 정유재란
• Ⅳ. 임진왜란 외국 기록물과 피로인
• Ⅴ. 맺음말
(2024.08.23. 21:21)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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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