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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성동구 서울특별시 성동구 정보
서울특별시 성동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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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구의 역사문화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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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3. 02:38) 
◈ 성동구의 역사문화자원
◈ 역사적 사건과 현장 - 고려시대부터 경치좋은 섬 저자도(楮子島), 뚝섬 상수도 수원지와 대현산 배수지의 설치, 1939년 부회의원 선거에서 민족차별 / ◈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한종유 (1287∼1354), 자초 (1327∼1405), 조만영 (1776∼1846), 임흥순 (1895~1971)
목   차
[숨기기]
 

1. 역사문화자원

 
 

1.1. 역사적 사건과 현장

 
◈ 고려시대부터 경치좋은 섬 저자도(楮子島)
 
이 저자도는 한강의 두모포 앞에 있던 경치 좋은 섬으로 중랑천과 한강이 합류되는 곳에 생겨난 삼각주이다.
 
· 고려말 한종유(1287∼1354)의 별장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세종이 이 섬을 둘째딸 정의공주에게 하사하여 공주의 아들 안빈세에게 전해져 내려왔다.
 
· 1930년대
동서의 길이 2㎞, 남북 885m, 면적 118만㎡의 큰 섬이 을축년(1925년) 홍수와 1936년 뚝섬 제방 공사와 경원선 철도 개축에 섬 흙을 파내 사용해서 섬 모양이 변형.
 
· 1970년대
압구정일대 고층아파트 공사에 이 섬의 흙을 전부 파다 써서 섬의 바닥마저 물 속에 잠기고 말았다.
 
· 2000년
조그만한 삼각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 뚝섬 상수도 수원지와 대현산 배수지의 설치
 
서울특별시의 상수도는 전차, 전기 등을 도입한 미국인 콜브란(H. Collbron)과 보스트위크(R. Bos twick)에 의해 부설되고 한강에서 취수하여 뚝섬수원지 내에서 침전, 여과, 정수한 후 20인치 동관으로 수원지에서 3,334m 떨어져 있는 대현산 배수지까지 송, 양수하여 여기서 서울에서 처음(1908. 8.) 성내 일원과 용산구에 급수하는 체계였다.
 
 
◈ 1939년 부회의원 선거에서 민족차별
 
일제강점기인 1939년 5월 20일 실시된 경성부회 의원 선거때 동부(東部)에서 당선된 임흥순(任興淳)은 504표로 경성부 전체에서 최고 득표로 당선되어 일인사회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당장 임흥순을 선거 사범으로 몰아 동대문서에 구속 후 그해 8월 2일 6개월의 실형이 구형되고 이어 8월 9일에는 벌금형 최고액 200원형 언도로 임(任)은 공소, 상고 절차 포기로 이 결정에 따라 의원직을 사퇴했다. 당선자 사퇴강요는 일제하 지방선거 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었고 지방의원 민족차별정책의 한 표본예였다.
 
 
 

1.2.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한종유 (1287∼1354)
한양 태생 고려 문신. 고려의 수도 송경(개성)에서 높은 벼슬을 살며 큰 공을 세우고 그 말년을 고향인 한양 저자도(楮子島)에서 은거하였다. 시호는 문절이고 저서에 『복제집』이 있다.
 
◈자초 (1327∼1405)
고려말 조선초의 스님, 호는 무학·계월간, 성은 박, 경상도 삼지(합천군) 태생, 공민왕 2년 (1353) 원나라 연경에 유학, 이때 연경에서 지공선사와 나옹에게 가르침을 받고 1356년 귀국했다. 그 후 나옹이 왕사의 몸으로 죽을 때 대사를 왕사로 추천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392년 조선개국 후 왕사(王師)가 되었다.
 
◈조만영 (1776∼184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풍양, 호는 석애, 시호 충경이다. 지금의 옥수동 295번지에 그의 주택지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헌종의 모후인 조대비를 낳았다. 글씨에 능하고 저서로서는 『동원인물고』 편술이 있다.
 
◈임흥순 (1895~1971)
서울 출생, 보성고보 졸업, 1939년 일제하 경성부회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민족차별로 의원직 사퇴, 제2대(1950 년 민주국민당 성동 을구), 제3대(1954년 무소속 성동 갑구)국회의원, 대한축구연맹회장(1958년), 서울특별시장(1959년) 역임, 1971년에 생을 마쳤는데 파란 많은 일생을 살다간 풍운아였다.
 
 
 

1.3. 내 고장의 문화유산

 
■사적
 
◈살곶이다리
제160호, 성동구 행당동 58번지에 있는 조선시대 가장 긴 돌다리인 살곶이다리는 1967년 12월 15일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었으며 국유이다. 1973년 수리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렀던 바 현재 반은 돌이고 반은 콘크리트로 되어 있는데, 복원되기 전에는 1920년 대홍수 시 일부가 떠내려가고 이후 반 이상이 손실되어 있었다고 한다. 교폭 20척(6m), 길이 285척(78m)으로 조선조 세종 2년(1420)에 착공하여 성종 13년(1482)에 완공되었으며 교각을 횡렬로 4열, 종렬로 22열을 배치하고 3장의 장대로 건너지른 위에 다시 동틀돌을 놓아 청판돌을 받게 되어 있으며, 좌우의 교안을 장대석으로 쌓았다. 기둥돌 아래는 네모난 주초가 있고 그것은 물밑 받침돌에 의하여 지탱되도록 하였으며, 기둥은 유수의 저항을 줄이기 위하여 마름모꼴로 다듬었다.
 
전체적인 수법으로 보아 구성과 형태가 조화있고 면밀하게 구축되어 있으며 각부의 석재가 장대하고 질박하여 호쾌한 감을 준다. 이 다리는 서울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관문으로 되어 교통·통신상 중요한 구실을 담당해 왔다.
 
살곶이다리라고 부르게 된 까닭은 그 일대가 살곶이벌이라고 부르던 데서 연유되었으며 이곳 살곶이벌의 유래를 살펴보면 뚝섬이라 불려오던 이곳은 옛부터 뚝도·살곶이벌이란 명칭 외에 전관·전교·동교 등으로 불려졌다.
 
 
■무형문화재
 
◈봉산탈춤 성수동 1가 13-442번지
김기수 씨가 예능을 보유하고 있다. 황해도 봉산군 동선면 길양리에서 전승되다가 1915년경 사리원으로 옮겨 전승되던 탈춤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로 1967년 6월 17일에 지정되었으며 현재 전승지는 서울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황해도 탈놀이의 최고봉을 이루었던 봉산탈춤은 이북지방의 큰 명절인 단오날 밤에 개최해오던 행사이며 또 하지의 축제로서 놀이내용은 길놀이·고사·무등춤으로 이루어진 후편으로 구별되고 크게 7과장으로 나누어지는데 제1과장 사상좌춤, 제2과장 팔목중춤, 제3과장 사당춤, 제4과장 노장춤, 제5과장 사자춤, 제6과장 양반말뚝이춤, 제7과장 미얄영감춤으로 되어있다. 봉산탈춤은 그 극본과 춤, 가면, 의상 및 반주음악에 있어 한국 가면극의 해서형의 특성을 잘 지니고 있으며 다른 가면극에 비하여 종교적 의미가 희박하고 민중의 오락적 요소와 사실적인 수법이 특이하다. 김기수씨 외에도 양소운, 윤옥, 김선봉씨 등이 각 과장마다 특색있는 예능을 보유하고 있다.
 
◈서울새남굿 제104호, 성동구 홍익동 414번지
김유감씨가 예능을 보유하고 있다. 새남굿은 서울지역의 전통적인 망자천도굿에 속하며 일반적으로 진오기라 불린다. 진오기굿은 그 규모와 제가집의 사회계층에 따라 세 종류로 나뉜다. 새남굿, 얼새남, 평진오기로 평진오기는 하층민이나 가난한 집안의 망자를 위한 굿이고, 얼새남은 중류층 사람들을 위한 굿이며, 새남굿은 사회의 상류층이나 부유층의 망자천도굿이다.
 
굿은 고조선 이래 한민족의 전통신앙인 무의 종교적 의례로서 오랜 옛날부터 각 지방과 씨족마다 특색을 갖고 자연스럽게 전해내려 왔으며 이 가운데 서울새남굿은 밖도령·영실·안도령·시왕군웅 등의 거리에서 망자 및 저승과 관련된 불교신앙의 내용이 강력하게 내포되어 있으며, 1996년 5월 1일에 뒤늦게나마 중요무형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새남굿은 안당사경맞이와 새남굿으로 구성되며, 안당사경맞이는 새남굿의 전날밤 8시쯤 시작하여 이튿날 새벽 6시경까지 밤새 논다. 먼저 안단사경맞이의 거리순서를 살펴보면 주당물림, 부정, 가망청배, 진적, 불사거리, 도당거리, 초가망거리, 본향거리, 조상거리, 상산거리, 별상거리, 신장, 대감거리, 성주거리, 창부거리, 뒷전거리 등 주로 재수굿과 제차를 같이 한다. 전통적인 새남굿에서는 만신 5인과 잽이 6인이 참여하여 삼현육각인 장고, 북, 피리 한쌍, 대금이 동원된다. 한편 새남굿에 사용되는 음악은 헌천수, 삼현도드리, 반염불, 굿거리, 잦은 굿거리, 중디박산, 취태, 잦은취태, 당악, 늦은타령, 잦은타령, 노래가락, 창부타령, 잦은환입, 가래조 등이 사용된다. 여기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째는 거리가 가장 많고 정치한 구성을 보이며 화려하다. 둘째는 망자와 관련해 무·불교·유교의 관념과 의례가 적절히 편성·혼합되어 있다. 셋째는 조선조 궁중문화의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유형문화재(시지정)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제72호, 성수동1가 642번지
일대에는 뚝섬수원지가 있어 성동구 외 5개구의 급수를 담당하고 있다. 뚝섬수원지 내에 있는 제1정수장은 융희 2년(1908년)에 건축된 우리나라 최초의 정수장으로서 처음에는‘경성수도양수공장’으로 불려졌으며 지금은 서울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되어 수도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울의 상수도는 전차·전기를 도입한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위크 2인의 기업단이 1903년 12월 9일에 고종황제로부터 상수도의 시설·경영에 관한 특허를 받아 1906년에 착공, 1908년 8월에 준공하여 급수를 시작하였다. 송수실은 312.4㎡ 규모로 벽돌조 기와지붕의 건물로서 입구에 화강석 아치문틀을 두고 좌·우 창틀은 반원 아치의 창틀로 쌓은 근대식 건물로 축조되었다.
 
이 상수도는 한강에서 취수하여 뚝섬 수원지에서 침전·여과·정수한 후 20인치 짜리 강관으로 수원지에서 3,334m 떨어져 있는 대현산 배수지까지 송·양수하여 여기서 성동 일원과 용산에 급수하는 체계를 취했는데 만수면의 높이가 종로 네거리보다 67.7m 정도 높은 위치에 있는 대현산에 두 개의 배수지를 설치하고 여기에 9,200여톤의 물을 저수했었다.
 
그 후 당초의 기틀 위에 여러 차례 걸쳐 대규모의 확장 공사를 거듭하였는데 가장 최근의 공사는 1988년 12월 20일 뚝섬수원지에 대해 종래의 일일 50만톤 생산을 일일 100만톤으로 증산하기 위해 개량·확장에 착공한 것으로 1990년 1차로 25만톤을 증산하고, 1991년에 일일 100만톤을 생산하여 성동구 외에도 노원·도봉지역 등에 공급하고 있다.
 
 
■무형문화재(시지정)
 
◈오죽장 제15호, 응봉동 265-73번지
윤병훈씨가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오죽(烏竹) 혹은 반죽(班竹)이라 불리는 검정색의 대나무는 신성한 곳에서만 그 뿌리를 내린다고 하여 옛부터 특별히 여겨왔다. 율곡이 태어났던 강릉 오죽헌에 그리고 민영환이 숨을 거둔 자리에 났다는 것이 바로 오죽인데 이것을 재료로 오죽장을 만드는 기능을 1996년 12월 31일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받게 되었다.
 
오죽장은 표면이 매끄럽고 윤기가 있어 튼튼하고 생동감이 있으며, 자연의 색채 그대로이기 때문에 오래될수록 색채가 더욱 선명해지고 아름다워 정감을 더해 준다.
 
 
 

1.4. 성동구 유적지

 
◈ 孔夫子道統古今淵源紀念碑 옥수동 262-1호에 신라시대 설총부터 조선시대 성혼까지의 역대 충신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
 
◈ 독서당터 옥수동 244번지 동쪽에는 조선초에 국가에서 학자들을 뽑아 일정기간 사가독서 하도록 한 독서당이 세워져 있었다. 그래서 약수동으로 넘어 가는 고개를 독서당길이라 칭한다. 원래 독서당은 세종 8년 집현전 학자들에게 휴가를 주어 사가독서를 하도록 한 것이 효시이다. 독서당원의 수효는 한번에 평균 6명 정도를 선발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세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는 350년간에 320명이 선발되었다.
 
당원으로 선발되는 과정이 큰 관심으로 학문에 정진하여 당원 중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된 호당의 권위는 상당하였다.
 
◈ 전관원터 행당동 66-3, 공양시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각 요로에 설치, 고려 때부터 승려들로 하여금 원을 지키게 하여 병자에게는 약을 주기도 하였고, 조선시대에 와서 이용이 국한되어 점차 폐지되고 민간업자가 담당하는 일이 많았다. 서울에서는 동대문 밖의 보제원, 서대문 밖의 홍제원, 남대문 밖의 이태원, 광희문 밖의 전관원이 있어 서울의 4원이라 하였는데, 그 중 홍제원과 이태원은 지금도 지명으로 전함.
 
◈ 동빙고터 옥수동 8번지, 태조 5년 예조의 속아문으로 한강변 두모포에 설치하여 제사 등에 쓰이던 얼음을 저장하던 곳. 동빙고의 얼음은 종묘와 사직단 등의 제사에 쓰이게 하고, 서빙고의 얼음은 궁궐이나 백관들에게 나누어 줌.
 
◈ 무쇠막 금호4가 246번지 일대는 무수막, 즉 수철리를 한자음화해서 ‘금’은 철에서 인용하고 ‘호’는 수에서 인용하여 금호동이 되었다. 이곳을 무수막, 무쇠막, 무시막이라고 칭하여 수철리라 한 것은 조선시대 주철을 녹여 무쇠솥, 농기구 등을 주조해서 국가에 바치거나 시장에 내다파는 대장쟁이(치장)들이 모여 살았고 대장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 입석포 입석포는 현재의 용비교 북단 부분으로 한강 본류와 중랑천이 합류하는 응봉동 강변에 있던 포구로 두모포보다 작은 나루였다. 주위의 경관이 좋아 예로부터 낚시터로 이용되었다.
 
◈ 응방 태조는 한강 위, 곧 지금의 응봉 기슭에 매사냥을 관장하는 응방을 설치하였다.
 
◈ 남이장군 사당 사근동 190-2호에 남이장군 사당이 있는데 당의 구조는 약 3백평의 대지 위에 4∼5평 정도의 기와로 된 한칸 벽돌 건물이다. 당 주위에는 잣나무 등이 있으며 당 위쪽 언덕에는 1976년에 사근동 쌍용회 일동이 세운 「충무공남이장군지비(忠武公南怡將軍之碑)」라 쓴 비석이 있다. 사당의 건립연대를 이곳 주민들은 약 1790년 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남이 장군이 아차산에서 훈련을 한 뒤에 호랑이를 타고 가다가 잠시 이곳에서 쉬었다 가신 곳이라 전하여 이 터에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 아기씨당 ; 행당동 128-901호 왕십리길 남쪽 언덕 위에는 아기씨당이라는 사당이 있었다. 이 아기씨당이 세워진 것은 옛날 이곳에 공주가 살았는데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공주 자신도 세상을 비관하여 시집가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으므로 동리 사람들이 그의 영혼을 위해 사당을 짓고 영정을 모셔 제사를 지냈다. 그 후 그에게 영험이 있어서 소원을 빌면 성취가 되고, 또 이 동리의 처녀가 결혼을 하면 바로 시댁으로 가지 못하고 신방을 신부집에서 차려 얼마를 지낸 뒤에 이 동네를 떠나야지, 만일 지키지 않으면 재앙이 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아기씨의 처녀혼이 질투를 하는 까닭이라 한다.
 
◈ 부군당 응봉동 100번지, 대림 1차 아파트내에 있음. 건물은 2층으로 기와를 덮었으며, 외벽은 시멘트로 되어 있고 1층은 반지하로 제기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보이며 2층은 제당이다. 2층 당 입구에는 본당의 내력을 기록한 현판이 걸려 있다. 당내의 전면에는 부군할아버지와 부군할머니를 주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당 양쪽 벽면에는 신격 미상의 신상이 각각 한 점씩 걸려 있다.
 
◈ 쌍호정 옥수동 295번지에 있었으며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집이었다. 순조 8년(1808) 12월 6일 조대비(추존왕 익종비)가 이곳에서 출생하였는데 출생하던 날 밤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정자 앞에 와 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쌍호정이라 하였다. 조대비 생가 동쪽에 울창한 노송들이 있었고 그 옆에 있었던 조그마한 정자가 쌍호정이다.
 
◈ 성덕정 성수1가동 110, 지금의 천주교성당 자리, 조선조 임금이 가끔 이 정자에 나와 말을 기르고 군대의 연무를 사열하던 곳이다.
 
◈ 마조단 행당동 살곶이다리 서쪽(지금의 한양대) 언덕, 말의 조상에게 매년 중춘에 제사를 지내던 곳, ‘선목’은 맨 처음 말을 기른 사람이며, ‘마사’는 맨처음 말을 타기 시작한 사람이요, ‘마보’는 말을 해치는 신인데 이들을 정성껏 모셨고 말의 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제사를 지냈다.
 
◈ 황하정 연산군이 풍류를 즐기려고 옥수동 강변인 두모포와 한강리 경계 구역에 세운 정자. 중종이 즉위하여 연산군의 실정을 바로 하고자 노력할 때 이 정자를 예종의 차자인 제안대군에게 하사하였다.
 
◈ 유하정 두모포 북쪽에 있었으며, 조선조 예종의 둘째아들인 제안대군의 재택이었다. 제안대군과 그의 양부 평원대군의 신주 봉안궁인 수진궁에 속한 공청이 되었다가 광해군 때 훼손되어 효종 때 중창되었다고 전하며 정조 5년에 규장각에 하사되었다. 정조는 국초에 신하들이 놀이하던 옛일과 호당의 전례에 의하여 3월과 9월 두 차례로 규장각 객원에게 사기를 주어 유하정에서 풍류놀이와 독서를 하게 하고 조정 관원으로서 실직이 없는 사람도 나아가서 독서하게 하였다.
 
◈ 사한단 옥수동 산1번지 달맞이봉 아래. 얼음이 잘 얼게 하기 위하여 매해 춘분일에 얼음을 꺼낼 때와 초겨울에 얼음을 저장할 때 물과 비를 다스리는 신(神), 현명씨(玄冥氏)에게 제사를 지낸 터이다.
 
◈ 몽구정 지금은 강변도로가 개통된 옥수동 108∼110번지 일대 9개의 정자가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동호의 풍경이 한강변에서도 가장 빼어나 왕가와 고관들이 수시로 내유하는 누각과 정자가 많기로 유명하였다.
 
◈ 두모포 옥수동의 옛이름으로 도성에서 동남쪽으로 5리 쯤에 있던 작은 나루였다. 한강물이 호수처럼 잔잔하고 도성 동쪽에 있는 풍광이 명미한 물가라는 의미에서 두뭇개라고도 하였다. 선박이 강변에 접안하기 쉬워 일찍부터 사사로이 나룻배가 운행되어 강 건너 압구정동 방면으로 교통로가 이어졌다. 경상도와 강원도지방에서 남한강을 경유하여 오던 세곡선을 두모포에 집결시켰다가 용산포로 이설하였고, 이곳에 빙고가 설치되면서 얼음을 나르는 배들이 집결되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에 뚝섬과 더불어 고추, 마늘, 감자류 등 곡식과 목재, 땔감 등 각종 물자의 집산지였다. 두모포 앞에 저자도라는 큰 모래섬이 있어 방풍도 되고 유속을 조절도 해주어 포구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한강 상류를 왕래하는 상인들의 본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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