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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성동구의 마을 소개
성동구의 생활문화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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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3. 02:38) 
◈ 성동구의 생활문화자원
◈ 구전설화 - 살곶이벌, 왕십리, 뚝섬 경마장터, 남이장군에 대한 일화 / ◈ 주민의 종교생활 - 태고종 안정사, 천주교 왕십리본당, 성동구의 기독교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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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활문화자원

 
 

1.1. 구전설화

 
◈ 살곶이벌
살곶이다리의 이름을 낳게 한 살곶이벌의 유래는 조선조 태조 이성계가 사랑하던 아들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다섯째 아들 태 종 이방원을 몹시 미워하여 함경도 함흥에서 칩거 하였을 때 태종의 신하인 박순이 자원하여 새끼 달린 말을 끌고가 태조가 거처하던 별궁 근처에서 어미와 새끼를 떼어놓고 울게 하여, “어미를 따르는 말도 저러한데 하물며 사람의 부친에 대한 정이야 얼마나 깊겠습니까?” 하고 태조의 구정을 설득하였다.
 
결국 박순은 마지막 함흥차사로 사망하게 되었지만, 그의 정성에 감동한 태조는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가서 아무 소식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이는 ‘함흥차사’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부왕을 맞을 준비를 하던 태종은 하륜의 말을 들어 이곳(살곶이다리 근처)에다 큰 천막을 치고, 굵고 높은 기둥을 세워 그 앞에서 태조를 뵈었는데 태조가 별안간 활을 쏘자 태종이 급히 기둥을 안고 피했으므로 화살이 기둥에 꽂혔으니 이에 태조가 “천운이로구나!” 하고 탄식을 했다고 한다.
 
또 태종이 부왕께 잔을 올리는데 미리 하륜이 일러준 대로 직접 잔을 따라 올리지 않고 중간의 신하에게 잔을 바치게 하자 태조가 옷소매 속에서 감추어둔 철퇴를 꺼내 놓으면서 “모두 천명이로다” 하였다. 잔을 바치는 의식이 끝나자 태조는 태종에게 옥새를 꺼내 내던지면서 “옛다, 이놈! 네가 종당 탐내던 게 바로 이것이지” 하였다고 하며, 그로 인해 이곳을 살곶이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왕십리
조선 초기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의 뜻을 받들어 새로운 도읍지를 정하기 위해 한양의 지리를 두루 살필 때 산기슭마다 빽빽하고 골짜기마다 막히고 좁아서 뜻에 맞는 곳이 없는지라, 삼각산(지금의 북한산)에 올라 용맥을 찾아 내려오다가 목멱산(지금의 남산) 제일 끝자락에 당도하니 들이 넓고 훤히 트여 시원해서 과연 새도읍 터로 마땅한 듯 하여 지형을 살피고 있었다. 마침 그 때 한 백발의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가다가 소에게 채찍질을 하며, “이놈의 소가 미련하기가 꼭 무학과 같구나 ! 어찌 좋은 자리를 다 놔두고 엉뚱한 곳만 찾아 다닐꼬”라고 중얼거렸다. 무학대사는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다가가 가르침을 청했다. “노인장께선 소승이 무학이라는 것을 알고 하신 말씀 같사온데 혹시 좋은 도읍지가 어디에 있는지 소승에게 가르쳐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러자 노인이 “동북방으로 왕(往, 가다)10리 하면 명당 자리가 있을 것이오”하고 말하고 사라졌다 한다. 무학대사에게 도읍터를 알려준 노인은 신라말기의 풍수지리설의 대가인 도선대사의 영혼으로서 죽은지 수백년 후에 나타나서 무학대사에게 좋은 자리를 잡도록 일러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무학대사는 북악산 아래 현재의 경복궁 자리에 도읍을 정하니 이곳이 바로 조선왕조 500년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한양이다. 이 뒤로부터 무학대사가 도선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10리를 더 갔다 해서 왕십리, 서울 도심에서 동남쪽으로 10리쯤 가면 왕십리라는 동리가 있는데 이곳에 도읍할 터를 찾았다 해서 왕십리 등으로 불렀다 한다.
 
◈ 뚝섬 경마장터
경마장의 힘찬 말발굽소리는 지난 1960∼70년대에 성동의 대명사였지만, 1989년 과천으로 자리를 옮긴 후 이제는 지역 주민들을 위한 체육시설이 들어서 주변 토박이들의 기억 속에만 자리할 뿐, 경마장으로서의 자취를 감춘지 오래 되었다. 이곳 성수동은 성덕정과 수원지의 두음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원래는 뚝섬이라 불리었다. 이 곳에 경마장이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 이래 임금이 사냥을 하고 무예를 검열하던 곳으로 한강 주변으로 형성된 넓은 목초지에서는 말들을 많이 길렀다. 이곳은 임금이 무예를 점검하기 위해 자주 거동하였으며, 그 때마다 임금의 행차를 알리는 독기를 세웠으며, 이곳 지형이 삼면 모두 강으로 둘러싸인 섬과 비슷하다 하여 독기를 세운 섬이라는 뜻의 뚝섬 또는 한자음으로 뚝도라고 일컬어져, 지금까지 뚝섬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 있었던 성덕정은 바로 임금이 사열하던 정자였고, 당시의 사열 광경은 장관을 이루었음을 노래한 옛 선인의 시가 인상적이다. 현재도 말과 관련된 지명이 일부 남아 있는데 과거 마장안벌이라 일컬어지던 장안평과 마장동 등이 대표적 지명이다. 또한 현재 한양대학교가 자리한 산기슭에는 말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냈던 마조단이란 터가 있다. 당시 말은 이 지역의 산업, 교통 및 주민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 남이장군에 대한 일화
남이장군에 관련된 두 편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자를 싫어하는 남이장군신 : 남이장군이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30세 유부녀를 범했는데 여자는 마침 집더미에 눌리는 듯 꼼짝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때 여자가 말하기를 “너는 제 명에 못살고 객사한다”하였는데 이로 인해 남이장군에게는 그 여자의 혼이 가려 결국 객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남이장군신이 여자를 싫어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예전에는 여자들이 당제에 참석할 수 없었다고 한다.
 
· 또 다른 이야기는 남이장군이 대변을 보고 있는데 손에 무엇이 잡혀 살펴보니 호랑이 꼬리였다고 한다. 남이장군이 이를 움켜쥐고는 호랑이와 서로 밀고 당기면서 힘을 겨루었다고 한다. 그런데 호랑이 힘이 8명의 장정의 힘과 같았다고 하니 이로 미루어 보아도 남이장군의 힘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강감찬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1.2. 주민의 종교생활

 
전통적인 마을신앙이 남아 있는데, 동제당(洞祭堂)의 신격은 나라를 건국한 시조신이나 국위를 크게 떨친 명장들이 많다. 동제당의 명칭도 이에 따라 부군당(府君堂) 또는 도당(都堂) 등이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소멸되고 그 맥을 잇고 있는 곳이 사근동, 응봉동, 행당동, 홍익동이다. 현재는 사찰 25개소, 교회 130개소, 성당 6개소 등이 있다.
 
◈ 태고종 안정사
이 사찰은 신라 흥덕왕 2년(약1,100여 년 전, 창건주 미상) 종남산 한가운데 자리잡고 앞으로는 한강을 응하고 위로는 삼각산을 응하여 좌청룡 우백호에 소규모 분당이 창건되었다. 조선 태조 당시 무학대사가 중창하고 이곳을 병화불침지라 칭하고 주석 하였으며, 1726년 병오난리 때 경림스님이 세 번째로, 1801년 신유 3월 가선스님이 네 번째로 중창하였다. 그리고 1849년 기유 4월 동원스님이 다섯 번째로 중창하고 서기 1942년 임오 8월 주지 성월스님이 현 대웅전과 칠성각을 여섯 번 째로 중창하였다. 1954년 갑오 3월에는 주지인 허스님과 화주 능해, 덕봉, 청호스님이 6·25때 파괴된 대웅전 삼성전을 보수했으나 997번지 소재 요사채는 소실되었고, 대방, 명부전은 보수 불가능으로 전면 해체하여 1963년 5월 시공, 주지 변능해, 화주 박덕봉, 김청호 스님 등의 지극한 원력으로 1965년 을사 3월 완공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천주교 왕십리본당
왕십리본당은 1959년 7월 26일 신당동 본당 관할 공소에서 분리, 승격되었다. 왕십리공소는 1959년 4월 13일 성동구 하왕십리2동 890-95번지에 있던 주택을 성골룸바노회의 지 벨리도신부가 사들여 성당으로 개축하면서 시작되었다. 승격 당시 관할구역은 인창동에서 화양리까지의 지역이었다. 1961년 10월 24일 성전을 건립하고 축성하며 주보를 예수성심으로 명명하였다. 1964년 6월 10일 성베네딕도수녀회의 분원이 설립되었으며, 1969년 8월 31일자 본당으로 행당동 본당을 분리시켰으며, 1972년 1월 28일에는 동대문본당이 신설되어 현인동, 황학동, 인창동의 일부가 분리되어 갔다. 1973년 5월 3일 13여년 동안 사목을 해오던 성골룸바노회에서 서울대교구로 사목권을 이양하였다. 관할구역은 왕십리동, 신당동 일부, 화양동, 마장동, 도선동, 사근동, 행당동 일부를 일원으로 하는 지역이다.
 
◈ 성동구의 기독교
성동구의 교단별 대표적 교회는, 장로교에서는 56년의 역사를 가진 무학교회가 4,000여 명의 교인이 있으며, 감리교 가운데는 94년의 역사를 가진 왕십리교회가 3,000여 명 그리고 침례교 가운데는 성서 침례교회가 45년의 역사에 구 전체 15,000여 명의 교인이 있다. 성결교 가운데는 성락교회가 37년의 역사에 7,000여 명의 교인이 소속되어 있다.
 
 
 

1.3. 주민의 생활권역

 
◈ 용답동 중고자동차 매매센터 상가지역
용답동 234번지에는 중고자동차 매매센터를 건립(82. 6. 24 개장)함으로써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업체 440여개가 몰려있어 장안평 중고자동차 매매센터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서울에서 매매되는 자동차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 마장동축산물시장 지역
서울 축산물 유통중심지로 전국 10만 축산농가의 축산물 중개 거래시장이다. 본래 우시장은 소의 판매시장으로 하루 중 새벽 4시에 서 오전 10시까지 매매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매매된 소 등은 우성산업 도축장에서 도축되었고, 이 도축장 주변에 소의 내장, 돼지의 부산물 등 판매상이 점차 늘어나 오늘의 마장동 축산물 시장이 형성되었다. 마장동 축산물시장은 1963년까지 운영되던 종로구 숭인동 도축장이 같은 해 중앙 도매 우시장으로 우성산업이 마장동에 도축장을 운영하면서 형성된 자연발생적 재래시장이다. 지금은 마장동 일대와 사근동, 홍익동 일부까지 육류취급점포가 확산되고 있다. 한우(토종)와 국내산 소, 수입육(호주, 미국, 네덜란드산 등), 돼지고기가 거래되고 있으며, 시장을 직접 방문하면 냉동되지 않은 신선한 고기를 살 수 있다.
 
현재 1,000여 개의 점포가 있으며 육가공업체도 60여 개가 있다.
 
◈ 성수동 준공업 지역의 제조업체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말에 걸쳐 규모가 적은 중소제조업체들이 성수 1가, 2가동에 1,500여 개가 업종별로는 의류, 제화, 섬유, 화학, 기계, 전기기구, 인쇄 등의 순이다.
 
◈ 금호동 네거리를 중심으로 한 상가지역
금호, 옥수, 응봉 동민들의 수요에 대응해서 거의 자생하다시피한 상가이며 자생하였기 때문에 강인하고 굳은 단결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이 상가는 지하철 3호선 금호역과 독서당길 주변 지역의 주택 개발로 고층아파트가 들어서 그 상권을 더욱 확장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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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