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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광진구 서울특별시 광진구 정보
서울특별시 광진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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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005년 6월 3일
광진구의 생활문화자원
about 서울특별시 광진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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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3. 01:02) 
◈ 광진구의 생활문화자원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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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활문화자원

 

1.1. 전통생활민속

◈ 광나루의 용제(龍祭)를 지내던 양진사(楊津祠)
서울의 한강을 주무대(主舞臺)로 하여 사는 사람들이 뱃길의 평안함과 홍수로 인한 재왕, 물귀신으로 인한 인명 피해 등을 없애기 위해 용신(龍神)에게 올리는 주술적(呪術的)인 제사를 지내 왔는데 광나루에 있는 양진사(楊津祠)가 그 중 하나이다. 양진사는 신라 때부터 용에게 제사 지내는 제룡단(祭龍壇)이 있던 곳이었다. 이로 보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제룡단을 설치하여 한강에 용신제(龍神祭)를 올렸음을 알 수 있다. 그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이곳에서는 꾸준히 용신제가 올려졌던 것이다.
 
그 위치는 지금의 광장동 용당산(龍堂山)에서 행해졌는데, 이는 양진 곧 광나루의 윗쪽으로, 이 용왕제를 지냄으로 광나루를 통해 오가는 뱃길의 안전함과 용왕의 진노를 사지 않도록 하고자 했던 것이다. 기록을 보면 음력 2월과 8월 두 차례 제사를 지냈다 하는데, 이 양진사에서의 용신제는 광진교가 들어서고 이어 천호대교가 들어서면서 광나루가 뱃나루의 역할을 못하게 되면서 이르러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옛 민속으로서의 의의를 살려 인근 주민들에 의해 복원, 봄·가을로 다시 용제를 드리게 되었다.
 
◈ 마을의 안녕을 빌던 능동 치성당(致誠堂)
능동 치성당의 동제는 일반적인 동제 형식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데, 제사 시기는 봄과 가을의 춘제(春祭), 추제(秋祭)를 모두 행하고 있다. 요즈음도 해마다 봄(음력 2월 초하루)과 가을(음력 10월 초하루)에 제사를 지내 마을의 무사 평안을 기원하고 있다.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인 제관(祭官)을 영자(靈子)라고 하며 옛날에는 마을의 제일 웃어른이 영자가 되었던 듯 하나 지금은 이곳 통장(統長)이 영자가 되어 날을 받아 목욕 재계하고 제사를 주관한다.
 
치성당이 있는 곳에는 수령(樹齡)이 약 500년쯤 되는 향나무 한 그루와 여러 그루의 오래 된 느티나무가 둘러 있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옛날, 오늘날과 같은 난방용 연료가 없을 때에도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떨어진 나무가지를 집어 가지고 가서 불을 지피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이 마을에 한가지의 불문율(不問律)이어서, 만약 이를 어기고 누군가 이곳 나무가지를 주워다 땔감으로 썼을 경우에는 이 마을 전체에 전염병이 돌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동제는 마을의 전염병을 예방하려고 드리는 일종의 액막이였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말을 타고 이 부근을 지나가서는 안되며, 담배를 피워서도 안되고, 제사 기간에는 동네 부인들이 나들이조차 하지 않아야 한다는 금기(禁忌)사항들이 있다. 특히 치성당 근처를 말을 타고 가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는 이곳 일대가 조선시대 말 목장이었던 사실과 연관하여 흥미있는 금기 사항이라 하겠다.
 
능동의 동제는 이를 신앙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살아 있는 현실적 종교로서 정신적 불안을 해소시켜 주고 건강한 생활의 희망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전염병과 관련한 금기 사항이 있는 것을 보면 재앙과 질병으로부터 벗어나 건강하고 안전한 삶을 바라는 마을 사람들의 소망이 담겨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동제를 통하여 마을의 전통 문화를 유지하고, 마을 사람들의 하나됨을 지켜가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능동 치성당 및 이곳에서의 동제와 관련되어 전해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은 이곳이 마을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당시 봄·가을 두 번에 걸쳐 지내는 제사인 춘제와 추제에 비용이 많이 든다는 마을 사람들의 의논이 있어 한 때 봄제사인 춘제를 폐지했더니 제관인 영자의 꿈속에 노인이 나타나 제사 폐지에 대해 준엄하게 꾸짓고는 마을에 재앙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영자가 마을 주민들을 모아 놓고 꿈 이야기를 들려주자 마을 사람들이 의논해 다시 봄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의 이야기로, 원래 치성당이 있던 곳은 마을 공유지로 약 500평 정도가 되었다. 1977년 마을 사람들이 그 일부인 100평을 서울시에 희사(喜捨)하여 그 이듬해 이곳에 동사무소 청사(廳舍)가 건립되었는데 이때 치성당의 남쪽으로 난 문이 동청사의 건립과 함께 폐쇄되자 이 마을에 재난이 잇따랐다 하며, 이에 다시 동쪽으로 새 문을 내고 치성을 드렸더니 재난이 그쳤다고 한다.
 
이 능동 치성당에는 별다른 당(堂)은 없으며, 옆에 조금 높은 종각(鐘閣)이 하나 서 있는데, 여기에는 새로 만든 한국식(韓國式) 종이 달려 있다. 이 종각의 설명문에 의하면, 이곳의 종은 약 100년 전부터 마을의 큰 일이 있을 때 이를 쳐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설치하였던 것이라 한다. 그동안 종은 여러차례 새로 제작되곤 하였는데, 지금 능동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두 종은 그 연대(年代)가 대략 100년이 못된 서양식(西洋式) 종이다. 그렇다면 이 종각은 대체로 서양 문물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이후 서양식 종을 만들어 걸고 사용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요즈음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한 인식이 되살아나면서 서양식 종을 치우고 한국식(동양식) 종을 새로 만들어 단 것이다.
 
◈ 광장동 성황당(廣壯洞 城隍堂)과 미륵당(彌勒堂)
광장동 147-5번지에 성황당이 있다. 이 당의 유래는 잘 알 수 없지만 이곳에 마을이 생기면서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집의 정면 중앙 벽에는 성황신이 모셔져 있고, 왼쪽 벽에는 별상신(別上神) 등 여러 신상(神像)을 그린 무속화(巫俗畵)가 걸려 있으며, 오른쪽 벽에는 산신상(山神像) 그림이 걸려 있다. 이들 무속화는 연대가 오래된 것들은 아니다.
 
이곳에서 드리는 동제(洞祭)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액운을 사라지게 하며 모든 일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음력 시월 초하루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리며, 제주(祭主)는 마을 통장이 맡아 모든 것을 준비하며, 당주(堂主)는 제사 일주일 전에 부정(不淨)하지 않은 사람을 선정하여 제물을 준비하게 한다. 상(喪)을 당했거나 궂은 일을 당한 사람은 당주가 되지 못하며, 일단 당주로 선정된 사람은 외부 출입을 삼가며 목욕 재계하고 근신하는 등 금기(禁忌)를 지킨다.
 
성황당에서의 굿과 제사가 끝나면 약 500m 떨어진 광장동 63번지 한강변 언덕에 있는 미륵당으로 옮겨 무당이 간단히 치성을 드리고 나서 마을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치성을 드린다. 이곳 미륵당은 2∼3평 정도의 건물 안에 커다란 미륵불이 안치(安置)되어 있고 현판(顯板)은 ‘상부관음전(上浮觀音殿)’이라 되어 있는데, 주민들은 보통 미륵당이라 부른다. 이 미륵불은 옛날 큰 홍수 때 상류로부터 떠내려 온 것을 모셔 놓은 것이라 한다.
 
 

1.2. 구전설화

◈아차산에 전해오는 설화 광진구에는 아차산이라는 산이 있다. 이 산은 조선 명종 때 붙여졌다 전하는데 그 유래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있다.
 
명종 때 였다. 홍계관 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점을 잘 쳐 이름이 온 나라 안에 퍼져갔다. 그러더니 명종의 귀에도 그의 이름이 들려졌다. 명종은 그 홍계관이란 자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나라 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홍계관은 매우 기뻐하며 왕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섰다.
 
“그대가 그리 점을 잘 치는가?”
“그러하옵니다.”
그러자 명종은 준비한 궤짝을 보이며 말했다.
“그럼 이 안에 뭐가 있는지 맞춰 보거라. 맞추면 너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고 틀리면 네 목을 자를 것이니라.”
홍계관은 말없이 궤짝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그는 입을 열었다.
“쥐가 들어 있습니다.”
임금과 신하들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과연 용하구나. 그러면 몇 마리가 있느냐?”
질문을 받은 홍계관은 또 궤짝을 쳐다보았다.
“세 마리이옵니다.”
“허허, 그럼 그렇지 궤짝을 열어 보거라!”
궤짝을 열자 두 마리의 쥐가 웅크리고 있었다.
“이럴 리가!”
 
놀란 홍계관은 꼼짝없이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다. 허나 그는 죽는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자기의 점이 틀린 것에 대한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그가 사형장로 끌려갈 때였다. 명종은 가만히 있다가 외쳤다.
 
“아차!”
“여봐라! 쥐 두 마리 중 암놈의 배를 갈라 보아라.”
신하들이 분부대로 배를 갈랐는데 그 안에는 새끼쥐 한 마리가 있었다.
“이런, 죄 없는 자를 죽이려 했다니...... 여봐라 어서 가 사형 집행을 멈추게 하여 그를 이리 데려오너라.”
 
같은 시간 홍계관은 죽기 직전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점을 쳤다. 그러자 자신이 살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는 칼을 든 집행관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청을 하였다. 죽기 전의 청이라 집행관도 들어주었다.
 
“어명이다! 기다려라∼!”
말을 타고 달려오는 한 사람이 외쳤다. 그 소리는 정확하게 들리지 않아 집행관은 자기가 집행을 늦추고 있어 고함을 치는 줄 느낀 나머지 그만 칼을 휘두르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 형 집행 장소의 왼쪽 산이 아차산이라 불려졌다 한다. (『전설따라 삼천리』 명문당)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사랑이야기 아차산에는 고구려 온달(溫達)장군과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平岡公主)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온달은 용모가 못생기고 순박하여 고구려 당시에는 ‘바보 온달’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평강공주와 결혼한 뒤 무예를 수련하여 용맹한 장군으로 발탁되어 만주 요동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고 그 후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 이북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자원하여 출전하였다. 그가 신라군과 전투 중에 전사한 곳이 아차산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온달장군은 아차산 전투에서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고 하며 시신을 넣은 관을 평양으로 운구하려고 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평강공주가 남편의 전사소식을 듣고 전선으로 달려와 운구를 하게 되었는데 공주가 관을 향하여“사생(死生)이 결정되었으니 이제 돌아갑시다”라고 말하자 비로소 관이 땅에서 떨어지면서 운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공주가 온달이 전사한 후 상심한 나머지 평양에 가지 못하고 따라서 죽었다고도 한다.
 
◈민족의 아픔을 함께 한 광나루 용당산 아주 먼 옛날에 한강에는 하늘로 승천하기를 기다리며 하천의 상하류와 주변의 산들을 다스리던 용이 있었다고 한다.
 
이 용은 한강이 세게 굽어지며 또한 넓어져 사람들이 수사교통으로 왕래하던 곳, 광나루터 부근에 은거하며 위로는 한강이 시작되는 강원도 태백산 줄기와 아래로는 서해바다를 다스리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또한 이런 용의 보살핌으로 광나루 주변은 강에서의 어업과 주변의 농업 그리고 강원도로부터 수로를 따라 번창하던 임업에 종사하던 많은 사람들은 넘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한강에 은거하던 용은 이제 하늘로 승천하게 되었다. 용은 그 동안 자신이 보살피던 많은 미물들과 작별을 고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기다리던 승천하는 날이 되었다. 용은 그 동안 깊이 간직했던 여의주를 힘껏 입에 물고는 자신의 모든 힘을 모아 하늘로 용솟음쳤다.
 
한강이 크게 요동하며 갈라지고 드디어 용의 모습이 나타나자 광나루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그 놀라운 광경에 혼비백산하였다. 그중 용기 있고 정신을 차린 몇몇 젊은이들은 그 동안 자신들을 지켜온 용이 떠난다고 생각하여 하늘로 오르는 용의 꼬리를 잡았다. 한명 두명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용의 승천을 막으려 달려들었다. 그러나 용이 승천하는 힘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용은 자신을 막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하늘로 높이 날아갔다.
 
어느덧 용의 모습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실의에 빠져 그 자리에 모두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하늘에서 무언가 반짝 반짝거리며 떨어지는 것이 있었는데 정신을 차린 몇몇 사람들이 달려가 보니 용이 승천한 하늘에서부터 두 개의 용 비늘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용의 비늘을 받아든 마을 사람들은 용이 승천하면서 만류하는 자신들의 정성을 받아들여 내려준 것이라고 믿고 비늘이 떨어진 곳에 사당을 세워 후대의 풍년과 뱃일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암울했던 시대인 일본 침략기에 이곳 용신당 역시 많은 수모를 겪었다. 당시 일본은 신사를 세우고 자기 나라의 신을 숭배할 것을 강요하였는데 용당산의 사당 역시 잠시나마 일본의 사당으로 꾸미고 소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에게 참배토록 하였다고 한다. 당시 신사로 꾸미고 사람들이 다니기 편하게 하기 위하여 용당산의 산세를 자르고 길을 놓는 공사를 하였다. 공사를 위해 용당산 입구를 파는 곳에서 붉은 피가 흘러 작업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고, 당시 공사에 참가했던 나이 드신 어른들 중에는 아직도 그때를 기억하는 분들이 있다고 하니 이곳 용당산이 바로 우리 민족의 아픔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자 한 것이라 하겠다.
 
 

1.3. 주민의 종교생활

전통적인 마을신앙은 용제를 비롯하여 광장동 성황당, 능동 치성당, 노유2동(예전의 성수2가동) 한강변에 부군당(府君堂)이 있었고, 자양동에는 최영(崔瑩)장군을 모셨다는 신당(神堂)이 있었으며, 군자동의 한국화장품 자리, 화양동의 화양정 자리 등 각 동리에 동제를 드리는 신당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나 지금은 대부분 도시화와 한강 개발 등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불교 현재 광진구 관내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사찰이 영화사(구의2동) 등 13개이며 그 외 종단에 속한 사찰이 9개가 있다.
 
◈천주교 천주교는 중곡동 643-2에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회관이 입지하고 있을 정도로 발전해 있으나 광진구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1970년 11월 8일 화양동 성당으로 그리 역사가 길지 않다. 화양동 본당에서 분리되어 중곡동 본당, 구의동 본당, 자양동 본당과 메리놀 외방선교회 한국지부가 중곡1동에 있다.
 
◈개신교 광진구의 개신교 현황은 1996년 6월말 현재로 약 220개 가까운 개신교 교회가 있고 신도수는 4만 7천 명 정도라고 한다. 이들 개신교 교회 중에 장로교회가 약 170개 교회로 가장 많으며 다음으로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 하나님 성회, 재림교회 등의 교회가 있다.
 
◈대순진리회 1976년 4월에 발족한 대순진리회는 해마다 그 규모가 확장되고 있다. 전국 신도수는 약 4백만명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1995년에는 총 3만여명의 학생에게 30여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광진구 중곡4동에는 대규모의 중곡도장이 있어 4천명의 신자를 헤아리고 있고 중곡 2동에 2개의 교당 등 모두 4개의 교당이 있어 서울에서 대순진리회의 교세가 가장 활발한 지역이다.(대순진리회 중앙본부 종교연감 1995년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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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