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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강서구 서울특별시 강서구 정보
서울특별시 강서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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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005년 6월 13일
강서구의 생활문화자원
2005년 6월 3일
about 서울특별시 강서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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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3. 23:51) 
◈ 강서구의 생활문화자원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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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활문화자원

 

1.1. 전통생활민속

석전제례 강서구에서는 서울에서 유일한 양천향교에서 공자추모 석전제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옛 조상들의 생활풍습을 재현시켜 잊혀져 가는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구민들에게는 우리 구가 오랜 문화고장이라는 자긍심을 갖게 하고 있다.
 
석전제는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의 234개 향교에서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를 위시한 옛 성현 27인(동양 5성, 송조 4현 및 동국 18현)을 추모하고 덕(德)을 기리는 행사로 매년 음력 2월과 8월 초정일(初丁日)에 봉행(奉行)하는 행사 전통적인 유교행사이다.
 
매년 음력 2월·8월 초정일 11시부터 12시에 행해지며, 장소는 양천향교 대성전이고, 주로 공자추모 석전제를 지내며, 행사운영은 양천향교에서 주관하고 강서구에서 후원한다. 주요 참석대상은 국회의원 등 정당인사, 향교 및 성균관 유림, 지역주민 및 학생이다.
 
◈ 양천허씨 집성촌(集姓村)
이 고장에 최초로 자리잡은 성씨(姓氏)는 양천허씨이다.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일조함으로써, 개국공신 20인 중의 하나로 기록된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의 자손들이 조선 초기까지 이 고장에 유력한 집성촌을 이루어 살면서, 수많은 국가동량을 배출해 내었다.
 
풍산 심씨 가문이 방화동 개화산 밑 능리에 자리잡고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역시 중종조에 김말손(金末孫) 장군(충청병마절도사)이 염창동에 자리잡아 살면서 원주김씨 집성촌을 이루었고, 연산군의 금표구역 때문에 떠났던 양천허씨 일부가 다시 돌아와 원래 뿌리가 있었던 가양동 일대와 등촌2동 능안마을 및 목2동 월촌리(달거리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조선조 10대 연산군이 도성 밖 일백리를 금표구역(禁標區域 : 왕의 놀이터 및 사냥터)으로 설정해 놓고 금표구역 내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을 쫓아내 버리는 사건이 있었다. 연산군 11년(1505년) 8월 21일 기록에 보면 “망원정 이남으로 백리를 한계로 하여 금표(禁標)를 세우고 양천현을 혁파하며, 망원정 근처의 도로에는 사람들이 통행하지 못하게 하라”는 연산군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이듬해인 1506년에 중종반정 때까지 약 1년 가까이 양천현(강서구)에는 살던 모든 사람들이 쫓겨나가고 인적이 끊어진 무인지경이었던 것이다.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중종반정의 개국공신이었던 심정(沈貞)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외에 양천허씨와 사돈관계였던 안동권씨들이 개화동 일대에 자리를 잡았고, 내발산동에 문화유씨·외발산동에 경주최씨가 자리를 잡았으며, 화곡동에 안동김씨 지금은 양천구가 된 신정동에 원주원씨가 자리를 잡고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으나 이 고장이 서울특별시가 되면서부터 급격한 개발로 대부분 흩어지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겨우 집성촌의 흔적들만 남아있고 풍산심씨·문화유씨·경주최씨 및 안동권씨들만 집성촌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 강서구 도당제
◈ 우장산도당제 화곡5동 매년 10월 3일 ☎ (02) 690-7514
◈ 검덕산도당제 내발산동 매년 10월 1일 ☎ (02) 3663-7727, 3663-7717
◈ 개화산산신제 개화동 매년 10월 1일 ☎ (02) 662-2095
◈ 개화산산신제 방화3동 3년마다 개최☎ (02) 662-4287
◈ 증미산산신제 염창동 음력 10월 1일·필요에 따라 개최☎ (02)652-9138,
◈ 궁산산신제 가양1동, 필요에 따라 개최☎ (02)662-2063
 
 

1.2. 구전설화

◈ 투금탄(投金灘)
가양2동 앞 한강여울을 투금탄이라 한다. 『성주이씨가승』에 적혀있는 내용을 보면 고려 말기의 명사인 이조년, 이억년 형제가 젊었을 때에 길을 가다가 우연히 금덩이를 주워 둘이 나눠가졌다. 형제는 공암나루를 건너고자 나룻배를 탔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한강 물에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형이 깜짝 놀라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이에 동생은 “제가 어찌 황금 귀한 줄을 모르겠습니까. 평소에 두터웠던 우리 형제의 우애가 아닙니까? 그런데 황금을 주운 뒤에 만약 형이 없었던들 나 혼자서 금덩이 두개를 다 가질 수 있었을 텐데......하는 사악한 마음이 들어 형제의 우애에 금이 가려고 해서 액물인 황금을 강물에 던져 버린 것입니다” 했다. 이에 형님도 네 말이 옳다고 하면서 자신이 가졌던 금덩이마저 물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 곰달래길
양천구 신월동 신원초등학교 앞에서부터 시작하여 화곡1동 사이를 지나 화곡 사거리를 거쳐 목동사거리 쪽으로 지나가는 거리가 곰달래길이다. 한강유역이 백제 땅일 때 이곳에 서로 사랑하는 음소와 음월이라는 남녀가 살고 있었다. 신라가 백제를 위협하자 전국에 군대소집 명령이 내려졌고 이곳에 살던 청년 음소도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다. 청년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말했다. 동산에 둥근 달이 깃발처럼 떠오르면 백제가 이긴 것이니 자신을 기다릴 것이고, 칠흑 같은 밤이 되면 백제가 싸움에 진 것이니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라는 말을 한 후 전쟁터로 떠났다. 몇 날이나 계속 되던 신라와 백제의 싸움이 끝날 무렵 동산에서 작은 조각달이 떠오르다가 이내 커다란 둥근 달이 되었다. 여인은 기뻐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먹구름이 지나가면서 캄캄한 밤이 되었다. 이에 놀란 여인은 산 위로 올라가 아래로 몸을 굴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구름이 지나가고 다시 환하고 커다란 달이 나왔을 때, 밤새 먼길을 달려온 청년이 도착하였으나 이미 여인의 목숨은 끊어진 뒤였다. 산꼭대기 달이 떠오르는 곳에 자신의 손으로 여인을 묻고 돌아서며 청년은 “이제 끝이로구나, 거친 세상에 음월이의 목숨이 끝났구나” 라고 하며 슬피 울었다고 한다. 이 울부짖던 말이 '고음월(古音月)'이다.
 
고(古)는 이두음으로 사용할 때 거칠다. 끝났다. (古)라는 뜻인데 바로 “음월이의 목숨이 끝났다”라는 말이며 그 뒤 그 마을 지명이 고음월리(古音月里)가 되었고 오늘날 우리말로 풀어서 곰달래 마을이 된 것이라 한다.
 
◈ 귀신바위와 김말손 장군
맑고 포근한 옛적 어느 날, 염창산(증산, 불똥산)아래 마을에 갑자기 먹구름이 일고 하늘이 깜깜해지며 바람이 거세게 불고 흙먼지가 흩날리며 나무가 부러지고 지붕이 날아갔다. 이에 놀란 어느 농부가 집단 속을 하려고 밖에 나가다가 이상한 것을 보고 놀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집채만한 큰 바위가 한강 윗쪽에서 마을로 날아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바위는 귀신이 붙어 제멋대로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것이었다. 놀란 마을사람들은 정신을 수습하여 촌장 집에 모여 대책을 의논하였으나 별다른 대책이 없이 어떻게 할 줄을 몰라할 때 이 소문은 한양의 용감한 김말손 장군에게 알려졌다. 백성을 괴롭히는 귀신 붙은 바위를 없애 버리리라 결심한 김말손 장군이 바위 있는 곳으로 가니 귀신 붙은 바위에서 뇌성벽력이 일어나고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하며 김장군에게로 날아왔다. 그러나 김장군은 겁내지 않고 “요사한 돌귀신아! 선량한 백성을 괴롭히니 내 너를 잡아죽이겠노라” 하면서 힘껏 활을 쏘니 화살을 중허리에 맞은 바위는 “꽝, 우르릉” 하는 큰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화살이 깊숙이 박힌 바위 한 가운데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내리며 귀신 붙은 바위는 죽고 말았다. 하늘은 다시 청명해지고 광풍과 뇌성도 멎었다. 마을의 평화는 회복되었다. 그후 부근 사람들은 김말손 장군의 무공과 은공을 기념해서 바위 곁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영벽정(映碧亭)이라 하였다(두미암과 영벽정 일대의 뛰어난 절경과 정자를 세운 동기를 말하는 것이다).
 
◈ 조옥동(照玉洞:초록동)과 초록동자
임진왜란 당시 가양동 뒷산인 궁산에 전라창의사 김천일 장군, 전라소모사 변이중 장군, 강화 의병장 우성전 장군 등이 인천, 강화, 김포, 통진, 양천의 의병들을 지휘, 한강을 도강하여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에 참가함으로써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때 양천의 초록동에 사는 어느 농부가 의병으로 나아가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므로 그의 어린 아들이 아버지의 갑옷을 입고 대신 의병에 들어가 행주대첩에서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 아들을 초록동자라고 부르며 비록 어리지만 그 효성과 애국심을 따르도록 자손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 방화동 세우물
지금은 아파트 숲 속으로 변해 옛날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으나 현재 방화3동으로 바뀐 옛 능말에는 우물 4개가 있었다. 그 중 세 우물은 삼각형을 이루어 3대를 나타내었으며 흔히 시할머니, 시어머니, 며느리 등 3대가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위치를 이루고 있다고 하여 삼음도회(三陰都會)라 하였으며 나머지 한 우물은 조금 떨어진 복종마을에 있었다. 그런데 한 집안의 중심이 되는 세 여자가 화합하면 집안이 조용하고 번창하지만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면 망할 집안이라 했다. 세 우물의 경우 한군데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면 다른 우물은 수량이 급격히 줄어들므로 마을사람들이 삼음도회의 우물물을 마시면 자식을 못 낳거나 집안이 시끄럽게 된다고 하며 우물을 메워 버렸다. 복종마을에 하나 남은 큰 우물은 물맛이 달고 시원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큰 우물에서 물을 마신 사람은 누구든지 「참, 물맛 좋다!」라고 칭찬을 해야 수위의 변화가 없지, 물만 마시고 그냥 가 버리면 물의 양이 갑자기 줄어들어 버렸다고 한다.
 
◈ 증미(曾米)마을
삼남지방에서 조세로 거둔 양곡을 싣고 한양으로 올라오는 조운선(漕運船)이 염창리 앞 한강 여울목에서 가끔 침몰하는 일이 있었다. 염창리 앞 강 폭은 좁은 데다가 물살이 빨라 상류에서 흘러내린 토사가 쌓이거나 패여 강바닥이 고르지 못했기에 배가 자칫 침몰하는 것이다. 배가 침몰하면 부근의 마을사람들이 물 속으로 들어가 양곡을 건지게 되었기에 이 마을을 쌀을 건진다는 뜻의 증미(曾米)마을이라 하였다.
 
◈ 이문(里門), 경문(慶門), 경문밭(慶門田)
조선조 7대 임금인 세조가 아직 보위에 오르기 전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 무술을 연마하기 위해 말을 타고 통진 쪽으로 다녀오다가 길을 잃고 헤매던 중 날이 저물자 가까이 불빛이 보이는 마을에서 쉬게 되었다. 이 마을(발산동 광명리)에는 효자와 효부가 많이 살았는데 수양대군은 이들이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이 그지없이 숭고해 보여 날이 밝은 즉시 도성 안으로 들어가 대군의 이름으로 이 마을사람 전체의 효성을 기리기 위한 이문(里門)을 세워주었다. 또 이를 축하하는 뜻에서 경문(慶門)도 세워 주었는데 이때 수명산(발산)이 기뻐서 소리내어 울었다 하여 발음마을이 되었으며 또한 동네 이름을 오랫동안 빛날 것이라는 뜻으로 광명리라 하였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경문의 유지관리를 위해 이 마을에 밭을 내려 주었으니 이 밭을 경문밭(慶門田)이라 하였다.
 
◈ 화곡동 진흙은 옹기그릇
원료 개발되기 이전의 화곡동 일대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고 할만큼 진흙땅이었다. 비만 오면 온통 신에 엉겨붙는 진흙 무게로 겨우 걸음을 뗄 수 있었고 이 때 문에 몇 곱절 더 차비를 지불한다해도 택시가 들어가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화곡동의 진흙은 도기를 만드는 원료로는 최상급으로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한강 상류의 도기공장들이 염창동에 이전해 와서 이곳 진흙으로 도기(옹기그릇)를 만들게 되었다. 1935년 무렵만 해도 염창동에는 11개소의 독 굽는 가마가 있었는데 모두 이곳 화곡 7동 진흙을 원료로 하였으니 당시 이곳에 논밭을 가진 땅주인들은 진흙을 팔아서 돈을 벌고 기름진 진흙땅을 무상으로 갈아 엎어주니 농사가 잘되어 돈을 벌고 까치산 산기슭의 흙을 파냄으로 자연히 밭이 논으로 바뀌어지게 되니 땅값이 올라가고 대다수의 주민들에게는 고통만 안겨주었던 진흙 덕택에 부자가 된 땅주인이 많았다고 한다.
 
 

1.3. 주민의 종교생활

우리 고장에는 서울에서 유일한 양천향교가 있어 매년 춘추기 2회에 걸쳐 석전제례(釋奠祭禮)를 올리고 있다.
 
조선조에 성균관과 더불어 국가교육의 중추를 맡아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배출한 곳이 바로 향교이다. 향교는 오늘날의 국립 고등교육기관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향학(鄕學), 학궁(學宮) 또는 교궁(校宮)으로도 불렸다. 향(鄕)은 수도를 제외한 행정구역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고, 교(校)는 학교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결국 향교는 지방의 학교라고 정의할 수 있다.
 
종교단체 현황을 보면, 기독교, 불교, 천주교 순으로, 357, 22, 7개소의 교당이 있고, 향교가 1개소 있다. 전통사찰은 약사사, 미타사, 법성사가 있다.
 
 

1.4. 주민의 생활권역

◈ 공항시장 방화동620-184 ☎ (02)662-2752
◈ 화곡중앙시장 화곡동 370 ☎ (02)602-5757
◈ 남부화곡시장 화곡동 830-1 ☎ (02)651-5554
◈ 대원종합시장 화곡동 1023 ☎ (02)695-4425
◈ 송화시장 내발산 719-6 ☎ (02)602-2801
◈ 방신종합시장 방화동 567-4 ☎ (02)663-1978
◈ 강서중앙시장 화곡동1071-19 ☎ (02)697-6045
◈ 등마루종합시장 등촌동 637-10 ☎ (02)3661-2355
◈ 코렉스마트 강서점 등촌동 632 ☎ (02)3662-6964
◈ 신월중앙시장 화곡동 929-1 ☎ (02)604-3132
◈ 그랜드마트화곡점 화곡동 1095 ☎ (02)606-0101
◈ 그랜드마트 강서점 등촌동 678-14 ☎ (02) 3662-0101
◈ E마트 가양점 가양동 449-19 ☎ (02)693-5102
◈ 까르푸 할인매장 가양동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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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