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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구의 역사문화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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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3. 23:51) 
◈ 구로구의 역사문화자원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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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문화자원

 

1.1.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노숭(1337∼1414)
본관이 광주, 공민왕 14년(1365)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공민왕이 돌아가고 나이 어린 우왕이 즉위하였으나 놀기만 좋아할 뿐 절제가 없었다. 어느날 우왕이 신하들과 함께 놀이를 나갔다가 소나기를 만나 냇물이 불어났다. 수행했던 신하들이 우왕좌왕하면서 왕을 보좌하지 못할 때 노숭이 왕을 업고 냇물을 건너면서 국왕이 절제있는 행동을 할 것을 간청하였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노숭은 전라도에 의창을 세워 많은 굶주린 사람과 빈민을 구제하였으며 조선건국에 참여하여 개국원종공신이 되었으며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고려에서 조선왕조까지 다섯 왕을 모셨다. 노숭은 청렴하고 뛰어난 관리로서 재능은 물론 효성도 지극한 인물이었다.
 
◈유순정(1459∼1512)
조선 중종 때의 공신, 유순정은 본관이 진주. 목사 유양의 아들이다. 이는 일찍이 김종직의 제자가 되어 성종 18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에 등용된 후 북평사가 되고, 성종 22년 북정 도원수 허종의 막료가 되어 야인정벌에 많은 전공을 세웠다. 중종 7년(1512)에 영의정에 올라 재직 중에 53세로 서거하자 당시 조정에서는 3일간의 정사를 중지하는 예우와 함께 현재 오류 2동, 온수동 일대와 부천시 여월동과 작동에 이르는 30여 만 평의 토지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하였다.
 
◈권협(1542∼1617)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자는 사성, 호는 석당, 본관은 안동, 권상의 아들이다. 1577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숭문원, 춘추관의 관직을 거쳤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장령으로 있으면서 서울 사수를 주장하기도 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명나라에 건너가 병선과 군량을 원조 받는 데 성공하고 돌아와서 호조참의에 올랐다. 이 공으로 선무공신 3등에 책봉되고 길창군으로 봉해졌다. 1607년 예조판서에까지 이른다. 안동권씨 가운데 최초로 구로구 궁동에 정착한 인물이다. 묘역은 그의 손자 권대임의 처 정선옹주 묘역 내에 있다.
 
 

1.2. 내 고장의 문화유산

◈함양 여씨 묘역
구로구 고척 2동 산 6-3번지에 소재하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0호로 1991년 12월 24일에 지정된 이 묘역의 총 넓이가 1,025㎡로 묘역 내에는 묘 2기, 묘비 1개, 상석 2개, 문무관석이 4개가 있다.
 
이 문화재는 조선초기 묘제를 알 수 있는 분묘이며, 지석과 기단석, 묘비와 문무관석의 양식 연구에 가치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고, 문화재관리는 함양 여씨 종친회가 관리단체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정선옹주 묘역
구로구 궁동 54의 2호에 위치한다. 정선옹주는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대왕의 7녀로 지금의 구로구 궁동 67번지 일대에서 궁궐 같은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현재 궁동이라고 하는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이 일대는 풍수지리설로 보아 금닭을 품은 형국인 금계포란형의 명당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즉 궁동의 북쪽의 와룡산을 주산으로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좌청룡, 서쪽으로는 궁동 서부를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우백호를 이룬다. 이 묘역은 총면적이 5백여 평 되며, 정선옹주와 그 남편 권대임의 묘를 비롯하여 8기의 안동 권씨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정선옹주 묘역 내에는 신도비 외에도 이 같은 묘비 등이 다수 남아 있어 당시 묘제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주막거리 객사
오류 2동 120번지에 있으며 동부제강과 동부제강 사원연수원 사이에는 기와집인 주막거리 객사가 있다.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기 이전까지 한양과 제물포를 왕래할 때 관원들이 쉬어가거나 숙박하던 주막거리였다. 이 객사는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많은 부분을 시멘트 콘크리트로 개조하였으며 현재는 행랑채의 부속건물은 사라지고 한 채만 남아있다.
 
이 객사는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서울과 제물포를 왕래하면서 쉬어갈 수 있는 국립여관격인 원(院)으로서 청일전쟁 이전까지는 청국 사신이나 고위 관리들이 쉬어 가는 곳이었다. 이 객사는 조선말의 일본인 첩자인 고마네가 1930년경까지 살았는데 그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 관여하였다고 한다. 한때 이 집은 개성에 있던 전국의 무당의 본부를 옮겨왔다가 서울로 이전해 갔다고 전한다.
 
현재 이곳에는 ‘주막거리 객사’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객사 마당에는 목련나무 고목이 자라고 있어 목련 나무집이라고 부르는데 봄이면 기왓장 사이로 이상한 약초가 자라 마을사람들이 기와지붕에 올라가 약초를 캐갔다는 것이 보도된 일도 있다.
 
◈오류장(梧柳莊)
오류장은 오류역 남쪽 개웅산 기슭의 군부대 내에 있었다. 일제 때 이곳에서 온천수보다 온도가 조금 낮은 온수가 나왔으므로 일본인이 요정을 짓자 조선총독부의 고관들이 이곳에서 자주 연회를 열었다. 그때마다 서울에서 인력거로 기생들을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오류장은 이광수의 소설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한 시대의 역사를 말해주는 장소이다.
 
◈ 유순정(柳順汀)의 묘
오류2동 산 43-6호에 위치, 이는 오류동 안오류골 미래 빌라 뒷산에 있다. 유순정은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유순정은 본관이 진주이고 목사 유양의 아들이다.
 
중종 7년(1512)에 영의정에 올라 재직 중에 53세로 서거하자 당시 조정에서는 3일간 정사를 중지하는 예우와 함께 현재 오류2동, 온수동 일대와 부천시 여월동과 작동에 이르는 30여만평의 토지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하였다. 이 해에 이곳을 그의 묘소로 정해 안장하였다. 이 까닭에 옛부터 오류골 주막을 ‘공신산소 앞’이라 하였고, 그의 후손들이 그의 묘역관리를 위하여 480년 전에 이 지역에 정착하여 진주 유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 노숭의 묘
천왕동 산 39번지이며, 천왕골과 항동의 경계선에 위치한다. 전에는 신도비만 있고 묘비가 없었으므로 누구의 묘인지 몰라 다만 노정승 묘라고 불러오다가 묘소의 주인공이 노숭인 것이 밝혀졌다. 1979년 노숭의 후손들이 비석과 석등 외에 석물과 함께 부인 두명의 묘소를 노숭의 묘소 앞으로 이장해 왔으므로 현재 3기의 묘소가 나란히 놓여져 있다.
 
◈ 봉수대 터
오류동과 개봉동과의 경계가 되는 천신 마을 뒷산을 개웅산으로도 부르고 봉화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조선시대 이 산에서 봉화를 올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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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