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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동작구 서울특별시 동작구 정보
서울특별시 동작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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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005년 6월 13일
동작구의 역사문화자원
2005년 6월 3일
about 서울특별시 동작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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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3. 23:51) 
◈ 동작구의 역사문화자원
◈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사육신묘의 조성과 추모, 한성의 관문 노량진, 정조의 행궁 용양봉저정, 장승백이 팔도장승대장 / ◈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서견(徐甄, ?∼미상), 노한(1376∼1443), 이제(1394∼1462), 이승소(李承召, 1422∼1484), 노사신(盧思愼, 1427∼1498), 정유길(鄭惟吉, 1515∼1588), 정창연(鄭昌衍, 1552∼1636), 정태화(鄭太和, 1602∼1673), 정지화(鄭知和, 1613∼1688), 박태보(朴泰輔, 1654∼1689), 심훈(沈熏, 1901∼1936), 유일한(柳一韓, 1898∼1971)
목   차
[숨기기]
 

1. 역사문화자원

 
 

1.1.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사육신묘의 조성과 추모
노량진동 185-2 한강변 야산에 조성된 사육신공원은 세조 2년(1456) 단종복위 운동이 발각되어 순절한 70여명 중 남효온이 『육신전』에 수록한 성삼문·박팽년·유응부·이개·하위지·유성원의 묘와 사당인 의절사가 있는 묘역이다. 신도비(1781)에는 김시습(생육신)이 밤중에 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이곳에 매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조성 경위는 알 수 없고, 일찍부터 박씨지묘, 유씨지묘, 성씨지묘, 이씨지묘 라는 표석이 꽂힌 네 묘가 있었는데 육신묘라 전해왔다. 당시 단종복위 운동을 하다 순절한 선비들을 세조도 ‘지금은 난신이나 영원한 충신’이라고 평가할 만큼 기개가 돋보이는 충절사들이었다. 특히 사육신은 사림들의 추앙을 받아 중종반정 이후 신원운동이 계속되더니 드디어 숙종대에 국왕이 직접 치제 숭상케 되었다. 숙종은 노량진사장에서 군사조련을 사열할 때마다 육신묘에 제사하고 1691년 묘역에 사육신의 위패를 모시기 위한 민절서원을 세워 사액(賜額)하였으며 박팽년의 7대손인 좌익찬 박숭고로 하여금 육신묘를 수축케 했다. 이어 영조는 육신에게 이조판서·병조판서를 추서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정조는 신도비를 세우고(1782) 단종공신 대현창을 단행(1791)하여 사육신은 충절신의 상징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서울시는 1978년 이 묘역을 1만 ㎡로 넓히고 분묘 밑에 사당인 의절사를 세워 위패를 모셨으며 앞 광장 양편에 신도비인 ‘유명조선국육신묘비’와 ‘사육지묘비’를 배치하는 등 성역으로 정화했다. 그후 봄·가을로 추모제향을 올리는 동시에 사육신의 충절과 선비정신을 기리는 추모문화제를 거행하고 있다.
 
◈ 한성의 관문 노량진
한성의 5강진 중 대표적인 나루가 노량진이었다. 신라 경덕왕때 율목군을 율진군으로 개칭한 것으로 미루어 이곳에 옛부터 한강을 건너는 나루와 그에 따른 도진촌이 번창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태종 4년(1414) 민간이 운영하던 사진(私津)인 노들나루에 관선 15척이 배치되고 금위영에서 군사를 주둔시켜 별장이 관장하는 관진(官津)이 되고 숙박시설인 노량원이 남쪽 언덕에 설치되었다. 한성이 융성해지면서 교통량이 급증하여 노량진 좌우에 위치한 동재기나루와 흑석나루가 그 기능을 분담하게 되었다.
 
이수천 어구의 동작진은 과천으로 넘나드는 인마가 항상 붐비었고 동작구 명칭의 연원이 되었다. 처음 흑석나루는 노량진의 검색을 꺼리는 서민의 도선장이었는데 세곡을 운반하는 참선이 정박하는 좌도수운판관 산하의 수참이 되고 항상 참선이 정박하게 되었다. 노들나루는 도선장이면서 송림이 우거진 석벽 아래 수양버들이 늘어서고 백로가 노니는 절경이라 노들나루·노량진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민요 「노들강변」이 널리 전승되었다. 또한 바로 이곳이 정선에서 뗏목을 띄우며 시작한 「정선아리랑」의 끝자락이다.
 
한편, 노량진 백사장은 군사훈련장으로 국왕이 자주 행차하여 사열 받았으며 그 대안에 새남터는 중죄인의 사형장이었다. 19세기 중반 천주교인 대학살도 이곳에서 행해졌는데 새남터를 형장으로 삼은 것은 도강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주기 위한 착상이었다 한다.
 
◈ 정조의 행궁 용양봉저정
정조는 1789년 비명에 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에서 화성(수원)으로 이장하여 현륭원이라 하고 다음해부터 매년 6천여 명이 동원되는 대규모의 참배행차를 단행했다(총 13회). 노량진에 행궁인 용양봉저정이 건립되고 주교사를 상설(고종 19년 폐지)하여 행차 때마다 거대한 배다리가 부설되었다. 당시의 용양봉저정과 노들강을 가로지른 배다리의 규모는 1795년의 행차를 소상히 기록하고 112쪽의 판화와 63쪽의 반차도를 그려 놓은 「원행을묘정리의궤」로 알 수 있다. 주교는 대선 36척 위에 긴 널판 1천여 장을 깔고 양끝에 난간을 세워 깃발을 꽂았으며 양편과 중앙에 홍살문을 세웠다. 용이 뛰놀고 봉황이 높이 난다는 뜻의 용양봉저정은 노량진 언덕 위에 규모가 큰 누정이 있고 그 아래 여러 채의 부속건물이 있으며 정문 앞에 수양버들이 줄 서 있었다. 정조가 1,700여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노량진 배다리를 건너는 이신의 「노량진주교행궁도」는 장관이며 당시 노량진은 국가적 정치적 대역사가 행해진 현장이었다.
 
◈ 장승백이 팔도장승대장
지금의 장승백이 4거리는 당시 노량진에서 만안고개를 올라 과천방면과 시흥방면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이었는데 삼림이 우거져 낮에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음산했다 한다. 정조의 능행어가는 이곳에서 잠시 쉬어 금불고개(숭대앞)와 남태령을 넘어 수원으로 향했다. 정조께서 이곳 분기점에 장승을 세우라 명하시여 높직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세워졌다. 그 뒤 정조의 어가는 물론, 이 길을 왕래하는 모든 행인이 안심하고 장승 앞에서 쉬어갔으며 이곳의 지명이 장승백이로 널리 통용되었다. 또한 이곳 대방장승이 장승을 소재로 한 판소리 「변강쇠가」와 서도창 「변강쇠타령」에 팔도장승의 우두머리로 나온다. 지금 서있는 대방장승은 1992년 동작구민들이 대방장승의 원형을 고증하여 장승백이 4거리 노량진2동 가두에 세운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다. 이 장승을 세우자 일부 종교신도들이 기름을 부어 소각을 시도하고 톱으로 잘라 넘어뜨리는 등 시련을 겪었으나 지금은 다시 세워 매년 10월 24일 장승제를 지내며 전통적 공동체 화합축제를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1.2.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서견(徐甄, ?∼미상)
고려말 충신, 사헌장령으로 정도전 등을 탄핵하고 충절을 지켜 은둔했으나 충신에 봉해지고 효종 때 삼현사에 안치됨. 금천현 사람으로 대방동에 묘가 있음.
 
◈ 노한(1376∼1443)
조선초 문신, 태종과 동서간으로 한성부사, 우의정을 지내고 노량진에 묻힌 공숙공으로 효도의 상징적 인물임. 노량진에 효사정을 세우고 수묘함.
 
◈ 이제(1394∼1462)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은 광인을 가장하여 아우 세종을 즉위케 하고 전국을 유랑하면서도 국사봉에 올라 경복궁을 바라보며 나라와 아우를 염려했다 함. 상도동 국사봉 아래 묘와 지덕사가 있음.
 
◈ 이승소(李承召, 1422∼1484)
조선초의 문장가, 세조∼성종 년간에 편찬사업, 외교에 탁월한 공적을 남기며 판서, 중추부사에 올라 양성군에 봉해짐. 묘가 노량진 남쪽에 있었음.
 
◈ 노사신(盧思愼, 1427∼1498)
조선초의 문신, 법제·사서 제찬을 주관한 석학으로 세조, 성종의 총애를 받아 영의정에 오르고 선성군에 봉해짐. 대방동 청련암에 선친의 명복을 빌어 노씨절이라 하고 묘가 노량진에 있었음.
 
◈ 정유길(鄭惟吉, 1515∼1588)
조선중기의 서예에 능한 문신, 문장이 능란하고 외교수완이 탁월했으며, 외교·치민에 지혜를 평가받아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우의정이 됨. 동래정씨 묘역인 사당5동에 집성촌이 있었다 함.
 
◈ 정창연(鄭昌衍, 1552∼1636)
조선 중기의 문신, 선조대에 우의정이 되었고 광해군대에 시련이 거듭되었으나 덕망이 높아 후세에 칭송 받음.
 
◈ 정태화(鄭太和, 1602∼1673)
조선 후기의 문신, 재주가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숙하여 요직을 두루 걸쳐 5번이나 영의정이 되었음.
 
◈ 정지화(鄭知和, 1613∼1688)
조선 후기의 문신, 집권세력인 서인 세가의 후예로 관찰사, 각조 판서를 거듭하고 좌의정에 올라 정계를 지배함.
 
◈ 박태보(朴泰輔, 1654∼1689)
조선 후기의 충절사, 박세당의 아들로 강직하고 지기가 고상해 호남어사로 나가 적폐를 시정해 백성의 찬사를 받았다. 기사환국(1689) 때 죽었으나 정려문이 내려지고 영의정이 추서됨. 귀양길에 노량진에서 죽고 그 자리에 노강서원을 세워 모심.
 
◈ 심훈(沈熏, 1901∼1936)
일제강점하의 민족운동가, 민족문학자로 3·1운동에 참여하고 소설 『상록수』를 남김. 하복면 흑석리(흑석동) 출신임.
 
◈ 유일한(柳一韓, 1898∼1971)
1926년 ‘건강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제약회사 유한양행을 세워 민족기업으로 키우고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라는 신념으로 후손에게 상속하지 않고 사회에 환원한 기업가임. 1962년 대방동에 사옥을 건립하고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3. 내 고장의 문화유산

 
■ 국보
◈ 다뉴세문경(1점) 제141호, 상도동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 용범(13점) 제234호, 상도동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 보물
◈ 안중군의사 유묵(20점) 제569호, 상도동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 놋쇠지구의(1점) 제883호, 상도동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 사적
◈ 사당동 백제요지 제247호, 사당동 538-1
 
■ 중요무형문화재
◈ 북청사자놀음(여재성) 제15호, 흑석동 15-38
◈ 종묘제의(이은표) 제56호, 동작동 100-28
◈ 유기장(이봉주) 제77호, 신대방1동 우성APT 13동 2003호
 
■ 유형문화재(시지정)
◈ 용양봉저정(1동) 제6호, 본동 10-30
◈ 사육신묘(7기) 제8호, 노량진동 185-2
◈ 지덕사부묘소(3동 1기) 제11호, 상도동 산65-42
◈ 창빈안씨신도비부묘소(1기) 제54호, 동작동 국립묘지내
◈ 임당정공신도비(1기) 제61호, 사당동 산32-2
◈ 수죽공신도비(1기) 제62호, 사당동 산32
◈ 잠곡정공신도비(1기) 제63호, 사당동 산32
◈ 이정영의 묘(1기) 제94호, 사당동 산44-7
◈ 지장사 철불좌상(1기) 제75호, 동작동 국립묘지 내
◈ 지장사 궤불(1폭) 제113호, 동작동 국립묘지 내
◈ 지장사 대웅전 아미타회상도(1폭) 제114호, 동작동 국립묘지 내
◈ 지장사 대웅전 극락구품도(1폭) 제114호 동작동 국립묘지 내
◈ 지장사 대웅전 감로왕도(1폭) 제115호, 동작동 국립묘지 내
◈ 지장사 대웅전 지장십왕도(1폭) 제116호, 동작동 국립묘지 내
◈ 지장사 대웅전 신중도(1폭) 제117호, 동작동 국립묘지 내
◈ 지장사 대웅전 현왕도(1폭) 제118호, 동작동 국립묘지 내
◈ 지장사 대웅전 팔상도(1폭) 제119호, 동작동 국립묘지 내
◈ 지장사 능인보전 후불화(1폭) 제120호, 동작동 국립묘지 내
 
■ 문화재자료(시지정)
◈ 지장사 능인보전 신중도(1폭) 제3호, 동작동 국립묘지 내
◈ 지장사 삼성각 칠성도(1폭) 제4호, 동작동 국립묘지 내
◈ 지장사 삼성각 독성도(1폭) 제5호, 동작동 국립묘지 내
◈ 지장사 삼성각 산신도(1폭) 제7호, 동작동 국립묘지 내
 
■ 비지정문화재
◈ 유명조선국육신묘비(1기) 노량진동 사육신공원
◈ 육각사육신묘비(1기) 노량진동 사육신공원
◈ 청련암 약사여래불(1기) 대방동 1 삼성산
◈ 청련암 칠성탱화(1폭) 대방동 1 삼성산
◈ 청련암 산중탱화(1폭) 대방동 1 삼성산
◈ 청련암 산신탱화(1폭) 대방동 1 삼성산
◈ 미륵암 석조미륵불(1기) 상도1동 103-2
◈ 사자암 극낙보전아미타불좌상(1기) 상도3동 280
◈ 사자암 지장탱화(1폭) 상도3동 280
◈ 사자암 신중탱화(1폭) 상도3동 280
◈ 사자암 현황탱화(1폭) 상도3동 280
◈ 지덕사 허목지덕사기(1점) 상도동 65-42 지덕사 내
◈ 정종대왕어제 지덕사기(1점) 상도동 65-42 지덕사 내
◈ 후적벽부 팔곡병풍목각판(1조) 상도동 65-42 지덕사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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