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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관악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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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관악구의 마을 소개
관악구의 역사문화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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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3. 23:51) 
◈ 관악구의 역사문화자원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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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문화자원

 

1.1. 역사적 사건과 현장

■ 관악의 개척사
오랜 옛적부터 우리의 선조들이 터를 일구어 오면서 곳곳이 그 자취를 남겨 놓은 유서 깊은 고장으로서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잉벌노현(仍伐奴縣), 통일신라시대 경덕왕(재위, 742∼765년) 때에는 곡양현(穀壤懸)으로 개명하였고, 고려시대에는 금주현(衿州縣),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 지역 및 과천군 화북면 일부에 속해 있었으며 관악이라는 이름이 처음 생길 때에는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영등포구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현재의 관악구와 동작구, 서초구 일부를 영등포구에서 분구하여 ‘서울특별시 관악구’가 신설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지방자치단체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1.2.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강감찬 장군
고려의 명장 강감찬(948∼1031) 장군은 정종 3년에 금주 즉 현재의 봉천동(218-14) 에서 삼한벽상공신 궁진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장군의 처음 이름은 은천이었다. 학문을 좋아하며 983년(성종 2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고 저서로 『낙도교거집』과 『구현집』이 있다. 고려 현종 원년(1010년)에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을 때 고려에서는 강조가 30만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우다 패하여 많은 신하가 왕에게 항복할 것을 권했으나 예부시랑으로 있던 강감찬 장군이 항복을 반대하여 위난을 면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018년 거란의 성종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다시 소배압을 시켜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케 했으나 조정은 강감찬 장군을 상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대적케 하니 장군은 홍화진의 물을 막아 적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퇴각하는 적에게 귀주에서 대첩을 거두니 이 귀주 대첩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충무공의 한산대첩과 함께 청사에 길이 남는 승전으로 손꼽힌다. 이 공으로 장군은 ‘추충협모안국공신’의 호를 받았다. 장군은 그 이듬해에 벼슬을 그만 두었다가 1030년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검교태사시중천수군개국후에 봉해졌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으로 숭의전 사당에 배향되어 있으며, 1974년에 낙성대 성역화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장군의 일대기를 적은 ‘강감찬 장군 사적비’를 세워 장군의 애국충정과 호국의 얼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강홍립 장군
강홍립 장군은 명종 15년(1560)에 출생하여 인조 5년(1627)에 세상을 떠났다. 자는 군신이요, 호는 내촌으로 본관은 진주이다. 우의정 사상의 손이며, 참판 신의 아들이다. 선조 22년(1589)에 진사가 되고 1597년에 알성문과로 급제하여 설서, 검열을 거쳐 선조 38년(1605)에 도원수 한준겸의 종사관이 되었고, 같은 해 진진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 광해군 즉위년(1608)에 보덕, 이듬해 한성부 부윤, 1614년에 순검사를 역임하고, 1618년 진령군에 봉해졌다. 이 해 명나라가 요동을 침범 후 후금을 토벌코자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자, 백사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의 천거로 도원수로 임명되었으며, 광해군의 간곡한 청에 의해 오직 한사람이라도 덜 상케 하여 국리를 도모, 향배하라는 밀지를 받들어 부원수 김경서와 함께 13,000여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여 밀지대로 그 뜻을 따랐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에서 화의를 주선하여 재난의 확대를 미연에 방지한 바 있으나 국내의 정변과 더불어 외교 방침의 변화는 장군의 애국충절도 빛을 보지 못하게 하였고, 마침내는 관직을 삭탈당하였다가 죽은 뒤에야 복관되었다. 장군은 관악이 낳은 인헌공 이후의 큰 인물로 한 시대의 영웅이요, 시운을 얻지 못한 풍운아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재 난곡에 있는 강씨묘역에는 강홍수, 강신, 강락, 강홍립 등의 묘가 있으며 강사상의 묘는 그 신도비와 같이 남아있다.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7)
신위 선생은 영조 45년(1769년)에 출생하여 헌종 13년(1847년)에 세상을 떠난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자는 한수, 호는 자하, 본관은 평산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렀고 14살 때 정조가 궁중으로 불러들여서 크게 칭찬하고 사랑하였다. 정조 23년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를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그는 한시문학에 있어서 조선 500년 제일의 대가로 시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난 삼절로서 필묵의 천재였다. 조선개국 이래 시작(詩作)이 가장 많았으며, 100년 이후의 시인들도 그를 시작법의 스승으로 추대하였다. 또한 필법·화법 모두 신의 경지에 이르러 그가 쓰고 그린 종이조각 하나라도 보배로서 전하여지고 있으며, 아들 명연은 호를 애춘이라 하였는 바, 아버지의 유고를 수집하여 책을 만들었는데, 역시 삼절로서 이름이 있었다. 자하가 지은 책으로는 『경수당전고』(분여록) 등이 있다. 선생의 묘는 관악산에 있었으나 서울대학교 이전시 충북 장호원으로 이장하였다.
 
 

1.3. 내 고장의 문화유산

■ 사적
◈ 백제요지
제247호, 관악구 남현동 538-1, 면적 661.16㎡(200평) 규모의 백제 중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요지는 발견당시 채집한 격자문 토기편들로 미루어 백제시대의 가마터로 확인되어 1976년 4월 10일 사적 제247호로 지정되었다. 가마는 파괴되어 있으나 한강변에 있는 백제토기 가마터로는 유일한 것이다.
 
한강변의 바람드리 토성, 곰말토성, 삼성산성, 강 건너 야단삼성 그리고 백제 돌무지 무덤, 방이동 고분군 등과 아울러 주목되는 유적지로서, 백제시대 문화 및 삼국시대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사유지인 밭에 위치하고 있는 이 가마터는 현재 발굴되지 않은 상태로 보전되고 있으며 약 200평 면적에 흑토가 깔려 있다.
 
그리고 이곳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500m 거리에 있는 곳(사당초등학교 터)에는 신라토기의 요지로 추정되고 있는 유적이 있다.
 
◈ 구 벨기에 영사관
제254호, 관악구 남현동 1059-13, 남현동 남부순환도로변의 길가 사거리 가까이 있는 건물로서 1900년 5월 우리나라에 온 벨기에 전권위원인 발카르에 의해 1903년 착공하여 1905년에 준공된 건물로 원래 지어진 곳은 중구 회현동 2가 72번지 2호였으나 198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1919년 벨기에 영사관이 이전하면서 일본 요꼬하마 생명보험회사의 사옥이 되었고 일본 해군성 무관부 관저로, 해방 후에는 해병 헌병대 청사로 사용되었다. 1970년 상업은행에 불하된 후 1982년 9월 10일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현재 한빛은행 사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은 지하1층, 지상 2층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하면서 현관과 발코니 석주 등은 독특한 고전주의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 천연기념물
◈ 신림동 굴참나무
제271호, 관악구 신림동 산112-1, 신림동 굴참나무는 참나무과에 속한 낙엽교목이며 높이 18m, 가슴둘레 1.9m가량 되는 노거수로 1982년 11월 4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약 1,000년 전에 강감찬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나서 현재와 같은 커다란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인근에는 장군이 별당으로 사용하였다는 칠불사가 있으며 수량은 약 1,0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연 2회 음력 7월 1일과 10월 1일 수명보존(목신)과 동리는 평안을 위하여 고사를 지내고 있다.
 
■ 유형문화재(시지정)
◈ 낙성대 3층석탑
제4호, 관악구 봉천7동 228호, 봉천7동 228번지. 안국사 경내에 (강감찬 낙성대)라 새겨져 있는 사리탑식의 3층 석탑으로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이 탑은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봉천동 218번지 집터에 있었으나 낙성대 공원 조성시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 석탑의 조성연대는 고려시대 (13세기경 추정)로 자재는 화강암이며, 탑의 높이는 4.48m이다.
 
◈ 봉천동 마애미륵불
제49호, 관악구 봉천11동 산4-2, 관악산 북쪽 중턱에 우뚝 솟은 거대한 절벽 바위면에 얕은 도드락 새김으로 조각된 조선시대의 미륵불 좌상이다. 낮은 육계, 소방의 머리칼, 다소 풍성하게 보이는 갸름한 얼굴 등은 상당히 우수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16∼17세기 불상으로서는 뛰어난 솜씨로 조선조 조각사 편년 설정에서 절대적인 자료가 되며 조선조 사회에도 미륵신앙이 상당히 유행되고 있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이 마애미륵불은 16∼17세기 조선조 불상을 대표하는 기준이 될 만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된다.
 
◈ 강사상 신도비
제104호, 관악구 신림13동 산107-2, 조선 숙종 39년(1713년)에 세워진 정정공 강사상(1519∼1581)의 신도비이다. 선생은 1543년(중종 3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446년(명종 1년) 식년문과에 병(丙)과급제하여 한림이 되어 수많은 관직을 거쳐 우의정과 영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사후에 아들 인(絪)이 호성공신에 책록되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강홍립 장군(1570∼1627)의 조부로서 1561년에 명나라 원절사, 1568년 명나라 성절사, 사신 원접사, 1570년 명나라 주청사로 활동하는 등 외교에 역할이 컸으며 평상시 국가의 치란은 천운에 있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여 정쟁에 초연하였다. 신도비문은 권유가 짓고 본문은 이진검이, 제목은 권규가 썼다.
 
◈ 이경직 신도비
제105호, 관악구 남현동 산 57-10, 조선 현종 9년(1668년)에 세워진 효민공 이경직(1577∼1640)의 신도비이다. 선생은 백사 이항복과 사계 김장생의 제자로 1605년 식년시와 증광별시에 잇달아 합격한 후 전시에 응시하여 승문원에서 처음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강화유수로 있다가 병사할 때까지 도승지, 호조판서 등 많은 관직을 거쳤다. 1617년(광해군 9년) 일본에 회답사의 종사관으로 다녀오고,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 때 전라절도사로 공을 세우고, 1627(인조 5년) 정묘호란 때 병조참판으로서 후금국 사신과 교섭하여 화의를 성립시켰다. 신도비문은 김류가 짓고 글은 삼남인 정영이 썼으며 공의 묘소는 이 묘역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 기념물(시지정)
◈ 낙성대 유지
제3호, 관악구 봉천7동 218-14, 낙성대는 고려의 명장 인헌공 강감찬 장군(948∼1031)이 태어난 집터이며 그가 태어난 날 밤에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고 해서 그 생가의 터를 ‘낙성대’라 이름지어 전해오고 있다. 자리에는 고려시대의 사리탑식 3층 석탑이 하나 있어 낙성대 위치를 알려 주고 있었다. 1973년 낙성대를 정화하면서 이 석탑을 안국사 경내로 옮기고 그 자리에는 1974년에 따로 높이 2m의 유허비를 세워 유서 깊은 사적지임을 표시하였다. 이곳은 현재 낙성대 동북쪽에 위치한 봉천7동 218번지 14, 19호 일대이며 대지면적은 33평으로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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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