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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강동구 서울특별시 강동구 정보
서울특별시 강동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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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005년 6월 13일
강동구의 역사문화자원
2005년 6월 3일
about 서울특별시 강동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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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3. 23:51) 
◈ 강동구의 역사문화자원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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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문화자원

 

1.1.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신익희(1892∼1956)
호는 해공, 독립운동가, 정치가이며, 최린, 송진우 등과 독립운동을 했고, 3·1운동 때는 해외 연락 임무를 맡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 외무, 문교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 이집(1314∼1388)
고려말의 학자로 초명은 원령, 자는 호연, 호는 둔촌, 본관은 광주이다. 당(唐)의 아들로 충숙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문장과 절개로 알려졌으며, 이색, 정몽주, 이숭인 등과 교유하였다. 공민왕 17년(1368) 신돈의 미움을 받아 생명을 위협당하자 영천으로 피신했다가,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주살된 뒤 개경에 돌아와 판전교시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 천녕현에서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이때 「시편신립(詩篇新粒)」에 대한 질문서를 정몽주에게 보내 문사들을 경탄케 하였다. 그는 광주의 구암서원에 배향되었고, 그의 저서에는 「둔촌집」이 있다.
 
 

1.2. 내 고장의 문화유산

◈ 암사동 선사주거지 유적 사적 267호.
암사동 선사주거지 유적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0여년 전에 우리 조상인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유적으로 신석기시대의 최대 집단 취락지이다. 이 유적은 동남쪽의 구릉에 신석기시대 다음 시대인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유적(無文土器遺蹟)과 인접되어 있어 두 시대의 문화가 접촉하는 양상을 알려주며, 또 농경문화 개시를 입증하여 주는 고고학적 자료도 발견되어 한국선사문화의 추이를 밝히는 데 있어서 유일하고도 귀중한 유적이다. 이 유적은 1925년 을축년 홍수에 한강변 모래언덕 지대가 심하게 패어져 수많은 빗살무늬토기 조각이 노출되면서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임이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계속된 발굴조사에 의해 많은 빗살무늬 토기와 석기는 물론 청동기시대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이 암사동 선사주거지유적은 1979년 7월 26일 사적 제267호로 지정되었고 1981∼1988년까지 유적지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총면적 78,133㎡의 문화재 보호구역을 확대하여 9차에 걸친 복원공사로 신석기 시대 움집이 복원되어 선사유적전시관을 건립하였다.
 
·신석기인의 생활상 : 암사동 유적의 연대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에 의해 기원전 4∼3천년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석기시대에는 거의 대부분 땅을 깊이 파고 움집을 견고하게 지어서 살았다. 신석기시대는 완전한 생산경제의 단계가 아니고 일부 수렵, 채집, 어로에 의존하는 경제 단계였기 때문에 대형 저장시설보다는 대부분 간단한 제작시설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암사동 움집은 한강을 끼고 넓은 평지에 자리잡고 있어 당시 사람들의 생활 기반은 고기잡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나타내준다고 하겠다. 이것은 어망추, 작살 등 어로 도구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뒷받침되며, 화살촉들의 발견으로 인근야산에서 수렵을 했으리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또 도토리, 갈판, 갈돌의 발견은 신석기인들의 주식량이 도토리였으며 보습, 돌 낫 같은 농기구의 출토는 밭농사가 일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움집 : 신석기시대 살림집은 동굴을 이용한 경우도 있으나 움집이 일반적이다. 움집이란 일정한 넓이와 형태를 가진 구덩이를 파서 집의 바닥은 땅 밑에 두고 구덩이 안은 별도의 벽체 시설 없이 서까래가 바로 땅에 닿게 된 집을 말한다. 신석기시대의 움집은 해안가 구릉이나 큰 강변의 대지에 지어졌는데, 직경 4∼6m 크기의 원형이나 모를 죽인 방형의 구덩이를 깊이 50∼100㎝정도 판 다음 화덕자리 등의 내부시설을 마련하고 지붕을 덮었다. 화덕자리는 돌이나 진흙으로 원형이나 타원형, 장방형의 테두리를 돌려 집 중앙에 설치하였는데 보온과 취사에 이용되었다. 바닥은 아무런 시설이 없거나 또는 진흙을 깔아 다진 것이 있는데 그 위에 풀이나 짐승가죽 등을 깔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붕은 움구덩이 주위에 서까래를 걸치고 한 쪽 끝을 움 중앙에 모이게 묶어 골격을 형성하였는데 서까래 아래 사이에 잣나무 가지나 갈대, 억새 등의 풀을 이어 덮었다. 움집의 규모로 보아 작은 움집은 2∼3명, 큰 움집은 5∼6명이 기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저장공(貯藏孔) : 주거지 외곽에 자리잡은 저장공이 모두 4개 확인되었는데 모두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직경 2.3m에 깊이 0.34m, 직경 0.9m 에 깊이 0.35m, 직경 0.95m에 깊이 0.43m, 직경 0.85m에 깊이 0.28m의 4개가 보이고 있다. 규모가 비교적 크기 때문에 저장공(貯藏孔)라 할 수 있는 이 시설물은 원형의 수혈로서 외곽의 한쪽에 2단의 계단을 만든 출입시설이 있다. 직경은 3.4m, 깊이는 1.74m인데 바닥은 어깨면으로부터 1.4m 깊이에서 평탄해지다가 중앙부에 이르러 장방형에 가깝게 좁아지면서 깊게 파였다. 저장공에는 집바닥을 파고 바닥이 없는 토기를 거꾸로 묻어 만든 것과 벽 쪽을 파서 별도의 독립 저장 시설을 마련한 것이 있다.
 
·출토유물 : 집터에서 드러난 유물 중 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빗살무늬 토기이다. 이 토기는 바탕 흙이 사질토에 운모가루 또는 석면과 활석이 섞여 있으며, 흙 테를 하나씩 따로 빚어 차례로 쌓아올린 수법으로 만들어졌다. 그릇 모양은 곧은 입술모양에 뾰족 밑 또는 둥근 밑이고 반 달걀모양을 하고 있다. 빛깔은 부드러운 갈색이나, 문살무늬, 생선뼈무늬 등 여러 유형이 있으며 무늬가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지역별로 크게 동북, 서북, 중서부, 남부지방의 4개 문화영역으로 나눌 수 있으며 중서부 지방은 뾰족 밑 토기가, 동북지방은 납작 밑 토기가, 남부지방은 둥근 밑 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뾰족 밑 토기는 계란의 윗부분을 옆을 잘라 버린 것 같은 모양을 보인다. 암사동 집터유적지의 대표적인 것은 돌촉, 돌도끼, 공이, 긁개, 갈판과 갈돌 등이며 이러한 유물은 돌짐승의 사냥과 가죽을 벗기는 데 쓰였다고 보여지며, 공이는 들짐승의 뼈나 열매 같은 것을 부수는 데 쓰였을 것이다. 그리고 갈판과 갈돌은 도토리알과 같은 열매를 갈아서 가루를 내는데 쓰였을 것이다.
 
◈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0호,
이 곳에는 세종대왕부터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7대왕을 섬기면서 도덕정치를 실천한 광릉부원군 이극배(시호 익평공, 영의정 1484∼1495)의 묘와 그의 후손들의 묘 등 모두 11기의 묘가 모여 있다. 이 가운데 이극배의 묘는 연산군 원년(1495)에 조성되어 배위 경주 최씨와 나란히 안장되어 있는데, 묘비를 비롯하여 상석 및 석등과 문익석 2, 무인석 2등 석인상 4구가 있다. 또한 신도비는 연산군 2년에 세워졌는데 명필가로 유명한 예조판서 겸 예문 관제학 신종호가 찬한 것이다. 다른 묘에도 이처럼 묘 앞에 문무관석과 묘비등이 놓여 있어서 각각 석인상의 모습, 비석의 형태, 비문의 서체, 석조기법 변천은 물론 이들과 함께 조선조 분묘제도의 특징도 잘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귀중한 묘역으로 알려져 있다.
 
◈ 구암서원
암사동 산 23번지 바위 절터가 남아있다. 신라 때 절이 9개나 있어 구암사라 하였으며, 하진참 동쪽바위에 있어 바위절이라고도 하였다. 당시에는 가옥이 많아 구암사의 출입자가 많았으나 신라와 백제의 전쟁 때 가옥과 절이 소실되었다. 암사동 607번지 일대는 당시 건축물에 사용했던 기와가 잔재하고 있다. 구암서원은 조선 현종 8년(1667)에 건립되었으며, 숙종 23년 (1697) 현판을 사액 받아 여러 인물을 배출해오다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정리 때 철폐되었다. 지금 이 구암서원 터에는 고종 33년(1896) 8월이라고 적은 비석이 있어 구암서원지임을 알려주고 있다.
 
◈ 유창(劉敞) 신도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6호이다. 조선 초기의 유명한 문신 옥천부원군 유창(1352∼1421)의 호는 선암, 시호는 문희, 본관은 강릉이다. 그의 묘와 그의 자손들의 묘가 있는 묘역에 서 있는 신도비이다. 그 당시의 분묘 제도와 석조 미술을 대표할 만한 문관석 2기, 묘갈 1기, 망주석 2기와 함께 있는 이 신도비는 상당히 우람한 당시의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유창은 공민왕 20년(1371) 문과에 급제하였고 조선개국을 도와 협찬개국공신이 되었으며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천성이 부드럽고 너그러웠으며, 사람들은 당나라 위사덕에 견주었는데 이런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유창의 생애와 업적은 물론 당시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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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