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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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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구의 역사문화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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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1. 01:00) 
◈ 동래구의 역사문화자원
◈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장산국의 소멸, 동래의 명소 온천장, 정과정곡(鄭瓜亭曲), 송상현과 임진왜란, 동래지역 독립운동 / ◈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장영실(蔣英實), 김정서(金廷瑞), 안용복(安龍福), 박기종(朴琪淙, 1839∼1907), 우장춘(禹長春, 1898∼1959), 곽상훈(郭尙勳), 박차정(朴次貞) / ◈ 내 고장의 문화유산 - 동래패총(東萊貝塚), 복천동고분군(福泉洞古墳群), 동래야유(東萊野遊), 대금산조(大散調)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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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문화자원

 
 

1.1.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장산국의 소멸
『삼국사기』 거도(居道) 열전에 의하면, 당시에 우시산국(于尸山國)과 장산국이 신라의 이웃에 경계를 두고 있어 자못 나라의 근심이 되었는데 거도는 지방관이 되어 혼자 병합의 뜻을 품고 해마다 한번씩 여러 마필을 장토(張吐)의 들판에 모아 병사로 하여금 이를 타고 달리는 놀이를 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마숙(馬叔)이라 하였다. 두 나라 사람들이 늘 이것을 구경하고 신라가 일상으로 하는 일로 여겨 의심치 않게 되었다. 이에 병마를 일으켜 불의에 습격하여 두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하였다. 장산국의 국기(國基)로는 장산 혹은 망미동 일대를 지목하고 있다.
 
◈ 동래의 명소 온천장
『동국여지승람』 동래현 산천조에 온정(溫井)이 소개되고 있는데, 온정은 동래현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그 물은 계란을 익힐 정도로 뜨거우며 환자가 목욕하면 곧 치유됨으로 신라 때 왕이 여러 차례 이곳에 행차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네 곳에 돌을 쌓고 그 위에 구리 기둥을 세웠는데 지금도 그 자리가 남아있다 하였고, 『경상도읍지』 울산군 편에도, 신라 왕이 울산을 거쳐 온천에 왕래한 기록을 하고 있으니, 동래 온정(온천)의 역사는 매우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정과정곡(鄭瓜亭曲)
고려시대에도 지방 호족의 세력이 강하였다. 동래의 경우 동래 정씨(鄭氏)가 그 대표적이니, 시조 정문도(鄭文道)의 후손 중에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고관을 역임한 이가 많았는데, 특히 동래와 관계 깊은 이는 과정 정서(鄭敍)라 하겠다. 그는 인종이 돌아가고 의종이 즉위하자 동료의 모함을 받아 동래에 유배되었는데, 동천 서천이 합치는 지점 남쪽에 정자를 짓고 참외를 심어 스스로 호를 과정(瓜亭)이라 하며, 여기서 저 유명한 「정과정곡」을 읊었던 것이다.
 
◈ 송상현과 임진왜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은 부산진(첨사 정발)과 다대진(첨사 윤흥신)을 함락하고 동래성을 포위하였다. 이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을 위시한 충의(忠義)의 관민(官民)들은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대적하여 마침내 장렬하게 순절하니 성(城)은 시산(尸山)을 이루었다고 한다. 또 살아남은 사람은 의병을 일으켜 끝까지 항쟁하였으니 김정서(金廷瑞) 장군을 위시한 24 별전공신(別典功臣)이 바로 그들이다. 또 동래의총(東萊義塚)에 모신 이름 없이 순절한 용사들도 있었던 것이다.
 
◈ 동래지역 독립운동
동래인의 독립·저항정신은 임진왜란에서 이어졌는데, 일제가 종래의 왜관 자리를 그들의 전관거류지로 삼고 이를 거점으로 부산의 중요한 토지 대부분을 독점하고 경제적으로 압박하고 중요 문화재를 집중 파괴하여 어느 지역보다 일제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일제의 잔악한 침략근성을 피부로 확인한 동래인은 해방될 때까지 항일운동을 끈질기게 전개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신여학교, 동래고등보통학교, 범어사 등이 그 무대의 하나이다.
 
 
 

1.2.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장영실(蔣英實)
조선 세종 때 과학자. 동래현 관기(官妓)의 소생으로 뛰어난 과학기술적 재능을 발휘하여 정3품 상호군(上護軍)에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일찍이 과학적 재능으로 세종에게 발탁되어, 간의대(簡儀臺)·천문의(天文儀)·자격루(自擊漏)·갑인자(甲寅字)를 제작 감독하고, 태양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를 제작하고, 경상도 채방별감(採訪別監)이 되어 동(銅), 철(鐵)의 채광 제련을 감독하고 1441년 세계에서 최초로 측우기(測雨器)와 수표(水標)를 발명하여 하천 범람에 대비하였다.
 
◈ 김정서(金廷瑞)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첨사 정발, 다대첨사 윤흥신은 사력을 다하여 왜적과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수많은 군관민(軍官民)이 순국하였는데, 그래도 살아 남은 사람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대항하였으니, 바로 김정서가 동래 지방에서 창의(倡義)의 선봉에 섰던 것이다. 임진년(1592) 4월 15일 이후 왜적을 토벌하고 소산(蘇山)의 싸움에서는 투석기(投石機)를 설치하고 돌을 실어와 밤을 타서 적진에 퍼부으니 적의 사상자가 골짜기에 가득하였다. 언양(彦陽) 등에서 유격전을 벌이다가 화왕산에서 곽재우와 합류하였다.
 
◈ 안용복(安龍福)
숙종 때 사람으로 동래의 노군(櫓軍)으로 전한다. 숙종 19년(1693) 봄 동래어민 40여 명과 울릉도 부근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일본에 잡혀갔는데, 호키 태수와 에도 막부에 강력히 항의하여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승인하는 서계(書契)를 받아내는데 성공하였으나 조정은 오히려 월경(越境) 죄로 형벌을 주었다. 출옥한 후 울분하여 다시 동래의 동료 몇 사람과 함께 옥기도(玉岐島)에 들어가 독도의 감세관(監稅官)이라 속이고 도주(島主)와 담판하여 그들의 죄상을 추궁한 서약서를 받아 귀환하였다. 역시 조정은 상(賞)은 커녕 월경죄로 사형을 감하여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안용복의 노력은 헛되지 아니하였으니 일본 막부는 다께시마(竹島)는 조선의 땅이 명백하다 하여 울릉도에 나가는 것을 금했으며 그 뜻을 조선 정부에 통고토록 대마도주에게 명했던 것이다.
 
◈ 박기종(朴琪淙, 1839∼1907)
한국 최초의 철도(鐵道)회사 기선(汽船)회사를 설립한 선각자이다. 왜관 상인과 교역할 수 있는 특권을 갖는 동래의 상고(商賈)가 되어 경제력을 기른 그는 일본의 문물을 견학하고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 지방 최초의 신식학교인 개성(開成)학교를 설립하였고, 고장의 상업발전을 위하여 상무소(商務所)를 설립하며 철도 건설에 고심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이권만 빼앗기고 중지하고 말았다. 외부(外部) 참사관, 변리공사 등을 역임하였다.
 
◈ 우장춘(禹長春, 1898∼1959)
개화당으로 지목되어 일본 동경으로 망명한 우범선(禹範善)의 아들로 태어나 육종학의 세계적 권위자가 된 그는 해방이 되자, 일본과 모든 관계를 끊고 조국에 귀환하여 동래에서 농업과학의 연구에 매진하여 채소의 우량종자 생산과 벼의 2모작 수확에 관한 연구로 한국의 농업을 변모시켰다. 그가 판 자유천(慈乳泉)은 지금도 넘쳐흐르고 있다.
 
◈ 곽상훈(郭尙勳)
1895년 동래에서 출생하여 동래고등보통학교(東萊高等普通學校)에 입학·수업하면서 교감 김병규(金秉圭) 등의 민족적 교육에 큰 감명을 받고 이어 경성공업전문학교(京城工業專門學校)에 진학하였다가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동래에 내려와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옥고를 치르고 그후 안동의 오산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해방을 맞았는데 한민당을 창립하여 독재에 항거하다가 4·19 이후 민주당의 집권으로 국회의장을 지냈다.
 
◈ 박차정(朴次貞)
1910년 동래 복천동에서 태어난 박차정은 한일합방이란 민족의 참상을 보다 못해 1918년 비장한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아버지와 신간회(新幹會) 중앙집행위원으로 항일독립전쟁에서 활약한 큰 오빠 박문희(朴文熺)의 영향을 받아 동래 일신여학교 학생시절부터 항일학생운동의 선봉에 서서 활약하였고 일신여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근우회(槿友會) 선전부장으로 활약하다 체포되었다. 옥고를 치른 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 화북대학에 입학, 졸업하고, 의열단(義烈團)의 단장으로 유명한 김원봉(金元鳳)과 결혼하여 독립전선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다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여자의용군을 모집, 대장이 되어 곤륜산 전투에서 일군(日軍)과 격전 끝에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1.3. 내 고장의 문화유산

 
■ 사적
 
◈ 동래패총(東萊貝塚) 제192호, 낙민동 100-18번지 일대
 
◈ 복천동고분군(福泉洞古墳群) 제273호, 복천동 50번지 일대
 
 
■ 중요무형문화재
 
◈ 동래야유(東萊野遊)제18호, 온천동 산 13-3(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
 
◈ 대금산조(大散調)제45호, 온천 1동 8-5(강백천류대금산조보존회)
 
 
■ 기념물(이하 시지정)
 
◈ 동래읍성지(東萊邑城址)제5호, 명륜 복산 명장 안락동 일대
 
◈ 송공단(宋公壇)제11호, 복천동 229-78 일원
 
◈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제13호, 온천동 산17-7 금강공원 내
 
◈ 온정개건비(溫井改建碑)제14호, 온천동 135-26
 
◈ 내주축성비(萊州築城碑)제16호, 온천동 산 131-4 금강공원 내
 
◈ 이섭교비(利涉橋碑)제33호, 온천동 산 131-4 금강공원 내
 
 
■ 유형문화재
 
◈ 동래부 동헌(東萊府 東軒)제1호, 수안동 421-56
 
◈ 망미루(望美樓)제4호, 온천동 209 금강공원 입구
 
◈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제5호, 온천동 산 20-12 금강공원 내
 
◈ 동래향교(東萊鄕校)제6호, 명륜동 235
 
◈ 충렬사(忠烈祠)제7호, 안락동 838
 
◈ 장관청(將官廳)제8호, 수안동 510-1
 
◈ 고려5층석탑(高麗五層石塔)제13호, 온천동 301-15
 
◈ 군관청(軍官廳)제21호, 안락동 830 충렬사 경내
 
 
■ 무형문화재
 
◈ 동래학춤(東萊鶴춤)제3호, 온천동 산 13-3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
 
◈ 동래지신밟기(東萊地神밟기)제4호, 위와 같음
 
◈ 충렬사제향(忠烈祠祭享)제5호, 안락동 838 충렬사
 
◈ 가야금산조(伽倻琴散調)제8호, 온천동 87-1 강태홍류 가야금산조보존회
 
◈ 동래고무(東萊鼓舞)제10호, 온천동 산 13-3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
 
■ 비지정 주요문화재
동래한량춤, 거사단(去思壇), 영보단(永報壇), 동래줄다리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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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