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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기장군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보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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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023년 12월 1일
기장군의 역사문화자원
2005년 6월
2005년 6월 3일
about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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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1. 01:00) 
◈ 기장군의 역사문화자원
◈ 역사적 사건과 현장 - 기장은 신라의 변방에 속한 지역으로서 멀리는 삼한시대 이전부터 왜구(倭寇)의 침탈을 무수히 당해온 지역으로 신라·고려·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노략질 대상이 되었던 곳이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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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문화자원

 
 

1.1. 역사적 사건과 현장

 
기장은 신라의 변방에 속한 지역으로서 멀리는 삼한시대 이전부터 왜구(倭寇)의 침탈을 무수히 당해온 지역으로 신라·고려·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노략질 대상이 되었던 곳이다.
 
◈ 고려시대의 왜구침략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우왕(禑王) 1∼2년(1375∼1376) 11월에 왜구가 진주 명진현에 침구하였고, 또 함안·동래·양산·언양·기장·고성·영선 등의 고을에 불지르고 노략질을 하였으며, 12월에는 합포현에 침구하여 불사르고, 양주·울주·의창·회원·함안·진해·고성·동평·동래·기장 등의 현민을 살해하고 불살랐다고 한다. 우왕 5년(1379) 8월 왜구가 울주·청도·밀양·자인·언양 등지에 침입하자 우인열(禹仁烈)은 배극렴(裵克廉), 하을지(河乙沚), 오언(吳彦) 등과 함께 울주에서 왜구와 싸워 격파하였으며, 다시 9월에 왜구가 울주와 기장에 침입하므로 우인렬이 군대를 모아 사주(泗州)에서 대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권133, 114 열전)
 
◈ 임진왜란과 기장
한반도의 남단인 기장은 동래와 함께 바다의 관문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태조 5년(1396) 8월 9일에 왜적의 배 120척이 경상도에 침입하여 우리의 병선 16척을 탈취해 갔고, 수군만호 이춘수(李春壽)를 살해하였으며, 동래, 기장, 동평성(東平城)이 함락되는 등 수없이 많은 왜적의 침탈이 빈번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침략군의 제2군인 가토군은 동래, 기장, 언양, 울산으로 진격해 왔다. 4월 15일 동래성이 함락되자 기장현감은 군졸을 모아 동래성 수복을 준비하던 중,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버리고 지금의 일광면 조정리로 후퇴해 버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6월경에는 지금의 기장읍 죽성리(竹城里)에 왜장 구로타(黑田長政)가 왜성(倭城)을 쌓고 한때는 8,000여 명의 왜병이 주둔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기장지역은 7년간의 전란 동안 완전히 폐허가 되고 계속 왜군의 점령하에 있었던 것이다.
 
기장의 주민들은 동서남북으로 흩어지고 남녀노소가 겪은 피해는 형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기장주민들은 삼한 아래로 왜구의 침략과 노략에 대항하여 절망 속에서도 끈질기게 목숨을 이어온 강인한 정신력을 발휘해 온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임진란 당시의 기장은 왜군의 본거지가 되었으므로 현청도 있을 수 없었고, 현감도, 향리도 없었으며, 백성들은 산 속 깊이 피난생활을 하였다. 이런 결과로 전란이 끝나자 기장현(機張縣)은 극심한 피해로 독립된 현으로 유지될 수 없었으며, 전란 때 현감(縣監)이 싸움 한번 해 보지도 않고 도주하였다는 문책으로 선조 32년(1599)에 폐현되고 말았다. 이때에 동래부(東萊府)도 동래현으로 강등된다. 폐현된 기장은 두 조각으로 나뉘어 남쪽은 동래현에, 북쪽은 울산군에 편입되었다. 그 뒤 18년 후인 1617년(광해군 9년)에 기장현이 되살아난다.
 
◈ 임진란과 기장의 의병활동
임진란 7년 동안 현감도 도주하고 관군도 힘없이 흩어질 때 기장에서는 의병활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특히 지금의 철마면에서 김일개(金一介), 김일덕(金一德), 김일성(金一誠), 오홍(吳鴻), 오춘수(吳春壽) 등이 의병을 일으켜 기장현 수복을 위하여 결사적으로 항전하였다. 바다와 육지에서 많은 의병들이 항외토적을 외치며 싸웠던 것이다. 울산·경주지방에서 일어난 의병들과도 연락하고 협력하여 기장의 왜병을 소탕하는데 경울간의 박홍춘 의병장과 김득복(金得福) 의병장도 수차에 걸쳐 동래와 기장수복전에 직간접으로 호응하여 왜병퇴치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외도 많은 의병들의 전공이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 기장의 봉수대(烽遂臺)
왜구의 침략이 극심했던 기장지역에는 봉수대가 많았다. 남산(南山)봉수(기장읍 죽성리 산 52), 임랑포(林浪浦)봉수(장안읍 임랑리 임랑강 남쪽 산봉우리), 아이포(阿爾浦)봉수(장안읍 고리 뒷산), 거물산 봉수대지(巨物山 烽遂臺趾, 동백리 이동마을의 거물산 산봉) 등이 있다.
 
 
 

1.2.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지면관계로 임진왜란 때의 의병활동을 전개한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 정팔동(鄭八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현감이 성을 버리고 도망칠 때 그를 따르는 군졸이 없었다. 결국 현감 혼자 남게 되자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정팔동은 비록 자신의 신분이 하인이었지만 현감을 호위하기로 결심하였다. 왜병들이 이 두 사람을 에워싸고 덤벼들었다. 정팔동은 상전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대항하였다. 왜병들도 정팔동의 의기에 감격하여 죽이지는 아니하였다 한다. 위험에 처하여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은 진실한 의사였다.
 
◈ 최개동(崔介同)
본래는 최개똥이라고 불렸다. 기장군 남면사람으로 몸집이 크고 용맹스럽고 힘이 센 장사였다. 왜병들이 근처 마을에 와서 노략질과 겁탈을 하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왜병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죽였다. 그리고 읍내 내리마을 뒤에 있는 앵림산(지금 안적사가 있는 산)에 들어가 토막을 지어 숨어살게 되었다. 이 무렵 기장주민들도 왜병을 피하여 이 산속에서 숨어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왜병들이 산 속까지 쳐들어와 숨어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유린하고 죽이는 일이 극심했다. 이런 처참한 광경을 본 최개똥은 왜병들을 활로 쏘아 수십 명을 사살하니 이에 겁먹은 왜병들은 그 근처에 얼씬도 못하였다 한다. 많은 피난민들이 개똥에게 의지하여 난리를 무사히 피하게 되었다. 이 소문이 조정에 알려지자 선조임금은 최개똥의 이름을 최개동으로 고쳐주고 공신으로 봉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 김일개(金一介), 김일덕(金一德), 김일성(金一誠) 삼형제
이 삼형제는 기장현 하북면 예림방(禮林坊, 지금의 정관면 예림리)에서 태어났다. 첫째 일개의 자는 여강(汝剛), 호는 송미이다. 둘째 일덕의 자는 여경(汝卿), 호는 죽간(竹澗)이다. 세째 일성의 자는 여빈(汝彬), 호는 채정(蔡汀)이다. 삼형제는 임진란 때 기장과 울산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전후 선조 38년(1605)에 조정에서는 이들 삼형제에게 선무원종 2등공신과 3등공신에 녹훈하였다. 현재의 철마면 와여리에 있는 의열사(義烈祠)에 배향되어 있다.
 
◈ 오홍(吳鴻) 과 오춘수(吳春壽) 종형제
오홍은 기장현 하서면 연구동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치화(致化), 호는 연파(蓮坡)이다. 23세 때 참봉으로 봉직하였다. 오춘수는 오홍의 종제(從弟, 사촌동생)로서 선조 6년(1573) 동래읍 북면 노포동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죽강(竹崗)으로 종지품(從之品)의 무관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동래성이 함락되었다는 급보를 종제 오춘수로부터 전해들은 오홍은 의병을 모집하여 300여 명을 훈련시켰다. 오홍은 이들의 장수가 되어 먼저 기장현부터 수복할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해 4월 20일 밤 오춘수와 함께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사라동과 현청을 점령하고 있던 왜병을 급습하여 왜병 470여 명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리고 왜병을 도주시켰다. 이것이 오장군의 첫 승전인 사라동의 전과이다. 그뒤 두모포(豆毛浦)에서 왜병들에게 포위공격을 받고 있던 의병부대를 구출하는 전과를 올렸는데 이때 구출된 의병들은 뜻밖에도 동향출신의 김일덕(金一德)이 이끄는 부대였다. 이것이 두번째 두모포 전과였다. 1596년초에는 당시 순천부사로 있던 오응승(吳應昇) 장군과 합세하여 운봉(雲鳳)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정유재란(1597)때 남원성(南原城)의 적병을 기습하는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32세)하였다. 선조 41년(1608) 24별전공신으로 동래 안락서원과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오춘수는 선조 28년(1595) 서생포전투에서 전사, 후에 사상감 검정에 추증되었다.
 
◈ 김산수(金山壽), 김득복(金得福) 부자(父子)
아버지 김산수의 자는 군경(君卿), 호는 덕계(德溪)이다. 아들 김득복의 자는 진옥(振玉), 호는 동호(東虎)이다. 집안이 청도에서 살다가 경주지방으로 이사하였다. 임진란을 당하자 가재(家財)를 털어 의병을 일으키고 처가와 외가가 울산과 인연이 있으므로 경주·울산지역의 의병장들과 함께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였다.
 
7년 왜란의 무수한 전공으로 선조 38년(1605)에 아버지 김수산은 선무원종 3등공신에, 아들 김득복은 선무원종 1등공신에 봉해졌다. 특히 김득복의 공이 너무 컸기 때문에 명나라 원정군의 장군이 동쪽의 호랑이 장군이라고 하여 동호(東虎)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두 부자의 묘가 현재의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에 있다.
 
• 근세의 인물로 초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한 김약수(1892∼?), 한글학자 김두봉(1889∼?), 여성정치인으로서 자유당 독재에 항거했던 박순천(1898∼1983) 등도 이곳 출신들이다.
 
 
 

1.3. 내 고장의 문화유산

 
■ 시지정 문화재 현황
 
◈ 장안사 대웅전 - 기념물 제37호, 장안읍 장안리 598-2
 
◈ 이길봉수대(아이봉수대) - 기념물 제38호, 장안읍 효암리 산 51-1 외 12
 
◈ 기장향교 - 기념물 제39호, 기장읍 교리 59-1
 
◈ 기장읍성 - 기념물 제40호, 기장읍 서부리 83-4 외 17
 
◈ 기장척화비 - 기념물 제41호, 기장읍 대변리 306-2
 
◈ 기장 죽성성 - 기념물 제48호, 기장읍 죽성리 52-1 외 11
 
◈ 기장 남산봉수대 - 문화재자료 제2호, 기장읍 죽성리 산 52
 
 
■ 비지정 문화재 현황
 
◈ 국수당 - 기장읍 죽성리 노송 한 그루, 풍어 기원 제사
 
◈ 시랑대 - 기장읍 시랑리 413, 영조 9년(1733) 시랑권적이 기장현감으로 좌천되어 이곳 경치를 보고 ‘시랑대’라는 세 글자를 바위에 새김
 
◈ 신라토성 - 기장읍 원족마을, 신라 때 축조한 토성
 
◈ 수리정 - 철마면 웅천리 422, 1689년 정자, 1974년 유적비
 
◈ 효자각 - 철마면 연구리 578, 효자 이야기 비석
 
◈ 산성 - 기장읍 대라리, 고려 문종 3년(1055)에 산성 축조, 석성
 
◈ 황학대 - 기장읍 죽성리 두호마을, 옛 선비들이 시를 짓고 놀던 곳
 
◈ 임란공신묘 - 기장읍 대변리 산 5-1, 임진왜란 시 동호(東虎)장군 김득복 장군의 묘
 
◈ 차건신의 묘 - 장읍 만화리 산 72, 신라시대 승상 차공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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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