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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양구군 강원도 양구군 정보
강원도 양구군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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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023년 12월 1일
양구군의 역사문화자원
2005년 6월
2005년 6월 3일
about 강원도 양구군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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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1. 01:00) 
◈ 양구군의 역사문화자원
◈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의병과 양구 군민의 궐기, 구 천도교인의 시위, 해안 소학교의 맹휴 / ◈ 내고장의 역사적 인물 - 김현도(金玄度), 최도환(崔道煥), 동창률(董昌律)
목   차
[숨기기]
 

1. 역사문화자원

 
 

1.1.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의병과 양구 군민의 궐기
1907년 을사보호조약이 일제의 강제에 의해서 체결된 후 고종이 퇴위하자 각 지방에서 의병이 조직되었으며, 이를 정미년(丁未年) 의병이라 한다. 당시 본토의 관찰사였던 이규완(李圭完)이 의병활동 사항을 수록 폭도사 편집 자료로 제출한 경비발(警泌發 제760호) 「폭도봉기이래상황」(暴徒峰起以來狀況)보고자료에 의하면 1907년 11월 2일 양구면 연포(現松靑里) 학포(鶴浦) 두 곳에서 왜군 후지이 소위가 지휘하는 왜군과의 공방전에 이어서 11월 21일 방산면 선안리(方山面 善安里 → 現 縣里)에서 김덕흥(金德興) 김경화(金敬和)가 지휘하는 300여명의 의병은 소위 춘천수비대인 후지이 소위 외에 보병 30명과 기병 7명 순사들과 접전, 이 전투에서 김덕흥·김경화 외에 14인이 전사하였고, 동년 12월 중순 이래 최천유(崔千有)가 부하 600인을 인솔하고 화천·양구·인제간을 왕래하면서 곳곳에서 공방전이 감행되었다. 12월 20일 양구면의 의병 50인의 접전에 이어서 이듬해 1월 2일에는 양구분견대(楊口分遣隊) 후지이가 지휘하는 왜군들과의 접전 등 전투에서 동면 덕곡리 출신으로 용맹한 최도환(崔道煥, 1851-1911) 양구 의병대장은 장년들을 양구 심곡사(深谷寺, 동면 팔랑리)에서 모집하고 용전을 여러 차례 걸쳐서 응전하였으나 이인금 외 60여인이 전사하고 2인이 포로 당하였다.
 
◈ 양구 천도교인의 시위
1913년 3월 10일 양구 지방 천도교인 양구면 상리 출신인 염완기를 중심으로 양구면 함춘 나루터에서 서민과 농민들이 규합하여 3·1만세를 불렀다. 한편 양구면 도사리 유흥조와 남면 창리 이중옥 등이 이끄는 농민들이 양구 면으로 향진 합류하다가 각각 왜경의 조총 등의 무기에 못이겨 분산되고 말았다. 염완기 일가는 신변의 위태로움과 정세를 졸염한 나머지 상해로 망명하였고, 1927년 최준용은 신간회관련 사건으로 서울제일공립보통학교(현 경기고) 졸업 무렵에 퇴학을 당하는 등 일본인들이 3·1운동을 계기로 가혹한 탄압과 처벌을 가한 사실을 찾아볼 수 있어 아직 70, 80대 노인들로 하여금 노면담화에서 그 당시를 회상해 준다.
 
◈ 해안 소학교의 맹휴
1937년부터 1940년까지 해안학교(당시는 매동)에 교원으로 있던 홍순창(洪淳昌)은 당시 5학년을 담임하면서 평소 학생들에게 항일사상을 주입, 이것이 동기가 되어 당시 학생인 김창화, 외에 여러 학생이 동맹 휴학을 하자 경찰에 잡혀가 고초를 겪은 사건이 있었다. 1938년 3월에는 항일 동맹휴학 중 해안학교 졸업생 사은회 석상에서 학생들이 조선 노래를 제창하기를 희망했는데 일본인 교장 구보 이찌도가 이를 거부하자 「타도 일본 정신」이라고 각 교실 흑판에다 판서함으로써 사건이 발단 되었다. 그후 진상을 밝히기 위해 춘천에서 판·검사들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당시 교과서의 허위교육 내용을 홍순창은 일제의 저의라고 폭로하면서 올바른 역사교육으로 민족의식을 그들의 심전(心田)에 굳게 심어 갔던 것이다. 1939년 9월 9일 학교 교정에서 2학년이던 교장의 아들과 김영창(金永昌)이 싸웠는데 교장이 영창을 불러다 구타 실신케 하는 벌을 주었는데 이 때 홍순창은 “벌을 받아 슬퍼하지 말고 나라 없는 것을 슬퍼하라”고 할 정도로 항일교육에 철저한 교사였다. 1939년 3월 구보 교장의 재임을 반대하여 동맹휴학을 추진하여 항거하였고, 이때, 「조선독립」 등의 전단을 만들어 뿌리기도 하였다.
 
 
 

1.2. 내고장의 역사적 인물

 
◈ 김현도(金玄度)
1587년 강원도 금성 제6대 현감을 거쳐 제14대 양구 현감으로 도임. 재임 중 목민관으로 사민들에 경서를 강론하여 교육에 헌신, 양구 현민의 무리한 진공품을 조정에 수차 상소하여 부담을 가감케 하는 등 애민선정(愛民善政)의 유공은 허다하다. 현종 8년(1667)에는 효성을 인정받아 효자로 정려가 내려졌고, 13세 때 지은 창오모색(蒼梧暮色)이라는 장편시는 천하의 명문으로 당시 문장대가들이 그 웅문(雄文)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1610년 유언대로 예안(禮安) 김씨들이 동면 후곡리에 토착하여 현재에 이른다. 동면 후곡리 백앙봉(百仰峰) 기슭에 위치한 서암사(書巖祠)에다 1864년에 배향하였다.
 
◈ 최도환(崔道煥)
1851년 4월 4일 양구동면 덕곡리에서 태어나 임당리에 이사 후 성장. 1870년 실업가로 목상·옹기점·보부상으로 활동. 1906년 10월 7일 양구 지방의 의병대장으로 추대. 관절염으로 은거생활 중 1911년 7월 11일 일본 헌병에 체포. 1911년 춘천형무소에서 단식 투쟁중 옥사. 1968년 3월 1일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국민장 수여. 현재 양구군 동면 임당리에 그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 동창률(董昌律)
1867년 함남 북청군 이곡면에서 출생. 1919년 11월 9일 의친왕 망명거사에 대동단(大同團)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국사범으로 7년 옥고를 치름. 탈옥 후 남몰래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두 자녀를 데리고 양구군 동면 원당리에 피신 생활. 서당을 개설하여 후진 양성에 일생을 헌신하다가 1943년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유일한 혈육인 증손녀 옥녀가 양구읍에 거주하고 있다.
 
 
 

1.3. 내 고장의 문화유산

 
◈ 고대지석묘군(1곽) - 지방기념물 제9호, 양구읍 고대리, 남면 송우리
 
◈ 선돌 - 남면 용하리 양구 선사박물관
 
◈ 양구향교 - 양구읍 중리
 
◈ 심곡사지 - 동면 팔랑리
 
◈ 서암사 - 동면 후곡리
 
◈ 비봉산 성지 - 양구읍 중리
 
◈ 노고 성지 - 양구읍 중리
 
◈ 방산자기 도요지 - 방산면 장평리
 
◈ 대암산·대우산 천연보호구역 - 천연기념물 제246호, 동면 팔랑리
 
◈ 공수리지석묘군(11기) - 지방문화재 제109호, 양구읍 공수리
 
◈ 고대2지구지석묘군(2기) - 지방문화재 제110호
 
◈ 개느삼 - 천연기념물 제372호, 양구읍 한전리, 동면 임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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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