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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도요지 지표조사 보고서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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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018년 7월 12일
Ⅷ. 임실군 도요지의 현황과 수습유물 (1)
개요
about 임실군 도요지 지표조사 보고서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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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2018.07.16. 02:38) 
◈ Ⅷ. 임실군 도요지의 현황과 수습유물 (1)
2016년 3월부터 임실군 도요지를 대상으로 정밀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군산대학교 박물관이 임실문화원과 공동으로 추진하였는데, 임실문화원 최성미 원장님이 손수 조사단을 이끌었다. 이 자리를 빌어 원장님의 열정과 도전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
목   차
[숨기기]
2016년 3월부터 임실군 도요지를 대상으로 정밀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군산대학교 박물관이 임실문화원과 공동으로 추진하였는데, 임실문화원 최성미 원장님이 손수 조사단을 이끌었다. 이 자리를 빌어 원장님의 열정과 도전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 임실군 문화관광해설사 강명자 선생님과 군산대학교 김병환·김가혜 선생님도 고단한 현지조사에 빠짐없이 참여해 큰 힘을 보탰다. 그해 여름이 시작되기 이전에 1차 현지조사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원장님의 방침에 따라 두 달 동안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종래에 학계에 보고된 도요지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실태조사와 새로운 도요지를 찾는 부분에도 큰 비중을 두었다. 현지조사와 추가조사를 통해 밝혀진 임실군 도요지의 현황을 면별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1. 임실군 도요지 현황

 

1.1. 1) 강진면

 
1.1.1. (1) 부흥리 도요지
소재지 : 임실군 강진면 부흥리 배나무실 마을 동북쪽 달군이골
유적의 현황 : 임실군 강진면과 청웅면 경계에 백련산(754m)이 있는데, 이 산봉우리에서 비교적 험준한 산줄기가 서남쪽으로 흘러내렸다. 이 산줄기에서 남쪽으로 갈라진 여러 갈래의 산자락이 거의 U자형으로 휘감은 달군이골에 부흥리 도요지가 있는 것으로 학계에 보고되었는데, 현지조사 때 유적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임실군 강진면 부흥리 배나무실마을 동북쪽 골짜기로 30번 국도에서 북쪽으로 500m 가량 떨어졌는데, 오래전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었다. 현지조사 때 조선 후기 백자편이 밭에서 일부 수습되었지만 도요지와 관련된 유구의 흔적을 찾지 못하였다.
 
 
1.1.2. (2) 부흥리 옹기요지
소재지 : 강진면 부흥리 배나무실마을 서남쪽
유적의 현황 : 백련산(754m)에서 강진면 소재지까지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내린 산줄기 동남쪽 기슭에 임실 부흥리 옹기요지가 있다. 임실군 강진면 부흥리 배나무실마을에서 서남쪽으로 200m 가량 떨어진 곳으로 일부 민묘 구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었다. 이 옹기요지를 중심으로 남쪽에 30번 국도가 통과하고 있는데, 국도 남쪽에는 갈담천을 따라 앵마들이 따라 비교적 넓게 펼쳐져 있다. 청웅분지에서 발원해 줄곧 서쪽으로 흐르는 갈담천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남쪽 기슭으로 지형이 완만하고 흙이 좋아 옹기요지가 들어설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민묘 구역 주변에 불 먹은 흙과 가마의 벽체편, 옹기편이 집중적으로 쌓여 있어 본래 가마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지조사 때 기종이 다양한 옹기편과 가마의 벽체편이 수습되었다.
 
▲ 강진면 부흥리 도요지 및 옹기요지 현황도
 
 
1.1.3. (3) 용수리 사적골 제철유적
소재지 : 강진면 용수리 가리점마을 서남쪽 사적골
유적의 현황 : 강진면과 순창군 구림면 경계에 장군봉(780m)이 있는데, 이 산봉우리 북쪽 골짜기를 사적골이라고 부른다. 장군봉 북쪽 기슭에서 발원해 줄곧 동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가리점마을을 지나 30호 국도에서 섬진강 본류로 흘러든다. 사적골 중단부에 가리점마을이 있는데, 현지조사 때 가리점마을에서 상당량의 슬래그가 수습되었다. 당시에 수습된 슬래그와 관련된 제철유적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지만 가리점마을 위쪽이 비교적 완만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 점에서 사적골 상단부에 제철유적이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리점이라는 마을 이름도 제철유적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점쳐진다.
 
▲ 강진면 용수리 사적골 제철유적 현황도
 
▲ 강진면 용수리 쇠종골 제철유적 현황도
 
 
 
1.1.4. (4) 용수리 쇠종골 제철유적
소재지 : 강진면 용수리 배나무골마을 남쪽 쇠종골
유적의 현황 : 회문산(830m) 동남쪽에 쇠종골 골짜기가 있다. 회문산 자연휴양림 반대편 골짜기로 임실군과 순창군 경계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계속해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배나무골마을 부근에서 섬진강으로 들어간다. 현지조사 배나무골마을 부근 쇠종골 입구 골짜기에서 소량의 슬래그가 수습되었는데, 임실 용수리 사적골에서 서남쪽으로 2km 남짓 떨어진 곳이다. 쇠종골 중단부에 제철유적이 들어설 정도로 상당히 넓은 지형이 형성되어, 이 일대에 슬래그와 관련된 제철유적이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쇠종골 지명도 제철유적에서 유래된 것으로 판단된다.
 
 
1.1.5. (5) 필봉리 도요지
소재지 : 강진면 필봉리 하중방마을 서북쪽 사기점골
유적의 현황 : 강진면 필봉리 하중방마을 서북쪽에 사기점골이 있는데, 이 골짜기 상단부 하필제 위쪽에 필봉리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다. 종래에는 하필제 아래쪽에 필봉리 도요지가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현지조사를 통해 그 위치가 얼마간 옮겨졌다. 하필제 위쪽이 천혜의 자연 분지형 지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 일대의 동남쪽 기슭 하단부에 자기편과 도침, 소토 등이 폭 넓게 산재되어 있다. 필봉산(580m) 북쪽 기슭에서 발원해 하필제로 흘러드는 물줄기를 중심으로 동북쪽 200m 구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오래 전에 조성된 일부 민묘 구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임야지대로 가마처럼 약간 볼록하게 솟은 지형이 남아있을 정도로 유적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이 일대는 나무와 물이 풍부하고 백토 산지가 부근에 위치하여 고려 말과 조선 초 도요지가 들어서기에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현지조사 때 조선 초기에 유행한 분청사기편과 백자편이 함께 수습되었는데, 자기류는 기형이 정교하고 소성상태도 양호하여 대부분 상품으로 평가된다. 자기편 못지않게 상당량의 도침도 흩어져 있는데, 도침은 대부분 원판형으로 그 높이가 5cm 내외이다.
 
▲ 강진면 필봉리 도요지 현황도
 
 
 
1.1.6. (6) 학석리 도요지 A
소재지 : 강진면 학석리 하율마을 북쪽
유적의 현황 : 강진면과 운암면 경계에 율치가 있는데, 이 고개는 섬진강유역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남북방향 교통로가 통과한다. 율치 남쪽 기슭에서 발원하는 물줄기가 율치제로 흘러드는데, 율치제 제방에서 동남쪽으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학석리 도요지 A가 있다. 하율마을 북쪽 섬진교회 부근 밭으로 상당한 깊이로 제토작업이 이루어져 도요지와 관련된 유구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고 조선 후기의 백자편이 일부 수습되었다.
 
▲ 강진면 학석리 도요지 A 현황도
 
 
1.1.7. (7) 학석리 도요지 B
소재지 : 강진면 학석리 내동마을 북쪽
유적의 현황 : 강진면 학석리 내동마을 북쪽에 학석리 도요지 B가 있다. 강진면과 운암면 경계 산봉우리 남쪽 기슭 말단부로 내동마을에서 상기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서쪽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일대에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학계에 보고되었지만 도요지와 관련된 유적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다만 내동마을과 그 주변지역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현지조사에서 분청사기편과 백자편, 옹기편이 수습되었다. 내동마을에서 서남쪽으로 300m 가량 떨어진 구릉지에 백토 산지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학석리 일대에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도요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습유물 ; 1990년대 후반 지표조사의 내용을 소개하면, 당시에 백자편과 요도구, 가마 벽제편이 채집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자기류는 대접과 접시를 중심으로 완, 종지, 잔 등이 석여있다. 자기류는 내저원각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혼재되어 있으며, 문양은 무문이다. 전면에 시유된 유약은 갈색과 황백색, 짙은 회색으로 다양하다. 굽은 투박한 높은 다리굽과 평저식 다리굽으로 투박하고 묵직하다. 소성방법은 대부분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받침은 지저분한 흙 받침과 굵은 규사가 섞여있다. 요도구는 경사진 납작 원형 도지미이다. 자기류의 속성에 의하면 도요지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 강진면 학석리 도요지 B 현황도
 
 

1.2. 2) 관촌면

 
1.2.1. (1) 상월리 도요지 A
소재지 : 관촌면 상월리 신흥사 서남쪽
유적의 현황 : 신흥사 서남쪽 부도날로 불리는 산기슭에 상월리 도요지 A가 자리하고 있다. 721번 지방도가 통과하는 곳으로 대부분 임야지대를 이룬다. 상월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면담조사에서 “본래 부도날 일대에 상당히 많은 자기편이 쌓여있었는데 도로공사를 하는 과정에 대부분 도로 속으로 파묻혔다”고 제보해 주었다. 종래에 3기 내지 4기의 분청사기 요지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학계에 보고되었지만, 현지조사 때 가마터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지방도에서 신흥사로 들어가는 도로 양쪽의 논과 밭에서 분청사기편 일부가 수습되었다. 분청사기의 속성은 다음에 설명할 임실 상월리 도요지 B에서 채집된 것과 거의 흡사하다.
 
 
1.2.2. (2) 상월리 도요지 B
소재지 ; 관촌면 상월리 신흥사 서남쪽
유적의 현황 ; 관촌면 상월리 치막골 입구에 상월리 도요지 B가 자리하고 있다. 임실 상월리 도요지 A에서 남쪽으로 250m 가량 떨어진 곳으로 721번 지방도 동쪽 밭이 여기에 해당된다. 최근에 상당한 깊이로 제토작업과 부분적인 성토작업이 이루어져 도요지와 관련된 유적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오래전 밭 개간과 경작활동으로 인해 도요지와 관련된 유구가 유실 내지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지조사 때 지방도 동쪽 농수로와 밭둑에서 분청사기편이 일부 수습되었다.
수습유물 ; 1990년대 후반 지표조사의 내용을 소개하면, 당시에 상감청자편과 분청사기편, 초벌구이편, 도지미, 가마의 벽체가 채집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자기류는 기벽이 얇은 대접과 접시가 섞여있으며, 대접은 구연부가 외반되었다. 문양은 상감 선문·동심원문·격자문·화형파상문, 인화 국화문·파상문, 귀얄문 등으로 다양하다. 유약의 색깔은 녹갈색과 회청색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전면에 시유된 유약은 빙렬이 확인되지 않았다. 굽은 작은 다리굽과 죽벌굽이 섞여있으며, 굽의 높이는 대부분 1cm를 넘지 않았다. 소성방법은 대부분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받침은 내화토 비짐눈과 태토 비짐문이 섞여있다. 요도구는 직경 9~12cm, 높이 4~5cm 정도 되는 원통형 도지미이다. 자기류의 속성에 의하면 도요지는 14세기 늦은 시기부터 16세기 이른 시기까지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 관촌면 상월리 도요지 A·B 현황도
 
 
1.2.3. (3) 신전리 도요지 A
소재지 : 관촌면 신전리 137
유적의 현황 : 관촌면 신전리 신전마을 도화지도예문화원에서 동북쪽으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신전리 도요지 A가 자리하고 있다. 임실군 문화유적 분포지도에는 신전리 도요지 A가 두테비골에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남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밭에 위치한다. 호남정맥 남쪽 기슭에서 발원해 줄곧 남쪽으로 흘러온 상월천이 도요지 서쪽에서 남쪽으로 흐른다. 이 일대는 신전마을 동쪽 산봉우리 서쪽 기슭 말단부로 대부분 계단식 밭과 논으로 개간되었는데, 도요지는 밭에서 확인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밭을 경작하는 과정에 밭둑에 쌓아놓은 자기편과 도침의 양이 산더미처럼 많고 유물의 분포 범위가 넓어 본래 대규모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습유물 ; 현지조사 때 백자와 도지미가 채집되었는데, 백자는 대접과 접시, 완, 제기 등이 섞여있다. 유약의 색깔은 회백색·황갈색·회색·짙은 회색 등으로 다양하며, 전면에 두텁게 시유된 유약은 거의 빙렬이 보이지 않는다. 굽은 굽이 거의 없는 평저와 투박한 다리 굽, 굽바닥이 약간 내경된 다리굽이 섞여있으며, 굽의 높이는 대부분 1cm를 넘지 않는다. 소성방법은 대부분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받침은 내화토 비짐눈과 내화토 받침, 가는 규사가 섞여있다. 제작수법은 유약이 시유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정도로 조잡하지만 백색을 띠는 백자는 상당히 우수하다. 요도구는 바닥면이 편평하고 직경 11.2~13cm, 높이 6.5~7.5cm 정도 되는 제기형 도지미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백자와 도지미의 속성에 의하면 도요지는 19세기 늦은 시기부터 20세기 이른 시기까지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 관촌면 신전리 도요지 A·B 현황도
 
 
1.2.4. (4) 신전리 도요지 B
소재지 : 관촌면 신전리 690
유적의 현황 : 관촌면 신전리 신전마을 두무실마을 입구에 신전리 도요지 B가 자리하고 있다. 호남정맥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산자락 말단부로 두무실마을 입구 시내버스 승강장 부근이 여기에 해당된다. 해주 오씨 민묘 구역을 중심으로 동쪽 밭에 상당량의 백자편이 쌓여있는데, 현지조사 때 가마터와 관련된 유구의 흔적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몇 년 전 21번 지방도 공사로 생긴 높이 4m 내외의 퇴적층이 절단면에 노출되어 있는 점에서 도요지의 동쪽 부분이 얼마간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퇴적층의 범위가 넓고 깊이도 상당히 깊어 상당 기간 동안 운영된 것으로 점쳐진다.
수습유물 ; 현지조사 때 백자와 도지미, 소토가 채집되었는데, 백자는 대접과 접시, 완, 제기, 잔 등이 섞여있다. 유약의 색깔은 회백색·회색·짙은 회색 등으로 다양하며, 전면에 두텁게 시유된 유약은 거의 빙렬이 보이지 않는다. 굽은 굽이 거의 없는 평저와 투박한 다리 굽, 굽바닥이 약간 내경된 다리굽이 섞여있으며, 굽의 높이는 제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1cm를 넘지 않는다. 소성방법은 대부분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받침은 내화토 받침과 내화통 비짐눈, 굵은 규사 등이 섞여있다. 제작수법은 유약이 시유되지 않은 부분이 적지 않을 정도로 조잡하지만 회백색을 띠는 백자는 상당히 우수하다. 요도구는 바닥면이 편평하고 직경 11.2~13cm, 높이 6.5~8.5cm 정도 되는 제기형 도지미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백자와 도지미의 속성에 의하면 도요지는 19세기부터 20세기 이른 시기까지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1.2.5. (5) 회봉리 도요지 A
소재지 : 관촌면 회봉리 500
유적의 현황 : 관촌면 회봉리 뒷골 입구에 회봉리 도요지 A가 자리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완공된 중희소류제에서 남쪽으로 200m 가량 떨어진 곳으로 본래 대학동마을이 있었던 곳이다. 중희소류제 제방공사를 실시하는 과정에 상당한 깊이로 제토작업이 이루어져 도요지의 흔적을 찾지 못하였다. 현지조사 때 뒷골 입구와 그 주변지역에서 소량의 조선 후기 백자편이 수습되었다.
 
 
1.2.6. (6) 회봉리 도요지 B
소재지 : 관촌면 회봉리 산23
유적의 현황 : 관촌면 회봉리 다란이골 입구에 회봉리 도요지 B가 자리하고 있다. 임실 회봉리 도요지 A에서 남쪽으로 850m 남짓 떨어진 곳으로 뒷골 입구 동남쪽 구릉지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도요지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호남정맥의 마치 남쪽 기슭에서 발원하는 회초천이 줄곧 남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서쪽에는 비교적 험준한 산자락이 휘감고 있다. 오래전에 개간된 밭과 그 위쪽 민묘 구역에 자기편이 폭 넓게 흩어져 있는데, 지금도 경작활동으로 인해 유적이 심하게 유실 내지 훼손되고 있다. 현지조사 때 밭 서북쪽에 약간 볼록하게 솟은 구역에서 다량의 소토와 석재가 지표면에 노출되어, 본래 이곳에 가마가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습유물 : 1990년대 후반 지표조사의 내용을 소개하면, 당시에 상감청자편과 분청사기편, 초벌구이편, 도지미, 가마 벽제편이 채집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상감청자와 분청사기는 대접과 접시, 장군, 병으로 내저 원심이 패인 것과 없는 것이 섞여있다. 문양은 삼감 선문·동심원문·격자문·당초문, 인화 우점문·파상문·연판문·국화문, 귀얄문 등으로 다양하다. 그릇 내면 중앙에 십자문이 백상감된 예가 확인되었다. 유약의 색깔은 녹갈색과 회청색, 황색, 회색으로 전면에 시유된 유약은 빙렬이 확인되지 않는다. 굽은 작은 다리굽과 죽절굽으로 굽 안바닥을 얼마간 다져 놓았다. 소성방법은 대부분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받침은 내화토 비짐눈과 내화토 받침, 태토비짐문, 흙받침 등이 섞여있다. 요도구인 도지미는 직경 9~12cm, 높이 4~5cm로 원통형이다. 자기류의 속성에 의하면 도요지는 15세기에서 16세기 초에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 관촌면 회봉리 도요지 A·B 현황도
 
 
 

1.3. 3) 덕치면

 
1.3.1. (1) 사곡리 도요지
소재지 : 덕치면 사곡리 사기촌
유적의 현황 : 강진면과 덕치면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줄기 남쪽에 사기제가 있다. 이 저수지 제방에서 서남쪽으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사곡리 도요지가 있다. 이 일대는 피아골 입구로 서쪽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 가장자리에 해당한다. 이 산줄기의 동남쪽 기슭 하단부로 민가를 제외하면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었거나 민묘구역으로 조성되었다. 지금부터 20여 년 전 민묘를 조성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백자편과 소토가 상당량 쌓여있었는데, 민가의 신축과 민묘를 조성하면서 대부분 유실되었다고 한다. 현지조사 때 백자편과 도지미편이 밭과 임야지대에서 폭 넓게 흩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였는데, 가마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가마터 동쪽에 사기제로 이어진 농로가 개설되어 있는데, 몇 년 전 농로를 개설하면서 생긴 절단면에 백자편이 박혀있어 당시에 유적이 얼마간 잘려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任實縣 磁器所 一 在縣西 品中”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문헌과 백자의 연대 사이에 시기적인 편차가 너무 크다.
수습유물 : 현지조사 때 백자편과 도지미, 불먹은 흙덩이 등이 채집되었다. 백자는 대접과 접시, 종지, 잔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저 원각이 없고 기벽은 두텁고 둔한 조형을 이룬다. 전면에 시유된 유약은 회색, 암회색, 녹갈색을 띠고 있으며, 유약에서 빙렬이 확인되지 않는다. 제작수법은 조잡하고 투박하고 묵직하며, 문양은 시문되지 않았다. 굽은 투박한 다리굽과 안굽식 다리굽, 평저식 다리굽이 섞여있다. 소성방법은 대부분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받침은 내화토 비짐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요도구인 도지미는 납작하고 경사진 원통이다. 백자의 속성에 의하면 도요지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1.3.2. (2) 천담리 도요지 A
소재지 : 덕치면 천담리 구담마을 서남쪽 윗골 남쪽
유적의 현황 : 덕치면 천담리 구담마을에서 처음으로 도요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구담마을 주민들의 제보와 최성미 원장님의 현지조사가 이룬 쾌거이다. 1998년 이광모 감독이 만든 ‘아름다운 시절’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구담마을은 섬진강을 따라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아마도 섬진강을 따라 자리한 수많은 마을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 아닌가 싶다. 이 마을에서 서남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윗골로 불리는 골짜기에 도요지가 있다. 현지조사 때 잡목과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가마터를 찾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임실군과 순창군의 경계를 이루는 험준한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휘감고 물이 넉넉해 도요지가 들어서기에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모두 두 차례의 현지조사를 통해 도요지의 실체가 파악되었다. 이 골짜기 중앙을 가로지르는 물줄기는 줄곧 동북쪽으로 흘러 구담마을 부근에서 섬진강으로 들어간다. 이 물줄기를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 구역으로 나뉘는데, 남쪽 구역에서만 도요지가 발견되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웟골에는 몇 채의 민가가 있었는데, 지금은 민가가 없고 대부분 농경지로 개간되었다. 도요지는 비교적 완만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 북쪽 기슭 하단부에 자리하고 있는데, 오래 전 계단식 매실 밭과 논으로 개간되는 과정에 가마터가 심하게 유실 내지 훼손되었다.
현지조사 때 매실 밭 남쪽 경계에서 가마터의 흔적을 찾았다. 지표면에 가마의 벽체가 드러날 정도로 유구가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으며, 가마는 등고선과 직교되게 남북으로 장축방향을 두었다. 가마터 부근에 약간 볼록하게 솟은 곳이 있는데 또 다른 가마터로 추정된다. 가마의 벽체를 비롯하여 도침과 백자편, 옹기편이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는데, 유물의 분포 범위는 대략 200m 내외이다. 백자는 대접과 접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여기에 일부 소형 접시도 포함되어 있다. 도침은 높이 10cm 내외되는 원통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백자의 종류와 그 특징을 근거로 남쪽 구역에서 발견된 도요지는 조선 후기 백자 가마터로 추정된다.
 
▲ 덕치면 천담리 도요지 A·B 현황도
 
 
1.3.3. (3) 천담리 도요지 B
소재지 : 덕치면 천담리 구담마을 서남쪽 윗골 북쪽
유적의 현황 : 윗골 북쪽 구역에서는 가마터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유물이 다양하게 수습되었다. 기벽이 얇고 옆으로 돌대를 두른 고려시대 토기편과 후기청자 저부편, 분청사기편, 순백자편이 함께 발견되었다. 유물의 대부분은 기종이 다양한 분청사기편이 절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백자편은 기벽이 얇고 색깔이 투명한 순백색을 띤다. 오래 전 계단식 농경지로 개간되어 가마터와 관련된 유구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지만 유물의 기종이 다양하고 완만한 자형지형을 이루고 있는 점에서 본래 가마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남쪽 구역에서 집중적으로 나온 늦은 시기의 조선 후기 백자편은 섞여있지 않았다.
 
 
1.3.4. (4) 천담리 도요지 C
소재지 : 덕치면 천담리 천담마을 서쪽
유적의 현황 : 천담마을 서쪽에 해발 300m 내외의 산봉우리가 있다. 이 산봉우리의 동쪽에 해발 154m의 또 다른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들 산봉우리 사이에 천담리 도요지 C가 있다. 이곳 도요지는 천담리 산 33-1번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천담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면담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지금은 잡목이 무성하게 우거져 백자편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골짜기에는 상당히 많은 백자편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현지조사 때 유구의 흔적은 찾지 못하였다.
 
 
1.3.5. (5) 장암리 옹기요지
소재지 : 덕치면 장암리 장산마을 남쪽 윗골
유적의 현황 : 장산마을에서 남쪽으로 ‘윗골’이라는 골짜기를 따라 1.5km 가량 가다보면 윗골제가 자리하고 있다. 윗골제의 남쪽을 마을 주민들은 ‘강도래미 골짜기’라고 부르고 있다. 장암리 옹기요지는 장암리 742-5번지 윗골제 에서 500m 가량 떨어진 남쪽에 위하고 있다. 장암리 옹기요지는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해 확인된 유적으로 “옹기요지에서 100 여 년 전까지도 옹기를 생산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완만한 사면 부를 이루고 있는 유적은 현재 소나무 숲으로 우거져 유구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시대적으로 보면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4. 4) 삼계면

 
1.4.1. (1) 뇌천리 도요지
소재지 : 삼계면 뇌천리 544
유적의 현황 : 삼계면 소재지 동쪽에 미산(281m)이 있는데, 이 산 동쪽 기슭 하단부에 뇌천리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 도요지 동쪽에는 호암천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섬진강 지류인 오수천이 남쪽으로 1.3km 가량 떨어진 곳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종래에 뇌천리 도요지가 삭산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지만, 현지조사 때 도요지와 관련된 유구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최근에 민가가 철거되고 상당히 넓은 밭으로 개간된 구역에서 조선 후기의 백자편과 옹기편이 섞인 상태로 수습되었다.
 
 
1.4.2. (2) 두월리 도요지
소재지 : 삼계면 두월리 산76
유적의 현황 : 삼계면 두월리 상지몰마을과 뒷골마을 사이에 두월리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상지몰마을 남쪽 산봉우리 서남쪽 기슭 하단부로 한 채의 민가를 제외하면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었거나 대규모 민묘 구역으로 조성되었다. 면담조사 때 마을 주민들이 “오래전부터 밭을 갈면 땅속에서 불 먹은 흙과 흰색을 띠는 자기편이 많이 나왔다”고 제보해 주었다. 현지조사 때 도요지와 관련된 유구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지만, 유물은 무문토기편과 회청색 경질토기편, 분청사기편, 백자편 등이 수습되었다.
 
▲ 삼계면 뇌천리 및 두월리 도요지 현황도
 
 
1.4.3. (3) 오지리 도요지
소재지 : 삼계면 오지리 산119
유적의 현황 : 임실읍 망전리와 삼계면 오지리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줄기 동남쪽 기슭 하단부에 박우터마을이 있다. 이 마을 서남쪽에 작은 저수지가 있는데, 이 저수지 위쪽에 오지리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다. 임실군 문화유적 분포지도에는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현지조사 때 도요지와 관련된 유적의 흔적을 찾지 못하였다. 이 마을 주민들이 이곳을 ‘점둥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곳에서 도자기를 구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설명해 주었다. 유물은 점둥이골과 그 주변지역에서 조선 후기의 백자편과 옹기편이 일부 수습되었다.
 
▲ 삼계면 오지리 도요지 현황도
 
 
1.4.4. (4) 학정리 도요지 A
소재지 : 삼계면 학정리 학정마을 서쪽 구릉지
유적의 현황 : 삼계면 학정리 일대는 천혜의 자연 분지형 지형을 이루고 있다. 삼계면과 덕치면 경계에 위치한 원통산(603m)에서 양쪽으로 갈라진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휘감고 있고, 그 중앙부에 학정마을과 학정제에 있다. 학정제 위쪽 학정마을에서 서쪽으로 700m 구역에 학정리 도요지 A가 자리하고 있다. 이제까지 임실군에서 그 존재를 드러낸 도요지 가운데 최대 규모를 이룬다. 이 일대는 원통산 남쪽 기슭 하단부로 지형이 완만한 산자락으로 대부분 대규모 민묘 구역과 계단식 밭으로 개간되었다. 이 산자락들 기슭에 도요지가 입지를 두었는데, 오래전 민묘 구역의 조성과 대규모 밭 개간으로 유적이 심하게 유실 내지 훼손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 때 가마의 벽체로 담장을 쌓은 민가가 학정마을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널리 유행하였던 다양한 기종의 분청사기편을 중심으로 순백자편, 옹기편, 조선 후기의 백자편 등의 유물이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다. 이 도요지의 서쪽에서 순백자와 옹기편이 소성 과정에 붙은 상태로 수습되었으며, 조선 후기의 백자편은 학정마을 부근에만 흩어져 있다. 이 도요지와 학정제 사이의 구릉지에 백토와 백석이 폭 넓게 분포되어 분청사기 도요지와 관련하여 최적의 자연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당시 남원에는 자기소가 한 곳 도기소가 두 곳에 있었다. 자기소는 남원부 북쪽의 아산리에 있었으며 중품에 해당하였다. 그리고 도기소는 남원부 서쪽의 초랑리와 동쪽의 은령리에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헌에 등장하는 남원부 북쪽 아산리 자기소를 임실 학정리 도요지 A로 비정해 두고자 한다.
수습유물 : 1990년대 후반 지표조사의 내용을 소개하면, 당시에 상감청자편과 분청사기편, 초벌구이편, 도지미, 가마 벽제편이 채집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상감청자와 분청사기는 대접과 접시, 장군, 병으로 내저 원심이 패인 것과 없는 것이 섞여있다. 문양은 삼감 선문·동심원문·격자문·당초문, 인화 우점문·파상문·연판문·국화문, 귀얄문 등으로 다양하다. 그릇 내면 중앙에 십자문이 백상감된 예가 확인되었다. 유약의 색깔은 녹갈색과 회청색, 황색, 회색으로 전면에 시유된 유약은 빙렬이 확인되지 않는다. 굽은 작은 다리굽과 죽절굽으로 굽 안바닥을 얼마간 다져 놓았다. 소성방법은 대부분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받침은 내화토 비짐눈과 내화토 받침, 태토비짐문, 흙받침 등이 섞여있다. 요도구인 도지미는 직경 9~12cm, 높이 4~5cm로 원통형이다. 자기류의 속성에 의하면 도요지는 15세기에서 16세기 초에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 삼계면 학정리 도요지 A 현황도
 
 
1.4.5. (5) 학정리 도요지 B
소재지 : 삼계면 학정리 용수골마을 남쪽
유적의 현황 : 삼계면 학정리 용수골마을 남쪽에 학정리 도요지 B가 있다. 원통산에서 발원하는 귀염나무골과 저서골 두 갈래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으로 용수골마을에서 남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삼계면 학정리와 청웅면 옥석리 경계에 위치한 지초봉(571m)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자락의 서쪽 기슭 하단부로 비교적 완만한 지형을 이룬다. 인근 마을 주민들이 ‘사구시’라고 부르는 곳으로 도요지가 들어서기에 최적의 자연 환경을 이룬다. 최근에 농원을 조성하는 과정에 상당한 깊이로 제토작업이 이루어져 당시에 유적이 심하게 훼손된 것으로 추정되며, 농원 가장자리에 생긴 경사면에 다량의 백자편과 원형 도침이 쌓여있다.
수습유물 : 현지조사 때 백자와 도지미가 채집되었는데, 백자는 대접과 접시가 반절씩 섞여있고 백자 완도 일부 포함되어 잇다. 유약의 색깔은 백색·청백색·회백색 등으로 다양하며, 전면에 투명하게 시유된 유약은 거의 빙렬이 보이지 않는다. 굽은 투박한 다리 굽과 굽바닥이 약간 내경된 다리굽이 섞여있으며, 굽의 높이도 0.5~2cm 내외로 다양하다. 소성방법은 대부분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내화토 비짐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제작수법은 유약이 시유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정도로 조잡하고 투박하지만 백색·청백색을 띠는 백자는 대체로 우수하다. 요도구는 직경 1.5cm 내외로 납작하고 약간 경사진 원형 도지미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백자와 도지미의 속성에 의하면 도요지는 18세기 후반부터 상당 기간 동안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 삼계면 학정리 도요지 B 현황도
 
 

1.5. 5) 성수면

 
1.5.1. (1) 도인리 도요지
소재지 : 성수면 도인리 848
유적의 현황 : 성수면 도인리 신흥촌마을 북쪽에 도인리 도요지가 있다. 성수면 도인리와 관촌면 도봉리 자연경계인 비교적 험준한 산줄기가 신흥촌마을을 휘감고 있으며, 이 마을 남쪽에는 도인저수지가 있다. 이 마을 북쪽 서당골 양쪽 밭에 조선 후기의 백자편이 폭 넓게 흩어져 있는데, 서당골 동쪽 밭에서는 도요지와 관련된 유구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반면에 서쪽 구역의 밭에서는 상당량의 백자편과 소토가 흩어져 본래 이곳에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몇 년 전 대규모 비닐하우스 단지를 조성하면서 상당한 깊이로 제토작업이 이루어져 당시에 유구가 유실 내지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 성수면 도인리 도요지 현황도
 
 
1.5.2. (2) 임실 삼청리 도요지
소재지 : 성수면 삼청리 83
유적의 현황 : 성수면 삼청리 구곡마을 동쪽에 삼청리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동쪽으로 600m 가량 떨어진 곳에 창원 정씨 재실인 雲東齋가 있는데, 이 재실 뒤편에 삼청리 도요지가 있다. 백제 한성기 백제와 가야를 최단거리로 이어주던 간선교통로가 통과하던 곳으로 동쪽에 한치재가 있다. 성수면 동남쪽에 위치한 매봉(430m)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산자락의 남쪽 기슭 하단부로 비교적 완만한 지형을 이룬다. 이 일대는 재실을 중심으로 대부분 계단식 논과 밭으로 개간되었으며, 재실의 서쪽은 대규모 민묘 구역으로 조성되었다. 재실 뒤편 밭에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는데, 오래전 밭 개간과 경작 활동으로 흙이 유실되어 가마의 벽체가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밭과 민묘 구역 경계에도 또 다른 가마가 더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실 뒤편 밭둑에는 훼손된 가마의 벽체편과 백자편, 소토가 서로 섞인 상태로 상당량 쌓여있으며, 현지조사 때 수습된 백자편은 조선 후기로 추정된다.
 
▲ 성수면 삼청리 도요지 현황도
 
 
1.5.3. (3) 성수리 도요지 A
소재지 : 성수면 성수리 193
유적의 현황 : 성수면 성수리 갈골마을 서북쪽 배나무골에 성수리 도요지 A가 자리하고 있다. 임실군 성수면과 진안군 백운면 행정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줄기 남쪽 골짜기로 그 서쪽에는 양쪽 지역을 이어주던 옛길이 통과하던 서낭당이골이 있다. 배나무골 두 갈래의 물줄기 사이에 비교적 완만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 산자락이 있는데, 이 산자락의 하단부 민묘구역 뒤편에 도요지가 있다. 이곳은 중앙부에 위치한 민묘 구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었으며, 밭 위쪽 절단면에 백자편이 박혀있어 가마가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지조사 때 밭과 절단면에서 조선 후기의 백자편이 수습되었다.
 
 
1.5.4. (4) 성수리 도요지 B
소재지 : 성수면 성수리 235
유적의 현황 : 성수면 성수리 갈골마을과 수철리마을 사이에 성수리 도요지 B가 자리하고 있다. 성수면 소재지에서 진안방면으로 30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성수리로 들어가는 14번 지방도를 이용하여 올라가면 성남저수지가 나온다. 이 저수지 위쪽에 갈골마을로 들어가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500m 쯤 가면 성수리 도요지 B가 나온다. 이곳은 성수산(875m)에서 서쪽으로 성남저수지까지 동서방향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서북쪽 기슭 하단부로 대부분 논과 밭으로 개간되었다. 오래전 개간된 논과 밭은 3m 내외 높이를 이루고 있는데, 도요지는 밭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밭둑과 남쪽 골짜기에 가마의 벽체편과 도침이 상당량 쌓여있었는데, 오랜 기간 동안 밭을 경작하는 과정에 가마가 상당부분 유실 내지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습유물 : 현지조사 때 백자편과 제기모양의 원통형의 도침이 채집되었는데, 백자는 대접과 접시, 완, 제기 등이 섞여있다. 유약의 색깔은 회백색·황갈색·짙은 회색 등으로 다양하며, 전면에 두텁게 시유된 유약은 거의 빙렬이 보이지 않는다. 굽은 굽이 거의 없는 평저와 투박한 다리 굽, 굽바닥이 약간 내경된 다리굽이 섞여있으며, 굽의 높이는 1cm를 넘지 않는다. 소성방법은 대부분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받침은 내화토 비짐눈과 가는 규사가 섞여있다. 제작수법은 유약이 시유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정도로 조잡하지만 회백색을 띠는 백자는 우수한 편하다. 요도구는 바닥면이 편평하고 직경 10.8~12.9cm, 높이 6.8~7.4cm 정도 되는 제기형 도지미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백자와 도지미의 속성에 의하면 도요지는 19세기 늦은 시기부터 20세기 이른 시기까지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 성수면 성수리 도요지 A·B 현황도
 
 
1.5.5. (5) 오봉리 도요지
소재지 : 성수면 오봉리 929-1
유적의 현황 : 성수면 오봉리에 위치한 오봉저수지 제방에서 서쪽으로 얼마 덜어지지 않은 구릉지에 오봉리 도요지가 있다. 몇 년 전 721번 지방도를 확장하는 과정에 상당한 깊이로 제토작업이 이루어져 도요지와 관련된 유적의 흔적을 찾지 못하였다. 현지조사 때 지방도와 제방 사이에서 조선 후기 백자편이 일부 수습되었다.
 
▲ 성수면 오봉리 도요지 현황도
 
 
1.5.6. (6) 왕방리 도요지
소재지 : 성수면 왕방리 464
유적의 현황 : 임실군 성수면과 장수군 산서면 경계에 위치한 오봉산(625m)에서 서북쪽으로 뻗어내린 산자락 하단부에 왕방리 도요지가 있다. 오봉산 서북쪽 기슭에서 발원해 서북쪽으로 흐르는 돌채골 입구 서쪽 기슭으로 사지목들 동쪽이 여기에 해당된다. 오래전 대부분 계단식 논과 밭으로 개간된 이후 오랜 기간 동안 경작활동으로 인해 도요지와 관련된 유적의 흔적을 찾지 못하였다. 다만 현지조사 때 마을 주민들이 ‘점터’라 불리는 돌채골 입구 논과 밭에서 기벽이 얇은 고려시대 토기편과 조선 후기 백자편, 옹기편이 섞인 상태로 수습되었다.
 
▲ 성수면 왕방리 도요지 현황도
 
 

1.6. 6) 신덕면

 
1.6.1. (1) 삼길리 도요지 A
소재지 : 신덕면 삼길리 대추나무골 입구
유적의 현황 : 신덕면 삼길리 방길제에서 위쪽으로 150m 떨어진 대추나무골에 삼길리 도요지 A가 자리하고 있다. 임실군 신덕면과 완주군 구이면 경계에 위치한 호남정맥의 대추나무재 동쪽 골짜기 대추나무골 입구가 여기에 해당된다. 호남정맥의 대추나무재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산자락 남쪽 기슭 하단부로 일부 민묘구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경작활동으로 가마가 심하게 훼손되어 밭둑에 상당량의 가마의 벽체와 백자, 도침 등이 볼록하게 쌓여 있으며, 유물은 조선 후기의 백자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대추나무골을 중심으로 남쪽 구역에도 백자편과 소토가 산재되어 또 다른 가마가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습유물 : 현지조사 때 백자와 도지미, 소토가 채집되었는데, 백자는 대접과 접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일부 백자 완도 포함되어 잇다. 유약의 색깔은 백색·황백색·적백색·회색 등으로 다양하며, 전면에 투명하게 시유된 유약은 거의 빙렬이 보이지 않는다. 굽은 투박한 다리 굽과 굽바닥이 약간 내경된 다리굽이 섞여있으며, 굽의 높이도 0.4~1.2cm 내외로 다양하다. 소성방법은 대부분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굵은 규사 받침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제작수법은 유약이 시유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정도로 조잡하고 투박하지만 백색을 띠는 백자는 비교적 우수하다. 요도구는 직경 11.5cm 내외로 납작하고 약간 경사진 원형 도지미편으로 높이 2.8cm 내외이다. 백자와 도지미의 속성에 의하면 도요지는 18세기부터 상당 기간 동안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 신덕면 삼길리 도요지 A 현황도
 
 
1.6.2. (2) 삼길리 도요지 B
소재지 : 신덕면 삼길리 내량마을 주래골 입구
유적의 현황 : 신덕면 삼길리 내량마을 남쪽 주래골 입구에 삼길리 도요지 B가 자리하고 있다. 삼길리 내량마을 남쪽에 홍산(329m)이 있는데, 이 산에서 내량마을까지 북쪽으로 뻗은 산자락 말단부가 여기에 해당된다. 내량마을에서 남쪽으로 150m 가량 떨어진 주래골 입구로 일부 논으로 개간된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임야지대를 이룬다. 홍산에서 내량마을까지 뻗은 산자락 서쪽 기슭으로 도요지가 임야지대에 입지를 두어 유적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 현지조사 때 주래골 입구 임야지대에서 조선 후기의 백자편이 상당량 수습되었다.
수습유물 : 현지조사 때 백자와 소토가 채집되었는데, 백자는 대접과 접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유약의 색깔은 회백색·황백색·회색 등으로 다양하며, 전면에 투명하게 시유된 유약은 거의 빙렬이 보이지 않는다. 굽은 굽이 거의 없는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일부 투박한 다리 굽이 섞여있으며, 굽의 높이도 0.1~1.3cm 내외로 다양하다. 소성방법은 대부분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굵은 규사 받침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제작수법은 유약이 시유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정도로 조잡하고 투박하지만 회백색을 띠는 백자는 비교적 우수하다. 가마의 벽체로 추정되는 소토는 2점이 채집되었는데, 한 점의 소토 내부는 유약이 일부 흘러내렸다. 백자의 기종과 속성에 의하면 도요지는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신덕면 삼길리 도요지 B 현황도
 
 
1.6.3. (3) 수천리 도요지 A
소재지 : 신덕면 수천리 갈수제 위쪽
유적의 현황 : 신덕면 소재지 동북쪽에 위치한 갈수제 위쪽에 수천리 도요지 A가 자리하고 있다. 갈수제 울음재골 위쪽에 위치한 계곡 입구 남쪽 기슭 하단부로 대부분 임야지대를 이룬다. 최근에 농로를 확장하는 과정에 생긴 절단면에 도요지의 퇴적층이 노출되어 있으며, 그 주변에 또 다른 가마가 더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지조사 때 퇴적층과 그 주변지역에서 분청사기편과 백자편이 함께 수습되었다. 이 도요지는 임진왜란 이전에 분청사기를 생산하던 곳으로 갑자기 가마의 문을 닫았다가 한 세기 동안의 공백기를 거친 이후 조선 후기의 백자를 다시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임실군 도자문화의 전개과정과 그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곳이다.
수습유물 : 현지조사 때 분청사기와 백자가 채집되었는데, 백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분청사기는 그 기형을 파악할 수 없는 조각만 채집되었고, 문양은 모두 귀얄문이다. 유약의 색깔은 갈색과 짙은 회색이고 전면에 시유된 유약은 시유되지 않은 부분이 확인될 정도로 조잡하다. 한 점만 수습된 저부편의 굽은 죽절굽으로 굽의 높이는 1.1cm이다. 소성방법은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모두 4개의 내화토 비짐눈이 확인된다. 백자는 대접과 접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일부 백자 완도 포함되어 있다. 유약의 색깔은 회백색·명회색·짙은 회색 등으로 다양하며, 전면에 시유된 유약은 거의 빙렬이 보이지 않는다. 굽은 낮거나 높은 투박한 다리 굽과 굽바닥이 약간 내경된 다리굽도 약간 섞여있으며, 굽의 높이는 0.4~2.1cm 내외로 다양하다. 소성방법은 대부분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가늘거나 굵은 규사 받침이 섞여있다. 분청사기는 조선 전기 늦은 시기에 백자는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신덕면 수천리 도요지 A 현황도
 
 
1.6.4. (4) 수천리 도요지 B
소재지 : 신덕면 수천리 421-7
유적의 현황 : 신덕면 수천리 밤재마을 경로당에서 북쪽으로 150m 가량 떨어진 밭에 수천리 도요지가 B가 자리하고 있다. 이 일대는 밤재마을을 휘감은 산줄기 남쪽 기슭 하단부로 일부 민묘 구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었다. 밭둑에 소토와 조선 후기의 백자편이 상당량 쌓여 있는 점에서 가마가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면담조사 때 밤재마을 주민들이 “오래 전에 자기를 구웠는데, 밭으로 개간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자기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고 제보해 주었다.
수습유물 : 현지조사 때 백자와 도지미가 채집되었는데, 백자는 대접과 접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일부 백자 완도 포함되어 잇다. 유약의 색깔은 회백색·황백색·짙은 회색 등으로 다양하며, 전면에 투명하게 시유된 유약은 거의 빙렬이 보이지 않는다. 굽은 낮거나 높은 투박한 다리 굽과 굽바닥이 약간 내경된 다리굽이 섞여있으며, 굽의 높이도 0.5~2.1cm 내외로 다양하다. 소성방법은 대부분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모두 굵은 규사 받침이다. 제작수법은 유약이 시유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정도로 조잡하고 투박하지만 짙은 회색을 띠는 백자는 비교적 우수하다. 요도구는 직경 12cm 내외로 납작하고 약간 경사진 원형 도지미편이 한 점 수습되었다. 백자와 도지미의 속성에 의하면 도요지는 18세기 늦은 시기부터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1.6.5. (5) 수천리 도요지 C
소재지 : 신덕면 수천리 331
유적의 현황 : 신덕면 수천리 밤재마을과 율치저수지 사이에 수천리 도요지 C가 자리하고 있다. 신덕면과 신평면을 잇는 49번 지방도가 통과하는 밤재 서북쪽 기슭 하단부로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었다. 현지조사 때 감나무골 입구 밭에서 분청사기편과 백자편이 혼재된 상태로 수습되었는데 가마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조선 후기의 백자편과 옹기편도 섞여있는 점에서 본래 이 일대에 민가가 자리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수습유물 : 현지조사 때 분청사기와 백자, 도지미, 소토가 채집되었는데, 백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분청사기는 대접과 접시가 반절씩 섞여있고, 문양은 대부분 귀얄문이다. 유약의 색깔은 갈색과 짙은 회색이고 전면에 시유된 유약이 아래로 흘러내릴 정도로 조잡하다. 굽은 작은 다리굽과 죽절굽이 반절씩 섞여있으며, 굽의 높이도 0.6~1.4cm 내외로 다양하다. 소성방법은 대부분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모두 내화토 비짐눈이다. 백자는 대접과 접시가 반절씩 섞여있으며, 모두 내저 곡면이다. 유약의 색깔은 회백색과 유백색이고 전면에 시유된 유약은 시유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정도로 조잡하다. 굽은 투박한 다리굽과 죽절굽이 섞여있으며, 굽의 높이도 0.5~1.0cm 내외로 다양하다. 소성방법은 대부분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모두 내화토 비짐눈이다. 요도구는 직경 11cm 내외로 납작하고 약간 경사진 원형 도지미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분청사기와 백자, 도지미의 속성에 의하면 도요지는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 신덕면 수천리 도요지 B·C 현황도
 
 
1.6.6. (6) 신흥리 도요지 A
소재지 : 신덕면 신흥리 8-1
유적의 현황 ; 신덕면 신흥리 사기소마을 동남쪽 밭에 신흥리 도요지 A가 자리하고 있다. 도지봉(439m)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산자락 말단부로 일부 민묘 구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었다. 이 도요지를 중심으로 동쪽에 생골과 서쪽에 부석골이 있는데, 생골과 부석골 물줄기가 하나로 만나는 서북쪽 기슭 구릉지에 도요지가 있다. 오래전 밭 개간과 경작활동으로 인해 유적이 심하게 훼손된 것으로 추정되며, 밭 중앙부에 상당량의 소토와 백자편이 흩어져 있다. 그리고 밭둑에도 가마의 벽체와 백자편이 볼록하게 쌓여있으며, 유물의 분포 범위가 남북길이 200m, 동서폭 100m 내외이다. 현지조사 때 조선 후기의 백자편과 도침이 상당량 수습되었다.
수습유물 : 현지조사 때 백자와 도지미가 채집되었는데, 백자는 대접과 접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일부 백자 완도 포함되어 잇다. 유약의 색깔은 백색·황백색·적백색·회색 등으로 다양하며, 전면에 투명하게 시유된 유약은 거의 빙렬이 보이지 않는다. 굽은 낮거나 높은 투박한 다리 굽과 굽바닥이 약간 내경된 다리굽이 섞여있으며, 굽의 높이도 0.4~1.9cm 내외로 다양하다. 소성방법은 대부분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가늘거나 굵은 규사 받침이 섞여있다. 제작수법은 유약이 시유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정도로 조잡하고 투박하지만 백색을 띠는 백자는 비교적 우수하다. 요도구는 직경 11~15cm 내외로 납작하고 약간 경사진 원형 도지미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바닥면이 편평하고 높이 10cm 이상 되는 것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백자와 도지미의 속성에 의하면 도요지는 18세기부터 상당 기간 동안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1.6.7. (7) 신흥리 도요지 B
소재지 : 신덕면 신흥리 7-1
유적의 현황 : 신덕면 신흥리 사기소마을 입구에 신흥리 도요지 B가 자리하고 있다. 사기소마을 북쪽을 휘감은 산자락 남쪽 기슭으로 최근에 민가가 신축되어 유적의 흔적을 찾지 못하였다. 민가 주변의 밭에서 조선 후기의 백자편과 소토가 일부 수습되었다.
수습유물 : 현지조사 때 백자와 옹기, 소토 등이 채집되었는데, 백자는 대접과 접시가 섞여있다. 유약의 색깔은 회색과 명회색으로 전면에 시유된 유약은 거의 빙렬이 보이지 않는다. 문양은 무문으로 굽은 투박한 다리 굽이며, 굽의 높이도 낮은 편이다. 소성방법은 대부분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받침은 내화토 비짐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백자의 내면과 외면에 시유된 유약이 고르지 않을 정도로 제작수법이 조잡하고 투박하다. 옹기는 기종과 크기가 다양하지만 도요지와의 관련성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도요지 벽체와 관련된 상당량의 소토가 수습되었지만 유구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백자의 속성에 의하면 그 시기가 18세기 이후로 추정된다.
 
▲ 신덕면 신흥리 도요지 A·B 현황도
 
 
1.6.8. (8) 오궁리 도요지 A
소재지 : 신덕면 오궁리 882
유적의 현황 : 신덕면 오궁리 오궁저수지 남쪽에 오궁리 도요지 A가 자리하고 있다. 호남정맥 산줄기 남쪽 기슭 말단부로 오궁저수지 제방에서 남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곳으로 민묘 구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었다. 최근에 대규모 민묘 구역을 조성하는 과정에 도요지가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지조사 때 민묘 구역 주변에서 조선 후기의 백자편이 수습되었다.
수습유물 : 현지조사 때 백자와 도지미가 채집되었는데, 백자는 대접과 접시가 반절씩 섞여있다. 유약의 색깔은 회색과 명회색으로 구분되며, 전면에 시유된 유약은 거의 빙렬이 보이지 않는다. 문양은 대부분 무문으로 두 점의 백자 접시편 몸통부에 철화 당초문이 표현되어 있다. 굽은 투박한 다리 굽과 평저식 다리굽이 섞여있으며, 굽의 높이도 비교적 다양하다. 소성방법은 대부분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굵은 규사 받침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제작수법은 대접 몸통부에 손자국의 흔적이 남아있을 정도로 조잡하고 투박하다. 요도구는 직경 15cm 내외로 납작하고 약간 경사진 원형 도지미편이 수습되었다. 백자와 도지미의 속성에 의하면 그 시기가 19세기 전후로 추정된다.
 
 
1.6.9. (9) 오궁리 도요지 B
소재지 : 신덕면 오궁리 산60
유적의 현황 : 신덕면 오궁리 중촌마을 남쪽 오시락골에 오궁리 도요지 B가 자리하고 있다. 호남정맥 산줄기 서쪽 기슭 하단부로 가는골과 지내밭골 사이 산자락이 여기에 해당된다. 현지조사 때 민묘 구역에서 조선 후기의 백자편과 소토가 일부 수습되었는데, 도요지와 관련된 유적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수습유물 : 유물은 백자와 도지미, 소토 등이 채집되었는데, 백자는 대접과 접시가 반절씩 섞여있다. 유약은 회색과 명회색, 암회색 등으로 다양하며, 유약은 전면에 상당히 두껍게 시유되어 빙렬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굽은 투박한 다리 굽과 평저식 다리굽, 굽바닥이 외반된 다리굽이 섞여있으며, 굽의 높이도 가장 높은 굽이 2.4cm로 다양하다. 소성방법은 대부분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굵은 규사 받침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제작수법은 유약이 시유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정도로 조잡하고 투박하다. 요도구는 중앙부가 가장 높고 가장자리가 낮아 납작하고 약간 경사진 원형 도지미편이 수습되었다. 백자와 도지미의 속성에 의하면 그 시기가 19세기를 전후한 단계로 추정된다.
 
▲ 신덕면 오궁리 도요지 A·B 현황도
 
 

1.7. 7) 운암면

 
1.7.1. (1) 선거리 도요지
소재지 : 운암면 선거리 782
유적의 현황 : 운암면 선거리 선거제 위쪽 사당골 입구에 선기리 도요지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모두 두 차례의 현지조사를 실시하였지만 도요지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다만 사당골 입구 밭에서 조선 후기의 백자편이 일부 수습되었다.
 
▲ 운암면 선거리 도요지 현황도
 
 

1.8. 8) 임실읍

 
1.8.1. (1) 이인리 도요지
소재지 : 임실읍 이인리 산262
유적의 현황 : 임실읍 이인리 용수골 입구에 이인리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조사를 실시하였지만 도요지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면담조사를 통해 죽계저수지에 수몰된 것으로 밝혀졌다.
 
▲ 임실읍 이인리 도요지 현황도
 
 

1.9. 9) 지사면

 
1.9.1. (1) 관기리 도요지
소재지 : 지사면 관기리 127-2
유적의 현황 : 임실읍 지사면 관기리 큰 까끔마을 서남쪽에 관기리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학계에 보고되었다. 현지조사를 실시하였지만 도요지의 흔적을 찾지 못하였고, 본래 도요지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 곳은 대규모 민묘 구역으로 조성되었다.
 
▲ 지사면 관기리 도요지 현황도
 
 

1.10. 10) 청웅면

 
1.10.1. (1) 남산리 도요지
소재지 : 청웅면 남산리 570
유적의 현황 : 청웅면 남산리 남산마을 서쪽 안골에 남산리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다. 남산마을에서 서쪽으로 400m 가량 떨어진 남북방향으로 뻗은 산자락 서쪽 기슭 하단부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일대는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었는데, 임실 남산리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밭 사이로 임야지대를 이룬다. 현지조사 때 가마처럼 약간 볼록하게 솟은 곳에서 불 먹은 소토와 조선 후기의 백자편이 다량으로 확인되어, 도요지의 보존상태가 양호할 것으로 추정된다.
수습유물 : 현지조사 때 백자와 도지미가 채집되었는데, 백자는 대접과 접시, 완 등이 섞여있다. 유약의 색깔은 회백색·황갈색·회색·짙은 회색 등으로 다양하며, 전면에 두텁게 시유된 유약은 거의 빙렬이 보이지 않는다. 굽은 투박한 다리 굽과 굽바닥이 약간 내경된 다리굽이 섞여있으며, 굽의 높이는 1cm를 넘지 않는다. 소성방법은 대부분 포개어 소성하였는데, 받침은 가는 규사와 굵은 규사가 섞여있다. 제작수법은 유약이 시유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정도로 조잡하며, 요도 구는 바닥면이 편평한 원통형 도지미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백자와 도지미의 속성에 의하면 도요지는 19세기 늦은 시기부터 20세기 이른 시기까지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 청웅면 남산리 도요지 현황도
 
 
1.10.2. (2) 옥전리 도요지
소재지 : 청웅면 옥전리 1471
유적의 현황 : 청웅면 옥전리 중산제 제방 아래에 옥전리 도요지가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산제 아래쪽과 위쪽을 대상으로 현지조사를 실시하였지만 도요지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 청웅면 옥전리 도요지 현황도
【저작】 임실군 도요지 지표조사 보고서 (2017)
• Ⅷ. 임실군 도요지의 현황과 수습유물 (2)
• Ⅷ. 임실군 도요지의 현황과 수습유물 (1)
• Ⅶ. 벽돌가마 등장과 초기청자의 성격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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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