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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임실의 정자 (2013)
임실의 정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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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樓亭) 임실군(任實郡) # 월파헌
【향토】
(2018.07.16. 02:38) 
◈ 6. 월파헌(月波軒) - 삼계면 학정리
월파헌은 경주 김 만옹선생(晩翁先生)이 은둔(隱遯)한 곳이다. 경안도(慶安道) 역승(驛丞)으로 있을 때 관복을 벗어 던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말하기를 ‘사군자(士君子)가 벼슬살이를 할 만한 시대가 아니다.’라고 하며, 마침내 이곳에 들어와 작은 헌(軒)을, 문수(文殊)의 쌍암(雙巖)에 얽어짓고, 편액(扁額)을 ‘월파(月波)’라 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삼계면 세심리에서 학정리로 가는 길 중간 도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월파헌 이다.
목   차
[숨기기]
월파헌은 경주 김 만옹선생(晩翁先生)이 은둔(隱遯)한 곳이다. 경안도(慶安道) 역승(驛丞)으로 있을 때 관복을 벗어 던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말하기를 ‘사군자(士君子)가 벼슬살이를 할 만한 시대가 아니다.’라고 하며, 마침내 이곳에 들어와 작은 헌(軒)을, 문수(文殊)의 쌍암(雙巖)에 얽어짓고, 편액(扁額)을 ‘월파(月波)’라 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삼계면 세심리에서 학정리로 가는 길 중간 도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월파헌 이다. 골짜기로 넘어가는 작은 도로는 깨끗하게 포장되어 있고, 길 옆에 정자가 있는데 정면, 측면 각 1칸으로 정각 골에 흐르는 깊은 계곡으로 인하여 맑고 깨끗함을 더해주는 물소리와 함께 서있다. 팔작지붕에 토기와이며 네 귀퉁이에는 철 기둥을 세워놓았다. 바닥은 목재로 되어 있었으나 근년에 보수하면서 콘크리트로 채워져 있어 정자로써의 역할이 조금은 부족한 면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정자 내에는 강선정기(降仙亭記), 월파헌기(月波軒記), 월파헌 중수기 등 6개의 현판이 걸려있어 당시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의 중요한 쉼터로 지역 내 정신적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개요 - 2014.11 자료 추가】
 
 
 
 
 

1. 1. 重建月波軒記

月波軒 我先祖晩翁先生捿遯之所也 昔癸丑之斁倫也 以
慶安丞投紱而歸曰 非士君子可仕之日 遂入智異山中 搆
一小軒於文殊之雙巖 扁以月波 賦詩而見志 使次男元立
抗章叫閽 明母子之倫 又遭丙亂 使長子元重 起旅勤
王 明君臣之義 樂天委命 以終餘年 觀於李白軒之記金遁
谷之詩 則當時士友之所推重可知也 歲月寢久 屋不修而
且壞 地遂荒而水廢 往在丙寅 先父兄慨然有志於重建 而
遠莫之遂 乃築一架屋於芝山之芝巖 盖公墓下也 暗合於
朱夫子劉亭之制 且從水石之淸佳也 五十年之間 修補凡
一再 而客夏天大雨 四柱之一攲 而三有隨頹之勢 諸族咸
懼而言曰 勢非支一而可完三 且地勢突兀 無寧移礎就稍
坦地 避風雨以圖久遠乎 於是就右五步地 經營三旬而工
告竣 棟楹桷檻蓋瓦級磚之見抛者 居三之一 間架視舊面
勢維新 眞所謂無侈前人 無廢後觀者也 雖流峙之昔在前
者在左後者在右 其峨峨者洋洋者 朝暮焉四時焉 爲軒所
有則一也 若智異之軒 則吾未之目焉 如論形勢 則互有甲
乙磅礡雄偉 谷邃而疊 水淸而深 芝推甲於雙巖 窈窕淸
秀 澗轉而橫 石奇而潔 雙爲乙於芝巖 噫軒一而已 或於雙
或於芝 而今又遷 時耶人歟 地雖殊 而名軒之實自若 非昔
加而今損 廢無而新有也 且智與芝 咸祖德裕 間百里而拱
揖 南北鎭一方 而呼吸朝夕 芝之巖視之 以智之巖亦可也
矧軒乎 然登斯軒 但評古今形勝 則彼巍然而秀者山也 嶷
然而立者石也 逝者波也 照者月也 翼然者軒也 是皆物物
而已 不足有無於先祖肯搆之意 與後孫繼述之志而止 爲
尋常遊賞之所也 如見其巍然者 則溯吾祖之氣像而圖
所以秀 如見其嶷然者 則溯吾祖之志節而圖所以立 如見
其逝者 則溯吾祖之誠心而圖所以不息 如見其照者 則溯
吾祖之胸次而圖所以光明 至若翼然者 則萬物皆備 是
吾祖之全體也圖所以致廣大者也 諸族乎 盍相勉焉 嗚
呼 以倫斁而軒成 以屋社而軒修 軒之興廢 盖亦有關乎
氣數也歟 愴古悲今 奚徒桑榟之感而已 但丙寅之扁以
降仙者 盖用諸賢誄公句語 恐非本意 乃復舊號焉 發謀
經紀者 宗孫仁植也 始終周旋者 敎仁正基也 謹以是爲
崇禎后五周戊午六月十五日 九代孫 敎成 謹記
 
 
중건월파헌기(重建月波軒記)
 
월파헌(月波軒)은 우리 선조(先祖)이신 만옹선생(晩翁先生)께서 은둔(隱遯)하셨던 곳이다. 계축(癸丑)년 인륜(人倫)이 무너졌을 때에 경안도(慶安道) 역승(驛丞)으로서 관복을 벗어 던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말하기를 ‘사군자(士君子)가 벼슬살이를 할 만한 시대가 아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작은 헌(軒)을, 문수(文殊)의 쌍암(雙巖)에 얽어짓고, 편액(扁額)을 ‘월파(月波)’라 하고, 시(詩)를 지어 뜻을 보였다.
‘차남(次男)인 원립(元立)에게 항의(抗議)하는 문장(文章)을 지어 대궐에 호소하되, 모자(母子)의 윤리(倫理)를 밝히도록 하고, 또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만나서는 장자(長子)인 원중(元重)에게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하되, 군신(君臣)의 의(義)를 밝히도록 하고, 천명을 누리다가 남은여생을 마쳤다.’라는 내용이 이백헌(李白軒)의 기문(記文)과 김둔곡(金遁谷)의 시(詩)에 보였으니 당시 사우(士友)들로부터 추중(推重)받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세월이 오래되어 집은 수리하지 않아서 또 허물어졌고 땅은 마침내 황폐해지고 물도 말라버렸다. 지난 병인(丙寅)년 돌아가신 부형(父兄)께서 개연(慨然)히 중건(重建)할 뜻이 있었으나 멀어서 이루지 못했다. 이에 한 시렁만한 집을 지산(芝山)의 지암(芝巖)에 건축하였으니 대개 공(公)의 묘소(墓所) 아래이다. 암암리에 주부자(朱夫子) 유정(劉亭)의 규모와 흡사하고 또 수석(水石)의 청가(淸佳)함도 그 경치를 모방했다.
50년 동안 보수를 무릇 한 두 번했으나 작년 여름 큰비로 네 개 기둥 중, 한 기둥이 기울고 세 기둥도 따라서 무너지려는 형세였다. 여러 종족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한 기둥이 세 기둥을 완전하게 지탱할 수 있는 형세가 아니고 또 지세(地勢)가 우뚝 높으니 차라리 초석(礎石)을 조금 평탄한 곳에 옮겨 비바람을 피하여 오래 지탱하도록 도모하는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오른쪽으로 다섯 보(步)를 더 나아가는 땅에 30일 동안 공사해서 보수를 끝마쳤으니 동량(棟楹), 각함(桷檻), 개와(蓋瓦), 계단벽돌[級磚]의 폐기할 것이 삼분의 일이었다. 간가(間架)는 옛 모습에 비하면 산뜻해서 참으로 전시대 보다 사치스러운 곳도 없고 후대에 보는 사람에게도 허름한 곳이 없다고 말할만했다.
비록 물과 산에 대해서는, 옛 건물에서는 앞이 왼쪽이고 뒤가 오른쪽이었으나, 그 아아(峨峨)한 것, 그 양양(洋洋)한 것, 아침저녁 사시사철 헌(軒)이 소유한 것에 대해서는 같았다. 저 지리헌(智異軒)은 내가 아직 보지는 못했으나 형세(形勢)를 논한다면 상호간에 갑을(甲乙)이 되었으니 방박(磅礡)하고 웅위(雄偉)하여 골짜기는 깊고도 첩첩하고 물은 맑고도 깊어 지암(芝巖)이 갑으로써 쌍암(雙巖)을 밀치고 있고, 요조(窈窕)하고 청수(淸秀)하여 골짜기는 굴러서 가로질렀고 돌은 기이하면서도 정결하게 쌍암(雙巖)이 을로써 지암(芝巖)을 위해주고 있다.
아, 헌(軒)은 하나뿐인데 혹여 쌍암(雙巖)에 건립하고 혹여 지암(芝巖)에 건립하고 지금에 또 옮겨 건립했으니 시기(時機) 때문인가. 인간(人間) 때문인가. 땅은 비록 다르지만 헌(軒)의 이름은 실제 그대로이다. 옛집이 더 낫지도 지금 집이 못하지 아니하니 허물어진 집은 없고 새집이 지어졌다. 또 지암(智巖)·지암(芝巖)은 모두 덕유(德裕)를 비조(鼻祖)로 백리 간격에서 마주보고 남쪽 북쪽에서 한 방향만을 누르면서 아침저녁으로 호흡하니 지암(芝巖)을 바라보면 지암(智巖) 또한 보이는데 하물며 헌(軒)이야 뭐 말하겠는가. 그러나 이 월파헌(月波軒)에 올라가 고금의 형승(形勝)을 평론하자면, 저 외연(巍然)히 빼어난 것은 산이고 억연(嶷然)히 서있는 것은 돌이고 흘러가는 것은 물결이고 비추는 것은 달빛이고 익연(翼然)한 것은 헌(軒)이니 이 모든 것은 사물들일 뿐이다. 선대께서 긍구(肯搆)하신 뜻과 후손이 계술(繼述)한 뜻과는 상관없이 다만 평소 놀고 구경하는 장소일 뿐이다.
그 외연(巍然)한 산을 보면 우리할아버지의 기상(氣象)이 올라가서 수려하도록 꾀하는 것 같고 그 억연(嶷然)한 돌을 보면 우리할아버지의 지절(志節)이 올라가서 설 수 있도록 꾀하는 것 같고 그 흘러가는 물결을 보면 우리할아버지의 성심(誠心)이 올라가서 하염없이 흐르도록 꾀하는 것 같고 그 비추는 달을 보면 우리할아버지의 흉차(胸次)가 올라가서 비추도록 꾀하는 것 같고 그 익연(翼然)한 헌(軒)에 이르러서는 만물이 다 갖추어졌으니 이것이 우리할아버지의 전체이고 도모하여 광대하게 이룩한 까닭이다. 여러 종족들이여, 어찌 서로 힘쓰지 아니하겠는가.
오호라, 윤리(倫理)가 무너졌을 때 헌(軒)을 낙성(落成)하고 사직(社稷)이 옥(屋)이 되었을 때 헌(軒)을 수리(修理)하였으니 헌(軒)의 흥폐(興廢)는 대개 기수(氣數)와도 상관이 있는가. 옛날을 아파하고 지금을 비애하면서 어찌 한갓 상재지감(桑榟之感) 뿐이겠는가.
다만 병인(丙寅)년에 ‘강선(降仙)’이라 편액(扁額)을 내걸은 것은, 대개 제현(諸賢)들이 공(公)을 조문하는 글귀의 말을 인용한 것이지, 공의 본래의 뜻은 아니었던 것 같아서, 이에 구호(舊號)대로 ‘월파(月波)’라 하였다. 이 일을 발휘해서 시작한 사람은 종손(宗孫)인 인식(仁植)이고, 시종일관 주선한 사람은 교인(敎仁)·정기(正基)이다. 삼가 위와 같이 기문(記文)을 적노라.
 
숭정(崇禎) 후 5번째 무오(戊午) 6월 15일 9대손 교성(敎成)은 삼가 기(記)하노라.
 
 
 

2. 2. 次月波軒三十韻

南嶽岧嶢倚碧虛 翠微西畔卽吾廬
朝嵐暮靄眞堪賞 雅趣幽懷亦自如
時聽春禽歌後院 更憐垂柳拂前渠
人喧側近黃塵陌 地僻還如隱者居
一病支離須藥物 重門牢落斷輪輿
舊交遠隔南雲外 剝喙驚聞午睡初
且喜廚人具鷄黍 謾勞征馬到村墟
早將璞玉遭三刖 誰向雲衢借一噓
最愛高才騰騄駬 多慙朽質類蟾蜍
金蘭宿契如投漆 玉屑淸談足起余
憶昔阿山初避寇 登臨晩翠幾聯裙
賴其高義能周救 得以窮愁盡破除
錦里三霜嘗險阻 銀川一別費居諸
生涯到底風飄梗 髸髮無端雪滿梳
羈旅古鄕仍蹭蹬 提携令子共躊躇
十年南徼紛豺虎 千里西方阻鲤魚
我已靑雲通步武 君猶白首伴樵漁
平生多病憐司馬 四十知非愧衛蘧
禮法多拘裩裏虱 斗升虛竊太倉儲
未投定遠封侯筆 行把淵明帶月鋤
嗟子素爲鄕黨敬 休官仍與世人䟽
浮生何必論窮達 賦命由來有疾徐
覽彼月波新製作 天然淸水出芙蕖
按篇探玩神還爽 浣手長吟興有餘
白雪陽春人孰和 碧桃紅杏恨難攄
夢回京國三更月 思入鄕山五畝蔬
祖道不堪拈別酒 臨岐無計挽行車
聖朝汲汲搜岩穴 綸札翩翩下里閭
高臽卽今猶可致 壯心從此石須沮
去歸方丈春應盡 雁北來時倘寄書
遁谷 金壽賢
 
 
월파헌(月波軒) 삼십운(三十韻)을 차운한다
 
남악(南嶽)이 푸른 허공에 높이 솟아 있는데, 南嶽岧嶢倚碧虛
파르스름한 서쪽 두둑이 바로 우리 집이었지. 翠微西畔卽吾廬
아침안개 저녁노을은 참 감상할만하고, 朝嵐暮靄眞堪賞
단아한 취향 그윽한 회포도 여전했었지. 雅趣幽懷亦自如
때로는 봄에 후원에서 새의 노래 들었고, 時聽春禽歌後院
또는 앞 내에 날리는 버들도 어여뻤었지. 更憐垂柳拂前渠
사람이 소란하니 옆에 먼지 낀 들판이었고, 人喧側近黃塵陌
지역이 외지니 은자가 사는 것 같았었지. 地僻還如隱者居
지루한 병이라 약물을 기다려야 했는데, 一病支離須藥物
중문이 퇴락하여 수레가 끊기고 말았네. 重門牢落斷輪輿
친구가 멀리 남쪽 운수(雲水)에 살았는데, 舊交遠隔南雲外
찾는 소리 놀라서 막 낮잠 자려다 들었네. 剝喙驚聞午睡初
집사람이 닭고기 기장밥 차려줘서 기뻤는데, 且喜廚人具鷄黍
정마(征馬)가 마을에 와서 공연히 괴롭혔었지. 謾勞征馬到村墟
일찍이 박옥(璞玉)을 올려 삼월(三刖)을 당했지만, 早將璞玉遭三刖
누가 운구(雲衢)을 향해 한번 울부짖어 주었던가. 誰向雲衢借一噓
가장 좋은 것은 고재(高才)로 녹이(騄駬)타는 것인데. 最愛高才騰騄駬
매우 부끄럽네, 후질(朽質)로 성서(蟾蜍)가 되었구려. 多慙朽質類蟾蜍
금란(金蘭)의 숙계(宿契)는 교칠(膠漆)과 같아서, 金蘭宿契如投漆
옥설(玉屑)같은 청담(淸談)은 나를 일으켰었지. 은玉屑淸談足起余
기억하니 아산(阿山)에서 막 적을 피할 때에, 憶昔阿山初避寇
만취정에 올라가 연이어 얼마나 호위를 했던가. 登臨晩翠幾聯裙
고의(高義)에 힘입어 두루 구제할 수 있었고, 賴其高義能周救
궁핍한 시름까지도 다 밀고 나갈 수 있었네. 得以窮愁盡破除
금리(錦里)에서 3년 동안 험난함을 맛보았고, 錦里三霜嘗險阻
은천(銀川)에서 한번 이별로 세월 지나갔었지. 銀川一別費居諸
생애는 가는 곳마다 풍상이 험난했으니, 生涯到底風飄梗
머리는 그냥 눈처럼 얼레빗에 가득했지. 髸髮無端雪滿梳
고향에서 나그네로 여전히 빈둥거리고, 羈旅古鄕仍蹭蹬
아들의 손을 잡고 함께 머뭇머뭇했었지. 提携令子共躊躇
10년 동안 남쪽지방에 악한 시호(豺虎)가 소란하고, 十年南徼紛豺虎
천리 서쪽지방에서 이어(鲤魚)가 물을 잃었었지. 千里西方阻鲤魚
나는 벼슬길에 나아가서 임금을 보필하였는데, 我已靑雲通步武
그대는 백수(白首)로 나무꾼·어부와 친구했었지. 君猶白首伴樵漁
평생 병이 많아 사마상여(司馬相如)처럼 가여웠고, 平生多病憐司馬
40에 잘못을 알고 거백옥(蘧伯玉)에게 부끄러웠지. 四十知非愧衛蘧
예법(禮法)은 까다로워 옷에 이 잡는 것 같아서, 禮法多拘裩裏虱
도적맞은 두승(斗升)은 태창(太倉)에 곡식이었네. 斗升虛竊太倉儲
붓을 던지고 정원후(定遠侯)을 받지 못해서, 未投定遠封侯筆
연명(淵明)처럼 달밤까지 호미로 김맸었지. 行把淵明帶月鋤
아, 그대는 본래 향당(鄕黨)에서 공경 받았는데, 嗟子素爲鄕黨敬
관직 그만두고 연이어 세인(世人)과 소원해졌지. 休官仍與世人䟽
부평 같은 인생 뭐 꼭 궁(窮) 달(達)을 논하랴, 浮生何必論窮達
타고난 명은 본래부터 질(疾) 서(徐)가 있다네. 賦命由來有疾徐
저 새롭게 중건한 월파헌(月波軒)을 살펴보니, 覽彼月波新製作
천연한 청수(淸水)가 부용도랑에서 솟아나네. 天然淸水出芙蕖
책을 펴고 완미하니 정신은 도리어 상쾌하고, 按篇揬玩神還爽
손을 씻고 장가(長歌) 부르니 흥이 넘쳐나네. 浣手長吟興有餘
백설(白雪) 양춘(陽春)을 어떤 사람이 화답할까, 白雪陽春人孰和
벽도(碧桃) 홍행(紅杏)은 운(韻) 놓기 어려워 한탄하네. 碧桃紅杏恨難攄
꿈에 서울에서 돌아오니 삼경에 달떴는데, 夢回京國三更月
고향에 다섯 이랑 채소 생각에 빠져들었네. 思入鄕山五畝蔬
조도(祖道)에서 이별주를 차마 못 마시고, 祖道不堪拈別酒
갈림길에서 가는 수레를 만류할 수 없었네. 臨岐無計挽行車
성조(聖朝)께서 다급하게 암혈(巖穴)을 찾았고, 聖朝汲汲搜岩穴
륜음(綸音)이 편편(翩翩)히 마을에 내려왔네. 綸札翩翩下里閭
깊은 함정에 즉금에 빠질 수가 있으니, 高臽卽今猶可致
씩씩한 마음으로 돌로 막아둬야 하리라. 壯心從此石須沮
방장산에 돌아가면 봄이 다 지났을 것인데, 去歸方丈春應盡
기러기 북쪽에서 올 때 혹여 편지 부쳐오려나. 雁北來時倘寄書
 
둔곡(遁谷) 김수현(金壽賢)
 
 
 

3. 3. 月波軒三十韻

方丈高山接太虛 壯如衡岳峻匡廬
千峯仰止登難遍 萬象看來盡不如
雙峽遠橫臨斷麓 層巖斗起壓淸渠
烟嵐逈與塵寰隔 境落端宜處士居
天秘幾年欺俗眼 人豪今日駐藍輿
靈龜告吉誅茅後 危檻先成卜築初
荊棘變爲新勝地 園池非復舊荒墟
窓前碧蕙芳華艶 榻外刪雲瑞氣噓
偏愛石泉鳴玦玉 更憐宵漢耀蟾蜍
名軒二字波兼月 托契三朋爾及余
十里澄光凝鏡面 五更寒影襲衣裙
仰觀空碧胸襟爽 俯聽潺湲俗慮除
雙景朦朧迷上下 一堂吟嘯送居諸
靑鞋花塢香生襪 白髮朝陽雪滿梳
林壑興酣長偃息 滄浪歌罷獨躊躇
新醪滿甕春舂秫 寒膾堆盤夜釣魚
嬴得風流歸浩蕩 不憚蹤迹混樵漁
夢尋隍鹿寬天壤 志在羲皇傲几蘧
沈醉自期千日臥 安貧還笑萬金儲
樽前晝短頻燃燭 江上田荒幾荷鋤
千尺綠楊臨水嫩 數株紅杏入庭䟽
知還野鳥孤飛倦 驚睡淸風一陣徐
春晩暝巖看躑躅 秋晴深沼賞芙蕖
烟沙細雨眠鷗外 嶽寺寒鍾落照餘
仙界淨緣無與共 暮年心事向誰攄
塊然守靜門無客 可以療飢澗有蔬
嗟我半生長坐井 羨公盤谷願膏車
追遊絶境宜投杖 景仰高風可式閭
採藥北山同鄭老 耦耕南畝繼長沮
永懷水月成長律 遠寄高軒壁上書
白軒李景奭
 
 
월파헌(月波軒) 삼십운(三十韻)
 
방장(方丈)은 높은 산이라서 하늘까지 닿아는데, 方丈高山接太虛
형악(衡岳)같이 굳세고 광려(匡廬)처럼 험준하네. 壯如衡岳峻匡廬
일천봉우리 올려보니 두루 오르기 어려웠고, 千峯仰止登難遍
삼라만상을 보노라니 모두 다른 모양이네. 萬象看來盡不如
쌍협(雙峽)은 멀리 빗겨 끊긴 산기슭에 닿았고, 雙峽遠橫臨斷麓
층암(層巖)은 우뚝 솟아 맑은 도랑을 눌렀네. 層巖斗起壓淸渠
연람(烟嵐)은 아득히 티끌세상과 떨어져 있고, 烟嵐逈與塵寰隔
경락(境落)은 단아하여 처사가 살기에 마땅하네. 境落端宜處士居
몇 년이나 하늘이 감추고 속안(俗眼)을 속였던가. 天秘幾年欺俗眼
호협한 사람이 오늘 남여(藍輿)를 타고 머물렀네. 人豪今日駐藍輿
영귀(靈龜)가 길지(吉地) 고하자 띠를 베어내고, 靈龜告吉誅茅後
가파른 난간에 집터를 잡아 집을 낙성하였네. 危檻先成卜築初
가시밭은 새롭게 승지(勝地)가 되었는데, 荊棘變爲新勝地
동산 연못은 황폐한 채 복구되지 않았네. 園池非復舊荒墟
창 앞에 푸른 혜초는 향기로운 꽃이 어여쁘고, 窓前碧蕙芳華艶
평상 너머 산운(刪雲)은 상서로운 기운 풍기네. 榻外刪雲瑞氣噓
유독 석천(石泉)의 패옥소리가 사랑스럽고, 偏愛石泉鳴玦玉
또 밤에 은하수가 달빛에 빛나서 어여쁘네. 更憐宵漢耀蟾蜍
두 글자 헌(軒) 이름은 파(波)와 월(月)이고, 名軒二字波兼月
세 벗들과 계(契) 맺은 것은 너와 나였네. 托契三朋爾及余
십리에 맑은 광채가 수면에 비춰 서렸고, 十里澄光凝鏡面
오경에 차가운 그림자 속옷까지 엄습했네. 五更寒影襲衣裙
푸른 허공을 우러러보니 흉금이 상쾌했고, 仰觀空碧胸襟爽
잔잔한 물소리 굽어듣고 세속 걱정 씻었네. 俯聽潺湲俗慮除
햇볕이 몽롱하니 위아래가 혼미한데, 雙景朦朧迷上下
한 집에서 읊조리며 세월을 보냈었네. 一堂吟嘯送居諸
청혜(靑鞋) 신고 꽃밭에 가니 버선에 향기가 나고, 靑鞋花塢香生襪
백발(白髮)을 아침에 빗으니 빗에 눈이 가득했네. 白髮朝陽雪滿梳
임학(林壑)에서 흥에 겨워 오래 노닐었고, 林壑興酣長偃息
창랑(滄浪)에서 노래하고 혼자 주저했네. 滄浪歌罷獨躊躇
새로 익은 항아리 술은 봄에 찧은 찹쌀로 빚었고, 新醪滿甕春舂秫
쟁반에 담긴 신선한 회는 밤사이 낚은 물고기였네. 寒膾堆盤夜釣魚
풍류(風流)를 여유롭게 얻어 호탕하게 돌아가고, 嬴得風流歸浩蕩
종적(蹤迹)을 가리지 않고 나무꾼 어부 어울렸네. 不憚蹤迹混樵漁
꿈에 해자에서 사슴 찾는 것은 세상 참 관대하고, 夢尋隍鹿寬天壤
뜻을 복희황제에 두니 궤거(几蘧)을 업신여겼네. 志在羲皇傲几蘧
술에 빠져 일천 날을 누워 있으려고 기약했는데, 沈醉自期千日臥
안빈(安貧)하니 도리어 쌓은 만금이 가소로웠네. 安貧還笑萬金儲
낮이 짧으니 술두루미 앞에서 자주 촛불 피우고, 樽前晝短頻燃燭
밭이 묵으니 강가에 얼마나 호미 들고 나갔던가. 江上田荒幾荷鋤
천 자나 된 녹양(綠楊)은 물에 드리워져 예쁘고, 千尺綠楊臨水嫩
두어 그루 홍행(紅杏)은 뜰에 성글게 심어있네. 數株紅杏入庭䟽
들에 새들은 외롭게 날아 돌아갈 곳 아는데, 知還野鳥孤飛倦
맑은 바람 살짝 휘몰아쳐 잠에서 놀랐노라. 驚睡淸風一陣徐
만춘(晩春)에 어두운 바위에서 철쭉을 보고, 春晩暝巖看躑躅
청추(晴秋)에 깊은 못에서 부용화를 구경했네. 秋晴深沼賞芙蕖
연사(烟沙)에 이슬비 내리고 갈매기는 잠을 자는데, 烟沙細雨眠鷗外
악사(嶽寺)에 차가운 종소리 낙조(落照)에 떨어지네. 嶽寺寒鍾落照餘
선계(仙界)의 깨끗한 인연 함께할 사람 없으니, 仙界淨緣無與共
모년(暮年)에 마음속 말을 누구에게 털어놓을꼬. 暮年心事向誰攄
흙덩이처럼 고요히 지내며 찾아오는 손님은 없고, 塊然守靜門無客
요기할 수 있는 것은 골짜기에 나물이 있었다네. 可以療飢澗有蔬
슬프다, 내 반평생 오래도록 우물 안에 앉았으니, 嗟我半生長坐井
부럽다, 그대의 반곡에서 수레타고 달렸으면 하네. 羨公盤谷願膏車
절경(絶境)을 추모하기에 마땅히 지팡이 던져야 했고, 追遊絶境宜投杖
고풍(高風)을 경앙하기에 마을에 경의를 표할만했네. 景仰高風可式閭
북산(北山)에서 약초를 캐니 정노(鄭老)와 동행했고, 採藥北山同鄭老
남묘(南畝)에서 밭을 일구니 장저(長沮)을 이었네. 耦耕南畝繼長沮
수월(水月)을 오래 생각하여 장율(長律)로 지어, 永懷水月成長律
월파헌(月波軒) 벽 위에 써서 당신께 부치옵니다. 遠寄高軒壁上書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4. 4. 月波軒重修記

月波軒舊在頭流之雙巖 醉睡金公
諱聲振所築也 在昔光海斁倫之時
公棄官南歸 簞瓢之趣 可以敵軒冕
之樂 登臨嘯詠 與當世名碩 酬唱以見
志 所謂江湖而戀闕者也 年久而亭廢
草樹之間 但見月白而水淸而已 雲仍
曾欲重建 而爲其居遠難守 乃就公
墓下 據巖臨流 起亭數楹 澄川碧
峀 隱暎遠近 頗有觀眺之勝 而仍舊
額者 蓋出於追遠之心也 今敎鍠又懼
其傾頹 與諸宗合謀修葺 工役告訖
屬余記之 余曰斯軒命名之意 前人記
文已備矣 更何贅焉 雖然軒之興廢
地之變遷 旣有其事由 則略擧而識之
何傷之有 噫 賢者所樂 蓋難言也 霽
月澄波 心曠神怡 寵辱俱忘 則其高風
淸想 世莫得以測也 爲公後承 勿以軒成
謂 其徽蹟復明 更究扁楣之義 謀所以進
乎此 則其於似述之道 乃可得矣 請以此爲
軒之記
崇禎五周乙未復月 恩津宋秉璿記
 
 
월파헌중수기(月波軒重修記)
 
월파헌(月波軒)은 옛적에 두류산(頭流山) 쌍암(雙巖)에 있었으니 취수(醉睡) 김공(金公) 휘(諱) 성진(聲振)께서 건립했다. 옛적 광해(光海)가 윤리(倫理)를 무너뜨릴 때에 공은 관직을 버리고 남쪽으로 낙향했다. 단표(簞瓢)의 취향은, 높은 벼슬하는 낙과 비교할만한 하겠는가. 월파헌(月波軒)에 올라가 읊조리며 당시 유명한 석학들과 화답하여 자신의 뜻을 보였으니 이른바 ‘강호(江湖)에서 임금을 그리워했다.’라는 겪이다.
세월이 오래되고 정자는 허물어지니 초목 속에서 흰 달빛과 맑은 물만 보일 뿐이었다. 후손들이 일찍이 중건(重建)하려고 했으나 ‘자신들이 거처하는 곳과 거리가 멀어서 수호하기 어렵다.’하여 이에 공의 묘소(墓所) 아래에 옮겼다. 바위에 의거하여 물이 임하는 곳에 두어 기둥 정자를 중건하였으니 맑은 시내와 푸른 산이 원근에 비춰 자못 돌아볼만한 경치였다. 옛 편액을 그대로 내걸었으니 대개 가신 분을 추원(追遠)하려는 취지에서였다.
지금 교굉(敎鍠)이 또 그 무너지려는 것을 두려워하여 제종(諸宗)들과 모의해서 수리(修理)를 하고 공역이 끝나자, 나에게 기록해주기를 부탁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 헌(軒)을 월파헌(月波軒)이라 이름 지은 뜻은 전인(前人)의 기문(記文)에 이미 갖추어져있으니 다시 무슨 말을 덧붙이겠는가. 비록 그러나 헌(軒)의 흥폐(興廢)와 지(地)의 변천(變遷)은 이미 그 사유(事由)가 있으니 대략 내용을 들어서 기록한들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아, 현자(賢者)가 즐기는 것은 대개 말하기 어렵다. ‘징파(澄波)에 비 개이고 딸 뜨면 마음이 넓어지고 정신이 기뻐서 세상 영욕(榮辱)을 모두 망각한다.’라고 하였으니 그 고상한 기풍과 맑은 생각은 세속에서 헤아릴 수 없다. 공의 뒤를 계승하는 후손들은 ‘헌(軒)이 완공되었다.’고 말하지 말고, 공의 아름다운 자취를 다시 밝히고 또 편미(扁楣)의 의(義)를 궁구(窮究)하여 여기에 나아갈 바를 도모하면 그 계술(繼述)하는 도(道)을 이에 얻었다할 만하다. 청컨대 이로써 헌(軒)의 기문(記文)을 적겠노라.
 
숭정(崇禎) 5번째 을미(乙未) 복월(復月) 은진(恩津) 송병선(宋秉璿)은 기(記)하노라.
 
 
 

5. 5. 月波軒記

頭流之山 磅礡於南紀 而爲衆山之宗焉 物之最鉅者也 其崗巒秀異 峻
極于天者 山之精華 發於外 而愚者之所共知也 其陵谷卑微 逶迆於地
者 山之精華 隱於內 而智者之所難識也 然則雙巖之狹 乃方丈之陵谷
而一自岳瀆之肇判 玆地晦彩於草樹之中 世人凡眼 安得以知之 其擇
勝於荊棘之間 而能卜棲遲之所者 惟我金公一人而已 金公年德俱邵
志操雅潔 癖成山水 老而彌篤 頃年悠然有壯遊之志 乃作頭流之行 翩
翩一筇 飛入雙巖 徘徊笑傲之際 仍陟高崗之上 矯首騁目 遠望近瞻 則
爰有小溪 發源於層巖之麓 流入於小洞之口 聽其冷冷者 便戄然驚惧
於心曰 此誠山之正脈 而是吾暮年卜居之區也 乃控手却立而視之 則其
突然而出者爲高邱 呀然而陷者爲長谷 霔者爲沙川而響如玦環 缺
者爲深洞而幽如武陵 於是誅其茅拓其基 (결)糞壤燔榴翳 傍其溪
之南畔而立亭焉 椽不過三 階纔數等 雲以爲籬 山以爲屛 栽梅數
株 淸香滿堂 種柳成行 嫩綠粧門 慕西湖栗里之趣也 海外仙葩 托根階
上 宣州絶艶 移植庭前 取胡生杜子之玩也 左其圖右其書 床有樽匣
有琴 門巷蕭灑 窓櫳幽靜 舊日荒原 變作仙境 顧瞻群峯 摠無顔
色 其巍然遠橫者曰白雲山也 而公不注眼 屹然近峙者鳳城山也 而公無
寓玩 望仙臺邊晴霞晩捲 而不以此爲賞心 步月庵中 寒鍾暮起 而不以
此爲傾耳 其餘春花夏雲秋樹冬雪 四時可玩之物 皆不爲我公寄興之
具 而只有靑天皓月 碧澗澄波 能爲主人晩年知己之二友 公之所好 其諸
異乎人歟 是以揭華扁二字於堂之壁上 曰月波 奚取於月也 奚取於水
也 靈臺虛淨 炯若秋波 主人取其波耶 胸襟灑落 皎如霽月 主人取其月
耶 金烏西匿氷輪 東轉輝騰 遠峯流入澄潭 金君愛是景耶 霪霖快霽
洲水揚淸 鏡面無埃 灝氣昇天 金君玩此物耶 月入波而增輝 波迎月而
耀彩 浮光躍金 靜影沈璧 乾坤混淪 上下朦朧 當此時 主人岸烏紗 披荷
衣 焚一炷香 持三尺琴 心遊太古 慮絶塵寰 陶陶融融 熙熙然浩浩然 人欲
淨盡 天理流行 一夜之間所玩者 只銀蟾蜍碧琉璃而已 人間至樂 俱萃於
此軒 金公之頤養淸福爲如何哉 食於玆寢於玆 臥於斯坐於斯 雙峽烟
霞 儘乎我公之菟裘也 噫人以物顯 物以人貴 會稽蘭亭 未遇王右軍
則其淸湍脩竹 蕪沒於空山 黃州竹樓 不有王元之 則其沙鳥風帆 索莫於
寒江矣 至於月波軒 獨不然乎 惟我月波主人 遠在山中 寄以歸來篇曰
我有終老之計 願公爲我記之 須早作芳隣 余旣以未得登眺爲歎 又喜
其襃揚我公之風流 以傳示騷人之往來玆軒者 故終不敢以文拙爲辭 嗟
乎 自古以來 移家入山者 非一非二 而商山之行 四皓同歸 蹤迹似煩 竹溪
之逸 六人聯袂 朋儔太過 二山幽隱 吾所不取 然則同志二人 白首連墻 不亦
樂乎 淸波不盡 明月長懸 秣馬他年 我當尋君 一半華山 願與分焉
萬曆四十三年 乙卯暮春 完山 李景奭 記
 
 
월파헌기(月波軒記)
 
두류산(頭流山: 지리산) 남쪽은 펀펀하여 모든 산의 종주(宗主)가 되었으니 만물 중에서 가장 거물(鉅物)이다. 그 산봉우리가 수려하게 하늘에 닿아 험준한 것은 산의 정화(精華)가 밖에 드러나서 우자(愚者)도 모두 알 수 있지만, 그 능곡(陵谷)이 낮고 밋밋하게 땅에 구불구불 돌아간 것은 산의 정화(精華)가 안쪽에 숨어있어서 지자(智者)도 알아내기 어렵다.
그렇다면 쌍암(雙巖)의 협소(狹小)한 곳이 바로 방장(方丈)의 능곡(陵谷)인데 한번 산과 바다가 비로소 분별되면서부터 이 지역은 정채(精彩)가 초목 속에 흐릿하게 가려졌으니 세인(世人)의 범안(凡眼)으로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그 승지(勝地)를 형극(荊棘) 사이에서 가려서 은거할 터로 잡을 수 있었던 사람은 오직 우리 김공(金公) 한 사람 뿐이다.
김공은 나이와 덕(德)이 모두 높으시고 지조(志操)가 고결(高潔)하신 분이다. 산수(山水)를 좋아하는 벽(癖)이 있는데 늙을수록 더욱 좋아하셨다. 근래에는 유연(悠然)히 씩씩하게 유람을 할 뜻이 있어서 이에 두류산으로 갔다. 지팡이 짚고 훨훨 날아 쌍암(雙巖)에 들어가 거닐면서 웃고 노닐었고 이어 높은 산등성이에 올라가 고개를 들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멀고 가까운 곳을 바라보다가, 이에 작은 시냇물이 층층바위기슭에서 발원하여 작은 동구(洞口)로 유입(流入)하는데 그 찰랑찰랑한 소리를 듣고 문득 확연(戄然)히 마음에 놀라서 말하기를 ‘이곳이 진실로 산의 정맥(正脈)이다. 필시 내가 모년에 은거할 지역이다.’하고, 이에 손으로 만져보고 돌아서서 살펴보니 그 돌연(突然)하게 솟은 곳은 높은 언덕이고 하연(呀然)하게 움푹한 곳은 긴 계곡이었다. 장맛비가 쏟아지면 모래시내가 되어 마치 옥고리[玦環]가 울리는 것 같고 물이 쏟아지면 깊은 동구(洞口)가 되어 마치 무릉도원처럼 아득했다. 이에 띠를 베어내고 집터를 다져서 ■…■땅을 비옥하게 하고 석류나무를 심어서 그늘을 만들고 시내 남쪽 두둑에 정자를 건립하였으니 불과 서까래 3개에 계단은 겨우 두어 계단이었다.
구름을 울타리삼고 산을 담장 삼고 매화 두어 그루를 심어 청향(淸香)이 집안 가득 풍기고 버들을 심어 길을 만들고 은은한 신록이 문을 치장해주니 서호(西湖)와 율리(栗里)의 정취를 앙모하려 한 것이다. 해외(海外)에 좋은 화초를 계단에 심어서 선주(宣州)의 절경(絶境)을 뜰 앞에 옮겨놓은 것 같았으니 호생(胡生)·두자(杜子)가 완미했던 경치를 취한 것이다. 그 왼쪽에 그림이 있고 오른쪽에 책이 있었으며 상에 술두루미가 있고 상자에 거문고가 있었으며 문 앞은 깨끗하고 창은 아득했으니 옛적 잡초 무성한 언덕이 선경(仙境)으로 변모하였고 뭇 산봉우리를 돌아보니 모두 전에 모습은 없었다.
그 외연(巍然)히 멀리 가로지른 곳이 백운산(白雲山)산인데도 공은 눈여겨보지 않았으며 흘연(屹然)히 가까이 솟은 곳이 봉성산(鳳城山)인데도 공은 구경하는 일이 없었으며 선대(仙臺) 주변을 바라보면 쾌청하게 저녁노을이 말렸는데도 이를 감상하려는 마음이 없었으며 달밤에 암자를 산보하면서 차가운 저녁 종이 울려도 이것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 밖에 봄에는 꽃, 여름에는 구름, 가을에는 나무, 겨울에는 눈, 사시사철 구경할만한 경물(景物)에 대해서도 모두 우리 공께서는 감흥을 부칠만한 것이 아니었고, 다만 ‘청천(晴天)에 호월(晧月), 벽간(碧澗)에 징파(澄波)’만이 주인의 말년에 지기(知己)하는 두 벗이 될 수 있었으니 공께서 좋아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는 달랐다.
이 때문에 화려한 편액 두 글자를 당(堂)의 벽(壁)에 내걸고 월파(月波)라고 하였으니 왜 월(月)을 취했으며 왜 수(水)를 취했을까. 영대(靈臺)가 호젓하면 그 빛이 가을 물결 같았을 것이니, 주인(主人)은 그 물결을 취했을까. 흉금(胸襟)이 깨끗하면 밝기가 제월(霽月)같았을 것이니 주인은 그 월(月)을 취했을까.
금오(金烏: 태양) 서쪽에 달이 숨었다가 동쪽으로 넘어가 빛을 발휘했을 때 멀리 산봉우리가 징담(澄潭)에 빠져들면, 김군(金君)은 이런 경치를 좋아했을까. 장마가 쾌청하게 걷히고 모래톱에 물이 철철 흘러 거울처럼 티 없고 환한 태양이 떠오르거든, 김군은 이런 경물(景物)을 사랑했을까. 달이 파도에 빠져 더욱 빛나고 파도가 달을 맞아 빛나니 물에 뜬 광채는 금이 뛰는 듯하고, 고요한 그림자는 구슬이 물에 잠긴 듯하며, 하늘과 땅이 혼합하여 상하가 몽롱했을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주인은 오사모(烏紗帽)를 어슷하게 착용하고 하의(荷衣)를 풀러 헤치고 한번 향불 피워놓고 3척(尺) 거문고를 타면서 마음은 태고(太古)에서 놀고 생각은 속세와 끊고 도도(陶陶)하고 융융(融融)하게 희희연(熙熙然)히 호호연(浩浩然)히 인욕(人欲)을 깨끗하게 다 씻고 천리(天理)가 운행하는데 하룻밤 사이에 완미하는 것은 다만 은색 달과 푸른 물결뿐이었다. 인간 세상의 지극한 낙이 모두 이 헌(軒)에 모였으니 김공(金公)께서 청복(淸福)을 이양(頤養)하시는 것이 어떠했겠는가. 이곳에서 밥을 먹고 이곳에서 잠을 자고 이곳에서 눕고 이곳에 앉았으니 쌍협(雙峽)에 연하(煙霞)는 모두 우리 공의 은거(隱居)지인 셈이다.
아, 인(人)은 물(物) 때문에 현달하게 되고 물(物)은 인(人) 때문에 존귀하게 된다. 회계(會稽)에 난정(蘭亭)은 왕우군(王右軍)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청단(淸湍)과 수죽(脩竹)은 허공 산천에 묻혔을 것이고, 황주(黃州)의 죽루(竹樓)는 왕원지(王元之)가 있지 않았다면 사조(沙鳥)와 풍범(風帆)은 차가운 강물에 잠겨 쓸쓸했을 것이니 월파헌(月波軒)에 이르러서도 유독 그렇지 않았겠는가.
오직 우리 월파주인(月波主人)이 멀리 산중(山中)에서 귀래편(歸來篇)을 부쳐서 말하기를, ‘나는 말년을 보낼 계획을 마쳤으니 공은 나를 위하여 기문(記文)을 저술해주고 꼭 좋은 이웃이 되십시다.’라고 하였다. 내가 한탄스러운 것은 ‘아직 월파헌에 올라가서 살펴보지 못했다.’는 것이고, 또 기쁜 것은 ‘우리 공께서 저술하신 풍류를 세상에 드날려 이 헌(軒)에 왕래하는 문인에게 전해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침내 문장이 졸렬하다는 이유로 감히 사양하지 못했다.
애석하다, 예로부터 집을 떠나 입산(入山)하는 사람이 비일비재했다. 상산지행(商山之行)은 사호(四皓)가 동귀(同歸)하였으니 종적(蹤迹)이 번거로운 것 같고, 죽계지일(竹溪之逸)은 6사람이 옷소매를 나란히 하였으니 짝한 벗이 너무 과하게 많았다. 상산과 죽계 두 산에 은거한 일은 내가 취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동지(同志) 두 사람이 백수(白首)로 담장을 나란히 이웃하는 것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청파(淸波)가 다 마르지 않고 명월(明月)이 오랜 세월 떠 있거든 다음에 말을 타고 내 의당 그대 찾을 것이니 한 반쪽 화산(華山)을 나에게 나누어 주길 바란다.
 
만력(萬曆) 43년 을묘(乙卯) 모춘(暮春) 완산(完山) 이경석(李景奭)은 기(記)하노라.
누정(樓亭) 임실군(任實郡) # 월파헌
【향토】 임실의 정자 (2013)
• 5. 담락정(湛樂亭) - 청웅면 남산리
• 6. 월파헌(月波軒) - 삼계면 학정리
• 7. 화수당(花樹堂) - 삼계면 어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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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