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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성수의 역사문화 (2012)
성수의 역사문화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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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018년 7월 30일
Ⅲ. 성수의 역사 유적
about 성수의 역사문화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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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 소충사(昭忠祠) 조선 태조(太祖) 황산 대첩(荒山大捷)
【저작】
(2018.07.30. 10:25) 
◈ Ⅲ. 성수의 역사 유적
태조 이성계의 회군로回軍路 / 이성계의 황산대첩 회군로를 찾아 / 헬리콥터를 타고 성수산을 내려다보면 참으로 절묘한 산세를 발견하게 된다. 장수 팔공산의 준령이 치달아 우뚝 멈춘 성수산을 중심으로 세 가닥의 힘찬 맥이 뻗어 나아가고 있다
목   차
[숨기기]
 

1. 1. 태조 이성계의 회군로回軍路

이성계의 황산대첩 회군로를 찾아
 
헬리콥터를 타고 성수산을 내려다보면 참으로 절묘한 산세를 발견하게 된다. 장수 팔공산의 준령이 치달아 우뚝 멈춘 성수산을 중심으로 세 가닥의 힘찬 맥이 뻗어 나아가고 있다. 남동 방향으로는 지사면을 거쳐 지리산 천왕봉으로 맥이 통하 고 서남쪽으로는 임실의 두만산을 휘어감다가 강진의 백년산과 덕치면의 회문산으 로 뻗어 나아갔다. 그리고 동북쪽으로는 진안 마이산을 거쳐 조라치鳥羅峙에 이르는 데 이곳은 금강·만경강·섬진강의 분수령이다.
 
그런데 신라의 선사大禪師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전국의 많은 산을 두고 하필이면 왜 이곳 성수산을 찾아 그 주봉 아래 암자를 지었을까? 도선道詵이야말로 우리나라 풍수지리계의 태두泰斗이자 가大家다는 사실은 그냥 넘길 일은 아닌 것 같다. 이런 풍수지리상의 길지吉地는 항시 큰 뜻을 품은 웅호걸들은 관심을 두게 마련 이었다.
 
일찍 고려 태조대왕건이 이곳 환희담歡喜潭에서 기도를 드린 뒤 고려 창업을 이루 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역시 젊은 시절 이곳에서 무 학 사를 만나 상서로운 꿈에 하여 시원스레 해몽을 듣고 그의 인도로 500일 기 도를 드린 뒤 왕건이 목욕을 하였다는 환희담에서 목욕재계하고 홀연히 이상한 길 조를 얻어 공중에서 성수만세를 세 번이나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따라서 태조 이 성계는 삼청동三淸洞이라는 글씨를 남겨 뒷사람들이 작은 바위에 각자刻字를 하다. 삼청三淸이란 공기도 맑고, 물도 맑고, 정신(氣)도 맑다고 하여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이런 사실들이 이성계의 머릿속에는 항상 떠나지 않고 맴돌았으나 고려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남원 운봉의 황산벌에서 왜군倭軍인 아지발도군(軍)을 물리치고 의기양양해진 이성계는 휘하 장병들을 거느리고 개선하는 길에 설레는 마음으로 무학대사를 그리며 조선개국의 꿈 성수만세를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팔공산 도선암 (현 성수산 상이암)을 찾았다.
 
 
호남은 조선 개국의 발판이었다
 
북으로는 강을 경계로 륙과 연결지어져 있고 남으로는 해협을 끼고 일본 열도와 인접해 있는 우리 한반도는 그 지리적 조건으로 볼 때에 항상 사 교린을 표방하면서 그 틈바구니 속에서 민족자존을 세우며 끊임없이 성장해 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륙의 절반을 휩쓸며 호기 당당하게 살아온 고구려의 옛 전통을 이어받아 국호까지 도 고려라고 불 던 그 시 에 있어서의 우리 민족의 형편은 어떠하 던가? 더 이상 말할 나위 없이 39년간의 몽고 침략으로 사실상 고려는 한때에 저들의 부마국이 되 었고 그 이후에는 왜구의 끊임없는 발호로 말미암아 한반도 전체는 크나큰 몸살을 앓고 있어서 국세는 날로 피폐일로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고려가 청산되 고 새로운 조선이 개국되기 12년 전 있었던 아지발도의 침략은 가뜩이나 허약해질 로 허약해진 고려가 망하느냐 다시 일어나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크게 당황할 수밖 에 없었던 일 사건이었다. 이때에 최무선이 왜구를 맞아 화약무기를 써서 크게 무 찌른 진포 첩에 연이어 내륙 깊숙이 쳐들어온 왜구를 운봉 황산에서 맞아 일망타진 하 던 황산대첩은 오천 년 역사상 보기 드문 민족자존의 자랑이 아닐 수 없으며 기진맥진한 고려가 청산되고 새로운 아침의 나라 조선 개국의 발판이 되었다.
 
 
왜구는 쌀농사가 잘되는 호남 침략을 목표로 하였다
 
어찌하여 왜구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아 때때로 반도 조선을 괴롭혀 왔던가? 그 까닭은 물론 저들도 저들 나름 로의 생존이 있기 때문에 조선을 괴롭혔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저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쌀이었기 때문에 왜국침략의 최 목적 은 쌀 도둑질이요 그 도둑질의 상지는 언제나 저들과도 거리상 가깝고 쌀농사가 가장 성한 곡창 호남일 수밖에 없었다. 도둑들이 즐기는 마당은 곧 주인에게도 귀 중한 마당일 수밖에 없었으니 농업이 주업이었던 그때에만 볼지라도 호남이 휘청 거리면 민족 생존이 휘청거리고 호남이 풍성하면 민족 전체가 탈 없이 조용할 수밖 에 없었다.
 
그렇기로 ‘호남이 없었다면 이 나라도 없다.’는 충무공의 말은 하필 저 임진왜란 당시의 속사정만을 나타낸 말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아 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왜구의 호남 침공을 운봉 황산에서 때려잡은 그날의 그 큰 승리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기 그지없던 고려의 사직 을 누란의 위기에서 건져낸 구국의 승리 으며 나아가 호남을 조선국의 발상지로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던 주요 발판이었다. 물론 하나의 전쟁이 승리로 장식되려면 그 원인 중에는 상 를 앞지를 만한 유리한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인데 그 기본적 조건을 간추려 보면 천시天時가 맞아야 하고 지리가 맞아야 하고 인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이 세 가지 조건밖에 없다.
 
그렇다면 명장 이성계가 지녔던 이 세 가지 조건은 각각 어떠하 던가? 첫째 남정북벌로 튼튼하게 단련된 백전필승의 노련한 지략과 지모는 허술할 만한 흠집을 이미 다 털어버렸기 때문에 자칭 소년장수라고 뽐내며 거만을 떠는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무찌르기에 이미 충분한 조건을 갖췄다 해도 좋다. 게다가 우선 명산은 명장 과 같고 천은 정병과 같다는 말처럼 명산 지리산과 거산 덕유산의 맥이 바짝 닿아 고원 위의 분지를 이루고 있는 인월 ― 운봉 간의 목 황산에 자리잡고 겁없이 달려드는 왜구를 유인할 로 유인하여 놓은 그 솜씨가 벌써 지리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를 알고 남을 알면 백전백승을 거두는 법이다. 그렇기로 밝은 쪽에 적을 두고 우리는 어둠 속에 가려 있다면 이미 그 싸움은 결판난 싸움이나 다름이 없고 팔뚝 힘에 바람 힘을 보태어 화살을 쏘아 면 그 화살은 ‘흥’소리를 내며 사반공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어찌했던가? 고원 위에 뜬 달빛을 끌어다가 적을 비치면 그날의 도둑 떼 들은 낱낱이 헤아리며 죽 으니 그래서 오늘날 그날의 격전지를 인월리引月里라 하 고 팔랑재 바람 구멍 사이로 불어오는 센바람을 끌어다가 화살에 힘을 붙여 그 때 그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들을 여지없이 무찔 기로 지금도 인풍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흘러간 역사에 가설을 둘 수 없다 하지만 만약 그때 그날의 소년장수 아지발도에 게 당시 어느 고려 장수의 주장 로 저들이 원하는 국토의 일부를 그 로 내주었더 라면 그들은 반듯이 호남을 원했을 것이요 만약 호남을 그들에게 내주었더라면 지 금 우리는 어찌 되었을까?
 
우리 국토는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모양이요, 백두대간은 그 척추요 지리 산은 단전이며 예부터 우리 호남천지 53향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 로 삶에 불가결 한 먹이를 생산하는 보배로운 곡창 호남을 저들에게 내주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도둑 떼 아기장수를 달래기 위한 말이었다 할지라도 너무나 경솔한 발언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으며 꿈속에서라도 그런 민족자존을 해치는 말은 아예 탓할 가치 조차 없는 망언 중에 망언이다.
 
잔뜩 푸르렀던 지리산도 이제는 늦가을 첫눈으로 머리가 희고 달마다 고원 운봉에는 으레 보름달이 완연하게 밝으며 팔랑재 구멍 사이로 여전히 저 동해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은 겨울로 접어들수록 세차게 불어온다.
 
가뜩이나 그때 그 쌀 도둑 떼들이 이 땅에 쳐들어와 우리네 재산을 마구 사르고 우리네 목숨을 제멋 로 빼앗던 버르장머리 없는 그 만행의 슬픔이 황산대첩의 기 쁨으로 상쇄된 지 만 630년이 된 오늘에 다시 그날을 기리고 그 뜻을 되새기는 참다운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물론 역사는 거울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그 거울에 비춰가며 삶의 방향을 올바르게 지어가야 할 필요가 있기에 우리는 항상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는 것이며 같은 역사 중에서도 그 역사의 진실을 실증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아 연구에 연구를 거듭 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큰 문제가 하나 가로놓여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 라 과거 일제에 의해 저들에게 불리한 역사는 인위적인 힘을 가해서라도 축소 왜곡 시키기도 하고 또는 물리적인 힘을 가해서라도 인멸시키기에 급급하였다는 점이 너무나도 컸다는 점이다.
 
승전을 자랑하는 첩비를 폭파한 것이 그 중요한 실례이며 황산대첩으로 인해 얻어진 우리의 지명을 낱낱이 바꿔버린 것이 또 하나의 예이고 오늘날에 널리 통용되고 있는 국사 사전에까지도 황산대첩에 한 풀이는 너무나도 축소 설명되어 있는 것 이 또한 일제 잔재가 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로 남아 있다는 부끄러운 예이다.
 
 
황산대첩 후 회군로를 정리하다
 
아무튼 황산대첩에 한 뜻을 설명하는 과정에 진군로進軍路는 설명을 생략하고 남원 운봉의 황산대첩 관련 내용과 회군로回軍路에 한 것 중 임실과 관련 있는 사항들만을 모아서 정리하고자 한다.
 
장수에서 인월로 가는 지름길은 번암을 거쳐 가는 길뿐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왜구들의 동정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면 모르나 ‘장차 남원을 거쳐 광주로 향하리라.’며 자세히는 몰라도 이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척후의 보고를 세 히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단지 급한 마음에 저들을 빨리 소탕해 버릴 요량으로 지름 길만을 택하여 가는 것은 아무래도 왜구의 음흉한 전략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으로 자칫 만용이 될 수도 있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여러 정황을 분석하는 한편 저들의 호언장담에서 그 실마리를 풀고자 했다. 과연 왜구들이 장차 남원을 거쳐 광주로 향하려는 것인가. 그런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저들이 호언장담하는 이면에는 진군의 목표가 다른 데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이성계는 갑자기 눈에서 별이 쏟아지며 가슴이 확 트이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시당초 저들이 쳐들어온 목적이 무 엇이었던가. 곡창 호남을 샅샅이 누비며 될 수 있는 로 많은 식량을 약탈해 가려 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미 함양에서 잔뜩 당당해질 로 당당해진 기세를 슬그머니 접어 남원에서 광주로 갈 리가 없는 것 아닌가. 기운이 꽉 차면 누구나 교만해지고 기운이 빠지면 누구나 인색스러운 법이며 말 타면 경마 잡고 싶은 것이 사람마다 지닌 속성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교만해질 로 교만해진 왜구들은 남원 을 놓아두고 인월에서 곧장 전주를 향해 갈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성계 는 패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측 군사들로 하여금 곧장 전주를 향해 떠날 채비를 갖추게 하면서 교만한 왜구를 일망타진할 작전을 세웠다.
 
즉 인월에서 전주로 가는 지름길은 남원 산동 목동에서 고개를 넘어 보절을 통과해야 하는데 보절로 접어들면 일단 산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어서 이곳이야말로 쳐들어오는 왜구를 맞아 싸우기에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요새지역이다. 이성계는 이미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고 장수에서부터 일부 군사를 이곳으로 보내 함미산성 을 쌓고 진지를 구축하는 등 모든 준비를 해놓은 상태여서 이제는 전 주력 부 가 선발 와 합류해 왜구를 소탕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때 쌓았던 합미성의 흔적이 지명까지 남아 있고 진을 쳤던 터도 진기리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진기리는 본 래 진기리陣基里로 불 던 것이었는데 일제강점기 슬며시 진기리眞基里로 바꾸어 버 렸다. 그러니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바꾼 이른바 창씨개명만을 욕할 게 아니지 않은 가. 아니라 다를까 산서고개를 넘어 부랴부랴 보절 진기리에 도착하자 마침 왜구들 이 횃불을 밝힌 채 산동의 목동고개를 삼삼오오 떼를 지어 넘어오는 것이 포착되었 다. 이미 예견된 일이라도 자신의 판단이 맞아 떨어졌을 때에 느끼는 희열이란 마 치 수도자가 많은 고생 끝에 어느 날 문득 진리를 깨달았을 때에 얻는 법열과도 다를 바 없으리라. 더욱이 다른 길을 타고 산동의 목동고개 너머까지 귀신도 모르 게 우리 군사를 보내 잠자코 숨어 있다가 왜구들이 다 넘어 왔다 싶으면 나팔을 불라고 단단히 일러둔 일까지 있었다는 사실까지를 포함시켜 보면 당시 이성계가 느꼈던 기쁨이 어느 정도 을 것이라는 점은 상상되는 바 크다. 아무것도 모른 채 지껄이며 점점 왜구들이 앞으로 다가오자 난데없이 이성계는 큰 소리로 명령하기 를 “횃불을 밝히라.”고 소리쳤고 횃불잡이 군사들은 명령 로 미리 준비했던 횃불 을 일제히 밝히니 당황한 왜구들은 기겁하여 반사적으로 오던 길로 너나없이 몸을 돌려 헐레벌떡 줄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왜구들이 허겁지겁 달아나다
 
이와 같이 왜구들이 작살 맞은 뱀이 달아나듯 전후좌우 살필 틈도 없이 횃불을 든 채 한참 달아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저 고갯마루에서 뛰--하는 소라나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정신없이 달아나는 왜구들인지라 어느 곳에서 나는 소리인지도 모르 고 허겁지겁 우왕좌왕하며 달아나는 꼴이 실로 가히 볼 만한 눈요깃거리 다. 마치 독 안에 든 쥐가 힘써 빠져나갈 구멍을 애써 찾는 것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진풍경이 횃불 아래서 연출되는 동안 부분의 왜구들은 맞아 죽었고 구사일생으 로 살아남은 왜구는 겨우 몇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여기서 살아 돌아간 왜구들은 횃불에 비친 우리 군사들의 진지를 보고 그 로 아지발도에게 알려 끝내 왜구의 전주 침공 루트를 포기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우리 군 사들은 사생결단하고 달아나는 왜구를 쫓다가 지녔던 나팔을 잃게 되는데 날이 밝 아서야 다시 찾게 됐다. 이런 일로 인해 산동의 목동에서 보절의 진기리로 넘어오 는 고개 이름을 잃었던 나팔을 다시 찾은 곳이라는 뜻에서 지금까지 ‘구라치’라 불 러오고 있다.
 
 
帝王峰에서의 天祭를 지내다
 
전주 침공을 위해 구라치를 넘어오던 왜의 척후를 한밤중부터 새벽까지 진기리 에서 박살낸 이성계는 몇 명 살아남지 않은 적의 줄행랑을 먼발치로 바라보며 회심 의 미소를 짓고 곧장 발길을 남원으로 옮겼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번 전투를 위해 개경으로부터 천 리를 행군해 오는 동안 왜 구에게 당한 우리 백성의 시체가 가는 곳마다 즐비하 던 그 참혹스러운 광경을 쉽사리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원에 도착한 이성계는 일단 우리 군사의 환 을 받고난 뒤에 그동안 왜구와 싸웠던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놓고 장차 왜구 소탕을 위한 작전에 들어가 의견을 청취하 는데 그들 부분이 왜구들 은 운봉황산의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진을 치고 있기로 공격에 어려움이 많으니 다시 남원으로 진출하기를 기다렸다가 치는 것이 옳다고 입을 모았다. 일찍이 사근 내 전투에서 크게 패한 장수들은 잔뜩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의견들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이성계는 호통치듯 말하기를 “왜구 토벌을 목적으로 천릿길을 달려온 군사 가 왜구를 찾아 공격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거늘 왜구를 보고서도 공격하지 않는다 면 어찌 옳은 일인가? 여러 장수들은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여 한 치의 착오 없이 작전에 임할 수 있도록 하시오. 내일 아침 우리는 여원 치를 넘어 운봉으로 진군하겠소.”라고 하였다.
 
(중 략)
 
 
李成桂의 黃山大捷은 天命으로 여기다
 
남원은 예부터 오소경五小京의 하나로 군사 전략상 중요한 요새지이다. 때문에 만약 이번 전투에서 남원이 아지발도阿只拔都의 손아귀에 들어갔더라면 고려의 사 직은 물론이요 저처럼 환호하는 이곳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 전투는 이성계로서도 승패를 쉽사리 예 측할 수 없어 때로는 모든 것을 천명에 맡기고 행여나 왜구가 연거푸 실수라도 저질러 주기를 바란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승리를 이룰 것이라는 기 를 저버리지 않고 그 같은 기 를 신념으로 굳혀가며 차분히 전투에 임해온 결과 급기야 일당백의 성과를 이루어 황산대첩이라는 크나큰 승리를 얻을 수 있었 던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첫째 비몽사몽간에 여원치에서 나타난 길 할미의 지시가 그대로 적중한 것과 둘 째 그에 앞서서 이미 개성을 떠나 남하해 오는 도중 장단에 이르 을 때 낮인데 도 흰 무지개가 나타난 길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인간의 길흉이나 나라의 흥망성쇠도 모두 이미 하늘이 정한 일이라는 것이다. 첩 을 거둔 후 이성계가 취한 태도에서도 그러한 이성계의 믿음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전투에서의 공과도 묻지 않고 다만 조정의 지분으로 맡겨 마음 을 비울 로 비워버린 것은 이번의 승리만큼은 틀림없이 자신의 노력보다는 그런 노력을 가능케 한 하늘의 뜻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 하늘 요천수 맑은 물을 바라보며 개선해 들어오는 자신을 열광적으로 환영해주는 남원 백성들의 환호성을 듣고 한껏 기쁜 것도 하늘의 뜻이며 기린산 기슭에 자리잡은 만복사를 바라보며 치솟은 당간지주, 장엄한 가람, 그리고 그 사이를 한가 롭게 왕래하는 스님들의 모습을 보며 이제 더 이상 저 같은 불교로는 호국을 기 할 수 없다는 생각들이 한심스런 생각을 넘어 격한 분노심마저 치솟는 까닭도 또한 하늘의 뜻이 아닌가 싶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불현듯 지난날 무학대사와의 만남이 떠올랐다. 이성계는 열광적인 남원 백성들의 환호성을 뒤로하고 이제 개경 으로 돌아가야 할 판인데도 그길로 무학대사를 만났던 팔공산 도선암을 찾았다.
 
 
무학대사 찾아 道詵庵으로 가다
 
개선장군 이성계의 행렬은 여덟 장수와 네 종사를 비롯한 수많은 군사들 그리고 황산대첩을 전후하여 그가 탔던 여덟 필의 명마들이 뒤를 따랐다. 붉고 푸른 각종 깃발을 휘날리며 승리의 기쁨을 안고 풍악을 울리며 질서 정연하게 돌아가는 개선 길은 위엄이 넘쳤다. 높은 구름을 뚫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새매 같은 황운골, 목이 길며 갈기가 유난히 푸른 기린 같은 유린정, 바람을 앞지르듯 빠른 검정 가마 귀 같은 추풍오, 번개처럼 거침없이 달리는 붉은 멧돼지 같은 발전저, 그리고 모든 동물의 가장 잘생긴 부분을 모아 놓아 자색 용 같은 용 등자가 앞서고 그 뒤에 목과 네 다리에 하얀 서릿발을 띤 백마 응상백을 탄 이성계의 당당한 위풍 게다가 수천 수백의 군사들이 풍악에 맞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룬 장사지에 높은 산과 깊은 물을 가르며 지나는 모양은 가히 일 장관이었다. 우리의 자랑스런 국 토임과 동시에 또한 말없이 우리 백성을 돌보고 우리네 목숨을 묵묵히 지켜준 산과 들은 더 없는 명장이며 정명이 아닐진 저 높은 지리산이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갔 을지도 모를 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이성계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들을 기지 로 헤치며 왜구를 섬멸한 그곳들을 바라보며 장엄한 개선행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천寧川을 현계玄溪로 지명地名을 바꾸다
 
이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팔공산 도선암을 향해 가면서 이성계의 개선군은 마침 남원과 임실의 경계를 두고 흐르는 천(寧川 : 임실군 지사면 계산리앞)을 건너게 되었다. 행군의 맨 앞에서 그동안의 감회에 젖어 있던 이성계는 한 장수에게 그 천의 이름을 물었다. 장수는 이곳이 천寧川이라고 답을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이성계는 이름과는 달리 그 규모가 작은 냇물이니 川자를 溪자로 고쳐 ‘가무내’ 즉 현계玄溪라 부르도록 했다. 임실군 지사면의 현계는 그래서 그때 고쳐진 이름이 지 금까지도 그 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하룻밤 묵었던 관기리館基里
 
이성계의 개선군이 가무내를 건널 무렵엔 해는 서산으로 기울어 어두워져 갔으나 도선암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더구나 앞에는 큰 고개가 가로막혀 그날은 할 수 없이 그곳에서 머물며 하루의 노독을 풀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 다. 그래서 전, 후 좌, 우를 살펴보니 오직 첩첩산중 고개 밑에 제법 큰 마을이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성계 군은 그곳을 찾아 일단 하루의 노독을 풀기로 했다. 이성계는 또한 행군으로 잔뜩 지친 말에게도 준비했던 꼴을 먹이도록 명령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가 특히 말에 한 신경을 썼던 것은 전투와 행군에서 말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전에 무학대사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때에 사람이 귀하고 말은 사람보다는 천하기로 마구간 에 불이 났다는 전갈을 듣고 사람의 안부만을 물었다던 공자의 옛일은 다만 인간을 소홀이 여기던 그 시절에 인간 사랑의 긍지를 심어주기 위한 가르침이었다.’는 구 절이 그것이다. 그 한마디를 음미하며 사람의 중요성을 새삼 깊이 느낀 이성계는 그집에서 하루의 노독을 말끔히 풀 수가 있었다. 이처럼 무학대사와 만났던 지난날 의 팔공산 도선암을 찾기 하루 전 단잠을 잤던 마을을 이후로 館基(지사면 관기리) 라고 불 다. 이 이름은 지금까지도 그 로 고스란히 전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은 자못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밝힐 일은 왜 寧川을 굳이 玄溪라고 고쳐 불 던가 하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곧 溪는 川을 이루는 작은 흐름이라. 적을 물리 치는 데 소용되는 요새지로서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만약 가무내를 천 이라고 그 로 부르면 뒷날 다만 지명만을 믿고 이를 요새로 여긴 나머지 자칫 낭패가 뒤따를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무학대사 그리며 아침에 넘은 아침재
 
산골마을 관기리에서 하룻밤을 묵은 이성계는 아침밥을 일찍 먹고 군사들을 독려해 팔공산 도선암을 찾아 길 떠날 채비를 서둘 다. 어젯밤의 편안한 휴식으로 장병들의 피로와 노독은 거의 풀린 듯싶었고 더욱 반가운 일은 원수인 자신을 하 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져 장졸 간에 지켜야할 예의 이상의 그 어떤 깊은 신뢰를 퍼부어 주는 듯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자신이 휩싸여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 다. 이성계는 이러한 안정된 분위기가 느껴지자 이 시점에서 자신이 팔공산 도선암 을 애써 찾는 이유를 여러 군사들에게 장광설로 자세한 설명까지 하지 않더라도 강 귀띔은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일었다. 그러나 이를 즉시 말하지 않고 망설이는 참에 마침 길을 안내하던 비장이 “합하, 오늘의 행군은 마땅 히 저 고개를 넘어 만마관을 거쳐 전라감 으로 입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 고 묻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이성계는 “아니다. 내 개선의 광을 안고 여기까 지 온 이상 그냥 지나쳐서는 아니 될 곳이 있으니 그곳이 곧 팔공산 도선암道詵庵이다. 여기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선암 팔공산으로 가자.”라고 답했다. 군사들은 이 말에 의아해 하면서도 도원수의 명령이라 그 로 따를 수밖에 없어 지체 없이 불각지차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관기리 마을 뒤에 있는 재를 넘어 팔공산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따라서 도선암으로 향하여 넘어가는 고개 이름을 이성계가 아침에 넘어서 아침재(조치朝峙)라고 불러 지금까지 이름이 변하지 않고 있다.
 
 
안개 속에 길 찾아 헤맨 왕방리枉訪里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팔공산 도선암은 신라 말에 도선道詵에 의하여 창건된 고찰이기는 하나 첩첩산중에 들어앉은 작은 암자여서 수행하는 스님도 이름을 피 해 혼자서 독불공을 하거나 은 한 기도처로 삼아오던 터 기에 당시로써는 쉽사 리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장병 중 누구를 앞세워도 쉽게 찾을 수 없을 뿐더러 또 섣불리 아무 문 도 모르는 낯모를 백성을 앞세워 찾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 때문에 이성계는 다 만 팔공산 도선암을 팔공산에 있으리라는 가능성만으로 도선암을 찾을 수밖에 없 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아침재를 넘어서자 마침 안개가 잔뜩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성계 일행은 이처럼 짙은 안개에 묻혀 자취 를 쉽사리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 도선암을 찾느라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계는 자비로운 무학대사의 얼굴을 그리며 장사진을 이끌고 그저 전 에 본 듯한 계곡 길만을 따라 올랐다. 그때 이성계의 앞에 어슴푸레 무엇이 보이는 듯했다. 그는 안개를 헤치며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뿔사! 그것은 바로 자신이 애써 찾던 도선암이 아니고 무학대사의 모습이었다.
 
순간 기이한 생각이 든 이성계가 안개를 조금 더 젖히고 앞을 자세히 주시해 보니 그것은 무학대사의 모습이 아니고 낯익은 군사들의 모습이었다. 잠시 후 안개가 제법 걷히자 이런 순간적인 일들이 틀림없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성계는 그때서야 자신이 여태껏 안개 속에서 무학대사만을 그리며 헤매 다는 사실을 깨닫고 짙은 안개 속에서 가늠만으로 도선암을 찾으려한 자신의 어리석음 을 부끄럽게 여기고 마음속으로 지재차산중只在此山中 운심불지처雲心不知處를 여러 번 반복하며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팔공산 도선암을 찾다가 산만 한 바퀴 돈 채 한동안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그곳을 그르칠 枉에 찾을 訪자를 붙여 왕방(枉訪 : 지금의 왕방리)라 지금도 불려지고 있다. 최근에는 이곳에 오봉제가 축조되어 마을 일부가 물속에 잠기고 산 위쪽으로 옮겨 일부가 남아 작고 평화로운 마을을 이루고 있다.
 
 
고생 끝에 수천리數千里 찾아 지명 얻어
 
이성계는 안개 속에서 헤매 던 왕방리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실 묻지 않아도 가히 알 수 있다는 말은 오직 탁 트인 길을 불을 보듯 훤하게 볼 수 있는 사람, 즉 도를 한 사람만이 가까스로 조심스럽게 내놓을 말이라는 점을 익히 깨달았다. 그는 이런 실수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심심산중에서 다시 기억을 더듬어 기어 이 도선암을 다시 찾아 나서게 되었고 문을 모르는 휘하 장졸들은 그저 원수의 뜻이라 어쩔 수 없이 그 로 따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휘하의 군졸들이 못하 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팔공산 도선암은 고려의 태조와도 접한 관계가 있었 을 뿐 아니라 팔공산이란 이름은 이미 도참을 제 로 공부하여 알 만한 사람에게는 다소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만 원수가 이처럼 애써 찾는 정확한 의 중이 어디에 있는지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장졸들은 섣불리 이를 알아차린 듯한 태도를 취할 수도 없었던지라 너나없이 그저 뒤만 따를 뿐이었다. 계절은 이미 가 을로 접어들었는데 땅은 아직도 여름 기운이 가시지 않아 일어나는 안개는 밤부터 서서히 일어났다가 새벽까지 짙게 깔려 차츰 해가 중천으로 오르면 어김없이 걷혀 지는 법이다. 때에 반나절이 지나 태양이 은빛을 발하는 시점에서 그 빛을 타고 다시 도선암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성계의 일행들은 그날 오 후 새참때쯤 도선암 입구에 이르 다. 비로소 이성계는 약간의 피로를 느끼며 부하 장수를 향해 “황산에서 여기까지가 몇 리나 될꼬?” 하고 물었다. 그러자 어느 장수 하나가 엉겁결에 “수천리數千里나 되는 듯하옵니다.”라고 답을 했다. 수천리는 이 때부터 불러왔는데 오늘날에는 수철리水鐵里)고 적고 있으니 아마 멀다는 뜻을 피하 기 위함이 아닌가 싶어 이해는 되나 그래도 애당초로 돌아가 역사 따라 지명 따라 그 로 적는 것이 무방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무학대사와 인연맺은 곳 도선암
 
짙은 안개 속에서의 방황 끝에 애써서 찾은 팔공산 도선암의 입구 수천리에서 굳이 또 깊은 계곡을 따라 첩첩산중의 암자를 찾는 까닭은 어디에 있었던가.
 
첫째 팔공산은 해동천지 여러 산중에서 12 명산 중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장안산 줄기로서 장수와 임실을 경계짓고 있는 호남정맥의 웅산임과 동시에 예로부터 삼한천지를 번갈아 다스린 새 왕조의 창업주에게 거듭하여 여덟 번이나 왕기를 내 려줄 천하의 명산이라 일러온 산으로 실제 고려 태조도 도선의 인도로 이곳을 찾아 목욕재계하고 왕기를 얻어 고려 왕조를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이 산 중턱에 자리한 아담한 도선암은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도참의 가인 도선이 창건한 고찰로 이미 이성계 자신이 젊었을 적에 이 암자에서 이승 무학대사를 만나 상서로운 꿈에 하여 시원스런 해몽을 얻고 오백 일 치성을 드린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내용은 조선 초 태조 3년(1394)에 쓰여진 성수산 『상이암 사적기』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 내용의 략을 중심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선암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중국으로 건너가 도참풍수의 가인 일행선사 밑에서 공 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스승으로부터 ‘불교가 장차 동해海東에서 성하리라.’는 예 언과 함께 ‘7년 뒤에 열어보고 곧 비 리에 王씨 에 이를 전해주어라.’라는 말씀 을 듣고 돌아왔다. 그 후 스승과의 약속 로 도선국사는 송도에 사는 금성태수 융 隆을 찾아 이 참서를 전하며 그에게 당부하기를 “명년에 반듯이 귀한 옥동자를 얻 을 것이니 그 아들이 자라면 이 글을 전수하라.”하였다. 도선국사의 말 로 왕륭은 이듬해에 아들을 얻었는데 이가 곧 뒷날 고려태조대왕건이었다. 왕건이 청년이 된 어느 날 임실 팔공산 봉우리에 오른 도선은 왕건에게 말하기를 “아름답도다. 이 산이여 주봉이 빼어나니 천자가 가히 만조백관의 조화를 받는 형상이요, 어린 봉우 리가 좌우로 아름답게 뻗혔으니 여러 신하가 머리를 숙이고 하례하는 모습이로다.” 하며 크게 칭찬하고 또 “산 이름이 팔공이라 여덟 성인이 차차 나타날 것이며 이 산이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이 산이 망하면 나라도 또한 망하리라. 이제 왕공은 여덟 성인의 비롯이니 이 산에 의지하여 정성껏 기도를 올리면 장차 큰일을 이룰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이후 도선국사는 왕건을 위해 암자를 짓고 왕건은 도선국 사의 지시 로 이 산에 의지하여 백일기도를 정성껏 올렸으나 아무런 증험이 없자 다시 3일 동안 치성을 정성껏 올린 뒤에 암자 앞의 못에 들어가 목욕을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동자가 못가에 서서 목욕하는 왕건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 보고 있는지라. 왕건이 그 동자를 향해 “동자는 관절 누구인데 이 같은 첩첩산중 에 들어 하필 목욕하는 나를 그토록 물끄러미 바라보는가?”하고 예사롭게 물었다. 그러자 그 동자가 하는 말이 “제성을 굳이 말하자면 부처인데 부처는 본래 성은 없는 것이며 살기는 아무도 모르는 저 높은 곳에 삽니다.”라고 하더니 문득 층암절 벽 위로 올라가 노래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하늘이 한 땅을 지었는데 형상도 없고 모습도 없도다. 한 땅을 몸에 지니고 태어났으니 아무리 지우고자 할지라도 지워지지 않으리로다. 천조일토무형무체 토도신욕불세조天造一土無形無體 土塗身欲不洗涤” 노래를 마친 뒤에 그 동자는 문득 사라져 버렸고 그 같은 노랫소리를 들은 왕건 은 가사 중에 ‘土’라 하는 말이 곧 임금 王자가 쓰여져 있다는 사실을 찬양한 내용이 라 짐작하고 크게 기뻐하며 못가에 있는 이 사실을 남기기 위해 환희담歡喜潭이라는 세 글자를 새겨두었다. 임실군 성수면 성수산 골짜기 상이암 바로 아래 계곡 조그 마한 바위에 새겨진 이 세 글자는 수백 년 동안 풍마우세風磨雨洗를 거친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 오늘날에도 그 로 알아볼 수 있으니 이 또한 매우 흥미롭고도 자랑스 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 태조 이성계도 젊었을 적에 팔공산 근처 어느 외딴집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어느 날 밤 기이한 꿈을 꾸고 부근에 해몽을 잘하기로 소문난 노파를 찾아가 꿈 해몽을 부탁했다. 그러자 노파는 꿈 해몽 신 “여기서 멀지 아니한 산 밑에 도사님이 계시니 친히 찾아가서 물어 보시오.”하며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이성계 는 노파의 지시 로 산길을 헤치고 암자를 찾아가니 스님이 있기로 정중히 예를 올리고 꿈 이야기를 한 후 해몽을 부탁하니 다음과 같이 꿈 해몽을 하여 주었다.
 
첫째 일천 집의 닭이 일시에 운 것은 군계일학群鷄一鶴으로 닭이 천이면 봉이 하나라고 여러 사람들 중에 고귀하다는 뜻이요.
둘째 다듬잇소리가 난 것은 많은 사람이 장차 호응해 주리라는 뜻이요.
셋째 꽃이 떨어진 것은 반듯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요.
넷째 거울이 깨지고 몸이 부서진 것은 팔도에 이름을 떨치리라는 뜻이요.
다섯째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진 것은 왕이 되리라는 뜻이요.
여섯째 솥과 관을 머리에 이고 바다로 들어간 것은 장차 용상에 오른다는 뜻이다. 라고 풀더니 한참 동안 물끄러미 이성계를 쳐다본 뒤에 말을 이어 당부하기를 “그러나 이는 천기를 얻은 꿈이라 두고두고 삼가하고 삼가할 것이나 이제 지기를 얻지 않으면 안 될 것인즉 공께서는 이 산을 의지하여 정성껏 치성을 올리고 말없 이 때를 기다리시지요.”라고 하였다.
 
이처럼 기이한 이성계의 꿈을 거침없이 풀이해준 스님은 바로 뒷날 태조를 도와 조선 창업에 많은 공을 세운 바로 무학대사 다. 이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때는 바로 고려 공민왕 초기로 무학이 요승 신돈의 화를 피해 일시 은둔해 있었던 시기였다.
 
 
왕건이 목욕하였던 곳에서 이성계도 목욕하였다
 
이런 연유로 청년 이성계는 급기야 팔공산 도선암에 들어 환희담에서 목욕재계하고 고려 태조와 똑같이 오백일 기도를 정성껏 올렸던 일이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무학대사의 제자인 각여선사에게 다시 자신을 위한 오백일 치성을 부탁하 던 일 이 있었다. 그러니 왜구의 아지발도 군을 물리치고 더욱 의기양양해진 이성계가 휘하 병사를 거느리고 개선하는 길에 설레는 마음을 달래며 그리운 무학대사를 찾 듯 애써 이곳을 찾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고려와 조선 태조가 머물렀던 역사의 현장
 
천상天上서 울려 퍼진 성수만세聖壽萬歲 삼창 새나라 태동을 암시하였으며 산 맑고 물 맑고 하늘도 맑은 환희담 주변에서 성수만세 외침소리 들렸다 하여 팔공산을 성수산으로 지명을 고쳐 불 다고 한다.
 
도선암이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이성계는 일천一千 집의 닭이 일시에 운 것은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상像이요 장안長安 만호萬戶가 일제히 두드리는 다듬잇소리는 산명곡응山鳴谷應의 세勢이며, 꽃이 우수수 떨어진 것은 결과자연結果自然의 운運이요, 거울이 깨진 것은 명진사해名振四海의 성聲이라 한다.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진 것은 국조창업國祖創業의 서瑞를 뜻하며, 또한 솥과 관을 머리에 이고 바다로 들어간 것은 용비어천龍飛御天의 명이라고 해몽해준 무학대사의 자비스러운 모습을 떠올렸다. 그 꿈이 익어가는 오늘 천하 원수가 되어 천군만마를 이끌고 팔공산 도선암을 다시 찾는 이성계의 감회는 그 어느 때 보다 상쾌하고도 가뿐했다. “산을 어디에 감출 것이오? 산은 산속에 감춰둘 수밖에 없고 먼 항해를 앞둔 배는 다만 깊숙한 골짜기에 감춰 두어야 하오.”라고 일러준 뒤 “하늘이 장차 좋은 때를 줄 것이나 만사는 오직 유비무환이오. 장차 삼한의 너른 강토를 새롭게 추슬러 갈 강한 힘을 기르고 얻자면 이만 한 골짜기도 없소.”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넌지시 자신 의 얼굴을 살펴보던 무학대사의 얼굴, 그 얼굴이 새삼 더욱 그리워지는 까닭은 다 만 도선암이 가까워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山·水·氣가 맑은 三淸洞
 
태조太祖 이래로 산고수려일고려山高水麗日高麗라 했지 않는가. 산이 높으면 반듯이 물이 맑을 수밖에 없고 골이 깊으면 물의 흐름이 길 수밖에 없기로 팔공산八公山을 두고 동쪽은 산고수장山高水長의 장수長水요, 서쪽은 운심수청雲深水淸의 운수雲水가 아닌가. 산은 언제나 땅을 사방으로 가르지만 물은 항상 사방의 것을 하나로 모아 끊임없이 흐른다. 이는 곧 저절로 흐르고 가르는 자연의 이치이자 또한 우주 안의 무한한 기운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산은 솟고 물은 유유히 흐르는 것이다.
 
이 무한한 자연의 호연지기를 내 몸속에 축적하여 솟을 자리에서는 한없이 솟고 자취 없이 흘러야 할 자리에서는 유유히 흐르는 힘을 내어 내 몸속에 함축해 두자 는 것이 지난날의 내 꿈이 아니던가.
 
이성계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불현듯 지난날 자신이 실제 꾸었던 꿈들이 되살 아나면서 새로운 결단이 필요하다는 다짐이 그의 가슴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무 리 결과자연의 운을 타고났고 용비어천의 命을 받을 군계일학의 상을 지녔다 하더 라도 기운이 없으면 그것은 허상일 뿐이요, 명진사해名振四海의 성聲과 산명곡응山鳴谷應의 세勢를 지녔을지라도 다시 하늘로부터 이미 얻어진 성세를 곱게 비춰주는 빛이 없다면 안 될 것이다. 이런 생각과 함께 그의 뇌리에는 지난날 오백일 치성을 마치고 환희담에서 목욕하던 그때의 기쁨도 기쁨이지만 왠지 온몸에 충만한 상쾌 함에 이끌려 신선이 된 기분으로 “산도 맑고 물도 맑고 하늘도 맑구나.”하고 외쳤던 그 짧은 순간의 기억이 번개처럼 되살아났다.
 
天上의 소리 “성수만세聖壽萬歲” 이성계는 그때 강열하게 느꼈던 그 상쾌한 기분을 산청山淸·수청水淸·기청氣淸이라 하여 삼청三淸이라 했고 하늘 바라보기로 아늑한 못[歡喜潭] 주위를 신선이 내린 곳이라 하여 삼청동이라 명명하고 성큼 코앞에 다가 선 암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 옛날 그가 젊은 시절 무학을 만났던 때에 그 아늑한 터전에 안개가 말끔히 걷히고 오색구름이 롱한 빛을 발하며 감돌았던 기 억이 역력히 되살아났다. 그런데 이성계가 이런 기억을 되살리며 환희담 앞에 이르 자 이날도 역시 안개 걷힌 말끔한 하늘 아래 지난날 자신이 치성을 마치고 정성껏 쌓았던 돌무더기가 이름 모를 들꽃에 쌓인 채 살며시 얼굴을 내 고 있는 것이 보 다. 순간 그는 하늘을 올려다본 후 땅을 굽어보았다. 그때 다. 유난히도 맑은 가을 하늘에 오색구름이 팔공산 전체를 덮더니 그 가운데서 한 줄기 롱한 빛이 뻗히는 게 아닌가. 그것을 본 이성계는 “하늘이 무슨 말을 하랴. 그러나 사시四時는 어김없이 순환하고 만물은 때를 따라 고성쇄를 반복하나니.”라며 무한한 기쁨을 속으로 안고 한걸음에 도선암에 올랐다. 그러자 난데없이 오색구름이 갈라지면서 더없이 맑은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아 성수만세! 아 성수만세! 명천지 해동 땅에 높고 귀한 성수만세!”
 
역력히 귓가에 울려오는 이 소리는 그가 젊었던 시절 가냘프게 들었던 바로 그 소리 다. 그 울림은 마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광풍에 흔들려 쨍그 쨍그 하며 울리는 듯 심히 요란하고도 역력하였다. 순간 그는 “아 저빛! 이른 아침도 아 닌데 꼭두새벽에 어둠을 가르는 저 밝은 새벽빛!”하며 문득 ‘조명早明’이라는 두 글 자를 떠올리는데 언뜻 ‘산고수려일고려山高水麗日高麗에 장차 새벽 빛을 비치리라.’는 새로운 다짐이 가슴에 불현듯 박혀왔다. 이때의 그 자세한 전말前末이 『성수산상이 암사적기聖壽山上耳庵事跡記』에 적혀 있는데 여기에 그 일단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승新羅僧 도선道詵이 고려 태조대왕건과 함께 운수의 팔공산에 이르러 업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를 올리고 못에 들어가 목욕을 하 는데 때에 부처님의 험을 얻어 기쁜 마음으로 이 못을 환희담歡喜潭이라 하여 돌에 새겼고 암자의 이름도 도 선암이라 하여 도선이 창건한 것이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 태조 고황제께서 도 기이한 꿈을 꾸고 이 암자에 있는 승 무학을 찾아서 해몽하고 그의 인도로 이 산에서 기도하고 또 못에서 목욕하 는데 홀연히 이상한 길조를 얻어 삼청동三淸洞 이라는 각자를 하였다. 또 공중에서 성수만세를 세 번이나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 후 태조가 보위에 오르자 팔공산을 성수산이라 하고 도선암을 상이암이라 불렀다. 그 뜻은 성수만세라는 소리가 진실로 상의 귀에까지 들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산에는 고려 태조와 조선 태조가 머물 던 곳인즉 일초, 일목도 차마 벨 수 없으며 하물며 돌 위에 세긴 각자가 일월과 더불어 다투며 휘황하고 또 산 이름과 암자 이름으로 그 사적이 소상히 남아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으니 지금도 두 왕이 계신 듯하다. 그러니 어찌 숙연한 공경심이 일어나지 않으리오.
 
 
이성계 천명 계시받은 마이산 찾아
 
산도 맑고 물도 맑고 기도 맑은 성수산 도선암에서 젊은 날에 이미 기도의 험 을 얻어 이곳에 삼청동이라는 세 글자를 써주어 뒷사람들은 바른 돌에 어필을 새기 고 상이암(도선암:道詵庵)에 어필각을 세워 역사의 현장을 그 로 보존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어필각에 한 역사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이를 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일제강점기 시 를 거치면서 일본인들에 의한 의도적 인 역사의 왜곡과 은폐가 첫 번째 원인일 것이며 두 번째는 식민사학자들의 몰상식 한 소치라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가다듬어 시 를 조금만 올라가 보면 고적 선양에 한 열정이 곧 자주 독립의 긍지라 여긴 한말에 있어서는 태조대왕의 사직에 한 애정이 단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이 같은 객관적 흔적은 바로 어필각을 감싸고 있는 바위에 새겨진 수많은 명인 달사들 의 방명이 이를 잘 증명해 준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제 상이암 골짜기를 살며시 빠져나와 개선 길을 따라가면서 그 역사의 현장을 하나하나 살펴봄으로써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삼청동의 환희담과 상이암, 그리고 자신이 지난날 열심히 기도를 올렸던 상이암 뒤의 기도터를 둘러본 이성계는 성수만세의 감응을 마음속 깊이 새긴 채 개선 길을 곧장 용출산(마이산 : 馬耳山)으로 향했다. 용출산은 그가 소년 시절 꿈에 신으로부 터 금척을 받았던 곳, 따라서 그는 그 꿈이 새 왕조 창업의 계시임을 굳게 믿어왔고 이제 그 꿈을 실현할 시점이 가까워 왔음을 분명히 느낌에 따라 서둘러 용출산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이성계의 개선군은 상이암 골짜기를 빠져나와 용출산이 있는 진안 쪽을 향해 힘찬 행군을 시작했다. 상이암에서 진안으로 가려면 반듯이 넘어야 할 고개가 있다. 이 고개는 임실과 진안을 경계짓는 곳으로 앞서 소개한 아침재보다는 훨씬 높은 고개이다. 개선군이 고갯마루에 다다랐을 무렵 이성계는 잠시 행군을 멈추게 한 후 옆에서 동행하는 포은 정몽주에게 “옛말에 산중수복의무로山重水復疑無路라더 니 호남에는 평야뿐 아니라 이같이 첩첩한 산도 있고 첩첩산중을 넘나드는 높은 고개도 있구려. 구름이 항상 터 잡고 있는 이 고개를 넘어 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또 무엇이 있겠소이까?”하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러자 포은 정몽주는 맞장구를 치듯 “그야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이라 하였으니 버들이 그늘지고 꽃마저 활 짝 핀 그곳에 한 마을이 있겠지요.”라는 말로 이성계가 건네준 은근한 정을 글귀로 되받았다. 그러나 언감생심 넌지시 건너는 포은의 안색은 심히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고 그러한 태도를 이성계는 놓치지 않았다. 일단 탯속 깊숙히 담겨져 있었던 뜻을 은연중 내뱉었던 포은은 뒤늦게 이를 후회했으나 한 번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담을 수 없으니 어색할 수밖에 없었고 더구나 그처럼 어색스러움을 상 방에 게 보이고 나니 약간은 자신의 경솔함에 부끄러움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 다. 이성계는 포은의 그러한 계면쩍은 감정을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정도로 지나 쳐 주었다. 이성계로서는 기세등등하게 자신을 따르는 천군만마가 장사진을 이룬 채 산골을 가득 메워 나아가고 있는데 성수만세의 메아리가 여전히 귓가에 가득하 고 이미 소년 시절에 받았던 금척이 역력히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는 한 포은의 말 한마디에 그리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이 그것을 덮게 해준 것이었다.
 
또한 이성계와 포은이 행군을 잠시 멈추고 이야기를 나눴던 임실과 진안 사이의 고개를 후에 사람들은 구름이 항상 터 잡고 있는 고개라는 이성계의 말을 본떠 운치垈雲峙라 불 는데 그 후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속칭 운이 재라고 도 불려지고 있다.
 
이성계가 운이재에서 포은과 이야기를 나눈 후 갈증을 참으며 행군을 시작했 을 때 그의 머리에는 불현듯 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고개가 제 아무리 높더라 도 이미 길이 나 있는 바에야 어찌 그 고개를 넘지 못하며 구름이 아무리 앞을 가렸을지라도 나가고자 할 바에야 어찌 나아가지 못할 것인가. 이제 구름을 젖히고 트인 길에 들었으니 앞길은 밝다. 그렇다면 내가 장차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다만 산수간山水間에 흩어져 있는 포은과 같은 훌륭한 인재들을 찾아내 천명天命을 이루 는 일이다.
 
이상과 같이 『전주일보』에 연재된 「역사 따라 지명 따라」 제하의 오초 황안웅 선생의 글 중에서 팔공산 상이암에 관련된 부분을 발췌하여 정리하였다.
 
그 중에 잊혀진 역사를 되새기며 잃어버린 지명을 재발견하게 된 것이다.
 
역사란 세월 따라 흐르고 역사의 흐름 따라 새로운 문물과 제도가 만들어지는 가운데 지명도 덧붙혀지는 것이 어김없는 역사적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우선 역사를 이끄는 주인공이 있기 마련이고 그 주인공이 이룬 일이 있으며 마치 땅을 밟고 걸어가면 반듯이 발자국이 생기듯 역사적 사건이 지나가면 으레 그 역사 를 말해주는 그 터에 그에 걸맞는 이름이 지명으로 남는 법이다. 이곳 상이암에 관련된 역사의 흔적들은 그 어느 지역보다 많이 남아 전해지고 있으나 아직 그런 역사적 사실들을 조사하고 연구해 본 적도 없다는 사실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 일례로 태조 이성계가 이곳 도선암에서 성수만세를 세 번이나 외치는 소리를 들었기로 삼청동三淸洞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내렸다 하며 따라서 뒷사람들은 이 글씨를 바른 돌에 새기고 어필御筆 비를 보존하여 오다가 상이암 경내에 어필각을 세워 역사의 현장을 그 로 보존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이 어필을 몇 년 전부터 문화재로 지정하도록 신청한 바 있으나 당시 문 화재 위원들은 정확한 검증도 없이 어필이 아니라고 부결시켜 버렸다 하여 아쉬움 으로만 남아 있다. 삼청동三淸洞이란 글씨가 어필이 아니라면 삼청동 글씨를 새기고 어필각을 세운 주체가 전주이씨 종친들이란 사실과 민중들이 그동안 어필이라고 불러 전해오고 있었다면 당시 조선시대에 조정에서 내버려 두었겠는가? 하는 의문 이 들며 뒤집어서 당시 임금과 관련된 용어를 서민들이 마음 로 사용했을 때는 조정에서 그냥 두지 않았던 시 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동안 삼청동 비는 태조 이성계의 친필로 전해오고 있었으니 이번 조사를 통해 황산대첩 진군로進軍路와 회군로回軍路 등을 통해 상이암 사적기 등 많은 역사적 자료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제라도 삼청동 어필은 심도 있게 연구하여 문화 재로 지정되도록 추진하여 임실지역의 자존심을 세워야 할 것이다.
 
 
 

2. 2. 정재 이석용 의병장과 창의동맹단

정재 이석용 의병장의 출생과 성장
 
 
이석용李錫庸은 字가 경항敬恒이며 호가 정재靜齋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화산 봉선華山 鳳善이며 어머니는 조양임씨兆陽林氏이 다. 그는 1878년(고종 15년) 음력 11월 29일 지 금의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죽전마을에서 삼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다니 면서 치성을 드렸는데 어느 날 밤 폭우가 쏟아 지며 번갯불이 왼쪽 다리를 내리치는 꿈을 꾸 고 그를 잉태하였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날의 일진日辰이 갑술甲戌이었기 때문에 그의 아명兒名을 갑술甲戌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아 옛 충신열사忠臣烈士의 수절한 이야기를 들을 적에는 비분강개하였으며 때로는 현연泫然히 눈물을 흘리고 무언가 생각에 빠져 있기도 하였다. 또한 총명하여 10세 미만으로 문리文理에 통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17~18세에 이미 학문이 크게 진보되었다고 한다.
 
그해 그는 부안김씨에게 장가 드니 그의 부인은 겸재 관술謙齋 觀述의 딸이다. 그는 장인 겸재의 높은 학덕에 향을 받은 바가 컸다.
 
1895년(고종 32년) 8월 왜적들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다음 조선의 조정을 친일내각으로 구성하여 국권國權을 탈취하고자 혈안이 되어 자기의 세력을 부식扶植하는 데 전념하였다. 이를 지켜본 그는 비분悲憤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는 세정世情을 살피고 더 높은 학식을 넓혀 구국의 방책을 얻기 위해 당 에 석학碩學이자 志士로 이름 있는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심석 송병순心石 宋秉珣·입재 송근 수立齋 宋近洙·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간재 전우艮齋 田愚·운람 정봉현雲籃 鄭鳳鉉·최 계남崔溪南·허남려許南藜·애산 정재규艾山 鄭載圭·면우 곽종석勉宇 郭鍾錫·면암 최 익현勉庵 崔益鉉 등을 두루 찾아 학문을 논하고 또한 구국이념에 공감하였다.
 
이해 11월 왜적들이 지금까지 전통적 풍습으로 내려오던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 령斷髮令이 내려지자 그는 “하늘이 동방예의지국을 버리는구나!” 라 말하고 전고前古 에 듣지도 못한 8월 국모시해의 참사를 아울러 생각할 때 불공 천의 원수를 갚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1905년(광무 9년) 그의 나이 28세, 왜적은 고종황제를 위협하고 몇몇 친일 신親日大臣들을 앞잡이로 하여 소위 을사5조약乙巳五條約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국권은 이름뿐 일본의 보호감독 아래 들게 되어 실제적으로는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소식이 전국에 전해지자 당시의 우국지사憂國志士들은 서울 로 올라가 한문大漢門 앞 광장에 짚자리를 깔고 5조약의 체결을 무효화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도 이때 여기에 참석하여 다른 우국지사들과 뜻을 함께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곳에 모여 호소하는 우국지사들을 총칼로 무자비하게 해산시켰 다. 이때 일본의 그와 같은 행위를 보고 의분에 넘쳐 우국지사 가운데에는 비운悲運 에 처한 우리나라를 온 국민이 결속하여 회복할 것을 호소하며 자결自決한 사람도 있었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 의병義兵을 일으켜 일본과 싸 워 그들을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때 일본은 통감부 를 설치하여 침탈의 야욕을 더욱 노골화하고 있었다.
 
1906년(광무 10년) 그는 미국공사에 서한을 보내 왜적의 간계로 망국에 직면하고 있는 한국의 실정을 만국공회가 있을 때 호소하여 위기에서 구원해 주기를 요청한 바 있다. 그 서한의 한 목에 ‘천일天日은 위에 있고 신명神明은 곁에 있으며 만국공 법이 삼엄하게 밝은데 간악한 왜노倭奴가 어찌 감히 우리 5백 년의 당당한 예의지국 을 늑탈勒奪하겠는가?’하고 갈파喝破하였다.
 
그러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형편에 어떠한 묘책도 없었으니 오직 의병을 일으 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때마침 면암 최익현이 거의擧義하려고 정읍군 태 인면 종성리의 임병찬 처소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그해 3월 면암을 찾아 기의起義에 동참할 것을 약속하고 이에 일익이 되었다. 그런데 같은 해 윤 4월 20일 순창에서 패전하여 면암 등이 체포되고 의군이 해산되자 그는 장차 자력에 의한 의병활동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석용은 자신의 고향인 임실 지방을 본거지로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과 싸울 준비를 하였다. 이때 나이 29세의 청년이었다. 가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1년 동안은 거사 준비를 위하여 바쁘게 활동하였다. 그는 전주·임실·장수·진안·남원·순 창·곡성·거창·함양 등지를 두루 다니면서 부지런히 동지를 규합하였다. 한편 그는 당시의 정부를 비롯하여 일본 정부 앞으로 규탄문을 발송하고 전국의 동포에 게 민족의 주권을 되찾자는 격문·건의문·호소문 등을 발송하였다.
 
광무 11년(1907년) 일본과 친일 신들은 고종을 위협하여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주게 하였다. 마침내 순종이 왕위에 오르자 우리나라의 주권은 뿌리째 일본의 손아귀에 들게 되었고 순종은 허수아비와 같은 임금 자리만을 지켜야 했다. 즉 친 일적인 신들과 이토히로부미는 각본에 따라 이해 7월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왜 놈들로 하여금 조선 정부 요직의 고문을 맡게 하는 등 모든 정책결정에 관여하게 하였다. 이에 의분을 참지 못한 그는 의병거의를 서둘렀다.
 
 
기의起義를 결심하고 나서
 
이해 8월 26일 그는 아버지 앞에 다음과 같이 하직 인사를 고하였다.
 
“지금 일본오랑캐 놈들이 도성 안에 가득 차 있어 임금과 신하는 처소를 잃어버 린 지경에 이르 사오며 단군檀君, 기자箕子가 베푼 풍교風敎는 요원遙遠해지고 요순 堯舜의 도학道學은 땅에 떨어졌사오니 무릇 혈기 있는 사람이면 어찌 누구인들 역적 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을 생각이 없겠사옵니까? 다만 의大義를 만천하에 펼치고 자 하는 것이 원이오나 성공 여부는 예측할 바가 못 됩니다. 감히 충성도 해보지 못하고 또한 효도도 해보지 못하 사온데 부모님 슬하를 떠나게 되오니 가련하오 나 의大義로써 은혜를 저버림은 어찌 인정상 차마 할 바이겠습니까. 두어 해를 지나지 않아서 돌아와 뵙게 될 것이온 즉 어린아이들이나 돌보아 주시고 행여 조석 간에 너무 기다리심으로써 화기를 손상시키지 마시옵기를 원하옵니다.”
 
아버지는 그의 하직인사를 듣고 “나는 네가 본시 큰 뜻이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오늘에 어찌 억지로 말리겠느냐! ‘마땅히 모든 것을 조심해서 선 에게 욕이 되지 않게 할지니라.” 하였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기의起義에 한 허락과 격 려를 받았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모두 감격하였다.
 
 
의병들과 격중가激衆歌를 지어 불렀다
 
그는 부모 곁을 떠나 다음날 임실군 성수면聖壽面 상이암上耳庵 에서 이미 규합된 의병동지 간부들과 만나 깊숙한 숲 속으로 들어가 온종일 거사에 해 논의하였다. 그리고 모여 있던 의병들에게 “옛날부터 호걸들이 친척을 버리고 고향을 떠날 적에 는 개 다 장래의 달을 희망하 거니와 나로 말하면 한갓 선비일 따름이라 다만 의를 만천하에 펴 보자는 것이지 성공 여부를 따질 바가 아니라 생각합니다.”라 고 말한 뒤 다음과 같은 「격중가激衆歌」를 지어 의병들에게 부르게 하였다.
 
- 가을바람 소슬(秋風蕭瑟)하니
- 영웅(英雄)이 때를 만남(得意時)이라
 
- 장사(壯士)가 업실 손야(업을 쏘냐)?
- 구름갓치(같이) 모야(모여)든다
 
- 어화 우리 장사(壯士)들아
- 격중가(激衆歌)를 불러 보새(세)
 
- 한양성중(漢陽城中) 바래(라)보니
- 원수(寃讎) 놈이 왜(倭)놈이요
- 원수(寃讎) 놈이 간신(奸臣)이라
 
- 삼천 리(三千里) 우리 강산(江山)
- 오백 년(五百年) 우리 종사(宗祀) 엇지(어찌)할가(까)
 
- 아마도 의병(義兵)을 이러낵켜(일으켜)
- 왜(倭)놈을 쪼차(쫓아)내고
- 간신(奸臣)을 타살(打殺)하야(여)
 
- 우리 금상(今上: 임금) 봉안(奉安)하고
- 우리 백성 보전(百姓保全)하야(여)
- 삼각산(三角山)이 숫돌 되고
- 한강수(漢江水) 띠 되도록
 
- 질(즐)기고 놀아 보새(세)
- 우리 대한(大韓) 만만세(萬萬歲)
 
 
그가 지은 「격중가」는 의병들의 사기를 십분 드높일 수 있었다. 또한 전의도 고 무시킬 수 있었다. 다음날 야음을 틈타 총포와 철환을 삼봉에서 황사현으로 옮겼 다. 그러나 용담에 있는 총과 탄환을 미처 운반해오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그리하 여 그 틈을 이용하여 이튿날 28일 선 을 찾아 고별제를 지내고 제문祭文을 지어 거사할 큰 뜻을 선 先靈에게 삼가 告하였다. 거사의 전야 9월 1일 삼봉 부근의 종 친들이 모여 문중 노인들이 그에게 타이르기를 “예로부터 독자는 부모를 봉양하도 록 국법으로도 정하여왔거늘 하물며 그 는 삼 독자의 귀중한 몸으로 국난을 구 하러 죽음의 길을 가고자 하니 의를 세우는 것도 좋지만 몸을 보전하여 가문을 이어감이 어떠한가?”라 권하였으니 난세를 바로잡아 국권을 되찾고자 충의 심에 불탄 그는 이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자세를 고쳐 정중히 말하기를 “세도 에 아첨하여 만고의 국적國賊이 되는 것은 의기남아義氣男兒로서 취할 바 아니오니 이때 일어서지 않으면 언제 또 기회가 오겠습니까? 평생에 길러 온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모아 이 한 몸 국난國難에 던지고자 결심한 지 이미 오래이오니 부디 말리지 마시옵소서.”하니 이와 같은 그의 비장한 각오에 모 던 종친들은 더 이상 말을 못한 채 숙연할 뿐이었다. 9월 2일 그는 참모들을 불러 의거를 논의하고 의병 의 이름을 ‘호남의병창의동맹단湖南義兵倡義同盟團’이라 하였다. 그리고 모인 참모들에게 “옛날부터 兵을 일으키되 의로운 거사가 아니면 성사하지 못하고 꾀하는 사람들이 청렴하지 못하면 오히려 화를 입고 매사를 신중히 심사숙고하지 않으면 사를 그 르치기 쉬우니 그 동지들은 이것을 가슴에 깊이 새겨 잠시도 잊지 말기를 바란 다.”고 훈시하였다. 한편 그는 자신이 이끄는 의병단이 거의하기 전 가족들이 일본 에게 장차 박해당할 것을 우려하여 자신의 가족들을 분산시켰다. 그리고 가산家産 등도 모두 이웃 친척들에게 뜻 로 사용하도록 하고 농작물은 마을 장정들에게 맡 기었다.
 
가족과 가산을 정리한 그는 일단 9월 4일 운현(雲峴 : 지금의 운재)의 절정絶頂에 처음으로 진을 쳤다. 그날 밤 진안 석전리石田里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 는데 그 수가 20여 명에 달했다. 그리고 마을 노인들은 그를 보자 “이제야 의병다운 의병 을 볼 수 있겠구나.”하면서 그의 의병 모집에 적극 찬동하였다.
 
9월 5일 그는 의병들을 이끌고 백암리(白岩里 : 현 진안군 백운면 소재지)를 출발 홍도령(虹度嶺 : 장수군 산서면 백운리 홍적골)에 이르러 진을 가다듬은 뒤 격문檄文으로 의大義를 들어 효유曉諭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장수 배룡리排龍里로 들어갔 다. 당시 친일파인 일진회에 속해 있던 자들이 장수 향교의 토지를 몰래 팔아먹었 다는 풍문을 그곳에서 듣고 이른 새벽에 들어가 그들을 붙잡으려 하였으나 이미 낌새를 차리고 모두 남원으로 도망가고 없었다.
 
그는 이날 밤 진을 옮겨 6일 새벽 진안군 백운면 전리大田里에 이르러 아침식사 를 풍족하게 한 뒤 조양촌朝陽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선교사로 와 있던 미국인 들이 그의 의병들을 환 해 주었다. 그는 의병을 이끌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 서 의병을 모으는 한편 방榜을 붙여 민심을 안정되게 하였다. 10일 마령면 좌포리佐浦里에서 일찍 조반을 마치고 백지곡白芝谷에 진을 친 뒤 임실·관촌館村을 기습하였으나 이를 미리 탐지한 왜경들이 모조리 전주로 도망쳐서 허탕을 쳤다.
 
 
호남의병창의동맹단 결성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곳저곳으로 진을 옮겨가면서 의병활동을 진행하는 가운데 사방 열읍列邑에 격문을 띄우고 마침내 9월 12일을 기하여 마이산馬耳山에서 의병 거사 궐기 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그는 그동안 모집하 던 모든 의병들을 마이 산 남쪽 용암龍岩에 모이게 하고 나무를 벌채伐採하여 단壇을 쌓은 뒤 호남의병창의 동맹단湖南義兵倡義同盟團이라 크게 써서 깃발을 걸게 하였다. 이 제단을 중심으로 동 서남북에는 각각 기치旗幟를 세우게 하고 기폭旗幅에는 ‘정기가精氣歌, 단심가丹心歌는 문천상文天祥이 순절한 시시柴市와 정몽주鄭夢周가 절사絶死한 선죽교善竹橋와 함께 비 춰 충렬忠烈의 소거를 같이하네竹橋柴市烈同聲.’라고 써 꽂아놓게 하였다. 이 자리에 모인 의병들에게는 ‘의병창의義兵倡義’라 수건에 써 머리에 동여매게 하였다.
 
이때 모인 의병은 모두 5백여 명에 달하였으며 부근의 부모 형제와 장정들이 모 여 주위 산봉우리에서 파수를 보았으니 이날의 거사를 성원하기 위해 모여든 민중 들의 수까지 합하면 천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5백여 명의 의병을 정렬시켜 놓으 니 그 우 찬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왜병들 이 그 광경을 하룻동안 계속하여 먼발치로 지켜만 보고 있었다고 한다.
 
고천제告天祭가 끝나자 모든 의병들은 환호를 울리면서 그를 의병 장으로 추하였다. 의병 장에 추 된 그는 단상에 올라 먼저 엄숙하게 「동맹작사同盟酌辭」를 지어 낭독하였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굳게 맹세한 뒤 다시 의병들이 지켜야 할 약속인 의진 약속義陣 約束 14개 조항과 의령 십조義令 十條라는 또 하나의 군규軍規를 제시하였다. 한편 그는 동맹의 결의를 다시 한 번 굳건히 하고 거사의 명분을 천지 신명에게 밝히고자 서사문誓師文을 지어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 서사문은 마치 제갈공명이 중원을 쳐들어갈 때 지은 출사표와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사문을 장엄하게 낭독한 뒤 그는 8도에 격문檄文 을 보내 자신들의 의병거사를 널리 알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저지른 죄상罪狀 10조목10條目을 의병들에게 발표하였다.
 
이때 그의 의병 통솔 조직은 다음과 같다.
 
의병대장義兵大將 이석용李錫庸
선봉先鋒 박만화朴萬華·최덕일崔德逸·송판구宋判九
중군中軍 여주목呂注穆·김운서金雲瑞·김성학金成學
후군後軍 김사범金士範·윤명선尹明善·전성학全成鶴
참모參謀 전해산全海山·한사국韓士國·이광삼李光三
총지휘總指麾 박갑쇠朴甲釗·곽자의郭子儀·임종문林宗文
연락連絡 홍윤무洪尹武·박성무朴成武·윤병준尹秉俊
도로부장道路副將 김사원金士元·김공실金公實·김성율金成慄
보급補給 한규정韓圭井·박금동朴金東·박문국朴文局
운량運糧 오기열吳琪烈·조 국趙榮國·김학문金學文
기실記室 전해산全海山·한사국韓士國
 
의병 창의를 위한 고천제告天祭를 비롯한 모든 출동 준비행사 곧 궐기 회가 모두 끝난 이튿날 그는 의병을 거느리고 진안 마령면 반월리에 이르러 아침을 마친 뒤 진안읍을 습격하기 위해 그의 의병 는 먼저 진안읍 앞산에 있는 우화정羽化亭에 본 진本陣을 쳤다. 그때 진안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들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를 놓칠세라 집중 포화를 빠른 속도로 일제히 쏘아 니 왜적들은 손 쓸 틈도 없이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하다가 왜군의 헌병 장 호리구찌겐지로는 왼팔에 총탄 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다른 왜병들은 옷마저 제 로 입지 못한 채 전주로 도망쳐 버렸다.
 
의병들은 왜병들이 남기고 간 군복·양총·장부·이토히로부미가 내린 수첩· 돈·기타 전리품을 많이 거두었으니 무려 20짐이나 되었다고 한다. 왜놈들이 진안 에 들어와서 행정을 제 마음 로 한 지가 1년이 됨으로 그동안의 문부文簿가 산더미 같고 가죽 끈이 수천 건이었다. 그는 읍민들을 불러모아 놓고 왜놈들로부터 빼앗은 가죽 끈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왜놈들이 장차 이것으로 그 들의 부모와 처자를 묶어 갈 것이다.”하니 뭇 사람이 모두 놀라며 그것들을 불 속에 던져 소각하였다.
 
또 우편물 취급소를 부수고 통역의 집에 있는 왜놈의 물건을 소각하고 전선을 끊어 버렸다. 이러는 동안 본 는 일진회를 비롯하여 왜놈들에게 아첨한 놈들을 잡아다가 엄중히 다스리고 양민들을 위로한 뒤 철수하였다. 의병들은 군율이 잘 시행되어 양민들은 조금도 피해가 없었으며 격문을 만들어 사방으로 전달하므로 감동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14일 아침에는 가치歌峙에 당도하여 술과 고기로 호군犒軍하고 용담龍潭 심원사深源寺에 한참 주둔하다가 진을 옮겨 숭암사崇巖寺에 주둔하면서 의병장으로 호남· 남·호서를 누비며 활동하는 김동신金東臣의 의진이 가까운 운일암(雲日巖 현 진안 군 주천면 소재) 계곡에 둔(屯)을 치고 있었으므로 거기에 편지를 보냈다. 이튿날 김동신으로부터 사람을 보내 협진하자는 청이 왔다. 그는 자기의 의진도 형세가 고단함을 걱정하고 있던 터라 허락하였다. 아침밥을 일찍 먹고 재를 넘으니 또 김 동신이 사람을 보내왔으므로 마침내 운장산 아래 벌평大筏坪에서 진 을 합했는 데 그때 마침 정천程川에 왜놈이 이르 다는 정보가 들어와 김동신의 군사가 이 말을 듣자 당황하여 겁을 내는 기색이었다. 그는 김동신 의진과 더불어 사를 경 할 수 없음을 알고 빨리 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우선 진을 칠 장소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굳이 떠나자고 청했다. 그리하여 밤의 어둠을 타고 흐린 달빛 에 산비탈의 나무를 휘어잡고 올라 운장산을 넘어 내원사內源寺로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두 부 가 진을 따로 하여 분담할 것을 김동신 장에게 제안하니 불응하며 주인이 손인 자기를 왜 괄시하느냐고 힐책하였다. 그런데 합군하 는 데 장을 누구로 추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었다. 용담 출신의 허許․ 양梁 두 사람 이 김동신을 장으로 추 할 것을 그에게 건의하였으나 그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유인 즉 진안에서 패한 왜병들이 그냥 있지는 않을 것이며 필경 전주에서 원군을 얻어 몇 배의 병력으로 반격해 올 것인데 김동신이 그 사정을 모르고 가벼이 생각하 여 함부로 군권軍權을 빼앗고자 하 기 때문이다. 즉 김동신은 허 ․ 양 두 사람을 부추 겨 자신이 장이 되려고 하 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말하기를 “만약 이번 일이 실패로 돌아가면 호남 의병의 기세는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적할 곳이 많으면 힘이 분산되는지라 저놈들이 반드시 불리할 것이며 진을 따로 하면 사방으로 횡행하 여 군사를 수합할 수 있지만 진을 합치면 형세가 이 산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허울 만 좋을 뿐이지 실속으로는 도리어 화가 되어 이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동일자 김동 신 일기에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이 부분은 좀더 연구와 검토가 필요함을 느낀다.” 고 하였다. 그가 아침에 일어나 점괘占卦를 뽑아보니 백수청산고자과처白水靑山孤子寡妻 라 나왔다. 이 점괘가 마음에 걸리어 그는 남몰래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김동 신과 의견이 피차 분분하여 반나절이 지나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그 는 자신의 의병을 지휘하여 “사세가 이미 급해졌다. 홀로 환난을 면할 수 없으니 그 들은 힘을 다하라.”고 말한 뒤 그의 군사가 적진에 나아가 왜놈 10여 명을 격살하였다.
 
이때 김동신의 의병들은 겁이 나서 싸우지도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으나 그의 의병들은 힘을 다하여 싸웠으므로 처음에는 왜적들이 죽음을 피하기에 겨를이 없더 니 의군 측에 원호하는 세력이 없음을 눈치채고 일제히 반격을 해 탄환이 비 오듯 하니 의군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 형세를 본 선봉장이자 포장砲將인 박만화朴萬華 가 분을 억제하지 못하여 적에게 접근하여 왜병 두 명을 사살하고 적의 흉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전사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나이 어린 동자童子 의병 박철규朴哲圭와 허천석許天錫도 아깝게 전사하였다. 용감한 그들 총각 군사는 몸이 날래어 싸움마다 항상 앞장서고 기민한 행동으로 종종 왜병들을 현혹시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싸움으로 군졸은 흩어지고 무기를 모두 잃는 고배를 마셨다. 그는 하늘을 우 러러 탄식하며 골짜기 속으로 몸을 숨기어 피난해 온 마을 사람들과 섞 다가 왜놈 이 수색할 것을 염려하여 마침내 몸을 솟구쳐 험준한 산으로 올라가는데 육척六尺 단신을 숨길 곳이 없었다고 그는 그때의 심정을 기록해 놓았다. 이때 비로소 몸이 적에게 노출되므로 총탄이 좌우에 비 오듯 쏟아지는데 탄환이 다리와 볼기에 부딪 쳤으나 멀리에서 날아온 탄환인지라 살을 뚫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산을 넘어 패장 敗將의 몰골로 흩어졌던 군사들을 만났다. 그들은 서로 붙들고 울면서 “이 장의 명을 듣지 않아 이런 참패를 당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한탄하였다. 이때 김동신 의 의병들도 서로 마음이 이반되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18일에는 패장의 몸으로 잠깐 고향에 들르니 친구들이 와서 위로해 주었는데 참으로 면목이 없었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다. 밤에 노동蘆洞을 지나다가 시 한 수를 지었다. 다음 날 칠봉七峯을 넘어 가는 길에 어머니를 뵙고 울었다. 아내가 부친 편지에 丁씨 집 안으로 시집간 누이가 보낸 필낭筆囊을 아울러 받았다. 하직 인사를 하고 말씀하시 기를
 
“나라를 위해 나선 사람은 감히 제 집을 위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옵고 모자의 은혜가 지극히 간절하오나 君臣의 의가 지엄하오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이것만은 경홀輕忽히 할 수 없사옵니다.”라고 하였다. 
 
호남의병창의동맹단 참가자
 
 
 
 
임자동밀맹단 조직과 활동
 
그는 이즈음 깊이 생각한 바 이 로 투쟁을 계속하다가는 의병들의 아까운 생명 만 희생될 뿐이라 판단하고 1909년 3월 6일 자기 휘하 의병들을 일단 해산하여 귀 가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는 의병들에게 다시 모일 때에는 언제라도 죽음을 함께 하기를 거듭 다짐하였다. 그러나 의병들은 귀가할 형편이 못 되었다. 왜냐하면 이 미 그들은 자신들이 소속되어 있던 의병단을 떠나 이제부터는 지하로 들어가 구국 운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의병단을 해산한 뒤 이런 시 한 수를 썼다.
 
호남 땅 삼월이라 살구꽃은 흩날리는데
나라 등진 이내 몸은 갑옷투구 벗었다.
불여귀 소쩍새도 세상일을 알아서인지
나를 향해 끊임없이 슬피도 우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끝내 순종황제純宗皇帝를 폐위하고 합방合邦이란 미명 아 래 조선을 저들의 손아귀에 완전히 집어넣었다. 이것은 우리 겨레의 천추만 千秋萬代 씻지 못할 오욕이며 역사적 비운이었다. 이때 그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을 하고 땅을 치며 통곡하였으나 그로써는 속수무책이었다. 정세는 일변하여 그전처럼 의 병을 일으켜 일본에 항거할 수도 없었다.
 
1911년 3월 그는 몇 명의 옛 동지들을 모아 비 조직을 결성하였다. 그의 비 조 직은 일본日本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일본 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꿈에 불과하여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는 1912년 다시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비밀결사 를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이라고 한다. 이때 조직된 비밀결사대는
 
단 장 : 이석용 李錫庸
단 원
구례 : 장찬석 鄭贊錫
하동 : 최제학 崔濟學, 이규진 李圭鎭
전주 : 최병심 崔秉心
임실 : 김병주 金炳周, 최창열 崔滄烈
진안 : 정진희 鄭鎭喜, 최자운 崔子雲, 이경하 李景夏
곡성 : 안자정 安子精, 안영오 安潁五, 유인수 柳寅秀
조영선 趙泳善, 조우식 趙愚植
남원 : 김경호 金景浩, 조성민 趙成珉, 김인식 金仁植
김학수 金學洙, 허 간 許 榦, 허 주 許 柱,
허 업 許 業
 
등이다. 이 비밀결사대는 그가 의병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자기 의진의 주 활동 범 위내 각 지역에 구축된 거점 조직이었다. 이 결사 의 인사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 하지는 않았으나 모병을 한다거나 무기와 군자금과 군수품 등을 보급하여 병력을 보충해 주고 의진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 이들 단원과 이석용의 혈맹관계血盟關係는 그의 문집 『정재집靜齋集』에 실려 있는 바 그들에게 보 낸 서신 내용으로 보아 긴 하 음을 짐작할 수 있고 일부 전해지고 있는 『불망록 弗忘錄』의 내용에서도 군자금과 군수품 보급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그동안 많은 고통과 역경을 이기고 투쟁을 계속하였으나 일본 경찰과 헌병들의 거미줄 같은 경계망과 끈질긴 추적으로 말미암아 국내 투쟁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 자 그는 하는 수 없이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여 그곳의 동포 들과 손잡고 항일운동을 펴기로 한 것이다. 그는 중국에서 활동하기 위하여 막 한 자금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자동밀맹단 참가자
 
 
이석용 의병장의 최후
 
 
정재 이석용 의병장은 이상과 같이 임자동맹단을 조직하여 큰 뜻을 버리지 않고 오직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의진이 해산 한 뒤에도 계속 활동을 전개하여 왔으며 1912 년 10월 12일 자신이 의병활동을 할 때 군량 과 자금을 보내주던 고향 친구 정동석鄭東錫을 찾아갔다. 이석용은 그를 찾아가 그동안의 의 병활동에 지원하여 준 데 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자신의 국내활동이 어렵게 되었다는 것과 그리하여 중국으로 망명할 것 등을 의논 한 뒤 자신의 망명자금을 다시 한 번 부탁하다. 정동석은 그의 부탁을 쾌히 승낙하고 10월 13일 그의 부탁 로 자금을 건네주겠다고 약 속하였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이랴? 정동석은 그를 배반하고 임실경찰서에 이석용의 행위 를 고발한 뒤 10월 12일 전남 순천으로 도망해 버렸다. 그것도 모른 채 13일 이석용 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정동석을 찾아갔던 것이다.
 
마침내 이석용은 일본경찰에 포위되어 정동석의 집(지금의 성수면 삼청리 429-1 번지)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가 그의 나이 겨우 35세 다. 임실경찰서로 끌려 간 그는 전주경찰서로 옮겨져 전주법원에서 살인, 방화 및 강도죄가 적용되어 사형 死刑을 선고받았다.
 
이석용 의병장의 큰아들 원영元泳은 기해(己亥 : 1899)년 동짓날이 생일이니 1912년 부친이 체포당할 때 열네 살이었고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지리산 속 산내면 달궁에 쫓겨와서 살았으며 그때 고광순高光洵 의병진義兵陣의 의병선봉장 고진사高進士 광수光秀의 가족도 얼마간의 돈을 주고 집을 사서 살았던 운봉雲峯 닭실 집을 일 본 군경이 달려와서 불을 질러버리니 하는 수 없이 달궁達宮으로 들어가 남의 협실 에서 살았다. 고진사高進士의 딸도 기해(己亥 : 1899)생으로 하지夏至 날이 생일이어 서 이원 과 동갑이었다. 의병은 의병끼리 통하는 지라 이 의병장이 체포당한 다음 해 1913년에 두 사람을 혼인婚姻 시킨 후 하산下山시켜 충절忠節의 가정家庭을 보존토 록 하였다.
 
그리고 1914년 사형死刑이 집행된 이석용 의병장의 시신屍身은 16세의 아들 이원과 24세의 고진사高進士 장남 고재진高在振 두 사람이 구형무소에서 거창居昌 안의安義 까지 허술한 관에 넣어 지게로 운구運柩하고 안의安義에서 임실 성수 고향까지 그곳 선비 의병 동지들의 주선周旋으로 상여를 꾸며 반상返喪하였다 한다.
 
그 참상을 어찌 말과 글로 다 쓸 수 있을 것인가. 왜경 왜병과 싸우며 몸을 숨긴 고진사의 명命으로 이 혼인이 성사된 것이다. 의義로운 사람은 의義로운 행동을 하 는 것임을 우리는 여기에서 배울 수 있다.
 
 
1914년 1월 12일 전주법원에서 그가 재판을 받을 때 일본검사와 일문일답한 재 판기록이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재판장이 선고를 내리려고 이석용에게 기립起立할 것을 청하자 그는 말하기를 “기립은 경의敬意를 표하는 것인 데 나는 원수怨讐에 한 경의를 표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간수배看守輩들이 달려들어 강제로 일으켜세우니 그는 크게 노하며 “나는(내) 마음으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재판장은 사형을 선고한 뒤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 사형이 선고되자 그는 아들의 면회를 요청하였다. 그는 16세 어린 아들 원 元泳을 만났다.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아들 원 에게 그는 “충忠과 효孝를 잊지 말라.” 한 마디 엄숙히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 그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듯 광채가 빛나고 몸에서는 이채가 발하였다고 한다.
 
이석용 의병장의 옥중서신
 
아들에게 보낸 편지
 
원영아 슬프다. 나라와 백성을 보전하지 못하고 삼십칠 세로 헛되 이 가니 너는 고향에 돌아가 조부님 전(前) 효도하여라. 가문 서책 을 잘 두었다가 후손을 잘 가르쳐 선영 봉제사를 잘 모셔라. 원영 아, 나는 죽어도 산 듯하다.
네가 주색을 즐기면 기일에 운감을 하지 않겠다. 나 죽으면 나의 시체는 월출이면 일몰이니 영암 월출산 기슭 남해바닷가 일본 땅을 향하여 묻어 달라. 그리하면 내가 저승에 가서 일본을 꼭 망하게 하리라. 나는 살아서 황제를 모시지 못하였으니 전주 이 왕조 땅에 ‘황극단(皇極壇)’을 세워 선황제를 모시게 하여라.
 
 
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1914년 4월 4일 정오 이날 호남의병 장 이석용은 조국광복의 망을 이루지 못한 채 구형무소에서 교수형絞首刑을 받고 순국殉國하였다.
 
하늘도 슬펐음인지 일본인 형무소장은 부하에게 이르되 “저 사람은 비록 일본에 항하여 싸웠으나 세상에 드문 지사志士이니 너희들은 결코 실례됨이 없게 하여 라.” 하였다.
 
이에 따라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이석용 의병 장의 장남인 이원 의사義士는 8년 동안 행상(요강행상)을 하면서 비축한 자금과 자 하는 농토 2,600평을 매각한 자금으로 1955년 5월 5일 아버지의 ‘의병활동기념비’를 세웠다가 이 비碑를 고쳐 고종황제를 중심으로 주위에 김구金九 선생, 5열사, 호남창의 장 이석용, 28 의사를 각각 새긴 비군碑群을 만들어 황극단皇極壇이란 이름으로 현 전북 학교 내 에 건립하였으나 전북 학교가 확장되면서 다시 전주시 송천동 1가 234-10번지(어 린이회관 앞)에 옮겨 세웠다. 그리고 임실군 성수면 소재지(양지리)에는 이 의병장 과 28의사義士를 향사하는 소충사昭忠祠를 세웠다가 성수면 오봉리 효촌마을 앞산에 의병장과 28의사 묘지 성역화 사업으로 옮겨져 기념관과 함께 소충사에 모셔져 있 다.
 
그의 묘소는 전남 암군 월출산月出山 아래 가지동可之洞에 홀로 모셨으나 임실군의 소충사昭忠祠 성역화 사업에 의하여 1995년 11월 20일 고향인 성수면 오봉리에 배위配位와 함께 상단에 모셨고 28의사義士는 삼열합동三列合同으로 하단下壇에 새로 이 모셔졌으니 이제는 편히 잠들고 계시리라 생각된다.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은 원 元泳이고 작은아들은 우 祐泳이다. 두 사위는 장현풍과 최학열이다. 孫子는 원의 아들로 명근明根과 우 의 아들로 효 근孝根·경근景根·순근順根·장근章根이 있다.
 
1962년 그의 공적을 기리어 정부에서는 한민국건국 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다.
 
 
밀맹 단원들에게 보낸 편지
 
本文은 임실 출신이며 1907년 9월 12일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여 일본 군과 싸우다가 1909년 3월 6일 의병을 해산하였으며 再起를 위해 각 지역의 애국 지사들과 협의 1912년 ‘임자동밀맹단’을 결성 활동 중 동년 10월 13일 고향 친구 의 고로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 후 재판을 받고 1914년 4월 4일 구형무소에 서 복역 중 사형이 집행되기 전 그동안 같이 활동하 던 맹 단원인 허업(許業) 을 수취인으로 하여 단원들에게 보낸 옥중 간찰로 그동안 발표되지 않았던 최초 의 내용이다.
 
 
[본문 1]
受信人住所氏名
全北 任實郡 梧支面 木洞 許 兄 巖卿 座下
在監人
弟 李錫庸 上 (金參奉 字 赤祥)
 
庸再拜于帶方 金士興氏
許直叟氏理卿巖卿丁和叔李而卿浴川安子精性五趙而慶愚植 鳳城鄭淑明氏黃季方完山崔秉心雲水金瑞雲崔宜敬月浪鄭宅信崔重悅諸兄丈尊座下我東禮義聞於天下良由士大夫生死一於正也庸自被俘以來平素禮儀一切去身豈有一毫生念哉但今日事義重而禮輕故含憤忍辱優游福堂時誦庸學論孟驗自家得力將侯北上東渡而明目張膽伸天下大義耳不料拘我以法止於中途若是其無巖也纔到達句折辱尤甚鎖兩手
 
 
[본문 2]
受信人住所氏名
全北 任實郡 梧支面 木洞 許 兄 巖卿 座下
在監人
弟 李錫庸 上
 
處稠座欲奮不能欲哭不可則所歌不出於文山之正氣圃隱之丹心耳柴市收屍竹橋隕血的是朝暮間事而所幸則旣已疏謝兩宮書討獨夫君臣之義華夷之防說盡無餘矣所不幸則儒門事業前頭無窮而小有方未聞道德不周於邪世止作一節之士自顧耳目聰明年力富彊施用不盡猶有憾耳然天定勝人只當順受而已窃願諸公鑑此前車望彼後津倍加臨履之功益篤修齊之行而餘力授徒磨礱舊學隱然有裨於世道致使一線陽脉不墜於靑邱則庸之瞑甘矣
 
[번역문 : 1, 2 포함]
 
받을 사람 : 전북 임실군 오지면 목동 梧枝面 木洞 (현 삼계면 덕계리 모가울)
허형암경許兄巖卿 좌하
보내는 사람 : 감옥에 있는 제 (弟, 자기를 낮추는 사람)
이석용李錫庸 올림
 
석용錫庸은 (다음 분들에게) 재배하고 아룁니다.
 
대방(帶方, 현 남원) 김사흥 씨(金士興 氏, 金參奉 字 未詳)
허직수씨(許直叟 氏) 이경(理卿), 암경(巖卿)
정화숙(丁和叔), 이이경(李而卿)
욕천(浴川, 현 곡성) 안자정(安子精), 성오(性五), 조이경(趙而卿
우식(愚植 字 未詳)
봉성(鳳城, 현 구례) 정숙명 씨(鄭淑明 氏) 황계방(黃季方)
완산(完山, 현 전주) 최병심(崔秉心 字 未詳)
운수(雲水, 현 임실) 김서운(金瑞雲) 최의경(崔宜敬)
월랑(月浪, 현 진안) 정택신(鄭宅信) 최중열(崔重悅, 濟學)
 
여러 형兄과 존경하는 어르신 좌하座下
 
우리나라 예의禮義는 들은 바로는 천하天下 어진 사 부士大夫의 삶生과 죽음死을 하나같이 한 데서 연유하 습니다.
 
저 석용錫庸은 잡힌 이래 평소 모든 예의禮儀를 몸에서 버렸으니 어찌 한 오라기 살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형을 예단)
 
다만 오늘 의義를 중히 여기지만 예禮를 가볍게 여긴 고로 분함을 머금고 욕됨을 참고 감옥福堂에서 하는 일 없이 지낼 때 제(錫庸 自身)가 배운 공자와 맹자의 학문 을 외우며 제 집[自家]에서 얻은 힘을 체험하며 앞으로 북쪽으로 올라가고 동쪽으 로 건너는(세계정세를 알아 진출하는) 눈을 밝히고 담력을 펼쳐 천하 의(天下大義, 하늘 아래 큰 의리)를 떨칠 것을 기다립니다.
 
저는 구속된 것을 헤아리지 않으나 국법이 중도에서 그치게 되어(국권을 탈취당함) 이같이 무엄無嚴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굽히기에 이르러 욕되게도 꺾이고 더욱 두 손을 심하게 묶이고 빽빽한(장소에 비해 많은 사람을 수용) 자리에서 분하지만 할 수 없고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으며 노래를 하고 싶어도 나오지 않습니다. 문산(文山, 人名 은 모름)의 정기正氣와 포은(圃隱, 鄭夢周)의 단심(丹心, 忠心)일 뿐입니다.
 
나무장수가 선죽교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정몽주의 시신을 거둔 것(日本人들 이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일)이 아침 저녁 사이의 일(일상의 일)이 되었을 뿐입니다. 행인 즉 이미 두 궁(兩宮, 고종과 순종이 계신 두 궁인 듯)에 상소를 올린 것에 감사하며 홀로 칠(討敵할) 뿐입니다. 군신의 의리로 중국이나 주변 나라에서 막아 보려는 말들도 다하게 되어 남음이 없습니다. (이제 소용이 없습니다) 불행한 것은 유교를 숭상하는 사업의 앞날前頭이 무궁하여야 하는데 작은 재주 있어도 도덕이 두루 돌지(두루 행해지지) 않아 사특한 세상을 그치게 하는 한 절의의 선비가 있다 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돌아보건 귀와 눈이 총명하여지고 해를 더할수록 부강하여지게(정성 을) 다하지 않음이 오히려 유감입니다. 그러나 하늘은(정의가) 이기는 사람을 정하 게 되었으니 오로지 순순히 당함을 받을 뿐입니다. (하늘을 믿습니다.) 간절히 원하 옵건 모든 공(公, 앞의 수신인)들은 이 앞 자를 바라보고 저 뒤 인연을 실천하는 공功이 배가倍加하기를 바랍니다. 더욱 독실하게 몸을 닦고 집을 다스리게 하고 남 은 힘을 무리들(후진들)에게 주어(가르쳐) 옛 학문舊 儒學을 닦아 가게 하시기를 바 랍니다. 은연중(隱然中, 남이 모르는 가운데) 세상의 앞길에 도움이 있어 한 줄기 양맥(陽脈, 밝은 날)에 이르러 우리나라가 추락하지 않았으면 저 석용錫庸은 달게(즐겁게) 눈을 감을 것입니다. (죽을 것입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평소 모든 예의(禮儀)를 몸에서 버렸으니 어찌 살 생각을 할 수 없다라는 각오와 앞으 로 세계정세는 변할 것이니 눈을 밝히고 담력을 길러 하늘 아래에 큰 의리를 떨칠 것을 기 한다고 말씀하 고 하늘은 정의가 이기는 사람을 정하게 되었으니 오로지 순순히 당함을 받을 뿐입니다. 원하건 동지들은 내가 앞에 가니 뒤 인연을 실천하는 데 노력 을 배가(倍加)하기를 바란다.’ 라는 내용이며, 더욱 철저히 몸을 닦고 나라를 위하여 남 은 힘을 후진들에게 넘겨줌으로써 모르는 가운데 세상의 앞길에 도움이 있어 한 줄기 밝은 날이 올 것이다. 그렇다면 저 석용(錫庸)은 달게 눈을 감을 것이다.
 
라는 유언장遺言狀이다.
 
 
따라서 본문은 정재 이석용 의병장의 옥중 간찰로 371자를 원고지 형태의 미농지에 붓글씨로 직접 작성한 내용을 2010년 1월 21일 입수하여 후손들에게 알리고 임실군 지사면 천리 이형남 전 교장 선생님에게 번역을 부탁드린 바 쾌히 승낙하 시고 위와 같이 번역하였다.
 
간찰 내용은 연도와 일자 미상(1912년 10월 13일 피체되어 1914년 4월 4일 구 형무소에서 사형당함)에 옥중에서 당시 임자동밀맹단원들에게 보낸 유서遺書 형태 로 자신의 각오 그리고 나라를 걱정하며 사형이 집행되기 전 옛 동지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글을 적은 편지이다.
 
 
관련 인명人名의 내력
 
▶ 김사흥金士興은 현 임실군 삼계면 후천리에서 1864년 1월 24일 출생하였으며 사흥은 字이고 호는 독수제篤守齊 또는 하석霞石이다. 이름은 인식仁植인데 처음에는 옥경玉經·홍식洪植·복경復經으로 불 으며 본관은 경주이다. 사흥은 정재 이석용 의병장과 함께 연재 송병선 선생의 문하생으로 을사조약 이후 변화하고 있는 일제 침략에 항상 나라 걱정과 함께 의병장이 이끄는 호남의병들이 활동하는 데 물리적 정신적 지원에 힘을 모았다. 의병이 해산된 뒤에도 정재 이석용 선생의 활동 재개를 위해 각 지역을 표하여 조직한 비 단체인 임자동밀맹단에 가입하여 김학수와 함께 당시 남원지역의 표로 군자금 모금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석용 의병장이 일 경에 체포된 뒤에도 여러 곳에서 나라 걱정과 함께 높은 학덕으로 후학들의 교육에 열중하며 생활하다가 1939년 9월 27일 향리에서 별세하였다.
 
▶ 허암경許巖卿은 현 삼계면 덕계리 목동(모가울) 출신으로 암경은 字이고 이름 은 허업許業이며 호는 몽회夢晦 본관은 양천이다. 1883년(고종 20)에 태어났고 1922 년에 별세하였다. 학행으로 향리에서 존경을 받았으며 임자년 임자동밀맹단원으로 이석용 의병장과 함께 독립운동에 앞장서서 활동을 하였다.
 
▶ 허직수許直叟는 현 삼계면 덕계리 목동(모가울) 출신으로 직수는 字이고 이름 은 간幹이다. 호는 노서蘆西이며 본관은 양천이다. 1868년(고종 5)에 태어났고 1924 년에 별세하였다. 임자년 임자동밀맹단에서 이석용 의병장과 함께 독립운동에 적 극적으로 활동하였다.
 
▶ 허이경許理卿은 현 삼계면 덕계리 목동(모가울) 출신으로 이경은 字이고 호는 석당石堂이다. 이름은 주柱이고 본관은 양천이며 벼슬이 박사 다. 기록으로 보아 임자 맹단원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으로 본다.
 
▶ 김서운金瑞雲은 임실군 성수면 도인리 출신으로 서운은 字이고(文伯이라고도 함) 호는 위제危齊 이름은 병주炳周(호적에는 仲文)이고 본관은 경주이다. 선생은 간 재 전우의 문인으로 경전을 통달하고 학행이 높아 존경을 받았으며 학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여 성취한 이가 많아 세상의 사표가 되었다. 선생께서는 1911년 이석 용 의병장의 재기를 위하여 거점조직으로 임자동밀맹단을 조직할 때 최창열과 함 께 임실지역 표로 활동 중 군자금 모금에 전력하였다. 그는 이석용 의병장이 체 포된 뒤 고향에서 나라 걱정과 높은 학덕으로 후학들의 교육에 힘을 썼으며 1936년 11월 12일 별세하였다.
 
▶ 최의경(崔宜敬, 晦鄕이라고도 함)은 字이고 호는 華峯이다. 이름은 창열滄烈이 고 본관은 전주이다. 선생은 1877년 7월 5일 임실군 성수면 봉강리에서 태어났으며 유년기에는 남원의 농산 신 선생에게서 수학하 고 성장하여 간재 전우 선생의 문 인이 되어 성리학의 심오함을 듣고 치가와 수신에 힘써왔다. 선생께서는 이석용 의병장과 동향인으로서 임자 맹단에 가입하여 김병주 선생과 함께 군자금 모금에 힘썼다. 선생은 후학들을 위하여 성리학을 강론하였으며 1940년 고향에서 64세로 生을 마쳤다.
 
▶ 최중열崔重悅은 1882년 3월 17일 진안군 성수면에서 태어났으며 중열은 字이고 호는 습재習齋이다. 이름은 제학濟學이며 본관은 탐진眈津이다. 선생은 면암 최익현 崔益鉉 선생의 문인으로 의병 에서 활동하였으며 1905년 2월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일본을 배척한다는 이유로 일본군 사령부에 끌려가서 곤혹을 치른 일이 있는데 그 때 최제학의 나이는 25세로 면암 선생을 모시고 시종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선생은 독립운동에 앞장선 표적인 정신적 활동가이다.(중략) 선생께서는 1912년 이석용 의병장의 임자동 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59년 9월 10일 하동河東에 있는 사동寺洞에서 78세로 생을 마쳤다.
 
▶ 정택신鄭宅信은 1885년 3월 13일 진안군 마령면에서 태어났으며 택신은 字이고 호는 수당修堂이고 이름은 진희鎭喜이며 일명 종엽鍾燁이라고도 한다. 본관은 동래이 고 학행이 겸전兼全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비분강개하며 구국의 일념을 떨치지 못하고 다음 해인 1911년 3월 옛 동지 몇 명을 규합하여 비 조직을 결성하여 일본에 건너가 일왕을 암살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1912년 이석용이 의병활동의 재개를 위해 각 지역에 비밀결사대인 임자동 맹 단을 조직하자 최자운, 이경하와 함께 진안지역을 표하는 단원으로 중국으로 망 명하여 활동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중국 망명을 위해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 가 동년 10월경에 이석용이 피체되었다. 이후 진안 마령에 거주하면서 이석용 의병 장의 제례를 주관하 고 후진양성과 창씨개명에 반 하는 항일투쟁을 전개하면서 일본경찰에 시달리다가 1940년에 돌아가셨다.
 
▶ 최병심崔秉心의 字는 경존敬存이고 호는 금재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1874년 10 월 5일 전주 玉柳洞(지금의 교동)에서 태어났다. 간재 전우艮齋田愚의 수제자이며 조선 유학의 저명인사로 1905년 전주에 옥류정사玉流精舍를 개설하고 천여 명의 제 자를 배출하여 명성을 떨쳤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단식으로 항거하고 토 역선참討逆先斬의 격문을 작성하여 도처에 배포하였다. 1912년 호남창의 장 이석 용 의병장이 전남북 양 도에 걸쳐 일본군 와 항거를 계속하자 임자 맹단을 조직 하는 데 가담하고 각 지역을 분담하여 활동할 때 전주지방을 맡아 의병활동을 지원 하였다. 1920년 염재 조희제가 일제의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실상을 담은 『야록 집』을 저술하는 데 시문을 작성한 연유로 일본경찰에 피체되자 6일간의 단식으로 항거를 하였다. 또한 1942년 일제의 소위 동화정책으로 창씨개명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반 하고 조상의 성씨를 수호하며 84세까지 살았다.
 
▶ 정숙명鄭淑明은 字이고 이름은 정찬석鄭贊錫으로 구례군 해교 사람이다. 그는 임자동 맹 단원에 구례 표로 활동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기타 자세한 기록 은 없다.
 
▶ 성오性五는 字이며 오潁五,永吾로도 쓰며 이름은 재창在昶이고 호는 신와愼萵이 다. 1878년(고종 15) 11월 3일에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에서 태어났다. 안자정의 재 종형으로 기우만·곽종석 두 스승에게 같이 배웠다. 덕행이 향리의 사표가 되었고 이석용 의병장의 임자 맹단원으로 안자정과 함께 곡성 표로 활동하였으며 1935 년 4월 3일 향년 58세로 별세하였다. 1941년 이석용의 유허비 비문사건 때 사후死後 인데도 가택수색을 당하여 서책을 압수해 갔으며 그 후에도 계속하여 감시를 받았 다.
 
▶ 안자정安子精은 字이며 이름은 훈壎이고 초명은 재숙在淑인데 일본식민지 시 에는 허수아비나 마찬가지다 라고 하여 소塑라는 이름으로 행세를 하였다. 호는 분암墳庵이고 본관은 순흥이다. 1881년(고종 18) 12월 8일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에 서 태어났다. 재주가 뛰어나 기우만과 곽종석에게서 사사하여 유학자로서 고명高明 하고 제자가 천여 명에 달하며 파리장서巴里長書에 힘이 된 바 컸다. 이석용이 의병 활동의 재개를 위하여 각 지역에 조직한 임자동 단의 곡성지역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로 국권이 피탈되고 이어 1907년 정미7조 약으로 군 까지 해산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안자정 은 1911년 의병활동을 재개하기 위하여 거점조직으로 임자동 단을 구성하고 군자 금 모금에 안자정은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다. 1913년부터 향리인 안계정사에서 후 학교육에 전념하 고 이석용의 비문사건으로 임실경찰서에 수감되어 곤혹을 치르 기도 하였다. 해방이 될 때까지 경찰에게 서책의 몰수 가택수색 등 심한 괴로움을 당하다가 해방 후 1958년 2월 12일 78세로 별세하였다.
 
▶ 조이경趙而卿은 字이며 호는 배헌拜軒이고 이름은 선泳善으로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에서 태어났다. 임자동 단원으로 조우식·안자정·안 오·유인수와 함께 활동하였으며 곡성지역을 표하는 단원이었다.
 
▶ 조우식趙愚植은 이름이고 字는 종안宗顔이다. 호는 성암省庵이며 본관은 옥천이다. 전남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에서 태어났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1월 면암 최익현 의병 에 합진하여 활동하였으며 의병이 해산되자 고향에서 생활하다 가 이석용 의병장의 활동을 돕기 위해 임자동밀맹단에 가입하여 안자정과 안 오·유인수와 함께 곡성 표로 활동하였다.
 
이상과 같이 14명의 내용은 밝혀졌지만 간찰에 나타난 사람들 중 구례의 황계방 黃季方과 남원의 이이경李而卿, 정화숙丁和叔은 자료가 없어 찾을 수가 없고 임실독립 운동사에 기록된 임자 맹단원 중 하동의 이규진李圭鎭·진안의 최자운崔子雲·이경 하李景夏·곡성의 유인수柳寅秀·남원의 김경호金景浩·조성민趙成珉·김학수金學洙는 간찰내용에 거론되지 않아 설명에서 제외시켰다.
 
 
 

3. 3. 소충사에 세워진 이십팔수 천문비

 
 

3.1. 소충사 건립과 이십팔수 천문비

김 일 권 (고구려문화재단)
 
1962년 한민국 정부에서는 이러한 그의 공적을 기려 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 고 아들 이원 李元泳은 아버지 이석용과 28의사의 순절을 기리는 의병활 동기념비를 전주 덕진공원에 세웠다. 이 비를 다시 고쳐 고종 황제를 중심으로 주 위에 김구 선생과 5열사, 호남창의 장 이석용, 28의사를 각각 새긴 비군碑群을 만 들어 황극단皇極壇이란 이름으로 전주 덕진 어린이공원 입구에 세웠으며 1956년에 임실 성수면 소재지에는 정재 이석용 의병장과 28의사를 향사하는 소충사를 건립 하였다.
 
그러다 임실군은 1993년부터 성수면 오봉리 산 130-1번지 일원 20,300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10년간 소충사 확장 사업을 전개하 고 현재의 소충사 성역에 모셔진 28의사비는 원래 성수면 소재지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새로 단장한 소충사 성역의 배치를 살펴보면 맨 윗자리에 이석용 의병장 묘를 두었고 그 아래로 28의사들의 합장묘를 두었으며 그 아래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사당 아래 오른편에 기념관 건물을 세웠고 그 왼편 부지에 관련 비석들을 안치하였다.
 
다시 비석들의 배치는 사당 언덕 아래 횡으로 이석용 의병장과 28의사 각각을 새긴 29개의 작은 비석들을 열좌시켰고 그 왼편 세로줄에는 호남창의동맹단湖南倡義同盟壇, 28의사 기적비紀績碑 및 조의단(弔義壇. 이승만 통령 휘호)의 세 비석을 크게 세워놓았다.
 
29개의 비석군을 자세히 살펴보면 맨 가운데 중심부에 다른 것보다 높게 세워진 비석이 있는데 이것이 호남창의동맹단의 주역이자 의병장이었던 호남湖南 창의 장倡義大將 이학사李學士의 조비弔碑이다. 이 왼편 날개로 14개의 비군이 나열되었고 가장 왼편부터 이십팔수二十八宿 별자리 중 동방칠수東方七宿에 해당하는 각항저방심 미기角亢氐房心尾箕와 북방칠수北方七宿에 해당하는 두우녀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을 새 겼으며 그 각각에 호남의병단에서 활약하 던 박만화朴萬華 의장義將 등 14인을 배 치하였다.
 
오른편 날개의 14개 비 군은 이십팔수 별자리 중 서방칠수西方七宿에 해당하는 규루위묘필자삼奎婁胃昴畢觜參 별자리와 남방칠수南方七宿에 해당하는 정귀류성장익 진井鬼柳星張翼軫을 새겼고 마찬가지로 최덕일崔德逸 의장義將을 비롯한 14인의 의병 이름을 병기하였다. 전체적으로 좌익 14 별자리와 우익 14 별자리가 포진한 형국이 다.
 
그런데 중앙 비를 다시 보면 앞면에 북극北極이라 새겼고 뒷면에 남극南極이라 새겨 지축의 남북극을 여기에 구현하려 하였으며 다시 비석의 좁은 옆 면을 따라 일·월·화·수·목·금·토日月火水木金土의 칠요七曜 글자를 새겨 놓았다. 칠요는 하늘에 움직이는 일곱 개의 행성을 뜻하는데 전통 천문학에서 중요한 요체로 삼던 것이다. 그 순서는 당시에 이미 통용되었던 태양력의 일주일一週日 순서를 따랐다.
 
이로써 남북극과 칠요 행성을 상징하는 의병 장 이석용은 우주의 중심부 자리 에 비유되었고 그와 더불어 순절하 던 28인의 의병들은 하늘의 적도 주변을 주천 하는 28수 별자리에 비유되었다. 28수 중심의 이런 구도는 전통 천문학의 기본 골 격을 따른 것이다.
 
한편 이 비석들의 봉립에 참여하 던 인사들을 중앙비의 뒷면에 봉립위원장 전 라북도 경찰국장 장동식張東植이라 새겼고 규수비奎宿碑의 뒷면에 봉립위원 임실 심 창무沈昌茂·정칠봉鄭七鳳·광주光州 김안천金安千·문승민文承敏, 김병철金炳轍·조병 曺秉永이라 새겼다. 비석에 새겨진 전체 구조와 글자들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 중심북극비
* 동방칠수비 : 각 항 저 방 심 미 기
* 북방칠수비 : 두 우 녀 허 위 실 벽
* 서방칠수비 : 규 루 위 묘 필 자 삼
* 남방칠수비 : 정 귀 류 성 장 익 진
 
 
이십팔 수와 천문사상
 
이상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28수 별자리 하나하나에 의병들의 이름이 응 되어 있다. 그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28수 별자리가 어떤 것인가에 해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28수는 적도赤道 주변에 포진된 수많은 별들 중에서 이정표가 될 만한 28개의 별자리를 특별히 만들어 천문을 관찰하는 지표로 삼았던 별자리 체계이다. 서양 천문학이 태양이 지나는 길 위에 관찰되는 12개의 별자리를 지표로 삼아 황도黃道 십이궁十二宮 체계를 엮어낸 것과는 조적으로 동양의 고 천문학에서는 지구의 북극점이 가리키는 북극성을 천문의 중심으로 삼고 그 북극에서 90도 거리에 있는 지구의 적도를 주목하여 적도 주변을 도는 별자리를 천문 관측의 좌표로 삼았던 것이다. 적도 28수 별자리 체계가 완전히 정착된 것은 전한시 에 이르러서인데 특 히 한무제(141∼87 BC) 시기의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과 사마천司馬遷의 『사 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서 본격적인 완성을 보게 된다.
 
 
사마천은 그 28수 별자리를 사방위로 나누어 사신도四神圖 각각의 이미지로 중첩시켜 이해하도록 하였다. 동방의 일곱 별자리는 청룡靑龍 칠수七宿로 서방의 일곱 별자리는 백호白虎 칠수로 남방의 일곱 별자리는 주작朱雀 칠수로 북방의 일곱 별자 리는 현무玄武 칠수로 분속하였다. 이 결과 청룡의 동방칠수東方七宿에는 각항저방심 미기角亢氐房心尾箕 별자리가 분속되었고 백호의 서방칠수西方七宿에는 규루위묘필자 삼奎婁胃昴畢觜參 별자리가 주작의 남방칠수南方七宿에는 정귀류성장익진井鬼柳星張翼軫 별자리가 현무의 북방칠수北方七宿에는 두우녀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 별자리가 분속 되었다.1)
 
그런데 28수 별자리는 하룻밤의 하늘에서 모두 동시에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계절별로 돌아가면서 일부씩 남쪽 하늘에서 차례로 관찰되기 때문에 일종의 주천周天 성수星宿로서 기능을 한다. 계절을 따라가면 봄철에는 청룡의 동방칠수가 남쪽 하 늘에 떠오르며 여름에는 현무의 북방칠수 별자리가 관찰된다. 가을에는 백호의 서방칠수 별자리가 보이고 겨울에는 주작의 남방칠수 별자리가 떠오른다. 얼핏 보기 에 북방 현무와 남방 주작이 각기 여름과 겨울에 배당되어 있어 거꾸로 된 측면이 있는데 이것은 하늘의 천체 운행 방향과 지상의 시간 방향이 서로 거울 칭을 이루면서 반 로 진행되기 때문에 빚어지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곧 방위 관점에서 는 남방과 여름이 응되고 북방과 겨울이 응되지만 계절의 시간 축을 따라서는 여름에 북방의 현무가 응되고 겨울에 남방의 주작이 응된다. 따라서 일 년을 시작하면서 봄철의 청룡 별자리 다음 여름철에 현무 별자리가 이르고 현무 다음에 는 가을철 백호 별자리가 그 다음 겨울철에는 주작 별자리가 차례로 동쪽 지평선 위로 떠오르게 된다.
 
이렇게 공간과 시간상으로 조금 다른 듯하지만 천체의 공간적 관점에서 조망하면 시간과 공간 곧 사계절과 사방위를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장치 음을 이해하게 된다. 28수 별자리와 사신도가 서로 결합되면서 비로소 28수 별자리가 천상과 지상의 시공간을 연결짓는 중요한 천문 원리로 운 되기에 이르 다. 이로 부터 전통적인 동양의 천문학과 천문사상에서는 북극성과 적도 28수 별자리가 천 문의 모든 것을 변하는 요체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로서는 조선시 뿐만 아니라 현 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지속 되고 있다. 28수 별자리 체계를 수록한 책으로 조선시대에는 세종 천문학자 이순 지(李純之, 1406∼1465)가 편찬하 던 『천문류초天文類抄』 속의 『보천가步天歌』가 기 본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이 구법旧法 『보천가』는 고려시 부터 중요한 텍스트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러다 조선 말기인 철종 에 이르러 청나라의 『연경실측신서燕京實測新書』와 『성도보천가星圖步天歌』 등을 참고하여 기존의 『보천 가』를 개정 편찬한 『신법보천가新法步天歌』가 천문학자 이준양李俊養에 의해 철종 13 년(1862) 관상감觀象監에서 간행되기에 이르 다. 그러니까 19세기 후반 무렵부터는 잡과雜科의 시험과목으로 지정되기도 하 던 이 『신법보천가』가 전통 천문을 익히 는 주요 교재로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따라서 근현 에 통용되 는 전통 천문의 판본은 세종 의 『구법보천가』와 철종 의 『신법보천가』라는 두 책에 기 는 바가 클 것으로 짐작된다. 소충사의 28수 조의단비에 새겨진 28수 별자 리도 이들에 의지하 을 것이다. 그런데 비교하여 보면 별자리 모양이 다소 다른 점들이 있어 소충사의 28수 별자리 그림이 저본으로 삼았던 모본이 과연 무엇이었 는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 좀더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십팔 의사 조의단 성립과 이십팔수 비碑
 
 
이상과 같이 천문의 요체를 표상하는 28수 별자리에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각 의병들을 각각 배당하 는가 하는 문제를 점검할 필요가 있겠다. 비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각 4방 칠수가 시작되는 처음에 의장義將을 내세웠고 그 다음에 의사義士 를 그 다음에 의졸義卒을 마지막으로 의동義童 혹은 의승義僧을 내세운 것을 알 수 있다. 곧 의병장 이석용 휘하에 활약하 던 의병들을 사방위로 나눈 다음 각 계급 별로 서열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동방칠수 : 의장 박만화·의사 한사국·의졸 한득주·최일권·김치삼·김춘화·의동 김동관
 
북방칠수 : 의장 여주목·의사 이광삼·의졸 김여집·서상열·서성일·의동 김학도·박철규
 
서방칠수 : 의장 최덕일·의사 허윤조·의졸 박달천·박운서·정군삼·성경삼·의동 허천석
 
남방칠수 : 의사 김사범·의졸 윤정오·양경삼·박인완·오병선·의승 봉수·덕홍
 
 
어떤 인물들이 포함된 것인가 알아보기 위하여 먼저 1907년 9월 12일 진안 마이산 용암龍巖에서 의병창의를 할 당시 마련되었던 의병 조직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호남창의록』의 권수 및 해제 17쪽에 ‘의창동맹단儀昌同盟壇’이란 이름으로 실 려 있다.
 
선봉先鋒 : 박만화·최덕일·송판구
중군中軍 : 여주목·박운서·김성학
후군後軍 : 김사범·윤명선·전성학
참모參謀 : 전해산·한사국·이광삼
총지휘 : 박갑쇠·곽자의·임종문
연락連絡 : 홍윤무·박성무·윤병준
도로부장 : 김사원·김공실·김성율
보급補給 : 하규정·박금동·박문군
운량運糧 : 오기열·조 국·김학문
기실記室 : 전해산·한사국
 
 
곧 초기 의병단의 선봉군에 섰던 박만화와 최덕일·중군의 선봉 여주목·후군의 선봉 김사범이 사방 별자리의 첫 자리에 안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07 년의 의병조직과 28의사 조의단비에 안치된 명단이 서로 일치하지를 않는다.
 
그러면 28의사 조의단으로 봉정된 인물들은 어떤 경위로 선정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에 참고되는 자료는 『호남창의록』 권1에 수록된 「전사한 의병들에 한 제문」[祭戰亡義士文]이다.
 
성상(聖上) 45년 무신년(1908) 4월 28일 패군장 이석용은 3척의 제단을 베풀어 제물을 차리고 피눈물로 축문을 지어 통곡하니 용담의 전망戰亡 의장 박만화·의동 박철규와 허천석·순창의 전망의졸 최일권·두봉의 전망의사 이광삼·남원의 전망 의사 김사범과 의졸 서상렬·장수의 전망의사 허윤조와 의졸 성경삼과 의졸 양경 삼, 췌리의 피화被禍 의졸 오병선·운현의 전망의장 최덕일과 여주목·의사 한사 국·의졸 윤정오·한득주·김춘화·정 군삼·박운서·김치삼·박인완·김여집· 서성일·박달천·의동 김동관·김학도·의승 봉수·덕흥의 소靈所에 결별을 고하 나이다.2)
 
여기에 거열된 인물들과 소충사 28의사의 명단이 완전히 일치를 한다. 따라서 의병장 이석용이 일제와의 전투를 하다 죽어간 부하 장졸들을 기리기 위하여 1908 년 4월 28일에 3척의 제단을 만들어 제사하 었는데 이것이 기초가 되어 이른바 28의사로 봉립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1907년 8월부터 1908년 4월까지 약 년간 직접 쓴 일기인 「창의일록」을 살 펴보면 1907년 9월 16일 추졸산酋窣山 내원사內源寺 전투에서 포장砲將 박만화朴萬華 와 동자童子 박철규朴哲圭와 허천석許天錫이 전사하였다. ) 1908년 3월 21일 비가 퍼붓 는 운현雲峴의 야간 전투에서 가장 큰 패배를 당하 는데 포장 최덕일이 자결하는 등 16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 3명이 상처를 입었고 2명이 잡혀갔다.5)
 
그 뒤 4월 28일 이석용은 운현의 패전한 장소로 찾아가 가시덩굴을 베고 3척 단 을 만들어 ‘조사단’이라 하고는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전사한 28명의 장졸들을 합 제合祭하였다. “이때 갑자기 별과 달이 깜깜하고 비와 번개가 날아 번득이니 아마도 신의 험이리라. 나는 통곡을 하니 온 군사가 슬퍼서 견디지 못하였다.”고 이 날의 슬픈 감회를 술회하고 있다.6)
 
4월의 전망의사 제문에 거열된 인물들은 아마 전사한 순서에 따라 수록되었고 지명은 당시 전사한 곳의 이름이다. 소충사에 이들의 조사단을 세우면서는 의장義將과 의졸義卒, 의동義童의 순서에 따라 재배치한 것이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28의 사 조의단비 내역이다.
 
 
이십팔수 천문비의 역사적 의의
 
끝으로 28인의 의병들을 천문의 28수에 비유한 것은 그 숫자가 28인이라는 데에서 쉽게 연상되기도 하지만 의병장 이석용 본인이 이미 천문에 해 상당한 식견이 있었던 데에서 기인되는 측면도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를 살펴보면 『호남창의록』권1의 1908년 7월 20일 작성된 여러 진 에 전한 격 문傳列陣檄에서 이석용은 “여러 진 의 맹주들과 더불어 함께 3척 장단將壇에 오르기 를 원한다. 북두성北斗星을 우러러 서울을 바라보고 땅을 굽어보며 중과 맹세하노 라.”하면서 천문과 지리의 적인 포국 아래 자신의 충의와 기개를 떨치려 하였다.7)
 
또한 이석용의 시와 글을 모아 아들 이원 이 1961년 3월 간행한 『정재선생문집』 을 살펴보면 그가 천문역법에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을유년(1885) 정월 삭일 에 지은 「서양역법을 논박함」(駁西曆)에서 ‘개 원회운세元會運世는 연·월·일·시가 연이어 12와 30으로 한정을 하였으니 이것이 하늘이 정한 천정상수天定常數인 것이며 여러 집안에서 만고 동안 바뀌지 않은 견해이며 결론인 것이라 하여 전통적 인 천문역법의 정당성을 피력한 다음에 ‘근래 서양의 문물이 하늘을 뒤덮은 이후 로마의 요망스런 역법이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시켜 망아지처럼 종횡무진 날뛰는 가운데 간지干支와 양의兩儀, 시후時候, 오행五行이 모두 이름과 순서를 잃었으며 윤 삭閏朔을 없애버리고 세수歲首를 호납胡臘으로 쓰고 있으니 춘추의 큰 계통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면서 전통 역법이 서양 태양력으로 바뀌는 세태를 개탄하고 있다.8)
 
그의 비판은 상당히 세 한 데까지 이르는데 ‘하물며 저 서력西曆이 반드시 착오가 없는 것도 아니며 이른바 부족한 수가 천 년에 이르면 하루 2시간 40분이 남게 되는데 그것이 끝에 어디로 돌아가겠는가.’라 하여 서양 역법 역시 완전한 것이 아니라 계산상의 문제가 남아 있으므로 굳이 우리 계산법을 낮출 필요는 없다고 옹호하고 있다. 이런 태도 위에 ‘숭정 연호조차 일찍이 땅에 버렸으며 북력北曆을 쓰는 것도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왔었는데 어찌 차마 서력西曆을 쓸 것인가?’라는 학문적 절의론을 외친다.
 
여기서 북력은 명나라를 신하여 중원을 차지한 청나라가 발전된 서양천문학을 받아들여 시헌력時憲曆을 반포하 는데 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북력 조차 부끄러워하였다니 조선 후기에 반청숭명의 존화 이념이 얼마나 질기었는가를 엿본다.
 
그리고 12와 30의 상수常數를 갖고 시간의 주기 변화 문제를 설명하는 원회운세 이론은 북송의 유학자 소강절邵康節이 제시하 던 것인데 엄 한 의미의 천문학은 아니며 일 년 12달과 한 달 30일의 주기를 바탕으로 삼아 우주적인 시간관으로 확 하여간 일종의 사변적 역법 체계이다. 전통 유학을 공부하 던 이석용으로서 이에 한 신뢰가 상당하 던 모양이다. 구 한말에 이르기까지 소강절의 시간관이 지배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 사회의 보수적 안목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된다.
 
이처럼 이석용이 천문에 한 식견이 높았고 의롭게 전사한 휘하의 28인 장졸들을 여러 차례 기렸었는데 이 뜻이 이어져 소충사의 28수 별자리 조의단으로 성립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재선생문집』의 권4 부록에는 정재 선생의 기개와 충의를 찬탄하는 후인들의 싯귀들이 실렸는데 그 중에 천문에 관련된 이야기가 더 러 보인다. 장수 장계의 유 한柳永垾의 시에서 ‘의로움은 북두北斗에 높고 이름은 남주南州에 가득하네. 우리 한인의 칭송은 천만 년을 가리.’ )라 하 고 전주 고사 동의 최정열崔整烈은 ‘사당 앞 초청받은 것은 봉과 용의 돌이요, 스물여덟의 별二十八星은 그 이름이 다하지 않으리.’ )라 하였다. 이러한 천문시들은 이석용이 휘하의 장수 최덕일을 위하여 직접 지은 만사輓祠에서 ‘그 의 숭고한 빛이 북극성신北極星辰 위에 드리웠고 그 의 이름이 남주南州의 사녀士女 사이에 가득하도다.’ ) 하 던 것처럼 원히 빛나는 별에다 애통한 혼의 충절을 담아내려던 발로라 하겠다.
 
이런 정신을 이어간 끝에 결국 단기 4292년(1959) 작성된 「28의사 소충사 유지책 에 관한 건」에서 ‘하늘에는 별이 경염됨이 있어 이십팔수二十八宿요, 나라에는 의사義士가 있어 28인이라. 성수면 소재지에 있는 28의사 단비壇碑와 사우祠宇는 우리 임실 군의 역사 전후에 없는 첫 사업으로 창설되었다.’12)라는 매듭으로 결말을 보게 되었다. 곧 소충사를 건립하면서 28의사 조의단에 하늘의 적도 28수 별자리를 하나하나 응 시켜 그들의 충의가 천문의 도수처럼 원하기를 기원하였다.
 
그런데 이석용의 비석에는 천문의 중심인 북극성北極星을 지칭하면서도 이 보다 더욱 천문의 요체가 되는 북극과 남극 및 일·월·화·수·목·금·토라는 지축地軸과 칠요七曜에 응 시키고 있다. 소충사의 29인 조의단비에다 천문의 질서 전체를 부여하기를 기원하 던 것이다. 만일 조선조의 왕정시 다면 북극성이 제왕을 상징하므로 참람된다 하여 불가능하 을 이야기가 여기에서는 구현되어 있다. 그 러므로 해방 후 민국시 로 넘어와서 자유로운 상상력이 마음껏 발휘된 끝에 호남 의병장 이석용을 북극에 응시키고 그 휘하 전몰 의병 28인을 천문의 주천 성수인 이십팔수에 자리매김하는 천문적 드라마의 연출이 가능하였다고 하겠다. 전통 천 문의 현 사회적 변용이라 이를 만하다.
 
역사상으로 장수들을 28수에 응시키는 고사는 중국의 후한 광무제가 건무建武 원공元功 장수들에 부여한 것이 처음이며 이후 수나라와 당나라에서 이런 형식을 적 용한 예가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소충사의 경우가 처음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소충사는 근 에 들어서도 전통 천문의 원리가 여전히 활발하게 살아 있는 현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천문의 원리를 지상에서 구체적인 물상으로 투 시켜낸 것이다. 그 런 점에서 소충사의 28수 천문비들이 더욱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우리 의 문화를 풍부하게 가꾼 값진 문화재로서 그 가치가 널리 알려질 수 있기를 앙망한다.
 
註 : 《任實獨立運動史》崔成美 편저 자료에 의함 
 
 
 

4. 4. 정재 이석용 의병장과 소충사

 
양지리에 처음 세워진 소충사
 
 
구舊 소충사昭忠祠는 양지리 학당마을에 1957년 7월부터 428 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사당 1동 (8평)과 강당 1동(8.5평)을 조성 하기 시작 약 3년간에 걸친 사 업으로 완공을 보아 당시 이승 만 통령의 조의단弔義壇이라는 휘호를 받아 비를 세웠다. 사당에는 정재 이석용 의병장과 28의사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순절한 날이 각기 달라 매년 음력 칠월칠석날 제사를 지내오다가 이석용 의병장과 28의사의 뜻을 기리고 군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하여 군민들의 뜻을 모아 소충사 성역화 사업을 계획 하여 1993년도 2억 1천4백만 원의 예산을 들여 오봉리 효촌마을에 부지 2만 평을 확보하였다.
 
그 후 대대적인 성역화 사업을 벌려 1994년부터 2000년까지 16억 4천만 원을 들여 묘지 이장을 비롯하여 사당과 기념관·홍살문 그리고 출입문인 솟을 문까지 조성함은 물론 주차장을 조성하여 구 소충사에 건립되었던 각종 비석 등을 옮김으 로써 시설을 완료하고 사업이 마무리되어 2002년 8월 15일 양지리 구 소충사에서 현 소충사로 이전을 완료하였다.
 
묘지는 의병 당시 격전지 던 운현(雲峴 : 현 운재)의 지주골(지주곡 : 蜘蛛谷) 과, 오봉리 큰 저수지 아래 골짜기에 모셔져 있었으나 많은 지인知人들의 발의로 면 민들의 의견을 모아 1988년 5월 18일 면 자체사업과 군郡의 지원을 받아 월평리 신 촌 마을 산1번지에 합동으로 모셔져 있었으나 현 소충사 건립추진 중 1995년(乙亥) 11월 19일(巳時) 청명한 날씨에 월평리 신촌新村 마을 앞에 간좌곤향艮座坤向으로 계 신 28의병들의 묘墓를 파묘하고 정재 이석용 의병장은 전라남도 암군 월출산 아래 가지동可之洞에서 모셔와 군부 의 협조에 의하여 장병 10여 명이 엄숙한 자세로 현 소충사 묘터에 운구하여 11월 20일 오후2시에 의병장과 당초 가족묘지에 모셔져있 던 배配位를 합장하여 먼저 하관을 하고 봉분을 만들었다. 묘역을 조성하는 과정에 함께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28의사는 10위씩 3열로 배열 안장하여 묘역을 조성한 후 오후 4시 30분에 완료함과 동시에 제사를 마치고 이장을 완료하였다.
 
현재 소충사의 규모를 보면 의병장의 묘지와 28의사의 묘지 그리고 사당과 기념 관·28의사의 기적비·호남의병창의동맹단비·조의단비·29개의 천문비가 있으 며 홍살문과 출입문 그리고 넓은 주차장과 관리사무소가 있고 2008년 5월 13일에 3억 원을 들여 조성된 의병장과 28의사의 합동 동상도 세워져 있다.
 
그리고 소충사 외의 기념물로서는 1997년 7월 18일에 지정되었으며 도 지방기념물 91호인 이석용 의병장의 생가와 유허비, 조국 광복 60주년이 되는 2005년 10월 19일 제막한 ‘운현전적의혼추모비’가 있다.
 
 
보주당 봉산스님의 호남운수동 소충사고기
 
불기2539년(1955) 乙亥 11월 19일(음력 9월 27일) 甲寅일 巳時 일기는 천고마비의 청명한 날씨 다. 본인은 양지리 학당마을 중학교 앞 소충사를 탐방하여 문전 망배 묵념望拜黙念 드리고 다시 찢어진 창호지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위靈位는 28位의 위패位牌가 배열되어 있고 각위전各位前에 뚝배기 그릇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석현石峴마을에 사는 거사居士 김태복 씨와 함께 보았다.
 
의병장 이석용의 아들인 이원형 처사님은 충효심이 강하여 이승만 통령으로부터 조의단弔義壇이란 편액을 받아 비석을 세웠으며 평생 장발과 마의포痲衣布로 만든 옷을 입고 하얀 갓을 쓰고 사시다가 돌아가셨단다.
 
오늘은 월평리 신촌마을 사지방 김金·박朴·정鄭 3성씨姓氏 선산 내의 김해김씨 선영 우측에 7년 전에 전사지戰死地에서 모셔와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계시는 28의사 의 합동묘소를 파묘하는 날이다.
 
봉분封墳을 크게 성역화하려고 임실군 주관으로 오봉리 효촌마을 앞 깃 봉아래 거 한 묘지墓地와 사우祠宇를 다시 지어 옮기려고 차묘破墓하는 데 관심이 많은 나 는 구경하러 갔다.
 
김태복님과 동행을 하니 포클레인으로 겉 봉분만 헤치고 점심시간이라 아무도 없었다. 둘이서 반 시간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일꾼 두 명이 괭이와 호미 를 들고 하의下衣 뒷주머니에 하얀 비닐봉지를 여러 개 차고 와서 파묘를 하는데 가관이더라. 나는 파묘 과정을 물어보니 28의사님들의 유골을 비닐봉지에 담는다 는 것이다. 한심하고 화가 치 었다.
 
누가 먼저인지 할 것 없이 둘이서 동시에 일꾼들을 쳐내고 석현마을에 사는 김 태복 부님과 함께 한 분 한 분 유골을 정리 집골하여 놓고 있는데 그 뒤에 임실군 청에서 나온 공보실 직원 한 명이 칠성판과 창호지 8권을 준비해 가지고 왔다. 칠성 판은 29개가 준비되어 유골은 다 모실 수 있었으나 유골은 보기보다 습기가 많았다.
 
그곳에서 수습한 유골은 30분이고 한 내광(곳)에서 둘이가 나와 같이 염습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마 처녀 한 분과 총각 의병이 합골로 되어 있지 않았느냐 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비구니(여승)인 듯하다. 하단에 있는 마지막 유골도 여승이 란다. 뼈는 황골黃骨이었다. 유골은 모두가 30위이나 염습한 유골은 29위이다. 늦가 을이라 오후에는 추웠다.
 
포클레인의 자동 불빛을 밝히며 늦게까지 다 집골하여 정리한 다음 양지리 중학교 앞 당신들 신당(구 소충사)으로 모시어 정위치의 마루에 하룻밤 주무시게 하였다. 그 다음날 모시게 되는 새로운 소충사 터에 하여 아승봉산我僧奉山은 생각할 때 충 신의 묫자리로는 부적합하나 이미 내가 성수로 오기 전 임실군에서 결정하여 건설 중이었다. 재혈縡穴을 위촉委囑받아 상·하였다 정좌계향(丁坐癸向)으로 上은 의병장님 내외분과 合封하고 下는 28의사님들을 三列로 배열하여 하관하고 한 봉분으로 하다. 토품土品은 삼황토三黃土와 사토沙土로 좋은 흙이다. 의병장님의 유골은 전남 암 월출산 아래 가지동可之洞에서 일본을 향하여 계셨다고 한다. 그곳에서 파묘破墓하여 다시 모시는데 뼈는 많이 없었다. 배위配位는 선산에서 개이改移 합장合葬)되었다. 11 월 20일 의병장님과 의병들이기에 임실읍 감성리 군부 의 사병들 10명으로 하여금 버스로 유골遺骨을 절차에 따라 정성껏 장지로 운구하였다. 본本 승僧은 소충사에 모 셔진 유해를 다시 개습開拾하였다. 습기濕氣가 있어 창호지가 젖었기 때문이었다. 시 간이 되어 부님과 내가 한 분 한 분 정성을 들여 잘 모시고 둘이서 허복토許伏土를 하고 자손들과 군수님 서장님이 복토하고 포클레인이 거 한 봉분으로 성분成墳하다. 날짜와 시간은 불기 2539년(1995) 乙亥 11월 20일(음력 9월 28일) 월요일 乙卯下午 2시 반, 제사는 하오 4시반에 초헌관에 군수님·아헌관에 서장님·종헌관에 의 병장 손자인 이명근님의 순서로 진행하고 참석 인원은 군인 10명·역군 9명·자손들 과 관객 등 58명이 정숙하게 제사를 모셨다. 그러나 본승本僧은 왜 시신은 30位인데 28位로 제사를 지내느냐고 따지며 여자僧 두 분을 빼버린 것은 유림들의 농간이다 라고 하며 있을 수 없다고 하니 그날은 서른 분의 제사를 지냈다. 날씨가 매우 청명淸明하다. 군수님을 비롯 모두가 조리 있는 또렷한 내 말에 수긍을 하였다. 늦가을이라 제사가 끝나니 캄캄하여 나는 구천사龜泉寺에 왔다. 법당法堂에 들어가 부처님 전에 분향하고 3배拜로 고유告由했다. 해마다 제에 동참하고 싶다. 그러나 陰曆七月七夕 일인지라 절에서도 그날은 전국적으로 불 공양 행사가 있어서 어려울 것이다. 의사義士 위靈位님들은 정좌계향丁坐癸向으로 삼봉리 금암후三峰里 金洞後 주산主山을 안아서 천추 만화를 원히 누려 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분향입제 추모를 받을 것이다. 2일간 봉사奉事함이 국민으로서 당연한데 사례금이라고 자손들이 거출하여 김태복 거사님과 나에게 각각 십만 원씩 주는 것을 호통을 쳐 퇴박하고 사양하였다.
 
봉공행례심방奉供行禮尋訪은 만백성萬百姓이 해야 할 의무義務이다.
 
時維乙亥 暮秋 (1995년)11월 20일 乙卯 월요일
五峯里 龜泉寺 住持 普周堂 奉山 씀
 
 
 

5. 5. 3·1독립만세운동

 
성수면에서는 여러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불길처럼 번져갈 때 아직 조용했다. 이 때 성수면 삼청리 천동마을의 박성식은 21세의 청년으로 같은 마을에 사는 정기태 와 협의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3월 28일 밤 9시에 일제히 횃불을 들 고 양지리 부동 앞산 사창개에 올라가 백여 명의 면민들이 모여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쳐 니 밤하늘의 정적을 깨고 성수면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에 놀란 일본의 주재 소 순사들은 총을 쏘아 며 산 위로 올라오니 군중들은 부득이 해산을 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주동자 박성식과 정기태는 일경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 다.
 
그 후 4월 7일 송귀남·김제룡·최극삼·송성학·문성술 등이 성수면 오봉리 수방의 중턱에 불을 질러 시위운동의 여세를 과시해 보이기도 하였다. 결국 임실일 의 시위운동을 전체적으로 볼 때 낮에는 워낙 왜경들의 감시가 심하여 부득이 밤에 어둠을 택하여 시위를 벌렸던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3·1독립만세운동 참가자
 
 
일제강점기 국내항일운동 참가자
 
 
 

6. 6. 학교 교육의 역사

성수의 근·현대교육사
 
임실군 성수면은 임실지역에서 최초로 공립서당인 관서당館書堂이 설립되었다. 임진왜란 이전 임실현감으로 부임한 김천일(1578~1581)이 성수면 유포리(현 양지 리)에 관서당인 가정재可貞齋를 설립하고 청웅면에는 용암서당을 설립하였다. 『운 수지』에 의하면 가정재는 선조 때(1580년경)임실현감 김천일에 의해 성수 유포리 (당시 마을 이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운수지』와 『임실읍지』의 학교 조를 보면
 
 
‘在東面柳浦里金候千鎰莅任時倡學一境創建書堂於此邀致金堤文.士某官給廩料他官學徒多聚而本面薛衡.魯忠民,鄭廣智,金琯安,沈壽仁,等皆成就魯忠民因爲學長天啓丙寅間以無學長因廢當初瓦家十餘間劃給屬公田畓十餘斗落釜子食鼎等物今有遺址’
‘재동면유포리김후천일리임시창학일경창건서당어차요치김제문.사모관급름료타관학도다취이본면설형.노충민·정광지·김관안·심수인 등개성취노충민인위학 장천계병인간이무학장인폐당초와가십여간획급속공전답십여두락부자식정등물금유유지’
 
 
이 기록을 보면 본 가정재는 조선 선조 때(1580) 당시 임실 현감이었던 건재 김천일健齋金千鎰에 의하여 임실현 관서당의 하나로 성수면 유포리(현 양지리)에 창건된 것을 알 수 있다.
 
김천일은 이 지역의 유학진흥儒學振興을 도모하고자 하여 관립官立으로 이 서재를 창건한 것이다. 이때 당시 명망 있던 선비 김제문金堤文을 서재의 훈도로 모시고 향교의 학생들까지 가르쳤다.
 
 
이때 설형薛衡·노충민魯忠民·정광지鄭廣智·김관안金琯安·심수인沈壽寅 등 유능한 문인들이 배출되고 그 중 노충민은 본 재의 학장에 추 되기도 하였다. 이 서재는 상당히 오랜 기간(약50여 년) 지속되었으나 천계병인(天啓丙寅 : 1626)에 이르러 학 장의 적임자가 없어 부득이 가정재를 폐지하였다.
 
가정재의 규모는 와가瓦家가 10여 칸이 있었으며 서재에 소속된 전답도 10여 두락을 소유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또한 옛날 서재에서 기숙하는 학생들에게 식사를 지어주는 가마솥과 식기류가 전해지고 있었던 것도 알 수 있었다. 그 후 이 가정재 터에 심수인의 재실인 반매당伴梅堂이 세워졌다고 한다.
 
김천일金千鎰은 본관이 광산이며 호를 극염당克念堂 또는 건재健齋라고도 하였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지평에 오르고 임실군수(1578~1581)를 역임하면서 재임 시 동 면(현 성수면) 유포리에 가정재와 구고현 선학동(현 청웅면)에 용담서당을 세워 지 역사회의 교육발전에 공이 많았음으로 충장공을 학정서원의 주벽으로 봉안한 것도 이에 연유한 것이다. 가정재와 용암서당을 관서당이라 하여 현재까지도 충장공의 유덕을 흠모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민족적 의분에 못 이겨 자발적으로 궐기한 유자儒者 의병장이었다. 그는 호남의병을 인솔하여 수원을 거점으로 많은 공을 세우다가 이듬해 6월에 진주성 2차전에 참여하였다. 10만 왜병에 맞서 분투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어 아들 건상乾象을 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선조께서 는 그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좌찬성을 증직하였으며 시호를 충장공忠壯公이라 하고 나주에 사우를 세워 정렬사旌烈祠라 사액賜額을 내렸다.
 
 
성수의 영진소학교
 
1895년 소학교령이 공포되자 이 고장의 한학자 심진표沈鎭杓가 광무 5년(1901)가 정재 자리에 진소학교를 세워 초 교장에 취임했다. 이 학교의 1회 졸업생 심진 상沈鎭商은 진소학교 훈도가 되어 진소학교가 임실읍으로 옮겨진 후에도 오래 도록 교직에 봉사하니 임실읍의 왠만한 인사들은 모두 그의 제자가 되어 오늘날까 지 그의 인격을 흠모하고 있다.
 
구 한말에 일본에 한 연구를 하자 일본인 훈도 스즈끼 신기쯔를 초빙하여 일본 어를 배웠는데 때마침 성수 출신 이석용李錫庸 의병장 부 들이 일본인들을 몰아내 고자 의병을 크게 일으키고 호남 일 를 석권하고 다닐 때 이곳 진학교 일본인 훈도 스즈끼는 1907년 8월 21일 의병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러한 사고로 말미암 아 강희 2년(1908) 권주상權周相 군수 때 이 학교를 임실읍 양사재養士齋 자리에 옮기 게 되었다. 이때 일본인 훈도를 죽인 것이 경상도에서 넘어온 의병들이라 전하기도 하고 그가 총에 맞아 죽을 때 비둘기 소리를 하며 죽었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이 고장 주민들에게 널리 전해온다. 비록 학교는 임실로 옮겨졌지만 심진표는 임실 진학교 명예직 교장으로서 4년간이나 추 되어 지속되었다.
 
따라서 임실 진소학교는 1923년 12월 유림들이 발행한 『임실군지』 「운수관조雲水館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降熙2(1908)年「本 郡守 權周尙, 與鄕儒協議, 報府指定, 爲私立永進學校, 仝 4年 以境內寄附金 2千 3百 47圓 爲基本金, 養士齋 32斗落, 各吏廳沓 47斗落 付屬 仝年承認 爲 公立普通學校’
‘강희2(1908)년 본 군수 권주상, 여향유협의, 보부지정, 위 사립 진학교, 동 4년 이경내기부금 2천 3백 47원 위기본금, 양사재 32두락, 각이청 답 47두락 부속 동년 승인 위 공립보통학교’
 
이것을 보면 임실초등학교의 전신은 사립 진소학교인데 그 위치는 향교 산하 기관이었던 양사재 터이다. 앞서 말한 로 성수면 가정재에 세운 진학교를 강희 2년(1908)에 임실로 옮겨온 것이다. 그런데 진소학교로 옮겨진 지 2년 만에 기부 금 2,347원과 양사재 소유답 32두락, 각 관청 소유답 47두락을 기금으로 운수관(雲水館.지금의 동중학교 자리)에 학교를 옮기고 정식 인가를 받아 임실공립보통학교 가 되었다.
 
이상으로 언급된 바와 같이 성수면은 임실지역에서 최초로 학교법인 관서당이 설립되어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런 전통은 계속 이어져 다시 근 학교인 사 립 진소학교를 설립하였으나 예상치 않은 사건으로 학교가 임실로 옮겨가게 되 었으나 성수면민들은 8·15 광복 이후 심희만 씨가 성수면 양지리에 사설강습소를 세워 중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년들을 모아 가르침으로써 농촌계몽운동을 하였으니 성수면은 임실군 내는 물론 도내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일찍부터 교육의 중심지 다.
 
 
성수의 중학원
 
일찍이 성수면에서는 구 한말에 제일 먼저 사립 진학교를 세워 초 교장에 심진표 선생이 취임한 바 있고 8·15광복 후에는 고 심진표 선생의 손자인 심희만이 다시 우리고장에 처음으로 사립 중학원을 세워 향토교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심희 만沈希萬은 일찍이 전상업학교를 나온 후 1942년을 전후하여 육우정 재산 일부를 활용하여 성수면 양지리에 사설강습소를 열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년들을 가르 침으로써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1946년 4월 6일 심희만은 성수중학원을 개교하니 때마침 8·15후 향학심에 불탄 청소년들이 멀리 진안과 장수에서까지 이곳 으로 몰려들어 한때 크게 각광을 받았다. 이 성수 중학원이 공립으로 정식 인가를 서 두르고 있을 때 불행하게 6·25동란이 일어나 학교 문을 닫게 된 것은 퍽 애석한 일이 었다. 9·28수복 후에는 임실읍과 오수에 중학교가 설립됨으로써 성수면은 당분간 중 학교를 복구하지 못하였다. 그 후 5·16 혁명 후 1면 1중학교 설립을 위한 정부의 방침에 따라 1972년 3월 6일 공립인 성수중학교가 개교하 고 심희만은 초 기성회 장이 되었다.
 
성수 중학교
 
 
성수중학교의 위치는 현 성수면 양지리 257번지에 있다. 학교의 연혁을 살펴보면
 
- 1970년 2월 4일 성수중학교 설립을 위한 발기 및 창립기성회 조직
- 1970년 10월 31일 성수중학교 학교부지 결정(현재의 성수중학교 위치)
- 1971년 8월 16일 교사 신축공사(3칸) 착공 및 10월 1일 교장 사무 취급 발령
- 1971년 10월 16일 교사(3칸)·숙직실·화장실 준공
- 1971년 11월 25일 6학급 규모의 학교 설립 인가(남, 여 공학)
- 1972년 3월 1일 박덕근 초 교장 취임
- 1972년 3월 6일 성수중학교 개교(직원 6명·학생 119명)
- 1972년 6월 26일 교사 증축(교실 2칸·교장실, 현관) 착공
- 1972년 8월 26일 교사 증축공사 준공
- 1974년 1월 25일 교사 2층 증축(교실 2칸, 승강장) 준공
- 1975년 1월 14일 제 1회 졸업식(남:73명·여:33명 총:106명)
- 1979년 3월 1일 9학급 편성
- 1995년 12월 31일 다목적교실 신축(216m²)
- 2011년 2월 9일 제 37회 졸업식 12명 졸업(총 2,926명 졸업)
- 2011년 3월 1일 제11 강길원 교장 취임
 
역대교장
제 1대 박덕근 교장(1972. 3. 1.∼1978. 8. 31.)
제 2대 신칠종 교장(1978. 9. 1.∼1980. 8. 31.)
제 3대 한기창 교장(1980. 9. 1.∼1984. 2. 29.)
제 4대 손금만 교장(1984. 3. 1.∼1989. 2. 28.)
제 5대 허지순 교장(1989. 3. 1.∼1993. 8. 31.)
제 6대 홍성문 교장(1993. 9. 1.∼1998. 2. 28.)
제 7대 박정규 교장(1998. 3. 1.∼1999. 8. 31.)
제 8대 이인규 교장(1999. 9. 1.∼2002. 8. 31.)
제 9대 안남근 교장(2002. 9. 1.∼2006. 2. 28.)
제 10대 최규숙 교장(2006. 3. 1.∼2011. 2. 28.)
제 11대 강길원 교장(2011. 3. 1.∼ )
 
학교 특색으로는 전라북도 임실군 동북부의 중산간 지 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 수면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문화의 중심으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농현상의 가속 화와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에서 오는 열악한 교육환경 및 농촌인구의 감소로 학생 수가 격감하고 있는 바 학생 유치를 위하여 작고 아름다운 학교를 만들고자 학생들 의 능력에 맞는 개별화 교육과 수준별 눈높이 수업을 통하여 교육력을 극 화 하고 있다. 전교생 현악반을 운 문화예술에 한 감각을 익힘으로써 실력 향상과 인성 함양을 통하여 자아존중감 형성과 삶의 질을 높이는 학교 교육과정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성수초등학교
 
 
초등학교의 위치는 현 성수면 양지리 675번지이다. 연혁을 살펴보면 1897년 심진표 선생이 진학교를 가정재 자리에 세워 학생들을 가르쳐 오다가 성수 출신 의병장 이석용 의병 에서 일본인 선생 스즈끼를 살해함에 따라 진학교를 임실 로 옮겼다. 그 후에 성수초등학교를 세웠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인 것이다.
 
- 1927년 4월 1일 교사校舍신축 기공식
- 1928년 3월 29일 성수공립보통학교 설립인가(4년제)
- 1928년 5월 17일 임실공립심상소학교장 三好輝雲 교장 겸무
- 1928년 5월 30일 교사(1동 2칸, 사무실 준공
- 1928년 6월 1일 성수 보통공립학교 개교(제1학년 40명 : 남34명, 여6명)
- 1929년 12월 31일 임실공립보통학교장 日比弘本校 교장 겸무
- 1939년 3월 1일 6년제 학교로 승격 - 1965년 3월 1일 왕방분교 설립인가
- 1974년 3월 20일 도지정 육상 체조 시범학교 운
- 1979년 3월 1일 전체 18학급 편성
- 1981년 3월 15일 병설유치원 개원
- 1992년 2월 29일 왕방분교 폐교
- 1996년 3월 1일 성수초등학교로 개명
- 2010년 2월 12일 성수초등학교 졸업 7명(총 졸업생 수 5,176명)
 
역대 교장
1 문태근 · 2 정택종 · 3 소차갑 · 4 진정옥 · 5 노태환 · 6 양순모 · 7 김한섭 · 8 김재근 · 9 최준기 · 10 곽생규 · 11 양해갑 · 12 박일수 · 13 강태영 · 14 한기 · 15 김창환 · 16 오응언 · 17 이병재, 18 임창환 · 19 박재근 · 20 유도봉 · 21 노준원(현재)
 
성수초등학교 소유 재산 실태
- 실습지 : 2,565평(전 2,094 답 471)
- 운동장 : 525평(전 75 도로 450)
- 학교림
성수면 왕방리 89번지 4정 5단 7묘
성수면 성수리 77번지 14정 6단 2묘
성수면 월평리 135번지 3단 9묘
 
 
성남초등학교
 
 
1950년 재건기에 세운 성남초등학교의 위치는 성수면 월평리 358번지에 위치 하며 연혁을 살펴보면
 
- 1955년 12월 25일 성남초등학교 설립인가 (이강록외 5인 교지 7,395㎡희사하여 확보)
- 1956년 6월 3일 교사(校舍)신축 3교실(건평 75평)
- 1956년 10월 18일 성수초등학교 3학급 분리 개교(1~3학년)
- 1959년 6월 10일 교사校舍 3교실 증축
- 1962년 1월 5일 교사 2교실 증축
- 1968년 교사 2교실 증축 - 1970년 교사 1교실 증축
- 1971년 교사 2교실 증축
- 1982년 2월 16일 성남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설립인가
- 1982년 3월 1일 유치원 개원
- 1996년 3월 1일 성남초등학교로 개명
- 1998년 2월 13일 성수초등학교로 통폐합 총 1,566명 졸업
 
역대 교장
1 박종대·2 양해갑·3 이기형·4 김삼두·5 김희선·6 한상섭·7 이우승·8 한기·9 이두원·10 박삼균·11 정광윤·12 이정빈
 
성남초등학교가 소유하였던 재산 실태는
성수면 월평리 358번지 옆 하천 2,040평 1955년 12월 25일 취득
이강록, 박문옥, 김태봉, 김판섭, 진 용, 박 신 등 6인 희사
성수면 월평리 358번지 답 380평 실습지 1959년 2월 20일
백미 21가마 2말에 구입
1965년 1월 30일 대금정산 1966년부터 학교에서 경작하 음.
성수면 봉강리 산 116-1번지 임야 7정 8반 5묘, 학교림
1967년 7월 5일 임실초등학교에서 인수
성수면 월평리 산 135번지 임야 3반 9묘 학교림
1966년 9월 20일 성수국민학교에서 인수
성수면 월평리 355번지 답 359평 교지 1969년 1월 14일 구입
성수면 월평리 357번지 답 54평 교지 1969년 1월 14일 매입
성수면 월평리 358-1번지 답 317평 교지 1969년 1월 14일 매입
성수면 월평리 355-2번지 답 249평 교지 1971년 5월 15일 심창순 씨로부터 매입
성수면 월평리 355-2번지 답 497평 교지 1971년 5월 15일 심용원 씨로부터 매입
 
 
성수초등학교 왕방분교
 
성수초등학교 왕방분교를 1965년 3월 1일에 설립하여 원거리에 거주한 학생들이 공부를 했다. 수철리·지암·왕방리·원증리·조치마을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원 거리인 소재지 학교까지 가지 않고 이곳에서 수업을 하게 되어 불편함을 덜었다. 4학년까지는 분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5학년이 되면 성수초등학교로 다녔다. 30명 이상의 학생들이 있었으나 점차 인구가 감소되어 1992년 2월 29일에 폐교가 되었 다. 전 왕방분교는 오봉저수지 댐 공사로 인하여 수몰되고 수철리로 넘어가는 중산 골 현재 자리에 다시 새 교사를 신축하여 수업을 했지만 5년 만에 학생 수가 없어 폐교되고 말았다. 건물은 개인의 소유물로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1) 김일권, 「四神圖 형식의 성립 과정과 漢代의 天文星宿圖 고찰」 (『고구려연구』 11집, 고구려연구회, 2001. 7.)에서 28수의 성립과정과 사신도의 결합 문제를 자세히 논하였다.
2) 번역문은 『호남창의록』(진안문화원, 1997) 72쪽과 『정재이석용선생문집·호남창의록』(임실문화원, 2002) 280쪽에 동일하게 실려 있다. 단 번역문에 무사(戊巳)라고 한 것은 원문에 무신년(戊申年) 으로 되어 있기에 바로잡는다.
3) 임실문화원, 392쪽
4) 전사한 16명의 명단은 『호남창의록』 권2의 「지의동장제문(知義洞葬祭文)」에서 확인된다. 1908년 12월 9일에 이석용은 다시 운현전투에서 죽은 장졸들인 “의장 최덕일, 의사 한사국, 의병 윤정오, 정군삼, 서성일, 김치삼, 한득주, 김여집, 박달천, 박인완, 의동 김동관, 김학도, 의승 봉수, 덕홍”을 따로 지의동(知義洞)에 장사지내면서 제사를 올렸다. “의병 김춘화와 박운서는 그 집에서 이미 장사지냈으나 여기에 아울러 제사지내 위로한다.” 하였다. 이들을 합하면 16인이 된다.(임실문화원, 339쪽, 진안문화원, 158쪽)
5) 임실문화원, 418쪽.
6) 임실문화원, 423쪽.
7) 진안문화원, 100쪽, 임실문화원 299쪽.
8) 임실문화원, 136쪽. 원문은 『정재선생문집』 권3의 22쪽에 보인다.
9) 임실문화원, 187쪽.
10) 임실문화원, 190쪽.
11) 『정재선생문집』 권1 「최선봉 덕일 만사」, 임실문화원 88쪽.
12) 임실문화원, 441쪽.
임실 소충사(昭忠祠) 조선 태조(太祖) 황산 대첩(荒山大捷)
【저작】 성수의 역사문화 (2012)
• Ⅳ. 성수의 문화 유적
• Ⅲ. 성수의 역사 유적
• Ⅱ. 성수의 지형과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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