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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성수의 역사문화 (2012)
성수의 역사문화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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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성수의 역사문화
Ⅳ. 성수의 문화 유적
about 성수의 역사문화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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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2018.07.30. 10:25) 
◈ Ⅳ. 성수의 문화 유적
성수의 현존사찰 / 성수산 상이암聖壽山 上耳庵 / 상이암(上耳庵)은 성수면 성수리 산 85번지에 있다. 운수지(雲水誌) 불우조(佛宇條)에 의하면 ‘在縣東五十里聖壽山中古有伽餘神僧始創焉趙侯性憙尹參判泰一有重修記文懸板巖石上刻名京鄕道內之人許多不得記之’라고 되어 있고,
목   차
[숨기기]
 

1. 1. 종교유적

 

1.1. 가. 불교

 
1.1.1. 성수의 현존사찰
성수산 상이암聖壽山 上耳庵
 
 
상이암(上耳庵)은 성수면 성수리 산 85번지에 있다. 운수지(雲水誌) 불우조(佛宇條)에 의하면 ‘在縣東五十里聖壽山中古有伽餘神僧始創焉趙侯性憙尹參判泰一有重修記文懸板巖石上刻名京鄕道內之人許多不得記之’라고 되어 있고, 任實邑誌 佛宇條를 보면 ‘在縣東五十里聖壽山窮谷中古有伽倻神僧始創 有麗太祖歡喜潭筆跡 又有康獻大王三淸洞筆跡 道僧杜谷堂慧月堂 現出有佛頭二坐 趙侯性憙尹嘉善泰一爲重修記文懸板甲午亂入灰燼’ 이라는 기록이 있다. 위 두 기록에 의하면 이 사찰은 어느 때인지 는 알 수 없지만 가야신승伽倻神僧이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가리키는 가 야신승의 생애에 해서는 알 길이 전혀 없다.
 
성수산聖壽山에 자리한 이 암자는 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의 말사이 다. 최초의 창건은 신라 말인 875년(헌강왕 1)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러 나 그 뒤의 자세한 연혁은 전하는 것이 없고 고려 초에 도선국사가 고려를 세운 태조대왕건과 함께 이곳을 지나던 중 성수산에 이르러 “이곳이야말로 하늘이 응하고 땅이 도와주는 처소입니다.”라고 하고는 앞으로 이곳에서 8명의 성인이 나올 것이라고 예 언하면서 산 이름을 팔공산八公山이라 했다고 한다. 도선국사의 말을 들은 왕건은 이 곳에서 백일기도를 끝내고는 못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하늘로부터 용이 내 려와 왕건의 몸을 씻어주고 승천하면서 ‘성수만세聖壽萬歲’라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성계李成桂가 등극하기 전 이곳에 와서 치성을 드리니 하늘 에서부터 ‘앞으로 왕이 되리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여 절 이름을 상이암으로 고 쳤다고 한다.
 
그 뒤 1394년(태조 3)에 각여覺如선사가 중수했으며 조선시 말인 1894년(고종 31)에 동학운동으로 불에 탄 것을 1909년(융희 3)에 김 건金大建이 중건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의병 장 이석용李錫庸이 상이암을 근거지로 항일운동을 전개했 으나 그 여파로 절은 일본군 에 의해 불에 탔다. 1912년에 원大圓스님이 중건했 으나 1950년 6·25전쟁 때 공비의 방화로 다시 불에 탔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58년에 임실군수 양창현梁昌鉉이 중심이 된 상이암재건위원 들이 빈 터에 법당과 요사를 지었다. 당시의 정황을 기록한『전북일보』1958년 11 월 28일자 신문기사를 보면 법당 상량식 도중 오색 서광瑞光이 둥근 원형을 그리며 하늘 위로 높이 뻗쳐 사람들이 모두 감격했다고 한다.
 
상이암에는 고려 왕건의 필적인 ‘환희담歡喜潭’이 전하고 조선 태조 이성계의 필적 인 ‘삼청동三淸洞’이 전하고 있다. 또한 이 사찰에서는 도승道僧 두곡당杜谷堂과 혜월 당慧月堂이 배출되었다. 임실군수 조성희趙性熹와 가선 부 윤태일尹泰一이 쓴 중수 기가 걸려 있었으나 갑오난甲午亂으로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상이암사 적上耳庵寺蹟』은 지금도 전하고 있다.
 

 
※ 상이암 사적기上耳庵寺蹟記
 
 
聖壽山 上耳庵 事蹟 原文
 
謹按唐一行禪師記; 忽於一日, 道詵來拜於庭下, 行喜而迎之曰;"吾固願見, 何其晩也." 與語大悅留彼數月, 學得妙術, 而告歸. 行臨外謂洗曰;" 吾道東矣, 珍重珍重. 乃與一封丹書而戒之曰;"愼守之七年而後, 開見卽爲密囑於王氏家可也.", 洗奉誡而反. 依其敎待其時, 轉入松都, 訪見王隆, 誠心告之曰;"明年必生貴子矣.". 及期果生一男, 乃是 王太祖王建也. 年至十七, 與道詵共謀大事, 遍踏名山勝地, 登此山頂顧謂 王公曰;"美哉! 此山主巒特秀, 天子奉朝之像, 衆峰列立. 公慨賀禮之儀, 山名八公也, 而八聖次次出現, "是故此山興則邦國興, 此山亡則邦國亡矣. 今王公則八聖之始也, 果能成禱可此山, 可成大業矣." 王公依其言, 致齋百日而無驗, 更禱三日然後, 公沐浴於潭水, 有一竪子, 忽立於潭邊. 公曰;"汝居何村?" 對曰;"居于無名村也". 又曰;"汝姓名云何?" 對曰;" 佛姓也, 而佛姓則本無名也.", 忽登於層岩絶頂之上, 遂歌之曰:"天造一土, 無形無體, 一土塗身, 浴不洗滌.", 因忽不見. 公卽爲解得, 不勝歡喜, 大刻石面曰; '歡喜潭'也. 又按安邊釋王寺蹟與讖書云;'無學禪師避辛旽之禍, 隱於此山, 晦跡韜名矣. 唯我 太祖大王, 在田之時, 暫身於三家村裡, 一夜得異夢, 而聞近有一老嫗, 善解夢之說, 卽往見而說夢, 嫗黙然良久而語之曰:"大丈夫神夢, 一箇淺見老嫗何敢易言乎?, 此山不遠之地, 有一道師, 躬往詳問可也." 太祖然其言, 披荊尋踪, 果有一僧黙然獨坐, 是乃無學也. 太祖整襟端跪而告之曰;"生則村夫愚邙也, 而心思有疑, 敢瀆靜慮, 願大師開示吾心." 師起身而對之曰;"疑事何事也?". 曰;"某夜得一夢, 千家雞一時鳴, 萬戶砧一時舂, 萬樹花一時落, 手執鏡墮地, 而破一身八破, 負椽三箇入破屋, 頭戴鼎冠入大海, 是何兆也?". 師動容改坐而籌曰;"相君之像, 非臣子之相, 聽君之夢, 必成大業之兆也." 因而解之曰;"雞鳴者, 高貴之意也. 萬戶砧者, 響應之意也. 花落者, 能成實也. 鏡破則必有聲也. 負椽三箇者, 以成王字也. 鼎冠入海者, 大據就床之意也. 此皆必登王位之吉夢也. 愼勿漏泄, 以待其時, 雖然欲成大業, 不得神助其能易圖. 伏願大君誠禱聖神, 獲蒙靈助然後, 待時可也.", 太祖中心大悅, 乃謝之曰;"謹奉敎矣.", 太祖與無學, 至誠致齋, 凡五百日云爾. 按古蹟, 此山則名曰八公山, 此庵則號曰道詵庵. 此山有一僧名曰覺如也. 源行禪定, 性達心空, 隔山嶂而能見食烹魚, 而還生, 此是無學之弟子也. 無學告於 太祖曰:"貧道之弟子覺如者, 住在於全羅道雲水縣八公山道詵庵, 而專心禪定, 其工可知. 昔者國師道詵與王太祖, 周覽江山, 到彼山頂, 仰觀乾象, 俯察地理, 顧謂王太祖曰;'美哉! 此山可爲天應地助之處也. 公可禱之, 必蒙神助矣. 王太祖依敎誠禱, 永亨國祚.', 今公亦欲禱之, 捨此何之.". 無學乃專書于覺如曰:"今有應天之君子, 而李公不以我爲陋卑, 身自枉屈問以時事, 此乃斯人也. 汝之所棲處, 卽昔時王太祖所禱之處也. 汝當誠心禱之, 以助萬一.", 爲覺如依敎, 設壇致齋, 凡五百日云爾. 太祖大王, 聞而嘉之, 與無學駕臨山庵, 傳語覺如曰:"予披烟塵, 而來身猶不潔, 當三日齋戒後, 詣壇相見, 於是三日沐浴于歡喜潭, 每日有一沙彌, 同浴同樂, 三日後乃覓其僧, 而不得見, 問諸寺僧, 對曰;"寺無其僧也.". 太祖心知其神人相助, 乃曰;"吾浴此潭, 三淸陋身矣, 由是親接乎佛也, 而其僧卽佛也, 不可以無心致之.", 因大刻於石面卽三淸洞三字也. 太祖大王,更加嚴敬, 設壇致齋, 又使覺如致誠于十六聖像, 與七星尊位, 合滿九十三日夜, 神光通天, 瑞氣盤空, 一朶白虹, 亘撑於紫微宮矣. 自空中聞有聲曰;"李公某, 汝亨聖壽萬歲云" 如是者三矣. 是以天應地助, 果遂所志. 太祖大王, 旣等寶位, 卽封無學爲國師, 謂無學曰;"美哉! 八公山道詵庵, 可謂儒釋成功之所, 君王致誠之地也.", 乃更號曰;'聖壽山上耳庵', 以應山呼聖壽萬歲之聲, 叮嚀於上耳庵故也. 留諸僧侶晨夕奉香.
 
洪武甲戌九月 日
 
刱建年代
初創 新羅憲康王元年乙未(875) 道詵國師
唐僖宗乾符二年
距今戊寅(1938) 一千六十四年
佛紀二千九百六十五年
中刱 朝鮮李太祖王卽位三年(1394) 甲戌一月 日 覺如禪師
距今戊寅(1938) 五百四十五年
火後中刱 朝鮮隆熙王三年(1909) 己酉十月 日 金大圓禪師
距今戊寅(1938) 三十年
 
성수산 상이암 사적 번역문
 
삼가 당나라 일행선사의 기록을 살피건 홀연히 어느 날 도선이 찾아와 뜰 아래 에서 절을 올리자 일행선사가 밖으로 나와 맞이하여 말하기를 “내 진실로 만나보기 를 원했거늘 어찌 이리 늦었는가.”하고 더불어 크게 기쁨으로 맞았다. 그래서 수개 월 동안 이곳에 머물며 묘술을 배우고 나서 돌아가기를 아뢰었다. 때에 일행선사가 밖으로까지 나와 정중히 맞으며 이르기를 “내 도가 장차 동으로 가노니 진중히 여 기고 진중히 여기라.” 하며 이에 한 봉한 단서를 내려주며 경계하기를 “이를 칠 년 동안 잘 간직했다가 열어본 즉 왕씨 집안에 비 히 내려주라.”하자 도선은 정중 히 이를 받들고 돌아왔다.
해동으로 돌아온 도선은 일행선사의 가르침에 따라 송도로 들어 왕륭을 찾아보고 성심으로 아뢰기를 “명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 때가 되자 한 아들을 낳았으니 이가 곧 태조대왕건이었다. 그의 나이 열일곱이 되자 도선은 그와 더불어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 명산승지를 두루 답사하 는데 이 산 꼭 기에 올라 왕건에게 말하기를 “이름답도다! 이 산의 주된 봉우리는 특히 빼어나게 천자에게 조공을 바치는 형상이며 뭇 봉우리들이 열 지어 벌려 있도다.” 라 하자 왕공은 개연히 하례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산 이름을 ‘팔공’이라 한 뜻은 여덟 성인(임금)이 차차로 출현한다는 뜻이라. “이런 때문에 이 산이 흥하면 나라가 흥할 것이요 이 산이 망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 왕공은 곧 팔성 중의 비롯이니 이제 왕공은 과연 능히 이 산에서 기도를 잘 올리면 가히 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왕공은 도선의 말에 따라 백 일 동안 제祭를 올렸으나 아무런 효험이 없자 다시 삼 일 동안 기도한 후에 공은 연못 물에 목욕하 는데 어떤 이가 홀연 나타나 연못가 에 서 있었다. 공이 묻기를 “어느 마을에 사는 사람인가?”하자 답하기를 “이름도 없는 마을에 산다오.” 하니 또 묻기를 “그 의 성명은 무엇인고?”하자 답하기를 “성 은 불씨이니 불씨는 곧 본디 이름이 없소.”라 하고 홀연 층암절벽 위로 올라 드디어 노래하기를 “하늘이 한 줌 흙으로 빚었으니 모양도 몸도 없도다. 한 줌 흙으로 온몸 을 발랐으나 씻으려 해도 씻을 수 없도다.”라 하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찾을 수 없었다. 공은 곧 환희로운 마음을 이길 수 없어 크게 석면에 ‘환희담’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또 안변 석왕사사적과 참서를 살피건데 ‘무학선사가 신돈의 화를 피하여 이 산에 서 몸을 숨겨 자취와 이름을 감췄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태조대왕께서 아직 왕위 에 오르시기 전 삼가촌 속에 잠시 머무르셨는데 어느 날 밤에 이상한 꿈을 꾸어 근방에 한 노파가 해몽을 잘 한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노파를 찾아 해몽해 주기를 원하 는데 노파는 말없이 한참 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장부의 신기한 꿈을 한낱 천견을 늙은이가 어찌 감히 말할 수 있으리오. 이 산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 도사가 계시니 몸소 찾아 상세히 묻는 것이 옳겠소.”라 하였다.
태조께서 노파의 말을 옳게 여기고 가시밭을 헤치고 찾으니 과연 한 스님이 말없이 홀로 앉아 있는데 이가 곧 무학대사 다. 태조께서 옷깃을 바르게 하고 무릎을 꿇은 채 아뢰기를 “저는 한낱 촌부로 어리석은 백성이옵니다만 마음속에 의심되는 바가 있으나 감히 이를 아무리 잘 생각해 봐도 알 수 없사옵니다. 하오니 원컨 큰스님께서는 제 마음을 활짝 열어 주시옵소서.”라 하자 스님은 몸을 일으켜 답 하기를 “의심스런 일이 어떤 일이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답하기를 “어느 날 밤에 한 꿈을 꾸었는데 천가의 닭들이 일시에 울고, 만호에서 다듬질 소리를 내자 일시에 방아를 찧고 온 나무에 달린 꽃이 일시에 떨어지고 손에 집었던 거울 이 땅 바닥에 떨어지고 한 몸이 여덟 갈래로 부서지고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무너진 집으로 들어가고 머리에 솥을 이고 큰 바다로 들고 하였으니 이는 무슨 징조이옵니 까?”하고 물었다.
스님이 이 말을 듣고 풀이하기를 “닭이 울었으니 고귀하게 될 뜻이요 온 집에서 다듬잇소리가 났으니 메아리가 있을 뜻이요 꽃이 졌으니 능히 열매가 이뤄질 것이 요, 거울이 깨어졌으니 반드시 소리가 날 것이요 서까래 셋을 짊어졌으니 임금 왕 자를 이룬 것이며 솥을 머리에 쓴 채 바다로 든 것은 크게 용상을 향해 나갈 뜻이라 이는 다 반드시 왕위에 오를 길몽이요. 하오니 삼가 누설치 말고 그때를 기다릴 것이오. 비록 그러나 업을 이루고자 하면 천신의 도움을 얻지 못한다면 능히 쉽 게 이룰 수 없사오니 엎드려 바라건 군께서는 성신께 정성껏 빌어 신령의 도움 을 얻은 연후에 때를 기다리는 것이 옳소.”라고 하였다.
태조께서는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 이에 사례하고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사옵니다.”라 하고, 지성으로 재를 올리되 무릇 오백 일 동안이나 올렸다 한다.
 
또 고적을 살피건 이 산 이름을 팔공산이라 하고 이 암자 이름을 도선암이라 부르는데 이 산에 사는 한 스님을 각여라고 하는 스님이 있다. 그런데 그는 원래 선정을 잘 닦고 성품을 통달하여 마음을 비웠기로 깊은 산중에 떨어져 있어도 능히 세속에서 생선을 삶아 먹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이었으나 이가 환생하여 무학의 제자가 되었다. 그런데 무학이 태조께 아뢰기를 “빈도의 제자로 각여라는 자가 있는데 그는 전라도 운수현 팔공산 도선암에 머물고 있는데 오롯이 선정을 닦아 그 공을 가히 알만합니다. 옛날 국사 도선이 왕태조와 더불어 강산을 두루 유람할 제 이 산꼭 기에 이르러 우러러 하늘의 기상을 살피고 굽어 지리를 살피고 나서 왕태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아름답도다! 이 산이야말로 가히 하늘이 응하고 땅이 도울 만한 곳이로다. 공이 이곳에 기도를 올리면 가히 반드시 하늘의 도움을 입을 수 있으리라 하 소. 그래서 왕 태조는 그 가르침 로 성심껏 기도를 올려 길이 나라를 세웠소. 그러하니 이제 공도 또한 이곳에서 머물며 기도를 올리는 것 이 좋겠소.”라 하였다.
무학이 이에 각여에게 서신을 보내 말하기를 “이제 응천의 군자가 있는데 이공은 나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몸소 나를 찾아와 시사를 물었더니 바로 이 분이다. 그러니 그 는 머물고 있는 곳은 곧 옛날 왕 태조가 기도를 올렸던 곳이라 그 도 마땅히 성심으로 기도를 올려 만에 하나라도 도우면 하네.”라 하자 각여는 가르침 로 단을 만들고 재를 무릇 오백 일 동안이나 올렸다 한다.
태조대왕께서는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겨 무학과 같이 산암에 이르러 각여에게 말하기를 “내 티끌 세상을 벗어나 왔기로 몸이 깨끗하지 못하니 마땅히 삼 일 동안 목욕재계한 뒤로 단을 찾을 것이라 하고 이때 환희담에 들어 목욕하 는데 매일 한 사미승이 찾아와 같이 목욕하며 같이 즐겼더니 삼 일 뒤에 그 사미승을 찾아도 보이지 아니하거늘 여러 사찰에 있는 스님들에게 물어도 답하기를 ‘저희 절에는 그런 스님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태조께서는 마음속으로 이는 신인이 도운 일이라 여기고 이에 말하기를 “내 이 연못에 목욕하여 내 몸을 삼청에 들 수 있도록 씻었도다. 이로 말미암아 몸소 부처를 뵈온 것이니 나와 같이 목욕을 한 그 스님은 곧 부처라 가히 무심으로 지나칠 수 없다.” 하고 인하여 석면에 ‘삼청동’이라는 세 글자를 크게 새겼다. 그런 뒤 태조대왕께서는 더욱 엄숙히 공경하는 태도로 단을 모아 정성을 올리고 다시 각여로 하여금 십육 성상과 칠성종위께 치성토록 하여 도합 만93일 동안 정성을 올리니 신비로운 빛이 하늘까지 통하여 상서로운 기운이 공중에 자리하며 한 줄기 흰 무지개가 그 로 뻗어 자미궁에까지 뻗어 들었더니 공중으로부터 “이공 아무야 그 는 성수만세를 누릴 것이로다.”하는 소리가 세 번이나 들려왔다. 이는 천지가 응하고 도운 일이라 과연 품었던 뜻이 드디어 이뤄진 일이었다.
태조대왕께서 이미 보위에 오르시자 곧바로 무학을 국사로 봉하고 무학에게 이 르시기를 “아름답도다! 팔공산 도선암은 가히 유교나 불교가 공을 이룬 곳이며, 군 왕이 치성을 올린 장소다.”하시고 이에 다시 ‘성수산 상이암’이라 불 으니 그 뜻은 이 산에서 성수만세 소리가 응하여 나라를 세우게 되었고 정녕코 귀 위까지 만세를 부른 경사를 비추었던 암자 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이런 연유로 많은 스님들이 머물며 조석으로 향을 받들게 되었다.
 
홍무갑술(1394년 태조3년) 9월 일
 
창건연대
초창 신라헌강왕원년을미(875) 도선국사
당나라 희종 건부 2년
지금 무인(1938)으로부터 1064년
불기2965년
중창 조선 이태조왕 즉위3년(1394) 갑술 1월 일 각여선사
지금 무인(1938)으로부터 545년
불탄 뒤
중창 조선 융희왕 3년(1909) 기유 10월 일 김대원 선사
지금 무인(1938)으로부터 30년
 

 
※ 어필각중수문(御筆閣重修文)
 
聖壽山 上耳庵 御筆閣 重修 原文
 
聖壽山上耳庵 御筆閣慈善惠捨重修文
御筆閣, 昔太祖大王, 致誠于聖壽山, 三淸洞三字, 親筆于石面, 而前孫秉浩氏任扶安郡守, 時來任所建者也. 觚稜聳空, 丹碧照耀, 山與庵倍光, 詩人墨客客, 莫不歎賞吟賀矣, 不幾年, 風雨磨洗, 浸漏傾覆. 更無孫秉浩, 同志嗣葺之人, 御筆三字, 塵面苔衣, 兀立於香爐峯紫煙中. 嗚呼惜哉! 有聖壽山故, 有上耳庵, 有上耳庵故, 有御筆閣, 今有山庵, 而無筆閣, 有山庵而無筆閣而可乎? 有山庵而有筆閣而可乎? 願君子善男善婦人, 聞此說則不見而如見, 亦有感舊振起之心, 此意仰禀于僉尊座下, 山則聖壽也, 若禱命福, 去此山而何之, 閣則王閣, 若施功德, 捨此閣而奚往. 願僉員, 慈善惠捨, 大王之尊靈與聖壽之巨靈, 同是感應, 處分千萬伏祝.
善男善婦人 僉座下
上耳庵化主 金 五 山
 
성수산 상이암 어필각 중수 번역문
성수산상이암 어필각 자선혜사 중수문
 
어필각은 옛날 태조대왕께서 성수산에서 치성을 올리실 때에 ‘삼청동’ 세 글자를 친히 석면에 쓰신 것으로 전임 부안군수 손병호 씨가 신임으로 오시어 세운 각이다. 마름모진 바위가 공중으로 솟고 붉은 햇빛이 푸른 바위를 비춰 빛나기로 산과 암자가 더욱 빛나 시인묵객들이 감탄하지 아니하여 누구나 다 한 마디 읊는 곳이라. 그런데 얼마 후에 풍우에 씻기고 갈아지며 습기에 젖어 무너질 지경에 이르다. 그래서 다시 손병호 씨 같은 분과 뜻을 같이하여 이어 일으킬 뜻을 지닌 자가 없다면 어필 세 글자는 그 로 티끌에 묻히고 이끼 속에 가려진 채 향로봉 짙은 안개 속에 우뚝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아! 슬프고도 애석하도다. 성수산이 있기로 상이암이 있고 상이암이 있기로 어필각이 있는데 이제 산과 암자만이 있고 필각이 없는 지경이라 산암만이 있고 필각이 없는 것이 옳은 일인가? 산암도 있고 필각도 있는 것이 옳은 일인가?
원컨대 모든 군자와 착한 남자 착한 부인들은 이 말씀을 새겨 들은 즉 보지 않아도 본 것과 같이 여겨 또한 옛일에 깊은 감탄을 내어 다시 일으킬 마음을 일으킬 것이라. 산인 즉 성수산이니 만약 명복을 빈다면 이 산을 버리고 무슨 산을 찾을 것이며 각인 즉 왕의 글이 모셔진 각이니 만약 공덕을 베푼다 한 즉 이 각을 버리고 어디를 향해 갈 것이리오.
원하옵건대 여러 어른들께서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어 왕의 존령과 성수의 큰 령이 한 가지로 감응할 수 있도록 처분해 지시길 천만 엎드려 빕니다.
선남선부인 첨좌하
상이암 화주 김 오 산
 
 
무량수전無量壽殿
 
 
상이암의 중심 건물로 2002년도에 지었다. 기단 위에 원형 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운 건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외1출목의 주심포작으로 비교적 간결하게 짜 올렸으며 풍판을 달았다.
 
법당 안에는 아미타불을 모셨으며 협시불은 모시지 않았다. 전각이 고산지역의 가파른 지형이라 법당의 높이를 최 한 낮게 설계했으며 내부의 닫집도 생략하였다. 다만 닫집 자리에는 붉은 바탕에 금빛으로 원경지大圓鏡智의 뜻을 담은 원을 그려 넣었다. 후불탱화는 극락도를 봉안했는데 따뜻한 황색 계통의 색감을 사용하였다. 화원은 신진환·이동기·양승태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단청장도 기록했는데 김경 한·양승태·이인섭 등 3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장은 우물반자로 처리하 고 내부 에는 출목을 생략하였다. 법당 안의 좌우에는 래 도來迎圖와 팔상도八相圖를 봉안하였다.
 
 
칠성각七星閣
 
 
칠성각은 2004년에 설립하였다. 기단 위에 다듬은 원형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에 초익공 겹처마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목조기와집 이다. 편액은 ‘칠성각七星閣’ 이란 편액은 창암 이삼만의 글씨이며 주련은 걸려 있지 않다.
 
창호는 빗살창으로서 중 앙 칸과 좌우 협칸 모두 2분 합으로 되어 있다.
 
내부에 모셔진 존상은 치성광여래좌상과 지장보살상 및 16나한상이고, 불화로는 칠성탱을 중심으로 지장 탱·독성탱·장수탱 2기·현왕탱 등이 모셔져 있다. 화기에 의하면 지장탱은 불기 2991년 5월 20일에 조성된 것이고 독성탱과 현왕탱은 모두 불기 2996년 윤 7월에 조성하였으며 장수탱은 불기 3002년에 금어 장원 운담長源 雲潭이 조성하였다. 전각의 외부에는 운판이 걸려 있다.
 
 
산신각山神閣
 
 
산신각은 6·25 전쟁 이후 1970년 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원형 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정면과 측면이 모두 1칸씩의 아담한 건물이다. 이익공 홑처마의 맞 배지붕으로 풍판을 달았는데 네 기둥 위에 앙서와 쇠서를 장식하였다. 바닥은 누마루 형식을 하고 있으며 현재 편 액이나 주련은 달지 않았다. 내외부에는 단청이 되어 있으 며 벽화도 그려 있다. 외부의 벽화에는 학을 탄 선비가 그 려져 있다. 내부에는 매화·연 꽃·소나무 등이 그려져 있다. 내부의 천장은 우물반자이고 바닥은 쪽마루 형식을 하고 있다.
 
내부에 모셔진 불화는 산신탱화이다.
 
내부의 벽에는 2001년 7월에 중수된 ‘산신탱 중건기’가 걸려 있다. 현재의 건물은 2009년에 보수되었다고 한다.
 
 
어필각御筆閣
 
어필각御筆閣은 상이암 입구의 암반 위에 위치해 있다. 둥근 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정면, 측면 각 1칸의 작은 건물로 지어졌다. 이익공 형식을 취했지만 앙서와 쇠서를 장식해서 화려하게 보이며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풍판을 달았다. 내 외부에는 단청을 화려하게 했다.
 
 
어필각 안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썼다고 전하는 ‘삼청동三淸洞’이라고 새긴 자연석 비가 있다. 석질이 비교적 무르고 조직이 거칠어서 각자의 새김이 정 교하지 못하며 오랜 시일에 풍마우세로 원 필의를 전하지는 못하나 유려한 필치이 다.
 
비각 옆에는 1922년에 세운 ‘조선태조고황제어필삼청동비각중수비’가 있다.
 
 
상이암부도上耳庵浮屠
 
혜월당부도慧月堂浮屠
 
 
상이암의 혜월당부도는 두곡당부도와 함께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24호로 지 정되어 있다. 혜월당 부도는 상이암 입 구 300m 전방에 있었으나 2002년 9월 도난의 우려가 있어 상이암 경내로 옮겼 다. 혜월당부도의 형태는 지 석은 평평 한 모양의 다듬지 않은 자연석 암반을 사용하고 그 위에 기단을 놓았다. 기단의 석재는 지극히 자연적인 원형의 화강암을 다 듬어 사용하 고 그 위에 항아리 형태의 탑신부를 올렸다. 탑신부 전면에 ‘혜월당慧月堂’ 이라고 해서楷書로 새겨 놓았다. 다시 그 위에 네 귀가 반전된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 屋蓋石을 올려놓았다. 옥개석의 낙수면 각도는 지극히 완만하여 거의 수평에 가까우며 기와골을 조각하지 않은 단조로운 형태이다. 상륜부相輪部는 상륜받침을 겸한 복발을 조각하고 그 위에 보륜寶輪을 조각한 다음 보개寶蓋와 보주寶珠를 차례로 조각하였다. 부도의 크기에 비해 기단은 빈약한 편이며 옥개석은 지나치게 큰 느낌을 준다. 제작연 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두곡당부도杜谷堂浮屠
 
 
이 두곡당부도는 혜월당부도와 함께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24호로 지정되어 있다. 두곡당 부도는 상이암 입구 300m 전방에 있었으나 2002년 9월 도난의 우려가 있어 상이암 경내로 옮겼다. 넓고 두툼한 방형의 자연석을 지 석으로 삼아 그 위 에 기단을 놓았다. 기단은 팔각형의 일체형으로 각 면에는 문양을 새겼다. 그 위에 석종형石鐘形의 탑신을 세웠는데 이러한 형태는 고려 말과 조선 초에 나타나는 단순 화된 석종형부도의 일종이다. 형태의 기원은 인도의 복발탑에서 유래되었으 며 그 형태가 종과 같아서 붙여진 이름 이다. 탑신의 정면에는 두곡당杜谷堂이 라고 해서楷書로 새겼으며 특별한 문양 은 보이지 않는다. 상륜부는 석종형 부 도의 일반적인 형태로 지극히 단순화시킨 복발과 보륜과 보개만을 형식적으로 조각하여 처리하였다.
 
방형옥개석부도方形屋蓋石浮屠
 
 
이 부도는 현재까지 특별한 명칭이 없어서 편의상 옥개석屋蓋石의 형태가 보기 힘든 방형方形으로 되어 있어 붙 인 이름이다. 원래 이 부도가 있던 자 리는 법당과 요사채의 사이에서 옮긴 부도로 전라북도유형문화재 150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도의 형태는 넓은 사각의 자연석을 지 석으로 삼아 그 위에 기단을 올렸다. 기단은 하 와 중 와 상 로 구분할 수 있으며 하 석은 사각으로 조각하였다. 중 석은 팔각의 형태로 조각하 고 상 석은 원형의 앙련을 조각하 는데 겹꽃으 로 소박한 느낌이다. 탑신은 종형의 모양에 문양을 조각했고 옥개석은 사각으로 반전 없이 조각했는데 특이한 것은 낙수면의 윗부분 사면에 각각 높은 박공을 조각 했다. 그 위에 차례로 복발과 보륜 그리고 보개와 보주를 차례로 조각한 일반적인 상륜부를 올렸으나 탑신에 비해 상륜부가 비 한 느낌이 든다.
 
상이암 석조上耳庵 石槽
 
 
상이암 경내에는 길이 163cm·폭 80cm·높이 62cm·깊이 34cm의 오 래된 석조石槽가 있는데 석조의 몸 통에 있는 음기를 보면 황태윤이 시 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태윤 은 조선 말기 때 사람으로서 상이암 석조는 조선 말기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만든 석조는 현재 사용되지 않고 뜰에 보관 중이며 현재는 최근에 만들어진 석조를 사용하고 있다.
 
오봉리 구천사五峯里 龜泉寺
 
본 사찰은 성수면 오봉리 산 22-1번지에 있다. 구천사가 있는 회남산은 강화노씨 들 종산이다. 회남산은 정북향 고덕산 상봉 연화봉을 안으로 하고 좌우 청룡이 있 다. 구천사라는 이름이 있기 전에는 산제당이라는 이름으로 여자 보살님이 부처님 을 모시고 있었다. 그분이 작고하고 얼마간 비워 두었던 암자를 지금의 혜경스님이 다시 복원했다. 구천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혜경스님이 외지에 있을 때 거북이 가 꿈에 서너 차례 나타나 가슴에는 구천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물을 흘리면 서 절을 했다고 한다. 꿈에 나타난 동자승이 이끄는 로 따라서 이곳에 왔더니 꿈에서 본 것과 같은 형상이었다. 이곳에 내가 모셔야 할 부처님이 계시는구나 하 고 1992년부터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거북이 두 마리가 회남산 상봉에서 내려오다 가 한 마리는 남원윤씨들 도선산 쪽으로 뻗어 있고 한 마리는 구천사 샘으로 뻗어 있다고 했다. 마치 바위 모양이 거북이가 구천사 옹달샘으로 입수하는 형상이다. 이 사찰의 창건연 는 알 수 없으나 현재 한불교 총화종으로 사찰이 등록되어 있다.
 
성수리 성지사聖志寺
 
한국불교태고종으로 성수리 493번지에 있다. 창건일은 1987년 6월 22일이고 창건주는 松庵 이강윤李康潤 처사다. 처에서 살다가 수행을 목적으로 이곳에 들어와 성지사라는 암자를 지었다. 天道祭, 四十九祭 등 불공을 드리러 온 신도들이 있다. 웅전에는 석가모니가 모셔져 있다.
 
 
 
1.1.2. 성수의 없어진 사찰
양지리 석성암陽地里 石星庵
 
본 사찰은 성수면 양지리 산 55번지에 있다. 이 사찰의 창건연 는 알 수 없으나 현재 한불교 태고종으로 사찰이 등록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에 전주 광양 간 고 속도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폐찰되었다.
 
전 가지사지傳 伽智寺址
 
『운수지雲水誌』에 의하면 ‘재현동이십오리성수산변궁협중운금무在縣東二十五里聖壽山邊窮峽中云今無’ 임실읍에서 동쪽으로 25리 떨어져 있는 성수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임실읍지任實邑誌』 불우조佛宇條에 보면 ‘재현동삼십오리성수산변궁협중在縣東三十五里聖壽山邊窮峽中’ 유승홍익초창우상왕방리동곡중금무有僧弘益初創于上枉訪里東谷中今無’라 하였다. 즉 이 사찰은 임실 현으로부터 35리 성수산 궁협窮峽 가운데上枉訪里 에 있었는데 승려 홍익 사가 왕방리 동쪽 골짜기에 창건하였다가 뒤에 성수산으 로 이건 중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건하여 중창한 위치가 어느 지점인 지는 알 수가 없다.
 
문암사門岩寺
 
『운수지雲水誌』 불우조佛宇條에 의하면 ‘在東面上耳菴西南谷中’이라고 적혀 있는데 상이암 서남 골짜기라고 하면 왕방계곡으로 판단되나 확인할 길이 없다.
 
삼봉리 봉죽암三峰里 鳳竹庵
 
삼봉리 산 8번지 내 삼봉산(529.4m) 남서쪽 밭뜸 마을을 향하여 뻗어 내린 능선의 말단 부위에 해당된다. 능선의 남서쪽 기슭 나무밭에 자리한다. 삼봉마을 주민들을 상으로 이루어진 면담에서 발견되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삼봉산 남서 쪽 기슭 중단부에 개설된 임도에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곳에는 건물지의 석축과 초석, 기와편이 널려 있다고 한다.
 
도리채골 암자터
 
성수면 왕방리에서 원증마을 쪽으로 약 500여m쯤 가다가 여산송씨 종산을 돌아 다리를 건너면 송씨 재실 못 가서 우측으로 임도를 따라가면 300m 지점에 작은 터가 있는데 이곳이 공을 들이던 암자 터라고 한다. 이곳에 암자가 있을 때에는 나씨가 살았으며 없어지기 전까지는 왕방리에 살고 있는 최 철 씨가 살았는데 지 금은 완전 폐허로 잡목과 풀이 우거져 찾아보기 힘들다.
 
북당골 암자터
 
왕방리 원증마을에서 700여m쯤 가다가 수문장가든 아래 좌측으로 직진하여 골짜기로 들어가면 수 를 살아왔다는 안명권 씨가 살고 있는 집이 있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500여m쯤에 위치한 깃 봉 밑으로 8부 능선에 공을 들이던 집터가 있는 데 이곳을 북당골이라고 한다. 북당골에는 아낙네들이 공을 들이던 곳으로 과거에 는 절집을 짓고 부처님를 모셨는데 지금은 완전 폐허되어 확인할 수 없고 또한 길도 없고 절집도 없어진 상태에 현장 확인이 불가능하여 안명권 씨의 증언으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지역 주민들에 의하면 공을 들이던 북당골에 있는 집을 처사집이라고 불다고 한다. 안명권 씨 집에 한 내력을 확인한 결과 안명권 씨 조부께서는 경남 양에 살았는데 천주교를 믿어오다가 신유박해 때 박해가 심하여 남원으로 이사 를 하였으며 다시 장수로 이사하 고 또다시 임실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 또한 여의 치 않아 이곳 계곡으로 들어와 은둔하며 살았다고 한다. 조부가 돌아가신 후 아버 지에 이어 본인이 3째 살고 있는데 조부가 들어오시기 전부터 기와집이 5채가 있었다는데 현재의 터에 두 집과 건너편으로 서너 집이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주위를 살펴보니 지금도 많은 기와편이 흩어져 있는데 살펴보 니 이는 일제강점기 와편으로 보인다. 집터에서 보면 북서쪽으로 매냄이 계곡과 집 앞의 계곡에는 이상하게 생긴 큰 바위가 누워 있어 주인에 물으니 예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송장바위라고 한다.
 
전 심원사지傳 深源寺址
 
판마을에서 동쪽으로 임도를 따라 오르면 300여m쯤에 산서면 학선리에서 넘어오는 옛길이 있고 옛길을 건너는 계곡에는 각시소(폭포)가 있으며 그곳에서 위로 오르면 텃번지라는 옛 마을 터가 있다. 마을 터를 지나 깃 봉 정상 쪽으로 오르면 8부 능선에 심원사 절터가 있다. 이곳 절터에는 언제 창건되었고 언제 훼철이 되었 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흔적만 남아 있다. 이곳 절터는 나무와 풀이 우거져 찾아 오를 수 없는 곳으로 이곳에 사는 정성기 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곳에서 그릇 과 기와편이 발견되었고 절 앞 낮은 곳에는 석축이 쌓여 있다. 뒤쪽과 앞에는 깎아 지른 듯한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한다. 절터의 부지는 약 700여 평방미터로 비교적 작다. 이곳은 과거에 산서면 사람들이 성수 상이암에 다닐 때 이곳 심원사 를 지나 재를 넘어 갔다고 한다.
 
역사적 기록을 찾아볼 때 창건연 나 폐사연 는 전혀 알 수가 없으나 다만 여지 도서輿地圖書에서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 도서에는 ‘심원사재현동삼십리성수산하록 深源寺在縣東三十里聖壽山下麓’이라 기록되어 있고 상이암도 三十里가 떨어졌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심원사가 판리에 있다는 것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任實邑誌 佛宇條를 보면 심원사에 관하여 ‘在聖壽山下今無’라는 기록이 있어 심원사는 성수산 아래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심원사는 적어도 18세기 후반까지는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임실군청 공보실에서 발행한 「내 고 장 전통문화」편에 판大版이란 명칭은 마을 동쪽의 산골 명칭이 판형(넓은 들판)이라 하 고 넓은 들판에 마을이 들어섰다고 하여 판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왕방리 사지枉訪里 寺址
 
 
왕방리에서 원증마을 아래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곳에 옛 절터가 있는 데 이곳은 왕방리 449번지 지로 되 어 있다. 이곳 절터가 있는 곳은 현지 주민인 김 곤(76세) 씨의 소유로 현 재 집을 지어 살고 있다. 이곳 절터에 는 기와편이 많았는데 농사를 지으며 많이 묻혀 버리고 일부는 몇 년간에 걸쳐 동국 학교 교수와 학생들이 방문하여 많은 양의 와편을 수습하여 갔다고 주 인인 김 곤 씨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주인이 보관 중인 망새 와편 1점과 답사 당시 수습한 1점의 와편을 분석한 결과 연 가 순치順治 六秊 기축己丑으로 적혀 있어 1649년으로 판단된다. 글자 내용을 보아 시주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이곳 주민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 절이 있을 당시 쌀을 씻으면 쌀 씻은 물이 흘러 오봉리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또한 역사적 기록을 보면 왕방리 사지는 임실 현에서 二十里 정도 떨어져 있고 심원사와 상이암은 임실 현에서 직선거리로 三十里가 떨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번 조사로 왕방리의 심원사와 왕방사지 그리고 상이암이 현지 조사와 기록으로 위치가 밝혀진 것으로 본다.
 
오봉리 사지五峯里 寺址
 
조치마을에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공을 들이던 곳이 있는데 이곳에는 작은 집을 짓고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천씨가 거주하며 공을 들이던 곳으로 주위의 많 은 부녀자들이 찾던 곳이라고 한다.
 
대왕마을 절터골
 
왕마을에서 서북쪽으로 300여m지점 8부 능선 산골짜기에 위치한 절터골은 먼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전하며 그곳에는 큰 바위와 돌계단도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서는 70년 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봄철에 화전놀이도 하 던 곳이 지만 현재는 이용되지 않고 있다.  
 
 
 

1.2. 나. 기독교

 
오류리 오류교회
 
 
오류교회는 1932년 6월 15일 에 집주인인 강수희 씨와 송성 녀, 이성애, 최재림 외 어린이 를 포함 다수가 참여하고 위인 사 목사가 참석하여 교회를 설 립하 고 2년 후인 1934년 6월 15일 당초 예배를 보았던 성수 면 오류리 227번지 강수희 씨 집을 매입하여 개조 후 12~13명이 모여 예배를 보기 시작하였다.
 
그 후 1936년 3월 5일 배 신 전도사가 예배를 보았고 3월 10일 자로 이경순 목사가 부임하여 교회를 운영하였다. 1938년 3월 10일 최석철 목사가 부임하여 예배를 보았으며 1942년 3월 10일 양동조 목사가 부임하여 교회를 운영하여 오다가 일제 탄압으로 인하여 예배를 드릴 수가 없게 되자 1943년 예배당을 오류마을에 매각하 여 마을회관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해방이 되자 1946년 5월 6일 하진풍 집사의 꾸준한 노력으로 다시 찾아 교회를 복원하였다.
 
1950년 3월 15일 윤남하 목사가 부임하여 교회를 운영하였으며 1955년 3월 15일 선교사인 조요섭 목사가 부임하였다. 1956년 4월 12일 최의종 목사, 1958년 5월 21 일 전주완산교회에서 김윤식 목사, 1965년 5월 30일 유성용 목사, 1972년 1월 김진 원 전도사가 부임하 고 1974년 2월에는 박윤남 집사가 교회부지 195㎡를 기부하였다. 이로써 1975년 3월 22일 건평 30평의 붉은 벽돌에 슬레이트 지붕으로 교회당 을 준공하였다.
 
1980년에는 이모세 전도사가 부임하 고 1983년 8월에는 시멘트 벽돌로 된 건평 50평의 오류교회 교육관을 건립하였다. 1984년 3월 18일에는 주건국 목사의 안수 로 김용관 전도사가 부임하 고 1987년에는 사택 건물을 짓기 위하여 529㎡의 밭 을 구입하여 붉은 벽돌로 23평짜리 사택을 완공하였다. 1989년 8월 22일 배태성 목사가 부임하여 교회를 운영하 고 1993년 3월 최시천 전도사, 1997년 10월 이만 재 전도사 2000년 5월 11일 이평준 목사가 부임하였다. 2000년 9월 19일 30평의 교회당을 증축하 고 2009년 7월 19일 정성일 목사가 부임하여 오류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다.
 
양지리 성수교회
 
 
성수면 양지리에 교회가 세워 지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 다. 초창기 성수 소재지인 양지 리에는 교회가 없어 오류리에 있는 교회로 다니게 되었다.
 
1948년 2월 26일에 사건이 발생하 는데 누군가에 의해서 성수지서가 불에 타고 순경이 죽게 되었다. 지서에서는 사건 책임자를 가려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지서에 가두 고 구타를 하였다. 이때 임실교회에 시무하던 이경순 목사가 경찰서장에게 교인이 라고 확인해 주면 그 사람은 풀려나게 되었다. 그를 계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이 때문에 오류교회당이 비좁아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그 러던 중 임실지방 도 제직회 월 1차 모임을 갖고 거두어진 헌금의 사용처를 의논하 던 중 하진풍 성도가 무보수로 목회를 하고 있는 성수교회 양종권 씨에게 생활비로 주자는 의견이 모아져 결정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임·순·남 지방의 선교사인 위인사 선교사가 이 사실을 알고 선교비를 생활비로 주겠다고 하 고 다시 도 제직회 헌금의 사용처를 의논하던 중 교회당이 없는 곳에 건축비로 주자는 의견이 결정되었다. 성수교회가 그 헌금으로 교회 건축 재목을 구입하 고 준비하던 중 6·25사변으로 인하여 준비하 던 재목이 인민군 에 의해 불태워져 모든 것이 원점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그 후 윤당섭 씨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이다가 또 최정오 집사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얼마 후 조요섭 선교사가 유현세 전도사를 성수교회 에 파송하였다. 그 후 유현세 전도사가 목회하던 몇 년 동안에 교회당이 없이 장소 가 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그 후 성도들의 기도와 헌금으로 지금의 성수교회당의 자리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면서 지금의 교육관 자리에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다. 어떤 성도는 성수산에서 벌목한 자신의 목재를 교회에 헌납하 고 성도들이 성수산에서 교회까지 목재를 운반하여 교회를 짓기 시작하다. 교회를 건축하는 중 비가 너무 많이 내려 기둥으로 쓰 던 나무가 썩어서 성도 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든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신도들의 기도와 헌신과 봉사 속에서 어떤 교인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패물을 팔아 오기도 하였으며 청년들은 교회를 짓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모든 교인들은 기쁨으로 봉사하여 교회를 짓는 데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1971년 6월 27일 안 목 전도사가 부임하여 2년간 사역하 고 1973년 9월 안종철 전도사가 부임하여 2년간 사역하였으며, 1975년 8월27일에는 심상봉 목사 가 부임하고 3년간 사역하여 초창기 교회의 모습은 힘들었지만 성수교회를 아름답 게 성숙시켰다. 그래서 평균적으로 100여 명의 성도들과 주일학교 127명, 그리고 중고등부 31명이 출석하여 예배를 드렸다.
 
그 후 1978년 11월 5일 이명남 전도사가 부임하 고 성도들의 기도와 노력으로 현재 예배드리고 있는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다. 교회를 짓는 동안 이명남 전도사가 일을 하 고 그 기간 중에 1981년 고선주 교육전도사가 부임하였다. 교육전도사로 인해 성수교회에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거듭나게 되었으며 초·중·고등학생들이 아침에 학교 가기 전 교회에 와서 기도한 후 학교에 가고 수업이 끝나면 교회에서 다시 기도를 마친 후 집에 가곤 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교회에 다니던 학생들 까지도 성수교회에서 기도하곤 하였다.
 
1982년 6월 28일 김도현 전도사가 부임하여 2년 동안 근무를 하였다. 교회를 건 축할 때 어떤 성도는 벽돌을 옮기는 일을 너무 많이 하여 허리가 굽는가 하면 어떤 성도는 밤이 늦도록 밥을 굶어가며 교회를 신축하는 데 일을 하였으니 성수교회는 성도들의 땀과 기도가 배어 있는 곳이다. 지금은 전문 기술자들이 건축을 하지만 성수교회는 성도들의 손으로 땀과 정성과 기도로 지어졌다.
 
1984년 9월 29일 류지영 목사가 부임하 고 80년 에 들어 이농현상이 심해져서 농촌에는 젊은이보다 노인들이 농촌을 지키게 되는 상황에서 류지 목사는 10년 동안 성수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어려운 농촌의 현실이지만 많은 젊은이들을 말 씀으로 양육하여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가더라도 성수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이 많 아지게 되었다.
 
그 후 1992년에 50년대에 지어졌던 구 교회가 헐리고 교육관이 지어지게 되었다. 1993년 5월에 성수교회는 처음으로(심인만 장로, 심 순 장로, 윤한종 장로, 심홍순 권사) 3명의 장로와 1명의 권사가 취임을 하였다.
 
1994년 6월 14일 현재 시무하고 있는 주정원 목사가 부임하 고 농촌교회에 한 비전을 갖고 농촌교회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소외되어져가는 노인들을 교 회로 이끌고 다양한 행사를 통하여 교회를 부흥시키면서 교육 분야에도 주력함으 로써 학생들을 교회의 일꾼이 될 수 있도록 하여 성수교회가 더욱 부흥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2003년 9월 교육관 리모델링을 완공하고 2005년 교회 예배당 리모델 링을 완공하면서 더욱더 교회의 질을 향상시켰다.
 
성수교회는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있어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공간과 넓은 주차장이 있다. 학생들을 위한 충분한 교실이 있어 성경공부를 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또한 작은 도서관이 있어 성도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가족 텃 밭을 운영하여 도시의 성도들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있다. 평신도 사형교회로서 평신도를 사역자로 훈련시키고 있다.
 
월평리 월평교회
 
 
월평교회는 오류교회에 다 니던 진흑룡·이이화·박순 자·송봉순·채귀례·박복순 등이 중심이 되어 월평리 861 -62번지(지 382㎡)에 1957 년 10월 1일 교회를 설립하다. 강 순 전도사가 초 교 역자로 부임하여 교회를 이끌어 오다가 1960년 김강민 전도사에 이어 1961년에는 조애 전도사가 부임하여 교 세를 확장하였다. 그 후 1964년에 이기성 전도사, 1969년에는 조성수 전도사가 부 임하여 교세를 키우는 과정 중 1970년에 월평리 861-61번지(하천 715㎡)와 861-62번 지(하천 287㎡)를 매입하여 3필지에 1,384㎡를 확보하여 1974년 2월 23일 교회본당 을 신축하였다. 1976년에는 유경재 전도사가 부임하여 교회를 이끌어왔고 1978년 6월 5일 진흑룡 씨가 초 장로로 임직하였다. 1979년 정천모 목사가 목사로서는 처음으로 부임하여 사역하던 중 1980년 3월 목사관(사택)을 신축하 고 1981년 3월 13일 이강윤·진상철 씨가 장로로·진경선·박병양 씨가 집사로 임직하였다. 1981 년 최용준 전도사에 이어 1986년에 원광연 전도사가 부임하여 1987년 5월 30일 교 육관을 신축하였다. 1990년 이봉근 전도사에 이어 1992년에 김학균 전도사가 부임 하여 사역하던 중 1997년 10월 3일 진세섭·진요한 씨가 집사로·김점순·최문순 씨가 권사로 임직하 고 박삼순 씨가 명예권사로 추 되었으며 2001년 10월 화장 실을 신축하였다.
 
2002년 11월 5일 송원선 목사가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2003년 6월 13일 교회본당 외벽 및 십자가탑을 리모델링하였다. 2004년 11월에는 임실군의 지원으 로 정화조 시설을 하였으며 2005년 11월 10일에는 십자가 네온을 설치하고 종갓을 교체하였다. 2006년 6월 2일 교회본당 내부를 리모델링하였다. 2009년 11월 28일 이강윤·진상철 씨가 원로장로로 추 되었고 진세섭 씨가 장로로·장 순·이정 남·강 자·양순옥 씨가 권사로 임직하였다. 현재 교인은 60여 명으로 월평리와 인근마을 그리고 전주·오수 등에서 다니고 있다.
 
 

1.3. 다. 천주교

성수리 공소
 
 
성수리마을 안에 천주교 임실본당 성수리 공소가 있다. 성수면에서 공소가 있는 곳은 성수리밖에 없다. 공소 라 함은 지역이 본당과 거리 가 멀어 미사를 보는 데 불편 하여 세운 작은 교회다. 이곳 에 공소가 생긴 연 는 신유박해 때 피신하여 은거를 하면서 터를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근거는 임실군 강진면 용수리(행정구역 개편으로 현재 정읍시로 됨)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산 215 임야에 위치한 金大建 안드레아(1822∼1846)신부의 친동생인 김난식 (프란치스코, 1827∼1873)과 조카 김현채(토머스, 1825∼1888)가 피신을 하여 이곳 에서 은거하며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왕방리 판마을 북당골에 사는 안명곤 씨는 윗 조부님이 천주교인으로 광주에서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들어와 지금까 지 5째(약 180년) 살고 있다고 증언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성수리 공소도 그 당시 신자들이 숨어 지내면서 세운 것이라 추정된다. 현재 성수산 자연휴양림 교육 관 건물 자리가 최초의 공소가 있던 터이다. 한국전쟁 무렵 그 당시 다섯 가구가 살면서 천주교 맥을 이어 왔는데 6·25 때 빨치산들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그 후 수철리마을로 들어와 다시 공소를 지어 현재까지 미사를 보고 있다고 이장 황재완 (천주교 신자) 씨가 증언했다.
 
신유박해는 1794년 중국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천주교세가 확장되자 위협을 느낀 유교사회와 지배체제가 천주교도에 한 탄압을 본격화 했다. 이 박해로 주문모를 비롯해서 이승훈·이가환·정약용 등 많은 교도들이 처형 또는 유배되었다.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 된 천주 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정치적 반 세력인 남인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 다툼의 일환이었다.
 
 

1.4. 라. 기타 종교

이원영 선생과 요강교
 
요강교는 성수면 삼봉리에서 구 한말 의병 장 이석용의 아들로 태어난 이원영에 의하여 창시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참화慘禍로 어려서부터 일제 탄압이 극심한 가운데에서도 아버지의 충의忠義를 창명彰明코자 지극한 노력을 하였다. 그러는 가 운데 김일부金一夫의 정역원리正易原理에 선후천先後天 교역交易에 의하여 새 세계가 개벽開闢된다는 것과 오음주송五音呪頌의 신비 체험을 한 뒤 마음이 끌리는 바 있어 가무도교詠歌舞蹈敎에 입신入信하였다. 해방 후 그는 가무도를 독자적으로 실천 하 는데 그때 그가 행하는 오음주송이 다른 사람들의 질병을 낫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에게 질병을 고친 사람들이 그가 행하는 가무도의 신비를 널리 퍼뜨 렸다. 이렇게 하여 그의 문하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교단이 형성되 었고 그는 스스로 교주敎主가 되었다.
 
교주가 된 이원영은 아버지의 충의비忠義碑를 세울 계획을 세우고 자금 조달을 위해 질요강을 만들어 자신을 추종하는 교인들로 하여금 매각도록 하였다. 교인들 의 요강장수는 비교적 좋은 성과를 거두어 자신의 숙원이었던 아버지의 충의비를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그 교인들이 요강을 팔았던 것에 하여 사람들은 그를 ‘요 강교의 교주’라 불 던 것이다. 그 뒤 그는 아버지의 층의비가 마련되자 보다 범위 를 넓혀 구 한말 여러 충의열사들의 비를 한곳에 세울 계획을 세웠다. 그의 이 같은 뜻은 당시 정부에까지 알려져 정부로부터 협조까지 받아 전주시 덕진동 현 전북 학교 중앙도서관이 있는 곳(당시 이원 이 거주하고 있던 뒷산)에 충의열사들을 창명하는 비석을 울타리 안에 세우게 되었다.
 
한때 이원영은 자신의 종교 신앙을 부정하기도 하 지만 아무튼 자기 아버지의 충의비 내용에도 자신의 종교 신앙 내용이 나타나 있다. 이원 이 세운 자신의 아 버지의 충의비와 중앙에 무戊와 기己 두 글자를 새겨놓은 것은 선후천운도교역설先後天運度交易說에 의한 것이다. 戊와 己가 가 입중궁入中宮이 되면 후천後天이 개벽된다 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석의 둘레에 33개의 원형 기둥을 세워 놓았는데 이는 33천(三十三天)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원 은 이 33개의 원형 기둥마다 에 교인 한 사람을 붙여줌으로써 신심信心을 굳게 가지도록 하 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집안에는 황천상제하감지위皇天上帝下鑑之位라는 신위를 봉안한 제단을 설치해 놓았다. 여기서 황천상제는 김일부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그의 행위를 보면 그가 일종의 무속행위까지도 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개 성수면 사람들로 지금은 교단도 없고 단 한 명의 신도도 없다.
 
 

2. 2. 민속문화

 

2.1. 가. 농요

 
2.1.1. 오봉리 방개소리
가창자 윤윤섭 1989. 9. 6. 김익두 조사
 
메 : 에헤야 에헤으어 나아헤 방개로다
받 : 에헤야 에헤으어 나아헤 방개로다
 
메 : 방개소리 먼디 사람듣기 좋고
옆에 사람 뵈기 좋게 잘도 허네
받 : 에헤야 에헤으어 나아헤 방개로다
 
메 : 서마지기 논배미가 반달만큼 남았네
니가 무신 반달이냐 초생달이 반달이제
받 : 에헤야 에헤으어 나아헤 방개로다
 
메 : 에헤야 에헤으어 나아헤 방개로다
받 : 에헤야 에헤으어 나아헤 방개로다
 
메 : 앞둑 배루 뒷둑배루 배루나 실실 둘러주소
받 : 에헤야 에헤으어 나아헤 방개로다
 
메 : 이 논배미 반달만큼 남았네 다 되야 가네
우리 농군은 쌀 것이 없어 상추쌈을 싸고
받 : 에헤야 에헤으어 나아헤 방개로다
 
 
 
2.1.2. 오봉리 밭 매는 소리
가창자 윤윤섭 1989. 9. 6. 김익두, 유화수 조사
 
메 ; 오늘 해도 다 되야가네 골목골목 저녁연기
못다 맬 밭 다 매고 갈라다 금봉채를 잃고 가네
받 : 금봉챌랑 잃었다 말고 내 품안에 잠들어 주게
 
메 : 잔돌밭에 기운 잃고 기운 찾기 난감도 허네
받 : 잔등 밭에 소첩을 두고 밤길 걷기 난감도 허네
 
메 : 놀로가세 놀로가세 월선이 방으 놀로가세
받 ; 월선이는 어디가고 거문고 한 쌍만 걸렸구나
 
메 : 못다맬 밭 다 맬라다 금봉채를 잃고 가네
받 ; 금봉채사 내당 주께 요내 품에 잠들어 가소
 
 
 

2.2. 나. 전설과 설화

중촌마을 당산나무
 
여러 차례 난리로 수난을 겪으면서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2003년 9월 태풍 ‘매미’가 한반도에 막 한 피해를 입힌 적이 있었다. 갑자기 벼락이 치면서 당산나 뭇가지 찢어지는 소리가 우레와 같이 들렸다. 주민들이 우왕좌왕하고 마을 주민 들이 나무 가까이에 있었는데 당산나무에서 여자들 몇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주변을 아무리 살펴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태풍으로 나뭇가지만 휘청거 렸다고 한다. 주민들은 귀를 한곳으로 모아 자세히 들으니 당산에서 나는 소리 다 고 했다. 길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괴성을 들은 주민들은 그 당시 몹시 두려움 을 느꼈다고 했다. 당산나무는 마을에서 오랫동안 당산제를 지냈는데 지금은 지내 지 않고 최근에는 칠월 백중날 박세채(78) 할머니가 음식을 차려 놓고 지낸다고 했다. 시집 온 며느리가 딸 하나만 낳고 10년이 지나도 아기가 없자 할머니는 해마 다 당산에서 제를 지내며 아들 하나 점지해 달라고 빈다고 했다. 간절한 기도가 전해졌는지 며느리가 임신을 했는데 아들이라고 한다. 박세채 할머니는 양지리 중 촌 황호동 씨의 어머니다.
 
중촌마을 당산나무는 그만큼 다른 세계에 있다.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력이 좋아서 수형이 장엄하고 아름답다. 그 나이가 몇백 살이 되었다고 한다. 요즘에는 첨단 과학으로 나이테를 정교하게 측정하여 밝힐 수 있다지만 어떤 생물이든 연치 가 수백 년이 넘으면 무슨 조화를 부리는지 알 수 없으니 어찌 진짜 나이를 안다고 하겠는가? 이런 나무의 나이는 숫자가 아니라 神齡(신령)이라거나 木靈, 또는 不齒算(불치산), 不可思議(불하은의)의 無量壽 (무량수)로 헤아려야 옳은 게 아닐까? 이 나무를 주술적 신비와 심리적 크기가 뒤얽힌 神木으로 받아들이는 셈이다. 신목은 객관적 존재라기보다 주체가 현실에서 받은 상처를 감싸주고 치유해준다고 믿는 주관적 상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상처 없는 자에겐 신목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현실에 바탕을 둔 삶의 생명성을 함께 드러내고 있는 당산나무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신성과 초탈의 이미지를 표출한다. 그곳은 일상의 절망이 깊어져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때 찾아갔다가 상처를 털어내고 치유하는 공간이다. 인간인 이상 언어를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산나무는 시간의 상징이다. 인간의 것과는 다른 그 시간의 더께가 때로 인간의 상처를 감싸안아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수철마을 귀목나무
 
이성계가 팔공산 자락 도솔암을 찾아 가던 중 날이 저물어 절골에서 쉬게 되었다. 소금장수는 마침 이곳을 지나가다가 마땅히 쉴 곳을 찾았지만 군사들 때문에 무리에서 벗어나 멀찌감치 서 있는 귀목나무를 찾아 의지처를 삼고 나무에 기 고 잠을 잤다. 온종일 짐을 지고 걸어서인지 곤한 잠에 들었는데 몇 시경이나 되었을 까 잠결에 두런거리는 소리가 나서 사방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오밤중 에 누군가 화를 나누는 소리인데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을 모아 자세 히 들으니 곁에 있는 팽나무가 귀목나무에게 말하기를 저곳에 잔치가 있으니 밥을 얻어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러나 귀목나무는 “나는 손님이 계셔서 못 간다.”고 하니 팽나무는 혼자 갔다. 얼마 후에 팽나무가 돌아와 잘 먹고 왔냐고 물으니 팽나무는 ‘말도 마라. 더러워서 먹을 수가 없었다.’고 투덜댔다. 이유인즉 제상 앞에 피 비린 내 나는 신발을 신고 절을 하는 놈이 있어 더러워서 못 먹고 그냥 왔다고 했다. 소금장수는 하도 수상하여 곧바로 일어나 생각해 보니 예삿일이 아닌 듯했다. 곤하 게 잠을 자고 있는 이성계에게 가서 이 사실을 고하니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무릎 을 치며 바로 당신이 신발을 신고 절을 했다는 것이다. 황산벌싸움에서 수많은 왜 놈들을 죽이며 짓밟았던 생각에 미쳤다. 아차! 싶어서 다시 군졸들을 시켜 임실 장에 가서 제수를 준비하여 음식을 장만하고 목욕제계를 하고 정중히 절을 올리니 그제서야 마음이 평안했다는 것이다.
 
삼봉리 회군평
 
구 한말 국난으로 인하여 삼봉리에도 폭도들이 들어와 주민들의 재산을 약탈掠奪 하여 갔다고 한다. 때마침 회평回坪에 살고 있던 신기수申基守라는 거인이 이를 목격 하고 분개하여 주민들과 합세하여 삼봉리 둔평屯坪이라는 곳에 있던 폭도들과 싸워 크게 격퇴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그때부터 신기수라는 거인의 호칭을 신장군이라 불 다고 전했으며 승을 한 신 장군은 죽전에서 소령小嶺을 넘으면 회평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의 이름은 將軍과 民軍이 왔다 하여 회군평回軍坪이라 부른다고 한다. 또한 회군평을 진박골이라고도 한다. 현재 신 장군의 묘소는 삼봉리 원삼봉 마을에 있었는데 후손들은 없고 신장군의 묘가 있었던 자리는 전주이씨들이 선산 으로 만들면서 파헤쳐 지금은 흔적도 없다.
 
삼봉리 피앗골
 
골짜기가 깊어 난리가 날 때마다 사람들은 이곳으로 들어가 난리를 피했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평전들에서 전쟁을 하다 장수의 말이 부상을 입고 죽자 이곳에 말을 묻어 주었다고 해서 말 무덤馬墓이라는 지명도 있다.
 
삼봉리 고덕산 뱃골
 
고덕산 정상에 뱃골이 있는데 이는 그 옛날 이곳에 큰 강물이 흐르고 있어 배를 고덕산 정상에 매었다고 전한다. 오늘날까지 뱃골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삼봉리 봉죽암
 
봉죽암 옆에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에는 쇠붙이로 된 작은 부처가 모셔져 있었다. 스님이 이곳에 절을 지으려고 사흘 동안 기도를 하면서 염불을 하고 있는데 이웃마 을에 사는 힘이 황우장사 같은 사람이 와서 까닭도 없이 부처를 가져가려 하자 갑자기 뇌성병력이 치면서 황우장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하고 말았다. 그 후로 봉죽암이 지어졌다고 전한다. 삼봉리에는 고덕산 날망에 절이 있었고 개미 양절 터·봉죽암·문박골절터·음지절터 등 5개의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허물어지 고 절터에 석축과 주춧돌이 남아 있어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다른 설화를 들어보면 정유재란 때 삼봉리의 설화를 들어보면 신덕마을에 김일옥金一玉이라는 청년이 살았는데 이때에 왜군이 삼봉리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 릴 때 김일옥이라는 청년과 마을 주민들이 합세하여 삼봉리 평전 坪田臺에서 격투 를 하 는데 격투 중에 김일옥은 부상을 당하여 당시 봉죽암峰竹庵으로 피신을 하였다고 한다. 그곳 봉죽암에는 수도를 하던 소부인小婦人과 여승女僧이 기거하던 중이 었는데 그곳에서 피신 중인 김일옥과 여승은 동시에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삼봉리 정인철 증언)
 
성수산 심원사
 
심원사에 오랫동안 불도를 닦은 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절에 찾아오는 보살님들에게 늘 이렇게 말을 했다. ‘죄를 짓지 말고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법을 좇아 사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심원사 절 위쪽에는 도둑들의 소굴이 있었다. 도둑들은 성수 산과 백운면 골짜기 그리고 장수 팔공산을 타고 다니면서 마을로 들어가 도둑질을 해서 먹고 살았다. 이 도둑 떼의 우두머리 판쇠는 스님이 입버릇처럼 한다는 말을 소문으로 듣고는 “누구는 죄 짓고 싶어서 도둑질을 하는지 아는가. 농사지을 땅도 없고 먹고 살 길이 없어서 할 수 없이 하는데……” 남의 속사정도 모르고 그런다며 도둑은 스님의 버릇을 고치겠다고 하루는 칼을 들고 밤에 스님을 찾아 내려왔다. 스님에게 칼을 들이 며 “궁금한 것이 있어 왔다. 너는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라고 했는데 불법이 어디에 있단 말이냐. 네가 쥐고 있는 목탁 속에 있느냐 아니면 염주 속에 있느냐. 그도 저도 아니면 불상 속에 있느냐. 어서 답을 해라.”하며 다그쳤 다. 그러나 스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온화한 미소를 띠우며 점잖게 말을 했다. “모처 럼 좋은 질문을 받는구나. 불법은 사람 가슴속에 있소이다.” 스님의 답에 도둑은 “답 한 번 잘 한다. 나는 도둑질을 하면서 사람 잡는 재주도 있거든. 네 가슴을 쪼개어 불법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 좀 해야겠다.” 하며 스님의 가슴에 칼을 들이 댔다. 스님은 조금도 떨지 않고 오히려 큰 소리로 당당하게 말을 했다. “거미가 실을 뽑아낸다고 쪼개 보시오. 무엇이 나올 것 같소. 그저 몸에는 물만 들어 있을 뿐이오. 꽃이 아름답다고 나무를 쪼개 보시오. 그 속에 꽃을 찾을 수 있겠소. 밖에 나타날 때 실이 되고 꽃이 되는 것이지.” 도둑은 스님의 말에 벼락을 맞은 것처럼 통증을 느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칼을 버리고 스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스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저도 불법을 좇아 살고 싶으니 저를 제자로 삼아 주시오.” 했다. 스님은 크게 뉘우치는 도둑을 제자로 받아들 다. 도둑은 열심히 불법을 공 부하여 깊이 깨달음을 얻어 훗날에 큰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심원암은 없 어졌지만 흔적은 남아 있고 심원사 이야기가 전설로 남아 있다.
 
성수산 중바위
 
고덕산 정상에 작은 암자가 있었는데 빈 가 많아서 스님들이 못 살고 이사를 나왔다. 스님들은 절을 헐어 재목을 짊어지고 일렬로 줄지어 성수산으로 들어가는 데 이 동네 여인이 물 길러 나오다가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을 보고 놀라 그만 그 자리에서 바위가 되고 말았다. 훗날 사람들은 이 바위를 보고 중바위라고 불 다. 지금의 휴양림 자리이며 이곳을 새터라고도 불 다. 이곳에 휴양림 건물이 들어서 기 전까지 큰 바위로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전설만 남아 있고 바위는 흔적도 없다.
 
대왕마을 짐대바위
 
태평리 왕마을은 고려 말 이성계가 운봉 황산전투에서 승리하고 상이암을 거쳐 전주로 가기 전 진안 마이산으로 가는 길목이다. 이성계가 지나가는 길이라고 해서 왕촌이다. 이 마을에 전래되어온 민속신앙으로 2월 초에 마을 안녕굿을 한다. 왕 마을의 지형은 연소형국이고 마을 앞산은 사두혈로 마치 뱀이 제비 집을 보고 해치려 고 달려드는 형국이라 전해지고 있다. 예부터 마을에서는 뱀의 힘을 마을 입구에서 막는 액막이로 짐 에 솟 를 험상궂게 크게 만들어 세워놓았으며 이로써 솟 는 일 년간 마을의 무사안녕을 빌었다고 한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 행사가 계속되어 왔는데 농촌의 이농현상과 이로 인한 마을 사람들이 줄어들어 맥이 끊겼으며 지금은 바위만 남아 있는데 이 바위를 짐 바위라 부르고 있다.
 
왕방리 두꺼비 바위
 
왕방리에서 원증리 판골로 들어가면 각시소가 있다. 산이 깊어서인지 계곡에 는 물줄기가 시원스레 흐르고 곳곳에는 크고 작은 소가 여러 개 있다. 각시 소 앞에 는 두꺼비 모양의 섬바우蟾岩가 있다.
 
이 바위를 두꺼비바위라 부르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 다. 옛날에 땔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사는 총각이 있었다. 부지런하고 예의 바른 총각이 지게에 나무를 지고 내려오면 장터 사람들은 총각이 가져온 나무를 서로 팔아 주었다. 장터 사람들은 나무를 흡족하게 해다 준 총각이 무척 고마웠다. 장터 사람들은 총각이 혼자 사는 모습이 안쓰러워 이웃 마을에 가난한 집 딸을 중매하여 혼인을 시켰다. 혼인을 한 부부는 이 깊은 산중에 살면서 남편이 나무를 하러 가면 부인은 산나물을 뜯고 약초를 캐며 알콩달콩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재미있게 살았다. 각시소 그 위로는 성수산 깃 봉이 있고 갈매봉이 있다. 깃 봉 중턱에는 심원사深遠寺라는 절이 있었다. 부부는 혼인을 한 지 몇 년이 되었건만 자식이 없었다. 남편은 부지런히 나무를 하러 산속으로 들어가고 부인은 부처님께 자식을 점지해 달라고 절에 갈 때마다 각시소에서 몸단장을 하고 불공을 드리러 다녔었다. 어느 날 부인은 여느 때와 같이 불공드리러 가기 전에 각시소에서 몸단 장을 하는데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왠 포수가 바위 뒤에서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당황한 부인은 놀라서 그만 각시소로 풍덩 들어가고 말았 다. 백일기도 중 하루만 더 기도하면 자식을 얻을 수 있었는데 안타까웠다. 지켜보 던 포수는 그 부인을 구하려고 달려오다가 벼락을 맞아 그 자리에서 두꺼비 모양의 바위로 변해버렸다. 부처님께서 벌을 주신 것이다. 어느 때 없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심원사는 절 이름만 전해져 오고 바위로 변한 포수는 지금도 두꺼비가 각시 소를 향해 기어 오는 모습으로 서 있다.
 
북당골 송장바위
 
 
원증마을 북당골이라는 깊은 산중이 있다. 이곳에 가면 작은 계곡에 송장바위가 있다. 옛날 아랫마을에 부자이면서 인색하기 그지없는 욕심이 많은 노랭이가 살았 었다. 어느 날 이 집에 살던 머슴이 이웃마을에 심부름을 다녀오더니 주인 앞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했다. “어르신, 제가 그 마을에 가는데 상여가 나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상한 광경을 보았어요. 상여가 나가는데 관 뚜껑이 열려 있었어요. 궁금해서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가까이 가서 보니 글쎄 관 밖으로 두 팔이 나와 있는 거예요. 두 손이 쫙 펴져 있더군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맹인 그 사람 유언 로 했다네요. 살아 생전에 소문난 부자 는데 노 랭이 요. 죽을 무렵에야 그 사람은 개과천선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죽으면서 하는 말이 “나처럼 한평생 천만 금을 모았 으나 다 부질없게 되었구나. 천 만 금을 저승까지 가지고 갈 수는 없잖은가.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며 내가 돈을 모으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겠느냐 몹쓸 짓을 많이 했다. 내가 무덤으 로 갈 때 빈손으로 가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며 나를 보고 사람들이 교훈을 삼으라.” 고 하며 죽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의 뒤늦게 뉘우침에 용서하며 쭉 펴져 있던 팔과 손을 모아 관 안으로 넣고 뚜껑을 덮어 심원사 절 아래 북당골에 묻어주었다. 노랭이는 죽어서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부처님께 용서를 빌었다. 해마다 풍수 로 산이 패이고 노랭이를 묻은 그 자리는 계곡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 다. 계곡이 깊이 패이면서 노랭이의 시체가 묻힌 그 자리에 돌로 굳어 있는 송장바위가 조용히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바위가 관 속에 들어갈 때 수의를 갈아입은 그 로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후세에 이 바위를 송장바위라고 불 다. 지금도 송장 바위는 원증리에서 북당골 쪽으로 100m쯤 들어가면 안명곤 씨 집 앞에 있다.
 
도화동 상여바위
 
성수면 태평리 도화동에 상여와 같은 모양의 바위가 있다. 도화동 저수지 아래 70여m 지점에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가 꼭 상여처럼 생겼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 은 상여바위라고 이름지어 불 다. 이 상여바위에 관한 얘기가 슬프게 전해지고 있다. 상여바위가 있는 곳에는 마을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산중이다. 아주 오래 전에 산 아래 사는 사람들이 꿈을 꾸는데 상처투성이의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광경이 자꾸만 꿈에 보 다. 이산 저산으로 바쁘게 뛰어다니기도 하고 나무로 만든 창과 칼을 들고 전쟁하는 모습들이 자꾸만 보 다. 그것뿐 만이 아니다. 날이 궂으면 산골짜기에서 상여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 슬프게 곡을 하며 우는 소리도 들렸다. 괴이한 바람소리와 울음소리는 여전히 허공에서 맴돌았 다. “그거 참말로 이상하구나.” 사람들이 꿈을 꾸고 나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중 에 알고 보니 한 사람만 그런 꿈을 꾸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그런 꿈을 꾼다는 것이었다. 꿈이 이상하여 용하다는 이웃 마을 점쟁이를 찾아가 그동안 의 정황을 이야기했다. 가만히 듣던 점쟁이는 이곳이 정유재란과 구 한말에 크게 난리를 치르며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나이 어린 의병들이 전투를 하면서 죽거나 다쳐 피를 많이 흘린 계곡이라고 말했다. 애써 나라를 찾으려고 적과 싸웠지만 결 국은 전쟁에 패하고 수많은 의병들이 죽었다고 했다. 이 근방에서 얼마나 많은 사 람들이 전쟁을 하면서 죽었을지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하고 소름끼친다고 했다. 그 래서 그때 죽은 원혼들이 너무 슬프고 원통해서 떠나지 못하고 도화동 골짜기에 바위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병사들의 원혼이 바위에 스며들었다 하여 해마다 원혼들의 넋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내주다가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사람들 은 이 바위를 상여바위라고 이름 붙여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도화동 상주바위
 
도화동 저수지 아래로 내려가면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도 상여바위 옆에 있어 이를 상주바위라 부른다. 지금은 토사에 묻혀 낮아졌지만 옛날에는 큰 바위 다고 한다. 옛날에 젊은 산지기 부부가 나름 로 성실히 살아가는데 어느 봄날 명산 천 을 찾아다니던 한 선비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를 구해 주었다. 그 선비는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하던 감으로 산지기에게 구해준 보답으로 글공부를 가르 쳐 주었다. 산지기는 워낙 머리가 좋아 금방금방 깨우치는 것을 본 감이 놀라기 도 하였다. 그 후 선비는 회복되어 서울로 돌아갔으나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산 지기는 학문을 배워야 함을 깨닫고 그날부터 밤낮으로 공부하여 몇 해 뒤 과거에 급제했다. 그러나 조정의 중신들 특히 지난날 산지기가 구해주었던 감은 은혜를 보답하지 않고 이 산지기의 재능을 시기하여 절 로 벼슬을 줄 수 없다고 하며 산이나 지키라고 하였다. 과거에 급제를 하 건만 감의 질투 때문에 벼슬자리에 도 오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선비는 산지기의 놀라운 능력에 후환이 두려운 감은 중신들을 선동하여 고향인 도화동으로 돌아가는 산지기를 살해하고 말았다. 산지기의 아내는 남편이 죽은 줄도 모르고 집 앞마당 바위에서 애타게 기다렸다. 날마다 기다리던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어느 날 꿈에 남편이 나 타나 억울하게 죽었다며 호소했다. 꿈에서 깨어난 아내는 상복으로 갈아입고 몇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곡을 하였다. 울다 지친 아내는 그 자리에서 죽어 바위 로 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아랫마을 사람들은 산지기 부부의 시신을 찾아 바위 옆에 묻어 주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주며 원혼을 달랬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주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양암마을 사두혈과 개굴바위
 
개굴바위는 성수면 태평리 양암마을 입구 큰 도로 옆 좌측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를 개굴바위라고 부른다. 버드내에서 휘어진 곳에 4H마크가 찍혀 있다. 이 바위 는 두 가지 이름으로 부르는데 개골바위라고도 하지만 양암陽岩마을 지명과 같이 볕바위라고도 부른다. 100여 년 전 남원양씨南原梁氏 가문은 성수면 소재지 부근에 사두혈巳頭穴 명당을 구하려고 근방을 돌아다녔다. ‘뱀머리 명당’이란 뜻의 사두혈 은 주산에서 길게 뻗어 내려오던 산 능선이 평지에서 물길을 만나 멈춘 지세를 말한다. 마치 산에 있는 뱀 한 마리가 먹을 것을 찾아 들판으로 내려오는 형상과 같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산으로 이어지는 산 능선이 길면 긴 뱀, 즉 장사長蛇가 된다고도 한다.
 
뱀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는 개구리·쥐 등으로 먹이를 찾지 못한 뱀은 굶주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 먹이를 찾은 뱀은 배불리 먹고 자신의 지혜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뱀 머리 명당은 무덤 앞에 반드시 개구리나 쥐 형상의 안산이 있어야 한다. 또 안산이 너무 작으면 먹을 것이 없고 너무 커도 먹을 수가 없으며 너무 멀어도 잡아먹을 수 없으므로 적당한 거리에 적당한 크기의 것이 있어야 한다. 남원양씨 문중 에서 잡은 명당 앞에 서 있는 개구리바위는 그야말로 개구리처럼 생겼을 뿐만 아니라 그 크기나 거리도 뱀이 노리기에 아주 적당하였다. 당연히 개구리를 노리는 뱀의 기가 온통 머리로 집중할 것이다. 이러한 형국을 긴 뱀이 개구리를 쫓는 형세 즉 ‘장사추와 형長蛇趨蛙形’의 명당이라고 하는데 반드시 뱀의 머리 부분에 무덤을 써야 한다. 민간에 서 통용되는 묘지 풍수 관념에 따르면 개구리를 노리는 뱀의 온 신경이 머리 부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념은 풍수고전에서도 엿볼 수 있다. ‘금낭경’이나 ‘인자 수지’ 등에서는 산 능선을 크게 지룡支龍과 롱룡壟龍으로 나누는데 롱룡은 산세가 분명 하면서 웅장한 산 능선을 말하고 지룡은 평지의 얕은 능선을 가리킨다. 전자는 산 능 선이 끝나는 부분 즉 발足 부위에 터를 잡아야 하고 후자에 터를 잡을 때에는 머리 부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원양씨 문중에서는 긴 뱀의 땅을 찾아 명당혈을 얻었으 나 그 앞의 개구리바위까지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1980년 무덤 앞으로 길이 나면서 개구리바위가 없어질 운명에 처했다. 후손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문중의 흥망이 달 린 일이었다. 결국 문중에서 일치단결하여 개구리바위를 우회해 도로가 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뱀과 개구리의 팽팽한 긴장관계는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남원양씨 문중은 그래서 지금도 자신들이 번창하고 있다고 믿는다. 반면 개골바 위가 있는 산 주인 진원박씨 가문은 뱀에게 잡혀 먹히지 않으려고 명석한 두뇌로 뱀과 맞서 부지런히 살아가고 있다. 가진 것은 적지만 후덕한 인심을 나누고 베풀고 산다. 그래서인지 神의 보살핌으로 번성하고 있다. 결국 잡지도 못하고 잡히지도 않는 막상 막하다.
 
삼청리 장득바위
 
천동 앞산 월평리 방향 후동에 있다. 여산송씨 후손 송이섭 씨에 의하면 선조들 에게서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 있는데 장득바위가 묻히거든 다시 이곳에 와서 자리 를 잡으라고 했다 하는데 선조의 유언처럼 최근에 전주―광양 간 고속도로가 나면 서 자연스럽게 바위가 묻혀 버렸다고 한다. 선조들은 왜 이곳에 와서 다시 자리를 잡으라고 했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또한 그 옆으로는 도장골이 있는 데 어떤 지극한 효자가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이곳에 장례를 지냈는데 훗날에 도벌 꾼들이 묘를 훼손하고 없애버렸다고 한다.  
 
 
 

3. 3. 근대 문화

 
성수면 구 면사무소
 
 
성수면 옛 면사무소는 초등학 교 옆 양지리 687-5번지에 있다. 옛 면사무소 건물은 정면 5칸 측 면 2칸으로 일제강점기에 만들 어진 팔작 기와지붕이다. 건물 앞에는 성수면의 상징인 오래된 단풍나무가 있다. 본 건물은 개 인에게 매각되어 창고로 활용
 
정재 이석용 의병장 생가
 
 
성수면 삼봉리 676번지에 위 치한 정재 이석용 생가는 금동 마을 푯말에서 좌회전하여 약 2 km 정도 들어가 밭뜸 안에 있 다. 이석용 선생의 생가는 초가 지붕으로 복원되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담은 토담으 로 되어 있다. 이곳은 이석용(18 78~1903) 의병장이 출생하여 기거하 던 곳이다. 이 생가는 1997년 7월 18일 지방 기념물 제91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오류역五柳驛의 역사歷史
 
오류역은 1914년 5월에 착공하여 10월에 준공한 전라선 철도로 1931년 10월 1일 오류역을 조성하고 역원이 없는 간이역으로 개역開驛하였다. 그 후 1948년 10월 1일 교통이 불편한 근교에서 기차를 이용하고자 하는 주민들이 많아 정상 역으로 승격 하여 역무원을 배치했다. 그때부터 인근 지역 주민들이 상·하행선을 많이 이용 하였으며 역원을 배치한 정상 역으로써 오류역을 중심으로 성수면은 물론 진안군 백운면에 이르기까지 오류역이 교통 중심지 역할을 하여 지역 발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다가 6·25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음은 물론 화물운송에 있어 큰 차질을 빚기도 하였다. 1951년 9월 25일 전쟁 중에는 방화로 인하여 역사驛舍가 전소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장기간 복구를 미루다가 1955년 6월 25일 가역 사를 신축하였다. 그러다가 1965년 6월 25일 역사를 신축하여 준공하였으며 1970 년 4월 1일 보통 역으로 승격하여 다수의 직원들이 오류역에서 근무한 바 있다. 오류역이 개역한 이후 역의 역할은 화물수송이 주요 부분을 차지하 고 특히 진안 백운면 일 와 성수면 인근에서 나오는 벌채 목의 집하장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인근에 있는 다른 역보다 많은 물량을 취급하 던 때도 있었다. 또한 인근에서 화물차에 싣고 나오는 벌채 목에 하여 오류마을 주민들은 나무껍질을 벗겨 연료 로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일이 수십 년간 이어져 왔다.
 
오류역은 역을 출발하여 임실역으로 가던 기관열차가 열차의 노후화로 인하여 힘없이 올라가다가 중간에서 쉬고 또 조금 내려왔다가 다시 탄력을 받아 올라가는 일을 몇 번씩 하다가 힘이 완전히 빠질 때에는 오류역까지 내려와야만 했던 곳이다. 오류역에서는 증기의 축적과 힘을 모아 탄력을 이용하여 다시 올라가는 역할을 하여 때로는 이곳 경사 때문에 많은 시간을 연착하여 운행되기도 하 던 역사歷史 를 가진 곳이다.
 
 
그 후 산업의 발달과 국가 경제능력 향상으로 일반도로의 확충과 고속도로 또는 고속화도로 건설로 인하여 육로수송 능력이 향상됨에 따라 중간 역의 화물수송 능력 이 떨어지고 이로 인하여 자연히 철도수송은 약화되어 1975년 1월 1일을 기하여 수송화물 취급을 중지하였으 며, 2004년 7월 5일 철도 개량 사업으로 인하여 철로鐵路가 다 른 곳으로 이설되는 과정에 여 객 취급을 중지하 고 2004년 8 월 5일 모든 업무를 봉천역으로 이전하였다. 그 후 2005년 봄 73년간의 수많은 역사歷史를 지닌 채 철로鐵路와 역사驛舍를 완전 철거하여 지금은 당시에 서 있던 벚나무 몇 그루와 울타리 역할을 하 던 무궁화나무와 측백나무 등 잡목 일부만 남아 있다.
 
6·25 와 열차 습격사건
 
오류역은 임실역과 5km구간으로 오류역에서부터 임실역까지 올라가는 경사지가 운행을 어렵게 했다. 당시의 기차는 석탄을 이용한 증기기관차로 오류역에서 한참을 기다리며 증기를 보충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 역이었다. 6·25 당시에도 예 외는 아니었다. 1950년 6·25가 발발되고 전쟁 중에 아군과 적군이 고 리고 하는 과정에 1951년 10월경 순천에서 출발하여 전주 방향으로 올라가는 기관차가 있었다. 당시의 기관차는 앞에 화물칸 1량을 달고 그 화물칸에는 일반인들과 일부 군인들이 섞여 타고 있었고 여수에서 올라오는 생선장수들이 많은 생선을 가지고 함께 타고 있었다. 그리고 뒤의 2칸은 군인들의 식당과 당시 위문단들의 침 칸으 로 미군들 일부와 위문단원들이 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사고 지점인 임실 군 성수면 월평리 신촌마을 뒤에서 임실 쪽으로 500m지점에 느리게 올라가는 기관 차에 갑자기 빨치산들로 하여금 폭발물에 의한 습격을 받았다. 현장에서 앞의 2량 은 전복되어 일부 사상자가 나왔고 뒷부분 식당과 침 차량 2량은 분리되어 오류 역 쪽으로 경사를 타고 떨어져 나갔는데 이 2칸은 오수역까지도 통과되었다. 오수 역을 지나 용정리 부근의 약간 높은 철길을 넘지 못하고 다시 오수역으로 탄력을 받아 굴러오기를 몇 차례 반복하였다고 한다. 그때 오수역원들은 이 2량을 세우기 위하여 인근 농가에서 짚으로 만든 덕석(멍석)을 철길 위에 겹겹이 쌓아 차량을 세웠다고 한다.
 
이때 타고 있던 승객들 중에는 미군들을 비롯 많은 희생자들이 나왔으며 내국인 들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하여 찾아가 장례를 치 다고 한다. 미군들은 어떻게 처리 되었는지는 증언을 못하지만 이때 증언자의 기억으로는 미군 부상자 한 명에 하 여 헬리콥터를 이용 광주 육군병원으로 수송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때 많은 희생 자들은 당분간 역 주변에 있었는데 피비린내가 말도 못할 정도 으며 장기간 있었 던 시신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은 그 시 를 겪었던 분들의 증언을 받아들 일 것이다. 또한 최근에는 6·25전사를 연구하는 분들에 의하여 당시 임실에서 열 차 습격사건으로 미군 8명이 전사하 는데 북부산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는 기록을 찾아 이를 근거로 미국 태평양 사령부까지 연결하여 유해발굴을 하려고 많은 노력 을 기울이고 있다.
 
참나무 지지 껍질을 벗겼던 오류역
 
검은 연기 내뿜으며 달리던 열차의 모습은 50 이상이면 한 번쯤 보았을 아련한 추억이다. 촌각을 다투며 바쁘게 살아가는 요즘과 달리 60년 에는 석탄을 이용해 서 기차가 움직 다.
 
지지껍데기(나무껍질을 그렇게 불 다.) 오류역 광장에는 진안, 성수면 일 에서 벌목한 나무들이 실려와 쌓 었다. 참나무를 베어 싣고 오면 마을 전체가 참나무 향기로 가득찼다. 마을 사람들은 생나무가 들어오면 껍데기를 베끼는 일을 했다. 그때는 산림녹화사업으로 산에 나무를 하러 갈 수가 없었다. 전쟁의 폐허로 불에 타서 산들이 민둥산이 되어 산사태가 나면 엄청난 피해가 났었다. 기름보일러는 아예 엄두도 못 내고 산에서 나무 베는 일이 금지되어 있던 때라 벌목 나무의 껍질 은 오류마을에 유일한 땔감이었다. 자동차에서 나무를 내리면 사람들은 우르르 몰 려 칼과 낫을 들고 나무 껍데기를 벗겼다. 물이 오른 나무는 몸통이 전체 벗겨질 만큼 질이 좋았다. 참나무 냄새가 그렇게 좋은지 그때 알았다. 사람들은 껍데기가 두꺼운 참나무를 서로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참나무, 소나무와 함께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자주 실려 왔다. 온종일 식구들이 나무 껍데기를 벗겨 허청에 그득하게 쌓아 놓고 시나브로 말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불 담이 좋아 오래오래 잘 탔다. 껍데기가 훌 벗겨진 맨살둥이 나무는 화물차에 실려 제지 공장으로 갔 다. 어른들은 이 나무로 종이를 만들고 목재도 만든다고 했었다. 마리보시(일본말) 는 우리말로 나무를 화물차에 싣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장비가 없던 때라 사람들은 온종일 어깨에 메어다 화물차 안에 차곡차곡 쌓았다. 화물차 칸이 다 채워지도록 몇날 며칠 노동을 하고 나면 나무가 바닥이 났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시커먼 화물 차 머리가 멀리서부터 경적을 울리며 역사驛舍로 들어왔다. 화물차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중국 모택동 모자를 썼고 일본식 복장의 제복을 입었다. 석탄 작업을 해 서인지 얼굴이 시커멓게 먹칠이 됐다. 기차에서 내려와서 나무가 실려 있는 칸을 연결하였다. 그들은 군인들 밥통과 같은 것에 밥이 들어 있는지 추운 날에는 나무 잔가지를 모아 불을 피우고 그 위에 올려놓고 데워 먹기도 했다. 화물을 실은 기관 차가 출발할 무렵이면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서 석탄을 퍼서 기관차 불구덩이에 넣는 작업을 했다. 말 그 로 증기기관차 시절에는 석탄과 물을 실어야 했기 때문 에 정차 시간이 한없이 길었다. 화물차가 움직이면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거침없이 푹푹 피어 올랐다. 화물차는 임실역까지 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신촌 부근은 지 가 높아 힘을 많이 받기 때문에 한 번에 오르지 못하고 얼마만큼 다시 후진하 여 열을 가하여 탄력을 이용하여 겨우 올라갔다. 그때 기차가 열을 받아 내는 소리 를 ‘니꾸 사꾸’ 한다고 했다. 화물차가 떠나고 나면 다음 나무가 들어올 때까지 한동 안은 역 광장이 텅 비어 어른들은 벼, 고추를 말리고 어린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오류마을 어린이들은 열차 오는 시간에 맞춰 못을 몇 개씩 철로 위에다가 얹어 놓으면 열차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바퀴로 사정없이 눌 다. 기차가 떠나고 역무원 도 들어가면 철로에 잘 눌려 있는 못칼을 찾아내어 이것을 숫돌에 잘 갈아서 나무 손잡이를 만들어 나물 캘 때에 칼로 쓰기도 했다. 지지껍데기를 몇 차례 벗기고 나면 일 년이 지나갔다. 역 광장에는 아름드리 벚나무가 몇 그루 서 있었다. 봄이면 벚꽃이 활짝 피어 장관이었다. 마을 어른들은 벚나무를 일제강점기에 심었다고 한다. 벚꽃이 피면 나무에 올라가 꽃가지를 꺾어 병에다 꽂아 방안에 향기를 담았 던 시절이 있었다. 역사驛舍는 폐쇄되었고 벚나무도 베어져 없어졌다.
 
입영열차가 쉬어 갔던 오류역
 
1970년 초까지만 해도 군軍 입 자들이 남원에서 집결하여 논산으로 가는 입 열차가 간이역인 오류역에서 열차끼리 교행을 위하여 종종 쉬었다. 철로가 단선이 기 때문에 반 쪽에서 지나가는 기차가 온다는 연락을 받으면 10분이고 20분이고 무작정 기차가 지나갈 때까지 오류역에서 기다려야 한다. 빽빽하게 실려 있는 군 입 자들은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낯선 사람들 틈에 끼어 가다가 목이 마르면 마을 사람들에게 소리를 쳤다. 물 좀 달라고 소리를 치면 마을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우물에서 물을 퍼다 먹이고 자기 가족 중에 군 간 아들이 있는 집은 계란이 며, 떡이며 먹을 것을 창문 안으로 어넣어 주었다. 기차가 출발할 때는 마을 사람 들이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고 입 자들은 노래를 불 다. 눈물을 흘리며 우는 사람도 있었고 엄마를 목 터지게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일 년이면 그렇게 입 열차가 몇 차례 오류역에서 쉬었다가 떠나곤 했다. 옛날에는 시계가 귀한 때라 새벽이면 기차 소리에 맞춰 일어나 밥을 지어 자식들을 전주에 있는 학교에 보냈 으며, 들에서 일을 하다가도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끼니때를 알았고 모든 일 을 기차 시간에 맞추어 했다.
 
이처럼 열차를 소재로 한 이야깃거리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서민과 애환을 함께하며 생활 속에 깊이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교통수단이 다양한 요즘에도 열차를 소재로 한 화가 나오는 것을 보면 아직도 서민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입 열차를 타고 떠나가는 연인이 못내 아쉬워 열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는 여인도 있었을 것이고 차창 밖으로 얼굴을 마주보며 못내 이별을 아쉬워하는 부모님들도 있었을 것이다. 느림의 미학으로 서민과 정을 나누었던 추억의 열차는 유일한 교통수단이기도 했고 기 쁨과 슬픔을 함께하며 서민들 곁에서 친근한 벗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열차는 추 억이다. 그리고 삶의 궤적이다. 애환을 함께하면서 삶의 일부 기 때문이다.
 
 
간이역이라서 쉬지 않고 막 가는 열차도 있었다. 오수에서 임실까지 거리가 멀어 오류에 간이역이 생긴 것이다. 하루에 상, 하행선 몇 없다.
 
전라선 오류역을 출발하여 봉천-임실-남원-곡성-내구-동순천-순천-여수를 향해 가는 열차는 이 굽이굽이 코스를 지나게 된다.
 
전라선의 역사
 
1913년 1월 전북철도 주식회사가 철도 부설면허를 받아 1914년 2월에 자본금 30 만 원으로 회사를 설립한 후에 자본금 60만 원을 증자하여 본사를 전주에 두고 191 4년 5월에 토목공사를 착수했다. 1914년 10월에 준공하고 1914년 11월 12일에 이르 러 협궤 철도의 부설을 완료하여 1914년 10월 17일부터 여객운송을 개시하였다. 화물 등 일반 운송 업무는 1914년 12월 1일부터 시작했는데 본선철도 시설의 총 건설비는 1927년 현재로 55만 3천 원(1리당 34,000원)이었고 이는 한민국 사설철 도로는 부산 초기 전기선에 이어 가장 오랜 역사를 갖는 철도 다.
 
1927년 10월 조선총독부에서 매수하여 표준궤 개축과 함께 경전북부선이라고 개 칭하였다. 이 당시 철도 종사원 수는 모두 112명이었고 기관고 1개소, 정차잠 7개 소, 차량으로는 기관차 6량, 객차 18량, 화물차 53량 등이 있었는데 매수가격을 90 만 원으로 매수전에 업실적이 퍽 양호했던 것으로 평가되었었다. 1일 1리의 평균 수입은 1926년에 51원으로 사설철도 가운데 아주 우수한 것이었다.
 
그 뒤 1929년 4월 18일 이리(현, 익산)-여수 간이철도를 전주 방면에서부터 광 궤도 선으로 개축공사에 착공하여 역사驛舍 등을 전면 신축하거나 개축하였다. 개 축 건조물 가운데 특기할 것은 익산역의 근 식 사옥 건물 구조와는 조적으로 전주 역사를 한옥양식으로 세웠다는 점이다. 1931년 10월 전주―남원 1933년 10월 남원―곡성 1936년 12월 곡성-순천 간이광궤도선으로 개통되었으며 이것이 이미 개통되어 있던 광주선과 순천에서 연결됨으로써 명칭도 전라선으로 바뀌었다. 또 한 본선 가운데 순천―여수 간의 40Km(광궤도)는 1936년 9월 남조선공사 선이었던 것을 국철에서 인수 적인 선로의 증설과 기타 선로보강공사를 실시하였다. 전 주―순천 간의 133.2Km는 국철에서 상기 전북철도와 남조선철도 등 2개의 철도회 사를 매수하면서 공사에 착공하여 1937년 3월 익산―여수 간의 전라선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인터넷자료임)
 
 

4. 4. 역사와 문화유적

 
신촌마을 육우정六愚亭과 영당影堂
 
 
육우정六愚亭) 임실군 성수면 월평리 산1번지에 있다.
 
30번 국도와 17번 국도가 갈라지는 성수면 월평리 신 촌마을에서 다리를 건너 바 로 앞에 있는 산자락에 세워 진 정자이다. 육우정은 일명 봉남정鳳南亭이라고도 하며 정자의 주변은 뒤쪽으로 병 풍을 두른 듯 바위가 있다. 앞에는 봉황소鳳凰沼가 있으며 멀리 북쪽에 고덕산 삼봉三峰이 있고 동쪽에는 청계 구곡淸溪九曲·남쪽에는 계봉桂峰·서쪽에는 구치龜峙가 각각 둘러 있어 원경遠景역시 가히 일품인 승지勝地이다.
 
육우정은 1919년 10월에 이 지방 인사인 우곡 심진표愚谷 沈鎭杓·우석 홍종익愚石 洪鍾翼·우촌 양기형愚村 梁奇衡·우계 노학규愚溪 魯㶅奎·우당 이광의愚堂 李光儀·우천 송응진愚泉 宋應溱 등 6인이 건립하 는데 이들의 아호雅號를 우자愚字를 넣어 지었기 에 육우정六愚亭이라 하였다.
 
정자의 형태는 자연석 암반 위에 원형의 높은 주초를 세우고 계자 난간을 두른 누마루를 놓았으며 중앙에는 사방 4尺 크기의 환도실環堵室을 두었다. 난간은 높은 편이나 계자 난간 아랫부분에 안상을 새겨 통풍과 멋을 함께한 구조이다. 정면은 3칸이며 측면은 2칸으로 초익공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정자의 계단 쪽에는 육우정六愚亭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는데 서자書者는 李○○으로 현재는 판독하기가 힘들다. 또한 계원桂苑 민윤식閔允植이 쓴 효충전세孝忠傳世 라는 편액도 걸려 있다. 정면에는 심농心農 조기석趙沂錫의 글씨로 봉남정鳳南亭이라 는 편액이 연못을 향하여 걸려 있다. 정자 안에는 총 15개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육우정기六愚亭記가 6개·육우정서六愚亭序가 1개·봉남정서鳳南亭序가 1개·육우정상 량문六愚亭上梁文이 1개·육우정원운六愚亭原韻이 1개·차육우정운次六愚亭韻이 1개· 판상원운板上原韻이 1개·등육우정배登六愚亭拜가 1개이다.
 
 
정자의 뒤쪽 벼랑 위에는 당影堂이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의 이익공 건물로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당 안에는 현재 六愚의 사 진이 걸려 있는데 왼쪽부터 우곡愚谷·우석愚石·우촌愚村·중앙에는 전체 사진이 있고, 이어서 우계愚溪, 우당愚堂, 우천愚泉의 사진이 걸려 있다. 현재는 맨 끝의 우천愚泉은 사 진이 아닌 연필로 그린 초상 화가 걸려 있다. 당의 상량문에 단기 4301년 갑술 2월 22일 입주 27일 상량이라 적혀 있어 1968년에 건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정자 주변에는 육우의 주인공 인 여섯 사람의 호와 이름을 새 긴 암각서가 있다. 세 사람씩 두 곳에 나누어 예서체로 새겼다. 정자 입구 쪽에는 우계 노학규愚溪 魯學奎, 우당 이광의愚堂 李光儀, 우천 송응진愚泉 宋應溱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정자 아래쪽에 우곡 심진표愚谷 沈鎭杓, 우석 홍종익愚石 洪鍾翼, 우촌 양기형愚村 梁奇衡의 이름 을 새겼다. 또 정자의 주초석 아래 연못 쪽에도 해서체로 육우정六愚亭이라 새겨 놓았다. 각자刻字의 시기는 기록이 없으나 정자의 건립 이후로 추측된다.
 
◉ 심진표沈鎭杓
 
본관은 풍산으로 아호가 우곡愚谷이며 철종 12년(18 61)에 출생하였다. 향토의 사림 심병원沈炳遠의 아들로 기우氣宇가 헌앙軒昻하여 위풍이 당당하였으며 행실이 진실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학문에 조예가 깊어 후 학의 모범이 되었는데 고종 32년(1895) 소학교령이 공 포되자 1900년 가정재의 옛 관서당 자리에 진소학 교를 세워 초 교장에 추 되었고 이 학교가 임실 양사재로 옮겨진 후에도 4년간이나 교장에 추 되어 근속하였다.
 
◉ 홍종익洪鍾翼
 
본관은 남양으로 아호가 우석愚石이며 통정 부 홍 재순의 아들이다. 철종 13년(1862)에 출생하여 육우정 을 건립할 때 67세 다. 품성이 고상하고 효행이 돈독 하였으며 교육에 열의가 있을 뿐 아니라 매사에 청렴 결백하였다.
 
◉ 양기형梁基衡
 
본관이 남원으로 아호가 우촌愚村이며 용운암龍雲菴 양식梁埴의 손이다. 철종 2년(1851)에 출생하여 육우정 을 건립할 때 79세 다. 고종 광무 10년(1906)에 진사 과에 합격하였으며 천성이 강직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삼강록三綱錄에 그의 사적이 수록되어 있다.
 
◉ 노학규魯學奎
 
본관이 강화로 아호가 우계愚溪이며, 고려 말 충신 송재宋齋 노여魯輿의 후손으로 고종 5년(1868)에 출생 하였다. 모친은 맹인이었는데 그는 어머님께 손수 음 식을 떠 넣어드리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의 뛰어 난 효행은 삼강록에 기록된 바 있다.
 
◉ 이광의李光儀
 
본관은 전주로 아호가 우당愚堂이며, 효령 군 이보李補의 후예로 로 효성이 지극하고 학덕을 갖추어 남 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청빈한 가정에 태어났으나 학 문을 연구하면서도 근면 성실하여 가정을 잘 다스리고 부모 공양에 정성을 기울이는 한편 조부와 증조부의 효 행록을 문려에 게시하여 길이 후손들의 교훈이 되게 하였다.
 
◉ 송응진宋應溱
 
본관이 여산으로 아호가 우천愚泉이며, 단종 때 절의 송경원宋慶元의 후예로 고종 13년(1876)에 출생하였다. 천성이 순직純直하고 자비심이 두터웠으며 편모를 지 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육우정기六愚亭記 1
운수 현에서 십 리 되는 땅에 봉황산이 있는데 산 밑에는 천 길 석벽이 있다. 북으로는 高德, 三峰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청계구곡이 있다. 남쪽으로는 계봉桂峰 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구치(龜峙 거북재)가 있는데 육우정은 천 길 석벽 아래에 있다. 일명 봉남정鳳南亭이라고도 한다. 누정에 오르면 표연하여 세상을 버릴 만하 며 편안하여 세상을 즐길 만하며 유연하여 서로 잊고 은은하여 몸을 지킬 만하니 산중의 뛰어난 곳이며 속세 밖의 이름난 정자이다. 때로는 마음 맞은 사람끼리 마주하면서 술과 시로 호탕하게 하기도 하고 음악으로 서로 알아주기도 한다. 서산 의 산마루에서는 고사리를 캐고 동쪽 울타리 밑에서는 국화를 읊조리며 연잎이 연 못에 가득하니 굴원처럼 외로운 신하의 옷을 만들 만하고 주염계 같은 군자의 사랑 을 받을 만하다.
그 마음을 모은 이들은 누구인가. 우곡愚谷 심진표沈鎭杓·우석愚石 홍종익洪鍾翼· 우촌愚村 양기형梁基衡·우계愚 溪 노학규魯學奎·우당愚堂 이광의李光儀·우천愚泉 송응 한宋應漢 6인이다. 누정의 이름은 이분들의 6우(愚)로 하였다. 나는 林應喆 학사로부 터 듣고서 말미에 붙여두고자 하나 그 우(愚, 어리석음)를 따라갈 수가 없다. 오호 라 이 어찌 가히 알지 못하는 자와 함께 말하겠는가. 바람 맞으며 찬탄하면서 이에 기록한다. 계해년(1923년) 여름 6월 10일 통정 부 승정원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 추관수련관 원임 규장각 직제학 은율 지탄 송규헌(1870∼1938) 배
 
육우정기六愚亭記 2
백 척의 암벽 밑 깊은 연못 위에 누정을 짓고 편액을 육우라고 한 것은 무엇때문인가. 생각건 나는 어려서부터 어리석었다. 늙어서도 기질을 변화시키지 못 하여 일을 처리하는 데에도 졸렬하고 언사도 어눌하여 침묵하기 일쑤다. 개 천하 의 어리석음을 논할 때에 나만 한 이가 없는데 다행히 인근 마을에 나와 똑같이 어리석은 자가 다섯 사람이나 되었다. 심우곡·홍우석·이우상·노우계·송우천 등이 바로 이들이다. 거리가 1∼2리 정도 떨어져 사는데 날마다 서로 쫓아다니며 동으로 갔다가 서로 갔다가 오직 뜻 로 가다가 멈춘다. 작년 봄에 서로 말하기를 “우리 여섯 명은 모두 늙었다. 돌아갈 곳이 없다. 이와 같이 잡초가 우거지고 황폐 하여 쓸쓸한 모래톱에서 취하고 읊조리는 것으로 날을 보내는 것은 또한 고달프지 않은가. 어찌 쉴 만한 곳에서 여생을 마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라고 하여 이에 동쪽 봉산의 산록에 터를 잡고 누정 수칸을 지으니 뒤에는 절벽이요 앞에는 맑은 연못이다. 기둥 10柱를 동헌의 청처럼 두르고 가운데에는 네 기둥을 가설架設하 여 방을 만들었으며 별도로 삼면에 난간을 세워서 걸터앉아 더위를 피할 곳을 삼았 으니 규모는 간략하나 크고 밝도다. 낙성한 날 술을 마시고 매우 기뻐하였다. 수많 은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보니 자리하는 곳에 모두 기이한 자태를 드러낸다. 넓게 트인 곳은 신과 더불어 사귀고 어우러진 곳은 마음과 더불어 사귀었으며 맑은 물소 리는 귀와 더불어 사귀고 갖가지 모습은 귀와 더불어 사귀니 이 즐거움이 얼마나 큰가.
이에 난간 뒤의 절벽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절벽은 혼돈 씨가 칠 일간 깎아낸 뒤에 모진 바람을 겁도록 겪고 나서 지금의 형태가 되었고 이 연못은 바위 밑에 서 발원하여 5, 6이랑 정도의 보가 되었으니 왕왕 파도가 세차게 일어나면 형세가 벽해의 풍랑이나 은산을 거꾸로 세워놓은 것 같다. 이 두 가지는 개 오래되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니 또한 기이하게도 우리들의 어리석음이 변치 않은 것과 더불어 같지 않은가. 이는 개 같은 바가 있기 때문에 어리석음을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위와 물이 사람을 만나서 그리된 것인가. 사람이 바위와 물을 만나서 그리된 것인가. 그 반드시 만나는 바가 있어서 어리석음이 미친 것이니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어리석은 物을 기롱하는 것은 우리들과 物이 더불어 모두가 면할 수 없는 것인가.” 하였다. 경신년 5월 상순에 진사 우촌 양기형은 기록한다.
 
계월마을 비비정飛飛亭
 
비비정飛飛亭은 임실군 성수면 봉강리 86번지에 있다.
 
임실에서 남원 간 17번 국도를 따라 성수면 오류에서 좌회전하여 오류교五柳橋를 넘어 신계월마을로 들어서면 마을회관을 지나 안쪽에 있다.
 
이 비비정은 원래 삼례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어 우암의 친필 편액과 중건기만 간신히 수거하여 현재의 위치에 건립하였다.
 
간재 전우艮齋 田愚가 쓴 이건기移建記에 의하면 원래는 선조 6년(1573) 창주첨사昌州僉使 최 길崔永吉이 삼례역 남쪽에 세웠던 것을 길의 10세손 창렬(滄烈)이 1930 년 이곳 계월촌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비비정 원기原記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이 짓고 비비정 중건기는 직각 서준보直閣 徐俊輔가 지었다고 전한다.
 
현재의 이 비비정 건물은 1930년에 3월 재건한 것을 2000년에 보수하였다. 자연 석 덤벙주초 위에 사각의 기둥을 세우고 겹도리로 비교적 간단하게 짜 올려 홑처마 로 추녀를 마무리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건 물 가운데에는 4尺의 환도실環堵室이 있고 내부에는 비비정기, 비비정이건기 등의 현판이 있다. 정면에는 비비정飛飛亭이라고 쓴 해서의 편액이 있는데 편액의 바탕 재질과 변죽의 제작 시기가 다르게 보인다. 이는 변죽이 없던 편액을 후기에 개수하 면서 변죽을 붙인 것으로 판단된다. 편액은 우암尤菴이라는 낙관이 보이나 필획은 우암의 글씨와 다소 차이가 있게 보이기도 한다. 이는 오랜 시일이 흘러 편액을 새 롭게 번각할 때 원 필의를 살리지 못해 변형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비비정기飛飛亭記 1
비비정은 전주 삼례역 남쪽에 있다. 그 주인은 최준량崔俊良이다. 준량이 일찍이 나에게 기문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누정이 지어진 때는 만력 계유년(1573, 선조6) 인데 지은 분은 저의 조부 길永吉 )입니다. 저희 조부 길은 궁마弓馬로 발탁되 어 벼슬이 창주첨사(昌洲僉使 창주는 평안북도 창성군의 고려시 이름)에 이르 고 저의 부친 완성完成 또한 약관鶡冠에 벼슬이 나난만호(羅暖萬戶 나난은 함경도 삼수에 있었던 지역임.)에 이르 으니 저 준량까지 개략적인 삼세三世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무인이 뇌물 꾸러미를 수레에 싣고 권문權門을 분주하게 찾아다니면서 승진되어 임용되기를 도모하다가 늙어 죽은 뒤에 그르치는 자들이 넘치고 넘치는데 지금 창주첨사가 홀로 능히 이것을 면하여 경치가 뛰어난 곳에 누정을 지어 거처하고 편히 쉬며 맑은 공기를 마시며 능히 수명을 마쳤으니 이것은 이미 어려운 일이었다. 나난만호가 위로는 부귀하고 권세 있는 자들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고 아래로는 그 의식을 바꾸지 않았으며 지붕을 수리하고 벽을 바르며 들보를 새롭게 하였으니 효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 그 또한 문자를 사랑하여 이미 편액을 걸었고 또 내게 기문을 청하여 후인들에게 보이니 그 계술하는 뜻이 또한 깊도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누정에 이름붙인 뜻을 물었더니, “지명을 따라서 이름붙 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 는 누 의 무장 혈통이다. 옛적에 장익덕(張翼德, 장비 張飛, 167년~221년)이 신의가 있고 용맹하였으며 악무목(岳武穆, 악비岳飛, 1103-1141) 은 충성스럽고 효도하 는데 모두 이름을 飛라고 하였으니 광세에 서로 느끼는 것 을 어찌 무신만이 힘써 사모할 것인가. 어찌 그 의 후손들에게도 장비나 악비 같 은 부류가 있지 않을 것을 알리요. 그렇다면 이 누정을 오르는 자는 모두 두 분으로 서 마음을 삼을 것이니 그 세도世道의 도움 됨이 어찌 얕고 적겠는가.”라고 하였다.
 
준량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누정은 적지만 뜻은 크고 사람은 천미하나 말씀은 높으니 내려주신 두터운 은혜를 무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청컨 돌아가 서 처마 사이에 현판으로 새겨두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숭정 경신년 9월에 화양 노수(華陽老叟, 화양에 사는 늙은이라는 말로 송시열의 겸칭)가 기문을 짓는다.
 
飛飛亭在全州參禮驛之南 其主人崔後良也 良嘗請記於余曰 亭之作在萬曆癸酉 作之者吾祖永吉也 吾祖永吉以弓馬拔身 官至昌洲僉使 吾父完成亦以鶡冠 官羅暖萬戶 至吾良 蓋三世也 余曰 武人苞苴輦載 奔走權門 以圖進用 老死而後止者 滔滔也 今昌洲獨能免此 而作亭於形勝之地 居處遊息 導迎淸曠 能以壽終 斯已難矣 羅暖上不以是賂諸貴勢下不以是易其衣食 修葺塗墍 樑棟如新 可謂孝矣 今君又愛文字 旣揭扁額 又請記以示後人 其繼述之意又深矣 因問名亭之義 則曰因地名而名之也 余曰 君世世將種也 古者張翼德之信勇 岳武穆之忠孝 皆名以飛 而曠世相感 豈非武臣之所當勉慕者耶 安知君之後承不有張岳之倫而凡登斯者 皆以二子爲心 則其爲世道之助也 豈淺鮮哉 良頓首曰 亭小而義大 人微而語高 受賜之厚 無以踰焉 請歸而刻之楣間也 時崇禎上章涒灘九月日 華陽老叟記
 
비비정 이건기飛飛亭 移建記 2
비비정은 옛적에 전주 삼례역 남쪽에 있었다. 지금은 무너져서 임실군 계월촌桂月邨에 옮겨 세웠다. 창건한 분은 첨사 최공 길이고 이건한 분은 그 후손이다. 공의 10세손 최창렬이 우암 선생이 지으신 원래 기문과 직각 서공 준보가 지은 중건기를 가지고 보이면서 내게 그 사실을 기록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내가 가만히 보니 우옹 께서 장비와 악비 두 분을 무신들이 마땅히 힘써 앙모할 분으로 여기신 것은 그 가르친 뜻이 깊다. 이것은 지자知者와 더불어 말할 수 있으나 속인과 더불어 말하기 는 어렵다. 아, 지금 시 는 우옹의 시 와 어떠한가. 자식이 그 부모를 버리고 신하 가 임금을 등지는 것은 논할 것도 없거니와 문호를 열어 왜구들에게 읍하면서 즐거 운 마음으로 원수를 섬기는 자가 또한 있기에 이르 다. 당시를 한 번이라도 생각하 면 사람의 머리털을 위로 솟구치게 하고 눈가가 찢어지려고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최공의 후손들은 반드시 장비의 의에 의지하여 적을 토벌하고 악비가 죽음을 맹세하고 치욕을 씻은 것으로 마음을 삼는 것이다. 그런 뒤에 비로 소 잘 계술하였다고 할 것이다. 창렬이 또 유학에 종사하였으니 나는 그가 장차 종족들과 함께 성현의 학문을 강론하고 예악의 가르침을 지켜서 크게 세도에 도움 이 되어 우옹이 최씨에게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것을 안다. 그러니 어찌 서로 더불 어 힘쓰지 않겠는가. 창렬이 답하기를 “선생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 크고 원 합 니다. 무릇 우리 조상의 뒤를 잇는 자는 누가 편안한 마음으로 받지 않겠습니까.”하 니 드디어 그 말을 써서 돌아가서 그 벽에 새겨 두게 하였다.
 
대저 이 누정은 그 지명 때문에 이름을 붙인 것이나 지금은 최공의 자손이 거처함으로써 이곳에 건립하게 되었다.
 
飛飛亭 昔在全州參禮驛之南 今以頹圮 移豎於任實之桂月邨 蓋刱之者僉使崔公諱永吉也 移豎者 其後承也 公之十世孫相烈 以尤菴先生原記直閣徐公俊輔重建記見示 而要余記其實 余竊觀尤翁以張,岳二公 爲武臣之所當勉慕者 其指深矣 此可與知者道 難與俗人言 噫 今之時視尤翁時 爲如何哉 子焉而遺其親 臣焉而後其君者 姑無論已 至於開門揖寇而甘心事讎者 亦有之矣 時一思之 使人髮上指而眦欲裂矣 吾願崔公之遺裔遠胤 必以張侯之仗義討賊 岳王之誓死雪恥 爲心而後 始可謂善繼述矣 相烈又能從事儒術 吾知其將與族之人 講聖賢之學 守禮樂之敎 而大爲世道之助 如尤翁之所望於崔氏者 必矣 盍相與勖之哉 相烈對曰 先生所以敎告之者 大矣遠矣 凡爲吾祖之後承者 孰有不安意以受之哉 遂書其語 俾歸而刻置其壁 夫是亭始因地名而名之 今因崔公子孫之居 而得建於此也
 
 
왕방마을 둔학정遯壑亭
 
둔학정遯壑亭은 성수면 왕방리 산 79-1번지에 있다.
 
왕방리에서 원증마을로 가는 길 2km 정도의 중간 지점에 여산송씨 재실이 있고 그 맞은편 산기슭 물가에 자리하고 있다. 이 둔학정은 원래 단종 때 충신 송경원(宋慶元:1419~1510)이 임실 신안 백이산伯夷山 아래 창건하 던 것을 그의 후손들이 己卯년(1939) 8월 18일 庚午 未時에 상량문上梁文을 올려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송경 원은 본관이 여산으로 호號가 둔학遯壑이며 군수 선정致善의 아들이다. 1455년 전라 도사全羅都事로 재직 중 단종이 수양 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두문불출하다가 1457년 단종이 죽자 임실 백이산 아래에 은거하며 그곳에서 일생 을 마쳤다. 현재의 건물은 자연석 덤벙주초 위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초익공으로 홑처마로 짜 올렸다. 지붕은 우진각지붕이며 계자난간에 안상을 새기고 하엽을 조 각하여 난간두겁 를 둘렀다.
 
 
정자의 내부에는 최성식崔聖植이 쓴 둔학정遯壑亭 편액과 경차둔학敬次遯壑 둔학정 기遯壑亭記 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맞은편에 있는 여산송씨 재실에는 둔학송선생유 적비遯壑宋先生遺蹟碑가 있으며, 집안에는 ‘둔학선생실기遯壑先生實記’가 전하고 있다고 한다.
 
둔학정기遯壑亭記 1
백이산伯夷山은 두만斗滿에서 한 가지가 나뉘어 서쪽으로 돌다가 북으로 들어간 지 5리가 안 되어 우뚝하게 봉우리가 솟았는데 크지 않고 깊지 않으면서 체세體勢가 단정하였다. 나는 백이산의 이름을 공경하 고 또 그 동부洞府가 넓게 트이고 숲이 맑게 비침을 사랑하여 그 터에 세 칸의 조그만 누정을 지었다. 띠를 베어 처마를 만들고 돌을 포개어 섬돌을 만들었으며 나무를 교차하여 창문을 만들었다. 살구 나무와 진달래는 애써 심지 않아도 자라고 냉이를 캐고 죽순이나 고사리를 구해 바쳐서 몸체를 기르니 모두 산의 도움이다.
 
객이 내게 편액하기를 권하니 내가 말하기를 군평君平의 말에 ‘내 이름을 살리는 자는 내 몸을 죽이는 자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름이 귀하게 될 수 없는 것은 예로부 터 그러하였다. “내가 어찌 이런 일을 하겠는가. 그만둘 수 없다면 ‘둔遯’이라고는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객이 말하기를 “그 는 그칠 곳에 그친 것을 이 산山으로서 하였으니 어찌 산에서 취하지 않고 반드시 둔遯에서 하는가?” 하니 말하기를 “내 그 에게 말하리라. 내가 사는 것이 좋은 때가 아니니 다시는 이 세상에 뜻이 없다. 장차 늙도록 산골에 서 남은 생명을 마치고자 하니 일개 둔遯 빠진 글자가 있는 것 같다. 이 어찌 나의 실상이 아닌가. 또한 저 백이는 서주西周 사람이고 땅은 서로 거리가 몇천여 리이며 세상은 뒤로 몇천여 년이 지났으니 이로써 이름을 붙이는 것은 조물주의 우연한 뜻이 아니다. 높지도 않은데 높고 화려한 봉우리를 아우르고 뛰어난 승경은 아닌데 넓게 빈들을 마주하고 있으니 천하의 九州와 같이 큰 곳에도 없는 곳이 해동 한구 석에 있다. 오직 士人들만이 알 뿐이어서 山經에는 실리지 않았고 版圖에는 이미 황폐하다고 되어 있다. 내가 보기에 비록 이 산이 또한 피하는 것 같으나 나는 감히 나의 둔으로써 산을 더럽히지 않게 하려고 한다. 마치 유주자사 유종원이 우계곡에 서 한 것과 같다. 단지 산신령께 증거하여 나의 둔을 맹세하고 고치지 않음을 고수 하여 살아서는 산중 인이 되고 죽어서는 산중의 혼이 될 것이니 또한 어찌 산을 저버리는 것이 되겠는가.” 하였다. 객이 ‘예예.’하고 물러가니 드디어 둔학 두 글자 를 누정의 벽에 썼다.
 
 
둔학정 이건기遯壑亭移建記 2
둔학정은 옛적 운수(雲水, 임실군의 옛 지명)의 서쪽 백이산 아래에 있으니 바로 우리 선조 부군 둔학 선생께서 장수藏修14)하던 집이나 연 가 오래되고 허물어진 지가 오래되었다. 이번에 후손 주남柱南, 주 柱榮이 이를 걱정하여 부군께서 돌아 가신 지 4백31년 경진에 본군의 동쪽 성수산 명덕봉 아래에 이건하였다. 이 또한 부군의 무덤 아래이니 알지 못하겠지만 부군의 령이 어찌 이곳에 내리시지 않겠 는가. 오호라 부군께서는 음직으로 전라도사를 맡았으나 단종께서 왕위를 물려주 실 때를 당하여 스스로 외로운 절개를 지키었으니 생육신과 더불어 한 길을 갔을 뿐이다. 여러 현인들의 찬양하는 글에 모두 실려 있으니 불초 후손은 글 솜씨가 없는지라 어찌 감히 겹쳐서 기록하겠는가. 아. 지금 만들어진 누정의 규모가 옛적 보다 증감한 것이 어찌한가를 알 수 없지만 누정의 경색이 아직까지 옛터보다 못하지 않은 것이 있다. 용맥이 나아가 한 봉우리가 우뚝 솟은 것이 마치 황하黃河의 거센 물결에도 흔들리지 않은 지주砥柱와도 같이 앞에 있고 오봉五峯의 교악喬嶽이 엄연한 것이 마치 천 길 기상과도 같은데 남쪽에 있다. 또 연못은 달고 땅은 살지니 상하의 수전이 가뭄에도 풍년이 들고 좌우의 과실 숲은 가을빛을 희롱하여 洞天이 모두 붉은데 한 줄기 맑은 시냇물이 백 번 꺾여 난간 아래로 지나가며 돈다. 갓끈을 씻을 만하며 가슴속이 시원하니 이는 가히 현인들이 소요할 수 있는 장소이다. 지 금 또한 모재가 동쪽의 수 걸음쯤에 있어서 제사 지내어 서로 바랄 만하니 재실 은 부군의 사당이다. 모두 이와 같다면 옛터를 버리고 여기에 이건하는 것은 아마 도 불가함이 있지 않은가. 오호라 현재 강산은 변하였으니 우러르고 굽어보는 회포 가 가득 쓸쓸하다. 이 재실에 오르고 이 누정에 오르는 여러 종인들이 어찌 다만 구차하게 부군을 사모하는 것에 그치겠는가. 그 장차 부군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고 부군의 글을 강론하고 부군의 의리를 지켜서 부군의 평일 탐욕스런 자도 청렴케 하고 나약한 자도 굳세게 하 던 도를 길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면 부군의 양양 하게 계신 듯한 령 또한 빙그레 웃으시리라. 그렇다면 그 부군을 더불어 지키는 것이 지극할 것이다. 또한 오직 우리 후손들은 잘 계승하고 잘 수리하면 물은 폐하 지 않고 땅은 황폐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작년 봄부터 이번 여름 에 낙성되니 여러 종인들이 내게 그 일을 기록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나의 부족한 문장력으로 어찌 감히 감당하겠는가.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어서 그 략 을 모아서 후인들에게 고신(考信)할 바가 있게 하였다. 부군의 휘는 경원慶元이며 둔학遯壑은 그 자호이다. 개 이 정자를 시종 일을 마친 것은 여러 종족들이 정성 과 힘을 다하 는데 더욱 조력한 사람은 원호·재호·주 ·도수·주원·주행·동 진·주홍이다.
 
경진년 청화절(淸和節, 4월) 십삼 손 진철鎭哲이 울면서 삼가 기록함.
 
부동마을 부연정釜淵亭
 
 
부연정釜淵亭은 성수면사무소에서 우측으로 삼청리 가는 도중 부동교釜洞橋 넘어 바로 부동마을 입구에 있다. 1945년 8월에 건립한 정자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겹도리 홑처마로 지붕은 우진각지붕이다. 부연정釜淵亭이라 쓴 편액의 서자는 기록 이 없으나 근래의 서풍으로 보인다. 정자의 위치가 둔남천을 앞에 두고 자연석 암 반이 높직하게 터를 만든 천혜의 승지이다. 사면에는 노거수 10여 그루가 정자를 감싸고 있어 퇴락한 정자이지만 아직도 운치만은 여전하다. 과거에는 정자 앞에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지금은 농토로 변하였다.
 
정자의 기둥과 들보 등은 모두 귀목나무를 사용하 고 가구의 구성은 비교적 단출한 짜임이다. 정자의 아래에 함창김씨의 효자비가 세워져 있고 주변의 암반에 는 수많은 성혈性穴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후촌마을 덕양정德陽亭
 
임실에서 742번 지방도로를 따라 도인리 양지촌마을에서 후촌마을로 가는 오른쪽 야산에 있다. 덕양정은 1945년 7월 21일에 건립되었으며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우진각지붕 건물이다. 상량문에는 ‘同心和樂於千萬年’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마음을 모아 화목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정자 옆에는 둘레 2.7m나 되는 거 한 상수리나무가 서 있다.
 
오류마을 오류정五柳亭
 
오류마을 옛 철길 옆에 있는 마을 모정으로 1981년 8월에 건립되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기와로 된 우진각 지붕이며 진주강씨 열녀각이 옆에 있다.
 
오류마을 청용정靑龍亭
 
오류마을 위뜸 구 철길 옆에 위치하고 있다. 1981년에 건립되었으며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기와로 된 우진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건물 옆에는 큰 느티나무가 서있다.
 
중촌마을 모정
 
중촌마을 모정은 이 마을 입구에 있다. 1946년 7월에 건립되어 있으며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기와를 올린 우진각지붕이다 정자 옆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가 있으며 여름철에는 주로 할머니들이 사용하는 휴식공간이다.
 
 
왕방마을 모정
 
왕방마을 모정은 마을 입구에 있는데 이곳에서 왕방리 원증마을과 성수리 수철 마을을 가는 갈림길에 있다.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너와지붕인 데 당시 원증마을에서 생산된 너와로 덮여 있다. 50여 년 전에 마을 자체적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옆에는 들독이 지금도 보존되고 있어 당시의 농촌문화를 그 로 보여주고 있다.
 
석현마을 거암정欅岩亭
 
 
양지리 석현마을 느티나무 아래에 있는 모정이다. 모정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글씨는 임실경찰서장을 지낸 김봉관 선생이 초서로 ‘거암정欅岩亭’이란 이름 으로 편액을 걸었고 여름이면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명소를 이루는 곳이다. 편액 의 거암정 거欅자는 느티나무 거 자의 약자이다.
 
천동마을 삼청정三淸亭
 
천동마을 안에 있는 모정으로 노거수 밑에 1929년 7월에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구 건물은 없어지고 현재는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최근에 지어진 일반적인 정자 형태의 건물로 되어 있다.
 
중촌마을 은행정銀杏亭
 
성수초등학교 뒤 중촌마을 앞에 위치하고 있다. 1946년 7월에 건립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기와로 된 팔작지붕이다. 정자에는 효죽정·은행정이라 새겨진 현판이 있다.
 
후촌마을 영모재永慕齋
 
임실에서 742번 지방도로를 따라 도인리 양지촌 북동쪽 산모퉁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모재는 일명 도인재道引齋라고도 한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함안 조씨의 선조 조우趙禹와 그의 처 咸陽朴氏의 재실이다. 문중에서 1905년에 지었고 1923년에 중수한 것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이다. 내부에는 김병주가 지은 모재기永慕齋記와 14손 동일東鎰이 지은 도인재중수기道引齋重修記가 있다.
 
학당마을 화수정花樹亭
 
 
성수초등학교 옆 30번 국도변에 있다. 화수정은 풍산심씨 농정공파 서재로 조선 정조 3년(1799) 반매당伴梅堂 심수인沈壽寅 의 아들 심명철沈命喆에 의해 이곳에 창건 되었다. 심수인은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 지가 사랑하던 매화梅花가 죽자 3년 후 죽 은 매화를 다시 소생케 함으로써 기적을 낳은 분이다. 그 아들 명철은 정조 3년(17 99) 임실 동쪽 지금의 성수면 관전리(양지리)에 정자를 지어 매월 1회씩 종친들을 모아 화목을 도모하고 시문을 읊어 후손들 에게 모범이 되게 하니 이 정자를 화수정花樹亭이라 칭하였으며 화수정은 명철의 아호가 되었다. 또 당 의 문호 오촌鰲村 송치규宋穉圭가 지은 화수정기가 전하며 그 후 후손들은 화수정공이 마련한 종친 간의 친목이념을 계승하여 지금까지 200여 년을 춘추 2회씩 모여 선조가 끼친 유업을 흠모하고 하루를 즐긴다. 또 이곳을 학당 으로 개방하여 종족 자손들뿐만 아니라 다른 학동들도 여기에 모여 공부하게 하니 이곳을 화수정 서재라 하였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여러 번 보수하고 1928년 6월 1일 성수보통학교가 설립되기 전까지 이곳은 학당으로 활용되었으니 오늘날 이곳을 행정구역상 양지리 학당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의 건물은 1974년에 중수하여 관 리하여 오다가 2004년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고 그해 다시 그 자리에 신축하여 관리 하고 있다.
 
석현마을 영사재永思齋
 
사재는 양지리 석현마을에 있다. 석현과 중촌마을 중간 지점 도로변에 백구동白駒洞 암각서가 있는 바로 옆에 있다. 1964년 10월에 세워진 충의형 심윤원忠義衡 沈潤源 의 재실이다. 윤원潤源의 자字는 사징士澄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증통훈 부가복사 정贈通訓大夫家僕寺正 탁棹의 사자四子이다. 재실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로 된 팔작 지붕이다. 그 안에는 최성식이 지은 영사재기永思齋記가 있다.
 
삼봉마을 관수재觀水齋
 
 
관수재觀水齋는성수면 삼봉 리 원삼봉마을 213번지에 있다.
 
30번 국도상에 있는 성수면 사무소에서 백운 쪽으로 평지 3거리 방향에 금동마을로 들 어서 삼봉리 원삼봉마을에 위 치하고 있다. 이 관수재는 양박씨密陽朴氏 종 宗垈로서 그들의 선조 박기래朴幾來의 재실이다. 현재의 건물은 1938년에 창건된 것으로 잘 다듬 은 호박주초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 홑처마 팔작기와집 이다. 재실 입구인 솟을 문 앞 정면에는 주자의 글씨를 집자한 ‘인례문仁禮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솟을 문 중앙에 ‘효자통정 부행신릉참봉 양박기래孝子通政大夫行新陵參奉密陽朴幾來 열녀숙부인전주최씨부처지려烈女淑夫人全州崔氏夫妻之閭융희삼년 오월일隆熙三年五月日 명정命旌’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재실 안에는 중앙에 윤용구 가 쓴 관수재觀水齋 편액이 있고 사면에 주자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편액들을 걸 었으며 기둥에는 주련을 달았다. 문에도 주련을 달아 비교적 많은 편액들이 있 다.
 
삼봉마을 금헌재錦軒齋
 
 
성수면 삼봉리 죽전마을 삼봉 3길 49-8번지에 있다. 성박씨 향상공파 재실로 박동진 선조를 모시고 매년 사월 초파일에 종친들이 모여 시제를 모신다. 박찬명 씨의 고조부 박지문 씨의 호號가 금헌 錦軒이라 편액에도 금헌재錦軒齋로 썼다. 소가들이 죽전마을에 여럿 살고 있다. 원래 재실은 삼봉산 아래 선 하에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빨치산들이 불을 놓아 화재로 소실되어 그동안 묘소에서 시제를 올리다가 종친들의 뜻을 모아 마을 안에 현 식으로 재실을 건축했다. 목재 로 한옥처럼 지으려고 했지만 편리함을 고려해서 현 식으로 지었다. 재실 건축 연 는 2002년이고 관리는 박찬명 씨 아들 박태규 씨가 묘소와 재실을 관리하고 있다
 
금동마을 영모재永慕齋
 
30번 국도 좌측 금동마을 이정표를 따라 300m쯤 들어가면 풍산심씨 재실인 모 재永慕齋가 있다. 이 재실은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문 입구의 바위에 ‘풍산심씨 제동’이라는 암각서도 있다. 이 재실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기와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주련 4개가 있다.
 
도화동 추감재追感齋
 
 
추감재追感齋는 성수면 태평리 698-4번지에 있다. 30번 도로인 성수~백운 간 도로 에서 평지 3거리를 지나면 양암마을이 있다. 마을 입구에서 400m 지점에 좌측 길 을 따라 산길로 1.2km쯤 시멘트 포장길로 가다 보면 도화동이 있다. 이곳에서 왕 리 쪽으로 조금 더 골짜기로 가면 추감재가 있다. 『운수지雲水誌』에 의하면 ‘재상동 도화동윤참판태일소건유현각기문리거이봉선이호학지인사기자석용다취학도사시송독우차재在上東桃花洞尹參判泰一所建有縣刻記文里居李鳳善以好學之人使基子錫庸多聚學徒四時誦讀于此齋’라고 기록되어 있다. 추감재追感齋는 자연석 덤벙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 고 정면 3칸 측면 1.5칸의 초익공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건립되었다. 재실 안에는 2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건립 당시에는 너와집이었으나 1985년경에 기와집으로 바뀌고 2003년도에 강판지붕으로 개량되었다. 이곳은 남원윤씨의 재실이다.
 
양암마을 경수재敬守齋
 
성수면 태평리 양암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도로변 30번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다. 남원양씨의 재실로 현재의 건물은 1967년도에 건립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기와로 된 팔작지붕이다. 내부에는 양종호梁鍾鎬가 지은 경수재기敬守齋記가 있다.
 
양암마을 모호재慕護齋
 
청주한씨 재실로 양암마을 안에 위치하고 있다. 1960년에 건축된 재실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에 주련이 4개가 걸려 있다. 이 재실은 봉천리 한성희 씨 집안에서 관리하고 있다.
 
성저마을 경사재敬思齋
 
경사재는 성저마을 남쪽 나지막한 야산 기슭에 있는 남양홍씨 재실이다. 현재의 건물은 1964년(甲辰)에 건립한 것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슬레이트로 된 팔작지 붕이다. 출입문은 솟을 문으로 위에 ‘경앙문敬仰門’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내부에 는 7손 홍두현이 쓴 경사재기가 걸려 있다. 이 재실은 통정 부승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을 지낸 홍창좌洪昌佐를 모신 재실이다.
 
성저마을 비봉재飛鳳齋
 
 
비봉재는 월평리 성저마 을 안에 있다. 전주이씨 효 령 군파 장손인 13세손 이 창권 씨가 관리하고 있는 재 실이다. 1950년에 건축한 건 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주련 4개가 있는 팔작기와 지붕이다. 재실 앞으로 둔남 천이 흐르고 4차선이 통과 하는 교통 중심지이다.
 
수월마을 창선재彰善齋
 
월평리 수월마을 안에 있다. 전주이씨 효령 군파 재실이며 1980년에 건축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주련이 4개가 있는 팔작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다. 이기일 8 손 할머니의 재실로 이용의 씨가 관리하고 있다.
 
효촌마을 모송재慕松齋
 
 
모송재慕松齋는 성수면 오봉 리 산 26번지에 있다.
 
성수면사무소에서 백운 쪽 으로 1km쯤 가다 보면 평지마 을이 있고 평지 삼거리에서 효 촌마을로 가다 보면 바로 마을 안에 있다. 『운수지雲水誌』에 기록되어 있는 모송재에 관한 내용은 ‘재상동효촌교관윤상현지소건진사이병의참봉이 우참봉윤태일유령 현판在上東孝村敎官尹相鉉之所建進士李炳儀參奉李英宇參奉尹泰一有呤詠縣板’이라고 되어 있다. 모송 재는 남원윤씨의 재실로 고종 6년(1872)에 창건되었으며 1982년에 중수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강판 함석집이다. 주련이 4개가 있고 그 옆에는 최근 에 효촌마을 모정을 신축하여 사용하고 있다. 모송재 행랑채는 강판지붕에 정자와 같은 형식으로 되었으며 동네 주민들의 쉼터로 사용하고 있다. 바로 밑에는 결혼식 때 사용했던 옛 가마 2점을 보관하고 있다. 모송재 서문序文은 최병심이 짓고 모송 재 원운原韻은 윤태일이 지었으며 편액은 해평 윤용구가 썼다.
 
평지마을 추모재追慕齋
 
 
성수면 오봉리 평지 삼거리에 있다. 남원윤씨 지구공파 재실로 매년 삼월 삼짇날에 시제를 모시고 있다. 재실 건축연도는 1966년이고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주련이 4개이며 팔작기와지붕이다. 종중에서 유사를 선정해 현재 13세손이 시제를 모시고 있다.
 
천동마을 모송재慕松齋
 
모송재慕松齋는 성수 소재지에서 가다 보면 삼청리 천동마을 못 미처 우측으로 농로를 따라 가면 모송재가 있는데 이는 노여魯與의 재각齋閣이다. 재각은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팔작기와지붕이다. 노여는 고려 말에 창녕부사를 지낸 인물로 고려 가 멸망하자 남하하여 임실 성수에 은거하며 성수 지역의 강화노씨 입향조가 되었 다. 현재의 건물은 1944년 후손인 종수鍾洙에 의하여 건립된 것이며 재각 앞 입구에 는 솟을 문이 있고 양쪽 옆에 방을 두고 있다.
 
천동마을 숭모재崇慕齋
 
삼청리 천동 삼청저수지 위쪽에 있다. 전주이씨 재실로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이다. 상량에는 ‘丙寅 二月 二十七日立柱’라 씌어 있어 1974년에 지은 재실로 보인다.
 
구곡마을 운동재雲東齋
 
운동재는 성수면 삼청리 80-4번지 구곡마을에서 시멘트 포장을 따라 북동쪽으로 50여m 떨어진 곳에 있다. 이 운동재는 장수에 사는 창원정씨의 재실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상량문에는 문성왕탄강 2530년 무오(1978) 3 월 12일 입주로 기록되어 있다.
 
왕방마을 영모재永慕齋
 
영모재永慕齋는 왕방리 산 79-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왕방리에서 원증마을로 가 는 길 1km정도의 중간 지점에 가다 보면 왼편 산속에 둔학정遯壑亭이 있고 그 앞쪽 에 모재가 있다. 모재는 여산송씨 재실로 자연석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정면 4칸·측면 2칸의 초익공 홑처마 팔작집이다. 편액은 최성식崔性植이 썼으며 기둥에는 주련이 5개가 걸려 있다. 재실 옆쪽에는 둔학선생선조묘비개수헌성자비 와 조봉 부행전라도사둔학송선생유적비가 있고 제단 비 2기가 있다.
 
오류마을 오류재五柳齋
 
 
오류재五柳齋는 성수면 오류리 68-2번지에 있다.
 
전주―남원 간 17번국도 중간 지점인 성수면 오류리는 임실에서 5km 지점의 오 류마을 회관 뒤에 있다. 오류재五柳齋는 진주강씨 선조인 강필열(姜必烈 : 1666~173 5)의 재실로 문중에서 1973년 12월에 건립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팔작기와 집이다. 12개의 주련이 있는데 주자의 글을 주련으로 사용하였다. 1938년 戊寅 10 월 5세손 옥성五世孫 玉馨이 지은 오류재기五柳齋記가 있다.
 
오류마을 추모재追慕齋
 
 
오류마을 오류정에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추모재追慕齋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진주강씨의 선조 강진거(姜震擧 : 1656~1713)의 재실이다. 강진 거는 자字가 우백禹白이고 본관은 晋州이다. 현재의 건물은 1945년 겨울 후손인 강 의형姜義馨에 의하여 건립된 것이다. 정면 3칸과 측면 3칸인 팔작 시멘트기와지붕이 다. 재실 내에는 2개의 현판과 10개의 주련이 걸려 있다. 강진거는 이 지역 진주강 씨 입향조 강위황姜渭璜의 6세손이다. 성품이 남달리 온후하였으며 향리에 살면서 오직 뜻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추모재기와 후손 단형이 쓴 표장 문이 있 다.
 
계월마을 계양재桂陽齋
 
 
성수면 오류리 4차선 국도에서 오류리 앞 다리를 건너 구계월로 들어가면 마을 안에 마을회관과 모정이 있으며 그 옆에 계양재桂陽齋가 있다. 계양재는 여산송씨 재실로 1890년에 지어졌으며, 6개의 주련이 있고 편액은 최 성식이 썼다. 당초에는 우진 각지붕에 너와지붕이었으나 1983년 팔작 토기와지붕으로 개량하였다. 문간은 우진각지 붕으로 너와를 입혀 보존하고 있으며 문간채의 문살은 오래된 대나무살 문짝으로 되어 있다.
 
덕치마을 추돈재追敦齋
 
봉강리 덕치마을로 가는 중간에서 다시 좌측으로 약 1km쯤인 옥녀봉 기슭 산막동山幕洞에 위치하고 있는 경주 김광필金光弼의 재실이다. 金光弼(1577~1654)의 자는 화진華晋이요 호는 묵재黙齋이다. 계림군鶴林君 곤稇의 8손으로 용성으로부터 오류 마을에 처음으로 이거한 입향조이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23년(1886) 2월에 창건된 것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할석으로 된 팔작지붕이며 4개의 처마기둥 받침이 있 다. 내부에는 김인원이 쓴 추돈재기와 1886년 김준상이 쓴 추돈재기, 1912년 이정 항이 쓴 추돈재원운追敦齋原韻, 김 식이 쓴 추돈재차운기追敦齋次韻記 등 4개의 현판 이 있다.
 
성저마을 백원재百源齋
 
백원재百源齋는 성수면 월평리 성저마을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여양 진씨의 재실로 목조 팔작 시멘트기와 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1992년에 지었다. 마루 앞에는 유리문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정문은 일주문으로 콘크리트기둥에 목조를 올 려 지어져 있다.
 
정이당靜履堂
 
『운수지(雲水誌)』에 의하면 ‘재성수산하정이이두연소구공만년퇴은우차당여이삼 종강박경학세칭서당동금폐在聖壽山下靜履李斗然所搆公晩年退隱于此堂與二三從講泊經學世稱書堂洞今廢’라 적혀 있다.
 
취인현就仁縣
 
『운수지雲水誌』에 의하면 ‘재동면유포리남유사직단사군형옥기미지하 흥폐윤참 판태일枽호구기고감이음사절왈현명취인필출현인산수청숙도리평균건재김후서당 剏신유림제혜문학빈빈년과수백유적가순在東面柳浦里南有社稷壇司宭刑獄基未知何代興廢尹參判泰一枽弧舊基故感而吟四絶曰縣名就仁必出賢人山水淸淑道里平均建齋金候書堂剏新儒林濟匸文學彬彬年過數百遺跡可詢’이라고 기록되었다.
 
연암정사 기淵菴精舍 記
 
지금의 오봉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사 심원순沈原淳이 지었다. 그는 아호가 연암 淵菴이며 순종(純宗 ; 1901) 말에 출생하였다. 심원순은 천성이 독실하여 효행과 형 제우애가 있어 만인이 추앙하였다. 말년에 시문을 즐기고 문사들을 널리 사귀며 제자들을 길 다.
 
구 소충사 터
 
구 소충사 터는 양지리 중학교 입구에 있었는데 성역화 사업으로 현 소충사를 조성하여 이전하였다. 현재는 성수보건지소가 세워져 있고 뒤에 소충사 사당으로 사용하 던 건물은 현재 보존되어 모정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옆에는 소충사 이건 내력이 세워진 표석이 있다.
 
 
 

5. 5. 주요 금석문

성수산의 지맥
 
성수산은 장수 팔공산의 준령이 내달아와 높이가 876m인 명산이다. 정상에서 남동쪽으로는 지사면 주봉을 거쳐 지리산 천왕봉으로 맥이 통했고 서남쪽으로는 임실읍 두만산과 극락치를 휘감다가 강진의 백련산 덕치면의 회문산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북동쪽으로는 진안의 마이산을 거쳐 둔산 조약치에 이르며 이곳은 금강·만경강·섬진강의 분수령이 되는 물의 근원지이다.
 
성수산은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정상의 조망이 빼어나고 숲이 울창하며 고려 와 조선의 건국설화가 얽혀 있는 설화의 진원지이다. 고려 때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태두이며 가 던 도선(827∼898년)이 전국의 명산을 구름처럼 떠돌다가 이 산을 살피고 나서 천자를 맞이할 성지聖地인 것을 알고 왕건에게 백일기도를 드리면 망을 성취할 것이라고 권하였다고 한다. 왕건은 도선과 더불어 백일기도를 올리고 나서 고 려 건국의 망을 이룬 후 이곳 바위에 환희담이라는 친필을 새겼고 도선은 도선암을 세웠다.
 
이후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도 무학대사의 권고로 백일기도(또는 500일기도를 드렸다는 설)를 올린 후 큰 공을 세우고 조선 건국의 업을 성취한 후 삼청동三淸洞 이라는 친필을 비석에 새겨 어필각에 보관하게 하였다. 이후 이성계의 귀에 기도를 하는 과정에서 성수만세가 들렸다 해서 도선암 사찰 이름을 상이암上耳庵으로 고쳤다.
 
이후 상이암은 의병 장 이석용李錫庸에 의해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었고 왜병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1958년 상이암 재건위원들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경내에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24호로 지정된 부도浮屠가 있다. 성수면에는 이석용 외 28 의사를 모셔놓은 소충사昭忠祠가 있다.
 
이에 성수산 상이암은 두 왕조의 태동에 튼 향을 미쳤고 향로봉은 산 형국이 구룡지지九龍之地라 하여 왕가를 이루는 수도처로 알려졌던 것이다. 이에 성수산 주 변의 왕가와 의병 및 효열에 관련된 중요한 금석에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상이암의 금석문
 
상이암은 875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 고 1394년(태조 3)에 각여覺如가 중수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불탄 것을 1909년 원大圓이 중건하였다. 그 뒤 한말 의병장義兵將 이석용李錫庸이 상이암을 근거지로 삼아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므로 왜병倭兵에 의해 소실燒失되었다가 중건되었는데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 었다.
 
그 후 1958년 상이암재건위원들과 창현 군수의 도움으로 다시 세운 것으로 당우 堂宇는 법당과 요사채가 있었으며 주변에 삼청동비각·칠성각·산신각 그리고 3기 의 부도전이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현재의 법당 건물(무량수전)은 성수면민들의 숙원사업으로 당시 행정과 의회가 중심이 되어 2002년도에 2억 2천5백만 원을 들 여 완공하 고 중선방인 요사채는 2004년도에 1억 5천만 원을 들여 완공하였다.
 
태조가 쓴 삼청동비
 
태조가 삼청동이란 글씨를 써준 시기를 두고 잠저潛邸시에 쓴 것인가? 아니면 운봉전투에서 왜구를 섬멸하고 남원을 거쳐 전주로 가는 도중에 썼는가? 에 한 두 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삼청동이란 글자를 써준 시기는 추측건 100일기도를 드리는 과정에서 꿈에 용이 나타나지 않았나 사료된다. 즉 이성계의 간절한 기도 끝에 용이 나타나 자신의 몸을 세 번 씻어주는 길몽을 꾸었고 이에 그는 크게 기뻐하여 붓을 들어 이곳 바위에 삼청동三淸洞이라고 썼던 것으로 생각 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전쟁 시에는 많은 장비와 군인들을 데리고 상이암에 주둔 할 터가 못 되기 때문이다.
 
 
삼청동비는 어필각을 지어 잘 보관하고 있으며 비석의 질을 보면 성수산에 나는 자연석으로 석질은 좋은 편이 아니며 석면도 무늬가 있으며 잘 다듬어지지도 않았다. 서체는 행서 필의가 나타나고 있으며 장법과 글자 소가 잘 어울리고 있다. 비석 좌측에는 태조어필太祖御筆이라는 글자가 4자 새겨져 있다.
 
근세에 와서 이 글씨가 태조의 글씨가 정말로 맞는가에 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상이암에서 삼청동비를 문화재로 올린 적이 있으나 아쉽게도 문 화재위원들이 태조의 글씨가 현재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비교분석하기가 어려워 부결시킨 적이 있다. 즉 이러한 결과는 태조의 글씨가 많이 남아 있지 않 는 것도 문제지만 일부 문화재 감정위원들이 태조의 글씨를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없어서 유보시킨 것으로 생각되며 또 성수산과 상이암에 한 역사와 문화를 올바로 인식했다면 그 러한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지역의 설화나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설화 속에는 정말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녹아 있는 경우가 많다. 만약 조선시 상이암 삼청동비가 태조의 글씨가 아니고 허위로 조작된 비석이었다면 유교를 숭상하고 배불하는 조선시대에 상이암이 온전했을 거 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감히 어필을 도용했을 경우 국법으로 다스리는 사회 기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의 자료는 많지 않지만 몇 개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하여 보면 글씨를 쓸 때만큼은 매우 정중하고 단정한 안진경체顔眞卿體 필의를 구사한 명필이었다. 아 마도 태조가 안진경체를 좋아한 것은 안진경이 당나라 때 장군이면서 많은 난을 평정한 장군이기 때문에 그의 서체를 흠모하지 않았나 사료된다. 안진경은 당 현종 의 비인 양귀비를 사모했던 안록산이 양귀비를 차지하고자 난을 일으키자 모든 현 령들은 자기의 직분을 수행하지 못하고 달아났는데 안진경만 굳건히 한 지역을 방 어하여 일약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나라는 해서가 정립된 시기로 초당 때는 구양순과 저수량을 들 수 있지만 중당 때는 장중한 안진경(顔眞卿, 709 ∼785)이 새로운 글씨체를 창안 하여 우리나라에도 많은 향을 미쳤다.
 
태조의 글씨가 열성어필에 수록 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전서로 태조대왕어필이라 되어 있고 본문의 글 씨는 해서이면서 약간의 행기를 넣 었다. 여기서는 안진경의 필획이 약간씩 나타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종요와 구양순체 필의도 같이 나타나고 있다.
 
 
다음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태조사급치가사문서太祖賜給致家舍文書’ 또는 ‘태조가옥 허여문기太祖家屋許與文記’란 제목의 문서로 태조 이성계가 그의 후궁에게서 난 딸을 숙신 옹주로 봉하고 집을 하사한다는 내용의 분재기이다. 여기서는 삼청동비와 비교할 수 있 는 동同자가 나타나는데 즉 삼청동비의 洞자와 파임 부분과 내려가는 배세의 형세 그리 고 전체적으로 안진경 필의 등이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규보가 쓴 『동국제현서결평론서』를 보면 군주로 말하면 “태조太祖ㆍ인종仁宗ㆍ 명종明宗이 모두 글씨를 잘 썼다.”라고 평을 하 고 특히 연비태천鳶飛戻天이라 쓴 작 품은 태조의 남아 있는 글씨 중에서 가장 안진경 필의가 잘 나타나고 있다. 이 글귀 는 시경의 연비려천鳶飛戾天·어약우연魚躍于淵의 앞 부분으로 하늘에 솔개가 날고 고 기가 연못에서 뛰어노는 자연의 오묘한 도를 함축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삼청동비 옆에는 ‘조선태조고황제어필삼청동비각중수기朝鮮太祖高皇帝御筆三淸洞碑閣重修記’가 세워져 있다.
 
내용을 보면
 
이 비각 안에 봉안되어 있는 비석은 조선 태조고황제의 어필 삼청동 세 글자를 새긴 것이다. 오늘날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 비에는 이런 전설이 곁들여져 있다. 태조께서 등극하시기 전에 무학대사의 권유로 이 절에 오셔서 백일기도를 드리게 되셨다. 그러나 백 일 동안의 기도로는 도를 깨닫지 못하여 삼 일을 더 연장하 는데 그 사흘 동안에 어린 중이 나타나 함께 문답을 하고 목욕도 하여 매우 기뻐하셨다. 후에 이 중이 고려 왕건 태조에게 도를 깨닫게 해준 불상임을 깨달으시니 심신이 맑아져 곧 삼청동 세 글자를 자연석에 써 서 새기셨다. 그 후 어느 날 밤에 태조께서 는 꿈을 꾸셨는데 하늘에 서광이 비치고 흰빛 무지개가 서울의 자미궁으로 내달아 뻗쳐 있는 가운데 공중에서는 성수만세 소 리가 들리면서 산속으로 세 번 메아리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태조께서는 등극하신 뒤에 이 절을 상이암이라 개명하시니 성수만세 소리가 성상의 귀에 들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삼청동비는 풍마우세로 훼손되어 오던 중에 1939년 일제강점기인데도 우리의 선인 누군가가 이 비에 비각을 세웠으니 들보에 이렇게 씌어 있다. ‘개국 548년 기묘 이월 오일 기미 오시 입주 육일 경신시 상량’이란 상량문이 남아 있어 비각을 세운 연 는 알 수 있으나 누가 어떻게 세웠는가 알 수 없으니 매우 안타깝 다. 그러나 이 비각도 많은 세월의 비바람에 너무나 훼손되어 보기가 민망하 는 데 수년 전 이 비각을 봉심하던 우리들은 이전의 주지 관중스님의 요청으로 우리 정성을 모아 이 비각을 보수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중수위원회를 조직하여 미성을 모아 이제 새롭게 단장하고 그간의 경위를 밝히기 위하여 중수비를 세우는 바이다.
1992년 8월 15일(개국 육백주년 기념일)
태조고황재어필삼청동비각중수위원회
위원장 석호
부위원장 왕재
 
태조가 쓴 삼청동비는 열성어필·태조사급치가사문서·태조어필 등과 비교해 볼 때 태조의 안진경 필의와 자형 등이 상당히 유사성이 나타나고 있어 앞으로 태조어필로 증명하기 위해서 많은 연구가 더해져야 할 것이다.
 
환희담 암각서
 
 
환희담歡喜潭이라고 쓴 암각서는 성수산 상 이암 경내에 세워져 있다. 『문화유적 총람』 에 의하면 도선선사道詵禪師가 당唐에서 돌아 와 상이암上耳庵에서 수도하던 중 꿈에 왕건 을 맞이하라는 선몽이 있어 17세의 왕건王建 을 맞이하 는데 100일을 기도한 후 연못가 에서 목욕을 하다가 득도하였다고 한다. 왕 건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연못가의 자연석 에 환희담歡喜潭이라고 썼다는 전설이 내려오 고 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25cm 폭 90c m 두께 35cm로 세워졌으며 글자 옆에는 후 에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왕태조필王太祖筆’ 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환희담 암각서는 해서체로서 자연스러운 필의가 많이 나타나고 있어 앞으로 상이암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창암 이삼만이 쓴 칠성각 편액
 
창암 이삼만(1770∼1847)이 상이암에 직접 와서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이암은 창암이 생존할 때인 조선 후기에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창암 이삼만은 1770년 전주 자만동(현 교동)에서 아버지 전주이씨 완산동파 지철 과 어머니(貞輝女) 김해김씨(구이면 상척동) 사이에서 5남 1녀 중에 둘째로 태어났 다.
 
족보상 초명은 奎奐(奎煥, 또는 奎恒)이며 자는 允遠(允元,長遠)인데 성장하면서 이름을 三晩으로 개명한다. 즉 교우, 학문, 후손이 늦어서 개명한 듯하지만 이것은 확실하지 않고 늦게 이룬다 해서 붙여진 것으로 사료된다. 즉 화동진첩(화동서법) 을 보면 본관인 완산을 사용하고 이름은 奎桓이라고 적고 있으며 호는 초년에 사용 한 强齋와 자는 允元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창암은 예술가답게 뜻과 음이 비슷하 면 차용하여 사용을 많이 하였으며 중년에는 이름자를 三萬, 參晩으로 사용한 적이 있다.
 
창암은 어려서 글씨에 매력을 느껴 막 기로 시간만 있으면 글씨를 썼고 종이 신 분판과 바위 또는 헝겊 등을 사용하여 글씨 연습을 하였다. 특히 삼베에다 글씨 연습을 많이 했는데 그의 글씨를 보면 이러한 흔적이 많이 보이고 있다.
 
 
창암은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사 찰의 편액을 남겼다. 표적인 것으로 는 강화도 전등사의 원통각 편액·구 례 천은사 보제루편액·흥사의 가허 루 편액·동학사의 동학사편액 등이 있으며 성수산 가까운 곳의 오수 심포정편액·둔덕리 삼계정사편액, 삼계면 경주 이씨재실 이로재편액 등이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창암이 쓴 칠성각 편액은 행기를 넣어 자연스럽게 썼으며 별성자의 날생 부분은 넘어질 듯하면서도 마지막 획인 가로획을 굴곡시켜 균형을 잡았고 집각자의 마지 막 획의 삐침부분에 갈필이 나타나고 있어 전체적으로 기의생동을 느낄 수 있다.
 
칠성각 편액 뒤에는 묵서가 한글로 적혀 있다. 묵서명은 퇴색되어 판독하기가 어려운데 강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수년간 찾으려 애쓰다. 찾아온 年은 을미 사월 이십일이고 각(웅전)은 불로 탔는데 이 판은 안탔을까?”라는 문구가 있다. 상당히 자연스런 필치로 묵서하 는데 강의 뜻은 오랜 시간 유실되었다가 찾아왔는데 각이 큰불로 인하여 소실되었지만 이 편액만큼은 소각되지 않고 보 전되어 신비롭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편액 왼쪽에는 이삼만 인장이 새겨져 있으며 두인은 생략되어 있다. 판의 둘레는 약간의 단청을 하 고 나무의 재질은 송판인 듯하다. 이런 역사가 숨겨진 칠성각편 액은 위와 같은 역사가 숨어 있어 앞으로 스토리텔링하는 데 한몫을 할 것이다.
 
 
상이암의 역사를 말해주는 암각서
 
 
상이암 삼청동비각 뒤 산봉 우리에는 많은 이름들이 적혀 있다. 주로 암각서가 새겨진 곳 은 상이암에서 작은 냇가를 건 너 삼청동비각이 있는 뒷산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산 정상에 도 암각서가 있는데 이곳을 오 르려면 삼청동비각에서 약간 길을 내려가다 다시 바위를 타고 솔밭 길과 암벽을 타고 기어 올라가야 한다. 이곳에는 잘 다듬은 평평한 바위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사람들로 여기에는 안사按使 김문현(金文鉉 : 1893년) 지현(知縣) 민충식(閔忠植 : 임실현감 1893. 11. 3.∼1894. 12. 23. 여흥인 : 驪興人) 자子 병태丙台라고 새겨져 있으며 우측에는 진사進士 오재연吳在淵이가 기록되어 있다. 즉 상이암이 동학란 때 소실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동학란 때 동학교도들이 전주로 입성하자 전주성 을 버리고 달아난 김문현 관찰사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김문현은 동학란 이 일어나기 이전에 이곳 상이암에 들러 치적이 있어 암각에 이름을 새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삼청동비각 뒤쪽에도 암각서가 많이 있는데 열거하면
 
박계조朴秊祚·지현知縣 조성희趙性憙·공덕주功德主 이봉필李奉弼 남원부사南原府使 최석두崔錫斗·문재국文在國·문재학文在學 계사팔월일癸巳八月 日과 전서 필의로 쓴 시도수詩道守 손병호孫秉浩 이춘식李春植 이의현李義炫의 이름과 장지우張志雨·경력經歷 김동욱金東旭·안호 安鎬瑩·윤탁尹卓·박승범朴昇凡 등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자료로 알 수 있는 암각서가 몇 곳에 있는데 조성희趙性憙는 본관이 함안咸安 으로 고종 23년(1886) 7월 14일부터 고종 26년(1889) 1월 19일까지 임실현감을 지냈 다. 손병호孫秉浩는 본관이 양密陽으로 태인 현감으로 재직 중 고종 41년(1904) 8월 부터 임실현감을 겸임하였다.
 
삼청동비각 오른쪽에는 거사居士 이현구李顯九·도정都正 윤태일尹泰一·진사進士 이병의李炳儀·연산처사蓮山處士 이 경우李暻宇 등이 있으며 바로 옆에는 석면石面을 다듬은 후 남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해서로 썼다. 이 글씨는 북조체의 서체가 가 미되어 운필하 고 사찰에서 사용하는 사경체 비슷하게 엄격한 맛이 있다. 또 주변 에는 여러 암각서가 있어 모두 적어본다.
 
윤상정尹相定·윤상완尹相完 무자戊子 칠월七月 민광식閔廣植·김준문金俊文, ○○찬 瓚·박진숙朴辰淑 칠성각중수주七星閣重修主 을해乙亥(1935추정) 삼월일三月日·안사按使 이헌직李憲稙·지군知郡 임용현林鏞炫(1902-1904 임실현감 재직)·국장局長 김 진 金永桭·참봉參奉 심진표沈鎭杓 최규서崔圭瑞·진사進士 이석규李錫圭·참봉參奉 이광의 李光儀·진사進士 양기형梁基衡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심진표沈鎭杓는 풍산豊山심씨로 아호가 우곡愚谷이며 철종 12년(1861)에 출생하였다. 성수면 월평리 육우정에 배향된 인물이다. 향토의 사림 심병원沈炳遠의 아들로 기우氣宇가 헌앙軒昻하여 위풍이 당당하였으며 행실이 진실하고 효성이 지 극하였다. 학문에 조예가 깊어 후학의 모범이 되었는데 고종 32년(1895) 소학교령 이 공포되자 1900년 가정재의 옛 관서당 자리에 진소학교를 세워 초 교장에 추 되고 이 학교가 임실 양사재로 옮겨진 후에도 4년간이나 교장에 추 되어 근 속하였다.
 
이광의李光儀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아호가 우당愚堂이며 성수면 월평리 육우정에 배향配享된 인물이다. 효령 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후예로 로 효성이 지극하고 학덕을 갖추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양기형梁基衡은 남원양씨南原梁氏로 아호가 우촌愚村이며 용운암龍雲菴 양식梁埴의 손이다. 성수면 월평리 육우정에 배향된 회원이다. 철종 2년(1851)에 출생하여 육 우정을 건립할 때 79세 다. 고종 광무 10년(1906)에 진사과에 합격하였으며 천성 이 강직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삼강록三綱錄』에 그의 사적이 수록되어 있다.
 
또 다른 암각서는 안사按使 민정식閔正植(1891∼1892) 지현知縣 민 閔泳大(1891 ∼1893) 임진壬辰(1892)七月 日 지군知郡 박시순朴始淳등이 있다.
 
민영대閔永大의 본관은 여흥麗興이며 고종 28년(1891) 1월 29일부터 고종 30년(189 3) 11월 8일까지 임실현감으로 재직하였다. 민 현감은 재직하는 동안 많은 선정을 베풀어 신평면 창인리와 관촌면 고덕마을에 세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박시순(1848~1907)은 자(字)가 윤원允元이며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호는 국인菊人으 로 고종 16(187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서학교수西學敎授·우통례右通禮, 우승지右承旨· 면천군수沔川郡守·임실군수任實郡守·장연군수長淵郡守를 역임한 인물이다. 그의 일 기는 유배생활流配生活을 기록한 북정일기北征日記, 관직생활官職生活을 기록한 면불일 기沔紱日記·운불일기雲紱日記·민장 치부류인 사송록詞訟錄·민소책民訴冊·그리고 공문서류인 관지책官旨冊·군보郡報·군감郡甘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정일기北征日記 는 유배 시 홍원洪原에서 쓴 일기日記이며, 면불일기沔紱日記는 면천군수沔川郡守 재직 시在職時에 운불일기雲紱日記는 임실군수任實郡守 재직 시에 각각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박시순은 1895년(고종 32) 6월 20일 임실군수에 임명됨으로써 9개월 동안 의 면천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동년 7월 임지인 임실에 도착한 박시순은 1904년 (광무8)까지 무려 9년 동안을 임실군수로 재직하였으며 지역地域마다 임지任地에 재 직하는 동안 일기와 공문서류를 남겨 일부가 세상에 알려져 있다.
 
상이암에는 조선시 중기에서 후기 것으로 추정하는 형의 물확(확돌)이 있다. 물확은 물을 받아두기 위하여 사찰 입구에 많이 놓아 두는데 상이암 물확 옆에는 시주자와 건립연 가 적혀 있다.
 
시주施主 황태윤黃太潤 화주化主 조趙○주住○○○입立 무오戊午○月일이라 적혀 있고 석조의 크기는 길이 163cm·폭 80cm·높이 62cm·깊이 34cm이다. 이때 만든 석조는 현재 사용되지 않고 뜰에 보관 중에 있는데 현재는 최근에 만들어진 석조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칠성각 앞에는 환희담 암각서가 있으며 이곳에서 산을 약간 오르면 혜월당慧月堂, 두곡당杜谷堂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다.
 
칠성각 옆에는 작은 암각서가 있는데 산신각중수시주山神閣重修施主 참봉參奉 진재 석晋在碩 병진(1916) 7월일이라고 씌어 있다. 이 암각서는 석축으로 사용한 듯한 느 낌이 들며 참봉 진재석은 예서 필의로 썼으며 협서 글씨는 해서로 썼다.
 
진재석은 임실 지역의 유지로 많은 지역에 기념비가 있다. 첫째는 가까운 성수면 왕방리 마을 입구에 진재석시혜비가 있는데 이 비는 왕방리 지역 주민들이 1925년 (을축)에 세운 것이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13×38×13㎝이다. 비의 전면에는 전참 봉진재석시혜불망비前參奉晋在碩施惠不忘碑라 새겨져 있다. 또 다른 참봉 진재석시혜 송덕비는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 89에 있는데 덕치면사무소를 지나 200m 노변에 위치해 있다. 3기의 비 중 가장 왼쪽에 있는 것으로 윗부분이 둥그스름하게 표현된 선정비로 크기는 47×130×13㎝이다. 현재 풍화에 의한 마모 및 변색이 심한 상태이 다.
 
진재석의 또 다른 이름은 임실읍 성가리 525 죽림암 탱화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 탱화에는 1936년(소화 11) 병자년에 임실에 사는 권법상 스님이 그렸다고 전해 지며 이때 ‘시주자는 임실군 임실면(邑) 이도리 무인생 진재석晋在碩과 부인 이씨李氏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위의 내용으로 보아 진재석은 일제강점기 임실의 많 은 지역에 희사를 한 흔적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재석은 당시 임실의 표적인 부호로서 많은 선정을 베풀고 특히 소작인들에 게 적선積善함으로써 임실읍 감성리와 덕치면 회문리·임실읍 현곡리·성수면 왕 방리 그리고 성수면 상이암에도 전 참봉 진재석 시혜비가 세워져 있어 치적을 알 수 있다.
 
성수산 석문동 암각서
 
 
임실에서 진안 방면으로 30번 국도를 타고 약 7km 가다 보면 성수리 입구 삼거리에 성수산자연휴양림 북 문교회 수양관이라는 이정 표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성 수산 방향으로 1km쯤 지암 마을이 나오고 바로 위로 성 남저수지가 있다. 이곳에서 수철리마을을 지나 2km쯤 더 가면 휴양림교육관이 나 오고 다시 상이암 방향으로 1km쯤 계곡 옆으로 길을 타고 가면 석문동이 나온다. 이곳은 상이암계곡과 성문동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합수하는 곳인데 바로 아래 암각서가 있다. 연 는 알 수 없으나 바위 사방 면에 1m 정도 크기로 많은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암각서가 있는 바위가 거꾸로 누워 있다. 그 전에 큰 바위에 이름을 새긴 것으로 보이나 산사 태로 바위가 갈라지고 넘어지면서 상부가 아래로 누워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길에서 2m 거리 석문동 계곡 쪽으로 또 다른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입석에는 권봉규權奉圭, 한석재韓錫齊의 이름이 있고 오른쪽 우측 바위에는 김재홍金載弘, 김재호金載浩, 김재황金載璜의 이름이 글자 크기 10cm로 상단부에 새겨져 있다.
 
 
 

6. 6. 소충사의 주요 금석문

 

6.1. 소충사 경내의 사적비

소충사 호남창의동맹단비
 
 
이 비는 성수면 소충사 경내 기념관 앞에 위치 하고 있다. 비신은 145×55×25cm이고, 이수는 용두 석에 58×75×44cm이며 좌 는 거북좌 이다. 전면 에는 호남창의동맹단湖南倡義同盟壇이라고 적혀 있 으며 후면에는 1907년 9월 12일 진안 마이산 용암 에서 500여 명의 의병들이 모여 고천제를 지낼 때 조직하여 발표한 통솔조직으로 의병장 정재 이석 용선봉·중군·후군·참모·총지휘 연락·도로 부장·보급·운량·기실 등 28명의 조직원 이름이 적혀 있다. 하단에는 1909년 3월 6일 의병들을 일단 해산하여 귀가조치하고 1911년 3월 몇 명의 조직원들을 모아 비 조직을 만들었으며 그 후 1912년 겨울 다시 비 결 사 를 조직하여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이라 이름하고 활동하 던 조직원들의 이름 이 적혀 있다. 맹 단원의 구성을 보면 단장에 정재 이석용을 비롯 하동·전주·임 실·진안·남원·곡성을 표하는 22명이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그 명단이 적혀 있다. 이 비는 1964년에 세워졌으며 좌 는 거북이 모양을 하였으며 이수 모양은 용을 두 마리 조각하였다.
 
소충사 이십팔 의사 기적비
 
 
소충사 경내에 호남창의동맹단비와 함께 있으며 비신은 화강암좌 위에 세워져 145×55×25cm이고 이수는 옥개석에 58×75×44c m이다. 전면에는 이십팔 의사 기적비二十八義士紀績碑라고 써져 있으며 뒷면에는 정재 이석용 선생과 이십팔 의사의 내용을 담은 비문은 한민국 40년 戊戌(1958) 5월 단양 일端陽日에 光山 김문옥金文鈺 선생이 撰하고 瑞興 김규태金奎泰 선생이 쓴 비문을 새겼다. 이 비는 현재 소충사 조의단비 옆에 세워져 있다.
 
소충사 조의단비
 
 
조의단비弔義壇碑는 소충사 경내에 ‘창의 동맹단’ 비와 ‘이십팔의사기적비’와 함께 세 워져 있다. 비는 145×55×25cm 이고 이수는 용두석에 58×75×44cm이며 좌 는 거북좌 이다. 단기 4280년(1947) 6월 10일 당시 통령인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글을 짓고 통령 비서실장인 윤석오尹錫五 선생이 쓴 28 의사 추념문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조의단 弔義壇이라고 쓴 비액碑額의 글씨는 이승만 대통령의 행서 글씨이며 뒷면에는 현 소충사昭忠祠에 배향되어 있는 28의사의 명단 이 있다.
 
의병장과 이십팔 의사 비석군碑石群
 
 
소충사 경내에 있는 작은 비석들이며 중심부에 있는 약간 큰 비석은 북극성으로 호남의병 창의동맹단의 의병장을 뜻한다. 좌우 14기씩 28기는 28의사를 뜻하여 비석마다 의사들의 이름 과 별자리 모양이 음각으로 그 려져 있다. 후면에는 비석을 세울 때 도움을 주신 분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정재 이석용 선생은 북극성으로 호남 창의 장 이학사湖南倡義大將 李學士라 새겨져 있다. 또한 이학사 비의 후면에는 봉립 위원장인 전라북도 경찰국장 장동식이라고 적혀 있다. 왼편으로 14개의 별자리는 가장 왼편부터 이십팔숙의 별자리 중 동방 칠숙에 해당하는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와 북방칠숙에 해당하는 두우녀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이 새겨져 있으며 각각 에 의병으로 활약하 던 박만화 의장을 비롯 14인을 배치하였다. 오른쪽 14개의 비군은 이십팔숙의 별자리 중 서방칠숙에 해당하는 규루위묘필자삼奎婁胃昴畢觜參 별자리와 남방칠숙에 해당하는 정귀류성장익진井鬼柳星張翼軫이라 새겨져 최덕일 의 장을 비롯하여 14명의 명단을 새겨놓았다. 전체적으로 좌우에서 별자리가 포진한 형국으로 만들어져 있다. 29개의 비석은 1956년도에 이원 선생에 의하여 세웠으 며 크기는 이석용 의병장의 비석을 빼고는 모두가 동일하며 높이 75cm 폭 25cm 두께 10cm이다.
 
 

6.2. 소충사 외 지역의 사적비

정재이선생유허비
 
 
정재이선생유허비는 성수면 삼봉리 676번지인 의병장의 생가 뒤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석용 의병장의 생가는 1997년 7월 18일 지방기념물 91호로 지정되었다.
 
유허비는 아들인 이원 선생을 비롯하여 뜻을 같이한 유지들이 세웠는데 비석 전면은 정재이선생유허비靜齋李先生遺墟碑라고 되어 있으며 비문을 지어 1938년 11월 29일에 세웠다. 그러나 당시 세워졌던 유허비는 일제강점기인 1941년 일경에 발각 되어 비석의 음기에 기록된 사람들 일부가 체포되고 일부는 수배되었다. 이에 가담 한 사람들 중 아들 이원 을 비롯 6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분묘제사초상등 취체령 위반으로 투옥된 바 이원 은 징역 10월·박원충·심한경·이존칠·이현승·이맹 호·최병섭이 각각 4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 으며 잡히지 않은 나머지 분들은 도피하여 화를 면했다. 그때 세워진 유허비는 일제에 의하여 파손되어 없어졌으나 해방 후 찾아보니 윗부분은 없고 아랫부분만 발견되어 현재 소충사기념관에 보관하 여 역사의 증거물로 전시 중에 있다. 현재의 유허비는 해방 후 아들 이원 선생이 복원하여 세운 것이다. 현 비석의 크기는 높이 102cm·폭 35cm·두께 13cm이며 소충사기념관에 보관 중인 구비舊碑도 이와 비슷하다.
 
운현전적의혼 추모비
 
 
운현전적의혼추모비雲峴戰蹟義魂追慕碑는 성수면 태평리 왕 재 추모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 으며 조국 광복 60주년이 되는 2005년 10월 19일 제막식을 가 졌다. 우리 고장에서 자발적으 로 의병을 모아 일본군과 직접 싸우신 정재 이석용 의병장을 비롯하여 의병활동 중 순국하신 선열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성수면민들의 뜻을 모 아 세웠다. 이곳은 1908년 3월 21일 운현전투에서 악천우惡天雨인데도 적의 총검을 무서워하지 않고 적과 싸우다가 16명이 전사하고 포로가 2명, 부상자가 3명으로 크게 패전한 곳이다. 그해 4월 28일 이석용 의병장은 이곳에 삼척단三尺壇을 쌓아 28의사의 위패를 모셔놓고 ‘조사단弔祠壇’이라 이름하여 돼지 한 마리를 제물로 차려 놓고 제사를 올린 곳이다. 비의 머릿돌에 새긴 ‘운현전적의혼추모비’라는 글씨는 정재 이석용 의병장靜齋 李錫庸 義兵將의 사우견문록師友見文錄과 친필親筆 자료에서 집 자集字하여 정리하 고 중간의 비문(戊申三月스무하루勒約의 어둠 속에서도 忠則盡命主辱臣死로 祖國光復의 正路를 밝힌 二八星靈昭忠大義를 우러러 追慕합니다.)은 장수인長水人 오초 황안웅黃安雄 선생이 짓고 28의사 명단과 뒷면의 글씨는 부여인夫餘人 하산 서홍식荷山 徐弘植이 글씨를 썼다. 비석의 크기는 가로 290cm·세로 270c m·폭 80cm이다.
 
 
 

7. 7. 암각서와 비갈

육우정 암각서
 
 
성수면 월평리 신촌마을 앞에서 다리를 건너 산아래에 육우정이 있고 육우정六愚亭 들어가는 입구 우측에 바위를 이용하여 이름을 새긴 암각서 가 있는데 이는 여섯 분의 이름과 호 를 두 곳에 나누어 새겨 놓았다. 바위 를 배경으로 좌측에는 85cm와 70cm
 
넓이에 우곡 심진표愚谷 沈鎭杓·우석 홍종익愚石 洪鍾翼·우촌 양기형愚村 梁奇衡의 이 름이 새겨져 있고 우측에도 같은 크기로 우계 노학규愚溪 魯學奎·우당 이광의愚堂李光儀·우천 송응진愚泉 宋應溱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육우정의 건립과 함께 새겨진 것으로 보아 1919년도에 새겨진 것으로 본다. 심농 조기석이 쓴 ‘鳳南亭’이 란 편액도 있으며 또한 육우정을 바치고 있는 바위 아래에는 六愚亭이란 암각서도 있다.
 
백구동과 풍산심씨 선산 표지석
 
 
암각서는 성수면 소재지로 들어가 는 월평리 신촌마을에서 석현마을 을 조금 지나 양지리 중촌마을 입구 못 미처 좌측에 백구동과 풍산심씨 선산하白駒洞과 豊山沈氏先山下라고 암 각된 글씨가 있다. 이 암각서는 가암각서와 비갈로 110cm·세로 55cm의 크기로 풍산심씨 선산 아래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사재 앞에 위치하고 있다. 백구동白駒洞은 그곳 골짜기의 지명이며 작은 말을 키우던 곳 이란 뜻의 암각서로 본다. 과거에는 풍산심씨를 비롯하여 이곳에 몇 집의 인가人家 가 있었다고 전한다.
 
풍산심씨 묘동 암각서
 
성수면 소재지에서 진안 방향으로 가다가 1km지점에서 삼봉리 쪽으로 좌회전하면 금동마을이 있고 금동마을 입구 못 미처 풍산심씨 선산과 재실이 있으며 재실 옆 길가 바위에 가로 73cm 세로 53cm의 크기로 새겨져 있다. 자연석의 작은 바위 에 전면을 연마하여 풍산심씨묘동豊山沈氏墓洞이라고 새겨 놓았으나 누구의 글씨인 지 또한 연 도 알 수 없다.
 
강릉유씨 묘동 암각서
 
전주 남원 간 국도에서 성수면 오류리 앞 다리 를 건너 우측으로 덕치마을을 지나 약간 진입하 여 좌측의 콘크리트 포장의 농로를 따라 가다가 보면 봉강리 산 4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세로 1 50cm 가로 120cm의 크기로 우측 계곡에 강릉유 씨묘동江陵劉氏墓洞이라고 새겨진 암각서가 위치 하고 있다. 이 암각서는 오류마을에 살고 있는 강릉유씨의 선산 입구 길옆 작은 바위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지금도 선명하나 연 는 알 수 없 고 다만 좌측에는 임해석壬亥石이라고 되어 있고 우측에는 동적동童笛洞이라고 새겨져 있다.
 
 
경주김씨 묘동 암각서
 
 
전주 남원 간 국도에서 성수면 오류리 앞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덕치마을을 지나 다시 우측으로 작은 농로를 따라 올라가면 또다시 우측으로 밭 가운데 작은 바위에 경주김씨 묘동慶州金氏墓洞이라고 새겨진 암각서가 위치하고 있다. 이 암각서는 세로 170cm 가로 35cm의 크기로 오류마을에 살고 있는 경주김 씨의 선산 입구에 세워졌는데 보통으로 보아서는 보 이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삼청리 강화노씨 묘비
 
 
성수면 소재지에서 중학교 정문을 지나 1.5km 지점에 있는 천동마을로 가다가 마을 못 미처 우측으로 농로를 따라가면 강화노씨 재실이 있고 재실 뒤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비는 강화노씨 입향조이며 남한에서 문중의 가장 오래된 강화노씨 시조 묘라고 한다. 높이 125cm·폭 49cm·두께21cm 크기의 비석 전면에는 가선 부행 제학창녕부사노공여지묘, 증정부인남양홍씨부嘉善大夫行大提學昌寧府使魯公輿之墓, 贈貞夫人南陽洪氏祔라고 새겨져 있 다. 공의 휘는 여輿요 자는 덕 운德運이며 호는 송재松齋이니 효간공의 아들로 창녕부사昌寧府使를 지냈다. 무진년戊辰年 고 려창왕昌王1년(1388) 정원에 현 량과賢良科에 올라 진현전제학 進賢殿提學에 이르 다. 조선이 개국하자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산聖壽山 아래 성수면에 은거하여 송경(지금의 개 성)을 잊지 못하는 뜻으로 서재의 편액을 송재松齋라 하였으며 감찰공이며 오남五男 인 인언仁彦으로 하여금 다시 개성으로 들어가 살게 하였다고 운수지雲水誌에 기록 되어 있다. 공公은 다섯 자녀를 두었으니 장남의 휘는 인호仁好니 충청 및 북병사忠淸 및 北兵使요 차남의 휘는 인지仁止니 경기감사京畿監司요, 삼남의 휘는 인복仁復이니 한림학사翰林學士요, 사남의 휘는 인철仁喆이니 기장현감機長縣監이요, 오남의 휘는 인 언仁彦이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이때부터 오파五派로 갈라져 즉 병사공파兵使公派, 감사공파監司公派, 한림공파翰林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로 갈라졌다.
 
현재 구비舊碑는 숭정기원후 5壬辰이라고 씌어 있어 1892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8. 8. 시혜선정비

진사 이건호 시혜비
 
 
성수면 양지리 도로변에서 행촌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108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시혜비는 庚午(1930) 12월 당시 상동면 양지리 주민들이 세운 비석으로 높이 120c m·폭 43cm·두께 12cm의 작은 크기이다. 진사 이건호 시혜 불망비進士李建鎬施惠不忘碑라고 적혀 있으며 후면에는 이들을 추모하는 시문이 적혀 있다. 전 참봉오창현시혜불 망비前參奉吳昌鉉施惠不忘碑와 같이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최근에 보니 아직도 보존의 가치가 있는데도 도로 변이라서 차량에 의한 훼손으로 구비舊碑를 없애버리고 새로운 비를 다시 세우니 이 는 역사와 문화를 인식하지 못한 결과의 산물이라고 생각해 본다.
 
전 참봉 오창현 시혜비
 
 
성수면 양지리 도로변에서 행촌마을로 들어가는 입 구 양지리 108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시혜비는 乙丑(1925)년 4월에 양지리 주민들이 세웠으며 높이 135c m 폭 45cm 두께 12cm의 작은 크기이다. 내용은 전 참 봉 오창현 시혜 불망비前參奉吳昌鉉施惠不忘碑라고 적혀 있다. 진사 이건호 시혜불망비進士李建鎬施惠不忘碑와 같이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도로변이라 훼손이 심하고 시혜 비가 중년에 부러져 시멘트로 이은 흔적이 있었는데 최 근에 또다시 부러져 방치되고 있다. 비석 앞면에는 참봉이 행한 일을 기록한 시구 가 새겨져 있다.
 
전 참봉 진재석 시혜비
 
 
성수면 오봉리 저수지를 넘어 원왕방마을 모정 을 올라가는 앞 정원에 위치하고 있다. 진재석晋在碩시혜비는 왕방리 587-1번지에 위치하며 높이 10 3cm·폭 38cm·두께 12cm의 작은 크기로 주민들 이 을축년(1925) 12월에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있 다. 비석의 전면에는 전참봉진재석시혜불망비前參奉晉在碩施惠不忘碑라고 새겨져 있으며 후면에는 전 촌쾌활 감석하이全村快活 感碩何已라고 새겨져 있다. 또한 성수산 상이암 칠성각 옆에도 시혜비가 있는 데 이 또한 상이암에 많은 시주를 한 바 신도들이 세워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관의관 박진서 시혜비
 
 
성수면 오봉리 저수지를 넘어 원왕방마을 입구인 조치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비석은 저수지로 수몰될 당시 마을 어귀에 있었 는데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가 94cm·폭 36cm·두께 10cm로 비교적 작은 크기이며 박진서朴鎭瑞시혜비는 조치마을 주민들이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비석의 전면에는 ‘관의관박공진서시혜비官議官朴公鎭瑞施惠碑’라고 새겨져 있으며 후면에는 너무 마모되어 알 아볼 수 없고 글자의 형체만 남아 있다. 현재 비석 이 서 있는 곳 뒤편의 산은 지금도 박진서 후손의 산이라고 한다.
 
 
 

9. 9. 정려비

효자 윤상현 정려비
 
 
성수면 소재지에서 721번 지방도를 가다가 평지마을 삼거리에서 효촌마을 쪽으로 300여m 지점 도로변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정려각은 다른 곳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29년 봄 이곳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삼중기단 위에 한 개의 돌기둥(높이 180cm)이 있으며 그 사이에 가로 139cm·세로 53cm의 리석으로 된 두 개의 판석 을 끼워넣었다. 상판은 규모가 가로 139cm·세로 53cm이고 전면에 ‘효자증동몽교 관조봉 부윤상현지려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尹相鉉之閭상지이십구년임진구월일 명정’ 上之二十九年壬辰九月 日 命旌’이 후면에는 판돈 判敦寧 석촌 윤용구와 곽찬이 쓴 정려기 가 있는데 윤용구의 낙관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석촌 윤용구는 본관이 해 평으로 한일합방이 되어 조 선총독부에서 작위를 주었으 나 이를 받지 않고 거절하여 당시 조선 선비들의 추앙을 한몸에 받은 사람이다. 여러 서체에 능하였으나 그의 해 서는 특히 유명하여 당나라 구양순의 필법에 추사 김정 희의 필의가 가미된 강골한 필치를 구사한 분이다. 하판은 규모가 가로 130cm 세로가 65cm인데 전면에 현능참 봉顯陵參奉 최 조가 쓴 정려기가 있다. 최 조는 당 의병의 지도자이며 마도에 귀양을 가서 순국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장남으로 본관이 경주이다. 한편 후면에는 민병승이 지은 덕봉윤공석정이건기德峰尹公石旌移建記가 각각 새겨져 있다. 외부에는 육각형으로 된 네 개의 돌기둥이 다시 가첨석을 받치고 있는데 문장이 새겨진 비석 을 제외하고 가첨석과 6개의 돌기둥 한 개의 석재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윤 상현의 자는 응정應鼎이고 호는 덕봉德峰, 본관은 남원이다. 그는 천성이 인자하고 학문이 깊었으며 부모에 한 효성이 지극하여 유림들의 천거로 고종 29년(1892)에 정려의 은전이 내렸다. 정려각은 팔작지붕으로 갓석 크기는 220×125×76cm이며, 좌 는 3단으로 되어 있는데 크기는 178×30×25cm이다
 
孝子贈敎官尹公旌閭記
昔從湖南之儒聞雲水東有德峯尹公爲鄕先生矣届乙丑夏有枋燮者踵門而焉曾王大人旌閭記得以讀其狀乃昔日所聞德峯先生也輒感不辭而諾因發揮之曰程子云仁偏言則一事專言則包四者據此推之孝偏言則一行專言則包百行也一行之孝人易能之百行之孝非篤學博問者難能世之到此者盖幾人焉公天良聰睿夙悟學問之爲急孝悌之爲本讀書必要眀理飭行必要敦倫早喪怙恃至痛在心言稱罪人遇忌悲泣如袒括每晨謁廟朝望省墳非有疾病雖風雨不廢擇賢而友之慕古而尙之 若其糾利之事雌黃之說一不出諸口於毁譽無不反諸已而悔謙焉於性理禮書熟復而踐履之家雖窶而不改其操族雖疏而不替其撫奉身 儉約不用綺紈之屬接人寬厚不設表襮之 餙爲先必誠垂後必善盖其天性淳 慤德學隆深也豈可以一善目之哉宜其鄕邦擧德義達 廟堂 贈童蒙敎官 旌表其閭也公諱相鉉字應鼎南原望族也世之論 孝者只述其偏孝之難而不知專孝之爲尤難使人眀於養親而不眀於潔其己豈勝惜哉特擧其專而記之令過於此者知先生之盛而矜式焉
 
旃蒙赤 奮若端陽通訓大夫前 顯陵參奉 崔永祚 記
 
【해설문】
 
효자증교관윤공정려기
 
옛날 호남의 유림들을 따라 다닐 때에 임실 동쪽에 덕봉 윤공 위향鄕 선생으로 계셨던 분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마침 을축 여름에 방섭이라는 분을 따라 그 집을 찾았다. 그런데 그분이 증조의 정려기라 하기에 읽어보니 옛날에 들었던 바로 덕봉 선생이었다. 이에 문득 감회가 일러 부탁을 사양치 않고 정려기를 다음과 같 이 썼다.
 
정자께서 이르기를 ‘인仁을 좁은 뜻으로 말하면 하나의 일이지만 다 들어 말하면 인의예지仁義禮智 넷을 다 포함한다.’고 하셨는데 이를 미루어 효를 좁은 뜻으로 말 하면 한 행실이나 다 들어 말하면 온갖 행실이라 말할 수 있다. 한 행실로써의 효는 사람이 쉽게 능히 말할 수 있어도 백행으로써의 효는 학문이 독실하고 넓지 않고서 는 능히 행하기 어려운 것인데 세상에서 이같이 백행의 효를 행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공은 천성으로 양순良順하고 총예聰睿하여 일찍이 학문하는 자의 급선무는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시고 독서함에 있어서는 반듯이 이치를 밝히고 실행함에 있어서는 윤리를 돈독히 여기셨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서는 마음으로 심히 애통하여 말 끝마다 죄인이라 칭하고 기일을 맞이해서는 마치 품에 안긴 듯 슬프게 울며 매일 이른 아침마다 가묘를 찾고 묘소를 살피시되 질병에 시달려 누워 있지 않는 한 비록 비바람에도 그치지 아니하였다.
 
어진 이를 택하여 벗하고 옛 현인들을 사모하여 섬겼으며 만약 이해로 일이 틈이 생겼다든지 남이 거짓으로 꾸미는 말을 할지라도 입 밖으로 헐뜯거나 기리는 말을 내지 않고 자신을 돌이켜 뉘우치거나 겸손해 하셨으며 성리性理 예서禮書를 익히고 다시 실천해 나가셨다.
 
집안이 비록 가난했으나 그 지조志操를 고치지 않으셨고 족속이 비록 친절히 하지 않을지라도 그들을 몸소 친히 하기를 바꾸지 않으셨고 자신은 검약儉約하여 비단과 같은 것들은 입지 않으셨다.
 
남을 접대함에 있어서는 관후寬厚하셨으며 겉으로 나타나는 치장을 하지 않으셨으며 선조를 위하는 일에는 반듯이 정성을 쏟았다. 후손에게 모범을 보이는 일을 반듯이 기쁘게 행하셨으니 아마도 그 천성이 순자淳慈하시고 덕학德學이 높고 깊으 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찌 가히 일일이 찬한 덕목을 다 들어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고을에서 덕의德義로 천거함이 마땅하다는 뜻이 묘당廟堂에까지 알려져 동몽교관童蒙敎官이 증직됨 과 동시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공의 휘는 상현相鉉이요 자는 응정應鼎이니 남원의 망족이다.
 
세상에서 효를 말하되 다만 그 좁은 뜻으로서의 효의 어려움만 말하고 넓은 뜻으로서의 효가 더욱 어렵다는 것을 알지 못하여 부분 사람들은 부모를 잘 봉양한 사실만을 들어 밝히고 부모뿐만 아니라 그 자신까지 조촐히 한 사실을 밝히지 못하 니 어찌 아쉬운 일이 아닌가. 이에 특히 그 넓은 뜻으로서의 효행을 쓰고 이곳을 지나는 이들로 하여금 선생의 성한 효행을 알려 모범을 삼고자 함이로다.
 
전몽적분약(旃蒙赤奮若:1925년 단양(五月)
통훈 부 전 현릉참봉 최 영 조 記
 
 
효자 윤두표 정려
 
 
성수면사무소에서 백운 쪽으로 1km쯤 가다 보면 평지마을이 있 고 평지삼거리에서 효촌마을에 당하여 마을 입구에서 50m지점 오봉리 871-5번지 도로변 우측에 있다.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 칸으로 맞배지붕이며 단청이 되 어 있다. 크기는 200×200×154cm로 전면에는 ‘효자동몽윤두표지려 정축이월일 정려孝子童蒙尹斗杓之閭 丁丑二月 日 旌閭’라고 쓴 정려기와 방섭이 쓴 ‘예조계사禮曹啓辭’가 새겨진 현판이 있다. 윤두표는 1559년도에 태어났는데 자는 추경樞卿, 호는 첨담詹潭 본관은 남원이며 증 참의贈 參議 기삼起三의 아들이다.
 
그는 어렸을 때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으며 홀로 계신 아버지에게 효성이 지극하다. 어느 날 밤 도적들이 집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고 병든 아버지를 죽이려 하자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아버지를 온몸으로 감싸고 신 죽기를 호소하니 도적 들도 그의 효심에 감복하여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돌아가 생명을 온전히 보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향리에 알려지자 숙종 22년 丙子(1696) 10월 10일 임실현 감 정익주鄭翊周가 이 사실을 전라감사 김만길에게 보고하고 전라감사는 임금에게 장계狀啓를 올려 그 이듬해 정축년(1697) 2월에 정려의 은전이 내려졌다. 1933년에 8손 방섭枋燮이 쓴 정려 중건기가 있다.
 
효자 김치태 정려
 
 
임실역에서 742번 지방도로 를 타고 도인리 324-1번지 당당 촌을 거쳐 후촌마을로 들어가 는 길목 우측에 있다. 정려각의 크기는 222 × 200 × 210cm이고, 현판의 크기는 165 × 40cm이다. 현판에는 ‘효자증동몽교관조봉 부김치태지려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金致泰之閭상지이십구년上之二十九年(1892) 9월에 명정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 으며 김효자 정려기 정유년팔월 고중 신득구기金孝子 旌閭記 丁酉年八月高衆申得求記에는 김치태의 효행을 기록하고 있다. 정려기 밑에는 또 다른 현판이 있는데 이는 김치 태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김치태는 이곳 후촌마을 출신으로 본관이 경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에 한 효행이 남다르고 병중인 아버지가 한겨울에 잉어를 먹고 싶어하자 바로 잡아 봉양하였다. 또한 집안이 가난하여 고기를 사다가 드릴 수 없었으니 자신의 허벅다리를 도려내어 끓여드리는 등 온갖 효성을 다하였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묘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효자 박기래 부처 정려삼
 
 
30번 국도상 성수면사무소 에서 백운 쪽으로 평지삼거 리 못 미처 금동마을로 들어 서 삼봉리 213번지에 양박 씨 재실인 관수재가 있다. 관 수재觀水齋는 1909년에 조성 한 양박씨 종 宗垈이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외삼문과 인례문仁禮門 아래 중문과 정려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효자 박기래 부처의 정려기는 솟을 문 입구의 관수재를 들어가는 인례문 위에 가로 198cm 세로 39cm의 정려기가 건립되어 있다. 박기래의 자는 치명致明이며 호는 만포晩圃 본관은 양이다. 그는 선공감善工監 가감역假監役 준 準永의 아들로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하였으며 다른 사람과 달리 일찍이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리고 부모에 한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명을 거역하는 일이 없었 으며 아버지께서 병이 들자 변을 맛보아 병의 증세를 살피고 자기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 후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6년 동안 시 묘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그의 부인 전주최씨는 덕홍의 딸로 박기래에게 시집와서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을 잘 공경하였다. 남편이 병들자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 나 결국 숨지고 말자 자결하려다 어린 자식들과 선 봉사가 염려되어 차마 죽지 못하고 어린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웠다고 한다.
 
심종원 모자 열효비
 
 
30번 국도를 따라 성수면사 무소를 지나 1km쯤 지나 가다 가 삼봉리 321-1번지 금동마을 입구에서 300m쯤 들어가면 심 종원 모자 열효비沈鍾源母子烈孝碑가 있다. 모자 열효비는 리석 두 개를 이어 만들었는데 비의 전면 위쪽의 열녀 남원양씨는 순조 33년(1833년)에 명정되어 가로 68cm, 세로 60cm의 리석 위에 심종만이 그 사실을 적었고 아래쪽의 효자 심종원은 광무 6년(1902) 12월에 명정되어 가로 68cm 세로 57cm의 리석 위에 심원만이 효행을 기록하였다. 갓석의 크기는 138×8 5×70cm이고 비각은 149×95×46cm로 좌 는 바위를 그 로 사용하였다. 남원양씨 는 사인 심학노의 후처로 시집온 지 8개월 만에 남편이 갑자기 죽자 늙은 시부모와 어린 자식들이 의지할 곳이 없음을 염려하여 차마 같이 따라 죽지 못하고 시부모를 지극히 봉양하는 한편 어린 두 아들을 잘 양육하였다고 한다. 심종원의 본관은 풍 산이고 초명이 익원이며 자는 내화이고 호는 행촌으로 학노의 아들이다. 그는 열 살 때 계모인 남원양씨에 의하여 양육되었는데 항상 자기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을 한스러워하며 계모에게 효성을 다하였다고 전해진다.
 
심병원 효자비
 
성수면 소재지인 양지리 1083-215번지 학당에서 삼청리로 가는 길에 부동교 끝 자락 왼쪽 제방에 위치한다. 심병원의 효자비는 광무 9년(1905) 7월 동몽교관에 증 직되어 정려의 은전이 내렸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20cm 폭 30cm 두께 15cm에 전면에는 ‘효자증동몽교관승통정 부비서감승심병원지려孝子贈童蒙敎官陞通政大夫秘書監丞沈炳遠之閭 광무구년칠월명정光武九年七月命旌’이라고 기록하였다. 심병원의 자는 광선廣鮮이고 호는 속당粟塘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인데 단종 절신節臣 주冑의 13 손 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곱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께서 노환으로 늘 병석에 누워 계셨는데 한 번은 꿀을 먹고 싶어하셨다. 한여름철이라 쉽게 꿀을 구 할 수가 없어 고심하다가 성수산에 들어가 산신께 기도를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바위에서 꿀이 나와 그것을 가져다 어머니를 봉양하 더니 건강이 회복되었다고 한다. 비석은 심진표가 찬을 하고 조병노가 글을 써서 후손인 풍산 심진철이 세웠 다.
 
이각, 이회덕 부자정려
 
 
임실에서 남원 방향으로 17번 국도를 따라 성수면 월평리 338 -1번지 월굴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이각 이회덕 부자는 지극한 효행으로 1905년 조정으로부터 정려의 은전을 받았다. 정려각 은 맞배지붕이고 정면․측면 각 1 칸으로 편액이 있으며 면암 최익현 선생이 지은 ‘증 교관이공정려기贈敎官李公旌閭記’가 있다. 이회덕의 후손으로는 임실향교 초 전교를 지냈고 육우정의 회원인 이광의 선생이 있고 아들은 독립운 동을 하 던 이기택이다. 이기택 아들은 이강원으로 정려기는 가로 245cm, 세로 39cm의 크기로 이강원의 문간에 걸어져 있던 것을 1950년에 이곳에 정려각을 짓고 정려기旌閭記를 세웠다.
 
강주영 처 함안조씨 정려각
 
 
오류리 280번지 오류마을 입구 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정려는 194 7년에 중건하였으며 1977년에 중 수하고 단청한 것으로 효열각의 크기는 250× 220× 190cm이며 정 면·측면 각 1칸으로 너와를 입 혔다가 지금은 시멘트기와를 올 린 맞배지붕이다. 효열각 내부의 현판은 217× 33cm로 ‘상지 11년(1874) 3월 명정命旌된 열녀 학생강주 처 함안조씨 지려烈女學生姜周永妻 咸安趙氏之閭’라고 정려기가 새겨진 현판과 동치 십이년 삼월 예조 입안同治 十二年 三月 禮曹立案과 1947년에 후손 옥성玉馨이 쓴 정려 중수기 등 현판 세 개가 있다. 함안조씨는 강주 의 처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일찍이 시아 버지가 병들어 목숨이 위독할 때 잠시도 시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지성으로 간병 하여 건강을 회복시켰다. 또한 시어머니가 중병으로 앓아눕자 변을 맛보아 병의 증 세에 따라 약을 구해드려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이 갑자기 병들어 죽자 남편의 뒤를 이어 목매어 자결하였다고 한다.
 
김계룡 모자 열효비
 
 
전주 남원 간 국도에서 오류리 187번지 오류마을 입구에 있다. 열·효비는 숙부인 전주이씨와 그의 아들 효자 김계룡의 정려비이다. 이 비는 기단 위에 두 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가첨석을 씌웠으며 돌기둥의 높이는 170cm이며 가첨석 의 높이는 120cm이다. 그리고 두 개의 돌기둥 사이에 판석碑石이 옆으로 놓여 있다. 판석은 세로 73cm·가로 36cm·두께 9cm의 크기로 위의 비석에는 ‘열녀증통정부경주김인명처숙부인전주이씨지려烈女贈通政大夫慶州金仁明妻淑夫人全州李氏之閭 성상어극이십칠년경인월 일 명정聖上御極二十七年庚寅 月 日命旌’이라 적혀 있고 아래 비석에는 ‘효자증동몽교 관조봉 부김계룡지려배 인 양박씨孝子贈童蒙敎官曹奉大夫金啓龍之閭配令人 密陽朴氏’ 병오(1906)십이월 일 동수 ‘丙午十二月 日 同竪’라 각각 새겨져 있다. 김 계룡은 인명의 아들로 字가 운거雲擧, 일명 재하在夏라고도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 는데 어느 날 어머니께서 병으로 자리에 눕자 온갖 정성을 다해 약을 구해 드렸으나 효험이 없 이 더욱 위독하게 되자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흐 르는 피를 마시게 하여 어머니의 생명을 3년간이나 더 연장시켰다고 한다. 전주이씨는 인명의 처이자 계룡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열행이 뛰어나 『호남 삼강록湖南 三綱錄』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김동호 처 광주이씨 효열비
 
이 비는 성수면 양지리 부동마을 성수중학교 앞 다리를 건너 부동마을 입구 부연정 밑에 있다. 이 비의 규격은 높이가 140cm·폭이 53cm·두께가 23cm로 전면에는 ‘유인광주이씨효열비孺人廣州李氏孝烈碑’라고 새겨져 있다. 비문은 종인 성균관전학 김회경宗人成均館典學金會慶이 짓고 완산 이일형이 썼다. 광주이씨는 이기안李起安의 딸이자 김동호의 처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화하였으며 부모에게 효도 하고 삯바느질과 베를 짜 음식을 조달하였다. 성인이 되어 성수 부동마을 본관이 함창咸昌인 김동호에게 시집와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을 공경하여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남편이 병들어 백방으로 약을 구하고 하늘에 기도 하였으나 끝내 숨지자 상례를 잘 치르고 칠순의 시부모를 잘 봉양하는 한편 어린 자식들을 잘 길 다고 한다.
 
풍산 심례순 추모비
 
이 비는 성수면 양지리 석현마을을 지나 중촌마을 입구 못 미처 산아래에 있다. 비 전면에는 ‘유인풍산심씨휘례순절효의적추모비孺人豊山沈氏諱禮淳節孝懿蹟追慕碑’라고 되어 있고 원임 성균관장 양 박중훈이 찬을 하고 용성후인 양종식의 글씨로 1990 년 11월에 건립하였다.
 
이원영 선생 충효비
 
이 비석은 성수면 오봉리 소충사 경내 주차장 옆에 2003년도 아들 이명근이 주관하여 세웠는데 성균관유도회 총본부 이해문 회장이 찬을 하고 동래후인 정병조의 글씨로 세웠는데 비문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기록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항상 으뜸으로 삼아 누구나 이를 실행하려 하였으나 그것이 어려웠다. 그러기에 조정朝廷에서는 이를 찾아 포양褒揚하고 정려각旌閭閣을 세우게 명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본받게 하고 또한 이것을 교화敎化하였다. 그런데 근 에는 사회가 급변하여 이를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는데 호남의 임실에 이를 실천 한 사람이 있으니 곧 청암靑菴 전주이공휘원 全州李公諱元泳이 그분이다.
 
청암공靑菴公은 개국공신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휘 백유伯由와 연산조燕山朝의 무오 명현戊午名賢 정간공한재휘목貞簡公寒齋諱穆의 후손이며 한말 의병장義兵將 정재 이석 용靜齋李錫庸의 아들로 1899년 을해乙亥 5월 14일에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에서 태어 났다.
 
정재공靜齋公이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을 분하게 여겨 1907년 정미丁未에 거의擧義하여 토위討倭타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니, 선공先公은 일시 몸을 숨겼다. 이때에 왜군은 그의 가옥을 소각燒却하고 선공先公을 잡으려 하니 선 공은 가솔家率과 몇 마하摩下를 거느리고 지리산 달궁으로 들어가 남원의 의병장 진사進士 고광수 군高光秀軍과 합세하여 유격전遊擊戰을 벌일 것을 협모協謀하였다.
 
이때에 공公도 선공先公을 모시고 들어갔는데 선공은 고진사高進士와 혼인을 합의 하여 그 산중山中에서 公과 고진사高進士의 애令愛와 혼례婚禮를 거행하였으니 이 또한 의군義軍만이 겪은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얼마 뒤인 1914년 갑인甲寅에 선공은 왜군에 잡히어 구고등법원大邱高等法院에서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아 바로 형刑이 집행되었다.
 
이때에 公은 법정法廷으로 뛰어들어 왜정의 포악무도暴惡無道함을 꾸짖으니 저들 은 법정소란法廷騷亂 죄罪로 몰아 구속하였다. 그 후 풀려나와 공은 바로 선공의 장 례葬禮를 치르고는 3년을 한결같이 곡묘哭墓하였다.
 
상을 마친 뒤에는 백립白笠을 쓰고 망국亡國의 한과 실부失父의 통한을 종신토록 잊지 아니하였다.
 
또 왜倭의 치하治下에서는 왜의 호적에 등재되는 것을 거부하고 삭발에도 불응 하매 왜경은 수차례 투옥시켰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고 한국인의 기개氣槪를 떨쳤 다.
 
또한 선공의 유허비 사건으로 많은 지사志士와 같이 투옥되기도 하였다. 우리 조 국의 광복도 이러한 선열의 살신성인의 유택遺澤으로 얻어진 것이 아닌가. 公은 광 복 후에는 선공의 공을 정부에 올려 건국공로훈장을 받았으며 임실 성수에 소충사 昭忠祠를 세워 선공을 제향祭享하였으니 공이 평생에 품었던 한을 일부나마 풀었다. 그리고는 1983년 계해 11월 27일에 졸卒하니 향년 85세 다.
 
공이 졸卒한 뒤인 1990년에 공도 또한 건국공로훈장애국장을 받았다.
 
이와 같은 충효겸전忠孝兼全의 의행懿行에 하여 성균관장을 비롯하여 각처 향교 에서 포양褒揚의 글이 답지遝至하니 公의 윤令胤 명근씨明根氏는 그 의행懿行을 비 에 새기고자 글을 청하여 천식불문淺識不文하나 사양치 못하고 감히 그 개략을 위와 같이 적는다.
 
 
 

10. 10. 산성과 봉수대

월평리산성月坪里山城
 
전라북도 지방은 옛 백제百濟의 중간부에 자리하여 동東으로는 산악山岳 고원지대高原地帶를 이루면서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줄기를 경계境界로 가야伽倻와 신라新羅의 국 경國境을 이루고 있다. 서西쪽으로는 황해바다를 이루고 또한 북北으로는 금강錦江을 사이에 두고 왕도王都인 공주公州와 부여夫餘에 이른다. 또한 남南으로는 전남全南의 남해안南海岸과 나아가서는 일본日本 열도列島에 이르는 교통로交通路를 이루고 있었 다.
 
따라서 전북의 고 산성은 동東쪽으로는 신라新羅 국경에 이르는 방어진지를 구 축하 고 북쪽으로는 왕도王都에서부터 남방南方 경계 주변의 방어진지 또는 신라 국경과 서해안을 연결하는 횡단 코스상의 거점에 산성이 축조되었다.
 
우리나라의 산성 축조 시기와 형태를 보면 첫째로 백제시 삼국이 립하고 있던 시기에 산성이 축조되었고 두 번째로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왜구의 침입에 비할 목적으로 쌓은 성城이 있었다. 세 번째로는 조선 중기 임진란壬辰亂과 병자 호란丙子胡亂을 전후前後한 시기時期에 주로 성을 축성하여 토성土城보다 석성石城 형 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로써 임실 지방의 성터는 백제시대에 축조된 고 산성으로 구분되며 신라와 백제가 립하고 있던 6~7세기에 걸쳐 소백산맥을 국경으로 하는 주主저항선과 진 안·임실·남원을 잇는 제2의 방어선이 종縱으로 이루어지는 산성이 축조되어 있 다.
 
 
따라서 종縱으로 뚫린 방어선 외에도 백제와 신라를 횡단선상으로 잇는 관촌면 덕천리 성미城嵋산성·방현리芳峴里산성·리大里산성이 있으며 기타 장암리長岩里 산성·세심리洗心里산성·월평리月坪里산성·구고리九臯里산성·둔덕리屯德里산성 등 이 있다. 그리고 그 외 삼계면 봉현리의 술뫼산성·삼계리의 벗내 산성·세심리 산성·그리고 전주의 남고산성과 동고산성 이 연계되는 만마관萬馬館 인근인 관촌면 슬 치마을의 슬치산성이 축성되어 있다.
 
따라서 월평리月坪里산성은 성저마을 북쪽 에 위치한다. 전주 남원 간 국도변 동쪽 성 저城底마을 뒷산인 해발 271m의 정상부 능 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 방향으로 위치 한 테머리식 산성이다. 산성의 위치로 보아 성수산에서 발원하여 둔남천을 이루고 있는 곳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통하는 중요지점이라는 데서 그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이 산성은 전언傳言에 의하면 삼한시 의 고성지古城址라고도 하며 임진왜란 시 호남지방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군량미를 저장하기 위해 쌓은 합미성合米城이라고도 한다. 고적 자료에 의하면 삼한 시 의 산성으로 그 둘레가 400간(720m)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 재는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일부의 석축은 볼 수 있으며 산성 둘레의 석축 흔적 은 뚜렷하다. 붕괴된 城내의 평지에는 백제식 토기와 와편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백제시 의 산성으로 본다.
 
산성 정상을 올라 주위를 살펴보면 산성 입구로 보이는 곳에는 10여m 정도의 높은 성곽이 양편에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입구 쪽에서 우측을 향하여 동쪽 으로 따라 올라가면 성터가 남아 있고 계속하여 산 정상을 따라 돌아가면 모두가 성곽으로 보이는 성터가 남아 있다. 성터의 중간 지점에서부터 아래로 날등이 형성 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현재 묘지 3기가 조성되어 있다. 또한 이 날등으로 하여금 성안이 두 곳으로 나눠진 형태로 특이한 산성이라 할 수 있다. 서남 방향으로 향하 여 성곽의 형태가 계속되고 다시 입구에 이르니 마치 남쪽 방향으로 향하는 둥근 모양의 산성으로 보인다.
 
한편 북쪽으로 향하는 중간의 두 산마루 사이에 성문 형태의 파여진 터가 있어 이는 북쪽으로 향하는 성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산성의 안쪽에는 우물이 존재 하지 않았고 일부 자료에는 성 밖으로 약 70여m 떨어진 지점에 석축을 쌓아둔 작 은 우물터가 있다고 기록되었으나 현재는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에 부르고 있는 이곳의 지명을 성안城內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성터 아래 마을 이름을 월평리 성저城底라고 부르고 있다.
 
성수의 봉수대지烽燧臺址
 
봉수烽燧란 횃불과 연기로써 변방의 긴급한 군사 정보를 중앙에 알리던 제도로 상고시 를 거쳐 삼국시 부터 근 에까지 이르는 통신수단으로 전신전화가 가설 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중요한 군사통신시설로 사용되어 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봉수는 삼국시 부터 존재하였다고 하지만 삼국시 와 고려시 의 것 으로는 그 숫자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봉수제가 완비되었다고 볼 수 있는 조선시 세종 이후부터는 『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한 여러 자료에서 봉수의 숫자를 알 수 있는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여러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우리나라 전 체에 조사된 봉수는 400여 개소가 운 되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 한 수치는 문헌상에 등장한 5 봉수로가 통과하는 지역을 기본으로 조사된 수치 이기 때문에 5 봉수가 통과하지 않은 지역을 포함시킨다면 남아 있는 봉수는 더 욱 많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북의 봉수 분포 내용을 보면 두 개의 봉수로를 이루고 있는데 고창과 부안· 김제 군산·익산을 잇는 서해안 지역권 봉수와 금산·무주·진안·완주·임실·장 수·남원을 잇는 동부 지역권 봉수로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동부지역에 속해 있는 임실군 내의 봉수 는 현재 파악된 것으로는 12개소이며 그 중 성수에 소재한 봉수 는 3개소로 전북 학교 학원 고고문화인류학과 조명일趙明一의 석사논문에서 상 세하게 밝히고 있어 이를 인용하여 게재한다.
 
봉강리 덕재산봉수대
 
지사면과 성수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덕재산(487.1m)의 정상에 자리하고 있 다. 동쪽으로 태산봉수, 서쪽으로 봉화산봉수와 연결된다. 현재는 잡목이 무성하 여 봉수와 관련된 유구나 유물은 확인할 수가 없으나 정상부가 직경 13m 내외의 평평한 지를 이루고 있다.
 
삼청리 매봉봉수대
 
성수면 오봉리 조치마을에서 산서 쪽으로 아침재를 넘어가다가 보면 정상에서 우측 서남쪽으로 매봉(430.1m)이 자리한다. 이곳은 삼청리 뒷산이기도 하며 이 봉 수는 서남쪽으로 덕재산 봉수와 동쪽으로 태산봉수와 연결된다. 봉수의 양쪽에 는 지사면과 성수면을 잇는 재가 있는데 동쪽에 아침재와 서쪽에는 한치가 있어 조선시대에는 중요한 교통로 다.
 
왕방리 영태산봉수대
 
성수면 왕방리에서 원증마을을 지나 판마을 못 미처 우측으로 올라가면 장수 군 산서면 학선리의 경계인 태산(666.3m) 정상부에 자리한다. 정상에는 현재 헬 기장이 조성되어 있다. 서쪽으로 지사면 매봉봉수와 동쪽으로 장수군 장수면 성 리의 원수봉봉수, 서남쪽으로 장수군 산서면 사계리 사계봉봉수와 연결된다.
 
 
 

11. 11. 명소

성수산 자연휴양림
 
성수산은 해발 876m로 임실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그 중간에 조성된 자연휴양림 은 원시림과 함께 낙엽송, 편백 등이 많이 심어져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수산 계곡 은 예전에 사람이 드나들기 힘들 정도로 외진 곳이었는데 지금은 도로가 뚫려 접근 성이 좋아졌다. 이곳은 원시림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 중 하나로 각종 편의시설이 잘되어 있어 가족단위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지금은 넓은 주차장과 공연장, 어린이 놀이터, 그리고 200여 명이 숙박할 수 있는 휴식공간이 조성되어 여름철 피서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휴양림 조성 내용을 보면 성수면 성수리 산81번지외 수 십 필지로 조성되어 있고 구역면적은 424ha이다. 1991년 5월 15일 산림청 고시 91-11호 로 시작된 자연 휴양림은 편백나무가 4ha, 낙엽송이 31ha 리기다소나무가 21ha 혼용림 16ha와 기타 활잡목림이 352ha로 조성되어 있다. 또한 1996년 6월 산림청고시 96-12 호로 명칭과 구역면적의 변경고시로 휴양림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휴양림을 조 성한 김한태 옹이 그동안 조성한 내용을 보면 융자 13억 2천5백만 원과 자부담 17 억 7백만 원을 합하여 총 30억 3천2백만 원을 투자하여 편익시설과 체육시설, 위생 시설, 교육시설과 양어장 등 58종을 설치하고 수년간 조림사업에도 많은 투자를 하였다. 이로써 자연휴양림을 조성한 김한태옹은 1991년도에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무할아버지」로 수록되어 유명하였다. 따라서 김한태옹은 산림 관련 분야의 조 림왕 인정·조림 성공상·모범 독림가인정·한국 임산협회장·한국 조림가협회 부 회장·한국독림가 협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年老한 몸으로 운 의 어려 움을 겪은 김한태옹은 2006년 7월 전주 북문교회에 본 휴양림을 넘기고 말았다. 전주 북문교회에서는 2006년 8월 30일 ‘유한회사전주북문교회성수산자연휴양림’으 로 이름을 바꾸어 운 중이다.
 
성수산 왕방계곡
 
왕방계곡은 왕방마을 왕방저수지 상류에서부터 시작되어 원증과 판마을을 거쳐 텃번지를 지나 상이암 가는 고개까지 약 15km 정도로 되어 있다. 계곡 일 는 좁은 목으로 되어 있고 양쪽 옆으로 많은 계곡이 형성되어 있어 풍광이 수려하고 수량水量도 많고 맑은 물이 흘러 사철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입구에서부 터 원증마을까지는 여산송씨들의 정자인 둔학정이 있고 그 옆에는 송씨들의 재실 이 있어 조상 숭배사상이 깊이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재실 옆으로는 수문산장 까지 임도가 개설되어 있다. 또한 조금 올라가다가 우측 중간지점에 왕방사지로 보이는 옛 절터가 있어 지금도 문양이 있는 기왓장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 반 편 골짜기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유명한 도쟁이골 방돌 채취장이 있어 지역 주민들의 소득원이 되기도 하였다.
 
원증마을은 좁은 터에 자리를 잡은 마을로 남양홍씨가 주로 터를 잡고 살고 있으며 최근에는 곳곳에 외지인들이 들어와 별장 겸 휴양시설로 사용하는 곳이 많이 보인다.
 
양쪽에 어우러진 나무 사이 그늘을 헤치고 골짜기 길을 조금 따라 올라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북당골이 있는데 이곳은 약간 깊은 골짜기로 형성되어 있다. 우리나 라에 천주교가 돌어온 후 박해가 심하여 이곳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는 안명권 씨의 증언을 들을 수 있는 곳이다. 또한 그곳 골짜기에는 송장바위가 있고 멀리 보이는 약간 높은 골짜기에 옛 절터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북당골 골짜기 입구 에서 우측으로 100여m 지점에 홍성현 씨가 수문산장이라고 이름지어 민박과 음식 점을 하고 있어 여름 피서지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고 있다.
 
‘대판이 가는길’이라고 써놓은 안내판을 보고 개울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올 라가다가 보면 이제부터는 깊은 골짜기 맛이 난다. 다소 으슥한 기분이 들 정도로 계곡과 숲이 잘 어우러진 좁은 길을 따라 가면 이곳에는 교회단체에서 조성된 것으 로 보이는 각종 휴양시설이 개울을 따라 우측으로 조성되어 있다. 조금 더 가다 보면 최일두 씨가 세워 놓은 ‘물푸리골’이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이곳은 원시림으로 잘 어우러져 하늘이 안 보이는 곳으로 유명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룬 각종 편의시설 은 어느 곳보다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되어 있다. 그곳을 벗어나 조금만 올라가 보면 또 오행진 씨가 만들어 놓은 편의시설과 넉넉한 주위 환경은 얽힌 마음을 풀어주는 쾌적한 곳으로 이곳 또한 하늘이 안 보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왕 방리에서 5km쯤 되는 지점을 올라가보면 이제는 다소 넓은 지역이 나오는데 이곳 이 판마을로 과거에는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지금은 두 가구만 살고 있다. 이곳에서 음식 업을 하고 있는 정성기 씨는 산신령 같은 모습으로 골짝 골짝을 누비며 약초를 비롯 산나물과 토종꿀을 채취하며 살고 있다. 염소와 수십여 마리의 흑돼지를 방목하여 자연에서 자란 그 로를 손님들에게 제공하고 있으며 또한 토종닭 사육으로 전국의 미식가들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텃번지라고 하는 곳에 옛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고 텃번지를 건너가는 길목에는 각시소와 더불어 폭포가 있어 여름 에도 추위를 느낄 만큼 시원한 곳이다. 마을 위쪽에는 옛 절터인 심원사지가 있고 장수 산서면 사람들이 이곳 길을 따라 고개를 이용하여 상이암에 다녔다는 고갯길 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판이에서 임도를 따라 계속하여 올라가다 보면 산 정상의 중간 지점에 일제강점기 금을 채취하던 폐광이 있다.
 
대판이 각시소
 
각시소는 이 지역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우리가 보았을 때에는 폭포라고 부르면 맞을 것 같다. 폭포가 있는 곳의 계곡을 건너면 텃 번지라는 옛 마을터가 있다. 이곳은 판마을 정성기 씨 집에서 300여m쯤 가면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에서 넘어오는 옛 길목 계곡에 위치하고 있 다. 약 15m 정도의 길이에 45도 각도로 흐르는 폭포는 100여 평방미터 정도의 웅덩이를 이루고 계곡의 위와 아 래에는 기암괴석이 산재되어 있다. 주위에는 큰 나무가 우거지고 시원하게 흐르는 맑고 많은 물은 여름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곳 계곡을 따라 위로 임도를 따라 오르면 산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고 다시 아래로 한참을 내려가다 보면 상이암 입구가 나온다.
 
 
대판이 텃번지
 
대판마을 정성기 씨 집에서 임도를 따라 300여m를 오르면 산서면 학선리에서 넘어오는 옛길이 있다. 이 길이 성수 상이암으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건너가는 계곡 에는 각시소라고 부르는 15m 정도의 약간 누운 폭포가 형성되어 물이 흐르고 있다. 그곳을 오르면 텃번지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가 없어지고 잡초와 잡목만이 자생하고 있다. 지금도 주위에는 감나무와 함께 과거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들만이 가끔씩 보이기도 한다. 아랫마을에 살고 있는 정성기 씨는 말하기 를 마을이 폐허되기 전까지 살았던 사람들은 김상권, 김봉열, 김성기 씨라고 증언 해 준다.
 
도쟁이골 방돌 채석장
 
 
왕방리를 지나 원증마을 앞 다리를 건너 밭둑길 왼쪽으로 400m쯤 가다가 다시 계곡으로 200여m쯤 우측 골짜기로 오르 면 방돌을 채취하던 곳이 나오 는데 지금은 폐허되어 잡목만 무성하다. 과거 이곳은 방돌 과 기와 신 너와지붕용 돌을 캐던 곳으로 수요가 많을 때에는 도시로 모두 팔려 나갔다. 시 의 변화에 따라 연탄보일러가 나온 후로는 온돌방이 없어지고 보일러 방이 확산되어 채석을 중단 하였다. 이곳은 깊숙이 들어가 있었기에 도장방 또는 도장골이라고 하다가 지금은 지역 사투리가 섞인 도쟁이골로 변화되어 부르고 있다.
 
삽치 도적골
 
임실군이 지정한 임실군 공동묘지가 있는 곳이다. 신촌마을에서 임실 방향으로 100m 정도 4차선 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골짜기를 말한다. 이 곳은 임실군에서 군 단위 공동묘지로 되어 있지만 성수면에서 관리하는 공동묘역 이다. 이곳에 매장할 수 있는 조건은 어려운 저 소득자들로서 사후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을 상으로 묘지를 제공할 수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전주와 임실 그리고 장수군 산서와 번암을 이어 경상남도 함양까 지 잇는 길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던 로 다. 그러나 이때 이곳을 지나는 사람 들을 상으로 도적들이 많았는데 이곳 또한 삽치에서 도적들이 강탈한 후 이곳 도적골로 숨어들었다는 곳이다. 그때부터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에도 도적골 또는 도둑의 두목이 살았다고 하여 두목골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한치와 구곡길
 
조선시 부터 경상도 유생들이 과거를 보러 다니던 지름길이다. 이 길은 당시 5 도시인 전주로 가는 길목이다. 서울을 향해 갈 때 반듯이 전주를 경유해야 함 에 경상도 지역 서부권에 있는 함양, 산청 사람들이 장수 번암을 거쳐 산서를 넘어 와 지사면 관기에서 하룻밤을 묵은 다음 다시 한치를 넘어 구곡마을과 월평리 신촌 을 지나 삽치를 넘어 임실·관촌·전주로 나가는 과거 큰길이다. 또 한국전쟁 때 공산 괴뢰군들이 낙동강 전투에서 패한 뒤 한치를 넘어 성수 관내를 경유하여 북진 하는 데 이용된 큰 길이다. 지금은 ‘통 로’라고 부르고 있다.
 
성수산 석문동石門洞
 
양쪽에 바위가 서 있는 것같이 골짜기 입구가 좁고 입구 또한 깎은 듯한 모양으 로 되어 있어 석문동石門洞이라고 부른다. 석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넓 고 깊은 골짜기에 바위가 많고 큰 바위 아래 한곳은 30여 명 정도가 비를 피할 수 있는 곳도 있다. 한편 그곳 골짜기를 통해 재를 넘으면 왕방리 판이가 나오고 판이 못 미처 과거 마을이었던 텃번지가 나온다.
 
석문동은 계곡이 협곡이라 은둔생활 하는 데는 그만한 장소도 없다. 지난 6·25 전쟁 때 이곳이 빨치산들의 은신처가 되었고 이때 아무런 죄도 없는 성수면, 지사 면 주민들을 몰아다가 학살한 곳이다. 현지인들의 자세한 증언에 의하면 지사면 삼산마을 주민 40여 명을 하룻밤에 이곳에서 모두 학살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이때 빨치산들은 탄환을 아끼려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온갖 방법으로 만행을 저질 다고 했다. 또한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숯을 굽던 곳인데 이곳의 숯은 참나무숯이라 질이 좋아 주로 서울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상이암 통시골
 
상이암에서 동북쪽으로 해우소가 있는 골짜기다.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임실 군과 진안군의 경계선이 있고 상이암 주변에서 제일 높은 곳같이 보이는 연화봉이 있는데 이 고개를 넘어가면 진안군 백운면 남계리가 나온다.
 
성수산 기도터
 
상이암 법당 뒤쪽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약 20분 거리에 위치한다. 산 높이로는 산 정상에서 8부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기도터라는 곳은 현재 움막이 지어져 있고 옆에는 큰 바위가 약간 누워 있는데 이곳을 기도터라 부르고 있다. 또한 전주 이씨 종중에서는 작은 비석에 고황제 기도터라고 새겨 세웠다. 지금도 작은 움막집 에는 가끔씩 사람들이 기도하러 와서 며칠씩 기거한다고 한다.
 
천동마을 시암
 
천동시암은 원래 들 가운데 있어 물이 맑고 깨끗하여 위 아래 동네가 모두 식수로 쓸 정도로 물이 많고 좋았다. 산골이라 물이 귀한 지역에서 가뭄이 들 때에는 인근 마을에서도 물을 떠가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농지의 효율화를 위하 여 시행한 경지정리 사업으로 그렇게도 좋았다는 시암(우물)은 묻혀버리고 그 신 상수원을 개발하여 식수를 용하고 있다. 주민들은 정자 그늘에서 과거의 시암을 바라볼 때 마다 늘 안타깝다고 한다.
 
대왕마을 주변 우물들
 
마을 주민들이 거의 사용하고 있었던 위뜸에 우물이 있다. 연 는 알 수 없으나 왕마을이 형성되면서부터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같은 마을이면서 고개 넘 어 운재 아래에 위치한 주암마을에도 샘이 있는데 이곳 샘은 가뭄이 와도 항상 물이 가득 차 있다고 한다. 지금은 식수보다도 가축용이나 허드렛물로 사용하고 있다. 또 도화동 추감재 재실이 있는 곳 위쪽에 있는 우물은 연 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 거주하는 윤재만 씨는 윤씨들이 정착하면서 생긴 우물터라고 한다. 지금까 지 마른 적이 없이 물이 항상 채워져 있다고 한다.
 
농촌의 개척정신 4-H마크
 
지덕노체智德勞體의 상징인 네 잎 클로버의 4-H마크는 양암마을 입구 바위에 그려 져 있다. 평지삼거리에서 진안방면으로 약 200m 거리 도로 옆으로 입석바위에 선 명하게 그려져 있다.
 
4-H 운동은 1947년 국내에 도입된 지(智 Head)·덕(德 Heart)·노(勞 Hands)·체 (體 Health)를 생활이념으로 한 농촌청년운동으로 지난 60년 동안 농촌지역의 빈곤 과 문맹퇴치와 농가 소득증 에 기여해 왔다. 실천을 통하여 배운다는 취지 아래 설립된 세계적인 청소년 단체이다. 4-H 이념을 생활화하여 창의적인 사고와 과학 적인 행동양식을 갖추고 친환경적인 체험으로 농심을 함양하여 청소년들을 건전한 미래세 로 키우는 동시에 지역사회와 국가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 실천적 청소년 사회교육운동이다. 19세기 말 미국 경제가 공업화함으로써 도시로 인구가 급속히 이동하여 농촌이 공동화되고 농가경제가 위축되자 교직자와 농촌지도자를 중심으로 농촌 젊은이들 사이에 새로운 각성이 일게 되면서 국가 전역으로 클럽이 확산되었다. 이에 1914년 정부 관리와 지역 지도자들에 의해 클럽을 모체로 하여 조직되었다. 1970년에 농촌계몽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마을마다 입구에 4-H 회원들 이 지·덕·노·체라는 문구와 클로버 잎 문양이 새겨진 낙관을 찍어 홍보와 4-H정 신을 바탕으로 이때에 가장 활발하게 농촌운동이 전개되었다고 한다.
 
도화동 마당바위
 
도화동계곡에는 많은 바위가 있다. 상여바위와 상주바위와 더불어 아래로 내려 가면 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넓고 큰 바위가 있는데 높이는 략 1.5~2m정도이 고 둘레는 모가 난 듯하나 위의 면은 넓고 반듯하여 사람들이 위에서 놀기가 편한 바위이다. 이 바위는 마당만큼이나 넓어서 부르는 이름이고 과거 인근 주민들이 화전놀이를 즐기던 곳으로 유명하며 주위의 큰 나무와 잘 어우러진 곳이다. 약 7~8 평 정도의 넓은 바위는 약간 경사는 있지만 자리를 깔았을 때 매우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지금은 바쁜 생활과 더 좋은 휴식처가 많아 찾지 않고 있지만 인근 주민들은 과거를 아쉬움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양곤 마라톤아시아제패 기념비
 
 
이 비는 성수면 양지리 석현마을 앞에 세워졌는 데 1982년 인도 뉴델리에서 아시안 게임 마라톤에 서 이 마을 출신인 김양곤이 우승을 하여 이를 기리 기 위한 기념비이다. 비석 전면에는 ‘장하다 이 마을 태생 김양곤金梁坤 선수 제9회 아시안게임 마라톤 제패’라고 기록되어 있고 비석 뒷면에는 ‘인도국 수 도 뉴델리.1982년 12월 2일. 기록 2시간 22분 21초. 국내기록 2시간 19분 41초. 이 마을 동민과 본동 태 생 제 5 국회의원 변호사 홍정균 세움, 1983년 4 월 9일 제막’이라고 적혀 있다.
 
오봉리 문바위
 
지금의 오봉저수지에서 물이 흐르는 지사면 쪽으로 도수로가 뚫린 곳을 어느 때 부터인지는 모르나 이곳 사람들은 문바위라고 불 다. 예전부터 그곳 주변의 지명 을 어둔골이라고도 했는데 이곳은 호롱불 속에 있는 심지가 기름을 빨아올리는 듯 한 지형이다. 근래에 지사지구 농업용수개발사업으로 산서면과 지사면 들판을 적 시기 위하여 오봉제가 축조되었다. 이어서 지사 안하리부터는 교각을 이용한 도수 로가 축조되어 이곳은 물론 지사면 전체에 도수로를 통해 농업용수가 공급되고 있다. 선조들은 어떻게 이곳에 저수지가 생길 것을 미리 알아 문바위와 어둔골이라 불 는지 몰라도 오늘에 와서 지명 따라 현실로 변하였다.
 
평지마을 탕건바위
 
오봉리 평지마을 앞을 지나 두부공장을 지나면 구천사에 오르는 길목에 탕건바 위가 있다. 이곳은 산 전체에 소나무가 자생하고 있는데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지 만 산속을 답사해 보면 큰 바위가 여러 곳에 산재되어 있다.
 
이곳에 있는 구천사도 역시 바위 사이에 암자를 지어 바위 속에서 흐르는 샘 물이 맑아 기도하는 암자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탕건바위는 구천사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데 정사각형의 네모난 큰 바위 위에 산 쪽으로 다시 작은 바위가 올려져 있어 조선시 궁중 신들이 쓰고 다니던 탕건과 같은 모습의 바위이다. 이곳 사람들은 예사로운 바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으 며 오늘에 와서는 구천사 스님이 이곳 바위 위에 종이로 장식하여 염불을 올리기도 한다. 한편 탕건바위 위 산속 남쪽 방향에 큰 바위들이 산재하고 있는데 소 발자국 같기도 한 모양이 두 곳이 있으며 새 발자국 같기도 한 모양은 여러 곳에 있어 전문가들의 조사와 판단이 필요한 지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응암마을 물레방앗간
 
매바우 앞 하천변 지금의 평풍교 다리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물레방앗간은 인근마을 사람들이 이용하여 왔지만 농업기계의 발달로 발동기와 함께 새로운 정미소가 생기면서 쇠퇴하여 철거되고 지금은 흔적도 없다. 다만 그 당시 이용했던 어른들의 증언이 있을 뿐이다. 왕마을 송 석·전 옥·최 기 씨의 증언으로 옮겼다.
 
대왕마을 연자방앗간
 
일명 ‘독방아’라고 불 다. 40년 전까지만 해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왕 마을 회관 위쪽에 있었는데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철거하여 맷돌을 회관 옆 건물에 보관했다가 마을길 공사를 하면서 없애버렸다고 한다.
 
대왕마을 디딜방앗간
 
왕마을 지금의 전종옥 씨 집 행랑채에 있었는데 축사를 지으면서 철거하여 지금은 흔적도 없다.
 
숯 굽던 사람들
 
삼봉재와 무재봉은 마을 뒤에 있는 산이다. 이곳에서 과거에 숯을 구웠는데 왕 마을과 삼봉리 등지에서 숯을 굽던 사람들로 윤종섭·송남수·장종호·심만옥 씨 가 있다.(최 기 씨 증언)
 
삼봉리 숯 굽던 이야기
 
왕방리 원증마을 뒷산 텃번지에서 숯을 구웠다. 그 당시 정인철 씨는 원증리에 사는 홍순만 씨에게 숯 굽는 기술을 배워 18세부터 50년 동안 숯 굽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는 그 후 경기도 광주군 퇴촌에 가서 기술을 전수하고 다시 돌아와 한동안 농사일에만 전념하다가 다시 숯을 굽기 위하여 숯가마를 지었다. 그러나 토질이 좋 지 않아 가마를 만들다가 실패를 거듭하고 지금은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숯의 종류는 월백탄·황탄·백탄·송탄으로 구분하는데 그 중 월백탄은 참나무 를 굴에 반듯하게 세워 천천히 나흘간 불을 지핀 다음 다시 나흘이 되는 날 통굴(굴뚝)에서 파란 연기가 나오면 창굴이 세 개 있는데 이때 창굴을 연다. 창굴을 두어 차례 열어서 서서히 식히면 월백탄이 되는데 숯 중에는 가장 으뜸이다.
 
황탄은 굴 안에 참나무를 세워 불을 세게 지핀다. 이때 사흘이면 숯이 된다.
 
백탄은 참나무를 나흘간 태워 불이 붙은 숯을 꺼내 땅에 구덩이를 파서 넣고 흙 으로 덮어 서서히 식힌다.
 
송탄은 소나무 공이를 잘라다 불을 지피면 송진기름이 나온다. 송진기름을 송탄이라고 하는데 이 기름은 비행기 연료로도 쓴다고 한다.
 
숯굴에 공기가 들어가면 나무는 숯이 되지 못하고 재로 남는다. 이때는 장기간의 경험과 감각을 활용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숯 중에는 월백탄이 으뜸이라고 하며 성수면은 다른 지역보다 참나무가 많아 옛날부터 숯 굽는 곳이 많았다고 한다. 정인철 씨는 우리가 살아있을 때 숯 굽는 일을 젊은 사람들에게 전수해 주고 싶다고 하나 이를 전수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한다.
 
왕방리 모정의 너와지붕과 들독
 
 
왕방마을 안에 너와지붕의 형태인 모정이 있다. 마을이 수몰되기 전에는 마을 안에 있었는데 댐 공사를 하면서 원형 그 로 해체하여 현재 자리로 옮 겼다. 왕방리 도쟁이골에는 아직도 너 와 채취 현장이 그 로 남아 있다. 왕 방정은 원래 기와지붕이었으나 위치를 옮기면서 너와 독으로 지붕을 교체했다고 한다. 왕방정의 역사는 80년쯤 되었다고 마을 주민들이 증언했다. 9개의 기둥을 세워 만든 왕방정枉訪亭은 단아하고 정교하였다.
 
또한 이 모정 안에는 들독이 있는데 석질은 윤기가 나는 자연석이며 위쪽에 약간 손질한 부분이 있다. 무게는 약 90kg 정도이며 지름이 약 50㎝이고 높이는 약 33㎝ 정도 된다.
 
석현(돌고개) 금광
 
돌고개 금광은 성수면 양지리 산 64번지에 위치하며 마을에서 약 500m 떨어진 뒷산 9부 능선에 있다. 이곳에는 세 개의 굴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금 을 채취한 곳이라고 하며 마을 주민들은 동굴이라고 부르고 있다. 석현마을 주민인 전성균 씨의 증언에 의하면 제1동굴은 약 30m 정도의 깊이로 되어 있고 제2동굴은 입구는 메워져 있지만 이곳에서 파낸 토석의 양으로 보아 상당히 깊이 들어간 굴로 보인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마을 앞 하천변까지 뻗어 나아갔다고 한다. 제2동굴에서 숲 속으로 산을 넘어 깊이 더 들어가면 또 하나의 동굴이 있는데 제3 동굴이다. 입구가 보이며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깊을 것이라고 했다. 그 이유 는 동굴 안에 돌을 던지면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동굴이 메워지기 전에 전성균(58) 씨는 유년 시절 친구들과 자주 와서 이곳 주위에서 놀았 다고 한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금을 채취하기 위해 굴을 판 것으로서 금광을 판 연 는 약 70~80년으로 추정된다. 또한 6·25 한국전쟁 때는 주민들이 금광을 피난처로 사용 했다고 하며 6·25 때 8사단이 이 산 정상에 주둔했었다고 한다. 북쪽으로는 조선 시 에 많은 도적들의 은신처 다는 도적골이 있다. 세월이 흘러 굴 입구가 토사로 인해 메워져 있었는데 제1동굴의 경우는 약15년 전에 우리들을 안내하고 있는 전 성균 씨가 중장비로 입구를 파내니 현재의 동굴 형태로 입구가 뚫렸다고 했다. 그 당시 동굴 안에는 철모 1점·검 1점·탄피가 나왔으며 동굴 안 바닥에는 돌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솔잎 등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아 6·25전쟁 때 이곳은 주민들 의 피난처나 빨치산들의 은신처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도인리 금광
 
도인리 양지촌 회관을 지나 신흥촌 쪽으로 1km쯤 가다 보면 도인저수지가 나온다. 저수지 미처 못 가서 좌측으로 농로가 나 있다. 농로를 따라 비석골로 400m쯤 가면 큰 밭이 있는데 밭 왼쪽 계곡을 따라 50m쯤 가면 금광이 있다. 금광 앞에는 계곡이 흐르고 금광 입구는 큰 바위가 내려앉아 막혀 있다. 좁지만 바위 사이로 굴 안이 보인다. 굴의 깊이는 약 10m쯤 된다고 했다. 금이 나오지 않자 작업을 중 단했다고 한다. 연 는 일제 강점기로 70~80년으로 추정된다. 저수지를 막은 시기 도 이때쯤이라고 이 마을의 주민 송태섭(75) 씨는 증언했다.
 
덕재 금광
 
 
봉강리 덕치 산 128번지에 있 다. 마을에서 1.5km쯤 남동쪽으 로 있다. 겉에서는 볼 수 없을 정 도로 잡초가 우거져 있다. 입구에 서 30m 파고 들어가다가 휘어지 면서 다시 100m를 파고 내려가 금을 채취했다고 한다. 굴 밖 양 옆으로 석축처럼 쌓은 돌무더기가 산재해 있다. 쌓인 돌의 양을 보면 깊이 파 들어 갔음을 알 수 있다. 6·25한국전쟁 때 빨치산들의 소굴이 될 것을 염려하여 마을 주민들이 굴 입구를 메워 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금광 입구는 메워졌지만 그 당시 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산 소유자는 최기성 씨이고 금광 옆으로 삼바위라는 바위 가 있는데 ‘전주최씨 묘동全州崔氏 墓洞’이라고 암각서가 새겨져 있다.
 
대판이 금광
 
왕방리 판마을에서 임도를 따라 동쪽으로 2km쯤 올라가다가 보면 고개 정상 이 나오는데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고 정상 200여m 못 미처 우측으로 올라가는 길 은 장수 필덕으로 넘어가는 길인데 임도에서 약 300m지점 8부 능선에 금광 두 개 가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금을 파내던 곳으로 광복 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금을 캐냈다고 한다. 금광 주위에는 금을 파던 당시 파헤쳐진 작은 돌들이 많아 금광 지역임을 바로 알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은 잡목이 우거져 진입할 수가 없고 확인하기도 곤란하다.
 
 
 

12. 12. 주요 도요지 陶窯址

성수리 도요지陶窯址 1
 
성수면 성수리 235번지 일 에 자리한다. 임실군과 진안군의 경계를 이룬 산줄 기를 따라 남서 방향으로 뻗은 산줄기의 하단부로 일명 배나무골이라 부르는 곳이다. 이 산줄기의 하단부는 이미 밭으로 개간되어 있고 그 위쪽은 민묘 구역으로 조성되었는데 성수리 도요지 1은 민묘 구역과 밭의 경계에 걸쳐 있을 것으로 추정 된다. 오래전 민묘 구역으로 조사된 산줄기의 자연지형을 그 로 살려 가마가 들어 선 것으로 추정되며 유물은 조선 후기의 백자 편이 주종을 이룬다.
 
성수리 도요지陶窯址 2
 
성수리 제2도요지는 성수산 자연휴양림으로 이어지는 지방도에서 갈골마을 쪽 으로 650m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성수산 왼쪽으로 뻗은 산줄기의 서쪽 기슭 말단 부로 논과 밭 경계 부분에 자리한다. 몇 년 전 경지정리를 실시하면서 논과 밭의 경계 부분에 높이 200m 내외의 절단면이 생겨 당시에 유구가 일부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밭에 볼록하게 솟은 곳에 백자 편과 소토가 집중적으로 쌓여 있 는 점에서 가마가 얼마간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후기의 백자 편이 발견 수습되었다.
 
삼청리 도요지陶窯址
 
삼청리 83번지 일 로 구곡마을에서 한치 쪽으로 4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이 마을에서 시멘트 포장된 농로를 따라 가면 농로에서 북동쪽으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창원정씨 재실이 있다. 이 재실의 바로 위쪽에 삼청리 도요지가 있다. 이곳은 매봉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은 산줄기의 남서쪽 기슭 말단부로 재실을 제외하면 부 분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재실 위쪽에 밭과 밭둑에 상당량의 백자편 과 도침, 소토가 쌓여 있는데 가마의 흔적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 일 에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백자 편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점에서 도요지의 운용 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은 것으로 본다.
 
왕방리 도요지陶窯址
 
왕방리 464번지 일 에 위치하며 왕방마을에서 소로를 따라 동쪽으로 500여m가 량 떨어진 밭에 위치한다. 오봉산(525.2m)에서 북동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의 말단 부 남서쪽 기슭에 자리한다. 현재 계단식 밭과 논으로 경작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 은 점터라고 부르고 있으며 계단식 밭의 절단면에서 회색 경질의 고려시 토기 편과 백자 편 그리고 소토 등을 다량으로 찾아볼 수 있다.
 
도인리 도요지陶窯址
 
도인리 신흥촌 마을에서 북쪽으로 100m떨어진 밭에 자리한다. 이 마을에서 성당골을 따라 북쪽으로 100m쯤 가면 동쪽 기슭에 한 채의 민가가 있고 민간의 동쪽 기슭과 밭에 자기 편과 도침 그리고 소토가 집중적으로 쌓여 있는 점에서 본래 동쪽 기슭의 자연지형을 그 로 살려 가마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의 백자 편이 일 색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도요지의 운 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오봉리 도요지陶窯址
 
오봉리 929-1번지 오봉저수지 제방 아래쪽에 있다. 성수면 소재지에서 721번 지방도를 따라 산서면 쪽으로 가면 제 1 오봉교를 건너 남쪽으로 150m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이곳은 아침재 북서쪽 매봉 정상부에서 북서쪽으로 뻗어내린 산줄 기의 말단부로 부분 논으로 개간되었다. 몇 년 전 721번 지방도 확포장공사를 실시하면서 제토작업이 적으로 이루어져 당시에 유구가 심하게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의 백자 편이 일부 수습되었다.
 
 
 

13. 13. 선사유적

 

13.1. 고인돌

양지리 고인돌
 
양지리 고인돌은 청동기시 의 유물로 성수면 양지리 358번지 성수면 중촌마을 북쪽 은행정이 자리한다. 이곳은 성수면 양지리와 도인리·삼봉리 경계인 산봉우 리(382.7m) 정상부에서 남북 방향으로 뻗은 산줄기의 남쪽 기슭 하단부로 그 말단 부에 양지들이 있다. 양지들과 은행정마을 사이의 밭에 1기의 기반식 고인돌이 자 리하고 있는데 상석은 괴석형으로 둔남천과 평행되게 동서로 장축 방향을 두었다. 민가와 인접된 밭으로 본래 이곳에는 두 기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민가를 신축하는 과정에 한 기의 고인돌이 유실되었다고 한다. 고인돌의 규모는 장축 354cm·단축 176cm·높이가 178cm이다.
 
 

13.2. 선돌

오류리 선돌
 
오류리마을 안 보건지소 옆에 있다. 입석의 크기는 높이가 123cm·폭이 34cm· 두께가 32cm로 되어 있다.
 
 

13.3. 고분군古墳群

삼청리 고분군古墳群 1
 
삼청리 산 36-2번지 일 천동마을 북쪽 봉우리(258.3m)에서 내천동마을과 외천동 마을을 뻗어내린 구릉의 정상부와 남쪽 기슭에 고분군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에서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인다. 마을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20년 전에 도굴꾼들이 많이 다녀갔는데 파낸 곳을 보면 돌로 쌓아 만든 고름장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흙으로 메워져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고분이 입지할 만한 지형의 조건과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볼 때 분묘 유적이 자리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여겨진다.
 
삼청리 고분군 2
 
삼청리 산 12-1번지 천동마을 남서쪽으로 100m가량 떨어진 구릉지 북서쪽 기 슭에 고분군이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에서 고려시 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일 부 밭으로 경작되는 곳을 제외하면 부분 임야지 로 조성되었다. 마을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20년 전에 도굴꾼들이 많이 다녀갔는데 파낸 곳을 보면 돌로 쌓아 만든 고름장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흙으로 메워져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고분이 입지할 만한 지형의 조건과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볼 때 분묘 유적이 자리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여겨진다.
 
삼청리 고분군 3
 
삼청리 구곡마을은 교통의 중심지이 다. 호남과 남지방을 직접 연결해 주는 내륙 교통로가 이곳을 통과하고 있는데 이 마을 동쪽 한치는 내륙 경로가 통과하는 큰 고갯길이다. 이 마을에서 한치 쪽으로 250m 떨어진 산줄기의 남동쪽 기슭 하단 부인 삼청리 99번지 일 에 삼청리 고분군 세 곳이 있는데 이는 고려시 의 것으로 본다. 이곳은 도굴로 그 내부가 노출된 고분이 적지 않았는데 지금은 흙속에 파묻 혀 그 흔적을 볼 수 없다고 제보해 주었다. 이곳에 고분이 분포된 것으로 밝혀졌지 만 현지 조사 때 유구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도인리 고분군
 
고덕산(619m)에서 임실 동쪽까지 북서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임실읍 금성리와 성 수면 도인리의 경계를 이룬다. 도인리 산3번지 일 인 이곳은 산줄기의 정상부와 남쪽 기슭에 도인리 고분군이 있는데 이 유적의 동쪽에는 금성리 고분이 자리한다. 이곳은 민묘 구역과 밭으로 개간된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부분 임야지 를 이룬다. 이 고분은 삼국시 의 것으로 보이며 지금부터 20여 년 전에 도굴로 인해 그 내부가 노출된 고분이 적지 않은데 지금은 흙속에 파묻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삼봉리 고분군 1
 
삼봉리 706-1번지이며 삼봉산(529.4m)에서 남서쪽으로 삼봉마을을 향해 뻗어내 린 능선의 말단부에 해당된다. 즉 삼양저수지 북쪽 기슭에 자리한다. 삼봉마을 주 민의 증언에 의해 확인된 유적으로 지금부터 20~30년 전에 이곳에서 도굴로 돌로 만든 고름장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지금은 흙속에 파묻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고 제보해 주었다. 이에 현지조사를 실시했으나 유구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삼봉리 고분군 2
 
삼봉리 두 번째 고분군은 원삼봉마을 서쪽에 위치한 완만한 능선에 자리한다. 삼양저수지 동쪽에 자리한 유적으로 평탄한 정상부와 완만한 능선을 가지고 있다. 마을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20년 전에 도굴꾼들이 많이 다녀갔는데 다녀가고 나면 구릉 정상부에서 도굴 구덩이가 많이 발견되었다. 구덩이를 파낸 곳을 보면 네 벽 에 돌을 어 만든 고름장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흙으로 메워져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고분이 입지할 만한 지형의 조건과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볼 때 분묘유적이 자리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여겨진다.
 
삼봉리 고분군 3
 
삼봉리 세 번째 고분군은 삼양저수지 남쪽 구릉의 정상부와 남쪽 기슭으로 비교 적 완만한 지형을 이룬다. 고분은 남서쪽 기슭에 집중적으로 집되어 있다. 마을 주민들의 제보에 의하면 삼봉리 고분군 2와 더불어 도굴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던 곳이었다고 한다. 유적 일 가 부분 숲으로 조성되어 유구의 흔적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고분의 벽석으로 추정되는 석재가 논둑에 얼마간 쌓여 있다. 현재 잡목과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유구의 흔적을 확인하지 못했다.
 
오류리 고분군
 
오류리 산24-7에 삼국시 ~고려시 로 추정되는 유물 산포지가 있다. 마을에서2 00m 떨어진 가넝골과 마을의 서쪽에 자리한 북당골 사이 골짜기에 해당된다. 임실 읍과 성수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봉우리들에서 원오류마을을 향해 남동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의 최말단부에 해당된다. 마을 주민의 증언으로 확인된 유적으로 오 래전 창을 들고 와서 고름장을 파헤치는 도굴꾼이 극성을 부렸는데 당시 많은 고름 장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이 일 에 분묘유 적이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봉강리 고분군
 
봉강리 산 5-1 일 에 삼국시 로 추정되는 고분군이 발견되었다. 봉강리 구계월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250m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이곳은 산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반월형의 지형을 이루고 있는데 고분이 집된 분포된 남쪽 기슭은 부분 민묘 구역으로 조성되었다. 이 일 에는 민묘 구역을 조성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도굴로 파헤쳐진 고분이 많았는데 지금은 민묘 구역을 조성하면서 훼손내지 파괴 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고분의 벽석으로 추정되는 천석과 할석이 민묘 구역의 석축을 쌓는 데 사용되어 본래 고분이 자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수리 고분군
 
성수산에서 표석봉을 지나 북서쪽으로 뻗은 험준한 산줄기가 임실 성수면과 진 안군 백운면 경계를 이룬다. 이 산줄기에서 남쪽으로 갈라진 산줄기의 하단부에 성수리 고분군이 있다. 성수리 갈골마을 주민들이 돌로 쌓은 고름장이 도굴로 파괴 된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는데 지금은 흙으로 채워져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현지조사결과 고분의 벽석으로 추정되는 여러 매의 판석형 할석이 산재된 것을 알 수 있다.
 
 

13.4. 유물산포지遺物散布址

삼청리 유물산포지 1
 
삼청리 619-1번지 일 인 천동마을 남쪽에는 북동―남서 방향으로 비교적 깊게 형성된 놋점골이 자리하고 있다. 놋점골의 남쪽에는 삼청제가 있다. 삼청리 유물 산포지 2는 놋점골 동쪽 중간 지점에 위치하는데 나지막한 능선으로 부분 밭으 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은 개간 당시 극심하게 삭토된 것으로 보인다. 유물은 회청 색 경질토기와 자기 편이 수습되었다. 유적이 위치한 놋점골의 지명으로 보아 이 일 에는 가마와 관련된 유구가 조사될 가능성이 높다.
 
삼청리 유물산포지 2
 
삼청리 301-1번지 구곡마을에서 천동마을로 가는 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동쪽에 삼청제라는 저수지가 있다. 삼청제 동쪽에는 북동-남서 방향으로 형성된 산(343.9m)의 지류가 삼청제까지 뻗어내렸는데 그 말단부에 유물산포지 1이 자리하고 있다. 유적이 자리한 곳은 부분 개간되어 밭으로 경작하고 있다. 유물은 회청색 경질토 기 편이 주종을 이루고 철화백자를 비롯한 백자 편과 청자 편이 주류를 이룬다.
 
양지리 유물산포지
 
양지리 829번지 일 이다. 임실역을 지나 17번 국도를 타고 남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우측으로 신촌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만나게 된다. 그 길을 따라 가다 보면 곧 사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곧바로 가다 보면 석현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 다시 석현마 을 앞쪽의 둔남천을 건너 사양들을 따라 학정마을 방향으로 가다 보면 축사가 보이며 축사의 뒤편에 있는 구릉을 넘어가면 계단식 밭과 과수원이 나타나는데 이곳에서 유 물이 수습되었다. 유물로는 회청색 경질토기 편과 분청자 편 백자저부편 기와 편 등 이 수습되었다. 분청자 편은 조각들로 정확한 기형을 확인하기 힘들며, 백자저부 편 은 안쪽 바닥면에 규사알갱이가 남아 있고 기내외면에 빙렬이 있다. 기와 편은 모두 수키와로 한 점은 미구 부분이 남아 있으며 굵은 사선 문이 외면에 시문되어 있으며 삼베 흔적이 보인다.
 
오봉리 유물산포지
 
오봉리 유물산포지는 오봉리 450번지 일 보들 남서쪽 논과 밭에 자리하고 있 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을 ‘점터’라고 부르고 있으며 유기그릇을 만들었던 장소 다 고 한다. 현재는 논으로 개간되고 민가가 들어서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수습 된 유물로는 회청색 경질 토기·편 자기 편 등이 있다.
 
성수리 유물산포지 1
 
성수면 성수리 유물산포지는 수철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경계로 성수리 유물 산포지 2와 구분된다. 오래전 밭으로 개간된 지역에서 기벽이 얇고 문양이 시문되 지 않은 회청색 경질토기 편과 자기 편·옹기 편이 혼재된 상태로 수습되었다.
 
성수리 유물산포지 2
 
성수리 411-2 일 에 고려시 로 추정되는 유물산포지가 있다. 수철리마을 북서쪽 밭에 자리한다. 고려시 토기 편과 백자 편 옹기 편이 서로 섞인 상태로 산재된 것을 확인하 지만 이들 유물과 관련된 유구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수철리 지명과 관련된 야철지 혹은 제철지의 흔적 역시 확인하지 못했다.
 
성수리 유물산포지 3
 
성수리 321-3번지에 고려시 로 추정되는 유물산포지가 있다. 성수리 유물산포지 1은 수철리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경계로 성수리 유물산포지 2와 구분된다. 오래전 밭으로 개간된 지역에서 기벽이 얇고 문양이 시문되지 않은 회청색 경질토 기 편과 자기 편·옹기 편이 혼재된 상태로 수습되었다.
 
도인리 유물산포지 1
 
도인리 유물산포지 1은 당당마을에서 양지마을 방향으로 가다 보면 좌측으로 유물산포지가 있다. 유물산포지는 재넘어들 맞은편의 구릉지로 현재는 계단식으로 밭이 있다. 수습된 유물로는 경질토기 편과 자기 편들이 있다. 토기 편은 모두 회색 또는 회청색의 경질토기 편으로 외면에 격자문·선문 등이 시문되어 있으며 내면 에는 문양이 시문되어 있다.
 
도인리 유물산포지 2
 
도인리 유물산포지 2는 1의 맞은편에 위치한다. 도인리 산 144번지 일 로 유물은 묘지가 있는 곳 축사 옆 계단식 밭에서 수습되었다. 유물은 연질·경질 토기 편과 자기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질 토기 편은 구연부 편으로 회황색을 띠고 있으며 겉면에 격자 타날이 되어 있다. 경질토기 편은 구연부 편과 동체부 편 등 두 점이 있다. 구연부 편 한 점과 동체부편 한 점의 외면에는 격자 타날이 되어 있으며 나머지 동체 편에는 돌 가 돌려져 있다. 자기는 백자 편으로 저부가 일부 남아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잡한 느낌을 준다.
【저작】 성수의 역사문화 (2012)
• Ⅲ. 성수의 역사 유적
• Ⅳ. 성수의 문화 유적
• Ⅴ. 성수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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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