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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8월

중국의 동북공정과 간도 영유권문제 (2004.09)

간도협약과 간도영유권 문제 (2004.08)

북방영토 분쟁대비해 중국과 러시아는 역사를 다시쓰고 있다 (2003.09)

잃어버린 영토(간도와 연해주 지역)를 찾아서 (20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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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모음     이일걸의 지식창고 2018.08.03. 16:20 (2018.08.03. 14:28)

잃어버린 영토(간도와 연해주 지역)를 찾아서 (2003.07)

-독도본부 2003. 7.17. 영토위기강좌-
이일걸(성균관대)

1. 잃어버린 영토(간도와 연해주 지역)를 찾아서

-독도본부 2003.7.17. 영토위기강좌-
 
이일걸(성균관대)
 
1. 우리 민족이 역사상 상실된 영토를 열거한다면 고조선 · 고구려가 차지한 북방의 대륙과 세종 때 정벌한 대마도를 들 수 있다. 독도는 현재 우리가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잃어버린 곳은 아니다. 오늘 제기하고자 하는 논점은 천 여 년 전 멸망한 고구려 ·발해의 고토(故土)를 되찾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백년도 안 된 1909년 청일간의 간도협약으로 잃어버린 간도지역과 청이 러시아에 불법 할양한 연해주를 다시 찾아야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당시 및 현재의 정치 지도자들의 소극적이고 미온적인 영토의식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2. 간도분쟁의 발단은 결국 1627년 인조 5년에 금과 맺은 강도회맹(江都會盟)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강희제(康熙帝)의 독단적인 국경선 선언과 연해주 할양은 모두 강대국과 약소국간에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국제정치형태이다. 그러나 을유(乙酉)·정해(丁亥)계시(界時)는 한·청의 주종의 관계가 어느 정도 무너진 상황이었다. 그것은 청의 외적 정치적 환경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더구나 청일전쟁 전후의 한국의 외적 상황은 청·일의 대립에서 청· 일 ·노의 세력균형상태로 잠시 변화하였다가 노일전쟁 전후시기에는 노·일의 각축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있어서 간도문제에 대한 한국정부의 미온적인 자세는 결국 간도지역을 상 실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한국 정치지도자의 무능과 각 파벌간의 세력다툼으로 인한 국내상황의 혼란으로, 간도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당시 한 중간에 문제가 된 토문(土門)강에 대해선 중국은 두만강으로 간주한 반면, 조선은 송화강 - 흑룡강에 이르는 선으로 주장하였다. 홍양호(1724-1802)도 조선과 청의 경계가 북으로는 흑룡강, 왼쪽은 혼동강까지 이르러야 된다고 생각하였다.1) 1887년 조존우는 조정에 보고한 담판오조에서 국제공법상 토문강이 조·청간의 경계임을 밝혔으며,2) 1888년 내부대신 이건하의 지시로 박일헌과 김응룡이 국계(國界)를 답사하고 보고한 내용에는 "토문강이 5·6백리를 흘러서 송화강과 합하여 흑룡강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니, 토문강에서 바다에 들어가는 흑룡강 하류 이동(以東)은 우리의 땅이다. 아국(我國)은 변경의 분쟁을 염려하여 유민을 엄금하고 땅을 비웠다. 그런데 청이 이를 선점하여 자기 땅이라 하고 아(韓淸俄)에게 천 여 리의 땅을 할양하였으니 이것을 용인할 수 없다. 따라서 한.청.아(韓淸俄) 3국이 회동선감(會同先勘)하여 각국 통행의 국제법규에 따라 공평히 타결해야 한다"3)고 하였다. 이와 같이 조·청의 경계를 토문강·송화강·흑룡강으로 인식한 이는 북여요선(北輿要選)의 저자 김노규와 이 책의 서문을 쓴 이건하, 김가진, 유완무, 발문(跋文)을 쓴 이병순4) 등이다. 또한 장지연도 양국 간의 경계를 토문강으로 주장하였다.5)
 
또한 압록강 대안(對岸)지역은 1897년 서상무가 서변계 관리사로 임명받아 이 지역의 한인을 보호하였으며, 1900년 경 평북 관찰사 이도재는 이 지역을 각군에 배속시키고 충의사를 조직하여 이주민을 보호하였다.6) 두만강 이북지역은 이범윤이 1902년 간도시찰사로 임명받아 사포대를 조직하여 러·일 전쟁 발발 시까지 간도 한인들은 보호하였다.
 
이와 같이 강도회맹(江都會盟) 이후 간도분쟁이 일어나기까지 조선정부는 물론 소수의 실학자들과 개화기의 학자들은 한·청간의 경계를 토문강에서 흑룡강 이동(以東)으로 인식하였다. 이 시기의 북방영토의 범위는 서로는 레지선과 동으로는 토문강·송화강·흑룡강선의 이동(以東)이었다.
 
당시의 청은 의화단난으로 인해 연합국과 싸워 패하였다. 변법자강운동이 일어났지만 무술정변으로 개혁운동이 실패로 끝났으며 극도의 재정난으로 청의 내정이 혼란한 시기였다.
 
이 때 한국정부는 이범윤을 간도시찰사로 파견하여 간도 한인의 보호를 지시하였지만, 兵力을 대동하지 않는 그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따라서 그는 정부에 수차 간도파병을 요청 하였지만 묵살 당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조치는 정부내의 권세쟁탈로 인하여 파생된 결과 였음을 알 수 있었다. 정부내의 혼란은 변계에까지 파장되어 변계(邊界)관리들이 임의로 1904년 한청변계선후장정(韓淸邊界善後章程)을 약정토록 하여 간도한인을 더욱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또한 한말의 이러한 혼란상은 정치지도자들의 정치의식과 대외관에서 엿볼 수 있었다. 일본에 편중된 유학생의 파견은 정상형이 제안한 내정개혁안 20개조 안에 포함된 사항이었다.7) 즉 19조의 유학생 파견은 한국의 광범한 민중에 대한 근대교육보다도 소수 특권자의 자제를 일본에 유학시켜 일본의 영향 하에 두고 이 엘리트를 통해 한국지배를 강화하는 포석으로 삼으려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 일본유학을 갔다온 개화파들은 국제환경(일본의 한국침략)에 대하여 낙관적으로 판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에 이용만 당하였다. 그러므로 개화파나 집권사대파는 국가의 안위보다도 그들의 집권을 위해 외세에 의존하는 대외관을 갖고 있었다.
 
 
3. 일본의 간도분쟁 개입배경은 대륙진출을 하기 위한 교두보의 확보였다. 또한 일본은 독점자본주의의 상품시장확대와 원료기지확대를 위해서는 대륙진출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따라서 일본은 간도의 정치·군사상의 중요성과 경제적인 측면 및 정치지리학적인 측면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간도분쟁에 개입하였던 것이다.
 
이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을사감약(乙巳勘約)을 강제로 체결하여 간도문제개입의 법적 근거를 만든 다음, 박재순으로 하여금 1906년 11월 8일 통감부에 외교교섭을 내도록 조작하였다. 또한 노일전쟁 중에는 한·청간의 간도문제 조기 타결을 우려하여 청에 감계문제(勘界問題)의 논의를 지연하도록 요청하였으며 러․일 강화조약으로 한국에서의 우월권과 만주의 특수이익을 인정받았다. 러시아와 1차 노일 협약을 채결한 후에야 1907년 이등(伊藤)은 간도에 제등일행(齋藤一行)을 파견하였다. 이후부터 청일간에 간도문제를 두고 외교교섭 과정이 전개되었다. 최초 이등박문(伊藤博文)은 "간도를 한국 영토임을 전제"하였지만 일본이 청에 통보한 내용은 '간도는 소속 미정의 영토'라고 하였다. 그러나 1908년 4월 일본은 대청교섭의 정책전환(간도에 일한(日韓)인의 잡거 인정, 일본 영사관 설치, 한인 재판권은 일본 영사관이 담당, 길장(吉長)철도의 회령 연장, 한청 국경의 두만강 인정 등)을 훈령하였지만 청은 종전의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 이에 일본은 1909년 2월 동삼성육안(東三省6案)을 제시하자 양국 간에 교섭이 진척되어 일본은 간도를 청에 양보하고 청은 동삼성육안(東三省6案)을 일본에 수락하여 9월 4일 간도협약이 체결되었다.
 
 
당시 동북아의 국제정치 상황은 일본에 매우 유리하였다. 일본이 러시아와 체결한 노일협상은 불일(佛日)협상, 영러(英露)協商(1907)과 서로 어울러서 종래 아시아에서 대치하고 있던 영일동맹과 노불(露佛)동맹을 결합시켜 독일에 대항하는 삼국협상의 포위진의 일익을 형성하게 하였다. 또한 일본은 만주에서의 미국과의 충돌위기를 미일공동선언으로 피할 수가 있었으며, 이 공동선언으로 일본은 만주에서의 특수권익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은 구미열강들과 외교교섭을 통하여 유리한 국제환경을 만든 후에야 간도분쟁에 개입하여 청과 교섭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외교능력은 청일전쟁 후 러시아와 벌인 외교교섭인, 웨베르·소촌각서(小村覺書)(1896. 5. 14) 로바노프·산현(山縣)협정(1896. 6. 9), 로젠·西협정(1898. 4. 25)에서도 탁월하였음이 드러났다.
 
따라서 일본의 대청교섭과정도 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만주진출을 위한 동삼성오 안건의 교섭과정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즉 간도영유권에 대한 대청교섭 정책전환에서 일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결국 간도는 동삼성오안건과 교환되는 간도협약으로 청의 영유가 되었다.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적 경향은 산현유붕(山縣有朋), 이등박문(伊藤博文), 계태랑(桂太郎), 정상형, 소천수태랑(小村壽太郎)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어 이들이 대륙침략주의자가 되었으며, 또한 대간도정책을 추진했던 주역이었다. 이들은 해외유학이나 해외시찰을 경험자로서 특히 국제정세에 밝았으며 한국사정에 정통하였다. 더구나 이등(伊藤),산현(山縣) ,정상(井上)은 해외사정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한 길전송음(吉田松陰)의 송하촌숙(松下村塾)에서 동문수학한 제자들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의 탁월한 외교능력과 치밀한 계획에 의하여 한국은 병합되었고 판도마저 청에 넘겨주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한국을 둘러싸고 벌인 대청외교와 대노외교에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서구 열강과의 외교에서도 승리한 결과였다.
 
일본이 체결한 간도협약의 내용은 본래 동·서간도 지역을 축소하여 동간도의 동부만을 한정하였다. 이제 간도라면 토문강에서 송화강을 거쳐 흑룡강으로 유입하는 이동(以東)지역이 아닌 노야령산맥(老爺嶺山脈)과 노령 및 알아하로 둘러싸인 곳으로 알고 있다. 이미 압록강 대안지역(對岸地域)이 서간 도라는 개념은 사라져 버렸다. 따라서 간도협약은 압록강 대안(對岸)의 서간도에 대한 국경분쟁의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중 국경선이 압록강·두만강 선으로 굳혀진 것은 간도협약 이후이다. 한국병합 이후 일본이 이것을 확정하여 지도로 표시하기 시작하였다.
 
4. 간도협약의 문제점은 「동위토문 서위압록(東爲土門 西爲鴨綠)」 이라는 정계비의 내용에 따라 국경이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간도협약을 무효라고 주장하여도 서간도 지역은 압록강이 국경선이 된다. 그러므로 목극등(穆克發)이 세운 백두산 정계비의 내용이 문제가 된다.
 
간도협약의 문제점은 백두산 정계비를 국경조약으로 인정할 때와 인정하지 않을 때에 따 라 달라진다. 이제 강희제의 독단적이며 일방적인 백두산 정계비와 간도협약의 무효절차를 밟아 중국에 통보하여야 한다. 그리고 역사상 문헌에 나타난 한·중국경선의 재조정작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백두산 정계비는 청의 일방적인 과실책임이 있으며, 간도협약은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국제법상 무효이므로, 이 늑약(勒約)에 근거한 간도협약은 분명히 무효인 것이다. 그 외에 카이로선언, 미·일 강화조약, 중·일 강화조약, 한·일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1965) 등에 의거하여도 간도협약은 무효인 것이다.
 
국제법학자였던 조전치책(篠田治策)은 간도문제의 연구에 대한 결론으로써 "간도는 한청양국의 어느 한 쪽에도 속하지 않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무인의 중립지대였다. 이미 압록강 대안을 청의영토로 한 이상, 두만강 대안은 한국령으로 하는 것이 공평하다고 믿는다"고 하였다. 조전(篠田)은 일본이 간도분쟁에 개입할 때 제등계치랑(齋藤季治郎)과 직접 관여하여 간도지역을 답사한 자이다. 그의 결론도 국제법상 중립지대의 분할방법에는 타당하지 않지만 압록강 대안지역을 청의 영토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
 
한편 1860년 청 ·노의 북경조약 체결은 1627년 강도호맹(江都會盟)의 위반이었지만 즉시 항의조차 못하였다. 그 후 을유․정해(丁亥)감계시(勘界時)나 러시아와의 수호통상조약 등을 체결하였을 때도 연해주문제의 재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당시 정치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강대국의 눈치나 살피는 비자주적이며 사대주의 근성에 배어 버린 까닭이었다.
 
 
5. 1909년 간도협약 이후 우리 정부가 이 지역에 대한 영유권 주장이나 항의를 하지 않는 것은 어떠한 까닭인가? 중국과의 수교시 우리 정부는 동서간도지역에 대한 영유권 문제의 제기조차 하지 못하였다. 구 소련과의 수교시에도 30억 달러를 원조하기로 하면서 재(在蘇)한인 문제도 간과해버렸다. 적어도 한인자치주의 설치요청을 했어야 하는 것이 정치지도자의 마땅한 임무인 것이다. 이러한 정치지도자의 행태는 한말의 정치지도자들이 간도문제에 소홀히 대처한 처사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영토 내에 거주하는 사람만이 우리의 국민이 아니듯이, 영토 외에 거주하는 동포들도 우리의 국민이다. 이러한 해외동포들의 생명과 재산 을 보호할 임무가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에게 당연히 있는 것이다.
 
우리가 특히 유의할 점은, 중국에 간도지역을 불법으로 점령하고 있음을 우리가 항의하지 않음으로써, 국제법상 중국의 취득시효를 우리가 인정하여 간도지역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남북한이 통일이 될 경우 그 형태나 내용에 따라서 국가상속문제가 발생할 것을 가정할 때, 북한이 중국과 체결한 일련의 백두산 지역의 국경 획정은 북한·중국간은 물론 이들과 외교관계를 설정한 국가들에 대하여는 유효하다 할 것이며, 국내법(헌법 제 3조)을 근거로 당사자임을 자처하는 한국에서도 유효하다. 그러나 남·북한이 통일이 될 경우 국가상속 문제에 있어서는 위의 원칙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즉 계승국인 통일한국은 북한·중국의 국경획정 이전의 간도협약의 불법체결문제도 상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북한은 통일후의 국가상속 문제를 고려하여, 남북한이 각자 체결한 합의문서 의 규정내용이나 공문서 등을 분석하여 대비하여야 한다. 먼저 한국은 헌법 제3조의 영토 범위 규정을 개정하여야 한다.
 
 
6. 잃어버린 북방영토에 대한 대안은 없는가. 그렇지 않다. 간도 지역인 연변 지역에는 300만 가까운 조선족 동포들이 살고 있으며 연해주 지역도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해간 동포들이 약 5만 이상 돌아와서 정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이 우리 문화, 우리말과 글을 잊지 않고 생활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들이야말로 우리의 고토를 지켜주는 자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미래의 세계는 국가 간의 문제에 있어서 국경선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고 그 곳에 어느 민족이 살고 있는냐가 문제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 정부의 재외 국민(해외 동포)에 대한 정책을 전면 수정하여야 한다. 우리 민족에 있어서 북방영토(간도, 연해주)의 중요성을 열거하면, 1)간도지역이 민족 건국의 발상지며 재세이화,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을 실현시킨 곳이다. 2)이 지역이 지정학적으로 국토 방위상 매우 중요한 요충지이다. 3)중국 조선족과 연해주 고려인의 위상확립과 민족 정체성 회복을 위하여, 장래 이 지역이 생존 공간으로서 필요한 지역이다.
 
 
7. 이에 대한 중국 대응은 매우 심각하다. 특히 중국은 조선족자치주를 의식하여 다방면의 대응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대륙에 존재했던 고조선, 숙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족원(族源)과 성격을 왜곡시키고 있으며, 이 들 국가들이 중국 중원 왕조에 예속된 소수 민족의 변방 지방 정권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중국학자들은 왜곡시킨 사료에 근거하여 한 ·중 국경선을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고구려, 발해시기의 한 ·중 국경선은 고구려, 발해의 남계(南界0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고구려족과 발해족의 원류는 다르며 별망 후 한족화된 것에 근거하여 주장하고 있다 주요 학자들은 "중조변계사"의 양소전과 장박천, 장옥량 등을 들 수 있으며, "동북민족원류"에서 족원을 왜곡시키고 있는 손진기를 들 수 있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애초 대륙 지역이 중국에 예속된 땅이라는 중화적인 역사인식을 문헌으로 후세에 남기려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의 간도 영유권에 대한 장기적인 대응책인 것이다. 러시아 역시 발해의 문화의 근원을 달리 보고 우리 민족과의 관련성을 회피하고 있다.
 
 
8. 탈냉전 후 삼국간에 일어난 외교교섭의 과정을 분석하면 백 여년 전의 정치 지도자처럼 강대국의 눈치나 살피는 사대주의적인 자세를 보였으며, 재외동포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1990년 소련과의 수교 시는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 당한 17만 명의 연해주 한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아 당시 재소한인 45만 명의 명예회복을 시키지 못하였다. 더구나 구소련의 분열에 따른 중앙아시아 35 만명 한인의 난민화를 막지 못하였다. 수교시 경협 30억불을 제공하면서도 연해주 고려인 자치주 설립을 요구하지 못하였다.
 
1992년 중국과의 수교 시에도 미해결된 간도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하나의 중국 논리에 따라 대만과 단교까지 하였다. 당시 정부는 간도영유권의 문제를 간과하였던 것이다. 1909년 청 ·일이 맺은 간도협약으로 간도지역은 중국 영토로 되어 있다. 이 간도문제는 한 ·중간에 청산해야하는 중대한 현안임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를 등한시하였다. 그리고 한·중수교회담 전에 간도영유권의 문제를 제기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며, 이 길이 우리민족의 역사를 바로잡고 우리의 고토를 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써 북방정책 추진에 반드시 간도영유권의 문제를 병행 추진하여야 한다고 학자들이 주장하였다. 또한 한 ·중 국교정상화 시대를 맞이하여 정부는 대한제국과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이어받은 유일한 합법정부로서 간도문제가 통일한국의 국경선을 뒤바꾸어 놓을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임을 인식, 대책을 세워야 할 때라고 하였다.9)
 
 
이와 같은 지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정권은 중국과의 수교과정에서 간도영유권을 방기하였다. 또한 1995년도 중국의 이붕 총리는 당시 방중한 이모 총리에게 "한국인들이 중국영토인 백두산과 연변지역에서 고토회복 및 한민족 운운 ·.. " 등의 행동에 대하여 유감을 표시했었다. 이 때 이모 총리가 간도영유권의 근거를 들어 이붕 총리의 유감표명에 반박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이모(某) 총리 역시 간도분쟁의 사실을 몰랐거나 간도영유권을 망각하였음이 틀림없다. 아니 광복 이후 간토영유권에 관한 관심을 보인 정치가로는 1983년 '백두산 영유권 확인에 관한 결의안'을 제출한 김영광의원 외 54명과 1995년 국회에서 '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한 김원웅의원 이외는 없다는 사실은 우리 정치가들이 얼마나 간도문제를 망각하고 있는지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 국민들도 간도분쟁의 역사에 대하여 아는 이가 드물다. 특히 간도지역이 과거 우리의 영토로서 치열한 영토분쟁이 일어났던 곳이며, 일본이 대륙진출을 위해 간도를 불법적으로 청에 넘겨주게 되는 간도협약의 실상을 청소년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설혹 알고 있었던 노년층들도 간도라는 지명이 생소할 만큼 잊혀지고 있는 실태인 것이다. 우리민족의 고토이며 북방영토에 대한 간도영유권이 현재 철저하게 망각되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9. 간도영유권이 국민들의 의식 속에서 망각되어지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누구의 책임인가. 전적으로 우리 정부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간도영유권 분쟁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역사교과서에서도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라나는 2세들에겐 지금의 연변지역이 옛 간도지역의 일부분으로 우리 땅이었다는 사실과 그곳에 사는 조선족 동포가 피를 나눈 같은 민족임을 가르치지 않았다. 또한 간도지역에 대한 영유권이 우리 민족에게 있음을 교육시키지 않았다. 그 결과 간도지역이 우리의 영토권이 없는 타국으로 인식하였으며, 그곳에 사는 조선족 역시 우리 동족이 아닌 다른 민족으로 여겼다.
 
그 결과 내국인이 같은 동족인 중국조선족을 등쳐먹는 사기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반만년의 역사를 지닌 문화민족인 한민족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피해상황이 전 조선족의 20%인 40만여 명에 접수된 피해액이 3백30억 원에 이른다는 사실이다.10) 더구나 사기사건의 피해자 중 울화병과 빛 독촉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거나 이로 인한 병고, 생활고 등으로 숨진 조선족만도 118명에 이르며, 빚쟁이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거나 빚 독촉으로 인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버린 조선족도 있으며, 한마을 48가구 전체가 빚더미에 올라 망해버린 경우도 있다.11) 이 사기사건은 그동안 뿌리내린 연변자치주의 조선족사회의 붕괴를 의미할 만큼 큰 사건이었다. 더구나 교사출신의 중국조선족 선원이 주동이 된 선상반란 살인사건 소식은 내국인과 조선족간에 느끼는 같은 핏줄간의 끈끈한 유대감이 아닌 괴리감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족간의 이러한 이질화된 현상의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 정부가 중국조선족에게 최초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 1989년경이었다. 그런데 고작 5년이 안되어 이 사기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정부의 중국조선족에 대한 정책이 잘못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동안 정부가 추진한 정책이 조선족의 차별화정책이었음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다. 이를 결정한 정책결정자의 조선족에 대한 선입견과 인식에도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즉 조선족사회를 이루고 있는 및 간도지역의 영유권을 둘러싼 선조들의 피눈물나는 분쟁의 역사를 자세히 배우지 않았다. 이들은 간도영유권의 존재와 그 중요성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기사건의 밑바탕에는 중국조선족을 같은 동족으로 여기지 않으려는 무지한 민초들의 얕은 인식이 깔려있는 것이다. 마치 약 100년 전 이주한 간도 한인들이 소수의 한족(漢族)들에게 당한 포학(暴虐)한 사건들을 보는 것과 같다. 당시의 한인들은 토지를 빼앗긴 채 전호(佃戶)의 신세로 전락하였으며, 청일전쟁 후에는 화물의 운반 등에 노예같이 사역 당하였다. 심지어 재산과 생명마저 빼앗긴 참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12) 이러한 한족(漢族)의 포학과 비적의 횡포로 인한 간도 한인의 참상에 대한 내용은 이범윤의 보고서,13) 황우영의 의견서(1993년),14) 1907년의 북간도민 김현묵 외 13명의 청원문16)과 주범중 외 13명이 내각에 제출한 청원문에 잘 나타나 있으며, 특히 북간도민들은 간도의 실상과 국제법상 영토권을 완전케 하여 수십만의 생명을 보호해 달라고 하였다.
 
당시 100년 전 이들의 애절한 청원을 무시하고 간도 한인들을 보호하지 못한 한말의 정책결정자들과 간도영유권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여 동족을 등쳐먹는 사기사건을 일으키게 만든 최근 정부의 정책결정자들은 역사에 그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결국 이 사기사건의 책임도 우리 정부와 통치자 및 정책결정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즉 정부는 간도영유권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이며 간도영유권의 실상을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 역대 정부가 간도분쟁의 분기점이 되는 간도협약의 무효를 대내외적으로 공포하여 간도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외국의 저명한 학자들도 해양영토 분쟁지는 알아도 분쟁의 역사가 더 오랜 간도분쟁에 대하여는 전혀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역대 정부는 광복 반세기가 넘도록 간도협약의 무효를 공포하여 간도영유권을 주장하지 못했을까. 왜 국민들에게 간도지역이 우리의 영유권이 있음을 밝히고 교육시키지 못하였을까. 그리고 이제는 간도영유권의 주장이 우리 민족에겐 왜 중요한 것인가를 모두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
 
북방영토인 간도 지역과 연해주 지역은 이제 잃어버린 영토가 아니라 다시 찾아야 할 영토로서 민족의 절대 과제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철저히 준비하고 계획하여 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1) 洪良浩, 「耳溪先生文集」 , 輪東歌條, "北在黑龍在混同 還我興王疆秉故岐豊"
2) 김노규, 「北輿要選」 下, 黨界公文攷,
3) 위의 책, 査界公文攷.
4) 위의 책, 서문·발문(跋文) 참조.
5) 장지연, 「대한 강역고」 , 한성 : 황성신문사, 1904, pp.1-2.
6) 현규환, 「한국유민사」 상, 삼화인쇄출판부, 1976, pp.134-140.
7) 김정명 편, 일한외교자료집성, 제 4권, 동경: 암남당서점, 1967, p.289.
8) 窱田治策, 間島間題の回顧, p.51.
9) 동아일보, 1992. 8. 26.
10) 한국일보, 1996. 11. 7 ; 경향신문, 1996. 11. 19 ; 동아일보, 11. 19.
11) 동아일보, 1996. 11, 19 ; 1997. 11. 1.
12) 「간도영유권관계발췌문서」 , 국회도서관, 1975, pp.1-47. 이후 「간도발췌문서」 로 표시함.
13) 「간도발췌문서」 , pp.48-50.
14) 위의 책, pp.1-4.
15) 황성신문, 1907. 5. 2.
16) 황성신문, 1907. 7. 6.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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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5년 7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