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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015년 3월
2015년 3월 2일
남명 조식. 실천 철학. 그리고 칼을 찬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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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1. 19:07) 
◈ 남명 조식. 실천 철학. 그리고 칼을 찬 선비
조선 유학자 퇴계 이황, 율곡 이이,우암 송시열 정도로 알고 있는 저는 남명 조식선생을 잘 몰랐습니다.
조선 유학자 퇴계 이황, 율곡 이이,우암 송시열 정도로 알고 있는 저는 남명 조식선생을 잘 몰랐습니다.
 
조선시대 학자들의 본분이 무엇이었을까? 유학자라면 학문을 이룬 뒤 이를 바탕으로 과거시험을 통과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이었지만 16세기를 대표한 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셨습니다.
 
남명(南冥)선생은 영남의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1))과 쌍벽을 이룰 만큼 영남학파의 수장이며 거두입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죽어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된 인물입니다.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몸에 차고 그 소리를 들었고 경의검(敬義劍)을 차고 스스로 경계와 반성을 그치지 않은 조식은 일생토록 타락한 권력을 질타하고 무기력한 지식인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이른바 "선비 정신"을 실천한 인물입니다.
 
 
 
\na-;▼성성자(惺惺子) - 성성이란 컴컴한 밤하늘에 별처럼 마음이 잠들지 않고 반짝인다는 뜻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1501년(연산군 7년)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에 속해있는 삼가현 토동(兎洞) 외가에서 조언형(曺彦亨,1469~1526)과 인천 이씨 사이에 삼남 오녀(三男五女)중 이남(二男)으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창녕, 자는 건중(楗中)이며, 호가 남명입니다. 18년간 살았던 김해에 ‘산해정(山海亭)’이라는 집을 지어 후진을 양성한 까닭에 산해선생이라고도 불립니다.
 
\na-;▼경남 합천군 삼가현 생가지(경상남도 기념물 제148호)
 
 
조식의 집안은 증조인 조안습(曺安習) 때부터 삼가의 판현(板峴)에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집안이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는데, 안습의 경우 문관이 되고자 노력했으나 생원시(生員試)에 그쳐 가문의 중흥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가문을 일으키려는 조안습의 꿈은 조식의 부친인 조언형에 이르러 이루어졌는데 조언형과 조언경 두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이 열린 것입니다. 부친 언형은 생원시와 전시에서 장원하였고 이후 요직인 이조정랑을 지내면서 가문이 창성하기 시작하였급니다만 영광도 잠시, 조식의 숙부 조언경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가솔과 함께 목숨을 잃었고, 부친 조언형 역시 말년에 모함으로 관직을 삭탈당했습니다.
 
조식의 외조부는 충순위 이국(李菊)입니다. 조식의 외가인 인천 이씨 집안은 고려 때 6대조 이작신(李作臣)이 삼가로 유배 온 이래 이곳 토박이가 되었으며 외가의 집터는 풍수적으로 상당히 명당이었다고 전합니다. 한 예언가가 지나가면서 그 집터를 보고 “신유년(1501)에 이곳에 태어나는 아이는 커서 반드시 성현이 될 것이다”라 예언했다고 합니다. 이후 조식의 부모가 처가에 들렀다가 누런 용 한 마리가 방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꾼 뒤 이씨 부인이 임신을 했고, 예언처럼 1501년 음력 6월 26일에 이곳에서 조식을 낳았습니다.
 
벼슬살이를 했던 부친 덕분에 어린시절은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는 않았고 5세까지 삼가에 있는 외가에 살다가 부친이 문과에 장원을 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스승은 부친이었는데 서울에 올라온 조식은 연화방(蓮花坊)이란 곳에 살면서 부친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9세 때 큰 병을 앓았는데 어머니가 이를 걱정하자 "하늘이 나를 생(生)함이 반드시 할 일이 있어서일 것이니 요절할 리 없다"하고 도리어 어머니를 위로했다 합니다.
 
“어머니, 하늘이 사람을 낼 때 어찌 뜻이 없겠습니까. 소자가 남자로 태어났으니 반드시 소자에게 부여한 임무가 있을 것입니다. 임무도 다하지 못한 어린 소자의 목숨을 하늘이 거두겠습니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친인 조언형은 언론과 감찰 업무를 담당한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을 각각 역임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언론과 감찰 업무를 맡은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원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서 우대를 받았던 관직입니다. 그들은 고과(考課- 업무평가)를 받지 않았고, 당상관도 이들의 인사를 받으면 정중하게 답례하도록 규정하는 등 우대를 받았습니다. 특히 국왕에게 직언을 하는 사간원은 언론의 대상이 국왕인 점에 비추어 음직(蔭職, 과거를 거치지 않고 다만 조상의 혜택으로 얻던 관직) 이 아닌 문과 출신자만 선발되던 자리입니다.
 
1536년(중종 31년) 36세의 조식은 결혼 14년 만에 첫아들 차산(次山)을 얻고 가을에 있은 향시에서 3등을 합니다. 1538년(중종 33년) 38세에는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의 추천으로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1543년(중종 38년) 43세 때는 경상감사로 부임한 이언적이 만나기를 원했으나 거절합니다. 그 이듬해인 1544년에 조식은 첫아들 차산을 병으로 잃고 연이어 1545년에는 어머니 인천 이씨를 여윕니다. 57세에 부인을 다시 맞아 3남1녀를 두어 후손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15세에 부친이 함경도 단천군수로 임명되자 단천으로 이주한 조식은 경전자사(經典子史)와 천문(天文), 지리(地理) , 의방(醫方), 수학(數學), 궁마(弓馬), 진법(陣法)등 남아가 갖추어야 할 모든 지식(知識)과 재능(才能)을 익혔고, 특히 자기의 정신력(精神力)과 담력(膽力)을 기르느라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들고 밤을 새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실천과 비판 의식을 지닌 선비로 성장한 데는 지방관 생활을 한 부친의 영향으로 어린 조식은 지방 관아에 생활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직접 눈으로 보았고, 이를 개선할 방법을 학문에서 찾았습니다. 방대한 독서량을 자랑했던 조식은 젊은 시절 좌전(左傳)과 유종원(柳宗元- 당송8대가 중의 한사람)의 고문을 좋아하였다고 합니다.
 
1518년 18세에 조식은 부친을 따라 서울 장의동(지금의 북악산 밑 경복고 일대)로 이주하였는데 당시 그의 집은 성운(成運)·성우(成遇) 형제의 집과 가까웠습니다. 성운은 훗날 1545년(명종 1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형이 화를 당하자 속리산으로 들어가 은거의 삶을 살았던 인물로 이웃사촌이었던 조식과 성운은 수시로 만나 학문을 토론하고 함께 인격을 수양해갔습니다.
 
평온하게 학문 활동에 매진하던 중인 1519년(중종 14년)에 기묘사화(
禍가 일어나면서 조광조(趙光祖)가 사사되었는데, 이때 조식의 숙부인 조언경도 화를 당했으며 기묘사화를 계기로 조식은 벼슬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성운 형제와도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연이은 사화를 지켜보면서 벼슬길에 회의를 갖기도 했지만, 곧장 과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520년(중종 15년) 진사 생원 초시와 문과초시에 모두 급제한 조식은 이듬해 문과회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했으며 그 후 과거 준비와 함께 학문을 닦던 그에게 일생의 항로를 바꾸는 전기가 찾아왔습니다.
 
과거 시험 공부를 하던 중 성리대전(性理大典)에 실려 있는 “대장부가 벼슬길에 나가서는 아무 하는 일이 없고 초야에 있으면서는 아무런 지조도 지키지 않는다면 뜻을 세우고 학문을 닦아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허형(許衡, 1279~1368, 원나라 학자)의 글이 그의 가슴을 친 것입니다. 이때가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이후로 조식은 출세를 위한 형식적이고 지엽적인 학문을 버리고 유학의 본령을 공부하는데에 전념하여 실생활에서도 유학의 성현이자 대유(大儒)들인 주렴계, 정명도, 주자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아침마다 절을 올릴 정도로 독실하게 공부했습니다.
조식의 학문과 실천의 지표는 ‘경(敬)’과 ‘의(義)’입니다. 경과 의는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로 “군자는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바깥을 바르게 한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조식은 좌우명과도 같았던 경과 의를 실생활에도 옮겨, 몸에 차고 다니던 칼에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글을 새겼습니다. 그에게 있어 ‘경’과 ‘의’가 가진 의미는 마치 하늘의 해와 달과 같은 것으로,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는 만고불변의 진리였기에 모든 진리는 이 두 글자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na-;▼ 경의검(敬義劍) - 칼에 적힌 내명자경 외단자의 (內明者敬 外斷者義)의 뜻은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고 밖으로 행동하는 것은 의이다
 
1526년 갑작스레 부친이 돌아가시자 3년 상을 치른 뒤 조식은 벗인 성우와 함께 지리산으로 유람을 떠났는데 오랜만에 만난 벗 성우는 그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그와 대화하면서 시골에서 게을리 공부하면 금방 뒤쳐진다는 사실을 깨달아 조식은 모친의 허락을 받아 의령 자굴산으로 들어가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2년간의 산속 생활을 끝낸 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처가가 있는 김해로 이사하여 집 근처 언덕에 산해정(山海亭)이라는 독서당을 짓고 본격적인 학문 활동을 했습니다.
 
\na-;▼ 산해정(山海亭) -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는 의미
 
조식이 김해에 독서당과 집을 지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벗인 성운을 비롯하여 각처에서 친구들이 찾아왔고, 오랜 시간 학문에만 전념하여 쌓은 내공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점차 퍼져 나갔습니다. 그의 명성은 급기야 중앙 정계로까지 알려져 1538년 조정에서는 38세 그에게 헌릉참봉이라는 말단 참봉자리를 제안했습니다. 명분은 재야 지식인을 등용하는 모양새지만, 실상은 왕실 무덤이나 지키는 자리로 그는 이 제안을 뿌리쳤습니다.
 
혹자들은 관직 자리가 낮아 거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지만, 조식은 평생토록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것으로 자신을 둘러싼 의혹을 물리쳤습니다. 당시 조정의 중신이었던 이언적이 1543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조식의 명성을 듣고 만남을 청했으나, 이 또한 피했는데 높은 벼슬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시골처사가 마치 벼슬자리를 구걸해 보이는 오해라도 받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날로 혼탁해져가는 세상과는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조식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였고 그 뒤에도 몇 차례에 걸쳐 조정의 부름이 있었지만, 번번이 사양했고, 48세 때 18년간 학문기반(學問基盤)을 닦던 김해(金海)를 떠나 다시 고향(故鄕)인 토동(兎洞)에 돌아와 계부당(鷄伏堂 : 암닭이 알을 품고 부화할때 그 마음가짐 즉 지극,정성을 다하라는 뜻으로 명명함)과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한편으로는 후진(後進)을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처사(處士)로서 언론(言論)을 발(發)하여 국정(國政)을 비판( 批判)하였습니다.
 
김해(金海)에서의 18년 생활(生活)은 급기야 사림(士林)의 기풍(氣風)을 다시 진작(振作)하는 힘이 되어 사림(士林)은 그를 영수(領首)로 추앙(推仰)하기 시작했고, 이를 안 조정(朝廷)은 그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그를 벼슬길로 나오도록 했으며 1553년에는 벼슬에 나오라는 퇴계 이황의 권고도 물리쳤습니다.
 
\na-;▼합천 뇌룡정(雷龍亭) - 장자에 나오는 ‘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시거이용현, 연묵이뢰성: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과 같이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뢰처럼 소리친다.’에서 따 온 것으로 48세때부터 12년 동안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장소입니다.
 
 
 
<경>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서 실천하라는 그의 가르침은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겨야 하는 실천철학이었습니다. 그가 제자들에게 강조한 것은 철저한 자기 절제를 통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한 절의였습니다. 1561년 조식은 김해에서 다시 지리산 아래 산청 덕산으로 이사하여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는 일로 말년을 보냈습니다. 오덕계·정한강·곽재우등 수많은 인재들이 그와 인연을 같이 했습니다.
 
\na-;▼산청 산천재 (1561년 건립 , 61세~72세사망시)
환갑나이면 대부분 사람은 배우기보다 가르치길 좋아하지만, 남명선생은 가르치기보다 공부하길 더 좋아했는데 이는 공자가 68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73세까지 6경(시경
經, 서경書
經, 예기
記, 악기
記, 역경(
經, 춘추
秋)을 만든데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불교의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의 수행)과 통합니다.
 
 
주련(柱聯)
 
 
 
\na-;▼산천재 450년된 매화나무 - 남명매(南冥梅)로 난초(蘭), 국화(菊), 대나무(竹)와 함께 사군자라고 하여 선비의 절개를 상징합니다.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점 때문이지요
.
 
 
\na-;▼산천재에서 12번 올랐던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그리워함
 
 
\na-;▼덕산에서 바라 본 지리산 -이호신 화가-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세력이 활보하던 명종대를 지나, 선조가 즉위하면서 조식에게 다시 벼슬이 내려졌고 새로운 세상이 온 듯 했으나, 조식은 이마저도 사양했습니다. 1572년 2월 남명 조식은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 직전에 제자인 김우옹((
金宇
顒 : 외손녀 사위)이 스승의 사후 칭호를 무엇이라 할지 묻자, 조식은 ‘처사(處士)’라 하라고 답했습니다. 그가 지향했던 삶이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임진왜란 당시 그의 제자 가운데서 의병을 일으킨 인물(곽재우
郭再
祐:외손녀 사위, 정인홍 등)이 많이 나왔던 것도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남명 조식의 실천 정신을 물려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1555년 조식은 조정으로부터 단성현의 현감자리를 제안받았는데 그간 윤원형을 비롯한 간신들이 가득한 조정에 나갈 마음이 없었던 그에게 사양하기 힘든 벼슬자리가 단성현감이었습니다. 조정은 조식의 거주지와 그리 멀지 않은 단성현의 현감자리라면 사양할 명분이 별로 없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조식은 이마저도 사양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작정하고 국왕을 향해 그간 가졌던 재야 인사로서의 의견을 강력하게 제시했으니 이것이 곧 "단성소(丹城疏)"라 불리는 을묘사직상소이다.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반되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에서 히히덕거리며 술과 여자에만 빠져 있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산 모으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온 나라가 안으로 곪을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사직상소를 받아본 국왕은 당시 스물을 갓 넘긴 명종으로 중종과 문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명종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탓에 모친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대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피붙이인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들은 권력을 마음대로 농단했고, 급기야 임꺽정의 난과 왜구의 침략 등 국내외의 혼란은 가중되어 결국 이러한 혼란기에 가장 고통받는 것은 민초들이었습니다.
 
조식은 사직상소를 올려 신성불가침적인 존재인 국왕과 대비를 향해 “대비(문정왕후)는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국왕은 아직 어리니 돌아가신 왕의 한 고아일뿐이다”라는 상상도 못할 극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국왕이 좋아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고도 따져 물었고 왕이 무엇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달렸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상소문을 받아본 명종은 본질은 외면한 채 ‘고아’와 ‘과부’라는 표현에 격노하며 조식을 불경죄로 처벌하라고 명령했지만 이 일을 두고 조선왕조실록 사관은 “왕이 신하의 상소에 대해 답을 하지 않고 도리어 문책하는 것은 자유로운 언로를 막는 것”이라 했습니다. 또 “이 이후로 온 나라의 선비들은 임금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게 되어 모두 비위 맞추는 데로 몰리게 될 것이다”라며 애석해 했습니다. 재야 지식인으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조식은 이 상소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한편으로는 국왕도 무시할 수 없는 재야 사림의 영수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시절에 재야 거물인 김대중선생처럼 납치하여 죽이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처형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조식의 문집인 <남명집>. 조식은 당대의 유학을 영도하던 위치에 비해 남긴 저술이 많지 않은데, 이것은 저술 행위를 중요시하지 않고 오히려 경계했던 학문적 입장에 따른 이유와, 남긴 원고 대부분이 임진왜란 중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 역사에서 16세기는 지방을 토대로 한 이른바 사림(士林)이라 불리는 지식인들이 성장한 시기로 이들 세력들은 지방에 따라 학문적 차이도 드러내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곧 남명학파와 퇴계학파입니다. 남명학파(북인)와 퇴계학파(남인)는 지리적으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뉘어져 있어 각각 영남우도와 영남좌도를 대표했습니다.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명학파가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실천적인 학문을 주장했다면,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 성리학을 이론화했습니다.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는 이 두 학파의 차이점이 잘 지적되어 있습니다.
 
“중세 이후에는 퇴계가 소백산 밑에서 태어났고, 남명이 두류산(지리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모두 경상도의 땅인데, 북도에서는 인(仁)을 숭상했고, 남도에서는 의(義)를 앞세웠다.”
 
이익은 지리산 아래에서 출생한 남명이야말로 우리 나라에서 기개와 절개로는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평가하면서, 남명의 제자들이 여기에 영향을 받아 정의를 사랑하고 굽히지 않는 지조를 지녔다고 했으며 반면 퇴계의 제자들은 깊이가 있고 겸손하다고 했습니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은 나이가 동갑으로 1501년에 경상우도와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대학자가 두 명이나 태어난 것입니다. 이황이 71세로, 조식이 72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둘은 완벽하게 동시대를 산 인물이었지만 두 사람은 서신만 왕래했을 뿐 실제로 대면한 적은 없습니다. 조식은 퇴계학파의 성리학논쟁에 대해 비판적으로 남명은 퇴계학파가 현실 인식은 하지 않고 형이상학적인 이론 논쟁만 일삼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황은 조식이 유학 이론에 깊지 못하다고 평했습니다.
 
 
 
\na-;▼퇴계 이황 인덕(仁,德) - 제자는 월천 조목,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 등
 
 
학문적으로는 이견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 호감을 가진 라이벌이었습니다. 경상도의 학자들 가운데는 두 사람을 모두 존경하여 두 문하를 번갈아 출입하며 학문을 계승한 인물들이 많았는데 한강 정구·동강 김우옹·정탁등이 대표적인 학자입니다.
 
그러나 조식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의 경우 이황을 비판한데다가 인조반정 때 역적으로 처형당하면서 조식의 명망이 퇴계에 비해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훗날 정조(正祖)는 “영남에서 절의있는 선비가 배출된 것은 실로 조식의 힘 때문이니, 후세에 어찌 중도의 선비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도 얻기가 쉽지 않다.”고 평했습니다.
 
\na-;▼남명의 제자 정인홍(鄭仁弘, 북인정권의 실세, 인조반정으로 처형돼 남명학파 몰락) - 광해군이 쫓겨난 인조반정은 효가 충보다 우선시하는 가족주의 부활이라 함(김학수연구원)
 
 
 
1571년에 퇴계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은 조식은 눈물을 흘리며 “같은 해에 태어나고 살기도 같은 경상도에 살면서 70년을 두고 서로 만나지 못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닌가. 이 사람이 가버렸다 하니 나도 아마 가게 될 것이다.”하였습니다.
 
이 말처럼 조식 또한 일년 뒤 세상을 떠났는데, 일설에 따르면 “내 비석에는 처사라고만 쓰라”는 이황의 유언을 들은 조식이 “퇴계가 할 벼슬은 다하고 처사라니, 평생 동안 출사하지 않은 나도 이 칭호를 감당하기 어렵거늘”이라 했다고 합니다.
 
72세(1572년)되던해 2월 8일 천수(天壽)를 다하고 경남(慶南) 산청군(山淸郡) 시천면(矢川面) 사윤동(絲綸洞)에서 조용히 운명(殞命)하였습니다. 운명 전 문병(問病) 온 노옥계(盧玉溪), 김동강(金東岡), 정한강(鄭寒岡), 하각재(河覺齋)에게 이는 하늘의 일월(日月 )과 같은 것으로 변할 수 없는 진리(眞理)이니 힘써 지행(指行)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부문(訃聞)이 발(發)하자 조정(朝廷)에서는 제물(祭物)과 제관(祭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사림(士林)은 모두 곡(哭)하여 만장(輓章)과 제문(祭文)을 올렸습니다.
 
선생 사후(死後) 나라에서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하였습니다
 
\na-;▼산청 묘소
 
 
\na-;▼비문(우암 송시열씀)
 
 
남명 조식은 경상우도라는 지역적 정서와 함께 그 시대 사화(士禍)의 참상을 경험하면서 경의(敬義)를 학문의 실천지표를 삼은 인물입니다. 그의 실천적 학풍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임진왜란 의병장 출신에는 조식의 제자들이 많이 나왔으며 남명학파의 의병활동은 조식의 핵심 사상인 ‘경’과 ‘의’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남명정신을 대변하던 제자 정인홍이 역적으로 처형되면서 남명학파는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민본(民本)을 바탕으로 한 남명 조식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성희글 편집
 
\na-;▼산청 산천재와 덕천사원, 합천 뇌룡정, 김해 산해정
 
 
 
 
\na-;▼산청 덕천 서원
 
 
\na-;▼조식편지
 
\na-;▼산청 세심
 
 
 

 
※ 원문보기
문화재·역사·전
• 윤동주 시인이여 영원하라!
• 남명 조식. 실천 철학. 그리고 칼을 찬 선비
• 지신밟기, 오곡밥 그리고 정월 대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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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