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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4일
광화문 월대 복원과 첩종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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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光化門) # 광화문 월대 # 첩종
【관광】
(2023.11.02. 18:02) 
◈ 광화문 월대 복원과 첩종 행사
경복궁 광화문의 월대가 복원되었고 궁궐 호위군 사열의식인 첩종(疊鐘)이 재현되어 관람하였다.
경복궁 광화문의 월대가 복원되었고 궁궐 호위군 사열의식인 첩종(疊鐘)이 재현되어 관람하였다.
보통 경복궁 수문장 교대의식이 10시, 14시에 진행되지만 2023년 10월 20일 ~10월 22일 기간은 수문장 교대의식은 첩종으로 대체했습니다. 모처럼 맑은 가을 하늘에 나들이 객이 많았고 4년 만에 열린 첩종 행사는 관심을 갖고 구경했습니다.
▣월대(月臺)
대개 방형의 넓은 단(壇)으로, 그 위에 지붕이나 다른 시설을 하지 않는다. 월견대(月見臺) 즉 달을 바라보는 대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월대는 궁궐에서의 하례(賀禮) · 가례(嘉禮)와 같은 큰 행사 때 사람들이 올라서서 행사에 참여하는 데 이용되며 제례(祭禮) 때에도 이용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 이전의 월대는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우며 조선시대 각 궁궐의 외정전(外正殿) 및 내정전(內正殿)의 앞, 그리고 종묘(宗廟) 정전 및 영녕전(永寧殿)의 앞에서 그 실례를 볼 수 있다.
월대는 공통적으로 건물의 전면(前面)에 놓이며 대개 장방형으로 그 높이는 약 1m 전후이다. 때로는 2단으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고, 장대석(長臺石)을 가지런히 쌓아 올려 벽면을 구성하고 상부는 전(磚)이나 박석(薄石 : 넓고 얇게 뜬 돌)을 깔며 모서리에 향로 · 드므(방화수를 담는 용기)를 올려놓기도 한다.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의 월대는 상하 2중으로 구성되었으며, 근정전 건물의 동서남 3면에 걸쳐 마련되었는데, 특히 남쪽의 정면 계단에는 상하에 각각 봉황새를 새긴 답도(踏道)를 두고 층계석에도 당초무늬를 새겼다.
또한, 상하 각 월대의 가장자리에는 돌난간을 사방에 두르고 난간기둥머리에는 사신도(四神圖)의 개념에 따라 청룡, 백호, 주작, 현무와 12간지 중 일부인 말(오午), 토끼(묘 卯), 닭(유 庾),호랑이(인 寅), 원숭이(신申) 그리고 28수(宿)의 성좌(별자리) 상징 동물중에 남방칠수의 들개(안 犴),동방칠수의 낙타(낙 駱)와 교룡(교 蛟),서방칠수의 이리(낭 狼), 북방칠수의 쥐(서鼠) , 남쪽하월대에는 해치(해 獬)를 좌우에 세웠다.(경복궁 영건일기)
 
▼복원한 광화문 월대
 
▣첩종(疊鐘)
ⓐ 첩종(疊鐘)은 『경국대전(經國大典)』 권 4(병전 첩종조)에 어전(御前) 사열(査閱) 및 비상대기에 사용했던 대궐 안에 있던 큰 종이라 기록되어 있다.
ⓑ첩종 의식이란 왕의 명령으로 궁궐에 입직한 군사뿐 아니라 문무백관과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병사들까지 모두 집합해 군사 점검을 받는 사열의식을 말한다. 이는 평상시 비상훈련과 실제 비상시에 왕권을 신속히 보호하고 국가의 안위를 지키려는 조치에서 시행되었다.
☞ 오위(五衛)는 중앙 군사 조직으로, 중위(의흥위), 좌위(용양위), 우위(호분위), 전위(충좌위), 후위(충무위)로 구성함
ⓒ첩종 절차는 먼저 종을 치면, 입직(入直) 한 군사는 왕이 나오는 문으로 따라가 그곳 궁전(宮殿)에 집합하고, 오위(五衛)는 광화문에서 종루(鍾樓)·흥인문(興仁門)까지 정렬하는데 위장(衛將) 등이 명령을 받아 통솔한다. 백관은 소속 청사를 지키는 1명을 제외하고는 무장을 갖추고 조방(朝房)에 모여 명을 대기하고, 궐내(闕內)의 모든 관청과 도성 밖의 모든 관원은 각각 본청(本廳)에서 명을 기다린다. 시신(侍臣)들은 건춘문(建春文)·영추문(迎秋門) 밖, 출직(出直) 한 병조(兵曹)·도총부(都摠府)·훈련원(訓鍊院)·군기시(軍器寺) 등의 관원은 광화문에 모여 명을 기다린다 -중종 20년 3월 22일-
ⓓ조선왕조실록 자료에 따르면 중종 이후에 첩종을 실시한 기록은 없다.
첩종은 군사를 집합시켜 사열하기 위해 궁중에서 치는 큰 종을 말한다. 예종 때 첩종을 하였는데, 군사의 수가 많지 아니하고, 백관(百官)도 또한 적다. 군사로서 점고(點考)에 빠진 자는 지금은 우선 용서하나, 백관으로서 점고를 받지 않은 자는 만약에 그 이름을 알게 되면 곧 파직하여 쓰지 않고자 한다. -예종 1년 6월 2일-
성종 때에 북(鼓)은 양기(陽氣)를 돕고 종(鐘)은 음기(陰氣)를 돕는데, 음기가 성하여 재해와 옥사가 빈발하니 절의 종을 치지 말 것을 신하들이 청하였으나, 성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첩종 의식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하들도 첩종일 때만 종각의 종을 칠 것을 주장하였다. -성종 1년 1월 11일-
첩종은 무비(武備, 군비)를 닦는 일로 중요하게 여겨졌던 바, 1476년(성종 7)에 도승지(都承旨) 현석규(玄碩圭)가 근래에 무비가 해이(解弛) 해졌으니 만약 뜻하지 않은 변고가 있다면 어떻게 거기에 대처하겠습니까? 국가에 일이 생기면 비록 조사(朝士)라도 당연히 종융(從戎,종군) 하여야 할 것입니다. 첩종과 강무(講武)·대열(大閱)의 의식을 강화하자고 건의하였고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성종 7년 7월 14일-
다만 성종 때에는 첩종이 실제로 거행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에 달아 놓은 종이 없으니, 경복궁에 있는 종을 치게 되면 군사들이 경복궁으로 모일 것이기 때문에 창덕궁에 매단 종을 주조한 이후에 첩종을 하자고 이극배(李克培)가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후에 창덕궁에 종을 매단 기록이 보이지 않고, 성종때 첩종을 한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성종 7년 7월 15일-
중종 때에는 양상이 다르게 전개되었는데, 무비(武備)가 해이(解弛)해졌으니 첩종 의식을 행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폐조(廢朝)인 연산군 때에 첩종을 하려 해서 인심이 흉흉해졌고 백성들이 놀라 시끄럽게 되니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중종 14년 6월 22일-
첩종(疊鍾)의 경우는 조종조에서 이미 사용하였고, 폐조(廢朝)인 연산군 때에도 이 종을 쳐서 출입번 군사(出入番軍士)에게 모두 갑옷을 입고 기다리게 하였으나 결국 하지 않고 말았다. 이것은 인심이 소요하는 일이므로 꼭 하게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급할 때에 이를 사용하려면 마땅히 장사들로 하여금 모두 불시에 교열(校閱) 하는 뜻을 알아서 항상 준비해 놓고 기다리게 해야 한다. -중종 27년 9월 20일-
중종 이후에는 첩종 의식을 행한 기록이 없으며, 정조대에 보이는 기록에는 종을 쳐서 군사를 일으키는 행위가 반란을 일으키는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행해지지 않고 있다고 하여 첩종은 조선 후기에는 행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정조 11년 8월 26일-
 
 
 
 
 
 
 
 
 
 
▼2023.10월 첩종 안내문
 
 
▼2016년 10월 첩종 안내문
 
 
출처: 문화재청, 민족문화대백과,뉴시스사진, 중앙일보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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