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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虛勢)로 지은 덕수궁 돈덕전(惇德殿)을 다시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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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德壽宮) # 돈덕전
【문화】
(2023.11.16. 09:38) 
◈ 허세(虛勢)로 지은 덕수궁 돈덕전(惇德殿)을 다시 짓다.
2023년 9월 26일 재건한 덕수궁 돈덕전에 다녀왔다. 돈덕전이란 이름부터 특이해 알아보니 돈덕(惇德)은 중국의 고대 문헌인 『서경(書經)』 우서(虞書) 순전(舜典) 제16장 중에 “멀리 있는 자를 회유하고 가까이 있는 자를 길들이며, 덕이 있는 자를 후대하고 어진 자를 믿으며 간사한 자를 막으면, 사방의 오랑캐들이 복종할 것이다(柔遠能邇 惇德允元 而難任人 蠻夷率服)”에서 나왔다.
2023년 9월 26일 재건한 덕수궁 돈덕전에 다녀왔다. 돈덕전이란 이름부터 특이해 알아보니 돈덕(惇德)은 중국의 고대 문헌인 『서경(書經)』 우서(虞書) 순전(舜典) 제16장 중에 “멀리 있는 자를 회유하고 가까이 있는 자를 길들이며, 덕이 있는 자를 후대하고 어진 자를 믿으며 간사한 자를 막으면, 사방의 오랑캐들이 복종할 것이다(柔遠能邇 惇德允元 而難任人 蠻夷率服)”에서 나왔다.
 
▣ 돈덕전 개요(연혁)
 
ⓐ 덕수궁 석조전 뒤쪽 원래 해관(海關 : 지금의 세관)이 있던 자리에 세웠던 화려한 유럽풍 외관의 벽돌로 지은 서양식 2층 건물(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했는지 불확실 )이다.
 
☞ 사바틴은 명성황후 시해 현장을 목격해 해외에 알렸고 독립문, 러시아 공사관, 사라진 건청궁 관문각 등 설계함
 
▼ 돈덕전 앞의 회화나무(작은나무)와 가시 칠엽수나무가 보인다.
 
ⓑ 돈덕전을 지은 이유는 1902년 10월에 있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 예식(稱慶禮式)" 때문이었다. 고종은 이 행사를 통해 근대 국가 대한 제국의 위용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그 일환으로 각국의 외교관들을 초청해 대규모 행사를 계획했다. 바로 그 행사 연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돈덕전을 지은 것이다. 백성들은 굶주리고 어려운 정치적 상항을 이벤트성 행사(1년 예산의 13% 차지)로 자주국이 되려고 하던 고종은 너무 무모했고 허세를 부렸다.
 
"서울에 5년 만에 다시 와 보니 거리의 남루한 복장이 이전보다 두 배나 많았다. ... 고종 황제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엄비(영친왕의 생모)를 따라 미신을 신봉하고 있었다. 황제는 아주 호감을 주는 인물이지만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 정치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다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국인은 러시아, 일본 기타 열강의 국제관계 및 그들의 정치적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나라가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제대로 몰랐다. ... 관직은 강대국과 종속관계에 놓여 독립심이 박약하고 의타심이 강하다. 관직은 공적과 능력에 따라 임용되지 않고 뇌물의 액수에 따라 결정됐다. " - 주한 러시아 공사로 재직했던 웨베르의 1903년 방한 기록-
 
ⓒ 대한 제국의 고종(재위 1863∼1907)이 즉위 40주년을 축하(칭경 예식) 하는 행사 프로그램[①기념비는 광화문의 비각 내(현재 광화문 기념 비전), ②원각사(협률사, 현재 광화문 새문안 교회 부근) 극장을 세워 가무단 조직해 연습공연]에서 외빈의 행사장으로 사용하고자 준비했다. 그러나 콜레라 창궐과 영친왕(英親王)의 천연두(痘疹)로 미뤄진 고종 즉위 40주년 행사는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 각국 외교사절의 폐현 및 연회장(1층), 국빈급 외국인의 숙소(2층)로 활용하였다. 1905년 미국 대통령의 딸(앨리스 루스벨트)이 방한 당시 머물렀다.
 
ⓔ 1907년 8월 27일 순종 즉위식이 열렸고 고종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오찬 장소로도 사용하였다.
 
ⓕ 1919년 고종 승하 이후 방치되었다가 1933년까지 존재했고(1920년대 철거 주장은 오류) 1935년 아동 유원지를 세웠다.
 
 
ⓖ 이번에 다시 지은 비용은 약 200억 원이 소요되었다.
 
ⓗ 재건한 돈덕전은 대한제국 외교의 중심 공간이란 의미를 살리면서도 내부 공간을 전시실과 도서실, 문화·예술 행사 공간으로 꾸며 활용도를 높였다. 1층에는 다양한 전시를 선보이거나 국제 행사를 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고 돈덕전의 의미를 되새기는 2층의 상설 전시는 "대한 제국의 외교"이다.
 
 
▣외관
 
 
▼ 돈덕전 좌·우측 외관 사진이고 붉은 벽돌과 초록색 창틀 외관부터 이국적이다. 대한제국 시절 영빈관으로, 일제강점기 때 헐렸다가 최근 재건되었다. 바로 앞의 잘린 큰 나무는 회화나무(학자수. 學者樹)이다.
 
 
▼ 존덕전 현판은 당나라 구양순(歐陽詢, 557~641)의 글씨를 집자(集字) 하여 만들었다.
 
▼ 1907년 돈덕전 2층 발코니에 있는 영친왕(좌측 어린이), 순종, 고종(우측)의 모습이다.
돈덕전 발코니는 오얏꽃이 그려진 난간을 두어 황실의 건축임을 보여준다. 돈덕전 외관은 아치형으로 두고, 기둥은 벽돌을 쌓았는데, 두 가지 이상의 색이 있는 벽돌을 교차하여 마름모꼴 문양을 넣었다.
 
 
▼ 재건한 고깔 모양의 지붕
 
 
▣ 내부
 
1907년 순종이 황제 즉위식 때의 돈덕전 평면도가 있는데, 남쪽으로 정문이 있고, 입구의 왼편으로 분수기(噴水器), 서쪽에는 악실(樂室)이 있다. 돈덕전 1층 내부에는 좌측에 휴게소, 식당 우측에 어실, 어탑을 배치하였다.
 
 
▼ 재건한 돈덕전 내부
 
▼ 상설전시장(1층)
 
▼ 옛 어실(御室) 자리로 모형, 출토물을 전시
 
 
 
 
 
▼ 언더우드 초상(2층)
광화문 새문안교회와 연세대를 설립하였다.
 
▼ 아카이브 실(2층)
 
 
★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 연기 및 취소
 
공식 명칭은 "어극 40년 칭경 예식(御極四十年稱慶禮式)'"으로 1902년은 1863년 열한 살에 왕위에 올라 황제로 40년을 맞은 해였다.
 
ⓐ 올가을에 등극 40년 경축 예식을 거행하려고 한다(玆於本年秋間 將行御極四十年稱慶禮式矣). 세부 절차를 의정부와 궁내부, 예식원, 장례원에서 마련하라는 명도 함께 내렸다. -1902년 3월 19일 -
 
ⓑ 10월로 예정된 축하연을 각국 사절이 참석한 국제 행사로 치르려고 했다. 메인 행사인 칭경 40주년 기념식은 10월 18일, 외부 인사 초청 행사인 외진연(外進宴)은 10월 19일, 궁중 내부 행사인 내진연은 10월 22일로 예정됐다.
 
ⓒ 몇 차례 연기됐던 내외 잔치는 12월 3일 경운궁 중화전에서 외진연을 시작으로 성대하게 거행됐다. 관청들은 문을 닫았고 상점들은 태극기를 게양했다. 7일에는 경운궁 관명전에서 내진연이 거행됐다. 잔치는 14일까지 관례에 따라 낮밤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정작 메인 행사인 기념식은 열리지 않았는데 콜레라가 창궐했기 때문이다.(칭경비용이 대략 100만 원으로 1902년 대한 제국 총예산의 13%였다니 정말 허세였고 무모하기 짝이 없다.)
 
ⓓ 1903년 4월 30일로 연기됐던 즉위 기념식 또한 또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4월 10일 일곱째 아들 영친왕(이은. 李垠)이 천연두에 걸린 것이다. 결국 대한제국 정부는 칭경 기념식 행사를 취소하고 각국 정부에 이를 통고했다. 행사를 위해 지방에서 불렀던 임시 혼성여단 부대도 해산하고 원대 복귀했다. -박종인의 땅의 역사-
 
 
▣ 관람 후기
 
고종 즉위 40주년 이벤트로 외교관들 연회장으로 세워진 돈덕전이 사라진 뒤 최근 200억 원을 들여 복원이 아닌 재건을 한 목적이 문화재 복원인지 잘 모르겠다.
 
재건한 돈덕전의 전시물 등 내부 구성이 제대로 된 것인지 묻고 싶다. 특히 부산 엑스포 유치와 돈덕전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구한말 황제, 정치인, 관료들을 현재와 비교하면 안되지만 부국강병해야 하고 나라를 위하고 백성들을 위한 것인지 파악하고 정책을 실행하는 것이 정치인과 관료들의 책무라 생각한다.
 
 
▣ 참고 자료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비(광화문 4거리 ) https://blog.naver.com/jawkoh/220603342908
★원각사(옛 협률사) 극장
『1902년까지 국내에는 연극을 전문적으로 상연할 극장이 없었는데, 1902년 정부에서 고종(高宗) 등극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칭경 예식장(稱慶禮式場)으로 봉상시(奉常寺) 구내(지금의 서대문구 새문안교회 자리)에 로마식 극장을 본떠서 2,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연회 장소를 짓고, 요즘의 극장의 명칭에 해당하는 ‘희대(戱臺)’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이것이 원각사의 전신(前身)이다.
 
그 해 8월부터 칭경 예식을 위한 준비로 [협률사(協律社)]란 관청을 두어 기녀(妓女)들을 뽑아 연희(演戱)를 교습시켰다. 원래 9월 17일로 예정한 칭경 예식이 콜레라의 만연과 영친왕(英親王)의 두진(痘疹)으로 가을로 연기되자, 그동안 가무를 연습했던 사람들은 [협률사]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기녀(妓女) ㆍ 삼패(三牌) ㆍ 공대(廣大) 등을 모집하여 희대에서 가무의 공연과 활동사진의 상영(上映) 등을 계속하였다.
 
출처: 문화재청, 덕수궁 홈피, 민족문화 대백과, 한국학 중앙연구원, 황제의 궁궐, 네이버 지식백과, 구글, 인터넷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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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德壽宮) # 돈덕전
【문화】 문화재·역사·전
• 덕수궁 정관헌(靜觀軒)이 고종의 카페라는 기록은 없다.
• 허세(虛勢)로 지은 덕수궁 돈덕전(惇德殿)을 다시 짓다.
• 덕수궁 석조전(石造殿)은 왜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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