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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이성계의 황산대첩 (2014)
이성계의 황산대첩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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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이성계의 황산대첩 (2014)
이성계 황산대첩 진군로
about 이성계의 황산대첩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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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太祖) 황산 대첩(荒山大捷)
【향토】
(2023.12.26. 22:09) 
◈ 이성계 황산대첩 진군로
우왕6년 (1380년) 8월에 경상도 원수 우인열은 고려 조정에 급히 아뢰기를 ‘나졸의 말에 따르면 왜구들이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덮고 밀려오는데 돛대가 잇달았다 하오니 조저원수를 급히 보내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성계 황산대첩 진군로
 
진포鎭浦서 화포 맞은 왜구 우왕좌왕
 
용담현령龍潭縣令 피원량皮元亮 등 목책 세워 방어
급할수록 쉬어간 지명 ‘새벼리’ 남아
 
 
용담 진안 龍潭 鎭安
 
우왕6년 (1380년) 8월에 경상도 원수 우인열은 고려 조정에 급히 아뢰기를 ‘나졸의 말에 따르면 왜구들이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덮고 밀려오는데 돛대가 잇달았다 하오니 조저원수를 급히 보내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당시 수도행정의 책임자인 라세와 심덕부, 그리고 화통도감의 화약주임인 최무선을 급파하여 전함 1백 척으로 왜구를 쫒아 잡았고 여기에서 쫒긴 왜구들은 다시 해안을 돌아 진포(지금의 금강하구)를 타고 상륙하여 노략질과 방화 살인을 마음대로 자행하였다.
 
 
진포에서의 화약 맛
 
때에 최무선이 진포에 이르러 사상 최초로 화포를 써서 왜구의 배를 불태우니 여기와 화염이 하늘에 넘쳐 왜구들이 거의 다 타 죽고 바다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많았으며 온통 바다는 피로 물결을 이루었다. 이처럼 화포를 맞고 기겁하여 죽음에서 겨우 벗어난 왜구들은 옥주로 달아나서 육지에 있는 왜구와 합세하여 이산, 영동을 불태운 뒤 황간 어모를 분탕질 하고 중모,화령,공성,청리 등을 침범하고 드디어 상주마저도 불사르고 선주까지도 분탕질을 하였다. 당초에 왜구들이 상주에 있을 때에 전라도 원수 지용기 휘하의 배검이 적진으로 가서 적정을 정탐해 올 것을 자청하므로 여러 원수들이 이를 허락한 바 있었다. 그래서 배검은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을 찾았는데 왜구들은 이를 죽이려 들었다. 때에 배검이 말하기를 ‘천하에 사자를 죽이는 나라는 없다. 우리ㅏ라의 여러 장수는 각각 정병을 수없이 많이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이나 너희 무리를 다 죽인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너희들이 한 고을을 택하여 차지하고 살면 어떻겠는가?’ 라고 물었다. 이런 말을 들은 왜구들은 “이것은 우리를 속이는 말이다. 너희 나라에서 참으로 우리를 살려 주려면 왜 우리 배를 빼앗았는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하고 배검에게 술을 주고 철기로 호위하여 보내었다. 째는 왜구들의 만행은 극도에 이르렀다. 두 서 너 살 된 계집아이를 잡아서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깨끗이 씻어 쌀과 술을 차려 놓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데 반드시 풍악을 올렸으며 제사를 마치자 그 쌀을 쥐어 먹고 술을 마신 뒤 그 아이를 불태워 점을 쳤다. 그러자 홀연히 창자루가 꺾어졌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가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반드시 패하고야 말 것이다” 하며 곧 군사를 끌고 상주로 달아났다. 진포에서 화약 맛을 단단히 본 왜구들의 우왕좌왕하는 꼴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허약한 고려 조정은 바람 앞의 등불 바로 그것이었다.
 
 
용담현령의 선방
 
애당초 쌀 도둑질에 목적을 둔 왜구들이었기 때문에 대마도를 출발하여 곡창 호남일대를 노략질하기 위해 진포(금강)에 배를 정박 시켰던 것인데 뜻밖에도 화포공세를 맞게 되자 그들은 일단 허겁지겁 흩어져 우왕좌왕 떠돌며 내륙 깊숙이까지 방황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끝내는 흩어졌던 대오를 재정비하여 이제는 다시 금강의 지류를 타고 목적했던 호남 침공을 감행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리라. 이런 눈치를 챈 고려조정에서도 가뜩이나 긴장하여 서울 방어는 물론 호남침공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지발도를 위시한 저들의 주력부대는 일단 함양으로 지결하여 운봉을 치고 남원을 손아귀에 넣은 뒤 장차 전주나 아니면 광주로 들던지 양단간에 다시 작전을 세워 어떻게든 호남을 차지하려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왜구들은 함양-운봉-남원으로 총하는 길만을 공격로로 택하였던가. 물론 그렇지만은 않았다. 가뜩이나 잔꾀로 뭉친 그들은 이미 정병을 뽑아 김천,영동으로 부터 무주를 거쳐 용담을 넘보기도 하였다. 한편 (용담현고지)에 따르면 ‘이미 상주와 선주를 불 지르기 이전에 옥주(옥천)를 약탈한 왜구는 금강의 지류를 타고 용담을 치려했으나 당시 용담현령 피원량은 염군리 고윤덕 등과 힘을 합쳐 혀의 남쪽 용담천에 돌다리를 놓고 건너편 고남산성에 목책을 세워 이포(지금의 고창)에 쌓아든 세곡을 지키기 위한 방비소로 여섯 군데나 두어 가까스로 쳐 들어온 왜구를 무찔렀다는 기록이 전해져 온다. 이런 기록을 참조해 보더라도 당시 굶주림에 허덕이면 쌀 도둑떼들의 침략이 얼마나 집요하였던가는 더 이상 설명할 나위조차 없는 것이다.
 
 
새벼리의 이유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이미 원수 배극렴 등 아홉 장수를 급파하여 사근산성에서 왜구를 맞아 싸웠으나 번번이 패하자 저들은 운봉까지 쳐들어와 그곳을 불사르고 인월역에 둔치고 있었으며 쫒긴 우리 장수들은 남원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자 다시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로 삼고 찬성사 변안렬을 체찰사로 삼아 부장이 되게 하고 우인열,박임종,홍인계,이성미,이원계를 원수로 삼아 모두 이성계의 절제를 받도록 하여 인월에 둔치고 있는 왜구를 섬멸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크고 자은 왜구의 침입이 있는 이래로 가장 참혹한 아지발도의 만행을 치기위해 출정한 이성계는 비로소 개성을 떠나 장단에 이르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는 기적을 보고 이를 점치도록 하자 점치는 자는 말하기를 승전할 징조라고 하였다. 이같은 경로로 금산을 거쳐 지난날 왜구의 정병이 쳐들어왔다가 물러간 용담의 고남이재를 넘어 급히 인월을 향해 달리던 이성계는 어느 산골에 이르러 마치 앞을 가로막는듯한 좁은 길을 보고 일단 해군을 멈추게 한 뒤 구사를 동원하여 그 길을 넓히고 나서 다시 장수로 떠났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좁은 산골길이 넓혀졌다는 뜻에서 지금까지도 새벼리(일명 새김치 또는 명치: 진안군 정천면 용평리)라는 이름이 저해져 온다는 내용이<동국문헌비고>에 기록되어 있다. 급할수록 정신차려 쉬어간 명장 이성계의 여유가 바로 이 지명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셈이다.
 
 
龍은 태조등극. 닭울음 朝鮮개국 상징
 
군사훈련 적합한 지역 ‘習陣번덕’ 이라 불러
日帝 때 龍鷄를 龍溪로 바꿔 버린 .... 우리 지명 찾아야.
 
 
장수-용계리 長水-龍鷄里
 
개경을 출발한 이성계는 곧장 금산을 거쳐 전라좌도의 산골길을 타고 이른바 용담현감 피원량 등이 앞서 쳐들어온 왜구를 물리쳤다는 고남이재를 넘어 새벼리서 길을 넓히고 왜구가 머물고 있다는 지리산 밑을 하루거리로 남겨둔 장수에 도착, 일단 현의 남쪽 팔공산 및 벌판에 군막을 쳤다. 장막을 치고 난 이성계는 개경에서부터 이곳까지 오는 동안 쌓였던 노독을 풀어주기 위해 군졸들에게 일정한 시간동안 휴식을 취하도록 하는 한편 정병 몇 사람을 척후로 뽑아 적정을 살펴 오도록 하고 얼마쯤 지난 뒤 군졸들을 불러 모아 대략 다음과 같은 훈시를 했다. “장병 여러분! 우리는 오늘 저 머나먼 개경으로부터 무모한 왜구를 치기 위해 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수나라 백만 대군을 무찌르고 만주벌판을 누볐던 광개토대왕의 후예로써 당당한 옛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은 바로 고려의 백성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떤 형편에 처해 있습니까. 우리에게 굴복되어 꼼짝 못하던 저 북방 오랑캐가 되살아나 우리를 괴롭히고 또 두 차례나 정벌 길을 나섰다가 불행히 심한 바닷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여 그대로 되살아난 왜구가 지금은 남해를 돌아 서해 진포에 상륙하여 내륙까지 들어와 갖은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미 저들은 우리 화통도감에서 만든 화포 맛을 보고 허겁지겁 물러갈 퇴로를 잃은 채 각처로 흩어져 우왕좌왕 하다가 이제는 하룻길에 불과한 지리산 밑에 떼를 지어 죽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너나없이 이 석자 되는 칼로 무도한 왜구를 소탕하여 위태로운 고려의 사직을 편안케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 할 수 있도록 힘껏 싸웁시다”. 하면서 옆구리에 찼던 칼을 뽑아 크게 휘두르자 군졸들은 일제히“와” 하는 환호성을 질렀고 잠시 후에 적정을 살피러 갔던 척후가 급히 돌아와 지리산 밑에 진치고 있는 왜구들의 동정을 상세히 알려왔다.
 
 
습진번덕習陳번덕에서의 훈련
 
척후가 알려온 적정의 중요내용은 함양에서 힘써 싸우다가 후퇴한 우리 측 군사는 남원에 있고 왜구들은 운봉까지 와서 불을 지른 뒤 다시 인월引月로 물러나 ‘장차 남원을 거쳐 광주를 향해 진격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상세한 보고를 받은 이성계는 척후가 내민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내심 어떤 결심이 섰는지 일단 이곳에 전열을 재정비하고 왜구를 소탕 할 진법을 익힐 것을 명령했다. 이와 함께 이성계는 첫째 정병을 그대로 척후로 삼아 다시금 적정을 소상히 살펴오도록 엄히 명령하고 둘째 모든 군졸들을 크게 넷으로 갈라 하나는 왜구, 또 하나는 우리 측 토벌군, 그리고 나머지하나는 독안에 든 쥐새끼를 일망타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매복 군을 만들어 이른바 가상훈련을 철저하게 시켰고 또 한 무리는 엉뚱하게 산서너머 어디론가 보냈다. 이성계가 구상한 작전은 곧 군졸을 모아 시킨 훈련은 가상의 왜구를 맞아 우리 측 주력부대가 일단 지형 상 유리한 쪽을 선점토록 하고 마구잡이로 몰려드는 왜구를 유인할 수 있는 대로 유인하여 이를 계속 해서 잡은 후 막판에 들어서는 왜구들이 도망칠만한 도주로에 군사들을 매복시켰다가 갑자기 나타나 이들을 후려치는 방법이었다. 장차 닥칠 왜구와의 만만치 않은 한판 승부를 놓고 언뜻 보기에는 한가롭게 보일 수 있는 이런 훈련을 왜 이성계는 반복해 가며 철저히 시켰을까. 도대체 그 깊은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지극히 명백하다. 즉 이미 척후가 알려온 인월의 지형이나 이 수분치 밑 벌판의 지형은 엇비슷한 산중 속의 분지였기 때문이었으며 뚜렷한 명분으로 다진 장병들의 인화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은 승리를 안겨주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남정북벌로 다져진 백전노장 이성계 자신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연유로 지금까지 장수읍에서 수분치로 향하는 팔공산 아래 벌판을 습진번덕이라 불러오고 있다. 사랑스런 우리 지명이 아닐 수 없다.
 
 
용계리龍鷄里에서의 닭 울음
 
팔공산자락 밑 습진번덕에서 훈련을 마친 군사들은 이제 저 무도한 왜구를 소탕하기위해 전쟁에 있어서는 묵적수행에 걸 맞는 시간의 선택 또한 중요한 일이다. 전쟁이란 본질적으로 피아간의 다툼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서둘러야 된다는 법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늦춘다고 되는 법도 없다. 오직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피아간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그에 걸 맞는 시간에 어느 편이 보다 신속한 대처를 할 수 잇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는 법이다. 왜구들이 장차 광주를 점령하기 위해 며칠 뒤 인월을 떠나기로 했으며 일부선발대가 그에 앞서서 바로 떠날 차비를 하고 잇다는 척후의 보고를 받고 훈련을 명령한 이성계는 곧바로 휘하 장수들을 불러 출정을 앞둔 작전회의를 가졌다. 여기서 한 장수가 “그동안 군졸들은 훈련 속에 너무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급하다 할지라도 이 밤을 쉬도록 한 뒤에 내일 아침에 떠납시다.” 하고 제의를 했다. 이에 성미 급한 또 다른 장수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구의 움직임이 있으려는데 어찌 시간을 다투어 치지 않으려 합니까. 밤을 도와 곧바로 진군해야 합니다.” 라며 맞섰다. “아침도 아닌 새벽에 떠나기로 하자. 우리의 생사는 하늘에 달렸으니 새벽 첫 닭 울음을 신호로 떠나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여 두 의견을 절충시키니 더 이상 별 무리는 없었다. 이렇게 회의를 마치고 막 각자의 장막 속에 들어 군졸들이 잠들려 할 때였다. 난데없이 마을에서 “꼬끼오” 하는 닭 울음소리가 났고 이 소리를 신호삼아 우리군사들은 부랴부랴 서둘러 출정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용계리龍鷄里를 출발해 막 산서면 비행기재까지 약 3km쯤 진군 했을 때 적의 척후병과 맞부딪쳐 그들을 생포하게 된다. 하늘이 도와준 그 닭 울음소리 때문에 이성계 군은 적정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고 화를 면함은 물론 왜구를 소탕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해서 얻어진 이름이 장수 용계리龍鷄里다. 그런데 일제가 슬그머니 골짜기를 뜻하는 용계리龍溪里로 고쳐 놓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해방 반세기를 지내왔다. 여기서 용은 태조등극을 상징하고 닭 울음은 조선개국을 상징하는 말이니 애당초의 용계리龍鷄里로 고쳐 우리의 지명으로 받들어야 할 일이다.
 
 
민초民草들의 忠魂충혼이 고려사직 지탱
 
호남수부 전주全州 점령위해 왜구 호시탐탐
함양전함양咸陽戰서 아군대패... 명장 李成桂이성계급파
 
 
함양咸陽에서의 혈전
 
고려 말 잦은 왜구의 침략은 왕조의 흥망을 가르는 큰 원인 중의 하나였다. 그 중 아지발도의 대거침략은 사직을 흔드는 일대사건이었다. 왜냐하면 함양 사근역에서 아지발도군과 대치했던 우리군사가 대패하고 헐레벌떡 남원까지 쫒긴 가운데 의기양양한 왜구들이 파죽지세로 운봉까지 쳐들어와 분탕질 치다 슬그머니 인월로 물러나 장차 호남침공을 위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호남을 저들에게 빼앗긴다면 고려의 노른자위를 빼앗기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미 영남 일대를 노략질을 할대로 다하고 이제는 호남의 목까지 조르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 처한 허약한 고려 조정은 실로 바람 앞의 등불 바로 그것이었다. 고려조정은 이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그동안 아껴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경계해 오던 명장 이성계를 급파하는 극약처방을 내리게 된다. 떠오르던 별이었던 이성계의 출정은 말하자면 명재경각에 달린 환자를 위해 명의를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조정이 이에 거는 기대는 큰 것이었다. 이와 같은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우선 이성계가 급파되기 전에 함양사근산성에서 벌어졌던 피아간의 피나는 전투, 그 부끄러운 패전의 역사를 반드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혈계血溪 이룬 사근역沙斤驛전투
 
예부터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로서 백제와 신라간의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던 군사요지는 인월 팔랑재였다. 남원은 고래로부터 5소경의 하나여서 남쪽지방의 대도시였고 지리산은 남녘의 동서를 한 몸에 어우르는 큰 산이었기 때문에 이의 중요성은 더욱 컸던 것이 다. 또한 이 지역은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 우리 조정을 항상 귀찮게 해 오고 있었다. 이 지역에 대한 왜구의 침입은 말 할 것도 없이 곡창 호남을 약탈하려는 목적이었고 그런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가급적이면 호남의 수부인 전주를 점령하는 것이 그들의 최대 목표였을 것이었다. 사실 전쟁은 곧 속임수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함양에서 팔랑재를 넘어 일단 운봉고원을 점거한 왜구들이 장차 남원을 거쳐 광주를 치리라고 호언장담하였다는 말은 믿을 수 없고 실은 그 앙큼한 시선의 속셈은 전주를 향해 있었을 것이 틀림없는 일이다. 어찌됐든 이때 당시 삼도원수 배극렴 등 아홉 장수는 함양 사근역(경남 함양군 수동면 소재)에 머물고 있는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이미 사근산성에 진을 치고 있었고 또 한 부대는 냇물 건너 작은 산에 매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왜구는 독안에 든 쥐와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왜구들은 이와 같은 우리 측 작전을 미리 간파해 좌우협공을 피할 방도를 이미 세운 후 그들 대부분의 병력을 숨긴 채 일부병력만을 노출시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며 높은 산성에 자리한 우리 군사를 이리저리 유인하는 꾀를 썼다. 자만에 차 있던 우리 측 군사들은 그러한 왜구들의 유인작전에 속아 무공만을 내세운 채 교만하고 성급하게 군사를 내어 적이 있는 사근역 동쪽 3km쯤까지 바짝 다가가 일망타진하려고 했다.
 
아무리 힘센 사자도 작은 생쥐 한 마리를 잡기위해 온 힘을 들이는 법인데 숫자만 믿고 저들을 얕잡아 본채 ‘때는 이때다’ 하며 “우” 하며 몰려든 우리 측의 군사 행동은 그러한 기본적인 원리마저 망각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전쟁에서 승자가 된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전투의 명분이야 천만번 옳다고 하더라도 전술과 전략에서 지면 그 전쟁의 결과는 뻔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사근역의 전투는 바로 그러한 전투의 기본적인 성격을 여실히 증명해주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협공을 당한 우리 군사는 피아간의 공방에 살상도 컸으나 당시 출전했던 아홉 명 중 원수 박승경과 백업이 전사하고 군사도 오백 명이나 희생되는 대패大敗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도 함양 사근역 앞 냇물을 혈계血溪라 불러오고 있다.
 
 
늙기 전에 씻을 부끄러움
 
역사는 흥망의 점철이며 그 흥망의 뒤에는 성패를 판가름하는 전쟁이 있기 때문에 결국 인류의 역사는 한편 투쟁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창이 찌르면 방패가 막고 피아간 서로 쫒고 쫒기는 중에 성패는 가늠되며 이로 인해 흥망이 바뀌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듭되는 모진 바람 속에 허약할 대로 허약해진 가냘픈 등불과 같은 고려의 사직은 어찌 그리 모질게도 꺼지지 않고 나름대로 흥망의 수를 고스란히 지켜 내었던가. 옛말에 ‘한 장수에게 빛나는 공은 곧 수많은 목숨의 희생일 뿐이다.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는 말이 있다. 수 백 년이 지난 지금 사근역 앞 피 냇물을 우리는 과연 어떤 시각에서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게 하는 구절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할 때 무자비한 섬 도둑떼들의 침략에 맞서 힘껏 싸우다가 죽어 간 이름 모를 우리의 충혼들이야말로 고려의 사직을 건져낸 원천적인 힘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민초들의 투쟁은 역사가 계속 되는 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귀중한 정신적 유산인 것이다. 흔히 역사는 승자에게는 자랑거리이거나 패자에게는 부끄러움이 되기 때문에 되도록 부끄러운 역사를 들춰 말하는 일을 꺼리는 것이 인지상정 이다. 그러나 부끄러운 패망의 역사를 굳이 숨기는 것이 좋은 일만은 아니다. 세계화 시대로 접어든 오늘의 이 시점에서 기필코 일본을 따라 잡아야 한다는 것이 지상의 명제로 되어 잇는 한 오히려 그때의 부끄러웠던 역사를 되짚어 봄으로써 우리를 일깨우는 하나의 좋은 거울로 여기는 지혜도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귀중한 역사의 현장인 사근역 앞의 혈계를 잘 가꾸는 일은 우리에게 맡겨진 의무이자 과제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항상 우리일 수밖에 없다’는 변할 수 없는 이치를 생각하면서 그날 그런 일이 있었던 그 무렵에 이미 기록으로 남겼던 이첨의 사근역 시(동국여지승람제31권)를 보며 역사를 되돌아보는 우리의 정서를 세삼 가다듬을 자세를 찾아야 할 때이다.
 
 
雲峰山下秋風草 (운봉산하추풍초)
운봉산 밑에는 가을바람이 이르고
日淡天寒木葉枯 (일담천한목엽고)
햇살 엷고 추우니 나뭇잎도 마른다
是時島夷敗我軍 (시시도이패아군)
이때에 우리군사 섬 오랑케에 패하여
血戰咸陽原上草 (혈전함양원상초)
피를 함양 언덕 풀에 뿌렸네
兩府元師陣前亡 (양부원사방전망)
두 원수가 진 앞에서 죽었으니
士卒儆軀難自保 (토졸경구난자보)
하찮은 군졸이야 말 할 수 없었겠지
悲歌數聲大夫溟 (비애수성대부명)
슬픈 피리 두어 곡에 눈물지으며
誓雪國恥及未老 (서설국치이내노)
늙기 전에 부끄러움 씻기를 맹세하네
 
 
용계리 닭 울음소리 신호로 출정.... 대승大勝
 
이성계 군李成桂 軍 함미산성 쌓아 왜구일망타진
아지발도 전주全州 침공 루트 막아 위기모면
 
 
진기리陳基里의 야간전투夜間戰鬪
 
함양 사근역 혈투에서 패전의 쓰라림을 맛본 우리 군사들은 가까스로 남원으로 물러앉아 개경으로부터의 구원병을 애타게 기다리며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한편 삼도도원수로 급파된 이성계는 일단 장수 습진번덕에서 군사를 조련 한 뒤 용계리의 닭울음소리를 신호로 때 아닌 밤중에 출정을 하게 된다. 물론 이 출정은 이미 왜구의 동정을 샅샅이 살펴온 척후의 보고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출정 길을 택하는 일은 이성계 자신이 극비리에 지시를 했다.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이미 용계리의 닭 울음으로 감쪽같이 왜구를 치러 나설 때를 얻었지만 이제 왜구 소탕의 첫발을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가 가장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재빠른 선택 진기리陳基里
 
장수에서 인월로 가는 지름길은 번암을 거쳐 가는 길뿐이다. 그러나 이 길은 왜구들의 동정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면 모르나 “장차 남원을 거쳐 광주로 향하리라”며 “자세히는 몰라도 이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척후병의 보고를 세밀히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단지 급한 마음에 저들을 빨리 소탕해 버릴 요량으로 지름길만을 택하여 가는 것은 아무래도 왜구의 음흉한 전략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으로 자칫 만용이 될 수도 있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여러 정황을 분석하는 한 편 저들의 호언장담에서 그 실마리를 풀고자 했다. 과연 왜구들이 장차 남원을 거쳐 광주로 향할 것인가. 그런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저들이 호언장담 하는 이면에는 진군의 목표가 다른데 잇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 이르자 이성계는 갑자기 눈에 별이 쏟아지며 가슴이 확 트이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당초 저들이 쳐들어온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곡창 호남을 샅샅이 누비며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식량을 약탈해 가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미 함양에서 당당 해 질대로 당당해진 기세를 슬그머니 접어 남원에서 광주로 갈 리가 없는 것 아닌가. 기운이 차면 누구나 교만해지고 기운이 빠지면 누구나 인색한 법이며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은 것이 사람마다 지닌 속성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교만 해 질대로 교만해진 왜구들은 남원을 놓아두고 인월에서 곧장 전주로 향해 갈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성계는 패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측 군사들을 남원에 그대로 남겨둔 채 자신이 이끄는 군사들로 하여금 곧장 전주를 향해 떠날 차비를 갖추게 하면서 교만한 왜구를 일망타진 할 작전을 세웠다. 즉 인월에서 전주로 가는 지름길은 남원 산동 목동에서 고개를 넘어 보절을 통과해야 하는데 보절로 접어들면 일단 산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어서 이곳이야말로 쳐들어오는 왜구를 맞아 싸우기에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요새였다. 이성계는 이미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고 장수에서부터 일부 군사를 이곳으로 보내 함미산성을 쌓고 진지를 구축하는 등 모든 준비를 해 놓은 상태여서 이제는 다만 주력부대가 선발대와 합류해 왜구를 소탕하면 되는 것이다. 이때에 쌓았던 함미산성의 흔적이 지금까지 지명과 함께 남아 있고 진을 쳤던 터도 진기리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진기리는 원래 진기리陳基里로 불렸던 것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진기리眞基里로 바꿔 버렸다. 그러니 조선 종자를 왜종자로 바꾼 이른바 창씨개명만을 욕할게 아니지 않는가. 아니나 다를까 산서 고개를 넘어 부랴부랴 보절 진기리에 도착하자 마침 왜구들이 횃불을 밝힌 채 산동의 목동 고개를 삼삼오오 떼를 지어 넘어오는 것이 포착되었다.
 
 
밤에 잃은 나팔 구라치求螺峙
 
아뿔사.! 병법에 ‘동을 치려는 듯 하면서 실은 서를 친다’ 말 그대로 분명 잔 꽤 많은 왜구들이 전주 침공을 감행 하기 앞서서 꽤 많은 척후가 미리 길을 정탐하기 위해 어둠을 타고 잠임 해 들어온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이성계는 내심회심의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예견 했던 일이라도 자신의 판단이 맞아 떨어졌을 때의 느끼는 희열이란 마치 수도자가 많은 고행 끝에 어느 날 문득 진리를 깨달았을 때에 얻는 법열과도 다를 바 없으리라. 더욱이 다른 길을 타고 산동의 목동고개 넘어 까지 귀신도 모르게 우리 군사를 보내 잠자코 숨어 있다가 왜구들이 다 넘어왔다 싶으면 나팔을 불라고 단단히 일러둔 일까지 있었다는 사실까지를 포함시켜 보면 당시이성계가 느꼈던 기쁨이 어느 정도였을 것이라는 점은 상상 되는 바 크다.아무것도 모른 채 지껄이며 점점 왜구들이 앞으로 다가오자 난데없이 이성계는 큰소리로 명령하기를 “횃불을 밝히라”! 하고 소리쳤고 횃불잡이 군사들은 명령대로 미리 준비했던 횃불을 일제히 밝히니 당황한 왜구들은 기겁하여 반사적으로 오던 길로 너나없이 몸을 돌려 헐레벌떡 줄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왜구들이 작살 맞은 뱀이 달아나듯 전후좌우 살필 틈도 없이 횃불을 든 채 한참 달아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저 고개 마루에서 ‘뛰’- 하며 나팔소리가 났다. 그러나 정신없이 달아나는 왜구들인지라 어느 곳에서 나는 소리인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우왕좌왕하며 달아나는 꼴이 실로 가히 볼만한 눈요기꺼리였다. 마치 독안에 든 쥐가 힘써 빠져나갈 구멍을 애써 찾는 것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진풍경이 횃불 아래서 연출되는 동안 대부분의 왜구들은 맞아 죽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왜구는 겨우 몇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여기서 살아 돌아간 왜구들은 횃불에 비친 우리 군사들의 진지를 보고 그대로 아지발도에게 알려 끝내 왜구의 전주 침공 루트를 포기 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우리 군사들은 사생결단하고 달아나는 왜구를 쫒다 지녔던 소라나팔을 잃게 되는데 날이 밝아서야 다시 찾게 되었다. 이런 일로 인해 산동의 목동에서 보절의 진기리로 넘어오는 고개이름을 잃었던 나팔을 다시 찾은 곳이라는 뜻에서 지금까지 구라치求螺峙라 불러오고 있다.
 
 
제왕봉帝王峰서 전승기원 천제天祭올려
 
이성계李成桂 겁먹은 군졸 호통... 운봉진군명령
길할미 나타나 왜구 소탕책 낱낱이 알려줘
 
 
제왕봉帝王峰에서의 천제天祭
 
전주침공을 위해 구라치를 넘어오던 왜구의 척후를 한밤중부터 새벽까지 진기리에서 박살낸 이성계는 몇 명 살아남지 않은 적의 줄행랑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곧장 발길을 남원으로 옮겼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면 이번 전투를 위해 개경으로부터 천리를 행군해 오는 동안 왜구에게 당한 우리백성의 시체가 가는 곳마다 즐비하였던 그 참혹한 광경을 쉽사리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원에 도착한 이성계는 일단 우리군사의 환영을 받고 난 뒤에 그동안 왜구와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놓고 장차 왜구 소탕을 위한 작전에 들어가 의견을 청취하였는데 그들 대부분이 “왜구들은 운봉황산의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진을 치고 있기로 공격에 어려움이 많으니 다시 남원으로 진출하기를 기다렸다가 치는 것이 옳다” 고 임을 모았다. 일찍이 사근 내 전투에서 크게 패한 장수들은 잔뜩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의견들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이성계는 호통치듯 말하기를 왜구토벌을 목적으로 천리 길을 달려온 군사가 왜구를 찾아 공격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거늘 왜구를 보고서도 공격하지 않는다면 어찌 옳은 일인가. 여러 장수들은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각자 맡은바 임무에 충실하여 한 치의 착오 없이 작전에 임할 수 있도록 하시오. 내일 아침 우리는 여원치를 넘어 운봉으로 진군 하겠소 라고 하였다.
 
 
길할미를 만난 여원치女院峙
 
아침이 밝아오자 이성계는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승전을 기원하는 맹세를 겸한 조찬을 서둘러 끝내고 왜구가 진치고 있는 황산을 향해 부랴부랴 잔뜩 안개 낀 아침을 헤치며 행군의 길을 떠났다. 운봉은 실로 호남의 지붕이라 불러오는 높은 고원이며 남원에서 운봉으로 가자면 반드시 평지에서 고원으로 접어드는 고개가 하나 있는데 이 고개를 지금까지 여원치라 불러오고 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이성계가 거의 고개 정상에 이르렀을 무렵 갑자기 짙은 안개가 자욱하여 시야를 심히 가리더니 비몽사몽간에 어떤 할미가 나타나 말하기를 “지금 급한 대로 곧장 운봉으로 발길을 옮기지 말고 반드시 저산으로 올라가 일주일 동안 천제님께 치성을 드린 뒤에 진군하시오. 그래야만 하늘의 도움을 얻어 이길 수 있소. 그리고 텅 빈 사창社倉에 진을 치지 말고 그 아래 후미진 곳에 숨기고 약간 시창을 비켜 그 옆에 군사들을 먹일 솥을 걸고 곧장 산봉우리에 올라 황산 골짜기에 숨어 있는 왜놈들의 동정을 잘 살펴가며 잇는 힘을 다해 싸우시오, 그래야만 저들을 물리칠 지리를 얻게 될 것이오. 또 아무리 힘센 군사라 할지라도 민심을 얻어야 이길 수 있고 더욱이 교만하고 무자비한 왜놈들을 맞상대하여 쳐 부시는 데는 반드시 백성의 인심을 얻는 일이 첫째이니 부디 추호도 민폐를 끼치지 말고 정당하게 왜구 소탕할 일만 차근차근하시오. 그래야 하늘이 도와서도 이기고 산신이 돌봐서도 이길 것이오” 라고 말을 마치자 어디론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자욱했던 안개도 활짝 걷히고 드디어 눈부시게 밝은 아침 햇살을 대할 수 있었다. 그럼 이 노파는 누구인가? 전하는바에 따르면 이 노파는 본디 함양에 살았던 미모 단정한 여인이었는데 왜장 아지발도가 그녀를 희롱삼아 젖가슴에 손을 대니 칼로 자신의 젖가슴을 도려내어 자결한 원귀의 화신이었다고 일러오고 있다. 즉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왜구에게 당한 사무치는 원한을 갚기 위해 그녀는 때에 길할미가 되어 새벽안개 속에 싸인 채 이성계 앞에 나타나 왜구소탕의 비결을 낱낱이 알려준 것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지금까지 남원에서 운봉을 넘는 고개를 여원치女院峙라 부르게 되었고 노파가 가르쳐준 대로 왜구와 맞서 싸울 때에 군사들을 먹일 솥을 걸었던 곳을 정봉鼎峰, 말을 매었던 곳을 차마동車馬洞이라는지명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七日間 천제天祭 모신 제왕봉帝王峰
 
여원치 정상에 올라가 일단 진을 치고 북쪽을 바라보니 약 3킬로 지점에 마치 투구를 쓴 모양과 같은 괴이한 산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예로부터 고남산高南山이라 불러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잠시 숨을 돌리고 난 뒤에 이성계는 그 산으로 올라가 곧장 동서 두 군데에 각각 천하대장군 한 쌍을 마을 어귀에 세우도로 하여 온갖 잡귀를 몰아내었으니 이때에 잠시 군사를 머물렀던 여원치 옆의 후미진 곳을 지금도 병막동兵幕洞이라 불러오고 있다. 그리고 해발 850미터에 달하는 고남산 정상에 올라 석축으로 천제단을 쌓도록 하고 인근 마을 한 복판 바위틈에서 천연으로 솟아나는 정화수를 떠다가 7일 동안 밤낮으로 정성껏 치성을 드리며 지리산 신을 비롯한 팔도명산의 여러 산신까지도 불러 모아 전승을 비는 기원제를 정성껏 올렸다. 이로부터 고남산을 제왕봉帝王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또 밤에는 수천개비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워 불과 오륙 킬로미터 전방에 있는 왜구들에게 위압을 가했으며 한편 척후를 적진으로 밀파시켜 왜구들의 일동일정을 낱낱이 살펴오도록 하고 황산 서북쪽에 군사를 보내 고개 마루에 크고 작은 돌들을 쌓아 아차하면 석전을 할 계획도 세우고 휘하의 중군을 비밀히 움직여 인월에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좁은 계곡에 매복토록 하는 등 철저한 대비를 차근차근 진행시켰기로 중군리中軍里라는 이름이 그대로 전해져 오고 있다.
 
그러나 결코 전투는 예상 할 수 없었다. 이성계 휘하의 군사는 고려군과 여진족을 합쳐 편성한 병력이 천 여 명에 불과한데 비하여 왜구의 숫자는 거의 열배에 가까운 대병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심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천제를 마친 바로 그날 밤 이성계는 또 이상한 꿈을 꾸었다. 내용인즉 즉 황산 서북쪽 고개 마루에 쌓아둔 돌들이 울면서 말하기를 “장군님! 무엇을 망설이고 계십니까? 왜구에게 희롱당하여 왼쪽 젖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한 여인이 길할미로 나타나 장군님께 칠일칠성을 말하지 않습니까. 더 이상 지체하지 마옵시고 내일 당장 출전하소서” 하였다. 그 이튿날 긴 밤에 있었던 꿈을 기이하게 여긴 이성계는 새벽녘에 참모들을 집합시켜 당일의 일진을 보았다. 어느 때와 같이 이두란을 시켜 백보 앞에 투구를 놓아두고 유엽전3개를 뽑아 쏘아보니 백발백중이었다. 매우 만족스런 결과였다. 그래 제왕봉 천제단에서 장차 진을 칠 곳을 바라보니 마치 비단으로 길게 다리를 놓은 듯하여 정봉과 제왕봉 사이를 장교동長橋洞이라 불렀는데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이때에 훤한 앞길을 예견한 이성계가 스스로가 지어 부른 이름이었다.
 
 
풍부한 지략. 용기로 전투승리
 
인풍引風...광풍 업은 화살에 왜구 秋風落葉
인월引月... 달빛 끌어내 승전 이끈 황산黃山기적
 
 
황산黃山에서의 격전
 
이성계가 제왕봉에서 칠일동안 천제를 마치고 난 뒤 군사를 이끌고 나와 진을 친 곳은 황산줄기의 나지막한 정봉이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황산의 남쪽은 제법 넓은 냇물이 흘러 나가는 좁은 계곡이 있고 북쪽으로는 아영의 사창과 인풍리를 지나 함양으로 통하는 울도치가 보인다. 그리고 사창리 마을 앞 해발 오백 미터 앞에는 환산에서 뻗어 내린 아담스런 봉우리가 솟아있는데 이 봉우리 정상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왜구들이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 한 눈 안에 그대로 들어와 적정을 훤히 관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동쪽으로는 풍천이 흐르고 그 양 옆에는 논밭이 펼쳐있는데 산 아래 남쪽으로는 낮은 평지와 늪지대가 있으며 이 편지와 왜구의 진지와의 사이에는 낮은 야산 줄기가 황산에서 뻗어내려 지리산을 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세를 유심히 살펴본 이성계는 틀림없이 왜구들이 이 애산과 험준한 산속에 매복하고 있으면서 우리군사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여기서 이성계는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 뭔가를 떠올렸다. 그러나 마냥 왜구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왜구들의 동정을 정확히 살피기 위해서라도 저들을 향해 싸움을 걸기로 결단을 내렸다.
 
 
바람 불어준 곳 인풍리引風里
 
그러나 아무리 상황이 급한 상황이더라도 왜구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인 우리군사인지라 무모하게 병력을 투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이성계는 우선 몇 명의 장수들로 하여금 일부 군사를 이끌고 풍천이 흐르는 왼편의 평지를 향해 슬그머니 시도해 보도록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우리 군사들은 반격해 오는 왜구에게 번번이 싸움다운 싸움을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채 퇴각해 왔고 이런 진퇴를 거듭하는 동안 해는 벌써 정오를 반나절도 훨씬 넘었다. 더구나 바람마저 때 아닌 동풍이 불어 닥쳐 우리 군사들이 싸우기에 심히 불리해짐으로써 야산에 매복한 왜구만 움직일 뿐 막상 황산아래 숨어 있는 왜구의 주력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정봉에 진지를 구축한 것이 잘못이었던가? 그렇다면 앞서 여원치에서 길할미가 일러준 작전은 오히려 저들의 간사한 속임수였던가? 이런저런 생각 끝에 급기야 이성계는 하늘을 우러러 제발 하늘이시여! 저 팔랑치에서 불어대는 바람을 돌이켜 이제우리의 화살이 힘차게 왜구의 가슴을 찌를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이성계가 이처럼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난 잠시 후 일진광풍이 팔랑치에서 힘차게 불어오더니 그 바람이 아영의 야산을 흔들어 놓을 듯 몰아치고 난 뒤에 급기야 방향을 바꾸어 왜구들이 매복해 잇는 곳으로 불어 닥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런 광경을 본 이성계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우측 험한 길을 택해 매복하고 있는 왜구를 유인한 뒤 곧장 북을 울려 쏟아져 나오는 적을 향해 총공격을 명령했다. 이처럼 이성계군의 총 공세가 시작되자 그동안 매복해 움직이지 않던 왜구들이 물밀 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성계의 추측을 훨씬 뛰어넘은 엄청난 숫자였다. 이성계는 이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대우전 20발과 유엽전 50발을 쏘아 일단 쏟아져 나오는 왜구들을 주춤거리게 하면서 마침내 휘몰아치는 바람을 등지고 비 오듯 화살을 퍼부어댔다. 이렇게 되자 광풍에 힘을 얻은 화살은 왜구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면서 우리 군사 앞에 그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갔다. 그러나 왜구들도 만만치 않았다. 물러서지 않고 세 차례나 기습을 감행 해왔다. 이처럼 왜구들의 기습은 집요한 것이었다. 급기야 벌어진 황산천의 대혈투 피아간에 얽혀 진흙에 뒤범벅되어 벌인 이 격전에서 끝내 일어선 자는 정작 우리 군사들뿐이었다. 말 그대로 대승이었다. 아! 중과부적으로 어렵게만 여겨왔던 이번의 싸움이었는데 천사에 따른 지세의 힘이 이처럼 클 줄이야...... 남정북벌로 산전수전 다 겪었던 백전노장 이성계로서도 처음 실감한 일이었다. 인풍리引風里, 남원시 동면 황산아래 자리한 이 마을은 그래서 당시전투에서 우리 군에 절대 유리한 바람을 불어준 곳이라는 뜻에서 인풍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달을 끌어온 곳 인월리引月里
 
인풍리 싸움에서 대패한 왜구들이 다시산위로 물러가 웅거한 채 요새만 굳게 지키고 있자. 이성계는 우리 군사들을 풀어 요해처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고 휘하 이대중 등 군사를 독려하여 왜구들을 사정없이 올려 쳤으나 사력을 다해 대항하는 왜구에게 오히려 쫒기어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 실로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어려운 싸움이었다. 그 까닭은 이미 해는 서산에 기울어 날마저 어두워진데다 어떤 기발한 새 작전도 떠오르니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이성계는 다시 ‘천제님이시어! 어서 동천에 달이 뜰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라며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기도를 했다. 쇠뿔은 단김에 빼야한다는 말처럼 승리의 여세를 몰아 왜구를 섬멸해야 할 판에 날이 저물어 버린다는 일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이성계의 간절한 기도는 하늘에 닿았던가. 대낮같이 밝은 달이 두둥실 떠오르는 게 아닌가. 하늘은 섬 도둑떼 보다는 우리의 고려를 우리의 이성계를 도운 것이다. 이성계는 동녘에서 덩그렇게 달이 돋자 군사를 정돈하고 진격나팔을 불어 총 돌격을 명하니 우리 군사들은 일시에 산 정상으로 기어올라 적진으로 치달았다. 피아간 백병전이 치열해지자 이성계는 아군을 진두지휘 하면서 진격을 독려했다. 이때 적장 하나가 창을 겨눈 채 이성계의 뒤로 달려들고 있었다. 마침 이를 본 장수 이두란이 큰소리로 “영공은 뒤를 살피시오” 하며 큰 소리를 치며 말을 달렸으나 이성계는 알아듣지 못했다. 미쳐 손을 쓸 틈도 없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명궁 이두란은 급히 활을 들어 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적장의 목을 명중시켰다. 이처럼 위급한 상황에서도 이성계는 의연히 싸움에 몰두하였다. 말이 화살에 맞아 쓰러지면 다시 말을 갈아타기를 여러 번, 급기야는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왜구가 쏜 화살이 이성계의 왼쪽 다리에 꽂히기도 했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고 박힌 화살을 뽑아 팽개치며 더욱 세차게 왜구들을 쳐나갔다.
 
숫자상으로도 월등히 우세한 왜구들이 이성계를 두어 겹으로 포위하여 위기일발의 어려움에 처했으니 이성계는 휘하 기병들과 저들의 포위망을 뚫고 그 자리에서 적 여덟 명을 베어 죽이니 왜구들도 더 이상 함부로 달려들지 못했다. 이와 같은 이성계의 기개에도 불구하고 우리 장수들 역시 지쳐 있기는 왜구와 다름없어 승패는 여전히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성계는 풍부한 지략과 용기로 용장다운 기백을 높이 떨치면서 결국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나갔다. 인월은 이처럼 때에 달이 올라 우리의 작전을 도왔던 관계로 전투가 이만큼이락도 이뤄질 수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때부터 달이 올라왔던 황산의 동쪽을 인월리引月里라 불러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이성계의 승리로 고려사직보전
 
피로 넘친 ‘황청黃川 피바위’ 말없이 역사의 현장 지켜
제왕봉帝王峰과 권포리權布里 ... 대첩 기려 정도전이 명명
 
 
황산에서의 대첩
 
인풍리와 인월리에서 각각 바람과 달을 끌어내 수많은 왜구를 물리치면서 승전의 기반을 마련한 이성계였으나 막상 황산의 일대접전을 앞두고는 승리를 예측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저들이 하늘처럼 믿는 대장 아지발도가 아직 건재한데다 우리 측 군사들도 많이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 기필코 이겨야 하는 왜구와의 싸움을 목전에 둔 황산벌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정적이 흐르면서 병사들의 기장은 높아가건만 우리 측이나 왜구측은 피아간에 먼저 싸움을 걸지 않는다. 이때 천지를 뒤흔들 듯한 이성계의 포효가 무거운 정적을 깼다. “겁먹은 자들은 물러가라. 나는 싸우다가 적에 죽겠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자는 나를 따르라”며 이성계가 비호같이 말을 몰아 적진을 향해 돌진해 나가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까지 겁을 먹고 있던 우리 측 군사들은 이성계의 이러한 결연한 의지에 감동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용기백배해 죽을힘을 다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왜구의 사기도 만만치는 않았다. 나이 겨우 십 오 륙세 되는 소년장수 아지발도의 창을 막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아지발도阿只拔都 잡은 피 바위
 
백전노장 이성계는 그동안 갖가지 전투를 통해 얻은 경험에 비추어서 이번 황산 전투는 분명히 이길 것으로 확신했다. 따라서 그는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아지발도를 사로잡아 잘 달래면 좋은 인재로 써 먹을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이런 이성계의 내심을 들은 장수 이두란은 “아지발도를 생포하려면 우리 군사의 희생이 너무 클 것이므로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 며 그냥 죽일 것을 주장했다. 이성계는 이두란의 이러한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전신을 투구와 갑옷으로 감싼 아지발도는 날래고 용맹해 활을 쏘아 죽일 수 있는 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성계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두란에게 “그러면 내가 화살로 투구를 쏠 터이니 투구가 땅에 떨어지거든 그대가 곧 저놈의 목을 쏘라” 고 말하고는 곧바로 말을 몰아 내달리며 아지발도의 투구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이성계의 화살은 아지발도의 투구 꼭대기 한 가운데 끈이 떨어지면서 투구가 기우뚱하자 놀란 그는 투구를 황급히 고쳐 쓰려고 했다. 이두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비발도의 목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이두란의 화살은 아비발도의 목을 정확히 뚫었다. 펄펄 날던 아지발도는 입에서 폭포수처럼 시뻘건 피를 쏟으면서 백마에서 곤두박질 쳐 순식간에 시체로 변했다. 눈 깜작할 사이에 우두머리를 잃은 왜구들은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성계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북을 울려 총 공격을 명령했다. 사기충천한 우리 군사들은 북소리를 천둥처럼 울리면서 우르르 달아나는 왜구들은 닥치는 대로 쳐 나갔다. 마치 수만 마리의 황소 떼가 울어대는 것처럼 처참히 울며 달아나는 왜구들, 실로 교만할 대로 교만했던 저들의 침략이 청산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죽은 왜구는 우리 군사의 거의 열배나 되었고 덕둔산과 지리산 쪽으로 달아나 살아난 왜구는 겨우 칠십 명에 불과했다. 시체는 산더미처럼 쌓였고 피는 황천을 가득 차게 흘러 칠일간이나 물을 마실 수 없었다. 천육 백 여필의 말과 산더미만큼의 병기와 수급을 노획했다. 생포된 왜장들은 잔뜩 겁을 먹은 채 이성계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부딪치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대첩, 이것이 바로 고려의 사직을 보전함과 동시에 교만한 왜구를 통쾌하게 섬멸한 이성계의 황산대첩이었다. 이 치열한 전투 당시 강처럼 피가 넘쳐흘렀던 황천 가장자리 넓은 바위는 지금도 벌건 피를 머금은 채 ‘피바위’라는 이름을 달고 말없이 그 자리에 박혀 있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제왕봉帝王封 아래의 권포리權布里
 
황산벌 싸움에서 도원수 이성계를 제외하고 공이 가장 큰 사람은 외방출신인 이두란이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외방출신의 처명에 대하여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처명은 이성계가 1369년 12월 요동을 정벌할 때 사로잡은 장수로 처형하지 않고 살려 주었다. 이두란은 이성계의 관대한 처분에 깊이 감사한 나머지 그는 항상 이성계의 곁을 떠나지 않고 충성을 다하였는데 이번 싸움에서도 목숨을 바쳐 싸움으로써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아지발도 또한 용감무쌍한 소년장수였다. 그는 용기와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나 나이가 어린 탓에 두려움을 몰랐다.
 
아지발도에게는 출정하기 전부터 사랑하는 애첩이 있었다. 에지가 뛰어났던 그의 애첩은 아지발도의 다리를 붙잡고 말리는 애첩의 간청을 물리치고 끝내 출정 길에 나섰다. 이에 애첩은 통곡을 하면서“ 정 이번 출정을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면 저의 간곡한 소원을 들어 주옵소서, 부디 고려에 가시거든 제발 황산이라는 곳에 진을 치지 마옵소서, 장군님께서 크게 불리한 곳입니다.”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이러한 애첩의 부탁을 성가시게 여긴 아지발도는 장수들이 보는 앞에서 칼을 뽑아 애첩의 목을 쳐 죽이고 자신만만하게 고려 출정을 단행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전투의 승리는 어떻게 이뤄진 것인가. 바로 한 전투를 이끄는 주장의 교만과 자중에서 그 성패의 갈림길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여원치에서 만난 길할미의 지시를 겸허하게 받아들인 이성계는 승리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고 애첩의 지극한 간청을 잊은 아지발도는 스스로 이역만리의 객귀가 되었던 셈이다.
 
정도전은 이 대첩의 원인을 제천봉의 천제로 상징하여 제천봉을 태조봉太祖峰이라 불렀고 이곳의 기운을 얻어 널리 왕권을 잡을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봉 아래 마을 이름도 권포리權布里라 불러 지금도 그 이름이 그대로 불려오고 있다. 또 이성계는 황산대첩을 마친 그 이듬해에 황산에 들려 당시의 대첩은 자신의 노력만이 아니라 생사고락을 함께한 8원수 4종사라 하여 그 이름을 바위에 새겼다. 이를 어휘각이라 하여 황산대첩비지 서쪽 모퉁이에 전해져 오는데 다만 일제강점기 말에 일본인들이 뭉개버려 그 정확한 명단을 해독할 길이 없음이 아쉽다.
 
 
황산대첩,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로 예정된 승리
 
부절리斧節里 논공행상 관여 안 해... 이성계李成桂 인품 돋보여
왕정리王亭里 전쟁 중에 한가한 승려보고 抑佛정책 다짐
동충리東忠里 의병지원 가장 많았던 민초民草의 충혼忠魂서린 곳
 
남원
 
승리로 이끈 세 가지 조건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서는 예부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본적인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으로 일러져 오고 있다.
 
첫째 때가 맞아야 한다는 天時요, 둘째는 피아간에 있어서 보다 작전수행에 유리한 지세를 재빨리 차지해야 한다는 地利며, 셋째는 핀 주먹보다는 꽉쥔 주먹이 힘을 지니듯 일치단결된 군사력이어야 한다는 人和가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 측의 열배나 되는 엄청난 왜구를 통쾌하게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남정북벌을 통해 탁월한 지략과 용기를 쌓은 백전노장이성계의 뛰어난 전술 감각이 이 세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출 수 잇게 했다는 점에서 그 승리의 가치를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용계리에서 울어준 초저녁 닭의 울음을 신호로 전주로 통하는 길을 구라치에서 막은 슬기와 격전에 앞서 서두르지 않고 고남산에 들러 하늘에 승전을 비는 제사를 올림으로서 얻은 단결력 그리고 또 “험한 고지에 웅거한 왜구를 치기에는 벅차니 그들이 그곳을 빠져 나오기를 기다려 치자”는 배극렴의 제언을 묵살하고 오히려 그곳의 지형지물을 잘 활용하면 이미 왜구는 독안에 든 쥐와 다름없다는 판단아래 바람을 잡고 달빛을 끌었던 전술전략 등이 모두 위의 세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준 것들이었다.
 
 
위엄 과시한 大基里 말무덤
 
그런데도 이성계의 용기와 지략을 미처 몰랐던 휘하의 군사들은 처음부터 겁을 잔뜩 집어먹고 출정을 몹시 두려워했던 나머지 전투에 능동적인 대처를 하지 않았던 사실 또한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이때마다 이성계는 탁월한 용인술을 발휘하여 휘하 군사들을 덕으로 감화시키기도 했고 또한 덕화만으로 다스릴 수 없는 경우에는 자신의 무애를 과시하여 장수로서의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 그 하나의 예가 산동면 대기리에 있는 말 무덤 이야기다. 즉 이성계가 제왕봉에서 출정에 앞서 활을 쏘았는데 그의 말이 화살을 따라 잡지 못하자 이성계는 자신의 말을 단칼에 목을 베어 죽였다. 그러나 말을 죽인 뒤에야 화살이 뒤늦게 날아와 떨어졌다. 그러자 이성계는 말을 죽인 것을 뉘우치고 후히 장사를 지내주었다. 또 전쟁터에서의 민폐는 곧 군사의 교만이며 군사의 교만은 군사의 교만은 자칫 패전의 주요 원인이 된다. 때문에 이성계는 이를 극히 경계하여 추호도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엄히 군율로 단속했다. 이에 대한 기록이 <東國戰爭史>권3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행군에서 군사들은 장막의 기둥을 모두 대나무로 바꿨는데 때에 이성계는 군사들에게“ 대는 나무보다 가벼워 널리 운반하기 편하다. 그러나 역시 민가에서 심은 것이지 우리가 가지고 온 물건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의 묵은 물건을 잃지 않고 가져가면 족하다.” 하니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 탄복하여 모두 대나무를 쓰지 않았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처럼 이성계는 때와 장소, 또는 상황에 따라 적절하고도 정확한 판단으로 군사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대동단결 다짐한 斧節里
 
흔히 명산은 병장과 같고 대천은 정병과 같다는 말도 있다. 이 말대로 끊임없는 외침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래도 우리네 땅을 묵묵히 우리네 땅으로 고스란히 지켜준 것은 바로 말없는 푸른 산이요, 유유히 흐르는 냇물이었다는 점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전투가 바로 황산대첩이다. 왜냐하면 지리산이 크게 한쪽을 막아 주었고 그 줄기에서 뻗은 크고 작은 모습들이 겁 없이 달려든 왜구를 중간 중간에서 그대로 막고 있었기 때문에 용장 이성계는 용기백배하여 일단백의 힘으로 그 속에 섬 도둑떼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반드시 지나쳐서는 안 될 특기할만한 사실은 왜장 이지발도가 죽자 완전히 사기를 잃은 왜구들이 우왕좌왕하며 아비규환의 형상으로 허겁지겁 살 길을 찾아 각자 도망하는 모양을 본 이성계가 군사들에게 큰 소리로 “싸움을 그쳐라, 예로부터 싸울 뜻을 잃고 각자 도생의 길을 찾아 도망치는 적을 모조리 죽이는 일은 마땅히 취할 때에는 매섭게 몰아쳤으나 승리를 얻은 후 논공행 않고 조정의 지분에 맡겼다는 점이다.
이는 곧 이성계의 인품을 증명해 주는 대목이다. 남원으로의 개선 도중 여원치를 넘을 무렵 앞서 전투에서 겁에 질려 겁에 질려 뒷전에서 목숨을 아꼈던 군사들이 자청해 이성계에게 처벌해 줄 것을 원했는데도 그는 이를 모두 용서해 주었었다. 여원치를 막 넘은 재 밑에 있는 이 마을은 그래서 전쟁 뒤에는 의례히 장수가 행하여야 할 논공행상을 거두었던 곳, 곧 이성계가 斧節, 또는 義仗을 거둔 곳이라 하여 지금까지 斧節里라는 지명이 그대로 전해진다.
 
 
동충리東忠里와 왕정리王亭里, 만복사萬福寺
 
전쟁이란 그 원인이나 명분이 어떻건 간에 피아간의 다툼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양측 모두의 손실일 뿐이며 그 중 가장 큰 뭐니 해도 인명을 잃는 일이다. 때문에 일장공성만고골一將功成萬枯骨이라는 옛말처럼 전혀 인명의 손실이 없는 승리는 찾아 볼 수 없다. 즉 용감한 군졸들의 충정 없이 우연히 장군에게 안겨지는 영광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그런 전쟁의 특성에 비춰볼 때 격전에서 살아남은 군졸을 이끌고 개선하는 장수로서는 당연히 살아남은 군졸들에게 너그러울 수밖에 없는데 그런 너그러움이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까닭은 이미 승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의로운 영령들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추모의 정이 마음깊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쩌면 개선의 기쁨은 곧 죽은 이들에 대한 슬픔보다 결코 더 크다고는 말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황산대첩을 가능케 한 충의로운 희생은 구체적으로 어느 누구였던가? 물론 사근역 전투에서 희생단한 박수경이나 배언의 죽음도 그 중 하나였고 그보다는 이진에서 사로잡아 자신의 그림자가 된 장수 이두란의 희생이 더욱 큰 것이었으나 겁에 질려 주저했던 배극렴 휘하의 군졸보다는 남원에서 단지 의를 위해 따라 나선 이름 모를 군졸들이 희생이 승전의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역사적인 이유로 해서 황산전투 당시 가장 많은 청년들이 의병으로 자원했던 곳을 東忠里, 개선의 기쁨과 희생된 충의로운 영령들에 대한 추모의 정을 동시에 느끼며 전투에서 얻은 상처와 피곤을 풀었던 곳을 王亭里라 이름 지어 지금까지 불러오고 있다. 다만 이성계가 머물렀던 남원 왕정동엔 만복가라는 아흔 아홉 칸의 절이 있었는데 죽음의 순간을 넘나들며 싸우는 군사들과는 달리 승려들은 그저 한가로이 지내고 있었다.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구국의 병장 이성계가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저 같은 불교에서는 더 이상 호국정신은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 그것뿐이었다. 조선개국 후 이워졌던 억불숭유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대목이다.
조선 태조(太祖) 황산 대첩(荒山大捷)
【향토】 이성계의 황산대첩 (2014)
• 이성계 황산대첩 진군로
• 이성계 회군로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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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