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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고고학으로 본 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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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고고학으로 본 임실
◈ Ⅲ. 삼국시대 백제와 가야문화의 공존
삼국시대 때 임실군의 가장 큰 특징은 백제와 가야문화가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임실군을 중심으로 한 섬진강유역에서는 가야토기가 일색을 이루지 못하고 백제토기와 섞여 있거나 지역색이 강한 가야토기의 경우도 대가야토기와 소가야토기가 동일 지역에 혼재된 조합상을 보인다.
목   차
[숨기기]
Ⅲ. 삼국시대 백제와 가야문화의 공존
 
 
삼국시대 때 임실군의 가장 큰 특징은 백제와 가야문화가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임실군을 중심으로 한 섬진강유역에서는 가야토기가 일색을 이루지 못하고 백제토기와 섞여 있거나 지역색이 강한 가야토기의 경우도 대가야토기와 소가야토기가 동일 지역에 혼재된 조합상을 보인다. 그리하여 임실군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토착세력집단의 실체와 그 발전과정이 상세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삼국시대 문화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매우 미진한 것과 관련이 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실읍 일대에 가야계 소국인 상기문上己汶이 있었던 것으로 본 견해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
 
 
임실읍 금성리 고분군과 임실천
 
금성리 출토 토기류 모음
 
목긴항아리
 
 
1972년 4월 임실읍 금성리 화성마을 남동쪽 산에서 나무를 심는 사방공사를 실시하던 중 수습된 뚜껑 있는 목긴항아리有蓋長頸壺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당시 3기의 고분이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유구가 워낙 심하게 훼손되어 고분의 구조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지만 구덩식竪穴式1 돌덧널무덤石槨墓로 추정된다. 돌덧널石槨은 대체로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깬돌을 가지고 수직으로 쌓았는데, 그 길이는 모두 300cm를 넘지 않았다. 유물은 토기류와 철기류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목긴항아리有蓋長頸壺를 제외하면 대부분 백제토기가 주종을 이룬다. 철기류는 쇠큰칼鐵製大刀와 뱀모양칼蛇曲劍, 쇠낫鐵鎌, 쇠창鐵鉾, 쇠도끼鐵斧, 쇠도끼鑄造鐵斧, 마구류와 살포鐵鏟 등이 조합상을 보였다. 임실 도인리 1호분에서 고리자루칼環頭大刀가 출토되어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큰칼, 뱀모양 칼
 
쇠창, 쇠낫, 살포
 
 
고리자루칼
 
 
임실 금성리에서 나온 가야계 목긴항아리를 5세기 후반 대가야와 기문 사이의 교역을 하였다는 증거물로 제시하고 당시 대가야가 교역로를 통하여 기문己汶으로 침공해 들어간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목긴항아리를 제외하면 항아리와 입큰 목긴항아리, 굽다리접시가 함께 수습되었는데, 이 토기들은 모두 백제계 혹은 백제토기이다. 토기류의 조합상에서 백제토기가 유물의 절대량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소량의 가야토기가 포함되어 있다. 임실 석두리에서는 백제토기와 가야토기가 섞인 상태로 출토되었으며, 하나의 토기에 백제토기와 가야토기의 특징이 함께 표현된 입큰 목긴항아리도 신평면에서 나왔다. 청웅면 구고리에서는 세발토기三足土器와 항아리短頸壺, 병甁 등 백제토기가 일색을 이루었다. 섬진강유역의 강한 지역성으로 백제와 가야의 역학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추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 임실 금성리 고분군

 
섬진강 상류지역인 관촌면 금성리 화성마을 동남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전주에서 남원으로 연결되는 17번 국도와 전라선이 통과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그리고 백두대간의 큰 고갯길인 육십령과 치재를 넘어 온 여러 갈래의 내륙 교통로가 하나로 합쳐지는 곳이다. 1972년 철기류가 발견매장문화재로 신고되어, 그 존재가 알려진 곳으로 모두 3기의 고분은 수혈식 석곽묘로 추정된다. 봉토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매장주체부인 석곽은 지하에 마련되었다. 벽석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할석을 가지고 수직으로 쌓았다. 주곽과 부곽으로 구성된 A호는 주곽의 길이 280cm, 폭 72cm, 깊이 90cm이며, 주곽의 남쪽 중앙에 설치된 부곽은 길이 45cm, 폭 48cm, 깊이 70cm이다.
 
 
금성리 제철유적
 
금성리 제철유적 지표조사 기념 촬영
 
 
유물은 토기류와 철기류로 구분된다. 토기류는 단경호·광구장경호·장경호·고배 등이 있다. 유개장경호는 동체부의 상단부가 긴박하게 축약되어 경부를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는 거의 원통형을 이루는 경부가 수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광구장경호는 구연부의 직경이 동체부의 최대 복경보다 큰 이질적인 기형으로 가야보다 백제토기의 속성을 강하게 담고 있다. 또한 원형투창 고배는 소형토기로서 종래에 한강 혹은 금강유역에서 출토된 백제계 고배와 흡사한 기형을 띠고 있다. 철기류는 철제대도·철겸·철부·철모·마구류 등이 조합상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철제대도 및 축소모형 철기류가 다량으로 출토된 점에서 주목된다.
 
이 유적은 경부에 밀집파상문이 시문된 유개장경호가 출토되어, 이를 근거로 섬진강 유역에 지역적인 기반을 두고 발전했던 가야세력의 존재를 암시해 주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유개장경호는 5세기 후반 고령과 임실, 즉 대가야와 기문 사이의 교역을 했다는 증거물로 보고, 당시 대가야가 내륙 교역로를 통하여 임실군 일대인 기문으로 침공해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유적의 연대는 5세기부터 6세기까지 견해가 다양하지만, 그 중심연대는 5세기 말엽을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다.
 
 
성수면 도인리 유적 항공사진
 
항아리, 목긴항아리
 
고리자루칼
 
 
 

2. 임실 신안리 고분군

 
용요산과 백이산 사이에 자리한 임실읍 신안리는 사방이 산줄기들로 가로막혀 자연분지를 이룬다. 동시에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의 주요 고개를 선상으로 연결해 주는 동서방향 교통로가 통과하는 교통의 중심지를 이룬다. 수혈식 석곽묘와 횡혈식 석실분이 그 입지를 달리하며 두 개의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우선 석곽묘는 금동마을을 감싸는 구릉지의 정상부와 북쪽 기슭을 제외한 모든 경사면에 자리한다. 특히 남서쪽으로 뻗은 구릉지의 정상부에 한층 밀집된 분포상을 보였는데, 금동마을에서 동쪽으로 100m 남짓 떨어진 남쪽 경사면에는 등고선과 평행하게 장축방향을 둔 1기의 석곽묘가 절단면에 노출되어 있다. 다음으로 석실분은 정잔마을에서 북쪽으로 200m 가량 떨어진 지류의 남쪽 기슭에 자리한다. 유물은 격자문과 승석문이 타날된 원삼국시대 토기편과 함께 회청색 경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임실읍 신안리 고분군
 
청웅면 옥전리 고분군
 
 
 

3. 청웅 석두리 고분군

 
임실군 청웅면은 백제의 돌평현과 통일신라시대 때 구고현이 설치된 행정치소이다. 그리고 동쪽의 백이산, 북쪽의 백연산, 남쪽의 두만산 등의 고봉들이 사방에 우뚝 솟은 자연분지이다. 호남정맥의 가는정이로 연결되는 동서방향 교통로가 통과하는 교통의 중심지를 이룬다. 청웅면 소재지 남쪽에 두만산에서 한 갈래의 지류가 소재지까지 뻗어 내려 구릉지가 발달해 있는데, 그 지류의 북쪽 가장자리에 성치산이 있다. 이 산의 북쪽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슭에 수혈식 석곽묘와 횡혈식 석실분이 분포되어 있는데, 후자는 남쪽 기슭에 입지를 두었다. 그리고 석두리와 인접된 옥전리에서는 석곽묘, 백연리·구고리·향교리 등의 남쪽 기슭에서는 석곽묘와 석실분이 동일 지역에서 조사되었다. 성치산의 남쪽 기슭과 구릉지의 정상부에서 수습된 유물은, 격자문과 승석문이 시문된 적갈색 연질토기편부터 회청색 경질토기편까지 다양한 조합상을 보인다.
 
청웅면 석두리 고분군
 
청웅면 석두리 고분군
 
석두리 1호분
 
석두리 2호분
 
석두리 출토 굽다리접시
 
병, 접시
 
 
 

4. 운암 운정리 고분군

 
섬진강댐 수몰지구로 임실군 운암면 운정리 장자골에 해당된다. 호남정맥의 주요 관문인 가는정이와 팽나무정이가 있는 곳으로, 섬진강의 본류가 U자형으로 휘감아 도는 구릉지 정상부와 남쪽 기슭에 모두 10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우선 남쪽 기슭에는 모든 지역에 걸쳐 고분이 조밀하게 분포된 양상을 보였는데, 동쪽 구역에는 횡혈식 석실분 일색, 서쪽 구역에는 수혈식 석곽묘와 횡혈식 석실분이 혼재되어 있다. 이 고분들은 모두 남쪽 경사면과 평행하게 남북으로 장축방향을 두었으며, 토광은 생토면을 파내어 마련하고 그 안에 벽석의 상단부가 지하에 묻히도록 축조되었다. 다음으로 구릉지의 정상에는 5기의 지석묘와 장방형의 석곽이 노출되어 있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100m 남짓 떨어진 서쪽 경사면에도 수혈식 석곽묘가 노출되어 있다. 유물은 토기편과 석기류가 수습되었는데, 전자는 빗살무늬토기편, 민무늬토기편, 표면에 격자문과 승석문이 타날된 원삼국시대 토기편, 회청색 경질토기편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운암면 운정리 고분군
 
 
 

5. 오수 주천리 고분군

 
오수면 주천리 주천마을 북동쪽 산줄기에 자리하고 있다. 즉, 임실읍과 오수면, 삼계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응봉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남쪽 기슭에 고분이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주천리 북쪽에 위치한 봉천리와 오암리, 동쪽의 오산리 일원에도 적지 않은 고분이 산재되어 있다. 오래 전 도굴의 피해를 입고 대부분 흙 속에 파 묻혀 고분의 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경부에 밀집파상문이 시문된 회청색 경질토기편이 얼마간 수습되어, 가야계 수혈식 석곽묘가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오수면 주천리 고분군
 
 
 

6. 지사 영천리 고분군

 
지사면 영천리 고분군
 
지사면은 팔공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북쪽과 서쪽으로 휘감고 있으며, 여기서 남쪽으로 뻗은 지류들이 모여 구릉지가 발달한 곳이다. 장수군 산서면과 경계를 이루면서 줄곧 남서쪽으로 흐르는 오수천을 따라 충적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금남호남정맥의 자고개와 개치, 고돔치, 마치 등의 고개를 넘어 금강 혹은 남강유역으로 연결되는 여러 갈래의 내륙교통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 계촌마을과 사촌마을 사이의 구릉지에 고분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지사면 금평리·안하리·관기리·원산리 일대에도 고분이 산재되어 있다. 오래 전 도굴과 흙 속에 파묻히거나 낙엽으로 덮여 고분의 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수혈식 석곽묘와 횡혈식 석실분이 혼재된 것으로 판단된다. 지사면 금평리에서 민묘구역을 조성하는 과정에 영산강유역의 표지적인 유물로 알려진 유공광구소호가 나왔다.
 
그런데 『양직공도梁職貢圖』2 백제국사조百濟國使條에 상기문이 백제 변방의 소국 가운데 하나로 열거된 점3에서 그 독자성4이 입증된다. 그렇다면 상기문이 6세기 초엽까지 가야계 소국으로 발전하였던 역사적인 사실을 증명해 주는 고고학 자료를 찾는다면, 그것은 가야계 중대형 고총高塚의 존재이다. 그러나 섬진강유역에서는 마한과 관련된 재지계 토기류만 부장되고, 현지 주민들이 말무덤으로 불리는 30여 기의 분구묘만 조사되었다. 특히 상기문上己汶이 있었던 곳으로 비정된 전북 임실군 임실읍과 장수군 번암면5 일대에서는 가야계 중대형 고총이 포함된 분묘유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가야계 최고급 위세폼威勢品6도 출토되지 않았다.
 
양직공도
 
 
더욱이 섬진강 중류지역에서 마한의 지배자 혹은 지배층 무덤으로 추정되는 말무덤7이 발견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달리 몰무덤이라 불리는 말무덤은, 봉분의 직경이 대체로 15m 내외이다. 현지에서 말무덤이라 불리는 것은, 남원시 대강면 방산리에서 7기 내외의 말무덤, 순창군 적성면 고원리에서 7기 내외, 대강면 방산리에서 섬진강을 건너 서남쪽으로 6km 가량 떨어진 전남 곡성군 옥과면 주산리에서 7기 내외의 몰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이 말무덤들은 1970년대 경지정리사업을 실시하는 과정에 모두 유실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운봉고원에 속한 남원시 운봉읍 장교리에 7기 내외의 몰무덤이 있었는데, 현재 3기의 몰무덤만 보존되어 있다. 이 말(몰)무덤들은 대체로 충적지 및 구릉지에 그 입지를 두어 전북 서부지역 마한의 분구묘와 상통한다.
 
2011년 금지면 입암리 말무덤에 대한 학술발굴을 통해 그 성격이 마한의 분구묘墳丘墓로 밝혀졌다. 본래 7기 내외의 말무덤이 두 줄로 정연하게 분포되어 있었는데, 1970년대 밭 개간과 농로를 개설하는 과정에 대부분 유실되고 1기의 말무덤만 남아있었다.
 
그런데 20년 이상 못자리용 흙 채취8와 분구의 남쪽에 민묘구역의 조성으로 분구가 심하게 훼손되었다. 분구의 남쪽은 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1m 이상 깊이로 골짜기가 만들어져 유구의 남쪽 부분이 심하게 유실되었다. 더욱이 유구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북서쪽 구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9 유구의 속성이 상세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그런데 말무덤은 분구의 주변에 도랑溝을 두른 마한의 분구묘로 밝혀졌다. 분구는 명갈색과 암갈색 점토로 쌓았는데, 유구의 남쪽이 이미 유실되어 그 평면형태가 어떤지 파악되지 않았다. 이 일대의 생토층을 거의 U자형으로 파내어 마련된 주구周溝는 그 남동쪽 부분이 끊긴 것으로 보인다. 분구 내에서 조사된 3기의 매장주체부 중 2기의 토광묘는 후대에 조영된 것으로 밝혀졌다. 1998년 분구 내 토광묘에서 항아리와 입큰 목긴항아리가 발견매장문화제로 신고되었고, 그 부근에서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남원시 금지면 입암리 말무덤은 유적의 입지, 유구와 출토유물의 속성이 전북의 서부지역에서 조사된 마한의 분구묘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가야토기와 백제토기의 특징이 확인되지 않은 항아리와 입큰 목긴항아리의 속성을 근거로 그 조영시기가 5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비정되었다. 금지면 입암리는 임실군 성수면 월평리 산성 못지않게 여러 갈래의 내륙교통로가 교차10하는 마한의 거점지역11으로 요천을 사이에 두고 송동면 세전리와 입접되어 있다. 임실 도인리 20호 집자리 출토품인 새모양 토기鳥形土器로 상징되는 섬진강유역에 기반을 둔 마한의 지배층 분묘유적으로 추정된다.
 
흔히 가야계 고총高塚이란 봉토의 평면형태가 호석에 의해 원형 혹은 타원형의 분명한 분묘단위를 갖추고 있는 대형고분을 말한다. 가야의 지배자 무덤으로 위세품 및 대규모 성곽과 함께 가야계 소국의 존재를 암시해 주는 고고학적 증거이다.
 
 
금지면 입암리 말무덤
 
말무덤 발굴 후 모습
 
항아리
 
목긴항아리
 
 
아직까지 임실군에서는 가야계 중대형 고총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운봉고원과 진안고원 속 장수군에는 가야계 중대형 고총이 밀집 분포되어 있다. 금남호남정맥을 자연경계로 임실군과 인접된 진안고원 내 장수군에는 장계분지와 장수분지, 대성고원 일대에 200여 기의 가야계 중대형 고총이 남아있다.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산줄기 사이로 수계상으로는 금강의 최상류에 속한다.
 
백두대간 산줄기 동쪽에 위치한 운봉고원에도 봉토의 직경이 20m 내외 되는 100여 기의 가야계 중대형 고총이 자리하고 있다. 운봉고원의 아영분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풍천을 사이에 두고 남원 월산리에 10여 기와 이곳에서 동쪽으로 1.5km 가량 떨어진 남원 두락리에도 40여 기의 가야계 중대형 고총이 무리지어 있다.
 
남원 두락리에는 봉토의 직경이 30m 이상 되는 초대형급 가야계 중대형 고총도 산자락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어, 당시 운봉고원에 기반을 둔 가야세력12이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융성하였다는 발전상도 입증되었다. 그리고 40여 기의 가야계 중대형 고총이 한 곳에 무리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운봉고원 속 상기문己汶國이 상당 기간 동안 존속하였음을 방증해 주었다.
 
2010년 임실군 청웅면 석두리에서 석곽의 평면형태가 세장방형으로 가야후기 고분의 속성이 담긴 가야계 수혈식 석곽묘가 조사되어 적지 않은 관심을 끌었다. 임실 구고리 산성에서 남서쪽으로 길게 뻗어 내린 산자락 정상부로 2기의 봉토분封土墳이 조사되었다.
 
오래 전 도굴로 유물의 출토량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가야토기와 백제토기가 섞인 상태로 토기류와 철기류, 장신구류가 나왔다. 특히 1호분 내 3호 석곽에서 10여 점의 못이 출토되어, 섬진강유역 가야묘제의 지역성이 확인되었다. 이를 근거로 임실군 일대로 가야의 진출 혹은 가야의 존재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현재로서는 가야와 관련된 더 이상의 구체적인 논의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의 정치적인 불안기13를 제외하면 섬진강유역에 대한 주도권이 백제에 의해 줄곧 행사되고 있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는 섬진강유역에서 가야계 중대형 고총의 존재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과 무령왕武寧王의 인구추쇄책人口推刷策이다.
 
백제 무령왕은 피폐해진 농가경제를 회복하고 농업노동력의 확보를 위해 두 가지의 경제정책을 펼쳤다. 하나는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농토에서 이탈하여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다시 농토에 안착시키는 유식자귀농책游食者歸農策이며, 다른 하나는 가야지역으로 도망간 백성을 본래의 고향으로 돌려보내던 인구추쇄책人口推刷策이다.
 
백제의 인구추쇄책은 인구파악과 농업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가야지역으로 도망간 백성들을 대상으로 절관한지 3~4대가 지난자들까지도 쇄환대상에 포함시켜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다. 당시 가야지역으로 도망간 백제 백성의 쇄환지역으로 임실군을 중심으로 한 섬진강유역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꼽힌다.
 
그 이유는 임실 금성리·석두리에서 가야토기와 백제토기가 섞여있는 상황에서 시기상으로도 백제의 인구추쇄책이 추진된 시점14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를 기반으로 백제는 6세기 전반기 이른 시기 임나사현任那四縣과 기문己汶, 대사帶沙를 두고 급기야 가야계 소국과 갈등을 초래한다.
 
삼국시대 때 임실군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토착세력집단이 어떤 과정을 거쳐 백제에 복속되었는지, 언제부터 임실군이 백제의 영토에 편입되었는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백제 때 설치된 행정치소와 관련된 기록을 통해 임실군이 백제에 정치적으로 편입된 것만은 분명하다.
 
백제 때 임실군 임실읍에 임실군任實郡, 청웅면에 돌평현突坪縣, 임실군 지사면과 장수군 산서면 일대에 거사물현居斯勿縣이 설치되었다. 이를 증명해 주는 백제계 분묘유적이 임실읍 두곡리와 청웅면 구고리·석두리, 지사면 원산리에서 발견되었다. 그런가 하면 백제의 행정치소와 관련이 없는 운암면 운정리와 신평면 대리·호암리15에 굴식 돌방무덤이 폭 넓게 분포되어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섬진강유역에 속한 남원시와 순창군, 곡성군에서는 마한의 지배자 무덤으로 추정되는 말무덤이 발견되었지만, 임실군에서는 그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다. 임실 도인리 20호 집자리에서 마한의 상징적인 새모양 토기가 출토됨으로써 임실군이 마한의 영역에 속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임실 석두리에서 마한부터 백제까지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임실군이 한성기 때 백제에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므로 6세기 초엽에 이르러 백제가 섬진강유역으로 진출하였다든지, 6세기 전반기 이른 시기까지 문헌에 등장하는 가야계 소국인 기문이 임실군을 비롯한 섬진강유역에 있었다는 주장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임실군 일대에 간선교통로16가 통과하거나 교차하는 교통의 중심지에 백제의 행정치소가 설치된 점에서 백제와의 관련성을 더욱 높였다. 그러다가 백제의 웅진 천도와 그에 따른 백제의 정치적인 불안으로 인해 백제가 정치적인 혼란에 빠지면서 갑자기 대내외적인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자, 임실군 일대가 한 동안 가야의 영역에 편입된 것이 아닌가 싶다. 임실 석두리·도인리에서 가야후기의 수혈식 석곽묘에서 가야 후기의 가야토기가 출토됨으로써 그 가능성을 암시해 주었다. 또한 임실군의 산성 및 봉수의 분포양상을 통해서도 가야와의 관련성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신덕면 신덕리 제철유적
 
상 신덕리 제철유적
 
하 제철유적 슬레그
 
청웅면 구고리 출토 병, 항아리
 
구고리 출토 세발토기
 
성수면 도인리 출토 항아리
【향토】 고고학으로 본 임실
• Ⅱ. 선사시대 때 거점지역으로 발돋움
• Ⅲ. 삼국시대 백제와 가야문화의 공존
• Ⅳ. 동진강 하구 가야포와 임실 월평리 산성
(2024.01.0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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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