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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거창 양민 학살 사건(居昌良民虐殺事件)
거창 양민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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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양민 학살 사건 (居昌良民虐殺事件)
6·25 전쟁이한창이던 1951년 2월 10, 11일 빨치산 토벌 작전을 벌이던국군이 경상 남도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600여 명의 주민을 학살한 사건.
▣ 지식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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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양민 학살 사건 (居昌良民虐殺事件) 거창군 19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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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과사전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10, 11일 빨치산 토벌 작전을 벌이던 국군이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600여 명의 주민을 학살한 사건.
 
당시 6·25 전쟁은 중공군의 개입 으로 한국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4 후퇴가 시작되고 한국 정부가 부산으로 두번째 피난길을 떠난 가운데 지리산 · 백운산 등지에 있던 빨치산들의 공비 활동도 거세졌다. 이에 국군은 전력이 둘로 나뉘는 것을 막기 위해 빨치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이게 된다.
 
학살 사건은 2월 5일 새벽 경찰 지서가 공비들에게 습격 당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계엄 사령부는 보병 제11사단 9연대를 보내, 공비를 소탕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때 거창군 지역을 맡고 있던 부대는 소령 한동석이 지휘하는 제3대대였다.
 
그러나 토벌 작전에도 불구하고 빨치산의 유격전으로 인해 변변한 전적을 올리지 못하자 국군은 그 총구를 힘없는 주민들에게 돌렸다. 9연대장 오익균의 명령을 받은 3대대장 한동석은 2월 10일 대현·와룡·내탄· 중유 등 6개 마을 주민들이 공비와 짜고 국군을 따돌렸다고 몰아 내탄 마을 골짜기에서 마을 사람 136명을 기관총 사격으로 죽였다.
 
다음 날인 11일에는 더 잔인한 학살이 이어졌다. 국군은 주민 1,000여 명을 신원 국민 학교로 모이라고 한 후, 그 중 경찰· 군인· 공무원의 가족을 가려 낸 다음 남은 500여 명을 박산 계곡에 몰아넣고 집중 사격해 죽였다.
 
사건은 그 며칠 후 한 사병이 사건의 내용과 학살이 벌어졌을 때의 사진, 사망자들의 명단을 국회에 보내 옴으로써 세상에 알려졌으며, 그 때 부산에 피난해 있던 국회는 결국 국회 조사단을 사건 현장에 보내 조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계엄 사령관이었던 대령 김종원은 조사단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미리 거창군 남상면과 신원면 사이 계곡에 공비로 변장한 군인과 경찰을 숨겨 놓고, 조사단에게 사격을 함으로써 사건이 밝혀지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국회는 재조사를 실시하였으며, 5월 8일에는 양민 학살 사건과 국회 조사 방해 사건의 내용이 공개되어, 내무부 · 법무부· 국방부 등 3부 장관이 사임하였다.
 
학살 사건의 책임자인 오익균과 한동석은 1951년 12월 12일 군법 재판 에 회부되어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고, 국회 조사 방해 사건을 꾸민 김종원에게는 3년 징역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이들은 이승만 정권의 특별 조치로 풀려났으며, 특히 김종원은 경찰 간부로 특채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사건의 뒷수습이 흐지부지되자,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11일 학살 사건 유가족 70명이 사건이 있던 당시의 신원면 면장 박영보를 불에 태워 죽이는 보복 사건이 다시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국회는 다시 조사를 시작하였으며, 검찰의 재수사로 모든 진상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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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10일, 거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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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