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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금인(琴軔)
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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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인 (琴軔)
[1510 ~ 1593] 본관이 봉화이고 자(字)가 백임(伯任)이며 호는 송계(松溪), 또는 송암(松巖)이다. 고려 학사 금의(琴儀)의 후손이며, 군위현감 금계(琴啓)의 2남인 금원수(琴元壽)의 장남이다.
▣ 지식지도
◈ 요약정보
금인 (琴軔) [1510 ~ 1593] 1540년(중종 35)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 3위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을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낙향 사후에 구만서원(龜灣書院)에 배향 스승 : 이황
◈ 지식지도
금인 (琴軔) 기호 학파 문묘 영남 학파 이기이원론 이황 박선장 남몽오 권호신 기대승 김성일 류성룡 이언적 이이 이덕홍 정탁 조목 황준량 구만서원 도산십이곡 오륜가 퇴계전서 도산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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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신 (2) 백과 남몽오 (2) 백과 박선장 (2) 백과
▣ 백과사전
[1510 ~ 1593] 본관이 봉화이고 자(字)가 백임(伯任)이며 호는 송계(松溪), 또는 송암(松巖)이다. 고려 학사 금의(琴儀)의 후손이며, 군위현감 금계(琴啓)의 2남인 금원수(琴元壽)의 장남이다.
 
1540년(중종 35)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 3위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을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등극한 명종대의 정치적 문란상을 보고 올바른 도가 아니라고 여겨 낙향하였다. 순흥 도촌(桃村 : 현 봉화읍 도촌리)으로 내려와 후학을 기르며 독서와 사색으로 유연자적하여 지역 사림의 신망을 받았다.낙향하여 자리 잡은 곳은 소나무 우거진 사이로 시내가 흐르는 곳이었는데, 이에 따라 호를 송계(松溪) 혹은 송암(松巖)이라고 하였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으며, 모든 행동이 단정하여 절도가 있어 집안사람들도 나태한 모습으로 있는 것을 보지 못했을 정도이다. 또한 마을 일로 시시비비를 가릴 때도 개인적인 판단을 자제하고 항상 공론에 의해 일을 처리하였다.한 번은 정언 벼슬에 있던 백암(栢巖) 김륵(金玏:1540~1616)과 향리의 사람을 천거하는 일로 논쟁이 붙은 적이 있는데, 조정의 일은 정언이 가타부타하는 것이 옳지만, 향리의 일은 우리들 소관이라며 정색을 하고 비판을 하였다.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1587~1667)가 이를 두고 “송계선생이 백암선생에게 한 말은 가히 유사한 일의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고 하였을 정도로 사리가 엄격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봉화군의 북쪽에 있는 응인산(膺仁山)으로 피난을 갔다가 향년 83세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사후에 선비로서의 삶이 평가되어 진사 남몽오(南夢鰲), 승지 박선장(朴善長), 참봉 권호신(權虎臣)과 함께 구만서원(龜灣書院)에 배향됨으로써 줄곧 지역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할아버지인 금계(琴啓:1439~1497)는 군위 현감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높았으며, 군위공파(軍威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또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금원수(琴元壽:1485~1570)이고,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장령(掌令) 김영수(金永銖)의 딸이다.아버지 금원수는 퇴계 이황과 교분이 있었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음사(蔭仕 :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덕으로 벼슬을 하는 것)로 벼슬을 시작하여 여러 관직을 거친 후 수직(壽職 : 해마다 정월에 80세 이상의 관리와 90세 이상의 백성에게 은전으로 내리던 벼슬)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동생 금보와 특히 우애가 깊었다. 금보는 공부하다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스승인 이황에게 묻곤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동생과 함께 하나하나 풀어나가 박학하였다. 또 해서(楷書)를 잘 써서 경서를 한 자 한 자 손수 써가면서 공부를 하였으며, 이런 공력에 힘입어 동생과 함께 이른바 ‘금문필법(琴門筆法)’의 명성을 이루었다. 특히 동생인 금보는 당시 이숙량(李叔樑)·오수영(吳守盈)과 더불어 퇴계 문인 가운데 삼절(三絶)이라 불릴 정도로 성취가 높았는데, 퇴계묘비(退溪墓碑)·도산신판(陶山神版) 등은 그의 작품이다.
 
영천(榮川 : 지금의 영주)의 도지촌(道智村)에 사는 우계이씨(羽溪李氏) 이장(李樟)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처가에서 살았는데, 장인이 사위의 사람됨을 알아보고는 만날 때면 매번 의관을 정돈하고 맞았다고 전한다. 부인과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이름이 금복고 (琴復古)로 생원을 지냈으며, 딸은 각각 권자명(權慈明)과 김원개(金元凱)에게 시집을 갔다
 
15세 무렵에 학문에 뜻을 둔 후 늙을 때까지 문장이라면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1540년(중종 35) 과거급제 후 성균관에 유학을 하였다. 그러나 명종대의 정치적 문란상을 보고 낙향하였다. 후학을 기르며 독서와 사색으로 유연자적하여 지역 사림의 신망을 받았다
 
마을 선비들과 더불어 성현의 학문을 닦고 익히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배운 것을 가르치는 데에도 성심을 다하였다. 사람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실천을 앞세운 뒤에 글을 배우도록 하였다. 그 결과 사냥과 술, 잡기를 일삼던 마을의 풍속을 일신시켜 인재가 군에서 가장 융성하게 만들었다.
 
문집인 『송계일고』는 현손인 금성(琴筬)이 1618년(광해군 10)에 모아 간행하였다. 가장(家狀)은 금성이 썼으며, 실록은 동암(東巖) 권성오(權省吾), 발문은 유암(楡巖) 배유장(裵幼章) 그리고 묘갈명은 대사헌을 지낸 조은(釣隱) 이세택(李世澤)이 각각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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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