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 강조의 정변(康兆의 政變)
강조의 정변
자 료 실
▶ 지식지도
▶ 원문/전문 (없음)
▶ 시민 참여 콘텐츠 (없음)
▶ 관련 동영상 (없음)
about 강조의 정변


[광고]
[100 세트 한정] 행운의 2달러 스타노트+네잎클로버 컬렉션 35% 19,800원 12,800원
강조의 정변 (康兆의 政變)
고려 목종 때 강조가 일으킨 정변.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고 현종을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강조의 정변 (康兆의 政變) 강동 6주 1003년 1009년 고려 발해 1010년 1018년 1019년 993년 강조 목종 헌애왕태후 강감찬 고려 경종 서희 고려 성종 성종 소손녕 양규 고려 현종 거란의 침입 귀주 대첩
▣ 참조 카달로그
◈ 참조 키워드
1009년 (2) 백과 고려 경종 (2) 백과 고려 현종 (2) 백과 목종 (2) 백과
▣ 백과사전
고려 목종강조가 일으킨 정변.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고 현종을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역사적 배경

고려 왕실에서는 근친 사이에 결혼이 널리 행해졌다. 목종의 아버지 경종은 두 왕후를 두었는데, 목종의 생모인 헌애왕후(獻哀王后)와 헌정왕후(獻貞王后)로서, 이들은 모두 태조의 아들인 욱(旭 : 戴宗이라 추존)의 딸로 경종과는 모두 사촌남매 간이었다.
 
그리고 경종의 숙부이며 태조의 아들인 욱(郁 : 安宗으로 추존)은 경종이 죽은 뒤 그의 왕후이며 질녀가 되는 헌정왕후를 사간(私姦)해 대량원군 순(大良院君詢)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뒤의 현종이다. 한편, 목종의 생모인 헌애왕후는 경종이 죽은 뒤 천추궁(千秋宮)에 거처하였다.
 
이때 외척 김치양(金致陽)이 가짜 중이 되어 천추궁을 출입하면서 추한 소문이 나돌자, 성종이 김치양을 장배(杖配 : 장을 치고 유배를 보냄)하였다. 성종이 죽고 목종이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헌애왕후가 섭정을 하여 스스로를 천추태후라 하였다. 그리고 김치양을 불러들여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을 삼고, 뒤이어 우복야겸삼사사(右僕射兼三司事)에 임명하는 등, 권세를 맡겨 백관의 진퇴가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1003년(목종 6)에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 아들이 생기자 천추태후김치양과 더불어 목종에게 아들이 없음을 기화로 그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 하였다.
 

경과와 결과

그러나 당시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모의는 태조의 유일한 혈통인 대량원군 순이 존재한다는 난관에 직면하였다. 그리하여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강제로 출가시켜 개성 숭교사(崇敎寺)에 머물게 하다가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옮기게 하고 여러 번 독살하려 했으나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한편, 김치양 일파는 1009년(목종 12)목종을 살해하려고 대궐에 불까지 놓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놀란 왕은 병석에 눕게 되었다. 음모를 알게 된 목종은 이러한 사건이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채충순(蔡忠順) 등과 의논해 선휘판관(宣徽判官) 황보유의(皇甫兪義)와 낭장 문연(文演) 등을 신혈사에 보내어 대량원군을 맞아오게 하는 한편, 서경의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에게 명해서 상경(上京)해 호위하게 하였다.
 
강조는 왕명을 받고 개성으로 오던 중에 왕이 이미 죽었다는 헛소문을 듣고 본영으로 되돌아갔으나, 정난(靖難)의 뜻을 품어 다시 군사 5천인을 이끌고 개성으로 향하였다. 평주(平州 : 지금의 황해도 평산)에 이르러 왕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주저하다가 목종이 생존하는 한 천추태후와의 관계로 김치양 일파를 제거할 수 없다고 판단해, 왕의 폐립을 결심하고 분사감찰어사(分司監察御史) 김응인(金應仁)을 신혈사에 보내어 대량원군을 맞게 하였다. 그리고 목종에게 변을 일으키게 된 명분과 퇴위를 요구하는 글을 올렸다.
 
강조의 군대가 대궐을 침범하자 목종은 궁인과 내시, 채충순과 유충정(劉忠正) 등을 데리고 법왕사(法王寺)로 물러앉고, 황보유의와 김응인 등이 맞아온 대량원군이 즉위하니 이가 곧 현종이다. 강조는 목종을 폐해 양국공(讓國公)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어 목종을 지키게 하는 한편, 김치양과 그의 아들 및 참소를 일삼던 유행간 등 7인을 잡아 베고 그 여당과 천추태후의 친속 30여 인을 섬으로 귀양보냈다.
 
목종과 천추태후는 귀법사를 거쳐 충주(忠州)로 추방되었는데, 강조는 불안을 느껴 목종 모자가 적성(積城)에 이르렀을 때 사람을 보내어 목종을 살해했으며, 천추태후는 황주(黃州)로 도망가 거기에서 여생을 마쳤다.
 
 

의의와 평가

이 정변이 비록 왕의 폐립을 자행하고 왕을 살해하기는 했지만, 왕실의 기강을 바로잡고 왕권의 재정립을 기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또, 이 정변은 거란의 제2차 침입을 가져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용】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고]
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기본항목(E)
내서재 추천 : 0
▣ 참조정보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