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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우리나라 수천년 래의 대외(對外)의 역사여. 동쪽의 조그만 좀도둑의 침입에도 온 나라가 허둥지둥하고 서쪽의 한마디 큰 소리에 조정 (朝廷)이 어찌할 줄 몰라 하니, 우리민족의 못나고 약함은 천성이며 고칠 수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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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구려 대신(大臣) 을지문덕의 행적을 읽다가 문득 기운이 솟아 곧 하늘을 우러러, "그러면 그렇지. 우리민족의 민족성은 참으로 이와같다"고 절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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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위대한 인물과 훌륭한 공업(功業)은 지금까지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었으니 우리 민족성의 강용(强勇)함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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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이같이 강하고 날랬던 우리 선조의 정신이 후대에 와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어리석어졌는가? 슬프다. 용(龍)의 후손이 미꾸라지로 변하고 호랑이의 자손이 강아지로 태어나 신성하던 민족이 모두 지옥으로 떨어졌으니 이는 과연 어느 마귀의 장난이며, 어찌된 운명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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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탄식할 수밖에 없다. 수백년 동안 어리석은 선비들이 부질없이 말하기를 '무공(武功) 이 문치(文治)보다 못하다'고 하며, 또 몇몇 용렬한 신하들이 망령된 입을 놀려 '인자(仁者) 는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섬긴다(이소사대[以小事大])'라고 하여 정책이 날로 쓰러지고 줄어 들었고, 백성의 기세는 꺾어져 눌렀으며 지난 날 강하고 씩씩했음을 덮어버리고 옛 사람 가운데서도 썩어 빠진 새우같은 유생(儒生)만을 숭상하였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보잘 것 없는 횡설수설로 우리나라 4000년의 신성한 역사를 더럽히고 위대한 영웅을 묻어 버렸기때 문에 혹 용맹스런 인물이 있다고 하여도 단지 시골 어린이들의 이야기 속에 겨우 전할 뿐이며, 혹 놀라운 공업(功業)이 있어도 나무꾼의 노래가락 한토막으로만 겨우 전할 뿐, 전체 내 려오는 사적(史蹟)은 날로 사라져 그 이름마저 찾아볼 수 없게 된 대장부가 그 얼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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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럽다 을지문덕이여! 아직도 몇줄의 역사가 전해왔도다. 그러나 불행하다 을지문덕이여! 겨우 겨우 몇 줄의 역사만 전해졌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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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전해지고 전해지지 못함이 그 본인에게 있어서는 아무 손익(損益)이 없지만 한나라의 강토는 한 영웅이 몸을 바쳐 장엄케 한 것이며, 한 나라의 민족은 또한 한 영웅이 피를 흘려 지킨 것이다. 그의 정신은 산과 같이 우뚝하고 그의 은택(恩澤)은 바다처럼 넓거늘 그 나라의 영웅을 그 민족이 모른다고 하면 그 나라가 어찌 잘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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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대가(大家)의 사필(史筆)로 영웅의 진면목을 전하며 재주 있는 사람의 사부(詞賦)로 영웅의 큰 공덕을 찬미하고 향토에 향을 피우고 단(壇)을 쌓아 영웅의 출현을 기도(祈禱)하며, 금궁(金宮)과 옥당(玉堂)으로 영웅의 나타남을 기다리고 영웅이 없으면 '영웅' '영웅'하며, 영웅이 있으면 눈으로 '영웅' '영웅'하여야 나타날 것인데 우리나라는 영웅숭배하는 사상이 너무 빈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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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의 진정한 영웅은 악착(齷齪)스런 역사가들이 잡초 속에 묻어 버렸고, 혹 영웅이라고 추앙하는 사람은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낙천주의(樂天主義)로 외구(外寇)에게 아첨하는 자도 영웅이라 하고 심지어는 적국에 붙어 조국을 배반한 자〔설인귀(薛仁貴)같은 종류〕도 영웅이라 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역사에 남는 일이 흔히 있으니 '영웅' 두자를 위해 통곡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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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나라 장수 범문호(范文虎)가 일본을 침략할 때 풍랑으로 배가 뒤집혀 육지에 오른 자는 3만에 불과하였고 따라서 일본의 승리함은 당연하였지만 일본인은 이를 수백년 이래로 역사에 칭송하고 소설로 전승하여 노래하고 탄미하며 영원히 잊지 않고 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한 손으로 산하(山河)를 정돈하고 한 칼로 백만강적을 살퇴(殺退)한 참 영웅의 큰 공적도 이같이 말살하고 있으니 양국(兩國)의 훗날 강약(强弱)된 차이는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할 것이다. 과거의 영웅을 올바로 기록하여 후에 이같은 영웅이 다시 출현하기를 기원한다.
제 1 장 을지문덕 이전의 한 한〔朝 漢〕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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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성조(聖祖) 단군(檀君)께서 당요씨(唐堯氏)와 같은 시대에 나라를 세운 이래로 우리 민족과 중국 민족은 요지(遼地)의 동서(東西)에 대치하여 우리가 강하면 저들이 근심에 처했고 저들이 강하면 우리가 압박을 입어 양국이 균등히 강하게 있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 서로 침벌함이 있었다. 고구려·신라시대 이전의 역사를 보면 당시 연운·요새(燕雲·療塞)등지는 피의 지대를 이룬지 천여 년이니 그 경쟁의 치열함을 가히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은 춘추전국 시대로부터 점차 대륙의 통일을 이루었지만, 우리는 마한(馬韓)말엽과 삼국이 처음 일어나는 시기까지 오히려 추장정치(酋長政治)의 시대였으므로 나라가 수 많은 소국으로 분립하여 서로 자웅(雌雄)을 다투고 침범하였으니 어느 겨를에 외부세력과 견줄 힘을 축적하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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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영정(政:진시황)과 유철(劉徹 : 한무제)이 그 무력을 발휘하여 몽괄군대의 위세가 장성(長城)밖에까지 멀리 미치고 양복(楊僕)의 누선(樓船)이 위만(衛滿)의 도성(都城)을 함락시킴에 이르렀다. 그 후 삼국시대 중엽에 이르러 각 대소(大小)의 부락이 점차 서로 합병하여 통일 될 기세로 나아가 가락(駕洛)·가야(伽倻)·부여(扶餘)·옥저(沃沮)·예맥(濊貊) 등 모두 삼국에 통합되고 기타 삼한(三韓)에 예속되었던 수백 소국도 삼국의 군현으로 편입되니, 드디어 우리 민족의 실력이 점차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신라의 병력이 해외에 까지 뻗혀 일본을 세번 정벌하고, 백제가 말갈을 자주 격파하여 국토를 개척하였으며 고구려가 사군(四郡)을 수복하여 전의 수치를 설욕하였고 요지를 습격하여 그 판도(版圖)를 확장하였는데, 그 천리(千里)도 안되는 땅과 불과 수 백만의 인구로서 바다와 육지에서 강적을 대항함에 승리는 많았으나 패하기는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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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신라의 적은 일본이며 백제의 적은 말갈이니 그들은 모두 해외 멀리 있는 나라들 이고 당시에는 사소한 상대여서 그 싸움의 경황이 폭풍이나 소나기 같이 잠시 일어날 뿐이요, 큰 전쟁은 드물어서 역사가의 붓을 고무시키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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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고구려가 상대하는 적은 강대한 중국이었고 또 그 국경이 인접해 있어 침략의 기운이 아침에 일어나면 저녁에는 군사가 도착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화(禍)가 항상 숨어 있었다. 그리하여 정치가는 머리를 앓고, 장수는 피를 뿌려 나라를 강성히 하여 도적을 막는데 힘썼으니 대개 시조(始祖) 동명왕(東明王) 이래로 영양왕(孀陽王)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가중국을 침입함이 수십 여 차례이고 중국이 우리 국경을 침범함이 수십 여 차례였다. 영양왕이 즉위할 때가 단기 2720년(서기 387년)경 인데 이 때에 우리와 중국간의 나 쁜 감정이 커져 서로 양립(兩立)치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을지문덕은 이같은 시대가 탄생시킨 인물이었다.
제 2 장 을지문덕 시대의 려·수(麗·隋) 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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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우리민족의 능력을 시험하려 했음이었던가? 당시 외적이 세력만을 강하게 하여 중국의 강남·강북의 양 조정이 보육여씨(普六茹氏:수양제의 본래의 성) 부자(父子)의 세력하에 통일되니 국토와 군사가 중국 역사이래 가장 강대하였다. 게다가 인구가 풍부하고 국고(國庫)가 넉넉하여 사납기로 유명했던 흉노·돌궐의 잔여 세력도 머리를 조아려 굴복하였고 성기(聲氣)가 통하지 않았던 고창실위(高昌室韋)의 먼나라 사람들도 줄이어 들어오니 수양제의 기세가 대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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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에 회유와 강건의 태도로 독립을 유지하며 중국과 대치한 나라는 오직 고구려 뿐 이었다. 수십 년을 형제의 예로 또 대등한 세력으로 지내오다가 하루 아침에 그들이 강대해 졌다고 하여 어찌 기꺼이 굴복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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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왕 즉위 원년(元年)에 수황제가 강남의 진씨(陳氏)를 멸하고 즉시 국서(國書)를 보내 모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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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수(遼水)의 넓이가 장강(長江)과 비교해 어떠하며, 고구려인의 수가 진나라와 비교해 또 한 어떠한가? 만 일 내가 당신 나라의 방자함을 꾸짖고자 하면 한명의 장군만 있으면 그만이요, 많은 말이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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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니 그 교만·무례가 이같이 국서(國書)에 가득하였으므로 고구려 군신(君臣)이 그 화(禍)를 경계하여 곡식을 비축하고 군사를 양성하여 전쟁을 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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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임금의 신임 아래 도(道)를 행하여 내정(內政)을 베풀며 백성을 가르치고 병사를 훈련시켜 밖의 도적을 막고, 사면(四面)이 적인 상황에서 국가 발전의 영광을 이룩한 인물은 그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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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을지문덕은 고구려 대신(大臣)이라 하였으니 대신이라 함은 반드시 그 때의 대대로(大對盧) 또는 막리지(莫離支) 또는 좌보(左輔)·우보(右輔)를 말함이니 고구려의 힘은 을지문덕에 크게 의지하였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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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살수(薩水)에서의 수나라와의 전쟁은 우리나라의 흥망이 걸린 것이었다. 을지문덕이 싸우고자 하면 전 민족이 모두 싸웠고 을지문덕이 후퇴하고자 하면 또한 전민족이 모두 후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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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이 거짓으로 항복하여도 상하(上下)가 모두 그 거짓 항복함을 믿었으니 그 군주의 신용과 국민의 신뢰가 깊음이 이와같아 전쟁터에서는 장수로서 조정에서 재상으로서 내정(內政)을 닦고 외침을 물리치는 계책을 강구하여 한 나라의 안위(安危)가 그 한 몸에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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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 사람들이 기록에 남은 몇 줄에만 집착하여 을지문덕은 다만 살수(薩水)의 한 전쟁에 서만 하늘의 천사같이 승리의 복음을 전한 후 바람과 번개같이 사라졌다고 하고, 그 전후에 는 을지문덕의 공이 없었다고 전하나, 역사를 참조하여 당시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기 2731년(서기 398년) 영양왕의 서쪽 정벌 이후 살수대첩 이전의 역사는 을지문덕의 공과 관련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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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라가 셋으로 나뉘고 외적은 강성한데 풍운을 바라보며 때를 이용하여 큰 도적을 어린아이 같이 조정하니 2천년 후 그 위인을 상상만 하여도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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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러 나라의 거동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북제(北齊)와 진씨(陳氏)가 수나라에게 망한 이후 수나라는 강성하고 주위 나라는 허약해져, 여러 약소국들이 힘을 합해 수나라에 대항하여도 오히려 이기기 어려운데, 협력하기는 커녕 스스로 비굴하여 수나라에 붙어 사는 나라가 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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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백제는 한쪽이 망하면 다같이 망한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침략하도록 계속 청하고 고구려를 정탐하기에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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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2731년(서기 398년) 백제는 수나라가 요동을 침범하자 길 안내자로 장사 왕변나(長史 王辨那)를 보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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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2740년(서기 407년) 백제는 좌평 왕효린(佐平 王孝隣)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침략하도록 청하고 아울러 그 동정을 살펴 수나라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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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2741년(서기 408년) 신라는 승려 원광(圓光)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침벌하기 위해 군사를 구걸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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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2744년(서기 411년) 백제와 신라는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치도록 요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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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울타리의 형제가 바깥의 도적으로 형제를 해치려 하였으니 실로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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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돌궐(突厥), 즉 흉노(匈奴)는 본성이 사납고 강한 족속이었는데 수나라에 굴복하여 종으로서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고구려 사신을 잡아 수양제에게 바치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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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2742년(서기 409년) 고구려가 돌궐의 계민(啓民)에게 사신을 보냈는데 마침 그때 수임금 양광(楊廣)이 그곳에 왔으므로 계민이 고구려 사신을 양광에게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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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수나라를 두려워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무례히 이웃나라의 사신을 체포할 수 있는 것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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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수나라의 강성(强盛)이 이와같을 뿐 아니라 이웃 소국(小國)들은 아부하기에 바빴는데 우리의 위인 을지문덕 장군이 홀로 우뚝 서 국가의 위엄을 지켜나갔다. 나폴레옹시대의 전 유럽이 굴복하였으나 오직 대항한 나라는 영국 한 나라 뿐 이었으며 수양제 시대에 전 아시아가 떨고 있었으나 홀로 끝까지 저항한 나라는 고구려 한 나라 뿐이었다. 2천년 전의 고구려는 바로 18세기의 영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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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4천 년 역사상 가장 영예로운 기념비를 성대히 세웠고 을지문덕은 영원히 한국인으로서의 뛰어난 모범을 보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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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에 비해 국토가 십분의 일, 인구가 백분의 일에도 못미치는 고구려가 수나라에 대항하려 하였으니 그 용기는 가상하나 실제 형세는 심히 위험한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들려 한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으나 이는 무엇을 믿고 그리 하였을까? 이는 그의 독립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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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당시 고구려가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은 없었는가? 있었으니 첫째, 국토를 떼어주어 수나라의 욕심을 채워주거나 둘째, 재물을 갖추고 비열한 언사로 전의 일을 사과하면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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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첫번째 계책은 매국적신(賣國賊臣)의 무리가 자기의 부귀만을 바라고 일시의 편안만을 바라는 그러한 행동이니 을지문덕과 같은 위인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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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계책은 병사 한 명도 죽이지 않고 백성 한 명도 고생시키지 않으며 오직 사신(使臣) 한 명만 파견하여 무릎을 꿇고 애절히 호소하면 저 수나라의 욕심은 이에 불과하였으므로 반드시 기뻐하며 원한을 풀어 다시 동맹국의 관계를 유지, 큰 전쟁의 화는 사라질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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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을지문덕은 이 계책을 사용치 않았으니 그는 난(亂)을 좋아하고 화(禍)를 즐기는 망령된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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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지 않다. 천리에 떨어져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옛날 사람들도 비웃었고, 싸우지 않고 스스로 굴복하는 것은 지사로서는 통곡할 바이다. 일시의 편안함을 쫓아 비열한 정책을 취하는 것에 대하여 혹 천박한 자는 '바깥의 조그만 치욕이 실제 권리상에야 무슨 손해가 되겠는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의 명예를 떨어 뜨리고 국민의 천직(天職)을 모독하면 점점 비열한 정신이 가슴에 들어와 그 나라는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지옥으로 빠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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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담에 '그 아버지가 술로 만년을 지내면 그 아들은 술마시고 행패하는 것을 사업으로 알게 되고, 그 아버지가 바둑 장기를 즐기면 그 아들도 그와 같이 되어 가산(家産)을 탕진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깊이 새겨 둘 격언이다. 내가 오늘 흉한(凶漢)을 만나 마음으로는 그를 도적으로 인식하더라도 잠시라도 화(禍)를 면하기 위해 치욕을 무릎쓰고 입으로 부조(父祖)라 부르고 무릎을 꿇으면 내 아들은 머리를 숙이고 다시 부조(父祖)라고 부를 것이니 필경 몇 세대 후에는 입으로만 부르던 부조(父祖)가 마음에 진실로 숭배하는 부조(父祖)가 된다. 소가죽을 오래 써서 본래의 모습을 모두 잃어 버리고 스스로 노예로 생각하여 타인(他人)의 채찍질을 달게 받고, 비록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라도 그 힘만 강하면 '부조(父祖)', '부조(父祖)'라고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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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고려 중엽에 몽고와 치욕적인 맹약(盟約)을 맺던 당시에는 마음에 기뻐 성실히 복종 하여 맺은 조약이 아니라, 피눈물을 머금은 조약이었으며, 춤추며 맺은 화친이 아니라 웃음 뒤에 칼을 숨기고 맺은 화친이었지만 수십 년이 지나자 피눈물이 웃음으로, 도검(刀劒)이 술 로 변하여 모든 국민이 도적을 '부조(父祖)'로 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 홀필열(忽必烈) 에게 절하던 손으로 내일 주원장(朱元璋)에게 절하고 또 그 다음날에 누루하치〔奴爾哈齊〕 에게 절하며 마치 늙은 기생이 남자를 맞듯이 이 사람이 가면 저 사람을 맞고 저 사람이 가 면 이 사람을 맞아 거의 습관이 성품으로 되어 그 부끄러움 조차 모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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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화란의 국민이 30여 년간의 전쟁으로 육체가 쇠진하고 국토가 피폐해졌어도 바다물을 국토에 부어 그 배위에 독립을 지킬망정 적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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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국권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면 칼과 피로써 이를 지켜야 하고 국권이 이미 떨어진 후라면 또한 칼과 피로써 이를 찾아야 하며 혹 참담한 가시밭에 날이 저물고 길이 멀어 패전의 치욕이 있을지면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칼과 피로써 국민을 환기해야 할 것인데 저 비열한 일파는 나태한 자세로 자기의 편안만을 생각하고 온유하게 복종하여 기회 를 기다리자 하니, 이는 우리의 예기(銳氣)를 스스로 멸하고 양심을 속이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천하의 백성들을 화(禍)로 이끄는 자들이다. 어찌하면 을지문덕 같은 영웅이 다시 태어나 이 무리들을 쫓아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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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수나라가 우리나라를 모멸하는 것이 날마다 정도를 더해가고 또 수나라에 아부하는 여러 나라의 비난이 비오듯 하였으나 을지문덕이 굽힘 없고 흔들림 없는 의기(義氣)로 끝내 대풍운을 일으켰으니 이는 위와같은 의(義)를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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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으로써 큰 것에 대적하고 적은 것으로써 많은 무리에 대항함에 있어서 그 계획이 스스로를 지키는 데만 노력하여도 불안한 것인데 을지문덕은 그의 큰 목구멍은 중국 9주를 삼킬 것 같고 그의 걸음걸이는 만리장성을 뛰어 넘을 것 같아 만일 우리나라 한 구석에서 문을 닫고 지키기만 힘쓰는 것이 가장 좋은 책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얼굴에 침을 뱉아 버리려는 기세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 해에 수 천명으로 한 곳을 점령하고 다음 해에 수 만명으로 또 한 성(城)을 탈취하며, 또 그 다음 해에 수십만 명의 병사로 한 진영을 엄습하여 지상(地上)의 풀과 나무 곤충 새가 모두 우리의 소유가 되고 외국 열강이 모두 고구려에 정기 사신을 보내도록 하였다. 당시의 유기(留記) 신집(新集)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아 을지문덕의 정략(政略)을 자세히 알 수 있는 문헌은 없으나 다만 《수사(隋史)》를 살펴보면 단기 2734년(서기 401년) 경에 고구려가 활약했던 흔적을 오히려 추측하여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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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양광(楊廣)이 침입해 올 때 그가 국내에 뿌린 포고문에 고구려의 핍박을 참지 못해 하는 내용이 보이는데 '고구려가 바다의 변방을 침범한다'고 하였고 또 '고구려가 국토를 계속 먹어간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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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보면 살수의 싸움은 을지문덕의 승전 내용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이것이 소위 '덕과 힘도 헤아리지 못하는 자' 아니면 이것이 소위 '소적(小敵)의 강(强)이 대적(大敵)의 금(禽)'이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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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백성도 역시 스스로 즐기며 살 수 있는데 어찌하여 이웃나라와의 교제를 두려워 하고 병화(兵禍)를 자초하여 상하군민(上下軍民)이 편히 쉬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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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하늘이 우리의 애매한 행동을 불허하는 것이니 전진하지 않으면 후퇴하고 후퇴하지 않으면 반드시 전진하게 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 기본원리인 것이다. 옛 노래에 '가자 가자 어서 가자. 오늘 아니가면 다시는 갈 날 없다'라고 한 것은 우리 경쟁세계의 우승열패(優勝劣敗)의 법칙을 가리킨 천리(天理)이다. 삼국시대 때의 산천도 오늘날의 산천이고 풍물도 오늘날의 풍물이며 인종도 우리 선조이거늘 후세의 경쟁력이 점점 약해짐은 무슨 까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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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나아가려 하는 마음가짐과 후퇴하려 하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것이다. 강함은 좋지 않다고 하여 허약함에 힘쓰고 큼(대(大))은 불가하다 하여 오직 작음(소(小))에만 힘써 다른 나라는 대국(大國) 강국(强國)이라고 인정하고 스스로는 소국(小國) 약국(弱國)이라고 자처 하여 비굴과 재물로 나라를 유지하려 하고 경서(經書) 시(詩)로 일삼아 동쪽으로는 대마도 를 양보하고 서쪽으로는 압록강 서쪽을 다 잃고 겨우 거북이 등만한 땅에서도 좋아하였으니 날로 후퇴함이 이와 같고서 날로 약해짐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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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을지문덕은 적이 크고 강하여도 반드시 전진하여 한 발자욱을 물러남에 등에 땀이 나고 한 터럭을 양보해도 배에서 피가 끓어 이로써 자신을 독려하고 동료를 고무시켜 나아가 전 국민을 복돋아 그 삶을 조국을 위해 살고 그 죽음을 조국을 위해 바쳐 모든 일에 조국만을 생각한 결과, 여진족을 식민지로 만들고 중국의 천자(天子)를 거의 생포하다시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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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땅이 넓다고 하여 그 나라가 큰 것이 아니고 군사와 백성이 많다고 하여 그 나라가 강한 것이 아니다. 오직 스스로 강하고 스스로 지키려는 마음이 있으면 그 나라가 강대해지는 것이니 을지문덕의 사상은 참으로 현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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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의 사상은 어떠한 사상인가? 바로 제국주의(帝國主義)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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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을지문덕을 전략과 내치(內治)의 천재라고 하면 모두 그렇다고 인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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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외교상의 민활원대(敏活遠大)함에 대하여는 아는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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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당시의 고구려가 취하여야 할 계책을 생각해 보자. 단지 전략에만 능하여 국세를 떨 칠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러면 내치(內治)에만 힘써서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할 수 있었을까? 이 역시 그렇지 않다. 당시 고구려의 지형을 살펴보면 동남(東南)쪽에는 신라와 백제가 있고 서쪽에는 수나라, 북쪽에는 거란(계단(契丹)) 말갈(靺鞨) 돌궐 선비(鮮卑) 등의 나라가 있었다. 어떤 높은 산이나 큰 강도 없었고 요새나 사막도 없었으며 그 국경이 접해 있음이 개의 어금니같이 잇달아 있어 사면이 적으로 싸여 있었다. 또한 그 때에 수나라의 기염이 모든 나라를 제압하여 수나라가 왼쪽으로 가라고 하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면 오른쪽으로 가며 바람 부는대로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없었다. 이렇게 본다면 신라 백제 거란 말갈 돌궐 선비가 모두 수나라인 셈이었다. 수나라의 노비가 사방에 나열하여 그 명령만 기다리는 형세인데 만일 을지문덕이 멍청하게 수나라에 도전만 했다면 아침에는 신라와, 저녁에는 백제와, 오늘에는 거란 말갈과, 다음날에는 돌궐 선비와 충돌하여 동서 남북으로 전쟁치르기에 겨를이 없게 되어 병사들은 분주한 명령에 피폐하고 백성은 그 생계를 잃어 정치가들이 조정에 수풀처럼 있을지라도 흩어진 민심을 바로 잡기가 어려울 것이고, 무공가(武功家)가 변경에 별처럼 많아도 번갈아 침입해 오는 적군을 제압하기 어려웠을 것이니, 장차 어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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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을지문덕의 외교수완은 참으로 기교하여 크게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다. 결과적으로 말갈과 거란을 우리가 이용하였고 고구려 침벌하기를 계속 요청하던 백제도 끝내는 중립을 지킬 뿐이었으며 돌궐이 수나라를 두려워하여 고구려 사신을 붙잡기는 하였으나 수나라를 군사력으로 도운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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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을지문덕이 시행한 기괴한 계략은 문헌상으로 전해 오지 않으나 한 모퉁이에서 독립하여 참담한 수완으로 여러 적국의 무리들을 와해케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참으로 위인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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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국에서는 제(齊)나라와 진(陳)나라도 이미 멸망하였고 돌궐과 선비도 이미 수나라에 굴복하여 감히 수나라를 거역할 나라들이 없었다. 중국의 역대 제왕들은 큰 혼란을 평정한 후에는 백성을 강압하여 반란의 싹을 없애 버렸던 관례대로 궁궐의 숙위병(宿衛兵) 수만명만을 제외하고 장수들의 병권(兵權)을 박탈하고 9주(九州)의 철을 모으고 금으로 12인을 만들 그러한 때였다. 그러나 저 양씨(楊氏) 부자(父子)는 오히려 무기와 군사를 늘리었으니 그 의도는 고구려를 침벌코자 한 것이었다. 만약 고구려가 현명치 못하여 저들은 저들이고 나는 나라고 하여 태평노래만 부르고 있었더라면 중국 강남의 진(陳)나라가 멸망했던 통분을 다시 맛보았을 것이다. 다행히 현명한 위인 을지문덕이 있어서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한 후 더욱 경계하여 착실히 경계에 힘썼으므로 우수한 군사 백만이 갖추어 졌었고〔수사(隋史)에 '고구려에 우수한 군사가 100만'이라고 기록하였다〕, 백성을 잘 다스려 국방세를 무겁게 거두어도 나라를 원망하지 않았으며〔수나라의 양광(楊廣)이 '고구려가 조세를 많이 거두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또 장군과 관원(官員)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훗날 큰 도적이 국경에 쳐들어 왔을 때 한명도 항복하는 사람이 없었고〔역사책에 '수나라 군사가 지나는 곳에 고구려의 모든 성(城)이 모두 견고하였고 항복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곽을 잘 수리하여 튼튼하였다. (우문술 등이 평양성 아래에 이르러 '성이 험준하여 공격하기 어렵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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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김각간(金角干) 유신(庾信)의 나라를 위해 기도했던 열성,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왜구 침입을 미리 헤아렸던 현명함, 제갈량의 농업에 힘쓰고 국방에 노력했던 정치력, 가부이(加富爾)의 증세(增稅) 정책, 이성(李晟)의 성을 수리하고 식량을 비축했던 일 등 그 열성과 충심과 고민하고 분발했던 마음을 을지문덕은 그 한몸에 고루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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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은 외교정책에 결점이 없었고 내치(內治)에 충실하였다. 또한 그 큰 검과 도끼로써 대륙무대에 진출하여 말갈인으로 위장한 유격병을 보내어 그 나라의 중심지를 정탐하여 변방에 침입하기도 하였고 또 거란의 무리들을 유인하여 그들의 해안 경비병들을 격파하기도 하였다〔단기 2744년(서기 411년) 수주(隋主)의 조서에 의거함〕. 또 말갈을 인솔하여 수나라를 드나들어 수나라를 동요시켰고〔단기 2731년(서기 398년)에 고구려의 왕이 말갈 병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정벌하였다〕, 수나라와 신라·백제의 외교를 방해하여 끊어 그 불화를 조장시켰으며〔수주(隋主)의 조서에 수나라에 오는 왕인(王人)을 거절했다고 한다〕, 침입하는 적들을 바람 앞의 먼지같이 순식간에 소탕시키고〔단기 2731년(서기 398년) 6월에 수임금 양견(楊堅)이 한왕(漢王)·양왕(諒王)·세적(世績)·주라후(周羅喉) 등을 보내어 30만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와 육지로 진격케 하여 평양에까지 이르렀다가 9월에 패하여 돌아갔는데 10에 8·9가 죽었다고 한다〕수나라 경계지역을 점차 먹어 들어갔다〔이 역시 단기 2743년(서기 410년) 수임금 조서에 의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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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가 수만리의 땅과 수억만의 백성 및 수백만의 강한 병사를 소유한 강국이었는 바, 동쪽 한 구석에 위치한 작은 나라라고 하여 무시했던 고구려에게 패배를 당하였으니 그들의 침입은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침입은 자발적인 것이기 보다는 피동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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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제가 요동의 옛 요새에서 군대의 위용과 신하들을 돌아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산과 바다도 옮길 수 있는데 조그만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어찌 큰 어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수나라의 교만한 어린아이의 자만적인 말이었다. 사기(史記)를 보다가 이 구절을 읽고 나도 몰래 비웃음이 나왔으니, 그러나 저 수나라의 기세만을 본다면 이같은 교만한 발언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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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간 훈련하여 기른 병력으로 강물이 넘치듯이 동쪽으로 침략하니 군함이 300척〔단기 2743년(서기 410년, 영양왕 22년)에 수나라 임금 양광(楊廣)이 유주총관(幽主摠官) 원홍사(元弘嗣)를 보내어 동래(東萊) 앞바다에서 병선 300척을 제조케 했다고 한다〕, 병차(兵車)가 5만대〔수나라 임금이 탁군( 郡)에 친히 와서 융차(戎車) 5만대를 제작하고 의갑(衣甲)을 실었다고 한다〕, 대갑(帶甲)이 이백만〔단기 2744년(서기 411년, 영양왕 13년)에 수나라 임금이 전국의 군대를 탁군에 모이게 하여 좌군 12군은 누방(屢方)·장잠(長岑)·명해(溟海)·개마(蓋馬)·건안(建安)·남소(南蘇)·요동(遼東)·현도(玄萄)·부여(扶餘)·조선(朝鮮)·옥저(沃沮)·낙랑(樂浪) 등으로 나아가게 했고 우군 12군은 점선(蟬)·함자(含資)·혼미(渾彌)·임둔(臨芚)·후성(候城)·제해(提奚)·답돈(踏頓)·갈석(碣石)·동이·대방(帶方)·양평(襄平) 등으로 나아가게 해 일제히 평양으로 치달으니 모두 113만 3천 8백명이요 대략 200만이라고 말하여지며 그 군량미 수송자는 2배에 달했다고 한다〕, 그 깃발이 천리까지 뻗혀 있었고〔기병(奇兵)은 40대(隊)였는데 10대를 한 단(團)으로 만들고 그 갑옷과 깃발은 색깔이 달랐다. 하루에 한 진영씩 보내었는데 서로의 거리가 40리씩 떨어져서 출진 후 40일만에 모두 출발을 완료하니 선두와 후미가 서로 이어져 북소리가 서로 들렸고 그 깃발은 960리에 뻗혀 있었다고 전한다〕, 장사(將士)들은 태반이 다 평촉(平蜀)·평재(平齋)의 전투에서 지략과 용맹을 떨친 장군들이었다〔모두 24군으로 나누어 좌익위(左翼衛) 대장군에 우문술(宇文述), 우익위(右翼衛) 대장군에 우중문(宇仲文), 좌효위(左驍衛) 대장군에 형원항(荊元恒), 우효위(右驍衛) 대장군에 설세웅(薛世雄), 우둔위 (右屯衛) 장군에 신세웅(辛世雄), 우어위(右禦衛) 장군에 장근(張瑾), 우무후(右武候) 장군에 조효재(趙孝才), 탁군태수( 郡太守) 좌무위(左武衛) 장군에 최홍승(崔弘昇), 우어위(右禦衛) 호분낭장(虎賁郎將)에 위문승(衛文昇) 등이 각각 나누어 거느리고 수군(水軍)은 좌익위(左翼衛)대장군(大將軍) 래호아(來護兒)가 통솔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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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야심만만한 양광(楊廣)의 심중에는 고구려 정도는 보이지도 않은 듯 하였다. 압록강을 한번의 채찍질로 가르고 평야성을 한발에 짓밟으려는 듯한 기세로 침범하였으나 불행히 을지문덕을 만나 제1차 요수(遼水) 전투에서 대패하였다〔수나라 군사가 요수에 도착하자 우리군사는 물을 막고 지키고 있었다. 수나라 군사가 부교(浮橋)를 설치하고 건너가는데 다 건너가기 직전에 우리 군사들이 급습하니 적군의 전사자가 심히 많았다. 그 때 용장 맥철장(麥鐵杖)·전사웅(錢士雄)·맹금우(孟金又) 등이 모두 전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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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요성(遼城) 전투에서 수나라는 크게 곤경에 처했으며〔적군이 요동성에 도착하자 우리 장수는 성을 튼튼히 지키었으므로 적이 포위하여 공격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제3차 평양성 전투에서 크게 손상을 입었다〔래호아가 강회(江淮)의 수군(水軍)을 이끌고 바다로 침략해 왔는데 배의 행렬이 수백리에 달하였다. 패수(浿水)로부터 들어와 성 아래로 바로 침입해 오자 우리 군사가 나곽(羅郭)의 빈절에서 매복하고 패하는 체 하며 유인하여 래호아가 성안으로 들어간 후에 복병(伏兵)들이 진격하여 전투를 벌이니 적의 시체가 낭자하였고 래호아는 그 몸뚱아리만 겨우 구하여 홀로 도망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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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끝내는 살수(薩水)에 이르러 큰 낭패를 만났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국가의 강하고 약함은 영웅의 유무(有無)와 관련되는 것이요, 병사의 많고 적음과는 관계 없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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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같이 있다가 토끼같이 나아가며 산같이 있다가 벼락같이 움직이니 을지문덕은 위인의 경지를 넘은 천신(天神)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요갈(療碣)의 서쪽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자들과 패수(浿水)의 아래로부터 검은 구름같이 모여드는 자들은 무두 적국의 군대였다. 또 하늘을 가리는 것은 적국의 군기였고, 땅을 진동시키는 것은 적국의 북소리였다. 그 군대의 웅장한 광경이 역사이래 처음보는 것 이어서 이웃나라들도 고구려를 안타깝게 여겼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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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을지문덕은 단지 그 휘하의 장군들을 지휘하여 주요 지역만 지키게 하고〔이미 앞에서 설명한 요수 요성을 지켰던 일을 말함〕 웃으면서 적을 살피어 나곽(羅郭)의 빈절에 복병을 숨겨 수나라의 수군(水軍)을 섬멸하고〔앞에서 설명한 래호아의 군사를 물리친 것을 말함〕 스스로는 한가로이 아무일도 없는 듯이 높은 곳에서 누워 적들이 함부로 날뛰는 대로 나두고, 적들이 교만하면 교만한 대로 놔두었다. 그러다 마침내 적들의 대군사가 압록강 서쪽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듣고는 비로소 여유있게 홀로 말을 타고 적진에 들어가 그 헛점을 정탐하다가 또한 헤아리기 어려운 신기한 수완으로 무사히 탈출하였다〔수나라 장수 우문술 우중문 등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서쪽에 주둔하자 을지문덕 장군이 적의 진영에 들어가 거짓 항복하였다가 얼마 후 계책을 사용해 우중문을 속이고 탈출하여 돌아왔다. 그 후 우중문이 속은 것을 깨닫고 사람을 보내어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하며 다시 을지문덕을 불렀으나 을지문덕은 압록강을 달려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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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첩첩으로 군사들을 그물같이 쳐놓고 거대한 적군을 사지(死地)로 유인한후 시구(詩句)로 적을 크게 칭찬하여 그 마음을 더욱 교만하게 부추키고 끝내는 '만족하였으면 이만 그치시오'라고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 우중문 등이 족함을 알고 침입을 그쳤다고 한다면 을지문덕이 그들을 그대로 돌려 보냈겠는가? 영웅은 사람을 잘속인다는 속담은 역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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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이 자기를 속이고 간 것을 알고 우문술 등이 대노하여 추격하자, 을지문덕은 적은 수의 군사로써 대항하다가 적군의 배고픈 기색을 보고 피곤한척 하며 잠깐 싸우다가 도망하곤 했다. 그러자 적장(敵將)이 하루에 일곱 번 승리하고 크게 교만해져 동쪽으로 살수를 직접 건너 평양성 밖 30리 지역에 진을 쳤다. 그때 을지문덕이 시한편을 보냈는데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비스런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통달하였고(신책구천문(神策究天文)) 묘한 작전은 땅의 이치를 다하였네(묘책궁지리(妙策窮地理)) 전쟁에서 승리하여 그 공이 이미 높으니(전승공즉고(戰勝功卽高)) 만족함을 알고 이만 싸움 그치기를 원하노라(지족원운지(知足願云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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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을지문적 한사람의 몸으로써 천억만(千億萬) 을지문덕으로 나타나되 갑자기 사신(使臣)으로, 장수로, 시인으로, 재상으로, 정탐가로, 외교가로 몸을 들어내고 또 당당한 충신이 갑자기 배반한 신하로 위장하여 들어내며, 우람찬 명장이 갑자기 패장(敗將)으로 나타나서, 갑자기 왔다가는 사라지고, 멀리 있다가 가까이 나타나고 일어나고 매복하여 그 양양(揚揚)한 의기로 요동에 진출했던 수나라 군신(君臣)들이 일시에 자유를 잃고 을지문덕의 술책에 왔다 갔다 하였다. 역사책을 읽는 사람들이여, 을지문덕의 역사가 일부만 남아 있는 것을 한탄하지 말라. 다만 이 몇줄의 기록만으로도 그 신(神)과 같은 인물됨이 다 들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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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은 견고하고 들판은 푸른 평양성 아래에서 수개월간 주둔했던 적병들이 양식 보급로가 끊어지고 노략질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부득이 군사를 돌려 후퇴할 때에 을지문덕은 군사를 내어 사면에서 공격하여 살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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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하다. 어두운 산, 검은 달 아래서 무참했던 항우의 모습과 같고 바다위를 휩쓰는 태풍에 스웨덴의 군함이 침몰함과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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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군사가 그들의 한 병영(兵營)에 지나지 않는다고 거만을 떨던 수나라 황제의 기세가 지금에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뒤에서는 고구려 군사가 쫓아오고 앞에는 큰 강이 가로 막고 있는데 날아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나 날개가 없었다. 수나라 병사들은 강변에 이르러 24군영이 배 한척에 모두 타고자 하여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강의 중간에 이르기 전에 우리 군사가 뒤에서 공격을 하니 용과 뱀이 뛰놀고 천지가 뒤집히는 듯 하였다. 후군장(後軍將) 신세웅(辛世雄)을 베어 버리고 더욱 분격하여 수백만 적군을 모두 고기의 뱃속에 장사 지내니 살아 돌아간 자가 2700명에 불과하고 수억만냥의 자재, 기계가 일시에 까마귀밥으로 변하였다. 이 때가 단기 2744년(서기 411년) 고구려 영양왕 32년 6월이었고, 지금으로부 터 1297년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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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관(史官)이 강조하여 기록하기를 '모년 모월 모일에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사를 방어할 때 살수에서 크게 물리치니 수나라 임금 양광(楊廣)이 도망갔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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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동서고금에 역사나 야담이 많치마는 그 중 전쟁을 하면서 적은 군사로 대군사를 침에 을지문덕 만한 사람이 있었는가? 약한 세력으로 강한 세력에 대적함에 을지문덕 만한 사람이 있었는가? 한나라의 대신으로 백만대군의 적진에 들어가 정탐함에 을지문덕 만한 사람이 있었는가? 고립된 성과 약한 병졸로 사면을 포위한 강한 적에게 굴복치 않음에 을지문덕만한 사람이 있었는가? 수 차례 강한 적을 쳐서 조그마한 그림자조차 돌려보내지 않음에 을지문덕만한 사람이 있었는가? 어린아이도 그 이름을 들으면 울음을 그치고 초목이 그 이름을 알아 주었음에 을지문덕 만한 사람이 있었는가? 안으로는 정치와 교화에 힘쓰고 밖으로는 적국을 방어하여 한몸으로 장수와 재상의 직을 겸임했으되 행동에 있어 여유있었고 동요됨 없음에 을지문덕 만한 사람이 있었는가? 땅이 작고 인구가 적은 나라의 군사를 계속 일으키어 전쟁이 그치지 않았어도 민심이 감복하여 한 사람의 반란자도 없이 몸을 바쳐 국가에 헌신케 하였음에 을지문덕 만한 사람이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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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 사람들이 을지문덕의 한 터럭만 닮았어도 나라의 독립을 지킬 수 있을 것이며 한 기침, 한 침(타(唾))만 본받아도 나라의 역사를 보존할 것이니 을지문덕은 우리나라 4천년 역사에 하나밖에 없는 위인일뿐 아니라 또한 세계 각국에서도 찾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적국의 역사가도 을지문덕을 크게 흠모하고 감복하여 찬미하되 '고구려에 을지문덕이라는 큰 인물이 있는데 침착하고 굳세고 지략을 갖추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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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전쟁이 끝난 후 780년 경에 조선시대 창업 공신 조준(趙浚)이 명(明)나라 사신 축맹(祝孟)과 안주(安州)의 백상루(百祥樓)에서 청천강(살수)을 내려보고 우리 을지문덕의 공열을 자랑하며 수나라 군사의 나약함을 냉소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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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는 푸른하늘아래 출정이는데(살수탕탕벽허(薩水湯湯碧虛)) 수나라 병사 백만이 물고기가 되었구나(수병백만화위어(隋兵百萬化爲魚)) 이제는 어부나 나무군의 이야기로만 남아(지금류득어초화(至今留得漁樵話)) 나그네의 한갖 웃음거리도 못되도다(불만정부일신여(不滿征夫一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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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는데 축(祝)씨가 얼굴을 붉히고 붓을 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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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삼국사(三國史)》를 읽다가 살수대첩의 다음해인 단기 2745년(서기 412년) 요동 전투와 또 그 다음해인 단기 2746년(서기 413년) 비서성전투에 이르러 갑자기 무엇이 빠진 듯한 의문이 일어났다. 살수대첩에서 수나라는 그들의 용맹한 장수와 정예 군사 수백만을 다 죽였고 자재, 기계 수억만을 다 잃었으니 수나라가 비록 부강하다 하더라도 다시 침입해 올 여력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재침(再侵) 뿐 아니라 세 번이나 침입해 왔으니 그 재물은 어떻게 조달하였으며 그 군사는 어떻게 모집하였을까? 이는 즉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걷워들여 군수(軍需)에 충당하고 쟁기질하는 농부와 시장의 잡상인을 모집하여 갑옷을 입혀 창 칼을 들리우고 이들을 죽음의 땅으로 몰아 넣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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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병사들은 훈련이 안된 오합지졸의 병사들이요, 폭력에 끌려 나온 원망에 찬 병사들이요, 내란이 있다는 소문〔수양제가 재 침입할 때 양현감(楊玄感)이 낙양에서 수나라에 반란을 일으켰음〕에 의해 술렁대는 병사들이었으니, 이것은 고구려가 승리할 수밖에 없는 첫번째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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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세로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주인이요 그들은 객(客)이고, 사리로써 말한다면 우리는 정의요, 그들은 불의이며, 국정을 살펴보면 그들은 혼란의 시대요 우리는 안정의 시대이고, 군사의 사기를 보면 그들은 패배의 군사요 우리는 승리의 군사이니, 이것은 고구려가 반드시 승리할 수밖에 없는 두번째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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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수나라의 부강한 기초가 이미 흔들리고 태평한 세월이 또한 기울었으니 스스로의 멸망을 이기기도 어렵거니와 어느 겨를에 이웃나라와 다투겠는가? 그래서 배구〔裵矩, 단기2744년(서기 411년) 수양제에게 고구려의 침벌을 권한 자〕가 입을 다물고, 곽영〔郭榮, 단기 2745년(서기 412년)에 수양제에게 고구려 침벌을 권한 자〕이 머리를 조아릴 뿐 이었으니, 이것은 그 신하들이 전쟁할 의욕이 없었던 것이다. 또 래호아가 전쟁을 말리고 우중문이 관망만 하고 있었으니 이것은 그 장군들이 전쟁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또 팔륜(八輪)이 무효하고 비루(飛樓)가 공을 이루지 못하니〔수양제가 고구려를 침입할 때 팔륜차와 비루를 제조했음〕이는 그 군졸들이 싸울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곡소리가 길에 가득하고 랑사가〔浪死歌, 수양제가 연패하고도 계속 군사를 일으키자 수나라 사람들이 그 고생을 참지 못하여 「무향요동랑사가」(無向遼東浪死歌)를 지었음〕는 산과 들에 가득하니 이는 그 백성들이 전쟁을 원치 않는 것이었다. 수나라의 군졸·백성·장군·재상들이 모두 전쟁을 싫어하는데 전쟁을 하고자 하는 자는 오직 저 야심을 품은 수양제 한 사람 뿐이었다. 우리 전국의 병력으로 고집스런 한 사람과 싸우는데 있어 그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이것이 우리나라가 반드시 승리할 수밖에 없는 세번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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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승리할 수밖에 없는 이같은 이유가 있었으므로 저들과 싸움을 하면 10번 싸워 10번을 이기고 100번 싸워 100번을 이겨 작게는 눈앞의 적병을 모두 쓸어 버리고 한 사람도 돌려 보내지 않을 것이오, 크게는 수나라의 중심에 진격하여 수나라를 우리나라로 만들수 있었는데, 어찌하여 한구석의 외딴 성만을 지키고 저들이 왔을 때 진격하지 않고 저들이 후퇴할 때 추격하지 않아〔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수양광(隋楊廣)이 크게 놀라 급히 군사를 끌고 돌아갈 때 군수물자 기계를 모두 버리고 군사들은 흩어져 혼란이 일어났다. 그 때 고구려 병사들은 성만을 지키고 그 안에서 북만 쳐대고 있었다. 다음날 오후에 비로서 성밖으로 나갔으나 적군이 거짓 후퇴한 것으로 의심하고 망설이다가 이틀 후에 쫓아가 공격하여 후군(後軍) 수천명을 살해했다〕역사책을 보는 후손들로 하여금 불만에 차게 만드니 참으로 비통하다. 단기 2744년(서기 411년) 살수대첩에서 1,133,800명을 섬멸했던 을지문덕은 어디에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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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한 솔잎에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의 말로를 맡기고, 쇠줄로 석저장사(石底將士) 김덕령(金德齡)의 큰 뜻을 끊어 버렸던 것 같이, 이때 을지문덕이 파면당했는지, 모함으로 쫓겨났는지, 혹 죽었는지 알 수 없으나 원수를 완전히 없애지 못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조국을 떠나 다른 위인들의 경우와 같이 그 회포를 다 펴지 못했음은 내가 단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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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회포는 무엇인가? 즉 영토개척주의였다. 이 주의가 아니면 을지문덕이 10여년동안 군사를 양성하는데 주력했을 까닭이 없으며 이 주의가 아니면 적국이 노여워하고 재물을 소비하며 전쟁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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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의를 실행할 적절한 시기는 살수대첩 이후의 양(兩)전투 때였다. 만일 이때에 을지문덕이 있었더라면 마땅히 '때가 왔다'고 크게 외치고 돌연히 일어나 순암(順庵) 안정복 (安鼎福)이 기록한 바와 같이 '신라와 화합하고 말갈의 무리를 이용하여 수나라의 뒤를 추격, 의려(醫閭)를 점거하고 그 죄를 성토'하면 수나라에 원망을 품은 그 나라 백성들도 우리 나라에 귀속하고 적국의 황제를 사로잡음이 손바닥 뒤집기 보다 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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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적군을 격멸함도 이때가 적시이고 국위를 발휘함도 이때가 적시이며 국토를 확장하여 동방대제국(東方大帝國)을 건설함도 이때가 적시였는데 이것을 이루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피곤한 짐승과의 싸움도 두려워 하여 화살도 당기지 못하였으니 이후 대국(大國)으로서의 위풍은 점차 소멸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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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도다! 을지문덕의 죽음이 너무 빨랐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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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수나라가 전쟁을 겪은 이후 그 백성은 곤궁하고 병사는 피로해져 안으로 원성이 높고 밖으로 반란이 일어나 수양제 자신은 반란자에게 피살되고 수나라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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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대첩이 없었더라면 왕세충(王世充)과 두건덕(竇建德)이 비록 용맹스러웠다고 해도 수나라를 쓰러뜨릴 수는 없었고, 이연(李淵) 이세민(李世民)이 비록 영웅이라고 하더라도 수나라의 강대함을 물리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을지문덕이 갈아 놓은 밭에 이세민이 수확을을 거두고 을지문덕이 노력을 들인 공로로 이세민이 그 복을 누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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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번의 전쟁으로 만승(萬乘)의 강대국을 완전히 전멸시켜, 이웃나라들이 우리나라의 강함을 두려워하여 복종할 정도였으니 비록 을지문덕이 그 포부를 다 펴지는 못했으나 한국인의 기개는 이미 충분히 보여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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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역사가 중에서 을지문덕의 참된 가치를 찾아낸 사람이 거의 없으나 종종 그 좁은 대롱을 통해 본 의론이라도 을지문덕의 전모를 추측해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지금 그 대략을 뽑아 기록하고 그외 문헌에 흩어져있는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도 여기에 붙여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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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이 침착하고 용감하며 사람을 현란시키는 꾀와 수단이 있었고 아울러 문장을 잘 지었다」 〔삼국사(三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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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양제가 요동을 침입할 때 그 군사의 성대함이 역사이래 처음이었으나 고구려가 한 구석의 작은 나라로써 대항하되 스스로를 지켜냈을 뿐 아니라 거의 수나라 군사를 전멸시켰으니 이는 을지문덕 한 사람의 공이었다」 〔삼국사(三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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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진(符秦)이 백만군사로써 진(晋)나라를 정벌하다가 비수(肥水)를 건너는 도중 사현(謝玄)에게 대패하고 후퇴하여 낙양에 이르렀는데 남은 군사가 겨우 10만이었다. 지금 수 나라 양제는 부진과 달라 그 부유함이 부진의 몇 배고 군사가 부진의 몇 배이며, 고구려의 땅이 강좌서릉(江左西陵)과 같이 지형적으로 뛰어난 것도 없고 병사들도 사안왕도(謝安王導)와 같이 잘 훈련되지도 못하였으며 또는 주서(朱序)같이 배반하는 자도 없었으되 을지문 덕이 평양의 고립된 군사로 적병에 대항하여 전승을 거두었으니 사현에게 비교하면 을지문 덕이 훨씬 우수하다」 〔동국통감(東國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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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제의 위세와 기염이 천지에 떨쳤으나 을지문덕이 여유 있게 계획을 세워 적 200만 군사가 압록강 살수의 귀신이 되고 살아 돌아간 자가 2,700명에 불과하니 수양제는 대패하여 세상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이후로 당태종의 뛰어난 군사 무술로도 안시성에서 이기지 못하였고 요(遼)·금(金)·몽고(蒙古)의 용맹으로도 해치지 못하였으니 금산(金山)·금시(金始)·합단(哈丹)·홍관(紅冠)의 병사도 우리나라에게 망한 바 되어 후세 천하가 우리나라를 강국으로 보고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으니, 이 을지문덕의 공이 아닌가?」 〔동국통감(東國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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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왕이 을지문덕 등의 신하를 이용하여 승승장구의 기세로 수양제를 토벌하지 않은 것이 애석하다」 〔동사강목(東史綱目)〕
120
「을지문덕의 손으로 국가의 큰 위기를 극복하였으니 그 공이 우리나라 전 역사에 미치었다」 〔동국명장전(東國名將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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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은 평양의 석다산(石多山)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동국명장전〕
122
「안주(安州) 청천강(淸川江)은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사를 추격하여 대피한 곳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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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열거한 것은 옛날 역사가들의 논평을 개괄한 것인데 너무 소략하다. 이외 종종 고금(古今)의 문인(文人)들이 을지문덕을 우리나라 시인(詩人)의 조상으로 높이 받들었고〔유냉제(柳冷齊)의 시에 "을지문덕은 참으로 재능있는 선비로서 오언시(五言詩)를 지었는데 우리나라의 으뜸이다"라고 말함〕 대동풍아(大東風雅)의 첫 머리 제1장에 반드시 을지문덕의 시를 먼저 실었다. 이는 조담약(趙湛若)을 거문고 잘타는 사람으로 추앙하고 김취려(金就礪)를 대주호(大酒戶)로 칭찬함과 같은 경우이니 을지문덕이 들으면 빙그레 웃을 일이나 이 또한 을지문덕의 위대한 측면을 추측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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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의 인물평은 오직 침착(침(沈))·용맹(지())·권모(권(權))·술수(수(數))가 기록에 나타나는 전부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수나라 역사가들이 그들의 황제에게 올리는 글에서 평한 내용을 우리 역사가들이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을지문덕의 진모를 잘 설명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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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진(陣)을 치고 대항함에 있어 지휘가 정연하고, 여유있는 마음으로 적의 병영에 들어가 사나운 병사들을 사타구니와 손바닥에서 희롱하였으니 '침착' '용맹' '권모' '술수'라고 하는 것은 이로 말미암아 얻은 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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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을지문덕을 살펴 보니 침착·용맹·권모·술수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것만으로 을지문덕의 위대함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면 을지문덕은 과연 어떠한 인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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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적인(모험인(冒險人))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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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되고 성실하였기 때문에 임금과 신하들이 그와 10여년간 물과 고기의 관계처럼 친밀하게 지냈고, 이간하는 말이 없었고, 장군과 재상들이 한 마음으로 내정(內政)을 닦고 외적을 물리치되 부지런히 서로 권면하여 그 병사들이 강한 병사가 되었고, 그 백성들은 강한 백성이 되어 천리(千里)의 좁은 땅에서 이웃나라를 깔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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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직하고 의연하였기 때문에 수양제의 군사가 성난 파도같이 모여 들어 군함이 바다 위에 개미떼 같았고, 군마(軍馬)가 평야에 구름같았고, 적이 큰소리로 위협하였으되, 굽히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정신으로 여유있게 대항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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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립성(特立性)이 강했기 때문에 당시 수양제의 기세 아래 이웃 나라들이 두려움 속에 굴복하여, 가까이로는 신라 백제가 꼬리를 흔들며 교태를 부렸고, 멀리는 돌궐 거란도 무릎을 꿇는 수모를 당했으나 을지문덕은 그 참담한 수완으로 수나라가 강하여도 그들을 배척하고, 약해도 물리쳐 같이 존립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자웅(雌雄)을 더욱 다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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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적이었기 때문에 역경을 돌보지 않고 생사(生死)도 무릎쓰고 홀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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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지금 그 일면만을 관찰하고 '침착' '용맹' '권모' '술수'라고 한다면 어찌 옳다고 할것인가? 을지문덕은 참으로 우리 선조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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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견으로 망령된 무리들이 을지문덕에 대하여 평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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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은 김춘추만 못하다. 을지문덕은 용맹함이 지나치고 시세를 파악 못하여 적국의 화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죽은 후 몇 십년 후에 고구려는 끝내 외환으로 멸망하였다. 김춘추는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정세를 큰 안목으로 통찰하고 강한 이웃나라들의 힘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끝내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신라(新羅) 900년의 기초를 튼튼하게 하였으니 두사람의 우열은 이것만 봐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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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무슨 말인가? 김춘추는 한 왕조의 현군(賢君)이었을 뿐 이었다. 그 사업이 신라와 시종(始終)할 뿐 이었으니 혁거세(赫居世)의 왕통이 끊어짐에 김춘추의 정신도 역시 없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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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을지문덕은 영양왕 때의 을지문덕이 아니라 우리나라 단군자손의 을지문덕이며, 고구려의 을지문덕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을지문덕이며, 일시의 을지문덕이 아니라 우리나라 억만세의 을지문덕이니 주몽의 왕통은 망하였어도 을지문덕의 정신은 이어져 왔고 김춘추는 죽었으나 을지문덕은 죽지 아니하였다. 그 빛나는 정신은 만고에 상존(常存)하였으니 회원진(懷遠鎭) 강화 때 실명씨(失名氏)의 노(弩)가 되어 양(楊)씨 집안의 교만한 어린 아이 수양제의 그 가슴을 상하게 하였고, 안시성 전투때 양만춘(楊萬春)의 화살이 되어 당나라 영주(英主) 이세민의 눈을 잃게 하였고, 윤관(尹瓘)의 말이 되어 만주 벌판을 짓밟았으며, 강감찬(姜邯贊)의 검이 되어 여진의 난리를 평정하였고, 정지(鄭地)의 화약이 되어 수십 척의 왜선을 불태웠고, 이순신(李舜臣)의 철갑산이 되어 풍신수길(豊臣秀吉)의 강병을 무찌렀던 것이 다.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메말라도 을지문덕의 위대한 힘은 닳지 않았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어져도 을지문덕의 기백(氣魄)은 전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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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금까지 국호를 대한국(大韓國)이라 하고 백성을 대한민(大韓民)이라고 하여 여기서 살고 여기서 늙으며, 여기서 노닐고, 낚시질하고, 노래하고, 곡(哭)할 수 있는 것이 어찌 을지문덕의 공덕 아닌 것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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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을지문덕은 우리나라를 창조하신 위인이며 우리 후손에게 독립심을 가르치신 성신(聖神)이시니 위대하고 위대하다! 비록 수십 세대후에 못난 정치가들이 그 광채를 가리고 수백 년 후의 어리석은 유학자들이 그 가치를 묻어 버려 영웅의 진면목을 찾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지금 풍운이 더욱 어지럽고 고통이 날로 더하여 위급함이 거의 육박하니, 내가 생각 건대 을지문덕의 위대한 혼령이 수천년 묘지에서 뛰어 나와 말안장을 다시 채우고 장부의 칼을 다시 휘둘러 피터 대제나 워싱턴과 같이 육대주를 나란히 휘달리고, 닐슨 제독이나 비스마르크와 같이 그 빛을 다투어 우리나라 독립의 기초를 튼튼히 할 날이 멀지 않았다. 누가 감히 을지문덕을 김춘추에게 다시 비교할 수 있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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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중국 서쪽을 돌아 보고 온 나의 친구가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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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滿洲)·봉천(奉天)·길림(吉林)·여순(旅順) 등지를 여행해 보니 종종 석관(石棺)의 발현과 궁실의 유제(遺制)로 우리 조상의 흔적을 살필 수 있는 것이 많은데 그중 어느 마을은 고려촌이라고 하고 있었다. 이는 고구려인이 어려움을 이기고 거주하던 곳이었다. 어떤 성(城)은 고려성(高麗城)이라고 하는데 이는 옛날에 고구려인이 성곽을 쌓아 수비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비록 천백년의 세월이 지나 풍물과 산천이 바뀌었으나 옛날 우리 선조들 이 큰 창 큰칼로 진격하고 튼튼한 성과 갑옷으로 적을 막던 옛터에 지금에는 아득한 후손이 한 마리 말을 타고 나그네가 되어 떠돌자니 고금변천의 감회가 새롭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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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탄식하였다. 그 땅은 을지문덕과 우리 선조들이 경영하던 곳이었다. 그때 피·땀을 흘리고 재산을 소비해가며 생명을 돌보지 않고 싸워 지켰던 터를 후손이 못나서 다른 사람에게 다 넘겨 주고 말았다. 을지문덕이 이미 먼 나라 사람이 되었고, 연개소문이 이미 죽었으니 그후 인재가 없어 오직 서희(徐熙)가 거란의 사신 소손녕(蕭遜寧)에게 "당신 나라의 동경(東京)도 역시 우리 땅이었다"라고 냉소하여 말한 적이 있을 뿐이오, 진실로 참담한 수완으로 외족(外族)과 쟁투한 사람은 봉황의 꼬리나 기린의 뿔같이 드물고 오직 그 중간에〔이하 는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설을 따름〕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중국의 풍속을 배척하고 거란의 사신을 거절하여 국토 개척의 큰 뜻을 품었다가 불행히 일찍 죽어 그 뜻을 이루지 못 하였다. 그 후로 우리나라 사람의 기개가 점점 줄어 들어〔이익의 설은 여기까지 임〕우리 나라 제도가 이처럼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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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그만 산하(山河)도 찢기고 쪼개져 단군이래로 4천년 동안 전수되어 온 중심지도 적에게 빼앗겨 우리 형제는 설 땅 조차 없게 되었으니 어느 겨를에 압록강 서쪽까지 생각하겠는가? 아! 20세기의 새로운 을지문덕이 다시 태어남이 어찌 이렇게 늦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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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구려가 비록 강대하였으나 싸워 얻은 토지와 백성을 제외하고 본래 우리나라만을 살피면 지금의 경기·평안·강원·함경·충청 등 수십 군이었고 토지는 천리(千里)도 안되었으며 인구는 수백만에 불과하였으니 조그만 나라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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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토지와 백성을 잘 이용한 결과 압록강 밖으로 만여 리의 땅을 획득하여 언어와 종족이 다른 수백만 이민족을 거느렸으며, 강약(强弱), 중과(衆寡)가 다른 중국 대륙을 점차 정복하여 공격하면 반드시 탈취하고 전쟁하면 반드시 승리하고, 수비할 때 견고히 하고 전 쟁이 없을 때 서로 격려하여 대중관계사(對中關係史)이래 가장 위대한 전쟁〔즉, 살수대첩〕 의 명예가 우리민족에게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역대의 임금 재상들은 서자(庶子)의 허약 한 자세로 일관하여 민심을 혼란케 하고, 외경사상(外競思想)을 힘을 다해 꺾어, 조선 중기 에 외국의 침입 소식이 있자 조정의 신하가 모두 대책이 없어 적봉(賊鋒)이 미치자 얼마나 큰 치욕을 겪었던가? 지금도 산천의 백발노인들은 모이면 종종 임진왜란을 이야기하며 통탄 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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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진화론(進化論)에 의한다면 중고시대(中古時代)때 굳세고 용맹했던 우리민족은 우승세력(優勝勢力)으로 세계에 그 힘을 떨쳤을 것인데 어찌하여 수치스러움이 이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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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볼 때 한국민의 용감하고 비겁함, 우수하고 못남은 그 나라의 한 두 선구적인 영웅의 고무·격려에 달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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