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或은 이를 웃으리라. 煩瑣하고 無益한 일이라고. 그러나 錯誤가 이에서 校正되느니라. 訛誤가 이에서 歸眞되느니라. 각기 제 時代의 本色이 이에서 綻露되느니라. 이미 散失된 朝鮮歷史上의 大事件이 이에서 發見되느니라. 그러므로 이것이 곧 地中古蹟을 發掘함에 비길만한 朝鮮史硏究의 秘鑰이니라.
3
自來로 不知者들이 이 秘鑰을 妄侵하여 도리어 本義를 眩亂케 한 일이 많다. 例를 들면 無名氏의 《東言考略》에 新羅가 「扶餘」를 惡하여 「부여」 죽인다는 말이 생겼다 하며, 李雅亭(아정 이덕무)이 高句麗는 「꾀꼬리」의 義를 取함이라 하며, 丁茶山(다산 정약용)이 慰禮城은 圍籬(울)의 義를 取함이라 하며, 近日 日本의 어떤 學者들이 弁韓의 「弁」은 音이 「배」라 뱀의 「배」니, 巳韓의 義요, 馬韓은 午韓의 義니, 辰韓·馬韓·弁韓은 다 十二支에서 取하여 所在의 方位를 証함이라 하니, 이같이 佐証 없이 비슷한 音을 取하여 武斷을 내릴진대, 구태여 부여 죽인단 말이 扶餘 때문에 생겼겠느냐? 부였다(空) 부여타(白) 等의 말도 다 扶餘 때문에 생긴 말인 것이며, 구태여 꾀꼬리만 高句麗의 이름 지은 原因이 될 뿐이랴? 꾀꼬리(鶯), 개꼬리(狗尾), 궤꼬리(蟹尾) 等이 모두 高句麗란 이름의 所自出이 될 것이며, 百濟 初年에 甁山·馬首·高木·牛谷 等 城柵이 다 그 所在地의 地名을 가지고 이름한 者인데 홀로 그 首都의 慰禮城을 漢江 古名 「아리」에서 取치 않고 圍籬의 뜻으로 이름하였다함이 何說이며, 弁韓의 「弁」을 배얌의 「배」에서 뜻을 取하였다함은 더욱 一駁할 價値가 없지만, 三韓의 位置가 明白히 辰韓은 東이며 馬韓은 西이며 弁韓은 南이거늘, 이제 馬韓은 午方이라 弁韓은 巳方이라 함이 何에 據함인가?
4
무릇 古史上의 吏讀文으로 쓴 名詞의 解釋에 許多의 困難이 있으니, 대개 吏讀文은 漢字의 全音·全義 或 半音·半義로 만든 一種의 文字라. 그러나 吏讀文이 口訣文으로 化하기 前에는 字母의 發見만 못 되었을 뿐 아니라 一定한 法則도 없어서, 같은 「白」 字이지만 何故로 「上白是」의 「白」은 그 全義를 讀하여 「살」이라 하면서, 「白良」의 「白」은 그 半音을 讀하여 「바」라 하느냐? 하면 그 解答이 없으니 그 困難이 (一)이오.
5
漢字로 지은 州郡縣의 이름은 景德王에 始한 바, 그 變更의 際에 推火(밀불)가 密城이 되고 今勿奴(거물라)가 黑壤이 된 것 같이 古名을 譯用한 것도 있지만, 退火가 義昌이 되며 比火가 安康이 되어 아주 古名의 本義를 버리고 漢字로 지은 地名이 더 많으며, 中華(중국)의 官名을 模倣함은 弓裔王에서 始하여 高麗 光宗에서 完成이 되었으나, 이는 또 一個도 古名을 譯用한 것이 없는 즉 名義의 源流를 찾는 同時에 매양 前後 際斷의 憾이 없지 않으니, 그 困難이 (二)오.
6
《三國史記》나 其他 史冊에 吏讀文으로 쓴 當時의 本名으로 實錄에 記치 않고 後來에 譯用한 漢字의 名詞를 記하였으니, 例를 들건대 百濟가 쓰던 漢江의 이름인 郁里河가 겨우 蓋鹵王紀에 一見한 以外에는 오직 新羅가 고친 이름인 漢江이 溫祚 初年부터 보였으며, 高句麗가 쓰던 遼東城의 이름은 烏列忽이거늘, 《三國史記》에 烏列忽이 겨우 地志에 一見한 以外에는 모두 隋·唐人이 稱呼한 遼東城으로 적혔을 뿐이니, 그러면 아주 可考할 수 없게 된 本名도 許多할 뿐더러 어떤 것은 當時의 本名인지 後來의 譯名인지 알 수 없게 된 것도 적지 않으리니, 그 困難이 (三)이오.
7
朝鮮의 史冊은 從古로 著者만 있고 讀者는 없는 書籍이라, 무슨 史冊이든지 訛字·誤字·疊字·漏字가 紙幅에 充滿한 中에 더욱 古地名과 古官名 같은 것은 夷言으로 排斥하여 그 訛·誤·疊·漏를 거의 謄寫者나 印板者의 自由에 放任하여 訂正者가 없었으며, 中華(중국) 二十四史 中 이른바 朝鮮列傳 或 東夷列傳에 적힌 名詞가 傳聞으로 音譯한 것도 있지만, 直接으로 當時 吏讀文의 本名을 그대로 가져다가 쓴 것도 적지 않으나, 그러나 數百年來로 古書 考證에 늙은 中華(중국) 文士들이 남의 歷史에는 事情도 隔膜일 뿐더러 勞力도 좀 아꼈는지라, 그리하여 모든 事實의 誤나 文句의 訛도 發見한 이가 없거늘, 하물며 彼等의 눈에 서투른 一般名詞이랴. 그러므로 그 朝鮮列傳 等의 訛·誤·疊·漏가 또한 대단하여 信用하기 危險한 記錄들이니, 그 困難이 (四)요.“”
8
言語는 死板的이 아니요 活板的이라, 時代를 따라 生滅하며 變化하는 故로 訓蒙字會나 龍飛御天歌나 處容歌 같은 것에 據하면 「코」 「鼻」가 「고」며 「가랑」 「脚」이 「가랄」이며, 「잇기」 「苔」가 「잇」이며, 「江」이 「가람」이며, 「바다」가 「바랄」이요. 《三國史記》나 《滿洲源流考》 같은 것에 據하면 「鐵」이 「물」이며, 森林이 「와지」며, 「管境」이 「그러면 이밖에 消滅 或 變改된 말이 얼마인지 모를지니, 그 困難이 (五)라.
9
그러나 朝鮮史를 硏究하지 않으려면 모르거니와 硏究하려면 여기에 힘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左方에 千慮의 一得을 陳述하여 一般 讀史者의 斤正을 求하노라.
12
이를테면 《三國史記》 職官志에 角干의 一名을 「舒弗邯」이라 「舒發翰」이라 하였으니, 角은 「쇠뿔」의 義요 「舒弗」, 「舒發」은 쇠뿔의 音이라. 武官이 쇠뿔로 만든 활을 씀으로 官名을 지음이니, 近世까지도 嶺南人이 武官을 「쇠뿔에기」라 함이 그 遺風이오. 「干」, 「邯」, 「翰」은 다 「한」의 音이니(邯은 邯鄲의 邯과 同音), 그런즉 「角干」, 「舒弗邯」, 「舒發翰」은 다 쇠뿔한으로 讀할 것이니라.
13
列傳에 異斯夫(이사부) 一名 苔宗이라 하며 居柒夫(거칠부) 一名 荒宗註1)이라 한 바, 「異斯」는 苔의 義니 「잇」이오, 居漆은 荒의 義니 「거칠」이오, 夫는 經書諺解의 士大夫를 「사태우」로 解함에 依하여 그 古音의 「우」임을 알지니 宗의 義니 異斯夫(이사부)는 「잇우」로 居柒夫(거칠부)는 「거칠우」로 讀한 者이며, 本紀에 「炤智一作毘處」註2)라 하며 「伐暉一作發暉」註3)라 하였은즉, 「炤智」의 「炤」에서 半義를 取하여 「비」로 讀하며 「智」는 全音을 取하여 「치」로 讀한 者니 炤智와 毘處가 同一한 「비치」며 吏讀文에 매양 弗·發·伐로 通하는 者인즉 「伐暉」와 發暉가 同一한 「뿔휘」니 뿔휘는 龍飛御天歌에 據하여 今語의 「뿔이」 「根」이니라. 地理志에 「三陟郡本悉直國」이요 金壤郡本休壤郡註4)이라 하였은즉, 「세치」의 音이 悉直이 되며, 「세치」의 「세」는 義로 쓰고 「세치」의 「치」는 音을 써 三陟이 됨이요, 「쇠라」를 音으로 써 休壤이 되고 「쇠」를 義로 써 金壤이 됨이니라. 이 따위는 이루다 셀 수 없으므로 아직 略하거니와, 以上은 곧 他의 遠證을 待할 것 없이 本文에서 그 解釋을 얻을 者니라.
15
이를테면 古史를 讀하다가 地名의 꼬리에 달린 「忽」·「波依」·「忽次」·「彌知」 같은 것들을 만난다 하자. 「忽」이 곧 「골」인가의 疑問이 있지만 疑問이 確說이 되지 못하니, 반드시 彌鄒忽·述爾忽·比列忽·冬比忽 等 모든 「忽」의 同類를 얻어야 確說이 될지며, 「波衣」가 곧 「바위」인가의 假定이 생기지만 假定으로 斷案을 내리지 못할 것이니, 반드시 租波衣·仇斯波衣·別史波衣 等 모든 波衣의 同類를 얻어야 斷案이될 것이며, 甲比忽次·要隱忽次·古斯也忽次 等 모든 忽次의 同類를 얻으면 忽次가 곧 「고지」 半島인 줄을 알 것이며, 松彌知·古馬彌知·武冬彌知 等 모든 彌知의 同類를 얻으면 彌知가 곧 「미지」 水灣인 줄을 알 것이니라. 漢陽의 南山도 木覔이요, 平壤의 南山도 木覓인즉, 南山과 木覓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 關係로 因하여 「木覓」은 마메 곧 南山의 吏讀文인 줄을 알 것이며, 松山의 古號가 夫斯逹(音대)요, 松峴의 古號가 夫斯波衣요, 松嶽의 古號가 扶斯岬인즉, 松과 夫斯의 서로 따라다니는 原因으로 因하여 松의 古語가 「부스」 곧 夫斯인 줄을 알 것이니라.
16
以上 本文에서 그 解釋을 얻을 수 없는 名詞는 그 同類를 搜集하여 推斷할 者니라.
18
이를테면 黃海道 文化縣의 九月山을 檀君의 阿斯達이라 하고 解者가 가로되, 阿斯는 「아홉」이요 「達」은 「달」이니 九月의 義라 하나, 阿斯를 앗·엇·옷·웃, 或 아쓰·어쓰·오쓰·우쓰 等으로 讀할 수 있으나 아홉으로 讀할 수 없으며, 達의 音은 「대」니 「대」는 山嶺의 義니, 淸州의 上黨山을 「것대」라 稱하는 類니, 《三國史記》 地理志에 蘭山의 古名이 昔達이요 菁山의 古名이 加支達이요 松山의 古名이 夫斯達이니, 阿斯達의 達도 그와 같이 音은 「대」요 義는 「山嶺」이니 「달」月의 義로 解함이 不可하며, 九月山의 古名은 弓忽이요 弓忽의 別名은 釼牟縣 或 窮牟縣이니, 三名을 合하여 보면 弓忽은 「굼골」로 讀할 것이니 高句麗 末葉에 義兵大將 釼牟岑(검모잠)이 義兵을 起하여 唐과 싸우던 곳이니, 굼골의 名山인 故로 굼골山이라 함이니, 마치 金剛山이 「개골」에 있는 山인 故로 개골山이라 한 類어늘, 이제 굼골을 九月로 訛傳하고 九月을 阿斯達로 僞證하여 檀君의 後裔가 九月山으로 移都한 事實을 僞造하였으나, 이는 新羅 景德王이 北方 州郡名을 옮기고 따라서 古蹟까지 옮길 때 만든 것이요 事實이 아니니라.
19
北扶餘의 古名이 助利非西요, 哈爾賓(하얼빈)의 古名이 非西岬이라. 俗語에 八月 秋夕을 가우節이라 하고 《三國史記》에는 嘉俳節이라 하였으니, 非·俳 等 字가 古音에 「우」임이 明白하니, 非西와 阿斯가 音이 相近할 뿐더러 檀君 後裔인 解夫婁(해부루)는 哈爾賓(하얼빈)에서 東遷하여 東扶餘가 되며, 解慕漱(해모수)는 哈爾賓(하얼빈)에서 崛起하여 北扶餘가 되었는즉 阿斯達은 곧 非西岬이니, 今 哈爾賓(하얼빈)의 完達山이 그 遺地가 될것이다.
20
以上은 그 父나 祖의 姓氏를 얻으면 그 子孫된 其人의 姓氏도 自然 알게 되듯이 本 名詞의 發生한 地方이 模糊하면 그 古名을 찾아 眞假를 아는 類니라.
22
이를테면 陳壽(진수) 《三國志》 三韓傳에 「諸官」을 다 「智」라 名하였다 하며, 其中의 大官은 「臣智」라 名하였다 하며 臣智를 或 「臣雲遣支」라 稱한다 하였으니, 智·臣智·臣雲遣支 等을 當時에 무엇으로 讀하였겠는가? 古代에 諸 小國의 宗主 되는 大國을 辰國이라 하며, 諸 小王을 管轄하는 大王을 辰王이라 하며, 諸 蘇塗(神壇)의 宗主되는 大蘇塗를 臣蘇塗라 한 바, 「臣」·「辰」 等을 다 「신」으로 讀할 것이니, 「신」은 太의 義며 總의 義며 上의 義며 第一의 義요, 智의 音은 「치」니 官名의 支·智 等 字는 모두 「치」로 讀할 것이니, 臣智 則 「신치」는 執政의 首相이오. 「臣雲遣支」의 「雲」은 下文의 「臣雲新國」의 「雲」을 여기에 疊載한 者니, 雲字를 빼고 신크치로 讀함이 可하며, 臣遣支는 高句麗의 太大兄이오 新羅의 上大等이니, 「신크치」의 音이 「臣遣支」가 되며 義가 「太大兄」 或 「上大等」이 됨이니라(大兄의 一名은 近支).
23
무릇 「太大」는 모두 「신크」니 淵蓋金(연개금)의 太大對盧[金庾信(김유신)傳에 보임]는 「신크마리」로 讀할지며, 金庾信(김유신)의 太大角干은 신크쇠뿔한(쇠뿔한의 義는 이미 前述)으로 讀할지니라.
24
著者가 年前에 北京 順治門內 石燈庵에 寓居할 때 一個의 東蒙古僧을 만나 東西南北을 가리키며 蒙古말에 무엇이냐 물은즉, 「東은 준라, 西는 열라, 南은 우진라, 北은 회차」라 하여 그 名稱이 高句麗의 順那·涓那·灌那·絶那 等 東·西·南·北 四部와 비슷하므로, 매우 驚奇하여 因하여 漢字로 써서 서로 問答하다가 元 太祖 皇帝의 成吉思汗(성길사한)라 稱한 뜻을 물으니, 成吉은 「싱크」니, 蒙古말에 最大의 義요 思는 音이 「쓰」니 威權의 義요 汗은 帝王의 義니 成吉思汗(성길사한)은 곧 無上最大의 威權을 가진 帝王이란 義라 하니, 「싱크」는 대개 朝鮮 古語의 「신크」가 變化한 者니, 三國 吏讀文의 學者의 붓으로 元 太祖의 名을 쓰자면 太大思라 할 것이로다. 그러면 太大의 名을 가지고 歷史上에 現한 者가 金庾信(김유신)·淵蓋蘇文(연개소문)·成吉思汗(성길사한) 三人이니, 비록 文野의 別과 活動範圍의 大小는 懸殊하나 각기 一時 東洋政治 舞臺上의 大怪物이니, 또한 一種의 佳話라 할 것이다.
25
以上은 後世의 沿革을 조차 本 名詞의 意義를 얻는 類니라.
27
前述한 모든 名詞가 거의 同一한 名詞를 互異한 字로 쓴 것이지만 그 가운데 가장 複雜한 者가 (二)니,
28
(一)은 「라」니, 沙羅가 沙良도 되며, 加瑟羅가 加西良도 되며, 平壤이 平穰·平那·百牙·樂浪·樂良 等도 되며 大良이 大耶도 되며, 加羅가 駕洛·加耶·狗邪·加良 等도 되며, 安羅가 安邪도 되며 邁羅가 邁盧도 되며, 新羅가 斯盧도 되며, 順那·涓那 等이 順奴·涓奴 或 順婁·涓婁 等도 되어 가닥을 잡을 수 없으나, 其實은 羅·良·盧·奴·婁·那·牙·壤·耶·邪 等이 모두 「라」로 讀할 者니, 「라」는 川의 義라. 《三國史記》에 「故國壤一名故國川」註5)이 「壤」 等의 「라」 됨을 證하며 「素那一名金川」註6)이 「那」 等의 「라」됨을 證하며, 沸流奴 一名 沸流川이 「奴」 等의 「라」됨을 證하니라. 穰·壤 等 字가 어찌 「라」가 되는가? 訓民正音에 「△如穰字初發聲」이라 하니, 「△」은 이제 消滅된 音이나 《老乞大》·《朴通事諺解》 等 書에 北京話의 「日」을 「△」로 發音하였은즉, 「△」은 卽 ㄹ에 비슷한 者라. 穰字의 全聲이 랑에 비슷한 「」인 故로 吏讀文에 펴라(펴라 씀이 可하나 「」가 消滅된 字인 故로 「라」로 代함)란 물을 쓸 때, 音으로 써서 平穰·平壤·百牙 等이 되며, 上字는 義로 下字는 音으로 써서 樂浪·樂良 等이 되며, 上字는 音으로 下字는 義로 써서 浿河·浿江·浿水 等이 됨이니, 俗語에 平壤笠을 「펴랑이」라 함을 보아도 平壤을 吏讀文에서 「펴라」로 讀함이 明白하니라. 平壤이나 浿水가 同一한 「펴라」이면 「펴라」가 어찌 水名되는 同時에 또 地名이 되겠는가? 公州의 「버드내」가 水名이지만 그 水邊의 驛名도 「버드내」요, 淸州의 「까치내」가 水名이지만 그 水邊의 村名도 「까치내」니, 《三國志》에 「句麗作國好傍大水而居」註7)라 한 바, 水邊에 作國함은 朝鮮人 古來의 習俗이라. 그러므로 羅·良·盧·奴 等 모든 「라」의 地名이 있음이며 나라(國家)의 名稱이 나루(津渡)에서 始함이니라. 平壤과 浿水가 이와 같이 갈리지 못할 關係가 있거늘, 順庵(순암 안정복) 先生은 浿水를 大同江으로 잡고서 衛滿(위만)의 平壤을 그 五百里 以外의 漢陽에 와서 求하며, 白鳥庫吉(백조고길)은 平壤은 今 平壤으로 잡고서 衛滿(위만)이 건넌 浿水를 鴨綠江 下半部라 하였으니, 이는 다 「펴라」란 이름이 吏讀文의 平壤·浿水 等 됨을 모른 까닭이니라.
29
(二)는 「불」이니, 三韓의 「卑離」와 百濟의 「夫里」와 東扶餘·北扶餘·卒本扶餘·泗沘扶餘 等의 「扶餘」와 推火·音汁火 等의 「火」와 不耐城의 「不」과 沙伐·徐羅伐 等의 「伐」이 다 「불」로 讀할 者니, 「불」은 平地의 義요 都會의 義라. 淸朝 乾隆皇帝의 欽定 《滿洲源流考》에 三韓의 卑離를 곧 淸朝 官名의 貝勒(패리)와 같은 者라 하였으나, 그러나 이를 百濟의 地理志와 對照하면 牟盧卑離는 毛良夫里요, 辟卑離는 波夫里요, 如來卑離는 爾陵夫里요, 監奚卑離는 古莫夫里니, 卑離는 國名이요 官名이 아니니, 그 詳細는 拙著 《前後三韓考》에 보이니라.
30
以上은 곧 複雜한 異名字에서 音과 義와 沿革으로써 그 同名됨을 發見한 者니 朝鮮 古史의 硏究에 非常한 도움이 있는 者니라.
32
前述한 同名異字는 「라」·「불」 等 普通名詞에 關하여 同名이 異字로 쓰인 것을 論述한 바거니와, 여기에서는 固有名詞 가운데 字의 同異는 不問하고 名이 同一한 것을 論證하려 한다. 例를 들면 《東史綱目》 地理考에 大同列水·漢江列水의 辨이 있으며, 松花鴨綠·遼河鴨綠, 今 鴨綠의 爭이 있으나 其實은 是라 하면 皆是요 非라 하면 皆非니, 朝鮮 古語에 「長」을 「아리」라 하였으니 長白山 古名의 「阿爾民商堅」의 「阿爾」가 이를 證하며, 「鴨」도 「리」라 하였으니 鴨水 一名 阿利水가 이를 證하는 者라. 대개 古人이 一切의 長江을 「리가람」이라 稱하니라.
33
漢字를 輸入하여 吏讀文을 만들어 쓸 때 「리」의 音을 取하여 阿利水·烏列江·句麗河·郁里河 等으로 썼으니, 「리」의 「」가 「아」·「오」·「우」 音의 間音인 故로 阿·烏·句·郁 等의 各種 取音이 不同함이오. 義로 써서 鴨子河 或 鴨綠江이라 함이니, 鴨綠은 炤智의 吏讀와 같이 「리」의 「」를 鴨의 義에서 取하고 「리」의 「리」를 綠의 音에서 取함이니, 朝鮮族 分布의 順序를 따라 各 리가람의 得名한 先後를 推想하면
34
第一次에 完達山下 哈爾賓(하얼빈)에 朝鮮을 建設하고 松花江을 「리가람」이라 하였으니, 《李相國集》 《東明王篇》 註에 引한 古記의 柳花王后가 가리킨 「熊心山下鴨綠水」와 遼史 聖宗本紀의 「改鴨子河爲混同江」이, 松花 古名의 「리」임을 證하며, 第二次에 南下하여 遼河를 보고는 또한 「라가람」이라 하였으니 《三國史記》 地理志의 「遼東城本名烏列忽」註8)과 《三國遺事》의 「遼河一名鴨綠」註9)이, 遼東河 古名의 「리」임을 證하며, 第三次에 東進하여 今 鴨綠江을 보고 또한 「리가람」이라 하였으니, 至今까지 變치 않는 鴨綠의 名이 그 古名의 「리」임을 證하며, 第四次에 西出하여 永平府의 灤河를 보고 또한 「리가람」이라 하였으니, 永平府志의 郁列河·武列河가 灤河의 古名이 「리」임을 證하며, 第五次에 京畿道에 漢江을 보고 또한 「리가람」이라 하였으니, 溫祚本紀의 「慰禮城」과 廣開疆土好太王의 碑文의 「渡阿利水」와 蓋鹵王本紀의 「郁里河」가 漢江 古名이 「리」임을 證하며, 第六次 慶尙道에 至하여 洛東江을 보고 또한 「리가람」이라 하였으니, 新羅 地理志의 《阿尸良》과 《日本書記》의 「阿禮津」이 洛東 古名의 「리」임을 證하니라. 列水·冽水 等은 中華(중국)人이 烏列水·郁列水 等을 略하여 쓴 者니, 모든 列水가 곧 모든 鴨綠江이요 모든 鴨綠江이 곧 모든 列水니, 時代와 境遇를 따라 位置를 區別함은 可하거니와, 만일 列水를 一個를 만들며 鴨綠江을 一個를 만들려 함은 癡想에 不過하니라.
35
《山海經》이 비록 後人이 伯益(백익)에게 僞託한 書이나 司馬遷(사마천) 《史記》에 《山海經》을 說及하였는즉 中華(중국) 秦·漢 以前의 書됨은 明白한바, 其中의 「朝鮮在列陽東海北山南列陽屬燕」의 文에 의하여 先儒들이 「列」은 漢水요 陽은 水北의 義요 朝鮮은 今 平壤이라 하여 「朝鮮在列陽」을 一句로 讀하였으나, 그러면 「列陽屬燕」을 어떻게 解釋할까? 列陽의 陽은 平壤의 壤과 같이 水의 義요 初聲을 讀하여 「라」로 發音할 者니, 中華(중국)人이 當時 朝鮮人의 쓰는 吏讀文의 烏列陽 或 郁列陽을 略하여 列陽이라 쓴 者라. 「朝鮮在列陽東」이 一句요 「海北」이 一句요 「山南」이 一句요 「列陽屬燕」이 一句니, 右의 列陽은 곧 永平府의 灤河를 가리킨 者요, 朝鮮은 廣寧平壤 或 海城平壤을 가리킨 者요 海北은 渤海의 北을 가리킴이요 山南은 無閭의 南을 가리킴이니, 이것이 대개 秦開 入寇 以後의 記錄이므로 列陽屬燕이라 함이니라.
36
關野貞一(관야정일)註10)의 朝鮮古蹟圖 解說註11) 黏蟬碑註에 그 碑의 發見에 依하여 歷來 爭論되던 「列水」는 그 大同江됨이 可하다 하였으나, 이는 반드시 《漢書》 地理志의 「列水西至黏蟬入海」註12)를 據함일 것이나, 그러나 이는 (一) 列水의 多數됨과 (二) 《漢書》 註의 顔師古(안사고) 等의 僞增이 있음을 모르는 말이다. (二)에 屬한 論辨은 拙著 平壤貝水考와 前後三韓考에 보이니라.
37
余友 某君이 「鴨綠」의 「鴨」은 音 「압」이니 前의 義요, 鴨綠 古號 「馬訾」의 「馬」는 音 「마」니 南의 義요, 松花江 古號 粟末의 「粟」은 音 「속」이 裡의 義라 하니, 鴨綠의 鴨은 誤解이나 其餘는 近理하니, 松花江은 滿洲語에 「송리」라 하니 「송리」는 「속리」의 變化일지니 속리는 國裡의 리란 義일지며, 鴨綠의 一名이 梅河이니 「梅」가 馬訾의 「馬」와 비슷하니 國南의 長江인 故로 「마리」라 함이며, 灤河·遼河·漢水 等의 區別한 名詞는 찾을 수 없으나 모두 「리」로 할 때 그 區別이 있었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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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에는 地名뿐 아니라 人名도 父子祖孫이 같이 짓고, 世代 或 大小 等 字를 그 上에 冠하여 區別하였으니, 金富軾(김부식)이 新羅의 兩 儒理王을 疑하여 其一은 禮字로 改한다 明言하며, 百濟의 兩 蓋婁王을 疑하여 其一을 蓋鹵로 改하였으나, 이는 다 周公·孔子의 諱法이 輸入된 뒤의 眼目으로 古史를 讀한 까닭이라. 麗朝 初年까지도 그 遺風이 있었음으로 安東權氏의 族譜에 據하면 權太師의 名이 幸이요, 그 子의 名이 仁幸이니라. 이 따위 關係를 모르고 古史를 硏究하면 마침내 盲人의 夜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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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上의 敍述한 바는 곧 拙見으로 얻은 바 古史上 吏讀文으로 쓴 名詞의 解釋法이라. 이 따위 解釋에서 얻는 史學的 硏究上의 效果를 略陳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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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前人이 이미 證明한 者는 더욱 堅確하게 함이니, 미치 咸昌이 古寧伽耶임은 前人의 說도 있지만, 이제 耶·羅가 同音인 줄을 發見하여 古寧伽耶를 「고링가라」로 讀하는 同時에, 咸昌 공갈못의 「공갈」이 곧 「고링가라」의 縮音임을 알 것이며, 따라서 「고링가라」의 位置가 더욱 明白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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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由來의 疑問을 明答할 수 있으니, 마치 高麗史 地理志에 益山의 武康王陵을 箕準(기준)의 陵으로 載하고, 「俗號末通大王陵」이라 註하며 「一云百濟武王小名薯童」이라 再註하여 兩說을 並存하였으나, 그러나 《三國遺事》에 薯童(서동)이 新羅 眞平王의 女 善化(선화)를 誘娶한 事實을 記하였으며, 《輿地勝覽》에는 武康王이 善花夫人과 彌勒山城을 作할 때, 眞平王이 百工을 보내어 助하였다 하니, 薯의 義는 「마」니 薯童은 곧 「마동」이오 末通은 곧 「마동」의 取音인즉, 武康王은 곧 百濟本紀의 武王 璋(장)이라. 璋(장)의 謚가 武康王이거늘 殘缺한 百濟史에 「康」을 闕하며 璋(장)의 王后가 善花(선화)요, 彌勒山城은 璋(장)과 善花(선화)의 戀愛를 歌하던 遺址어늘, 史家의 參考가 不齋하여 八百歲의 年齡이나 差異가 있는 隔世王인 箕準(기준)의 宮人으로 認하여, 柳冷齋(냉재 유득공)같은 博學者로도 그 益山懷古詩에 「可惜蒼黃浮海日, 船頭猶載善花嬪」의 笑話를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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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前人의 僞證한 者를 校正할 수 있으니, 櫟翁稗說에 「新羅 眞興大王이 碧骨堤」(俗稱 金堤 萬頃 외밤이들을 짓고 稻를 種함으로 後人이 그 恩德을 思하여 稻를 羅祿이라 하다)하였으니, 羅祿의 解도 고린 漢文쟁이의 解釋이거니와, 完山에 그친 眞興의 足跡이 어찌 金堤의 碧骨堤에 가서 稻를 種하리오. 百濟 地理志에 據하면, 碧骨은 곧 金堤 古號요 百濟의 郡이니 碧骨의 베골(稻邑)이니, 百濟가 이 堤를 쌓아 稻田을 作하고 그 利益이 多大함을 紀念하여 (베골)이란 郡名을 냄이 明白하다. 百濟本紀에 稻田을 記한 者 二니, 一은 多婁王 六年의 「始作稻田」이 是요, 二는 古爾王 九年의 「開稻田於南澤」이 是니, 碧骨은 곧 二에 屬한 南澤의 稻田이 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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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 前史의 杜撰을 打破할 수 있으니, 《三國史記》에 昔脫解는 金櫝에서 脫出한 故로 名을 脫解라 하고, 鵲鳴의 瑞가 있었으므로 鵲字 左邊의 「昔」을 借하여 姓을 昔氏라 하였다 하며, 《東史會通》에 高朱蒙(고주몽)은 擧國이 高仰한 故로 姓을 高氏라 하였다 하며, 文獻備考에 余守己(서수기)가 檀君의 九部 君長이 되어 衆人이 附하므로 衆人 邊을 加하여 徐氏가 되었다 하여 各種의 怪說이 紛紜하나, 그러나 三國 中葉 以前에는 人·地·官·等 各種의 名詞를 모두 우리말로 짓고 吏讀文을 쓴 것이니, 어디 이 같은 漢字 破字의 僻習이 있었으랴. 이 따위 破字가 麗朝 中葉에 盛行하여 黃葵가 皇揆가 되고, 鷄鳴聲이 高貴位가 되고, 無古之那가 無古之難이 되고, 身負三椽이 王字가 된다는 等 說이 《高麗史》에 보인 者가 許多한 바, 이 時代의 이 習慣을 잘 아는 文士들이 古記를 收拾하다가 말로 지은 名詞를 漢字의 義로 解하여 古史의 面目을 汚損함이 적지 아니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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吏讀文的 名詞의 解釋이 이와 같이 古史 硏究에 有益하나, 그러나 반드시 獨斷을 避함이 可하니, 例하면 淵蓋蘇文(연개소문)의 「蘇文」은 「신」으로 讀함이 可하나 乙支文德(을지문덕)의 文德은 「묵」인지 「문」인지 「무드」인지 알 수 없음은, 前者는 《三國史記》의 그 本註의 「一名蓋金」이 그 解釋을 傳하거니와, 後者는 그 解釋을 失한 까닭이니라. 古資彌凍의 「古資」는 구지(半島)로 讀함이 可하나, 彌離彌凍의 「彌離」는 「밀」인지 「미리」인지 「머리」인지 알 수 없음은, 前者는 古自郡(田城의 古號)의 地形과 歷史의 沿革이 그 說明을 與하거니와, 後者는 그 証據가 없느니라.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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