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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정현동문내위리기 (大靜縣東門內圍籬記) ◈

해설본문  桐溪 鄭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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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漢拏山) 한 줄기가 남쪽으로 1백여 리를 뻗어가서 둘로 나누어 동서의 양 산록이 되었는데, 동쪽에는 산방악(山方岳)과 파고미악(破古未岳)이 있고, 서쪽에는 가시악(加時岳)과 모슬포악(毛瑟浦岳)이 있다. 곧장 남쪽으로 가서 바다에 이르면 송악산(松岳山), 가파도(加波島), 마라도(磨羅島)가 늘어서 있는데, 모두 우뚝 솟아 매우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파고(破古)가 요의 형상이라면 가시(加時)는 호랑이 형상이다. 황모(黃茅)가 들에 가득하고 바다에서 10리쯤 떨어진 거리에 외딴 성으로 둘러싸인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대정현 이다. 현(縣)에는 객사(客舍)가 있고 그 객사의 동쪽이자 성의 동문 안에서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수십 보쯤 떨어진 위치에 울타리를 둘러친 데가 바로 내가 거처 하는 곳이다. 이곳은 전에는 민가(民家)였는데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태수(太守)가 이집을 비워두도록 했다가 나를 거처 하게 한 것이다. 이 가옥의 구조는 두 개의 용마루가 남쪽과 북쪽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다. 북쪽 용마루는 오래되고 누추한 데다 시렁이 네 개가 놓여 있지만 어둡고 새까맣기가 옻칠을 해놓은 듯하다. 집이 낮아서 몸을 바로 세울 수가 없고 방도 좁아서 무릎을 움직일 수가 없고, 그을음이 벽에 가득하여 의관(衣冠)이 더렵혀지므로 잠시도 거처할 수가 없는 곳이다. 남쪽 모퉁이 반 칸은 토상(土床)을 만들어서 침실로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대개 이곳 풍습이 온돌방을 좋아하지 않으니 유독 이 집만은 온돌을 놓았다. 동북쪽 모퉁이 에는 목두(木豆)를 놓아 두어 식량을 저장해 두도록 하였고, 그 밖에 변소 반 가(架)를 만들어 두었다. 서쪽 모퉁이 에는 한 칸을 더 두어 부엌을 만든 다음 진흙으로 바르고 구멍을 내어 밝게 하였으며, 대나무로 문을 만들어서 좀도둑을 막도록 하였다. 남쪽 용마루의 시렁은 북쪽 용마루와 같은데 만든 지가 오래 되지 않아서 그다지 더럽지는 않다. 동쪽으로부터 첫 째 번 칸은 화돌(火堗)을 만들어서 비복(婢僕)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삼았으며, 둘째 빈칸은 비워 두어서 출입을 하는 길로 삼고 판자로 문을 만들어서 열고 닫게 하였다. 절구를 그 곁에다 두었는데 풍습에 절구는 있어도 방아를 찧는 일이 없으므로 부득이 풍습대로 따랐다. 서쪽 두 칸은 중앙을 막지 않고 터놓는 다음 나무 평상을 두어 손님을 접대하는 곳으로 삼았다. 평상이 차지 않는 곳은 대나무를 엮어서 깔았다. 남쪽 용마루에서 북쪽 용마루까지는 거리가 10여척이다. 태수가 나를 위하여 서실(書室)을 두 칸 만들어 주었는데, 동쪽을 등지고 서쪽을 향하고 있다. 동쪽에서 성첩(城堞)까지의 거리는 겨우 4 ∙ 5척이며, 서쪽에는 귤림(橘林)이 있는데 울타리가 높아서 겨우 나무 끝만 보인다. 그 서실의 규모는 들보의 길이가 5척이며 모두 포척(布尺)을 사용하였다. 기둥의 높이는 4척이고, 서까래는 양쪽을 합치면 모두 54개였는데, 주춧돌을 놓지 않고 흙에다 바로 지었다. 지붕은 띠 풀을 엮지 않고 두껍게 쌓아서 빗물이 새지 않을 정도로 하였으며, 그 위에는 길 다란 나무를 빽빽하게 놓고 커다란 새끼줄로 꿰매어서 서로 얽어 놓았다. 이는 해상(海上)이라서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에 항상 지붕이 날아갈 우려가 있음으로 민속(民俗)이 다들 그렇게 한다. 북쪽 한 칸은 온돌방으로 만들고 남쪽 한 칸은 청사(廳事)로 만들었는데, 방안의 길이와 너비는 모두 5척이고 청사도 같다. 온돌을 종이로 발라서 매끄럽게 하고 풀을 엮어 만든 자리를 깔아 놓았으며 청사에 까는 것도 같았다. 방의 서족 벽에는 작은 창이 있고 남쪽 청사를 항해 문이 있다. 청사의 동남쪽 벽에 창이 있는데 모두 작은 것으로 서쪽은 벽을 쌓지 않고 비워 두었다. 또 방 동쪽 벽 시창(矢窓) 아래에 2층으로 된 서가(書架)를 두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수백여 권을 가지런하게 잘 정돈해 두었다. 내가 총관(驄冠)을 착용하고 도의(道衣)를 입고 그 안에서 거처 하면서 한가롭게 책을 보다가 졸리면 턱을 괴고 편한 자세로 조용히 쉬곤 한다. 집의 서쪽 처마는 길이가 짧아서 볕을 가리지 못하므로 기둥을 세 개 세워서 소나무 처마를 만들었다. 너비는 두어 자쯤 되고 길이는 두 칸 집의 끝까지였다. 기둥은 간대를 사용하였는데 크기가 양쪽 손으로 잡을 만하였다. 태수가 말하기를, “바다에서 떠 밀려온 물건인데 대나무 같지만 대나무는 아니다. 사람들의 말로는 절강(浙江)에 있는 갈대가 그만큼 크다고 하는데 내가 그것을 얻어서 진귀하게 여기고 있다가 마침내 여기에다 썼으니, 이 물건에도 수(數)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사람들은 그 말에 박수를 쳤다. 산죽(山竹)을 엮어 대자리를 만들어서 그 위를 덮고 이름을 소나무 처마라고 하였다. 소나무는 한라산 위에 있으므로 베어서 운반해 오려면 여러 날이 걸리므로 그 편리한 것을 취하여 한 것이니 이름과 실제가 비록 맞지 않은 듯하나 소나무와 대나무를 어찌 가릴 것이 있겠는가. 둘러쳐 놓은 울타리는 산죽(山竹)과 뉴목(杻木)과 진시(眞柴)로 틈이 하나도 없이 두껍게 막았으며, 그 높이는 지붕 위를 훨씬 벗어나서 재어보면 한 발 남짓 된다. 길 다란 나무로 띠를 만들어서 묶어 둔 것이 4층인데 그것이 높아서 쉽게 무너질까 염려한 것으로 안팎에다 기둥을 세워 지탱시켜 놓았다. 북쪽, 동쪽, 남쪽3면을 모두 처마에 닿아서 하늘을 전혀 볼 수가 없고 서쪽에서만 볼 수 있으니, 마치 우물 속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울타리 안데 동쪽과 서쪽은 항상 한 자 남짓 여유가 있고 남쪽과 북쪽은 3분의 2가 되는데 남쪽을 향해 판자문을 만들어 놓았다. 서쪽 옆에는 작은 구멍을 만들어 두었는데 음식을 넣어 주기 위하는 것이다. 둘러쳐놓은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 때에 금오랑(金吾郞)이 관대(冠帶)를 갖추고 교상(轎床)에 기대어 문밖에 앉아서 나장(羅將)으로 하여금 나를 잡아서 안으로 들여 넣게 하고 그 문을 닫아 봉함하였다. 울타리 서쪽에 작은 사립문을 만들었는데, 대개 그 전례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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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입정(立定)한 뒤에 토착민 한 사람을 만났는데, 내가 묻기를, “이곳 풍토에 대하여 내가 일찍이 들으니, 항상 비가 와서 갠 날이 적고, 항상 바람이 불어서 조용한 날이 적으며, 매습(霾濕)이 사람에게 침투하면 사람이 간혹 현기증으로 쓰러진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수일 동안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데다 건조하고 다습한 기후가 육지와 그다지 다르지 않으니, 전에 들었던 것이 잘못 들은 것인가?” 하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영주(瀛州)의 전역은 바다 속에 있는 궁벽한 섬이지만 이곳 대정현은 바닷가가 더운 가깝고 지형이 낮아서 장독(瘴毒)기운이 세 읍 주에서 가장 심합니다. 봄여름의 교차 시기부터 8월 초순까지 음산한 비가 연일 내려서 갠 날이 없고 사나운 바람이 무시로 불며 장무(瘴霧)가 잔뜩 끼면 지척에서도 사람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가 되면 기둥, 들보, 항문, 벽 등에 물방울이 샘에서 솟는 듯하고, 의관(衣冠)과 침상 및 자리가 습기를 받아 진흙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옷이나 재물이나 곡식이 있다 하더라도 여름철만 지나고 나면 썩어서 결국 쓸모없게 됩니다. 심지어 문에 부착한 돌쩌귀도 수년만 지나면 역시 모두 녹아 버리고 마는데 더구나 피와 살로 된 몸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 소인(小人)들은 이곳에서 나서 자랐기 때문에 몸에 베었습니다마는 내지(內地)의 조관(朝官)이 어찌 견딜 수 있겠습니까. 가을이 저물 무렵 서북풍이 일면 장려(瘴癘)가 조금 걷히고 햇볕이 드러나는 것이 과연 요즘 날씨와 같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간혹 차지 않고 여름이 간혹 따뜻하지 않아서 기후가 불순하고 추위가 더위가 뒤바뀌기 때문에 의복과 음식을 조절하기가 어려워 질병이 발생하기 쉬우며, 뱀, 지네, 지렁이 등 구물거리는 것들이 모두 겨울철을 지나고도 죽지 않고, 나무와 풀, 무, 부추, 파, 참깨와 같은 식물류들을 비록 한겨울일지라도 모두 밭에서 캐다가 쓸 수 있으니, 이것을 보면 나머지 다른 것은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 혀를 끌끌 차며 탄식하기를, “이곳은 참으로 별다른 지역이구나. 나와 같이 죄를 지은 자가 거처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내가 전에 성상의 견책을 받고 경성판관(鏡城判官)이 되어 북쪽 변방으로 갔었는데, 북쪽 변방의 풍토도 역시 괴상하였지만 그곳은 여기에 비교하면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곳에서는 한 성(城)을 관할하였고 여기에서는 위리(圍籬) 안에 갇혀 있으니, 같이 비교하명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아, 나의 죄는 의심할 여지없이 죽어 마땅한데, 다행히 천왕(天王)의 성명(聖明) 하심을 힘입어 살아서 해도(海島)로 보내졌다. 오늘 내가 그대들과 같이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은덕의 여파가 미친 것이니, 풍토가 좋고 나쁜 것이야 어느 겨를에 노하겠는가.” 하니, 응대하던 사람이 탄식하며 물러갔다. 그래서 그 대략을 기록하여 자식과 조카들에게 내가 거처하는 곳이 이러하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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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시대 정치범은 ‘위리안치’刑 ... 17세기 선비 동계 정온의 유배시절 편지 · 기록 공개... “둘러쳐 놓은(가시) 울타리 안으로 들어 올 때에 금오랑(金吾郞 · 의금부 도사)이 관대를 갖추고 교상(轎床)에 기대어 문밖에 앉아서 나장(羅將)으로 하여금 나를 잡아서 안으로 들여 넣게 하고 그 문을 닫아 봉함했다.” 1614년 영창대군을 죽인 강화부사 정항(鄭沆)의 처벌을 주장하다 광해군의 친국(親鞫)을 두 차례 받고 절해고도인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동계(桐溪) 정온(鄭蘊 · 1569~1641)이 남긴 기록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유배생활의 실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서 대대로 살아온 초계정씨 동계종택으로 부터 고문서와 고서 582점을 기탁 받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최근 이들 문서를 정리하다 동계가 제주도 대정현 유배시절 큰 아들 창시(昌詩)에게 보낸 편지 ‘기시아서(寄詩兒書)’와 유배지의 실상을 꼼꼼히 기록한 위리기인 ‘대정현동문내위리기(大靜縣東門內圍籬記)’를 발견하고 관련 내용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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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의 김학수 전문위원은 “동계의 위리기 는 지금까지 전하는 위리기 중 가장 자세할 뿐만 아니라 후대 편집이 아닌 저자의 친필원고(수본 · 手本)로 남아 있는 거의 유일 한 자료”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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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리안치란 조선시대 왕족이나 고위관료가 큰 죄를 지었을 때 먼 곳에 유배 보내면서 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해 집 둘레를 가시덤불로 둘러싸 외인의 출입을 금한 유배형을 말한다. 따라서 위리안치된 죄인은 주로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가 많은 전라도 연해의 섬에 보내졌다고 하지만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함경도 온성에 위리안치 됐다, 교살된 기준(奇遵 · 1492~1521)처럼 예외도 있었다. 이처럼 위리안치는 조선시대 죽음을 가까스로 면한 일종의 정치범들이 받았던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지만 자료의 부족으로 그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내가 이곳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알려주기 위해 썼다”는 동계의 위리기와 편지, 관련 기록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유배생활의 한 모습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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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배지인 제주도 대정현과 동계의 여정... 위리안치형에 처해진 동계는 늦더위가 한창인 1614년 8월13일 해남 어란포(於蘭浦)에 서 배를 타고 제주로 향했다. 다음날 새벽 별도진(別刀津)에 도착한 동계를 기다린 것은 노숙(露宿)이 었다. 술기운을 빌려 해안의 허름한 담장 아래에서 몸을 구개고 하룻밤을 지 샌 동계는 8월14일 정오 제주부에 들어가 제주목사에게 신고를 했다. 그리고 인근 민가에서 9일을 묵은 뒤 23일 제주부에 서 70여리 떨어진 배소(配所)를 향해 떠났다. 애월포(愛月浦)에 서 하루를 묵고 적막강산과도 같은 대정현에 도착한 것은 24일 그러나 정작 위리안치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가시울타리가 완성이 돼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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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동계는 3일을 기다린 뒤 27일이 돼서야 사방에 가시울타리를 치고 인신을 감금한 위리안치생활에 본격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대정현은 당시 바다 속에 있는 궁벽한 섬인 제주도 지역 중에서도 바닷가와 가깝고 지형이 낮아 장독(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일어나는 독기) 기운이 가장 극심한 곳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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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정온 자신도 한 토착민으로부터 봄여름이 교차할 때부터 8월 초 순까지 음산한 비가 연일 내리고 사나운 바람과 안개 등 습기가 많아 옷이나 재물, 곡식 등은 여름철만 지나면 다 썩어 무용지물이 되고 심지어 문짝의 돌쩌귀도 수년만 지나면 모두 녹아내리니 피와 살로 된 몸이야 두 말할 나위도 없는 곳이란 이곳 풍토와 관련한 무시무시한 얘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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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위리안치생활의 실상... 동계가 안치된 곳은 대정현 동문 안에 위치한 작은 민가로 현의 객사와 가까워 감시가 용이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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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환경이 매우 안좋아 집이 낮아서 몸을 바로 세우기도 어렵고방도 좁아서 무릎을 추스르기도 버거웠다. 돌방을 좋아하지 않는 제주의 풍습과 달리 이 집에만 온돌이 있었는데, 오히려 연기와 그을음으로 의관이 더렵혀지는 등 사람이 기거하기 힘든 환경이었다. 그래도 집의 동북쪽 모퉁이에 곡 식 저장소로 사용했던 목두(木豆)와 변소가 있었으며 서쪽 모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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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는 벽면에 진흙을 발라 만든 한칸 규모의 부엌과 비복들의 거처 및 손님방까지 갖추고 있었다. 집 사방을 가시울타리가 에워쌌는데, 남쪽에 판자문과 서쪽 옆에 음식이 드나드는 배식구인 작은 구멍이 만들어져 있었다. 기준 의 문집인 ‘덕양유고(德陽遺稿)’에 실린 ‘위리기’에 따르면, 위리(가시울타리)의 높이가 4~5길(장 · 丈)이고 둘레가 무려 50자(척 · 尺)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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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오빠로 1776년 9월 정조에 의해 흑산 도로 유배된 김구주(金龜柱 · 1740~1786)는 ‘가암유고(可庵遺稿)’에서 위리의 높이가 3길(장 · 丈)이며 4겹으로 가시울타리를 쳤다고 밝히고 있다. 요즘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한 길은 150~180㎝, 한 자는 25.4㎝ 정도이니, 가시울타리의 높이가 4.5~8m, 둘레 가 12~13m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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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기준은 “가시가 처마까지 닿아 햇빛이 들지 않아 비록 백주 대낮이라도 황혼과 같았으며 하늘을 쳐다보면 마치 우물 속에 들어 앉아 있는 듯 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가시울타리 남쪽에 음식이 드나드는 작은 구멍이 있었고, 그 바깥에는 사령들 이 거처하는 일종의 경비소가 사방에 설치돼 있어 토착민들이 이곳을 ‘산무덤’이라 부를 정도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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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과 차단됐지만 요즘 교도소 생활과 마찬가지로 편지를 보내거나 책을 읽을 수는 있었다. 특히 동계의 경우, 비록 주춧돌도 없이 땅 위에 바로 기둥을 세우고 띠풀로 지붕을 이은 것이지만 대정현감이 서실(書室) 두 칸을 만들어주어 경서와 사서 수백권을 서가에 정돈하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5자 남짓한 방에 온돌을 만들고 종이를 발라 매끄럽게 한 뒤 풀 자리를 깐 서재에 대한 동계의 애착은 각별했다. 김구주도 위리 안치된 6년째인 1784년에 무려 600권에 달하는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위리 안치생활 10년 만인 1623년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풀려난 동계는 1636년 병자호란 때 할복으로 척화의지를 불태웠으며 향리 로 돌아와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다 1641년 향년 73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조선시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김정(金淨) · 송인수(宋麟壽) · 송시열(宋時烈), 제주 방어사로 재임한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제주오현(濟州五賢)’으로 칭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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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기념물 제12호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 · 인성리 · 안성리에 걸쳐 있는 조선시대의 대정현성지(大靜縣城址)로 동문내(東門內)에 유배(流配)온 죄인에게 집 둘레에 울타리를 둘러치거나 가시덤불로 싸서 외인의 출입을 금한 중죄인을 위리안치(圍籬安置)하든 장소이다. 대정현(大靜縣)이 설치된 2년 뒤인 1418년(태종 18) 대정현감(大靜縣監) 유신(兪信)이 왜구의 침입을 막고 현을 보호하기 위해 쌓았던 읍성(邑城)의 터이다. 성벽 둘레는 약 1.5km, 높이 5.3m이며 여장(女墻, 성가퀴) 155개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성벽만 군데군데 남아 있다. 동쪽 · 서쪽 · 남쪽에 3개의 성문이 있었고, 문 위에는 문루가 있었다. 선조 때에는 옹성과 포대를 더 쌓았으며, 10여 곳에 봉수대와 연대(烟臺)를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을 알렸다. 성안에는 객사 · 동헌 · 위사(衛舍) · 향사당 등의 관청이 있었고, 동문(東門) · 서문(西門) · 남문(南門) 앞에는 옹중석(돌하르방)이 각각 4기씩 세워져 있었다. 현재 보성리 · 인성리 · 안성리 일원에 높이 2m의 석성이 400m 정도 남아 있으며, 일부는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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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4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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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정현동문내위리기 (大靜縣東門內圍籬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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