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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82년 7월 1일 (양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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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그대로 머무르셨다. 천. 청서육화탕(淸暑六和湯) 한 첩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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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882년 7월 2일 (양 8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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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더웠다. 민영기가 모시고 가 지평 섬실의 전 현감 한정옥(安鼎玉)집으로 옮기셨다. 민응식은 사람들 이목에 시끄러움을 꺼려 뒤에 출발했고 여주읍에 이르러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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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882년 7월 3일 (양 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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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비가 오더니 밤에는 몹시 쏟아졌다. 그대로 머무르셨다. 청서육화탕(淸暑六和湯) 한 첩을 올렸다. 인후증세가 다시 더했다. 민응식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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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882년 7월 4일 (양 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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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이침에 비가 오더니 저녁에 그쳤다. 그대로 머무르셨다. 양위탕 한 첩을 올렸다. 전 오위장 구연소(具然韶)를 충주병영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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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882년 7월 5일 (양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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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그대로 머무르셨다. 인후증세가 점차 나아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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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882년 7월 6일 (양 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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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그대로 머무르셨다. 양위탕 한 첩을 올렸다. 민영기를 양근 자잠리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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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882년 7월 7일 (양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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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그대로 머무르셨다.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 한 첩을 올렸다. 민긍식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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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882년 7월 8일 (양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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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그대로 머무르셨다. 양위탕 한 첩을 올렸다. 민영기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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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882년 7월 9일 (양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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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그대로 머무르셨다. 옥체 다리부스럼이 다 아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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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882년 7월 10일 (양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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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그대로 머무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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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882년 7월 11일 (양 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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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그대로 머무르셨다. 민영기, 민영식은 다른 사람의 이목을 꺼려 먼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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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882년 7월 12일 (양 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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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안정옥이 모시고 가 매산 오봉학 집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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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882년 7월 13일 (양 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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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민영위 집 뒷채로 옮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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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882년 7월 14일 (양 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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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종일 내렸다. 그대로 머무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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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882년 7월 15일 (양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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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끼더니 비를 뿌렸다. 그대로 머무르셨다. 안정옥을 서울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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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882년 7월 16일 (양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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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그대로 머무르셨다. 우철(又哲)이 와서 서울소식(京報)을 들었다. 안정옥이 중도에서 청사(淸使)가 내건 방문(榜)을 베껴서 돌아왔다. 김천찰방 민치헌(閔致憲)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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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882년 7월 17일 (양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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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그대로 머무르셨다. 민치헌을 서울에 보냈다. 이현식(李賢植)이 민영익의 봉서를 가지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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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882년 7월 18일 (양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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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그대로 머무르셨다. 이현식이 돌아갔다. 안정옥을 서울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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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882년 7월 19일 (양 8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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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다가 오후에 그쳤다. 그대로 머무셨다. 옥후가 학질증세로 편치 않으셨다. 향사 평위산(香砂平胃散) 두 첩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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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882년 7월 20일 (양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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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그대로 머무셨다. 수삼 한 냥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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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882년 7월 21일 (양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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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그대로 머무셨다. 수삼 한 냥쭝을 올렸다. 학질 증세가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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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882년 7월 22일 (양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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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그대로 머무셨다. 안신사물탕(安神四物湯) 두 첩을 올렸다. 민치헌과 안정옥이 서울에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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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882년 7월 23일 (양 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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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종일 왔다. 그대로 머무셨다. 수산 한 냥쭝을 올렸다. 학질증세가 더했고 양성 의인(醫人) 박응종(朴應鍾) 처소에 사람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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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882년 7월 24일 (양 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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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그대로 머무르셨다. 밤에 산삼 다섯 전쭝(戔重)을 올렸다. 안정옥이 (중궁전하께서 내려주신) 봉서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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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1882년 7월 25일 (양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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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이른 아침에 산삼 다섯 전쭝(戔重)을 올렸다. 민영위 집 안채로 옮기셨다. 학질증세가 한결 같았다. 양성 의인 박응종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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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1882년 7월 26일 (양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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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그대로 머무셨다. 이른 아침, 박응종이 진찰하러 들어갔다. 가미군자탕을 두 첩 올렸다. 좌찬성 민태호 집 하인이 봉서를 가지고 왔다. 같은 달 19일, 전 감찰 심의순(沈宜淳)이 환정곤위사(還正壼位事:왕비의 자리를 도로 바르게 하는 일)로 오장경 제독에게 정문(呈文)을 했고 장차 며칠 안으로 (궁중전하를) 영접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한 까닭에 부사 과 김설현(金卨鉉)이 이 일을 아뢰기 위해 서울에서 이른 아침 왔다. 이현식이 왔다. 이날 밤, 봉서와 무감 8명이 내려왔고 화복(華服)의 전교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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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1882년 7월 27일 (양 9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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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그대로 머무셨다. 학질 증세가 점차 덜했다. 가미군자탕 한 첩, 가감군자탕 한 첩을 올렸다. 영접할 배종관원이 내려왔다. 안정옥이 회답봉서를 가지고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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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1882년 7월 28일 (양 9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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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아침에 가감군자탕 한 첩을 올렸다. 손시(오전 8시 반에서 9시 반까지)에 가마를 움직여 죽산부 내아를 숙소로 했다. 가감군자탕 한 첩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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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1882년 7월 29일 (양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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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이른 아침이 가감군자탕 한 첩을 올렸다. 오전 6시경(卯刻) 가마를 움직여 양지현 내아에 이르렀다. 잠깐 머물러 낮수라를 자셨다(晝停). 민영익이 왔다. 학질 남은 증세가 있었다. 땅거미 질 무렵 용인현 동헌 숙소에 이르렀다. 평진탕 한 첩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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