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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화 (失花) ◈
해설   본문  
1939년 3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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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화 (失花)
 
 
 

1

 
3
사람이
 
4
비밀(秘密)이 없다는 것은 재산(財産)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2

 
6
꿈―— 꿈이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자는 것이 아니다. 누운 것도 아니다.
 
7
앉아서 나는 듣는다. (12월 23일)
 
8
「언더 더 워치―— 시계 아래서 말이에요, 파이브 타운스―— 다섯 개의 동리(洞里)란 말이지요. 이 청년(靑年)은 요 세상(世上)에서 담배를 제일 좋아합니다―— 기다랗게 꾸부러진 파이프에다가 향기(香氣)가 아주 높은 담배를 피워 빽― 빽― 연기를 풍기고 앉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낙(樂)이었답니다.」
 
9
(내야말로 동경(東京) 와서 쓸데없이 담배만 늘었지. 울화가 푹― 치밀을 때 저― 폐(肺)까지 쭉― 연기나 들이켜지 않고 이 발광(發狂)할 것 같은 심정(心情)을 억제하는 도리가 없다.)
 
10
「연애를 했어요! 고상(高尙)한 취미(趣味)―— 우아(優雅)한 성격(性格)―— 이런 것이 좋았다는 여자(女子)의 유서(遺書)예요―— 죽기는 왜 죽어―— 선생님―— 저 같으면 죽지 않겠습니다. 죽도록 사랑할 수 있나요―— 있다지요. 그렇지만 저는 모르겠어요.」
 
11
(나는 일찍이 어리석었더니라. 모르고 연(姸)이와 죽기를 약속(約束)했더니라. 죽도록 사랑했건만 면회(面會)가 끝난 뒤 대략(大略) 이십 분이나 삼십 분만 지나면 연이는 내가 ‘설마’ 하고만 여기던 S의 품안에 있었다.)
 
12
「그렇지만 선생님―— 그 남자의 성격이 참 좋아요. 담배도 좋고 목소리도 좋고―— 이 소설(小說)을 읽으면 그 남자(男子)의 음성(音聲)이 꼭―— 웅얼웅얼 들려오는 것 같아요. 이 남자(男子)가 같이 죽자면 그때 당해서는 또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 같아서는 저도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 사람이 정말 죽을 수 있도록 사랑할 수 있나요? 있다면 저도 그런 연애(戀愛) 한번 해보고 싶어요.」
 
13
(그러나 철부지(不知) C양(孃)이여. 연이는 약속(約束)한 지 두 주일(週日) 되는 날 죽지 말고 우리 살자고 그립디다. 속았다. 속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나는 어리석게도 살 수 있을 것을 믿었지. 그뿐인가. 연이는 나를 사랑하노라고까지.)
 
14
「공과(功課)는 여기까지밖에 안 했어요―— 청년(靑年)이 마지막에는―— 멀리 여행(旅行)을 간다나 봐요.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고.」
 
15
(여기는 동경(東京)이다. 나는 어쩔 작정으로 여기 왔나? 적빈(赤貧)이 여세(如洗)―— 콕토가 그랬느니라―— 재주 없는 예술가(藝術家)야 부질없이 네 빈곤(貧困)을 내세우지 말라고. 아― 내게 빈곤(貧困)을 팔아먹는 재주 외(外)에 무슨 기능(技能)이 남아 있누. 여기는 간다쿠 진보초(神田區 神保町), 내가 어려서 제전(帝展) 이과(二科)에 하가키 주문(注文)하던 바로 게가 예다. 나는 여기서 지금 앓는다.)
 
16
「선생님! 이 여자를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시지요―— 좋아요―—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까지 사랑을 받은―— 남자(男子)는 행복(幸福)되지요―— 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17
(선생님 이상(李箱) 턱에 입 언저리에 아― 수염 숱하게도 났다. 좋게도 자랐다.)
 
18
「선생님―— 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담배가 다 탔는데―— 아이― 파이프에 불이 붙으면 어떻게 합니까―— 눈을 좀―— 뜨세요.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네― 무슨 생각 그렇게 하셨나요.」
 
19
(아― 참 고운 목소리도 다 있지. 십 리나 먼―— 밖에서 들려 오는―— 값비싼 시계(時計) 소리처럼 부드럽고 정확(正確)하게 윤택(潤澤)이 있고―— 피아니시모―— 꿈인가. 한 시간 동안이나 나는 스토리보다는 목소리를 들었다. 한 시간―— 한 시간같이 길었지만 십 분―— 나는 졸았나? 아니 나는 스토리를 다 외운다. 나는 자지 않았다. 그 흐르는 듯한 연연한 목소리가 내 감관(感官)을 얼싸안고 목소리가 잤다.)
 
20
꿈―— 꿈이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잔 것도 아니요 또 누웠던 것도 아니다.
 
 
 

3

 
22
파이프에 불이 붙으면?
 
23
끄면 그만이지. 그러나 S는 껄껄―— 아니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타이른다.
 
24
「상(箱)! 연이와 헤어지게.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으니. 상(箱)이 연이와 부부(夫婦)? 라는 것이 내 눈에는 똑 부러 그러는 것 같아서 못 보겠네.」
 
25
「거 어째서 그렇다는 건가.」
 
26
이 S는, 아니 연이는 일찍이 S의 것이었다. 오늘 나는 S와 더불어 담배를 피우면서 마주 앉아 담소(談笑)할 수 있다. 그러면 S와 나 두 사람은 친우(親友)였던가.
 
27
「상(箱)! 자네 ‘EPIGRAM’이라는 글 내 읽었지. 한 번―— 허허― 한 번. 상(箱)! 상(箱)의 서푼짜리 우월감(優越感)이 내게는 우숴 죽겠다는 걸세. 한 번? 한 번―— 허허― 한 번.」
 
28
「그러면(나는 실신(失神)할 만치 놀란다) 한 번 이상(以上)―— 몇 번. S! 몇 번인가.」
 
29
「그저 한 번 이상(以上)이라고만 알아 두게나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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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꿈이면 좋겠다. 그러나 10월 23일부터 10월 24일까지 나는 자지 않았다. 꿈은 없다.
 
31
(천사(天使)는―— 어디를 가도 천사는 없다. 천사들은 다 결혼(結婚)해 버렸기 때문에다.)
 
32
23일 밤 열시부터 나는 가지가지 재주를 다 피워 가면서 연이를 고문(拷問)했다.
 
33
24일 동(東)이 훤―하게 터올 때쯤에야 연이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 장구(長久)한 시간(時間)!
 
34
「첫 번―— 말해라.」
 
35
「인천(仁川) 어느 여관(旅館).」
 
36
「그건 안다. 둘째 번―— 말해라.」
 
37
「……」
 
38
「말해라.」
 
39
「N빌딩 S의 사무실(事務室).」
 
40
「셋째 번―— 말해라.」
 
41
「……」
 
42
「말해라.」
 
43
「동소문(東小門) 밖 음벽정(飮碧亭).」
 
44
「넷째 번―— 말해라.」
 
45
「……」
 
46
「말해라.」
 
47
「……」
 
48
「말해라.」
 
49
머리맡 책상 서랍 속에는 서슬이 퍼런 내 면도칼이 있다. 경동맥(頸動脈)을 따면―— 요물(妖物)은 선혈(鮮血)이 댓줄기 뻗치듯 하면서 급사(急死)하리라. 그러나―—
 
50
나는 일찌감치 면도를 하고 손톱을 깎고 옷을 갈아입고 그리고 예년(例年) 10월 24일경에는 사체(死體)가 며칠 만이면 썩기 시작하는지 곰곰 생각하면서 모자를 쓰고 인사하듯 다시 벗어 들고 그리고 방(房)―— 연이와 반년(半年) 침식(寢食)을 같이 하던 냄새나는 방(房)을 휘― 둘러 살피자니까 하나 사다 놓네 놓네 하고 기어이 뜻을 이루지 못한 금붕어도―— 이 방(房)에는 가을이 이렇게 짙었건만 국화(菊花) 한 송이 장식(裝飾)이었다.
 
 
 

4

 
52
그러나 C양의 방(房)에는 지금―— 고향에서는 스케이트를 지친다는데―— 국화(菊花) 두 송이가 참 싱싱하다.
 
53
이 방(房)에는 C군(君)과 C양이 산다. 나는 C양더러 ‘부인(夫人)’이라고 그랬더니 C양은 성을 냈다. 그러나 C군에게 물어 보면 C양은 ‘아내’란다. 나는 이 두 사람 중의 누구라고 정하지 않고 내 동경(東京) 생활(生活)이 하도 적막(寂寞)해서 지금 이 방(房)에 놀러 왔다.
 
54
언더 더 워치―— 시계 아래서의 렉처는 끝났는데 C군은 조선 곰방대를 피우고 나는 눈을 뜨지 않는다. C양의 목소리는 꿈같다. 인토네이션이 없다. 흐르는 것같이 끊임없으면서 아주 조용하다.
 
55
나는 그만 가야겠다.
 
56
「선생님(이것은 실로 이상(李箱) 옹(翁)을 지적(指摘)하는 참담(慘憺)한 인칭대명사(人稱代名詞)다) 왜 그러세요―— 이 방이 기분이 나쁘세요?(기분? 기분이란 말은 필시 조선말은 아니리라) 더 놀다 가세요―— 아직 주무실 시간도 멀었는데 가서 뭐 하세요? 네? 얘기나 하세요.」
 
57
나는 잠시 그 계간유수(溪間流水) 같은 목소리의 주인(主人) C양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C군이 범과 같이 건강(健康)하니까 C양은 혈색(血色)이 없이 입술조차 파르스레하다. 이 오사게라는 머리를 한 소녀는 내일(來日) 학교(學校)에 간다. 가서 언더 더 워치의 계속을 배운다.
 
58
사람이―—
 
59
비밀(秘密)이 없다는 것은 재산(財産)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60
강사(講師)는 C양의 입술이 C양이 좀 회(蛔)배를 앓는다는 이유(理由) 외(外)에 또 무슨 이유(理由)로 조렇게 파르스레한가를 아마 모르리라.
 
61
강사(講師)는 맹랑한 질문(質問) 때문에 잠깐 얼굴을 붉혔다가 다시 제 지위(地位)의 현격(懸隔)히 높은 것을 느끼고 그리고 외쳤다.
 
62
「쪼꾸만 것들이 무얼 안다고―— 」
 
63
그러나 연이는 히힝 하고 코웃음을 쳤다. 모르기는 왜 몰라―— 연이는 지금 방년(芳年)이 이십, 열여섯 살 때 즉 연이가 여고(女高) 때 수신(修身)과 체조(體操)를 배우는 여가에 간단한 속옷을 찢었다. 그리고 나서 수신(修身)과 체조(體操)는 여가에 가끔 하였다.
 
64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65
다섯 해―— 개꼬리도 삼 년만 묻어 두면 황모(黃毛)가 된다든가 안 된다든가 원―—
 
66
수신(修身) 시간(時間)에는 학감(學監) 선생님, 할팽(割烹) 시간(時間)에는 올드미스 선생님, 국문(國文) 시간(時間)에는 곰보딱지 선생님―—
 
67
「선생님 선생님―— 이 귀염성스럽게 생긴 연이가 엊저녁에 무엇을 했는지 알아내면 용하지.」
 
68
흑판(黑板) 위에는 ‘요조숙녀(窈窕淑女)’라는 액(額)의 흑색(黑色)이 임리(淋漓)하다.
 
69
「선생님, 선생님―— 제 입술이 왜 요렇게 파르스레한지 알아맞히신다면 참 용하지.」
 
70
연이는 음벽정(飮碧亭)에 가던 날도 R영문과(英文科)에 재학중(在學中)이다. 전날 밤에는 나와 만나서 사랑과 장래(將來)를 맹서(盟誓)하고 그 이튿날 낮에는 기싱과 호손을 배우고 밤에는 S와 같이 음벽정(飮碧亭)에 가서 옷을 벗었고 그 이튿날은 월요일(月曜日)이기 때문에 나와 같이 같은 동소문(東小門) 밖으로 놀러 가서 베-제했다. S도 K교수(敎授)도 나도 연이가 엊저녁에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 S도 K교수(敎授)도 나도 바보요, 연이만이 홀로 눈 가리고 야웅 하는 데 희대(稀代)의 천재(天才)다.
 
71
연이는 N빌딩에서 나오기 전에 WC라는 데를 잠깐 들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오면 남대문통(南大門通) 십오간(十五間) 대로(大路) GO STOP의 인파(人波).
 
72
「여보시오 여보시오, 이 연이가 조 이층(二層) 바른편에서부터 둘째 S씨(氏)의 사무실(事務室) 안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나왔는지 알아맞히면 용하지.」
 
73
그때에도 연이의 살결에서는 능금과 같은 신선(新鮮)한 생광(生光)이 나는 법이다. 그러나 불쌍한 이상(李箱) 선생님에게는 이 복잡한 교통(交通)을 향하여 빈정거릴 아무런 비밀(秘密)의 재료(材料)도 없으니 내가 재산(財産) 없는 것보다도 더 가난하고 싱겁다.
 
74
「C양! 내일(來日)도 학교(學校)에 가셔야 할 테니까 일찍 주무셔야지요.」
 
75
나는 부득부득 가야겠다고 우긴다. C양은 그럼 이 꽃 한 송이 가져다가 방(房)에다 꽂아 놓으란다.
 
76
「선생님 방(房)은 아주 살풍경(殺風景)이라지요?」
 
77
내 방(房)에는 화병(花甁)도 없다. 그러나 나는 두 송이 가운데 흰 것을 달래서 왼편 깃에다가 꽂았다. 꽂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5

 
79
국화(菊花) 한 송이도 없는 방(房) 안을 휘― 한번 둘러보았다. 잘― 하면 나는 이 추악(醜惡)한 방(房)을 다시 보지 않아도 좋을 수도 있을까 싶었기 때문에 내 눈에는 눈물도 고일밖에.
 
80
나는 썼다 벗은 모자를 다시 쓰고 나니까 그만하면 내 연이에게 대한 인사도 별로 유루(遺漏)없이 다 된 것 같았다.
 
81
연이는 내 뒤를 서너 발자국 따라왔던가 싶다. 그러나 나는 예년(例年) 10월 24일경에는 사체(死體)가 며칠 만이면 상하기 시작하는지 그것이 더 급했다.
 
82
「상(箱)! 어디 가세요?」
 
83
나는 얼떨결에 되는 대로,
 
84
「동경(東京).」
 
85
물론(勿論) 이것은 허담(虛談)이다. 그러나 연이는 나를 만류(挽留)하지 않는다. 나는 밖으로 나갔다.
 
86
나왔으니, 자― 어디로 어떻게 가서 무엇을 해야 되누.
 
87
해가 서산에 지기 전에 나는 이삼 일 내(內)로는 반드시 썩기 시작해야 할 한 개 ‘사체(死體)’가 되어야만 하겠는데, 도리는?
 
88
도리는 막연하다. 나는 십 년 긴―— 세월(歲月)을 두고 세수할 때마다 자살(自殺)을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나는 결심(決心)하는 방법(方法)도 결행(決行)하는 방법(方法)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다.
 
89
나는 온갖 유행약(流行藥)을 암송(暗誦)하여 보았다.
 
90
그리고 나서는 인도교(人道橋), 변전소(變電所), 화신상회(和信商會) 옥상(屋上), 경원선(京元線) 이런 것들도 생각해 보았다.
 
91
나는 그렇다고―— 정말 이 온갖 명사(名詞)의 나열(羅列)은 가소(可笑)롭다―— 아직 웃을 수는 없다.
 
92
웃을 수는 없다. 해가 저물었다. 급하다. 나는 어딘지도 모를 교외(郊外)에 있다. 나는 어쨌든 시내(市內)로 들어가야만 할 것 같았다. 시내(市內)―— 사람들은 여전히 그 알아볼 수 없는 낯짝들을 쳐들고 와글와글 야단이다. 가등(街燈)이 안개 속에서 축축해한다. 영경(英京) 윤돈(倫敦)이 이렇다지―—
 
 
 

6

 
94
NAUKA사(社)가 있는 진보초 스즈란도(神保町 鈴蘭洞)에는 고본(古本) 야시(夜市)가 선다. 섣달 대목―— 이 스즈란도(鈴蘭洞)도 곱게 장식(裝飾)되었다. 이슬비에 젖은 아스팔트를 이리 디디고 저리 디디고 저녁 안 먹은 내 발길은 자못 창량(蹌踉)하였다. 그러나 나는 최후(最後)의 이십 전(錢)을 던져 타임스판(版) 상용영어(常用英語) 사천자(四千字)라는 서적(書籍)을 샀다. 사천 자―—
 
95
사천 자면 많은 수효다. 이 해양(海洋)만한 외국어(外國語)를 겨드랑에 낀 나는 섣불리 배고파할 수도 없다. 아― 나는 배부르다.
 
96
진따―— (옛날 활동사진(活動寫眞) 상설관(常設館)에서 사용(使用)하던 취주악대(吹奏樂隊)) 진동야의 진따가 슬프다.
 
97
진따는 전원(全員) 네 사람으로 조직(組織)되었다. 대목의 한몫을 보려는 소백화점(小百貨店)의 번영(繁榮)을 위하여 이 네 사람은 클라리넷과 코넷과 북과 소고(小鼓)를 가지고 선조(先祖) 유신(維新) 당초(當初)에 부르던 유행가(流行歌)를 연주(演奏)한다. 그것은 슬프다 못해 기가 막히는 가각풍경(街角風景)이다. 왜? 이 네 사람은 네 사람이 다 묘령(妙齡)의 여성(女性)들이더니라. 그들은 똑같이 진홍색(眞紅色) 군복(軍服)과 군모(軍帽)와 ‘꼭구마’를 장식(裝飾)하였더니라.
 
98
아스팔트는 젖었다. 스즈란도(鈴蘭洞) 좌우(左右)에 매달린 그 영란(鈴蘭) 꽃 모양 가등(街燈)도 젖었다. 클라리넷 소리도―— 눈물에―— 젖었다.
 
99
그리고 내 머리에는 안개가 자옥-히 끼었다.
 
100
영경(英京) 윤돈(倫敦)이 이렇다지?
 
101
「이상(李箱)!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102
남자(男子)의 목소리가 내 어깨를 쳤다. 법정대학(法政大學) Y군, 인생(人生)보다는 연극(演劇)이 더 재미있다는 이다. 왜? 인생(人生)은 귀찮고 연극(演劇)은 실없으니까.
 
103
「집에 갔더니 안 계시길래!」
 
104
「죄송합니다.」
 
105
「엠프레스에 가십시다.」
 
106
「좋―지요.」
 
107
ADVENTURE IN MANHATTAN에서 진 아서가 커피 한잔 맛있게 먹더라. 크림을 타 먹으면 소설가(小說家) 구보씨(仇甫氏)가 그랬다―— 쥐 오줌 내가 난다고. 그러나 나는 조엘 맥크리만큼은 맛있게 먹을 수 있었으니―—
 
108
MOZART의 41번은 ‘목성(木星)’이다. 나는 몰래 모차르트의 환술(幻術)을 투시(透視)하려고 애를 쓰지만 공복(空腹)으로 하여 저윽히 어지럽다.
 
109
「신주쿠(新宿) 가십시다.」
 
110
「신주쿠(新宿)라?」
 
111
「NOVA에 가십시다.」
 
112
「가십시다 가십시다.」
 
113
마담은 루바슈카. 노바는 에스페란토. 헌팅을 얹은 놈의 심장을 아까부터 벌레가 연해 파먹어 들어간다. 그러면 시인(詩人) 지용(芝溶)이여! 이상(李箱)은 물론 자작(子爵)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겠습니다그려!
 
114
12월의 맥주(麥酒)는 선뜩선뜩하다. 밤이나 낮이나 감방(監房)은 어둡다는 이것은 고리키의「나그네」구슬픈 노래, 이 노래를 나는 모른다.
 
 
 

7

 
116
밤이나 낮이나 그의 마음은 한없이 어두우리라. 그러나 유정(兪政)아! 너무 슬퍼 마라. 너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느니라.
 
117
이런 지비(紙碑)가 붙어 있는 책상 앞이 유정(兪政)에게 있어서는 생사(生死)의 기로(岐路)다. 이 칼날같이 선 한 지점(地點)에 그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면서 오직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고 울고 있다.
 
118
「각혈(咯血)이 여전하십니까?」
 
119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120
「치질(痔疾)이 여전하십니까?」
 
121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122
안개 속을 헤매던 내가 불현듯이 나를 위하여는 마코―— 두 갑, 그를 위하여는 배 십 전 어치를, 사가지고 여기 유정(兪政)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유령(幽靈) 같은 풍모(風貌)를 도회(韜晦)하기 위하여 장식(裝飾)된 무성(茂盛)한 화병(花甁)에서까지 석탄산(石炭酸) 내음새가 나는 것을 지각(知覺)하였을 때는 나는 내가 무엇 하러 여기 왔나를 추억(追憶)해 볼 기력조차도 없어진 뒤였다.
 
123
「신념(信念)을 빼앗긴 것은 건강(健康)이 없어진 것처럼 죽음의 꼬임을 받기 마치 쉬운 경우더군요.」
 
124
「이상(李箱) 형(兄)! 형(兄)은 오늘이야 그것을 빼앗기셨습니까! 인제―— 겨우―— 오늘이야―— 겨우―— 인제.」
 
125
유정(兪政)! 유정(兪政)만 싫다지 않으면 나는 오늘 밤으로 치러 버리고 말 작정이었다. 한 개 요물(妖物)에게 부상(負傷)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이십 칠 세를 일기(一期)로 하는 불우(不遇)의 천재(天才)가 되기 위하여 죽는 것이다.
 
126
유정(兪政)과 이상(李箱)―— 이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찬란한 정사(情死)―— 이 너무나 엄청난 거짓을 어떻게 다 주체를 할 작정인지.
 
127
「그렇지만 나는 임종(臨終)할 때 유언(遺言)까지도 거짓말을 해줄 결심(決心)입니다.」
 
128
「이것 좀 보십시오.」
 
129
하고 풀어헤치는 유정(兪政)의 젖가슴은 초롱(草籠)보다도 앙상하다. 그 앙상한 가슴이 부풀었다 구겼다 하면서 단말마(斷末魔)의 호흡(呼吸)이 서글프다.
 
130
「명일(明日)의 희망(希望)이 이글이글 끓습니다.」
 
131
유정(兪政)은 운다. 울 수 있는 외(外)의 그는 온갖 표정(表情)을 다 망각(忘却)하여 버렸기 때문이다.
 
132
「유형(兪兄)! 저는 내일 아침 차(車)로 동경(東京) 가겠습니다.」
 
133
「……」
 
134
「또 뵈옵기 어려울걸요.」
 
135
「……」
 
136
그를 찾은 것을 몇 번이고 후회(後悔)하면서 나는 유정(兪政)을 하직하였다. 거리는 늦었다. 방(房)에서는 연이가 나 대신 내 밥상을 지키고 앉아서 아직도 수없이 지니고 있는 비밀(秘密)을 만지작만지작하고 있었다. 내 손은 연이 뺨을 때리지는 않고 내일(來日) 아침을 위하여 짐을 꾸렸다.
 
137
「연이! 연이는 야웅의 천재(天才)요. 나는 오늘 불우(不遇)의 천재(天才)라는 것이 되려다가 그나마도 못 되고 도로 돌아왔소. 이렇게 이렇게! 응?」
 
 
 

8

 
139
나는 버티다 못해 조그만 종잇조각에다 이렇게 적어 그놈에게 주었다.
 
140
「자네도 야웅의 천재(天才)인가? 암만해도 천재(天才)인가 싶으이. 나는 졌네. 이렇게 내가 먼저 지껄였다는 것부터가 패배(敗北)를 의미(意味)하지.」
 
141
일고휘장(一高徽章)이다. HANDSOME BOY―— 해협(海峽) 오전(午前) 2시의 망토를 두르고 내 곁에 가 버티고 앉아서 동(動)치 않기를 한 시간 (이상?)
 
142
나는 그 동안 풍선(風船)처럼 잠자코 있었다. 온갖 재주를 다 피워서 이 미목수려(眉目秀麗)한 천재(天才)로 하여금 먼저 입을 열도록 갈팡질팡했건만 급기야 나는 졌다. 지고 말았다.
 
143
「당신의 텁석부리는 말(馬)을 연상(聯想)시키는구려. 그러면 말아! 다락 같은 말아! 귀하(貴下)는 점잖기도 하다마는 또 귀하(貴下)는 왜 그리 슬퍼 보이오? 네?」 (이놈은 무례(無禮)한 놈이다.)
 
144
「슬퍼? 응―— 슬플밖에―— 20세기(世紀)를 생활(生活)하는데 19세기(世紀)의 도덕성(道德性)밖에는 없으니 나는 영원(永遠)한 절름발이로다. 슬퍼야지―— 만일 슬프지 않다면―— 나는 억지로라도 슬퍼해야지―— 슬픈 포즈라도 해보여야지―— 왜 안 죽느냐고? 헤헹! 내게는 남에게 자살(自殺)을 권유(勸誘)하는 버릇밖에 없다. 나는 안 죽지. 이따가 죽을 것만 같이 그렇게 중속(衆俗)을 속여 주기만 하는 거야. 아― 그러나 인제는 다 틀렸다. 봐라. 내 팔. 피골(皮骨)이 상접(相接). 아야 아야. 웃어야 할 터인데 근육(筋肉)이 없다. 울려야 근육(筋肉)이 없다. 나는 형해(形骸)다. 나―— 라는 정체(正體)는 누가 잉크 짓는 약으로 지워 버렸다. 나는 오직 내―— 흔적(痕迹)일 따름이다.」
 
145
NOVA의 웨이트리스 나미코는 아부라에라는 재주를 가진 노라의 따님 코론타이의 누이동생이시다. 미술가(美術家) 나미코 씨(氏)와 극작가(劇作家) Y군은 4차원(四次元) 세계(世界)의 테마를 불란서(佛蘭西) 말로 회화(會話)한다.
 
146
불란서(佛蘭西) 말의 리듬은 C양의 언더 더 워치 강의(講義)처럼 애매(曖昧)하다. 나는 하도 답답해서 그만 울어 버리기로 했다. 눈물이 좔좔 쏟아진다. 나미코가 나를 달랜다.
 
147
「너는 뭐냐? 나미코? 너는 엊저녁에 어떤 마치아이에서 방석을 베고 15분 동안―— 아니 아니 어떤 빌딩에서 아까 너는 걸상에 포개 앉았었느냐. 말해라―— 헤헤― 음벽정(飮碧亭)? N빌딩 바른편에서부터 둘째 S의 사무실? (아― 이 주책없는 이상(李箱)아 동경(東京)에는 그런 것은 없습네.) 계집의 얼굴이란 다마네기다. 암만 벗기어 보려무나. 마지막에 아주 없어질지언정 정체는 안 내놓느니.」
 
148
신주쿠(新宿)의 오전(午前) 1시―— 나는 연애(戀愛)보다도 우선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9

 
150
12월 23일 아침 나는 진보초(神保町) 누옥(陋屋) 속에서 공복(空腹)으로 하여 발열(發熱)하였다. 발열(發熱)로 하여 기침하면서 두 벌 편지는 받았다.
 
151
「저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거든 오늘로라도 돌아와 주십시오. 밤에도 자지 않고 저는 형(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정(兪政).」
 
152
「이 편지 받는 대로 곧 돌아오세요. 서울에서는 따뜻한 방(房)과 당신의 사랑하는 연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 서(書).」
 
 
153
이날 저녁에 부질없는 향수(鄕愁)를 꾸짖는 것처럼 C양은 나에게 백국(白菊) 한 송이를 주었느니라. 그러나 오전(午前) 1시 신주쿠(新宿) 역(驛) 폼에서 비칠거리는 이상(李箱)의 옷깃에 백국(白菊)은 간데없다. 어느 장화(長靴)가 짓밟았을까. 그러나―— 검정 외투(外套)에 조화(造花)를 단, 댄서―— 한 사람. 나는 이국종(異國種) 강아지올시다. 그러면 당신께서는 또 무슨 방석과 걸상의 비밀(秘密)을 그 농화장(濃化粧) 그늘에 지니고 계시나이까?
 
154
사람이―— 비밀(秘密) 하나도 없다는 것이 참 재산(財産) 없는 것보다도 더 가난하외다그려! 나를 좀 보시지요?
【원문】실화 (失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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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李箱) [저자]
 
  1939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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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