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머님은 우리 남매를 다리고 사직골 막바지에서 쓸쓸한 가정을 이루어 있었다.
3
우리 아버지는 내가 세 살 먹던 가을에 돌아가셨다 한다. 어머님께서 시시로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께서 목사로 계시던 것이며, 그 열렬한 웅변이 죄많은 사람을 감동시켜 하느님을 믿게 하던 것이며, 자기 몸은 조금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교회 일에 진심 갈력(盡心竭力)하던 것을 이야기하신다. 나보담 사 년 맏이인 누님은 이 말을 들을 적마다 그 맑고 고운 눈에 눈물이어리었다. 철모르는 나는 그 이야기보담 어머님과 누님이 우는 것이 슬퍼서 눈물을 흘리었다.
4
집안은 넉넉지는 아니하나마 많지 않은 식구라 아버지 생전에 장만하여 주신 몇 섬지기나 추수하는 것으로 기한은 면할 수 있었다.
5
아버지의 감화인지는 모르나 어머님은 우리 남매를 학교에 다니게 하였다. 벌써 십 여 년 전 일이라 누님 공부시키는 데 대하여 별별 비평이 다 많았다. 그러나 어머님은 무슨 까닭에 여자 교육이 필요한 것인 줄은 모르셨겠지마는 아마 여자도 교육시키는 것이 좋은 줄로 아신 것 같다.
7
누님은 십 팔 세의 꽃 같은 처녀로 ○○학교 여자부 사년급에 우등 성적으로 진급되고 나도 그 학교 이년급에 진급되던 봄의 일이다.
8
나의 손을 붉게 하고 내 얼골을 푸르게 하던 치위는 없어진 지 오래이다. 햇볕은 따뜻하고 바람 끝은 부드럽다. 잔디밭에는 새싹이 돋아나고 개나리와 진달래는 벌써 산야를 붉고 누르게 수(繡)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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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버드나무 얽힌 곳에 꾀꼬리는 벗을 찾고 아지랑이 희미한 하늘에 종달새는 높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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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뜰 앞에 심어둔 두어 나무 월계화도 춘군(春君)의 고운 빛을 나도 받았노라 하는 듯이 난만(爛漫)히 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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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롯날 떠오르는 선명한 햇빛이 어렴풋이 조으는 듯한 아츰 안개에 위황(煒煌)한 금색을 흩을 적에 누님은 가늘게 숨쉬는 춘풍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어리인 듯이 월계화를 바라보고 섰다. 쏘아오는 햇발이 그의 눈을 비추니 고개를 갸웃하며 한 손을 이마 위에 얹고 눈을 스르르 감더니 아즉도 어슴푸레하게 조으는 월계화 그늘에 몸을 숨기매 이슬 젖은 꽃송이가 누님의뺨을 스친다 손으로 . 가벼이 화판(花瓣)을 만지며 고개를 숙여 꽃을 들여다본다…….
12
나도 한참 누님과 월계화를 바라보다가 학교에 갈 시간이나 아니 되었나하고 방에 걸린 시계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벌써 시간이 다 되어 간다. 급히 건넌방에 들어가 책보를 싸 가지고 나오며,
13
“누님, 어서 학교에 가요. 벌써 시간이 다 되었어요.”
15
하고 누님은 내 말에 놀라 돌아서더니 허둥허둥 건넌방에 들어가 책보를 싸더니 또 망연히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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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급히 부르짖었다. 누님은 또 한번 놀라 몸을 일으켰다.
18
요사이 누님의 하는 일이 매우 이상하였다. 그 열심히 하던 공부도 책을 보다가 말고 망연히 자실하여 먼 산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을 적이 많았다.― 누님이 잠은 어머님을 뫼시고 큰방에서 자되 공부는 나를 다리고 건넌방에서 하였으므로 누님이 정신 잃고 앉은 것은 여러 번 보았다.
19
그날 밤 새로 한 시나 되어 잠을 깨니 갑자기 뒤가 보고 싶었다. 나는 급히 일어나 뒷간에 갔었다. 뒤를 보고 나오니 이미 이지러진 어스름 반달이 중천에 걸리어 있다. 나는 달을 치어다보며 한 걸음 두 걸음 마당 가운데로 나왔다. 뜰 앞 월계화는 희미한 달빛에 어슴푸레하게 비치는데, 꽃 사이로 하야스름한 무엇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누님이 꽃에다 머리를 파묻고 서있다. 그의 흰 옥양목 겹저구리가 내 눈에 뜨임이라. 왜 누님이 저기 저러고 서 있나? 온 세상이 따뜻한 봄의 탄식에 싸이어 고요히 잠든 이 밤중에 무슨 까닭으로 나와 섰나? 나는 어린 가슴을 두근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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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리에 깜짝 놀랐는지 몸을 움칫하더니 아모 대답이 없다. 가만가만히 가까이 가서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숨을 급히 쉬는지 등이 들먹들먹한다. 나오는 울음을 물어 멈추는지 가늘고 떨리는 오열성(嗚咽聲)이 들린다. 나는 바싹 대들어 누님의 얼골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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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결 같은 두 손 사이로 보이는 얼골은 발그레 하였다. 나는 웬일인가 하고 얼골 가린 두 손을 힘써 떼었다. 두 손은 젖어 있었다. 누님의 두 눈으로 눈물이 흘러나린다. 구슬 같은 눈물이 점점이 월계화에 떨어진다. 월계화는 그 눈물을 머금어 엷은 명주로 가린 듯한 달빛에 어렴풋이 우는 것 같다. 누님의 머리는 불덩이같이 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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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내 손을 밀치는 그 손은 떠는 듯하였다. 나는 목멘 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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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에 젖은 꽃향기는 사랑의 노래와 같이 살근살근 가슴을 여의고 따뜻한 미풍은 연애에 타는 피처럼 부드럽게 뺨을 스쳐 지나간다. 이런 밤에 부드러운 창자에 느낌이 없으랴! 꽃다운 마음에 수심이 없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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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누님의 손목을 이끌었다. 맥이 종작없이 뛰는 것을 감각하였다. 누님은 눈물을 씻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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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들어가거라, 나도 곧 들어갈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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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절 웬일이야요? 어데가 편찮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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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더니 한 손으로 월계화 가지를 부여잡고 이마를 팔에다 대며 흑흑 느끼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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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 달빛은 쓰린 이별에 우는 눈의 시선같이 몽롱하게 월계화 나무위에 흘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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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공일날 누님과 나는 창경원 구경을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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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원 사쿠라꽃이 한창이란 기사가 수일 전부터 신문에 게재되고 일기도 화창하므로 구경꾼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넓으나 넓은 어원(御苑)이 희도록 덮여 있다. 과연 사쿠라는 필 대로 피어 동물원에서 식물원 가는 길 양편에는 만단홍금(萬段紅錦)을 펼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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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주(國柱)야, 우리는 동물원은 그만두고 저 잔디밭에 앉아 꽃구경이나 실컷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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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은 찬성을 구하는 듯이 나를 들여다보며 웃는다. 나도 짐승 곁에 가니 야릇한 무슨 냄새가 나던 것을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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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길 옆 잔디밭 은근한 편 소나무 밑에 좌정하였다. 붉은 놀 같은 꽃다리 밑으로 지나가는 흰 옷 입은 유객들이 꽃빛에 비치어 불그스름해 보이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춘흥을 자아낸다. 어린 나도 따뜻한 듯한 부드러운 듯한 봄의 기쁨을 깨달아 웃는 낯으로 누님을 돌아보니 누님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이더니, 푸른 풀 사이에 핀 누른 꽃을 하나 꺾어 뺨에다 대인다. 무슨 걱정이나 있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날 밤에 누님이 월계화 사이에서 울던 광경을 가슴에 그리면서 유심히 누님의 행동을 살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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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이 얼골에 수색을 띤 것이 퍽 애처로워서 무슨 이야기를 하여 누님의 흥미를 끌까 하고 곰곰 생각하며 이리저리 살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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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식물원 편을 바라보다가 그 곳을 가리키고 누님을 흔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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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웬일인지 누님은 깜짝 놀란다. 곤한 잠을 깬 사람에게 흔히 있는 표정으로 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다. 거기서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하나가 이리로 나려온다. 그는 우리 학교 사년급 급장이었다. 누님이 한참 멀거니 바라보다가 두 추파가 마주친 것 같다. 누님은 고개를 숙이었다. 나는 누님의 귀밑이 발그레진 것을 보았다. 누님이 내 무릎을 꼭 잡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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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아이고 아파요. 왜 저이를 모르셔요? 그이가요, 이번에 첫째로 사년급에 진급한 이야요. 공부를 썩 잘하고 또 재조가 비범하대요. 게다가 얼골이 저렇게 잘 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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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로 내나 그런 듯이 기뻐하면서 입에 침이 없이 칭찬하였다. 누님은 부끄럽게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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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가 그를 모른다디? 사년이나 한 학교에 다녔는데…… 그래 그 사람 보라고 사람을 흔들고 야단을 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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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요…… 그런데요, 어저께 내가 누님보다 좀 일찍이 나왔지요? 집에 오니까 어머님 친구 몇 분이 오셨는데 누님 칭찬이 야단입디다. ‘어쩌면 인물도 그다지 잘나고 재조도 그렇게 좋을꼬. 참 복 많이 받았습니다.’라고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하였어요, 저 사람도 장하지만 누님은 더 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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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사람을 너무 칭찬하여 행여나 누님이 그에게 질까 보아서 또 한참 누님을 추어 올렸다. 누님은 또 얼골을 붉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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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누가 네게 칭찬 듣고 싶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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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런 수작을 하는 틈에 그가 벌써 우리 앞을 지나가며 슬쩍 누님을 엿보았다 두 시선은 또 . 한번 마주쳤다. 누님의 얼골은 갑자기 다홍빛을 띠었다. 그가 중인총중(衆人叢中)에 섞이어 점점 멀어 가는 양을 누님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는 나가버렸다. 누님의 눈이 이리로 도는 바람에 그 사람의 뒤꼴을 보는 누님을 도적해 보던 내 눈이 잡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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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남의 얼골을 왜 빤히 들여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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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 아츰에 누님은 좀처럼 바르지 않던 분을 약간 바르며 더럽지도 않은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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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어머님이 의아하신다. 누님이 머뭇머뭇하더니 어린애 모양으로 어머님가슴에 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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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웃는다. 그 웃음과 함께 누님의 얼골에 홍조가 퍼진다. 과연 오늘은 누님이 더 어여뻐 보였다. 두 손으로 기운 없이 뒤로 큰 방문을 짚고 비스듬히 문에다 몸을 반만 실려 웃는 양이 말할 수 없이 어여뻤다. 어리인 우유에 분홍 물을 들인 듯한 두 뺨은 부풀어 오른 듯하고, 장미꽃빛 같은 입술이 방실 벌어지며 보일 듯 말 듯이 흰 이빨이 번쩍거린다. 춘산(春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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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듯한 눈썹은 살짝 위로 치어 오른 듯하며 그 밑에서 추수(秋水)같이 맑은 눈이 웃음의 가는 물결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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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누님은 또 빵긋 웃는다. 수색(羞色)에 싸인 희색(喜色)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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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말 더 이뻐 보인다. 너의 부친이 보셨던들 작히 기뻐하시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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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며 어머님의 눈에는 눈물이 스르르 어리었다. 곱게 빛나던 누님의 얼골에도 구름이 끼인 것 같다. 그러나 얼마 아니 되어 그 구름이 스러지고 또 다시 기쁨과 희망의 빛이 번쩍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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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는 어머님을 민망히 바라보던 누님이 지은 듯한 슬픈 어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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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시간이 다 되었겠다. 내 걱정일랑 말고 어서 학교에나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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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문턱에 들어서니 종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달음박질하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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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 생도가 다 모였다. 모두 행렬과 번호를 마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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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착(氣着), 경례, 출석원 도합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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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하는 카랑카랑한 소리가 들리었다. 그는 사년급 급장의 소리다. 이 소리가 끝나자 여자부 편에서도 이와 같은 호령과 보고를 하는 소리가 들리었다. 그는 옥을 바수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였다. 그는 우리 누님의 소리다. 오날은 웬 셈인지 이 두 소리가 나의 어린 가슴을 뛰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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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토요일 하학한 후에 교우회가 모인다고 사년급 생도들이 학교 문을 걸고 파수를 보며 철없는 일 이년급들이 나가는 것을 막아섰다. 우리가 늘 모이는 강당에 들어가니 벌써 이편에는 남학생, 저편에는 여학생이 빽빽이 앉아 있었다. 나도 거기 앉았노라니 무엇이니 무엇이니 하고 한참 야단들이더니 얼마 아니 되어 사년급생이 흰 종이 조각을 돌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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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육부(智育部) 간사 투표권이요, 한 장에 한 명씩 쓰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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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외친다. 내 곁에 앉은 녀석이 똑똑한 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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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외치던 사년급생이 대답한다. 저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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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모르면서 회(會)할 적마다 집에만 가려고 하지! 무기명 투표란 것은 선거자의 이름을 쓰지 않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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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짖는 듯이 그 사년급생이 말하고 기색이 엄숙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단박 사년급 급장의 이름을 썼다. 필경 남자부에는 최다점으로 그가 선거되고, 여자부에서는 최다점으로 우리 누님이 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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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부터 누님이 간사회 한다, 지육부 간사회 한다 하고 저녁 먹고 나가면 밤 아홉 점 열 점이나 되어 돌아오는 일이 빈빈(頻頻)히 있었다. 그 회에 갈 적마다 안 보던 거울도 보고 늘어진 머리카락도 쓰다듬어 올리며 옷고름도 고쳐 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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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롯밤은 누님이 지육부 간사회 한다고 저녁 먹고 나가더니 열 점 반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어머님은 별별 염려를 다 하시다가,
101
“너 누이가 여태껏 돌아오지를 않니? 회는 벌써 끝났을 것인데. 너 좀 가보아라.”
102
나는 두루막을 입고 집을 나와 사직골 막바지로부터 광화문통에 가는 길로 타박타박 걸어간다. 달도 없는 오월 그믐밤이었다. 전등도 별로 없고 행인도 희소한 어둠침침한 길을 걸어가려니 무시무시한 생각이 난다. 나는 무서운 생각을 쫓노라고 발을 쾅쾅 구르며 ‘하나, 둘’하고 달음박질하였다. 한참 뛰어가니 숨이 헐떡거리고 진땀이 흐른다. 모자를 벗어 부채질하면서 천천히 걸어간다. 내 앞 멀지 않은 곳에 이리로 향하여 젊은 남녀가 짝을 지어 올라온다. 그는 남학생과 여학생이었다! 그와 누님이었다! 나는 가슴이 설렁하며 일종 호기심이 일어났다. 살짝 남의 집 담모퉁이에 은신하였다. 둘은 내가 거기 숨어있는 줄은 모르고 영어로 무어라고 소근소근거리며 지나간다. 그 중에 이 말이 제일 똑똑히 들리었다.(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니 아마 이 말인 것 같다.)
103
“Love is blind.(사랑은 맹목적이라지요.)”
105
“But, our love has eyes!(그런데 우리의 사랑은 보는 사랑이지요.)”
106
하였다. 그들이 지나가자 나도 가만가만 뒤를 따랐다. 어두운 속이라 누님의 흰 적삼이 퍽 눈에 뜨인다. 전등 켠 뉘 집 대문 앞을 지날 때에 나는 그의 바른손이 누님의 왼손을 꼭 쥔 것을 보았다. 나는 웬일인지 싱긋이 웃었다. 그들이 행여나 나를 돌아볼까 보아서 발자최를 죽이고 남의 담에 몸을 부비대며 꽤 멀리 떨어져 갔었다. 우리 집 가까이 와서 둘이 걸음을 멈추더니 서로 악수를 하고 또 악수를 하는 것 같았다. 연연(戀戀)히 서로 떠나기를 싫어하는 것 같다. 한참이나 그리하다가 그가 손을 놓고 또 무어라고 한참 수군거리더니 그가 돌아서 온다. 누님은 우리 집 문 앞에 서서 한참 그의 가는 양을 바라보고 서 있다. 그는 또 내 곁으로 지나간다. 그의 걸음걸이는 허둥허둥하였다. 그가 지나간 후 나는 달음박질하여 집에 돌아왔다. 대문턱에 들어서니 어머님과 누님의 문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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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처럼 늦었니? 나는 별별 근심을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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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상의할 일이 좀 많아서…….”
110
“그 애는 어데로 갔니? 같이 오지를 안 하니? 오는 길에 못 봤어?”
112
“그 애가 어데로 갔을꼬? …… 길에서 만났을 것인데.”
114
나는 안방 문을 열고 시침을 뚝 따고,
116
하고 빙그레 웃었다. 어머님은 놀라며,
117
“너 뺨에, 옷에 맨 흙투성이니 웬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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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에 붙어 와……. 아니야요. 저 저…….”
120
하고 누님을 보고 빙글빙글 웃었다. 누님의 얼골은 또 발개졌다.
122
그후 더운 날 달밤에 누님은 친구하고 어데를 간다, 어데를 간다 하고 자조자조 나갔었다. 누님은 늘 나를 따돌리고 혼자 나갔으므로 푸른 풀 잦아진 곳과 달빛 고요한 데에서 그와 누님이 만나 꿀 같은 사랑의 속살거림을 몇 번이나 하였는지 나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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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의 출입이 자조롭고 기색이 수상하였던지 어머님이,
124
“인제 네가 어데 나가거든 꼭 네 동생을 다리고 다녀라.”
125
하신 뒤로는 누님이 집에 들면 공연히 짜증을 내며 하염없는 수색(愁色)이 적막한 화용(花容)을 휩쌌었다. 그리고 때때로 머리가 아프다 하며 이불을 쓰고 누웠었다.
126
하로는 우리가 점심을 마친 후 누님이 날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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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그 때는 유월 염천이라 더운 기운이 사람을 찌는 듯하였다. 나도 거기 가서 서늘한 공기도 마시고 무성한 초목으로부터 뚝뚝 뜯는 취색(翠色)에 땀난 몸을 씻으리라 생각하고 곧,
131
우리는 광화문 통에서 전차를 타고 진고개를 거쳐 남산공원을 올라갔었다. 저편 언덕 위에 그가 기다리기 지리(支離)하다 하는 듯이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하는 것이 보였다. 누님이 갑자기 돌아서 나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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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것 가지고 진고개 가서 과자 좀 사와! 응?”
133
하며 돈 20전을 주었다. 나는 급히 진고개로 나왔다. 얼른 과자를 사 가지고 가 본즉 그와 누님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135
나는 누님이 무슨 위험한 곳에나 간 것같이 가슴이 팔딱거리었었다. 이리저리 아모리 살펴도 그들은 없다. 나는 이편으로 기웃기웃, 저편으로 기웃기웃하였다. 한참이나 취색이 어린 남산 정상을 치어다보다가 또다시 걸어갔었다. 한동안 걸어가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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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어데로 또 그만 가 버렸어? 이리로는 아마 아니 갔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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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던 길로 도로 오려니 퍽 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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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그, 그 동안에 내가 퍽도 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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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중얼중얼하였다. 골딱지가 나니까 더 더운 것 같다. 대기는 횃불에 와글와글 끓는 것 같다. 나는 이 대기에 잠기어 몸이 삶아지는지? 땀이 줄줄 흘러 나리고 숨은 헐떡헐떡 차 오른다. 모자를 벗으니 머리에서 김이 무럭무럭 난다. 나는 부글부글 고여 오르는 심술을 억지로 참으며 아까 그가 있던 곳까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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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로 투덜거리고 아까 갔던 반대 방면으로 걸어갔었다. 한동안 걸어가도 그들은 또 보이지 않는다. 참고 참았던 짜증이 일시에 폭발이 되었다.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풀들을 쥐어뜯으며 한참 울다가 하도 내가 어린애 같은 것이 부끄럽고 우스웠다. 그렁그렁한 눈물을 씻고 희희 한 번 웃은 뒤 이리저리 또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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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편, 좀처럼 사람 눈에 뜨이지 않을 소나무 그늘 밑에 그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잃었던 보배를 발견한 듯이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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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함을 지르고 뛰어가려다가 에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좀 엿들으리라 하고 어느 밤에 그들의 뒤를 따라가던 모양으로 가만가만 걸어 가까이 갔었다. 한낮이므로 유객(遊客) 하나 없고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다. 더운 공기는 기름 언 것 같이 조금도 파동이 없다. 남이 들을까 보아서 가만가만히 하는 이야기도 낱낱이 내 귀에 들리었다.
146
“물론 그렇게 해야지요. 그런데 요사이는 어째 볼 수가 없어요?”
148
“어머님께서 ‘어데 나가게 하셔야지요,’ 나가거든 꼭 네 동생을 다리고 다녀라 하시겠지요. 그래서 오날도 같이 왔지요.”
150
“딴 이야기 하노라고 잊었구려, 기다리신다고 오죽 지리하셨겠어요?”
151
“한 시간이나 넘어 기다렸어요. 오날도 아마 못 오시는가 보다 하고 그만가 버릴까까지 하였어요.”
152
“네? 가 버릴까 하였어요? 제가 언제 약속 어긴 일이 있어요? 저는 어찌 급했던지 점심을 먹는데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어요.”
153
둘이 웃는다. 나도 웃었다. 나는 어린애가 꽃에 앉은 나비를 잡으려 간 때에 가는 걸음걸이로 한 걸음 두 걸음 가까이 갔었다. 사랑하는 이들은 달디단 이야기에 얼이 빠져 사람 오는 줄도 모른다. 그들 앉은 소나무 뒤에 살짝 붙었었다. 두 어깨는 닿아 있고 누님의 풀린 머리카락이 그의 뺨을 스친다. 그와 누님의 눈과 입에는 정이 찬 웃음이 넘친다. 그러다가 두 손길을 마주잡고 실심한 사람 모양으로 멀거니 서로 들여다본다. 누님의 몸으로부터 발산하는 따뜻하고 향기로운 기운에 나도 싸인 것 같았다. 나는 와락 달려들며,
154
“누님, 여기 계셔요? 나는 어데 가셨다고……. 아이 사람 애도 퍽도 먹이시지!”
155
둘은 깜짝 놀래었다. 누님의 모시적삼이 달싹달싹하는 것을 보고 누님의 가슴이 팔딱거리는구나 하였다.
156
그는 시치미를 뚝 따려 하였으나 ‘부끄럼’이란 원소가 얼골에 퍼뜨리는 붉은 빛을 감출 길이 없었다.
157
“에그, 나는 누구라구, 퍽도 놀랐다.”
158
누님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누님이 그를 향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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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가 제 동생이야요, 아직 철이 안 나서……. 많이 사랑해 주셔요.”
160
한 뒤 나를 보고 그를 눈으로 가리키며,
161
“너 이보고 이훌랑은 형님이라 하여라.”
163
내가 애를 먹였다. 누님의 얼골은 새빨개지며 나를 흘겨본다.
164
“왜 누님 성나셨소? 그러면 형님이라 하지요.”
167
하고 쥐었던 과자를 앞에 내놓았다. 누님이 나를 보고 방그레 웃으며,
168
“우리는 먹기 싫으니 너 혼자 저쪽에 가서 먹고 있거라. 우리 갈 때 부를것이니…….”
169
나도 길게 방해 놀기가 싫었다. 과자를 쥐고 나와 풀밭에 앉아 먹으면서 혼잣말로,
170
“내 뱃속에 영감쟁이가 열 둘이나 들어앉았는데 어린애로만 여기지…….”
172
그 긴긴 해가 벌써 서산에 걸리었다. 낙조에 비치는 녹수와 방초는 불이 붙은 것같이 붉어 보인다.
173
나도 이 동안에 퍽도 심심하였다. 풀을 자리 삼아 눕기도 하고, 기지개도 켜고 몸을 비비틀기도 하며 곡조도 모르는 창가를 함부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제나 올까, 저제나 부를까 고대고대 하여도 그 둘의 그림자는 얼른도 아니한다.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고. 이미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이야기는 끝이 없는가 보다. 벌써 이야기한 것이 수만 마디가 넘건마는 말 몇 마디 못하여 해는 어이 수이 가나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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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밑 풀과 나무에 빛나던 붉은 빛은 점점 걷히고 모색(暮色)이 가물가물 쳐들어온다. 햇빛은 쫓기어 남산 정상을 향하여 자꾸 기어올라가더니 남산 맨 꼭대기에 옴츠리고 앉았을 뿐이다.
175
검푸른 저문 빛이 남산 밑을 에워싸자 정상에 비치는 햇빛조차 스러지고 저편 하늘에 붉은 놀이 흰 구름을 붉고 누렇게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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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다 못하여 몸을 일으켜 그 곳으로 갔다. 어두운 빛에 놀랐는지 그들도 일어섰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나무로 깎아 세워 놓은 사람 모양으로 주춤 섰다. 누님의 걱정스러운 떨리는 소리가 나의 이막(耳膜)을 울림이라.
177
“K씨! 우리가 목전에 즐거움만 다행히 여겨 그냥 이리 지내다가는 우리의 꿀 같은 행복이 끝에는 소태 같은 고통으로 변할 것 같아요. 우리 각각 꼭 아까 말한 것과 같아야 됩니다.”
178
“아모럼요! 꼭 그리해야 될 터인데…….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집은 워낙 완고라…….”
180
나는 가슴이 선뜻하였다. 무슨 말을 하였나? 무슨 일을 하려는가? 엿듣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둘은 이리로 걸어온다. 누님의 눈은 약간 발그레하였다. 그 고운 뺨에 눈물 흔적이 보였다. 나는 또 웬일인가 하고 가슴이 선뜻하였다.
182
그날 밤에 나의 어린 소견에도 별별 생각을 다하고 씩씩이 잠도 잘 자지 못하였다 내가 어렴풋이 . 잠을 깰 적마다 큰방에서 어머님과 누님이 무어라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간단없이 들리었다. 새로 한 점이나 되어 내가 또 잠을 깨니 큰방에서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린다. 울음 섞인 어머님의 말소리가 난다.
183
“그래, 네가 요사이 늘 탈기를 하고 행동이 수상하더라……. 나는 허락한다 하더래도 만일 그 집에서 안 된다면 네 신세가 어떻게 되니? …… 네가 다만 하나 있는 어미 몰래 그 사람과 약혼한 것이 괘씸하다. 아비 없이 너를 금옥같이 길러내어 이런 일이 날 줄이야! 남편 없다고 너까지 나를 업수이 여기는게지…….”
185
“어머님, 잘못하였습니다, 무어라고 말씀을 여쭈어야 좋을지…… 친키도 전에 말씀 여쭈기도 부끄러운 일이고…… 친한 뒤에는 몇 번이나 말씀 여쭈려하였지만 입이 잘 떨어지지를 않았어요.……들어 주셔요. 암만 어머님이라도 그 때는 부끄러웠어요. 이젠 서로 약혼까지 해 놓으니 몸과 마음이 달아 부끄럼도 돌아볼 수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뻔뻔스럽게 여쭌 것이야요. 어머님 말씀같이 그가 저를 잊을 리는 없어요, 버릴 리는 없어요. 그다지 다정한 그가 그럴 리가 있다고요? 어제 공원에서 단단히 맹서하였습니다. 각각 부모님께 여쭈어 들으시면 이 위에 더 좋은 일이 없거니와 만일 그렇지 않거든 멀리멀리 달아나겠다구요. 배가 고프고 옷이 차더라도 부모도 못보고 형제도 못 보더라도 둘이 같이만 있으면 행복이라구요. 온갖 곤란과갖은 고통을 달게 겪겠다구요. 정말 그래요. 저도 그 없으면 미칠 것 같아요. 어머님이 허락을 아니 하신다 할 것 같으면 저는 이 세상에 살아있을것 같잖아요.”
186
밀어오는 물을 막았던 방축을 무너버릴 때에 물밀듯이 누님이 말하였다. 흔히 순결한 처녀가 사랑의 불을 가슴속에 깊이깊이 숨겨두고 행여나 남이 알까 보아서 전전긍긍하며 호올로 간장을 태우다가도 한번 자기 친한 이에게 발설하기 시작하면 맹렬히 소회를 베푸는 것이라.
187
나는 가슴을 울렁거리며 안방에 건너왔다.
188
누님은 어머님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울며, 어머님은 누님의 등에다 이마를 대고 운다. 나도 한참 초연히 섰다가 어머님 곁에 앉았다. 어머님을 흔들며 목멘 소리로,
190
이 말을 마치자 가슴이 찌르르해지며 흐르는 눈물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머님은 눈물을 삼키고 누님을 흔들며,
193
“이 애, 남부끄럽다. 그만두어라. 오냐, 네 원대로 하마. 그도 한번 다리고 오너라.”
195
‘여자가 수약(女子雖弱)이나 위모즉강(爲母則强)’이란 말은 어찌 생각하고 한 소리인고?
196
이틀 후 누님이 그를 다리고 왔다. 그의 곱상스러운 얼골과 얌전한 거동이 당장 어머님의 사랑을 이끌었다. 참 내 딸의 짝이라 하였다. 애녀(愛女)의 평생이 유탁(有託)하다 하였다. 단꿈이 꾸이리라 하였다. 기쁜 날이 오리라하였다. 더구나 맑은 눈과 까만 눈썹이 내 딸과 흡사하다 하였다. 누님과 그가 영어로 말하는 양을 보고 뜻도 모르면서 웃으셨다. 자미스러운 딸의장래 가정을 꿈꾸고 사랑스러운 외손자를 꿈꾸었다.
197
그 후부터는 남의 이목을 피해 가며 몇 번이나 서로 맞추어서 길게 기다려가지고 짜르게 만나던 애인들은 자조로이 우리 집에서 만나 웃고 즐기게 되었다
199
어떤 날 저녁에 그가 우리 집에 왔다. 그때 마츰 어머님은 어데 가시고 나와 누님과 단둘이 있었다.
202
라고 반갑게 인사하였다. 누님도 반가이 맞으며,
206
누님은 눈을 스르르 감으며 무엇을 생각는 듯하더니,
207
“오날이 칠월 초열흘이고, 초칠 일이 공일이라…… 공일날 오시고 오날 처음이지요?”
208
“그래요, 한 사흘밖에 더 되었어요?”
209
“사흘! 저는 한 삼 년이나 된 듯하였어요, 사흘만에 한 번씩 만나? 멀어요! 퍽 멀구 말구요! 사흘이 그다지 가까운 것 같습니까?”
210
하고 누님은 무엇을 찾는 듯이 그를 바라본다.
211
“사흘 만에 한 번씩 와도 장하지요.”
213
“장해요! 사흘 동안에 제가 몇 번이나 문밖을 내다보는지 아셔요? 저는 온갖 걱정을 다 했지요. 몸이나 편찮으신가, 꾸중이나 뫼셨는가?”
214
하고 목소리는 전성(顫聲)을 띠어가며 눈에는 눈물이 괴이어진다.
215
“저는 우리 일에 대하여 무슨 큰 걱정이나 생겼나 하고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는지요!”
217
“아니야요! 여하간 죄 없이 잘못하였습니다.”
218
하고 그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선웃음을 치며,
219
“어린애 모양으로 걸핏하면 울기는 왜 울어요? 저 동생 부끄럽지 않아요? (갑자기 어조를 야릇하게 변하며) 그런데 내가 어지도 올라카고 아레도 올라켔지마는 올라 칼 때마다 동무가 찾아와서 올 수가 있어야지.”
220
울던 누님이 웃음을 띠었다. 나도 웃었다.
221
그는 대구 사람이다. 그의 부모는 아직도 대구에서 산다. 서울 있는 오촌 당숙집에 그는 유숙하고 있었다. 그는 서울 온 지가 벌써 5, 6년이 지내었으므로 사투리는 거의 안 쓰게 되었으나 때때로 우리를 웃기려고 야릇한 말을 하였다.
223
흉내를 내며 나는 방바닥에 뚤뚤 굴러가며 웃었다. 그는 시치미를 뚝 따고,
224
“남 이야기하는데 웃기는 와 웃소? 갸 참 얄궂다.”
225
하였다. 누님은 어떻게 웃었는지 얼골이 붉어지고 배를 훔켜 쥐고 숨찬 소리로,
227
한참 동안 우리는 이렇게 웃고 즐기다가 나를 누님이 또 무슨 심부름을 시켰다! 무슨 심부름이던가 생각이 아니 난다. 그가 오기만 하면 누님이 무엇좀 사오너라, 어데 좀 갔다 오너라 하고 늘 나를 따돌렸다.
228
“에그, 누님도 왜 나를 늘 따돌려.”
229
투덜투덜 하면서 집을 나왔다. 반달은 비스듬히 푸른 하늘에 걸리어 있다. 만경창파에 외로이 떠나가는 일엽편주와 같았다.
230
나 없는 동안에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듣고 싶어서 급히 오노라고 오는 것이 한 시간이나 넘어 걸리었다. 나는 벌써 엿듣기에 익숙하여 사뿐 중문에 들어서며 가만히 살펴보니 애인들은 달 비치는 월계화 나무 밑에 평상을 내어놓고 나란히 앉어서 무어라고 소근거린다. 나는 숨소리도 크게 아니 쉬고 귀를 기울였다.
231
“그러면 어째요? 어머님께서는 좀처럼 올라오시지 않을 것이고……. 왜 그러면 상서(上書)로 이 사정을 못 아뢸 것이야 있어요?”
233
“글쎄요 몇 번이나 상서를 썼지만…… 부치지를 못 하겠어요.”
234
“만일 차일피일하다가 딴 데 혼인을 정해 놓으시면 어째요?”
237
“그런데 오촌 당숙 내외분은 아마 이 눈치를 아시는 것 같아요…… 네? 아마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집에 무슨 통기가 있었는지 할아버지께서 일간 올라오신대요.”
238
“올라오시면 죄다 여쭙겠단 말씀이구려.”
239
“글쎄요,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는 참 호랑이 같은 어룬이라…… 완고완고 참 완고신대…… 나도 어찌 할 줄을 모르겠어요. 그래서 밤에 잠이 잘오지 않아요.”
240
하고 머리를 긁적긁적하고 눈살을 찡기더니 또 말을 이어,
241
“오늘 또 아버지께서 하서(下書)하셨는데 이번 울산 김 승지 집에서 너를 선보러 간다니 행동을 단정히 하여라 하는 뜻입디다. 참 기막힐 일이야요.”
243
“부모님께 하로바삐 이 사정을 여쭙지 않으면 큰일 나겠습니다그려.”
245
“여하한 꾸중을 보시더라도 장가를 못 가겠다 할 터이야요! 조금도 걱정마셔요.”
246
그는 결심한 듯이 고개를 들며 단연히 말하였다.
247
밝은 달은 애태우는 양인의 가슴을 나는 몰라 하는 듯이 저리로 저리로 미끄러져 가며 더운 공기에 맑은 빛을 흩날린다. 월계화는 더욱 붉고 더욱 곱다. 진세(塵世)의 우수 고뇌를 나는 잊었노라 하는 것 같았다.
249
그 이튿날 일어난 누님의 얼골은 해쓱하였다. 머리카락이 흩어질 대로 흩어진 것을 보아도 작야(昨夜)에 잠을 못 이루어 몇 번이나 벼개를 고쳐 빈것을 가히 알러라. 누님이 사랑의 맛이 쓰고 떫은 것을 처음으로 맛보았도다! 행복의 해당화를 꺾으려면 가시가 손 찌르는 줄 비로소 알았도다.
250
하로 가고 이틀 가고 어느덧 일주일이 지내었건만 누님이 오날이나 와서 호음(好音)을 전해 줄까 내일이나 와서 희식(喜息)을 알려 줄까 고대고대하는 그는 코끝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학교에를 가도 그를 볼 수 없었고 누님도 이 때부터 심사가 산란하여 학교에 못 갔었다.)
251
이 동안에 누님은 어찌 애를 태웠던지 양협(兩頰)에 고운 빛이 사라져 가고 눈언저리는 푸른 기를 띠고 들어갔다. 입술은 까뭇까뭇 타들어 가고 두팔은 맥없이 늘어졌다.
252
일 주일 되던 날 누님은 생각다 못하여 편지 한 장을 주며,
253
“너 이 편지 가지고 그 댁에서 그가 있거든 전하고 못 보거든 도루 가지고오너라.”
255
전일에 그를 따라 한번 그 집에 갔던 일이 있으므로 그 집을 자세히 알아두었다. 그 집 대문에 들어서니 행랑 사람도 없고 그가 있던 사랑문도 닫히어있다.
256
안에서 기운 찬 노인의 성난 말소리가 나의 귀를 울린다.
257
“이놈, 아즉 학생이니 장가를 못 가겠다. 핑계야 좋지, 이놈 괘씸한 놈, 들으니 네가 어떤 여학생을 얻어 가지고 미쳐 날뛴다는구나! 아니야요란 다 무엇이야, 부모가 들이는 장가는 학생이라 못 가겠고, 학생 신분으로 계집은 해도 관계찮으냐, 이놈 고약한 놈! 네 원대로 그 학교나 마치고 장가 들일 것이로되 벌써 어린 놈이 못 견뎌서 여학생을 얻느니, 무엇을 얻느니 하니 그냥 두다간 네 신세를 망치고 가문을 더럽힐 터이야! 그래서 하로바삐 정혼하고 혼수까지 보내었는데 지금 와서 가느니 마느니 하면 어찌 하잔 말이냐. 암만 어린 놈의 소견이기로……. 그 집은 울산 일판에 유명한 집안이라 재산도 있고 양반도 좋고…… 다 된 혼인을 이편에서 퇴혼하면 그 신부는 생과부로 늙으란 말이냐! 일부함원(一婦含怨)에 오월비상(五月飛霜)이란 말도 못들었어! 죽어도 못 가겠다. 허허, 이놈 박살할 놈! 조부모도 끊고 부모도 끊고 일가친척도 끊으려거든 네 마음대로 좀 해 보아라.”
258
나는 이 말을 들으며 소름이 쭉 끼치었다. 한편으로는 분하기 짝이 없었다. 깨끗한 누님이 이다지 모욕을 당한 것이 절절이 분하였다. 곧 들어가 분풀이나 할 듯이 작은 눈을 홉뜨고 고사리 같은 손을 불끈 쥐었다.
259
“허허 이놈, 괘씸한 놈! 에이 화나, 거기 내 두루막 내.”
260
하는 그 노인의 우렁찬 소리가 또 들린다. 나는 간담이 서늘하였다. 그 노인이 신을 찍찍 끄을고 이리로 나오는 것 같다. 나는 무서운 증이 나서 급히 달음박질하여 그 집을 나왔다.
262
그 날밤 어머님 잠드신 후 누님이 살짝 내게로 건너와서,
263
“이 애, 너 본 대로 좀 이야기하여 다고, 응?”
264
이 말을 하는 누님의 얼골은 고뇌와 수괴(羞愧)의 빛이 보인다. 어린 동생에게 애인의 말을 물어도 부끄러워하였다! 나는 입을 다물고 묵묵히 앉았었다. 차마 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265
“왜, 또 심술이 났니? 어서 이야기를 좀 하려무나. 편지를 도루 가지고 온 것을 보니 형님을 못 만났니? 만나도 못 전했니? 혹은 무슨 일이 났더냐? 남의 속 그만 태우고 어서 좀 이야기하여 다고. 가련한 네 누이의 청이 아니냐.”
266
이 말 소리는 애완 처량하였다. 나의 어린 가슴이 찌르는 듯하며 눈물이 넘쳐 나온다. 이다지 정다이 구는 누님의 가슴에 그리던 꿀 같은 장래가 물거품에 돌아가고 만 것이 슬펐음이라. 그리고 순결한 우리 누님이 그 노인에게 ‘어떻다’든가, ‘계집을 했다’든가 하는 더러운 소리를 들은 것이 이가 떨리었다.
267
나는 비분한 어조로 그 집에서 들은 것을 이야기하였다. 정신 없이 듣고 있던 누님은 내 말이 끝나자 기운 없이 쓰러지며 이 이야기를 들을 적부터 괴였던 눈물이 불덩이 같은 뺨을 쉬일 새 없이 줄줄 흘러나린다.
269
하고 나도 누님의 가슴에 안기며 울었다.
270
이럴 즈음에 누가 대문을 가벼이 흔들며 떨리는 소리로,
272
한다. 누님은 이 소리를 듣고 얼른 일어났다. 애인의 음성은 이럴 때라도 잘 들리는 것이다. 나올 듯, 나올 듯한 울음을 입술로 꼭 다물어 막으며 급히 나갔다.
275
하며 우는 소리가 들린다 . 나도 나갔다. 둘은 서로 붙들고 눈물비가 요란히 떨어진다. 누님이 울음 반 말 반으로,
276
“저는 또다시…… 못…… 뵈올 줄…… 알았지요.”
280
“저 까닭에 오늘 매우 꾸중을 뫼셨지요?”
282
누님이 내가 편지를 가지고 그 집에 갔다가 내가 들은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우는 소리로,
285
“아니야요, 명일은 할아버지께서 꼭 다리고 가실 모양이어요. 지금 곧 멀리멀리 달아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나 몇 마디 할 양으로 왔어요.”
287
“네? 멀리멀리 가셔요? 부모도 버리시고 형제도 버리시고 멀리 가셔요? 제 신세는 벌써 불쌍하게 되었습니다. 불쌍한 저 때문에 전정(前程)이 구만리 같은 당신을 또 불행하게 만들 것이야 무엇 있습니까? 절랑 영영히 잊으시고 부모님 말씀으로 장가 드셔요. 장가 드시는 이하고나 백 년이 다 진토록 정다운 짝이 되어 주셔요. 아들 낳고 딸 낳고…… 저의 모든 것을 바쳐도 당신이 행복되신다면 그만이 아니야요? 곧 당신의 기쁨이 제 기쁨이 아니야요? 당신의 행복이 제 행복이 아니야요? 한숨 쉬고 눈물 흘리면서도 당신의 행복의 그늘에서 웃어 볼까 합니다.”
288
열정 찬 눈으로부터 하염없이 흘러나리는 눈물에 적막한 화용이 아롱진다.
289
“아아, S 씨를 내 손으로 불행하게 만들고 나 혼자 행복을…… 사랑을 떠나 행복이 있을까요? 나에게 행복을 줄 S씨가 눈물 바다에 허우적거릴 때 나 혼자 행복의 정상에서 나려다보며 웃을 수가 있을까요? 없어요! S씨 없고는 나 혼자 행복을 누릴 수가 없어요!”
290
“제 불행은 제 손으로 맨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이렇게 된 것이 당신의 잘못도 아니고 저의 잘못도 아니야요. 그 묵고 썩은 관습이 우리를 이렇게 맨든 것입니다! 그러하지만 저 때문에 당신의 마음을 수란(愁亂)하게 맨든 것 같아서 어떻게 가엾고 애닯은지 몰라요! 그런데 이 위에 더 당신을 영영이 불행하게 하겠어요. 당신이 행복되신다면 저는 오늘 죽어도 아깝잖아요.”
291
“안될 말씀입니다 . 그런 말씀을 들을수록…… 기가 막혀요! 해야 늘 그 말이니까 길게 말할 것 없이 나는 가겠어요. S 씨! 부디 안녕히!”
292
그는 흐르는 눈물을 씻으며 결심한 듯이 돌아서 가려 한다.
294
안타까운 떠는 소리로 부르더니 북받쳐 나오는 울음이 말을 막는다. 그는 또 한번 돌아다보고,
296
말을 마치자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마음은 이리로 몸은 저리로 멀어 간다…….
297
나는 심장을 누가 칼로 싹싹 에이는 것 같았다.
299
그 후 그는 어데로 갔는지 영영이 소식을 들을 수가 없고 누님은 시름시름 병들기 시작하여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병은 점점 깊어온다.
300
이슬 젖은 연화같이 불그스름하던 얼골이 청색 창경(窓鏡)에 비치는 이화(梨花)처럼 해쓱하였다. 익어 가는 임금(林檎)같이 혈색 좋던 살이 서리 맞은 황엽(黃葉)처럼 배배 말라간다. 거슴츠레한 눈은 흰 눈물에 붉어졌다.
301
그러다가 차마 볼 수 없이 바싹 말라 버렸다. 마치 백골을 엷은 백지로 덮어두고 물을 흠씬 품어 놓은 것같이 되고 말았다. 마츰내 한강 얼음 얼고 남산에 눈 쌓일 제 누님은 그에게 한숨을 주고 눈물을 주던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302
아아, 사랑, 아 사랑의 불아! 네가 부드럽고 따뜻한 듯하므로 철없는 청춘들은 그의 연하고 부드러운 심장에 너를 보배만 여겨 강징 난다. 잔인한 너는 그만 그 심장에다 불을 붙인다. 돌기둥 같은 불길이 종작없이 오른다. 옥기(玉肌)도 타 버리고, 홍안도 타 버리고 금심(錦心)도 타 버리고 수장(繡腸)도 타 버린다! 방안에 켰던 촛불 홀연히 꺼지거늘 웬일인가 살펴보니 초가 벌써 다 탔더라! 양협(兩頰)이 젖던 눈물 갑자기 마르거늘 무슨 연유 묻쟀더니 숨이 벌써 끈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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