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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막잡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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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1
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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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막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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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음악회 구경 아니 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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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던 맡에 상춘(相春)은 학수(學秀)를 꼬드겼다. 상춘은 사내보담 여자에 가까운 얼골의 남자이었다. 분을 따고 넣은 듯한 살결, 핏물이 듣는 듯한 붉은 입술, 초승달 모양 같은 가늘고도 진한 눈썹, 은행꺼풀 같은 눈시울 ― 여자라도 여간 어여쁜 미인이 아니리라. 그와 정반대로 학수의 얼골은 차마볼 수 없이 못생긴 것이다. 살빛의 검기란 아프리카의 흑인인가 의심할 만하다. 조금 거짓말을 보태면 귀까지 찢어졌다고 할 수 있는 입, 장도리나 무엇으로 퍽퍽 찍어서 나려 앉힌 듯한 콧대, 광대뼈는 불거지고 뺨은 후벼파 놓은 듯, 그 우툴두툴한 품이 마치 천병만마가 지나간 고(古) 전쟁터와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이 미남과 추남의 표본이라고 할 만한 두 청년은 한 고장 사람으로 같이 ××전문학교에 다니는 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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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 어데 음악회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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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구말구, 종로 청년회관에 학생 주최로 춘기 대음악회가 있다네. 종로로 지나다니면서 그 광고도 못 봤단 말인가. 참말이지, 이번 음악회는 굉장하다네. 그 학당의 자랑인 꽃 같은 여학생들의 코러스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조선서 음악깨나 한다는 사람을 총출이라데. 그리고 그 나라에서도 울렸다는 프오크 양의 독창도 있고 또 요사이 로서아에서 돌아온 리니콜라이의 바이얼린 독주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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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그만 늘어놓게. 그만해도 기막히게 훌륭한 음악회인 줄 알겠네. 그러나 내가 어데 음악을 아는가? 내 귀에는 한다는 성악가의 독창이나 도야지 목 따는 소리나 다른 것이 없네. 바이올린으로 타는 좋다는 곡조나, 어린애의 앙얼거리는 울음이나 마찬가지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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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음악회에 가기 싫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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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혼자 다녀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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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음악은 모른다 하더래도, 여학생 구경이라도 가세그려. 주최가 여학교측이고 보니, 그 학교 학생은 물론이겠고, 서울 안에 하이칼라 여학생은 다 끌어 올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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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매우 초조한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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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권은 내가 삼세. 음악이 싫거든 여학생 구경이라도 가세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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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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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라니? 여학생의 구경이라도 가자는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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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수는 배앝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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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은 보아 쓸데가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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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춘은 펄쩍 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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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란 말이 웬 말인가? 자네같이 쓸데 있는 것만 찾는다면 인생은 쓸쓸한 황야일 것일세. 캄캄한 그믐밤일 것일세.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아름다운 여성을 보는 것이 벌써 시가 아닌가. 행복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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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다? 행복이다? 흥, 내야 자네같이 어데 취미성이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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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정대는 듯이 이런 말은 하건마는, 찡그린 그 얼골엔 말할 수 없는 고뇌의 그림자가 떠돌았다. 상춘은 제 동무의 말은 들은 체 만 체하고 꿈꾸는 듯하는 눈자위를 더욱 반들반들하게 적시우며, 시나 읊조리는 어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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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더구나 새로운 학문을 배우는 여학생은 인생이란 거친 들의 꽃일세, 어두운 밤에 불일세. 햇발이 왜 따스한 줄 아나? 그들의 가슴을 덥히기 위함일세. 달빛이 왜 밝은 줄 아나? 그들의 얼골을 바래기 위함일세. 꽃이 피기도 그들의 눈을 기쁘게 하려는 까닭이요, 새가 울기도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하려는 까닭일세.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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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잠깐 가쁜 숨을 돌리었다. 학수의 얼골엔 고뇌의 그림자가 더욱 더욱 짙어가며 담박 울음이 터져나올 듯이 왼 상판의 근육이 경련적으로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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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싫네, 듣기 싫어. 그만해도 자네가 시와 소설을 많이 본 줄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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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이지. 그들이 하나가 아니고 둘이 아니고 백 여명이 모였단말이다. 생각을 해 보게. 백 여명이 모였단 말이다. 그 곳은 백화난만한 꽃동산일 것일세. 거기 종달새 격으로 꾀꼬리 격으로 피아노가 운다, 바이올린이 껄떡인다. 그나 그뿐인가, 꽃 그것이 노래를 부르니 이게 낙원이 아니고 어데가 낙원이란 말인가. 거기 가기를 싫어하는 자네는 사람이 아닐세, 사내가 아닐세, 목석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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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상춘은 못 견디겠다 하는 듯이 뻘떡 일어나 방안을 왔다 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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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에는 쉴 새 없이 미소가 떠올랐다. 제 얼골에 지나치게 자신을 가진 그는, 여성과 접촉을 안 했기 망정이지, 접촉만 하고 보면 ― 불행한 일은 아즉 여성과 흠씬 접촉해 본 일이 없었다 ― 손끝 한번 까딱해서, 눈 한번 깜짝해서, 다 저에게 꿀 같은 사랑을 바치려니 생각한다. 젊고 어여쁘고 지식이 있고 마음이 상냥한 여성은 언제든지 저의 애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비난하거나 미워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따라서 그는 어데까지 여성찬미자 ― 더구나 새로운 학문을 배우는, 배운 여성의 찬미자이었다. 그들의 말이 나오면 턱없이 흥분하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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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아니래도 좋고, 사내가 아니래도 좋네. 목석이라도 좋아. 음악회 구경도 싫고, 여학생 구경도 딱 싫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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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츰내 학수도 버럭 화증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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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이지, 요새 여학생은 눈 잔등이가 시어서 못 보겠데. 기름을 바를대로 바르고, 왜 귀밑머리는 풀고 다니는지, 살찐 종아리 자랑인지는 모르지만, 왜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잠뱅이를 입고 다니는지, 발등 뼈가 퉁겨 나와야 맛인가, 구두 뒷축은 왜 그리 높은지, 암만해도 까닭 모를 일이어. 옆에만 지나가도 그 퀴퀴한 향수 냄새란 구역이 날 지경이다. 그리고 이름이 좋아서 하눌타리로 사랑은 자유라야 쓰느니, 연애는 신성한 것이니 하면서 얼골만 반드레해도 그만 반하고, 피아노 한 채만 보아도 마음이 솔곳하고, 애꾸눈이라도 서양 갔다 온 사람이면 추파를 건넨다던가. 그런 천착(舛錯)하고 경박하고 허영에 뜬 년들에게 침을 깨 흘리는 놈도 흘리는 놈이지. 그래, 그런 것들이 우글우글 끊는 음악회에 간단 말인가? 차라리 요귀가 끓는 지옥엘가는 게 낫지. 바루 제가 젠 체하고 단 위에 올라서서, 몸짓 고개짓을 하면서 주리난장을 맞는 듯이 아가리를 딱딱 벌리는 꼴이란 장님으로 못 태어난 것이 한이 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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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학수도 까닭 모를 흥분에 목소리를 떨며, 그 험상궂은 얼골이 푸르락붉으락하며 부르짖었다. 제 스스로 제 얼골이 다시 더 못생길 수 없이 못생긴 것을 잘 아는 그는, 여성을 대할 적마다, 저 아닌 남으론 상상도 못할 만큼 심각한 고통을 느끼었다. 여성의 시선이 제 얼골에 떨어지면 못생긴 제 얼골이 열 곱 스무 곱 더 못생겨지는 듯싶었다. 조소와 멸시를 상상치 않고는 여성의 눈길을 느낄 수 없었다. 이러구러 그는 어느 결엔지 미소지니스트(여자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이)가 되고 말았다. 구식 여자보담 자유 연애를 ― 저는 일평생 가야 맛보지 못할 자유연애를 한다는 신식 여자가 더욱이 밉고 싫고 침이라도 배앝고 싶을 만치 더럽고 추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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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춘은 어이없이 학수를 바라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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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웬 야단인가? 여학생하고 무슨 불공대천지원수나 졌단 말인가? 모욕을 해도 분수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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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다, 그러면 자네는 여학생한테 무슨 재생지은덕이나 입었단 말인가? 왜 여학생이라면 사지를 못 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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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는, 잠깐 보면서 입을 닫치었다. 이윽고 상춘은 또 방안을 거닐다가 화증 난 듯이 문을 열고 튀 하고 침을 배앝았다. 봄밤이다. 생각에 젖은 처녀의 눈동자 같은 봄밤이다. 전등 불빛의 세력 범위를 벗어난 어스름 한마당 구석에는 달빛조차 어른거린다. 단성사인지 우미관인지 사람 모으는 젓(笛)대 소리가 바람결에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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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춘에게는 일 찰나가 몇 세기나 되는 듯싶었다. 아름다운 음악회의 광경이 무지개같이 그의 머리에 비추인다. 그는, 마치 애인과 밀회할 시간이 늦어가는 사람 모양으로, 앉았다 일어섰다 조를 비빈다. 저 혼자 같으면 좋으련만 같이 있는 처지에 학수를 버리고 가는 것이, 실없는 말다툼으로 감정이나 낸 듯도 싶고, 그보담 많은 여자에게 제가 얼마나 잘난 것을 돋보이게 하려면 못 생긴 동반자가 필요도 하였다. 그는 다시 제 동무를 달래고 꼬드기고 조르기 시작하였다. 오늘 저녁이 봄밤인 것과, 이러고 들어박혀 있을 때가 아닌 것과, 정 음악이 듣기 싫고 여학생이 보기 싫더라도 제 얼골을 보아 가달라고, 비대발괄하였다. 친구 따라 강남도 간다니, 이렇게 청을 하는데, 아니 갈 게 무어냐고, 성도 내었다. 얼골과 달라 마음은 싹싹한 학수라, 그렇게 조르는 친구의 청을 떨치기도 무엇하고, 또 얼마큼 상춘의 달뜬 기분이 전염이 되어 혼자 빈방을 지키기도 을씨년스러웠다. 마츰내 학수는 싫으나마 도수장에 끌려 가는 소 모양으로 상춘을 따라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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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춘이와 학수가 음악회에 들어선 때에는 벌써 회를 여는 관현악이 아뢰일 적이었다. 만일 상춘이가 대분발을 해서 이 원을 내고 일등표 두 장을 사지 않았던들 ― 그들은 일등표를 산 덕택에 바루 자석 옆 악단 멀지 않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 구경도 못 하고 돌아설 뻔하였다. 그다지 모인 사람이 많았다. 상춘의 짐작과 틀리지 않아 자리를 반분하다시피 여자의 구경꾼도 많았다. 띄엄띄엄 쪽찐 이와 땋은 이가 없지 않았으되, 대개는 푸수수한 트레머리의 꽃밭이었다. 그래, 탐스럽게 핀 검은 목단화 송이의 동산이었다. 머리를 꽃송이에 견주면 보얀 목덜미는 그 흰 줄기일러라. 문에 쑥 들어서면서 이송이와 줄기만 보아도 젊은이의 가슴은 이상하게 뛰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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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윽한 향수와 기름내, 많은 젊은 몸에서 발산하는 훈훈한 살내, 입내, 옷내 ― 그 곳의 공기는 온실과 같이 눅눅하고 향긋하고 따스하였다. 일분은 음악으로 하여, 구분은 이성으로 하여 모인 이들은 우단을 감는 듯한 포근한 느낌과 아지랑이에 싸인 듯한 황홀한 심사에 사라지며 있다. 이따금 파름파름 잎 나는 포플러 가지를 흔들고 온 듯한 바람이 우 하고 유리문을 찌걱거리면, 시방이 봄철인 것과, 꽃구경이 한창인 것과 오늘 저녁이야말로 음악 듣기에 꼭 좋은 밤임을 새삼스럽게 생각해내며, 공연히 마음이 놀아들나서, 이성의 눈결은 더 많이 이성에게로 몰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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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춘은 아까부터 보아둔 여학생이 하나 있었다. 그이는 모시 치마와 옥양목 저고리를 입은 얼골 갸름한 처녀인데, 저와 슬쩍 한 번 눈길이 마주친 후로 자꾸 저를 보는 듯하였다. 가장 잘 음악을 아는 체로 얼골에 미소를 띠우고 발로 박자를 맞추는 사이, 그이의 눈결은 꼭 저만 쏘고 있는 듯하였다. ― 고개만 돌리면 그와 나의 시선은 또 마주치렷다. 그는 부끄러워 얼골을 붉히렷다. 남에게 무안을 주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다. 얼마든지 나를 보게 해 두자. 아마도 나에게 마음이 끌린 모양이야. 얼마든지 보라지, 가만히 내버려 두어 ― 열기 있고 짜릿짜릿한 눈살의 쏘임을 견디다 못해서 상춘은 문득 고개를 돌리었다. 저 편에서 어느 결에 눈결을 돌리었나? 그이의 눈은 저 아닌 바이얼린 타는 이를 똑바루 보고 있다. 인제 이편에서 한동안 노리며, 보아주기를 기다렸으나 그이는 매우 감동된 듯이 눈을 번쩍이며 깽깽이 시루는 이의 손을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하고 성낸듯이 제 고개를 돌이키자마자, 어째 저편의 고개가 얼른 제 편으로 돈 듯하였다. 또 놓쳐서 될 말인가 하고, 이번에는 날쌔게 돌아다보았다. 그편의 눈은 한결같이 바이올린에 박혔을 뿐. 몇 번을 고개를 바루었다 틀었다 해보건만 한결같이 그이의 눈은 저를 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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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지 않는군. 안보면 대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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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증 낸 듯이 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다른 눈 맞는 이를 찾아내려 하였다. 한참이나 헛되이 돌아다니던 눈이 얼마 만에 저를 보고 웃는 듯한 눈을 잡아내었다. 그이의 얼골은 동그스름한데 아까 저 보던 이보담 몇 곱절이나 아름다운 듯싶었다. 옳다구나? 할 새도 없이 염통이 파득파득 소리를 내었다. 슬쩍 눈결을 피하였다가 슬쩍 눈결을 던지매 그이는 시방도 웃기는 웃건마는, 곁에 앉은 제 동무와 속살거리고 웃을 뿐이고 저를 보지는 않았다. 또 아깟 번으로 눈살을 놓았다 거두었다 하는 사이에 용하게 두 번째 그이의 눈을 맞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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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이다, 두 번이야. 이번 것은 틀림없이 나한테 호의를 가졌나 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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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춘은 이렇게 확신 있게 속살거리며, 사람이 헤어져 돌아갈 때에 문 앞에서 기다리면 그이가 나와 저를 보고 반겨 웃을 것과 저더러 같이 가자든지, 그렇지 않으면 저를 따라 올 것과, 어떻게 꿀 같은 사랑을 맛볼 것을 생각하였다. 악수, 키스, 달밤에 산보, 꽃 사이의 해매임 ― 그림보담도 더 아름다운 정경을 역력히 그리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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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앉아 있던 학수, 신트림이나 올라오는 사람 모양으로 보기 싫게 찡그린 얼골을 주체를 못하는 듯이 숙였다 들었다 하며 여자편과 외면을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남자의 편을 향하고 있는 학수. 맡지 않으려 할수록 속을 뒤흔드는 이성의 냄새와 느끼지 않으려 할수록 몸에 서리는 이성의 훈기에 축축이 진땀이 흘렀다. 으슬으슬 한기가 들었다 하던 학수가, 한창 꿈결 같은 환상에 녹는 상춘의 옆구리를 꾹 질렀다. 제 친구의 존재를 깜빡 잊어버렸던 상춘은 발부리에서 모츠래기가 날아간 듯이 놀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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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수는 목안에서 나는 듯한 그윽한 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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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상춘이, 여보게 상춘이, 여기 변소가 어데인가? 오줌이 마려워서 견딜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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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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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상춘은 네 말을 못 알아듣겠다는 듯이 물끄러미 학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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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수는 여간 급하지 않은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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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소가 어데냐 말일세. 오줌이 마려워서 죽을 지경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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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오줌이 마려워. 참게 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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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춘은 배앝는 듯이 퉁을 주었다. 저의 꽃다운 환상을 이따위 일에 부순 것이 속이 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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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인제 더 참을 수 없네. 여기 오는 맡에 마려운 것을 이때까지 참았네. 인제 할 수 없네. 아랫배가 뻑적지근하게 아파 견딜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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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사람도. 그러면 저 문으로 나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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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춘은 어처구니없이 픽 웃고는 악단의 오른 편에 있는 조그만한 문을 가리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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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면 오른편에 층층대가 있으니. 그리 나려가면 거기 변소가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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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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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수는 엉거주춤하고 겸연쩍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가리키는 대로 그 문을 열고 밖을 나왔다. 밝은 데 있다가 나온 까닭에 눈앞이 캄캄하였다. 손으로 더듬어서 층층대를 나려는 왔으나 어데가 어데인지 도모지 알 수가 없었다. 공장 옆에 있는 변소를 대강당 밑에서 찾으니 찾아질 리가 없었다. 헛되이 층층대를 끼고 얼무적얼무적하다가 하는 수 없이, ‘층층대 밑에라도’ 할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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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상하고 야릇한 일이 일어나기는 그 때였다. 문득 뒤에서 똑 찍, 똑 찍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방망이 같은 무엇이 훌쩍 어깨를 넘을 겨를도 없이 등 뒤에 물씬한 것이 닿으며 보드랍고 싸늘한 무엇이 눈을 꼭 감긴다. 학수는 전신에 소름이 쭉 끼치며, 하도 놀래어 ‘악’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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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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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 죽이는 웃음과 함께 낮으나마 또렷또렷한 목성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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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모 말도 않으셔요? 놀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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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소리가 나면서 눈 가렸던 물건이 떨어진다. 일시에 등에 대었던 것도 떨어지며 가벼운 힘이 어깨를 흔들자 눈앞에 보얀 얼골이 어른하였다. 이불의에 나타난 괴물이 학수의 얼골을 알아보자마자 그편에서도 매우 놀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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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그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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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부르짖음과 함께 그 괴물은 천방지축으로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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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수는 얼 없이 제 앞에 나는 듯이 떠나가는 괴물의 뒤 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후 놀래었던 가슴이 가라앉은 뒤에야 시방 제 눈을 감기고 달아난 것이 결코 귀신도 아니요 괴물도 아니요, 한갓 아름다운 여성임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자 그 여성의 대이었던 자리가 전기로나 지진 듯이 욱신욱신하고 근질근질해 온다. 무수룩하게 어깨를 누르는 팔뚝, 말씬말씬하게 등때기를 비비는 젓가슴, 위 빰과 눈언저리에 왕거미 모양으로 붙었던 두 손을 참보담 더 참다이 느낄 수 있었다. 그 근처의 공기조차 따스하고 향긋하게 코 안으로 기어드는 듯하였다.
 
65
그는 몽유병자의 걸음걸이로 그 여자의 간 곳을 향해서 몇 걸음 걸어가 보았다. 그 때의 찾고 찾아도 찾을 수 없던 뒷간인 듯한 집이 보이었다. 그는 늘어지게 소변을 보고 몸이 날 듯이 가든해 오매, 이 이상한 일의 까닭을 캐어보았다.
 
66
그것은 어렵지 않게 풀 수 있는 수수께끼였다. 눈을 감긴 이는 저의 애인과 함께 이 음악회에 왔음이리라. 그런데 그들은 무슨 까닭으로든지 이 층층대 밑에서 남 몰래 만나자고, 무슨 군호로 ― 눈짓 같은 것으로 맞추었음이리라. 사내가 그 군호를 몰랐던지 그렇지 않으면 사내의 발길은 더디고 계집의 발길은 일쯕어, 층층대 아래서 학수가 어름어름하는 걸 보고 꼭 제 애인인 줄만 여겨서 아양 피움으로 까막잡기를 하였음이리라.
 
67
이윽고 그 층층대를 도루 올라와서 음악회에 통한 문을 여는 학수는 제 얼골이 여지없이 못생긴 것과 여성에 대한 미움을 씻은 듯이 잊어버리었다. 전등불이 급작스럽게 밝아지며, 모든 사람이 저에게 호의 있는 시선을 보내는 듯하였다. 그 중에도 여자들은 미소를 건네는 듯하였다. 바이올린은 이미 끝났음이리라. 어느 양녀 하나이 보얀 손가락을 북같이 쏘대이게 하며 피아노를 치고 있다. 전 같으면 시답지 않을 그 악기의 소리가 제 가슴속의 무슨 은실 같은 것을 스치어서 어느 결엔지 멋질린 발길이 춤추는 듯이 박자를 맞춘다.
 
68
그는 바루 여자석의 옆 걸상 줄에 있는 제 자리에 한 두어 걸음 남겨 놓고, 걸상 줄밖에 나온 어느 여학생의 구두코를 지척하고 밟아 버렸다. 학수는 그 얼골에 애교를 넘쳐 흘리며 제 잘못을 사과하였다. 그 여학생은 당황히 발을 끌어들이며 괜찮다 하였다. 발 밟힌 이의 얼골이 아모 일도 아니 일어난 것처럼 새침하게 바루어진 뒤에도 발 밟은 이는 사과를 되풀이하며 빙글빙글 웃는다. 그 여학생은 한번 힐끗 학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팍 숙이고는 제 옆 동무를 꾹 찌르며 웃는다. 제 자리에 앉는 학수도 자기의 한 일이 가장 재미있고 우스운 것같이 킬킬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러는 가운데, 언뜻 깨달으니 그 여학생이 갈데없는 제 눈을 감기던 사람 같았다. 북받치는 웃음으로 하여 가늘게 떠는 그 동그스름한 어깨, 서너 올 머리칼이 하늘거리는 보얀 귀밑. ― 그렇다, 그렇다, 분명히 그 여자다. 내 눈을 감기고 달아난 그 여자다, 하였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제 그 여학생의 입이 비죽비죽하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또 한번 학수의 편을 보았다. 그의 광대뼈가 조금 내민 것을 알아보자, 학수는 그이가 아니로구나 하고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었다.
 
69
찡그린 상판을 남자 편으로 향하고 있던 학수는 인제 번쩍이는 얼골을 여자편에게로만 돌리어서, 저와 까막잡기하던 이를 찾기에 골몰하였다. 여러번 그이인 듯한 여학생을 찾아내었건만, 눈썹이 겅성다못도 하고 입이 크거나 작거나 하고, 이마가 좁기도 하며, 코가 높거나 낮거나 해서, 정말 그이를 알아 맞추는 도리가 없었다. 그릇 알았든 옳게 알았든, 비록 눈도 한번 못 깜짝일 짧은 동안이라 할지라도 저를 애인으로 생각해 준 그 여자는 여성으로의 모든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었을 듯하였음이다.
 
70
상춘은 상춘으로 그 얼골이 동그스름한 여학생과 눈을 맞추며 기뻐하고 있었다. 시선이 맞질리기가 벌써 네 번이나 된다.
 
71
음악회는 그럭저럭 끝나고 말았다.
 
72
상춘은 저와 네 번이나 눈이 마주친 그이를 기다리면서, 학수는 혹 제 동무들과 섭슬리어 나올는지 모르는 제 눈 감기던 그이를 기다리면서, 두 청년은 청년회관 문 앞에 서 있다…….
 
73
상춘의 그이는 나왔다. 무슨 할말이나 있는 듯이 상춘은 한 걸음 다가들었건만, 그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제 갈 데로 가 버렸다. 나오는 이 족족 새로이 얼골을 검사해 보았건만 학수의 그이는 없었다.
 
74
사람들이 다 헤어진 뒤에도 잘난 이와 못난 이는 사라지려는 아름다운 꿈을 아끼는 듯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75
아까 음악당의 유리창을 비걱거리던 바람은 휙휙 먼지를 날리며 포플러 가지를 우쭐거리게 한다. 반 넘어 서쪽으로 기울어진 초승달은 새악씨의 파리한 뺨 같은 모양을 구름자락 사이에 드러내었다.
 
76
“달이 있군.”
 
77
상춘은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 지었다.
 
78
“시방, 집에 가면 잠 오겠나? 우리 종로를 한 번 휘 돌까?”
 
79
두 청년은 걷기 시작하였다. 광화문통까지 올라갔다가 도루 나려왔다. 그들의 묵고 있는 집은 사동(寺洞)에 있었다.
 
80
“음악회란 기실 아모 것도 보잘 게 없어. 그 많은 여학생 가운데 하나나 그럴 듯한 게 있어야지.”
 
81
상춘은 탄식하는 듯이 이런 혼자 말을 하였다.
 
82
“왜 그렇게 가자고 사람을 들볶더니.”
 
83
“갈 적에는 좋았지만 나와 보니 그런 싱거운 일이 없네그려. 돈 이원만 날아갔는걸.”
 
84
“나는 재미있던데.”
 
85
상춘은 턱없이 빙글빙글하는 학수를 바라보며 의아한 듯이,
 
86
“왜 음악회라면 대경질색을 하더니?”
 
87
“딴 음악회는 다 재미 없어도 오늘 것은 매우 재미있었어……. 그런데 여보게, 사랑 맡은 귀신은 장님이라지?”
 
88
“그것은 왜 묻나?”
 
89
“글쎄 말일세.”
 
90
“그렇다네. 사랑을 하면 곧 이성의 눈이 감긴단 말이겠지.”
 
91
“흥, 그러면 나는 오늘 저녁에 사랑을 하였는걸. 사랑 맡은 귀신의 은총을 입었는걸.”
 
92
“사랑을 하였다니?”
 
93
“흥, 세상에는 이상한 일도 있지.”
 
94
“무슨 일이 그렇게 이상하단 말인가?”
 
95
“이야기할까?”
 
96
“이야기할 테면 하게그려.”
 
97
상춘은 별로 흥미가 끌리지 않는 듯하였다. 학수는 주춤 걸음을 멈추더니
 
98
다짜고짜로 등뒤에서 상춘의 눈을 감기었다.
 
99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100
상춘은 놀라 부르짖었다.
 
101
“내가 사내가 아니고 여자일 것 같으면 자네 마음이 어떠하겠나?”
 
102
“그게 다 무슨 소리인가?”
 
103
“오늘 음악회에서 어느 여자가 나를 그리했다네.”
 
104
상춘은 어이없이 웃으며,
 
105
“예끼 미친 사람…….”
 
106
“미치기는 누가 미쳐? 왜 거짓말인 줄 아나?”
 
107
하고, 학수는 입에 침이 없이 아까 층층대 밑에서 일어난 일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108
호기의 눈을 번쩍이고 있던 상춘은, 이야기가 끝나자 웬일인지 그 여자를 여지없이 타매하였다. 어데 밀회할 곳이 없어서 그 어둠침침한 층층대 밑에서 그런 짓을 하느냐는 둥, 그런 년이 있기 때문에 여학생의 풍기가 문란하다는 둥, 필연 여학생 모양을 한 은근짜나 갈보라는 둥, 내가 그런 일을 당했으면 꼭 붙들어 가지고 톡톡히 망신을 주었으리라는 둥, 그리 못한 학수가 반편이라는 둥…….
 
109
“왜 샘이 나니? 생각을 해 보게, 보들보들한 손이 살짝 내 눈을 가리었단 말이지. 내 등에 그 따뜻한 가슴이 닿이었단 말이지. ‘내가 누구예요?’ 하는 그 목소리? 그야말로 꾀꼬리 소리란 말이지…….”
 
110
하고, 학수는 못 견디겠다는 듯이, 몸을 비꼬자마자 상춘을 부둥켜 안았다.
 
111
“이 사람이 정말 미쳤나?”
 
112
하고, 상춘은 사정 없이 뿌리쳤다. 학수는 넘어질 듯이 비틀비틀하면서 허허 하고 소리쳐 웃었다. 그들은 벌써 사동 입새에 다다랐다.
 
113
상춘은 부인 상회로 무슨 살 것이나 있는 듯이 들어간다. 어데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이 상회를 거치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전일엔 상춘이가 암만 졸라도 좀처럼 들어가지 않던 학수이언만 오늘밤에는 서슴지 않고 상춘을 따라 들어설 수 있었다.
 
114
상회에 들어온 뒤에도 학수의 왼 얼골에 퍼진 웃음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 꼴을 보고 상춘은 의미 있게 웃고는, 벙글거리는 이를 슬며시 색경과 경대를 벌려 둔 데로 끌고 와서 귀에 대고 소근거렸다.
 
115
“여보게, 거울을 좀 보게.”
 
116
벙글거리던 이는 무심코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 저놈이 웬 놈인가? 지옥의 굴뚝 속에서 뛰어나온 아귀 같은 상판으로 빙그레 웃는 저놈이 웬 놈인가? 입은 찢어진 듯이 왜 저리 크며 잔등이 움퍽한 콧구멍은 왜 저리 넓은가? 학수는 제 앞에 나타난 이 추(醜)의 그것 같은 괴물을 차마 제 자신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사랑 맡은 여신의 은총을 입은 제 자신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더할 수 없이 못생긴 괴물이야말로 갈데없는 저임에 어찌하랴, 다른 사람 아닌 제 본체임에 어찌하랴?
 
117
그의 눈앞은 갑자기 한 그믐밤같이 캄캄하였다.
 
 
118
(『개벽』, 19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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