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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잡기첩(雜記帖) - 뒷골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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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5.28~
김남천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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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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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잡기첩(雜記帖) -
 
 

1. 1.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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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거리에서 30대, 40대의 사람들끼리 서로 만나면 ‘얼마만이요’의 뒤에 가끔 ‘댁이 어디시지?’하는 물음이 나올 때가 있다. 그런 때에 대답에는 ‘애오개’니 ‘야주개’니 ‘양사골’이니 하는 말보다도 무슨 동, 무슨 정(町) 소리가 나오기기 아주 쉬웁다. 나도 서울살이 3년이 지나 4년으로 접어들건만 낡은 동리 이름으로 주소를 들어 본 적은 극히 드물다. 사실 ‘애오개’니 ‘감영 앞’이니 하는 말을 내가 배운 것은 정거 차장한테서였다. 30대, 40대의 사람에서 이러하니 20대의 청년의 입에서는 무슨 동, 그것도 최근에는 무슨 ‘정(町)’이란 말밖에는 들을 길이 없다. 중류 이상의 가정 안에 그렇게 많이 남아 있는 낡은 전통과 풍습이 이 동명(洞名)의 호칭에선 거의 그 자취를 찾아 볼 수 없음은 언뜻 생각하면 퍽 괴이한 일이기도 하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이것이 이 땅의 중앙 도시의 간과치 못할 면모인가 하여 흥미진진한 바가 없지 않다. 제법 이 즈음은 ‘연희장(延禧莊)’이니 ‘앵구장(櫻丘莊)’이니 하는 하이칼라 이름까지 유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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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평양서는 이것이 다르다. 십년 전에 그런 것쯤은 이해할 길도 있으나 이번에 평양 보고 놀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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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하숙이 어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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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다리바우골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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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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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설수당골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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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중학교 3, 4년생의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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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골 형님 안나오셨나요?’라든가 ‘엿전골 누님’이라든가 ‘옥골댁’이라든가 하는 말은 친척 간에 쓰는 용어로서 어떤 가정에서나 사용된다. 가령 예를 들어 벽암리(薜岩里)의 어떤 골목을 말할 때 ‘내 집은 벽암리인데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다 무슨 술집을 지나서 담배가게를 어느 편으로 휘어돌아 운운’ 한다든가 또는 ‘벽암리 몇백 몇십 번지’라든가 하는 것보다 ‘땅바우골이 웨다’ 하든가 ‘설수당골이요’ 하든가 ‘안주전골’ 하든가 하는 편이 듣는 사람에게 현저히 뚜렷하고 똑똑하다. ‘땅바우골’, ‘안주전골’, ‘설수당골’ 등등은 모두 벽암리에 포함되지만 그 부분과 구역이 너른 까닭에 무슨 번지로 번거롭게 표시하는 것보다 이 편이 훨씬 알아듣기 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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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것만 적어도 이런 골목의 이름이 상당히 많아서 서울 낡은 동명의 지식에 비하면 현격한 차가 있다. 경상골, 설수당골, 땅바우골, 영문 앞, 사창마당, 새수구, 비나전골, 안주전골, 세다리바우골, 해주골, 엿전골, 삿전골, 소금전골, 이얏다리, 거문다리, 학당골, 옥골, 리문골, 강촌, 오동포, 잿동, 궁촌 등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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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나 역시 ‘옥골’ 하면 영화상설관 제1관이 있고 또 일류 여관이 가장 많기로 이름난 수옥리의 어떤 부분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고 ‘비나전골’ 하면 차관리(釵貫里)의 중심 골목으로 기생집 많은 곳 하고 똑똑이 그 거리와 골목의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삿전골이나 엿전골은 십년 전 우리 중학 시절에는 나까이 술집(색주가집과 비슷하다)이 많은 곳이라 하여 무시무시하기도 할뿐더러 그 골목을 지나다가 상급생이라도 만나면 수첩에 이름을 적히었다가 그 이튿날 철권 제재(鐵拳制裁)를 받는 통에 쉬쉬 하고 가까이 갈 염도 못했다. 이번 육수(‘맹물’이라고도 하여 서울의 장국밥과도 비슷하나 독특한 맛이 잇다)를 먹으러 그 곳을 거닐어 보니, 전통 있는 거리인지라 아직도 문등 달린 무슨 관이라 쓴 간판 앞에 ‘나까이’가 나서서 손님을 끌고 있었다. 기생들이 숙소는 대개 경재리(鏡齋里), 신창리(新倉里), 차관리 등지로 모아 놓은 모양인데 암소갈비 스키야키집과 나까이 술집은 이외의 곳에도 널리 흩어져 있었다. 약 1년 전과 달라진 것은 암소갈비나 스키야키집에 작부를 많이 둔 것이겠다. 물론 점잖게 양육봉사(良肉奉仕)의 신조를 굳이 지키는 집도 없지는 않으나, 대문 어귀에 계집을 내세운 곳이 많아진 사실은 숨길 수 없다. 어떤 곳은 유곽을 연상케 하는 곳조차 드물지 않았다. 서울로 치면 명월관 뒤 열부루 부근, 돈의정, 수은정(授恩町)의 긴 골목과 같을 것인데 사실의 풍경은 오히려 그 이상이다. 밤이 으슥해 오면 이 치마 두른 분들이 서투른 수심가의 한 가닥이나 이팔청춘가의 꼬챙이 소리를 올리면서 대문을 나서서 술꾼을 부르고 취한을 희롱한다. 이런 것이 주택지나 생도 하숙 부근에까지 널려 있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5월 28일)
 
 
 

2. 2. 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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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이란 말에 ‘평양’이 붙어서 ‘평양 냉면’이라야 비로소 어울리는 멱에 맞는 말이 되드키 냉면은 평양에 있어 대표적인 음식이다. 언제부터 이 냉면이 평양에 들어왔으며 언제부터 냉면이 평안도 사람의 입에 가장 많이 기호에 맞는 음식물이 되었는지는 알 수도 없고 또 알려고도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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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우리가 냉면을 국수라 하여 비로소 입게 대게 된 시일을 기억하는 평안도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밥보다도, 아니 쌀로 만든 음식물보다도 이르게 나는 이 국수맛을 알았을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등에 업히어서 어른들의 냉면 그릇에서 여나문 오리를 끊어서 이가 서너 개 나나마나한 입으로 모밀로 만든 이 음식물을 받아 삼킨 것이 아마도 내가 냉면을 입에 대어 본 처음일 것이다. 젖 먹다 뽑은 적은 입으로 이 매끈거리는 국수 오리를 감물고 쭐쭐 빨아올리던 기억이 있는지 없는지 가물하다. 누가 마실을 오든가 한때에 점심이나 밥참에 반드시 이 국수를 먹던 것을 나는 겨우 기억할 따름이다. 잔칫날, 그러므로 약혼하고 편지 부치는 날에서부터 예물 보내는 날, 장가가는 날, 며느리 데려오는 날, 시집가는 날, 보내는 날, 장가와서 묵는 날, 가는 날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이 국수가 출동한다. 이 밖에 환갑날, 생일날, 제삿날, 장례날, 길사, 경사, 흉사를 물론하고 이 국수를 때로는 냉면으로 때로는 온면으로 먹어 왔다. 심지어는 정월 14일 작은 보름달 이닥기엿, 귀밝이술과 함께 수명이 국수오리처럼 길어야 한다고 ‘명기리국수’라 이름지어서까지 이 냉면 먹을 기회를 만들어 놓았다. 지금 생각해 보매 평안도 사람의 단순하고 담백한 식도락을 추상(推想)할 수 있어 흥미가 새로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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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클클한 때라든가 화가 치밀어오를 때 화풀이로 담배를 피운다든가 술을 마신다든가 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런 때에 국수를 먹는 사람의 심리는 평안도 태생이 아니고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도박에 져서 실패한 김에 국수 한 양푼을 먹었다는 우리 시골에 있다. 이렇게 될 때에 이 국수는 확실의 술의 대신이다. 나같이 술잔이나 다소 할 줄 아는 사람도 속이 클클한 채 멍 하니 방안에 처박혀 있다간 불현듯이 냉면 생각이 나서 관철동이나 모교 다리 옆을 찾아갈 때가 드물지 않다. 그런 때 거리에서 친구를 만나 ‘차나 마시러 갈까?’ 하면 ‘여보, 차는 무슨 차, 우리 냉면 먹으로 갑시다’ 하고 앞서서 냉면집을 찾았다. 모든 자유를 잃고 그러므로 음식물의 선택의 자유까지를 잃었을 경우에 항상 애끊는 향수같이 엄습하여 마음을 괴롭히는 식욕의 대상은 위선 냉면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냉면이 우리에게 가지는 은연한 세력은 상당히 큰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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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의는 냉면은 몸에 백해(百害)는 있을망정 일리(一利)도 없는 식물(食物)이라 한다. 그런지 안 그런지 알 길이 없다. 혹종의 보약 같은 것을 복용할 때 금기물의 하나로 모밀로 만든 냉면이 드는 수가 많은 것은 우리들의 주지의 사실이다. 냉면은 몸에 해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국수물 다시 말하면 모밀숭늉은 이뇨제가 된다. 트리펠 같은 걸 앓는 이가 냉면에 돈육이나 고추나 파나 마늘이 많이 드는 것은 꺼리지만 냉면 먹은 뒤에 더운 국수물을 청하여다 한 사발씩 서서히 마시고 앉았는 것은 이 탓이다. 은근히 물어 보면 이것을 먹은 이튿날의 효과는 어떤 고명한 이뇨제보다도 으뜸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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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은 물론 모밀로 만든다. 모밀로 만든 국수는 차려 놓고 십여 분만 지나면 자리를 잡는다. 물에 풀면 산산히 끊어진다. 시골 외에는 순수한 모밀로 만드는 국수는 극히 희소하다. 국수발이 질기고 끊어지지 않는 것은 소다나 가다꾸리 가루를 섞는 탓이라 한다. 서울의 골목마다 있는 마른사리국수 또는 결혼식장에서 주는 국수 오리 속에 몇 퍼센트의 모밀가루가 들었는지는 우리들의 단언할 수 없는 바다. 나는 서울서 횡행하는 국수의 대부분은 옥수수 농매나 그와 유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틀 사흘을 두었다가도 제법 먹을 수 있고 얼쿠었다가도 더운 국물에 풀면 국수 행세를 할 수 있다. 이것은 국수가 아니고 국수 유사품이다. 평양 냉면이나 모밀국수와는 친척간이나 되나마나하다. (5월 29일)
 
 
 

3. 3. 냉면(전승〔前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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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주후면(先酒後麵)이란 말이 우리 시골에 있다. 소갈비나 구어서 소주를 마신 뒤에 얼벌벌하니 고추를 쳐서 동치미국에 말아 놓은 냉면을 먹는 맛이란 지내 보지 않은 사람으론 상상할 수도 없는 기막히는 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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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은 어느 계절에 먹는 음식일까? 평양이나 평안도 일대에선 점심이나 밤참은 언제나 냉면이나 사절(四節)을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이것을 애호하는 셈이다. 이 즈음 중독 사건이 각처에서 일어난 발련으로 여름에 냉면을 먹는 것을 도회지에선 꺼리지 않는가 한다. 나 자신도 여름에 서울서 냉면을 먹을 때엔 ‘고기가 변하지 않았나’를 단단히 다져 보고 ‘고기 국물이 상하지 않았나’를 여러 번 물어 본 뒤에도 안심할 수 없어 상당한 각오를 하면서야 먹는다. 이런 각오를 하고 먹어도 그 맛이 감쇄되지 않으니 그 맛은 과연 복어와 비길 정도인가 한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냉면은 겨울에 먹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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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는 온면이나 어북장국을 애호하는 분이 많으나 이는 늙은이들이나 할 짓이다. 국수를 먹으면 바람을 켜고 감기를 재촉하고 기침을 유발한다하여 겨울에 천식이나 해수병(咳嗽病)을 신고(辛苦)하는 노인네들은 절대로 입에 대지 아니하고 간혹 피치 못할 경우에는 냉면 대신에 온면이나 어북장국을 먹는다. 웬만큼 국수 맛을 아는 사람은 엄동에 오히려 냉면 맛을 향락한다. 혀를 울리는 쩌르르한 ‘전동치미’국에 국수를 풀어놓고 도야지 비계 같은 흰 잔디쪽 위에 ‘다대기’를 얹은 것을 훅훅 들이키는 맛이란 아닌게 아니라 다른 계절에선 찾아 볼 길이 없는 훌륭한 미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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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 시골서 다섯 사람이 내기 화투를 하고 밤참을 주문할 때에 그 중의 한 사람의 50줄에 든 늙은 분을 위하여 ‘다섯 그릇 중에 한 그릇은 온면이오’하고 말한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그 늙은이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자리를 찼다. 휭하니 밖으로 나가는 것을 알아채고 ‘아즈바니 젊은 놈이 미처 실수를 했으니 눌러 보아 주시오’ 해서 겨우 노염을 풀은 일이 있다. 앉아서 그 분 하는 말이 ‘임자네들이 날 병신 취급을 하는 바엔 아예 당초에 함께 작난을 칠 게 무언가’ 운운. 그는 저 혼자 온면을 먹으랬다고 그 곳에 모욕을 느꼈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는 국수를 주문할 때엔 연로한 분이 있으면 ‘아즈바닌 무얼 하실까요?’ 하고 은근히 묻는 일이 많아졌다. ‘응 난두 냉면으로 하시게’라든가 ‘나는 요즘 기침이 나서 장국으로 하시게’라든가 하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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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꾸미, 다시 말하면 국수에는 무슨 고리를 치야 가장 맛이 나는 것일까? 흔히들 우육과 돈육을 친다. ‘수육 치구 한 그릇이오’라든가 ‘살루치구 두 그릇이오’라든가는 이를 말함이다. 사실 서울이나 평양에선 이 외의 ‘꾸미’를 맛볼 수는 없다. 나는 다행히 물오리고기, 닭고기, 노루고기, 범(虎)의 고기, 산도야지고기 등등을 채서 먹어 본 일이 있으나 무엇 무엇하여도 냉면에는 꿩(雉) 이상 가는 것이 없다. 꿩보끼를 쳐서 동치미국에 먹어 본 적이 없는 이는 냉면에 대하여 용훼(容喙)할 자격이 없다. 꿩은 겨울에 나는 동물이다. 냉면 맛이 겨울에 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닌가 하나다. 꿩고기 쳐서 냉면을 먹어 보지 못한 겨울은 나에게 있어선 지극히 불행한 겨울이다. 이번 평양 들러 2박을 하는 동안 세 곳의 냉면집에서 다섯 그릇의 냉면을 먹었다. 질이 저하되었다. 서울 25전에 평양 15전이니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떤 것은 서울만도 못한 것도 있었다. 시골 와서 무려 10수 기(器)를 먹었으나 꿩의 고기를 구할 길이 없으매 국수 맛으로 입을 다셔 볼 길이 망막하다. 먹고 나서 입 다실 품이 없으매 마치 고향을 잃은 것같이 쓸쓸하고 서운하였다. 냉면과 인연 있는 어휘로서 자미 있는 것이 한둘이 아닐게다. ‘전동치미’, ‘다대기’, ‘수육’,‘ 살’, ‘생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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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드리’, 그러나 ‘못당추’란 말처럼 우습고 자미나는 말도 드물 것이다. ‘못당추’란 서울말로 직역하면 ‘못고추’다. 고추를 못한다는 듯이다. 10년 전 우리 학생 때엔 고추를 위주한 양념을 싫어하는 이는 내지인이라 하여 이것을 표시하는 말이 묘하게 되었더니 시세의 탓인지 그것이 ‘못당추’로 되었다. ‘방안에 다섯이요. 하나는 못당추요.’ 나는 그 소리를 듣고 고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냉면과 연줄을 갖는 것으로 ‘쟁반’이란 게 있다. 종이가 진(盡)했으며 자상하게 설명할 길이 없으나 서울서도 우춘관(又春館) 같은 데서 한다. 그 맛은 보증할 수 없으나 ‘쟁반’의 진미를 미루어 보기에는 충분할까 한다. (5월 31일)
 
 
 

4. 4. 만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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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떠날 때에 효석의 주소를 알아 보았더니 인흥리(仁興里) 어디였는데 최근에 이주하였으나, 석훈에게나 신문 지국에 물으면 알리라 한다. 인흥리라면 기림리(箕林里)와 인접한 곳으로 공설운동장 옆이다. 전에는 사과밭 옆이 황막한 밭뿐이어서 그대로 ‘가루개’라는 창기촌에 연접되어 있더니 수년래에 이 곳에 문화 주택이 들어서고 아담한 소주택이 짜고 앉아서 평양 유수의 주택지가 되었다. 이주를 하였더라도 그 부근이라면 마침 축구 대회도 있으니 구경하는 김에 들르기 편하리라 하였더니 정작 평양 내려서 어떤 친구를 만나 물어 보매 뜻밖에 창전리(倉田里)라 한다. ‘창전리 어딘가?’ 했더니 ‘번지는 잊었네만 포도원 김아무개네 저택 별실일세’ 한다. 김아무개의 저택이라면 중학 시대로부터 우리들의 인상 깊은 건물이다. 동경인가 어딘가 사는 돈 많은 귀족의 별장이었던 것을 매수한 것으로 7, 8년 전 고무 파업이 치열할 때에도 입에 오르던 양옥 2층의 이쁜 집이다. 이 부근을 속칭해서 포도원이라 한다. 10년 전만 해도 한 귀퉁이에 포도원이 있어서 포도원의 출처를 짐작할 만하더니 지금은 주택이 쫙 들어서서 옛날의 모습을 찾아 볼 길이 없다 이 포도원에서 언덕을 넘어 시가지로 흐르는 일대와 만수대 옆으로 언덕 일대는 4, 5년 전만 해도 뚜쟁이 소굴이라 하여 소문이 자자했는데 지금도 그런지 안 그런지 알 길이 없다. 효석 보고 물었더니 자기는 이 부근에 대하여 아무 지식이 없다 한다. 서울로 이르면 현저동 이쪽, 독립문 서편에 있는 교북정(橋北町)과도 비슷한 곳일까. 어쨌든 소위 은근짜의 가장 발호하는 지대이다. 뚜쟁이 집을 찾아가서 청구하면 소원대로 데려다 준다 한다. 거개가 과수나 여공이나 친정 다니러 온 가난한 색시들인데 개중에는 현역 여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낮에 이 부근을 거닐어도 공설 수도통 부근으로 밝은 댕기의 꼬들채를 빼고 옷맵시를 가누지 못한 채 흔들거리고 꼬리를 젓는 부녀자가 눈에 띄었다. 그 방면에 눈트지 못한 소년의 눈에 이렇게 뵈었으니 그 정도를 가히 짐작할 만할 것이다. 이번에 눈깔을 세우고 골목을 걸어 보았으나 그런 빛이 나타나지 않으니 이 부근의 풍기는 숙청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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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에 효석이 사는 집 뒤 밭 가운데는 활터가 있어서 저녁 먹고 산보 가는 길에 곧잘 이 곳에 들러 활 쏘는 구경을 하였었다. 서편 언덕으로 고아원이 있고 만수대로 올라가는 길가에 인정 도서관과 기념 강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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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전만 해도 만수대에는 몇 떨기의 노송과 높이 솟은 행행(行幸) 기념비가 있을 뿐이었다. 잡초 우거진 속에 벌레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소년의 창일(漲溢)한 감상의 축적을 실컷 이 곳에다 기울여 놓으며 밤이 으슥함을 알지 못하였다. 이 곳에 오르면 평양이 두 눈 안에 들었다. 낭떨어지 아래로 궁존이 있고 그 아래로 철로와 보통강의 뚝을 넘어 보통벌이 벌어져서 아득하니 용악산에 가 닿았고, 이 넓은 벌을 허투로 끌어 놓은 허리끈 같은 물줄기가 굽이굽이 흘러서 만경대에 뻗어 있다. 북으로 달리는 기차가 굴속으로 들어갈 때 이것은 작은 도마뱀같이 귀여웠다. 언덕을 내려서면 평양고보의 후원(後園)으로 추청각(秋晴閣)에 다다른다. 안주의 백상루에 올라서 청천강을 바라보는 경개다. 이 곳에서 다시 아카시아 숲을 지나 양촌에 이른다. 양촌은 ○지다. 옛날엔 습지여서 아무 쓸모없는 땅이었다 한다. 문명한 코 큰 친구들이 바이블을 들고서 제 마음대로 측량하여 광대한 지역이 이 사람들의 부락으로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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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통벌에는 서평양역이 생기고 전매국 연초공장을 비롯하여 메리아스, 양기(洋機) 고무 등등의 대공장이 쭉 들어 앉아서, 그것이 그대로 보통강을 끼고 보통문 송객정을 지나 노동자의 중심거리도 연달아 있다. 나는 이 철뚝을 거닐기를 소년 시절에 몹시 좋아하였다. 서문 밖 경창리(景昌里)로 나가서 보통문을 끼고 서평양 있는 데까지 철로를 좇아 강변과 논 가운데를 걷는 것이다. 지금 이 곳에 와서도 그 시절을 회상한다. 지금 만수대 위에는 처량한 풍경 대신에 측후소가 생기고 소방서가 생기고 또 다시 평남 도청의 신건축이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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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바라보매 아무데서나 눈에 띄던 행행 기념비조차 눈에 들지 않는다. 어디 불이 났는가. 왁살스럽게 생긴 붉은 자동차가 요란한 소리로 귀를 쩌개면서 먼지를 휘날리고 달려 내려온다. 차는 한 대, 두 대. 풍경은 한없이 소란하다. (6월 2일)
 
 
 

5. 5. 날파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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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양개명’ 서는 석전을 심하게 한다는 말을 어렸을 때 듣고서 몹시 놀래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몇십 명씩 패가 갈려서 돌팔매질을 쳐가면서 편싸움을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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빰떼기에 멍울만 져도 진단 고소 소리가 요란한 세상에, 이건 대가리가 열 조각이 나고 목숨이 경각에 있어도 찍짹 소리도 못한다니 어린 마음에 몹시 놀래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우리 어렸을 때까지 과연 이런 짓이 평양 풍습에 남아 있었는지는 똑똑히 알 수 없어도 옛날에는 이 유희가 일종의 경기처럼 성행했던 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평양 공부를 갈량이면 돌팔매 쯤은 배워둬야 한다고 허리끈에 자갯돌을 끼워서 휭휭 내두르다 휙 빼던져서 2,3십 간 맞은 쪽에 있는 바위를 마치는 눈부시는 재주를 닦노라고 매일처럼 강가에 나가던 어린 때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벽초의 『임꺽정』을 보노라면 꺽정이 부하의 일인에 돌팔매 명수가 나온다. 이놈이 나타나서 겨누는대로 상대편의 대구리고 눈두덩이고 뒷데석기고 할 것 없이 디리 마치는 품을 보노라면 나는 늘상 어린 시절에 ‘피양개명’의 석전 이야기를 연상한다. 통쾌스럽고도 또한 용맹하기 짝이 없는 경기이고, 무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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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열네 살이 되어 잔뜩 겁을 품어 안고서 평양에 나와 보니, 요행 석전을 하거나 돌로 싸우자고 덤벼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 대신 석전의 유물인지 변형인지는 몰라도 싸움이 대단히 흔하였다. 돌로 싸우는 것은 아니다. 갈기고, 받고, 차고, 윽박지르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개인끼리가 아니고 편싸움이 되면 소위 ‘날파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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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년 전까지도 여름날 저녁에서 밤이 으슥할 무렵이면 가끔 영문 앞 넓은 길거리에서 또는 신궁 앞 광장에서 이 날파람 하는 광경을 구경할 수 있더니 아직 그 철이 아닌 때문인지 이번에 들러서 이곳 저곳 찾아 보아도 그것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친구를 잡고 여름이면 이런 것을 볼 수 있더냐고 물으니 재작년 작년에서 점점 날파람 하는 광경을 찾아 보기는 대단 힘들어졌다고 한다. 날파람은 완전히 평양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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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서 14, 5년 전 일이니 옛말처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영문 앞이라면 지금은 길이 훨씬 넓어지고 신창리 전차길에서 경창리, 신양리로 휘여도는 버스 정류장이 생기고 장별리로 통하는 넓은 새 길이 터져서 흡사히 서울 안동 네거리처럼 사통팔달의 요충지가 되었으나, 예전에는 상수리(上需里)로 올라가는 길이 있을 뿐으로 서원준의 권총 사건 발단으로 유명한 새수구 ‘다리’ 쪽에는 언덕이 져서 양의 장자(腸子) 같은 작은 길이 있었고 장별리, 명륜당으로 넘어가는 길에는 높은 언덕이 져서 겨울에는 빙판 때문에 보행이 곤란하였다. 그러므로 대부대의 이동이나 진공이 가능한 널찍한 길은 신창리에서 영문 쪽으로 휘여도는 기역자 형의 한 줄기가 있었을 뿐이었다. 여름철이면 밤마다 이 길 가운데서 날파람이 벌어졌다. 상앞파와 영문앞파의 대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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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으면 나는 하숙을 나와서 곧잘 날파람 구경을 하러 이 길 어귀로 내려왔다. 잘못하다간 날파람꾼으로 간주되어 봉변을 당하는 수도 있으므로 종군을 하는 각오로 관전을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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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상당히 먼 거리를 가운데 두고 두 파가 대진한다. 십 세 전후의 아이들의 선진을 서는데 두 편에서 다섯 여섯 뛰어나와서 서로 다리를 들고 어루댄다. 진중과 진 뒤에는 20 전후 때로는 30줄에 든 장년들도 섞여 있다. 이들은 처음 참모격으로 책전(策戰)만 한다. 지금 신식 말로는 편의대나 척후병이라 하겠지만 날파람 술어로는 ‘겟쇄기’라는 게 있어서 두세 놈이 진에서 떠나 양쪽 관전자 속에 섞이어 있다가 기(機)를 보아 ‘셋가라’‘나간다’ 소리를 지르면 적의 선진의 배후로부터 달겨들어서 전단(戰端)을 열어 놓고 기습을 단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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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과 세련된 전기(戰技)는 혼전과 백병전에 가장 찬란하다. 두 파가 서로 어울려서 차고 받고 할 때에 맹장의 활약은 번갯불 그대로다. 예서 번쩍 제서 번쩍 다리를 들고 ‘어르라’ 소리가 날 때엔 벌써 떡! 하는 소리가 일어난 때이고 이어서 ‘아이쿠’ 다음에 파김치가 되어서 거꾸러지는 판이다. 어린 놈들이 저희끼리 붙어서 돌아갈 때에 어른들의 날파람이 드디어 백열화한다. (6월 3일)
 
 
 

6. 6. 날파람(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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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적에 들은 말엔 평양 사람은 받는 게 용하고 남도 사람은 물어뜯는게 일수라 하였다. 다리 위에서 두 사람이 맞붙어 싸우는데 손들 새 없이 평양 친구가 들이받아서 남도 친구는 물 속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 눈을 부릅뜨고 ‘이놈 네까짓 놈이 어디다 대구’ 하면서 평양 친구가 으시댔더니 남도 친구는 입 속으로 무엇을 잴근잴근 씹다가 해쓱하니 웃으면서 ‘여보게 자네 얼굴에 코가 있나 좀 만져 보게’ 하고 대답했더란다. 어느새에 평양 친구의 코는 남도 사람의 입 속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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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지어낸 우스꽝 소리겠지만 하여튼 날파람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평양 사람들의 받고 차고 하는 품은 신기에 가까웁다. 받고 찬다는 것보다는 차면서 받는다는 말이 더 적당할 것이다. 발로 어르대는 줄 알았는데 어느 새에 이마는 상대방의 대구리를 받아넘기고 바른 다리는 적의 급처를 후려 찬 것이었다. 순식간에 여나문 놈을 파김치를 만들면서 표범처럼 날쌔게 돌아가는 품은 과연 상당한 기력과 민첩한 기능이 없이는 못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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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승부가 결정되면 졸파들이 선두로 서서 진공과 후퇴로 대부대의 이동이 일어난다. 패군은 골목을 따라 산산이 흩어지고 이긴 편은 한참동안 적진을 점령하였다가 의기양양하여 제 동네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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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이름난 곳은 영문 앞과 신궁 앞 광장과 보통문 어귀였던 것 같다. 신궁 앞에서는 칠성문을 사이에 두고 내외 두 편이 대진하고 보통문 안에서는 서문밖패와 창광산패 또는 문안패가 서로 어울리지 않았는가 한다. 영문 앞에서 하던 날파람은 상앞패가 밀리는 때에는 가끔 신창리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적도 있었다. 서울로 이를테면 종로 네거리다. 전차가 다니고 자동차의 내왕이 빈번하고 파출소가 서 있는 앞에서 편싸움이 벌어지니 기관(奇觀)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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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몇해를 지내니 날파람은 점점 쇠퇴하여 어른들은 섞이지 않고 아이들끼리의 놀음으로 화하여 버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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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4, 5년 전에 나는 평양 서문 거리에서 장사를 벌여 놓았던 적이 있다. 장사 관계로 서로 아는 30줄에 든 친구와 영문 앞을 지나는데 마침 날파람이 시작되어 있었다. 한참 서서 어린애들이 어루는 것을 옆에서 성원하고 섰더니 피가 끓어서 참을 수 없던지, 맥고자와 윗양복을 내게다 맡기며 ‘가만 있수, 오래간만에 날파람 한번 해 봅시다’ 한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뻔히 쳐다보았더니 벗은 것을 훅하니 내던지고 ‘에라 셋가라’ 하면서 졸망구니 아이들 틈으로 뛰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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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년년(年年)이 날파람은 쇠하여 갔다. 지금은 날파람이란 어휘는, 하나의 사어로 되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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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도 평양사람이라면 싸움을 잘한다는 것으로 아름답지 못한 소문이 난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날파람으로 수련을 쌓았으니 무리는 없으나 이즈음엔 싸움도 날파람과 함께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게나 아닐까. 처음 우리가 평양으로 공부 나왔을 때에는 거리에 나가기만 하면 두세 번 싸움 구경을 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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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시초란 지극히 맹랑한 것이 적지 않았다. 슬없잖은 이유로 두어 마디 오락가락한 끝이 싸움이다. 일부러 싸움을 거는 적도 많다. 이러고 보니 구론(口論)이나 입심 같은 건 싸움값에 들 수도 없다. 받고 차고 갈기는 품이 도저히 날파람의 도가 아니다. 그러나 그 곳에 모인 구경꾼 중에 싸움의 원인을 아느 이는 하나도 없고 또 이들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생명을 도(賭)한 격렬한 투쟁에 몸을 맡기고 있는지 그것을 알려고 안타까워 하는 이도 없었다. 마치 권투 시합이나 유도 시합을 구경하는 거와 같다. 그러므로 당사자들도 자신을 일종의 경기자로 자처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권투 시합을 구경하면서 저들이 무슨 숙원으로 저렇게 격렬한 싸움을 하고 있는가 그 원인을 천착하려는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평양 사람들도 거리나 골목에서 일어나는 싸움의 원인을 캐려 들지 않고 쟁투의 폼과 포즈가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한가에 손에 땀을 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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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무엇 때문에 무의미한 싸움에 창일한 젊은 혈기를 소비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평양의 거리나 골목이나 요정이나 극장 앞에서 이런 싸움을 구경하는 것도 옛날의 일이 되고 말았다. 날파람과 싸움은 ‘문명(文明)해 가는’‘피양개명’에서 자취를 감춘다.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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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38년 5월 28일∼6월 4일)
【원문】평양 잡기첩(雜記帖) - 뒷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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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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