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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2
최남선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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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一[일], 국사는 왜 배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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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세상에 사는 데는 경험이 매우 요긴한 일이다. 경험이라 함은 제 몸이 지내 보아서 어떠한 것은 이롭고 어떠한 것은 해로우며, 어떻게 하면 좋고 어떻게 하면 언짢더라 함을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다. 이것을 비키는 가운데 사람의 생활이 완전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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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생활에서와 한가지로 국민의 생활에 있어서도 경험이 크게 소중하다. 우리가 나라를 지켜 나오는 동안에 어떻게 마음먹고 몸 가진 것이 나라의 영광이 되고 부끄럼이 되었는지, 어떠한 일과 물건이 나라에 유조 하였고 걱정이 되었는지를 알아 가지고서, 영광되고 유조한 일을 힘써 더하며, 부끄러웠고 걱정되던 일을 결단코 다시 범하지 아니하여야 함이 국민된 이의 직분이다. 그전부터의 이러한 경험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훌륭한 국민 노릇을 하게 하고, 나라로 하여금 빛난 명예를 가지게 하려는 것이 국사 공부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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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국민이 생활하여 나가는 동안에 살림살이를 편리하게 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할 양으로 애를 써서 갖가지의 새 법과 새 학문과 새 기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갈수록 많아져 내려오니, 이러한 슬기와 솜씨를 한통틀어서 말 하려 하면 이것을 문화(文化)라고 이른다. 역사는 한편에 있어서 어느 국민 이 문화를 위하여 얼마나 애를 썼는가, 또 그 국민의 문화가 언제 어떠하였는가, 또 그 문화가 빛났을 때에는 무슨 까닭에 그러했고, 시들었을 때에는 무슨 까닭에 그러하였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글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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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모름지기 역사의 사실에서 그동안 우리의 만들어 놓은 문화가 얼마만하고 어떠한 모양이었음을 살펴 보고서, 그 잘한 것을 늘리고 잘못한 것을 고쳐, 그전보다 더 크고 더 아름다운 문화를 만들어 내어야 하겠다고 깊이깊이 결심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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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역사는 다만 옛날 묵은 일을 알자고 배우는 것 아니라, 진실로 우리가 국민으로서 어떻게 나라에 유조할 일을 하겠느냐 하는 그 길을 알려하는 공부이다.
 
 
 

2. 二[이], 동방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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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나라의 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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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땅덩어리를 지구(地球)라고 부르니, 지구는 아득한 옛날에 생 겨나서 오래오래 허다한 변화를 치르고 시방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 지구가 생긴 지 오래간만에 목숨 있는 물건이 이것저것 생겨 가다가 맨 나중에 사람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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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지구 위에 생겨난 처음에는 슬기와 재주가 다 변변치 못하였다. 다만, 사람은 모든 것에 앞서서 슬기와 빨리 자라고 재주가 얼른 늘어서 마침내 만물의 어른이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나무 열매나 주워 먹고 짐승이나 잡아 먹으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정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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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퍽 오랜 뒤에 이르러서야 먹기 좋은 열매를 씨로 하여 그것을 땅에 심어서 많은 곱장이로 거두어 먹고, 한옆으로 길들이기 좋은 짐승을 잡아다가 집에서 새끼쳐서 그것을 잡아 먹고 또 힘드는 일을 대신 시키는 법을 알았다. 이렇게 농사지음은 기름진 땅을 두고두고 다듬어 감이 편리한 고로 농사를 지어 먹음으로부터 한 땅에 붙박이로 사는 버릇이 생기고, 또 많은 사람이 한 바닥에 모여 살면서 서로 돕고 서로 힘입는 틀이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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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람이 덩어리져 사는 데를 나라라고 부르고, 나라 생긴 뒤에 문화가 우쩍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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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으로부터 五[오]천 년쯤 전에 올라가 보아도 세계 위에 농사지어 먹을줄 알고, 또 붙박이 나라를 만들어 가지고 사는 백성이 몇 군데 되지 못 하였다. 동방의 세계에서는 황하(黃河) 가장자리에 「하(夏)」라는 이름을 가진 백성의 한 떼가 있고, 그와 나란히 송화강(松花江)을 끼고서 여기 저기 퍼져 살면서 스스로 「밝사람」이라고 일컫는 백성의 한 떼가 있을 뿐이었다. 큰물이 흘러가는 곳이라야 들이 터지고 또 땅이 기름져서 농사짓고 살기에 마땅한 고로, 옛날 농사짓는 백성의 나라는 으례이 큰물 곁에 생겨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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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사람의 동편에는 숲속에서 사냥질로 먹는 백성이 있고, 서편에는 풀 바닥에서 짐승쳐서 사는 백성이 있어서, 가끔 그네들이 와서 노략질이 대단하므로 밝사람 나라의 중심은 차차 남으로 옮겨 내려갔다. 그래서 안으로 농사 하기와 밖으로 사방 드나들기 다 좋은 대동강(大同江) 가에 이르러 영구한 나라 터를 잡아 가지고 사람이 많이 몰켜 큰 나라를 이루었다. 이 나라를 조선(朝鮮)이라 이름하고, 그 도읍을 왕검성(王儉城)이라 이르고, 그 나라의 어른을 단군(檀君)이라고 여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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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라 함은 이 세상에서 처음 개명한 땅이라는 뜻이요, 단군이라 함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리시는 어른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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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께서 조선 나라를 배포하신 것은 시방부터 四二八〇[사이팔공]년쯤 전의 일이니, 단군의 정사는 농사를 지도하여 백성의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함 이 주장이요, 사람 살이와 세상 다스리기에 필요한 모든 일이 골고루 구비 하였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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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푼푼한 땅에 많지 아니한 사람이 헤어져 살므로 농사지어 먹는 백성들 끼리는 큰 싸움을 할 까닭이 없으며, 또 세상 일도 심히 간단하매, 조선 나라는 화평하고 즐거운 가운데 장구한 세월이 흘러 내려갔다. 이동안에 단군 되신 어른이 몇 분 계신 것까지도 기억할 필요가 없이 대강 一[ 일] 천 년 동안을 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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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는 하느님 섬기는 일과 백성 다스리는 일을 단군께서 보시더니, 세상 다스리는 일이 점점 어수선하여지매 단군께서는 하느님 섬기는 일만을 맡으시기로 하여 이 거룩한 처소를 구월산(九月山) 밑으로 잡아서 그리로 옮겨가시고, 왕검성에서는 백성 다스리는 일만을 보살피는데 이렇게 하는 어른을 새로 개아지라고 일컬었다. 개아지의 이름으로 세상 다스리신 동안이 또 一[일]천 년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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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과 개아지를 합하여 앞뒤 二[이]천 년 동안에 조선 나라의 문화는 크게 발달하여서,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나타내었다. 농사짓고 누에치고 길쌈하는 재주가 다 능난하고 백성의 살림살이가 넉넉하매, 서로 속이고 도둑질하는 버릇이 없고 모든 도덕이 다 높았었다. 그래서 중국사람이 와서 보고 여기 군자(점잖은 이의 뜻)의 나라가 았다고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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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옆으로 고기잡기와 소금굽기와 가죽다루기와 활 만드는 솜씨가 놀라와 서, 이것들이 여러 외국으로 나가서 장사가 되었으며, 특별히 되를 불려 그릇을 짓는 재주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앞서 발달하여서, 시방 황해도 지방에서 나는 쇠는 뭍과 물 두 길로 중국으로 나가고, 경상도 지방에서 나는 쇠는 바다 건너 왜국(倭國)으로 나가서 우리나라의 가멸함이 크게 저 네의 욕심을 자아내었다. 왜국에서는 옛날에 조선을 보배의 나라라 하기도 하고 또 금은 보화로 눈이 부신 나라라고 부르기도 하면서 온갖 방법으로 이러한 물건을 얻어 가기에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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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조선 나라의 바로 거느린 땅은 시방 평안도·황해도·경기도와 및 강원도의 태령 이쪽이며, 그 문화의 은혜를 힘입어서 사는 범위는 시방 조선반도 온통과 및 만주·몽고·중국 북부(中國北部)에 걸쳤었다.
 
 
 

3. 三[삼], 뭉치면 굳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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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낭 쫓아 내는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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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살기 좋다는 소문을 듣고서 먼데로부터 살러 오는 백성이 많고, 한옆으로 중국에 큰 난리가 나는 족족 그 피난하여 오는 백성이 물밀듯 이 리로 쫓아 들어와서, 대동강 좌우편에는 이러한 더부살이 떼가 여기저기 수북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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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아지 시절 끝판에는 중국에서 떠들어온 백성이 많아서 여러 가지 거북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나라에서 중국 사람을 부릴 줄 아는 위만( 衛滿) 이라는 이에게 중국 더부살이를 단속하여 잘못하는 일이 없게 하는 소임을 맡겼다. 그리하는 가운데 나라에서 시키는 일이 위만의 뜻에 맞지 아니하여 말썽이 되다가, 위만이 드디어 개아지 임금의 자리를 빼앗아 대신 임금이 되어 가지고 중국 백성을 단단히 짓눌러서 꼼짝 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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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안에 붙여 사는 중국 더부살이들은 그전에 조선 물건을 가지고 저희 본국에 장사를 하여 큰 이익을 보더니, 위만이 조선임금 된 뒤에 이러한 무역을 나라에서 대신 경영하여 나라의 재물이 부쩍 늘고, 또 그 힘으로써 군사를 길러서 나라의 위엄이 커졌다. 이렇게 위만으로부터 그 손자 우 거( 右渠) 의 때에 걸치는 九[구]○년 가까운 동안에 조선은 동방에서 처음 보는 굳 센 나라 노릇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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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중국에는 한(漢)이란 나라가 세상을 차지해 가지고 한참 강한 체를 하는 참이러니, 조선으로부터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을 전같이 욕심껏 가져가지 못함을 원통하게 여겨서, 수륙 두 편으로 군사를 보내어서 조선의 왕검성을 에워싸고 쳤다. 그러나, 조선이 워낙 강하여 일년도 더 싸웠건마는 왕검성을 뺄 가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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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꾀를 내어서 터무니없는 말로써 조선 임금과 벼슬아치의 마음을 이 간질하여, 벼슬아치 가운데서 임금을 배반하고 몰래 성문을 여는 이가 생기니, 이에 왕검성이 떨어지고 조선 땅의 일부분이 한(漢)나라의 손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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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에서는 새로 뺏앗은 땅에 악낭(樂浪)이라는 고을을 두고 저희 백성을 더 많이 데려다가 이 땅의 이익을 욕심껏 긁어 가기로 하였다. 처음에 악낭 고을의 범위는 꽤 넓었었지마는 조선 백성이 많이 사는 곳은 금시에 도로 조선 백성의 권력 밑에 돌아가고, 저희 백성이 많이 사는 시방 평양( 平壤) 가까운 지방만이 온전히 그네의 다스림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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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은 이때까지 평화를 사랑하는 백성으로서 사람이면 누구나 다같이 구순하게 사는 것이거니 하고 서로 네니내니 할 필요를 알지 못 하였었다. 그러다가 중국 사람의 다스리는 악낭 고을이 생긴 뒤에 농사하는 땅을 빼앗기고 고기와 소금과 쇠 같은 요긴한 물건도 전처럼 마음대로 얻어 쓰지 못 하는 고생을 하고는, 남의 나라 사람의 마음은 나와 같지 아니함과 또 내 땅 안에 남의 세력을 두고는 우리가 살 수 없음을 깊이 느꼈다. 조선 사람이 이때에 민족(民族)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 땅을 우리가 지켜 야하겠다는 결심이 온 조선 사람의 사이에 우정우정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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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쪽저쪽에 있는 조선 사람의 떼[들이 각기 한편에서 악낭 고을을 건드려 보았으되, 헤어져 약한 힘을 가지고는 강한 나라의 큰 고을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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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조선 사람끼리 서로 합하여 한 덩어리를 만들지 아니하면 아니되 겠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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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탓저탓하여 세월이 끌리기는 하였지마는, 하나하나씩 작은 겨레가 큰 나라로 모여드는 운동은 갈수록 두드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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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나라가 무너진 뒤에 그 끼친 겨레들이 악낭의 언저리에 헤어져 사는데, 악낭의 북편에 있는 겨레는 흔히 부여(夫餘)라고 부르는 작은 나라를 만들어 가져서 그 수가 여럿이요, 남편에 사는 겨레는 八[팔]○ 안팎 되는 좁쌀 알 같은 나라가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의 세 연합국을 만들어 가지고 있고, 또 악낭의 동편에 있어서는 북에 치우친 겨레는 옥저( 沃沮)라 이르고, 남에 치우친 겨레는 예(濊)라고 일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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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이 차차 단합하여서 북에서는 모든 부여와 옥저와 예가 다 압록강( 鴨綠江) 가에 생겨 있던 구려(句麗) 나라로 몰려 들어가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 커다란 구려의 뜻)라 일컫게 되고, 남에서는 마한 五四[오사] 나라가한 강가에 생겨 있는 백제(百濟) 나라로 몰려 들어가서 통일된 새 나라를 이루고, 한옆에서 진한과 변한의 수십 나라는 경주(慶州) 땅에 생겨 있던 신라( 新羅) 나라로 단합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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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백제는 새로 뭉친 힘으로써 머리빼기와 발밑에서 악낭 고을 드레질 하기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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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대로 조금씩 악낭의 가장자리를 갉아뜯기는 하되, 워낙 덜미에 본국의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바에 그것을 아주 집어치우는 일은 과연 용이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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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백제는 그대로 힘을 돋구어서 연방 떼밀고 들먹거리기를 쉬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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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값으로 시방부터 一[일]천 六[육]백 년쯤 전에 마침내 악낭 고을을 무너 뜨 리고 중국의 더부살이 떼를 몰아내어, 조선 땅을 온전하게 조선 사람의 손에 거두어 넣기에 성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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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동아이 四二[사이]○년이나 걸린 것은 조선 사람 여러 끄 덩이의 한 데로 뭉치는 걸음이 이렇게 느리고 더디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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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악낭 고을이 우리 복장에 들어와 있는 동안에 조선 사람이 민족 의무 엇 임을 알고, 또 민족과 민족의 싸움에 있어서 힘이 갈리면 약하고 뭉치면 강하여, 단합한 힘이 어떻게 큰 공을 이루어 내는 경험을 얻었다.
 
 
 

4. 四[사], 하는 이가 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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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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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백제가 두 쪽에서 악낭을 좁혀서 이것을 몰아내매, 그 자리를 누가 가져야 하랴 하는 다툼이 두 나라 사이에 생길 박에 없었다. 그래서 대동강과 한강(漢江)과의 사이에서 두 나라의 피투성이하는 싸움이 한참 계속 되었다. 이런 가운데 긴 재 너머의 신라가 시방 경상도 땅을 차츰차츰 어우르고 다시 바다 가장자리로 올라가면서 세력을 원산 근처에까지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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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처음 동명 임금(東明王[동명왕])이 세운 나라이니, 도읍을 압록강 상류의 국내성(國內城)(시방 통구(通溝))에 두었었다. 여러 사나운 이웃에 끼어 지내는 동안에, 국민의 기상이 씩씩하게 단련되고 무력을 숭상 하여서 진작부터 강한 나라의 실지를 가졌었다. 한옆으로 먼 서역(西域) 모든 나라와 가까운 중국으로부터 여러 가지 새 재주를 배워 가져서 그 문화의 정도도 퍽 높았다. 시방 평양 근처와 그전 국내성 자리에는 고구려 옛날의 무덤들이 많이 남아 있고, 그 속에는 돌로 지은 기묘한 방과 채색으로 그린 찬란한 그림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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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온조 임금(溫祚王[온조왕])의 세운 나라로서, 도읍을 한강 남쪽의 시방 광주(廣州)에 두고서 처음에는 고구려로 더불어 나라 힘을 겨룰 만 하였으며, 신라는 불그뉘(弗矩內[불구내])(혹 赫居世[혁거세]) 임금이 시방 경주에 세운 나라로서, 그 발달이 세 나라 가운데 가장 뒤졌지마는 그 백성들은 만만치 아니한 기개(氣槩)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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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五五[일오오]○년쯤 전 고구려에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는 임금이 나와서 사방을 정복하여 나라 땅을 크게 넓히고, 그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뒤를 받아서 반도 안에서 시방 충청도·강원도의 지방까지를 그 나라 안에 거두어 넣고, 도읍을 국내성으로부터 평양으로 옮아 왔다. 백제는 고구려 힘을 견디지 못하여 도읍을 광주로부터 공주(公州)로 옮겨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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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신라는 나라 힘이 은근히 자라 가되 바다 건너 왜(倭)나라의 걱정 이 덜미에 있으므로 마음 놓고 활동하지를 못하더니, 一[일]천四[사]백 년쯤 전에 진흥왕(眞興王)이 나매 큰 경륜을 세우고 인재를 기르고 국력을 충실하게 하여서, 먼저 왜국을 물리치고 이어 재를 넘어 나와서 한강 바닥의 다툼에 한몫을 보았다. 이로부터 반도 안은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의 패권을 다투는 마당이 되어서 형세가 크게 어수선하여졌다. 그리고 저번에 고구려에게 쫓겨서 공주로 옮아 왔던 백제의 도읍은 다시 신라에게 덜미를 짚여서 금강(錦江)의 하류인 부여(扶餘)로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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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나라의 가운데 가장 일찍부터 서둘러 나온 고구려가 가장 큰 힘을 가져서, 바야흐로 고구려가 굳셀 무렵에는 천하에 그 대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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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수(隋)라는 강한 나라가 일어나서 양제(煬帝)라는 이가 수륙군 백만을 데리고 와서 쳤으나,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乙支文德)이 그 군사를 청천강( 淸川江)까지 끌어 들여다가 단번에 그것을 무찔러 버리니, 수나라가 이 빌미로써 마침내, 나라를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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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당(唐)나라의 태종(太宗)이라는 이가 수나라의 원수를 갚는다 하고수 륙군 삼십만을 데리고 동으로 쳐들어 왔었으나, 안시(安市)라는 작은 성을 에운지 여러 달에 마침내 이를 빼지 못하고, 데리고 온 군사를 다 없애고 돌아가서 그 끝에 자기 몸까지 죽어버린 일도 있었다. 고구려의 이렇게 강성함을 보고서 신라에서는 상하 일심으로 혀를 빼 어물고 나라 힘을 기르기에 더욱 눈이 벌갰었다. 또 신라에는 옛날부터 「 부루 」( 하느님을 따로 부르는 이름)의 가르침을 받들어 나라 위하는 정신을 길러 나오는 화랑(花郞)의 무리가 있더니, 더욱 이 기관을 늘리고 훈련을 장하게하여, 나라 일에 목숨을 바치기를 영광으로 아는 기풍이 온 나라 백성에게 철저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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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편의 백제는 꼭뒤에서는 고구려에게 졸리고 덜미에서는 신라에게 부대껴서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신라의 눌림을 면하려 하는 일본( 日本) 이 백 제로 더불어 좋게 지내려 하매 백제가 그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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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외국의 세력이 들어옴을 보고 다른 두 나라에서는 새 정신을 차렸다. 이때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권세를 잡고, 신라에서는 김유신( 金庾信) 이 나라를 맡아 가지고서, 서로 국민의 결속을 단단하게 하여서 반도의 임자를 겨루는 마지막 싸움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54
이러는 가운데 고구려의 지도자 개소문이 죽고 그 아들들의 띠앗이 사나와 서 고구려의 국내 사정이 뒤숭숭하여졌다. 신라는 이 기회를 타야 하겠는데 백제와 왜국이 결합하고 있어서는 앞뒤가 다 켕겨서 손발을 마음대로 놀릴수 없었다. 이에 신라에서는 큰일은 해야 하고 힘은 모자라매, 반도 통일의 운동에 한때 당(唐)의 구원 얻기를 바라고, 당에서는 고구려의 원수를 갚는 의미에서 즐겨 신라를 돕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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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일]천 三[삼]백 년쯤 전에 신라와 당, 백제와 일본 네 나라 군사의 어우러진 싸움이 백마강(白馬江) 위에서 대판으로 벌어져서, 그 결과로 일본군 사가 죄다 죽고 백제 도성이 떨어지니 백제가 이에 망하였다(나라 세운지 六七八[육칠팔]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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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신라는 말머리를 고구려로 돌려대어서 집적집적하다가, 고구려의 집안 싸움이 한고작 심하였을 대목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평양성을 에 워 쌌다. 아무리 내부에서 티격태격하는 판이로되 고구려는 오히려 두 나라의 큰 군사를 대수로 하여 삼 년을 버티어 나가더니, 나중에 신라의 꾀에 빠져안으로부터 성문을 여는 이가 나오니, 이제는 할 수 없이 고구려도 거꾸러지고 말았다(나라 세운 지 七[칠]○五[오]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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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빈 것은 영원한 목적을 위하여 한때 권도를 쓴 것 이러니, 당나라 군사는 한 번 나라 안에 들어온 바에 남의 일만 해주고 그대로 가려 하지 아니하여, 백제와 고구려의 옛땅에 저희 정치 기관( 政治機關)을 두고 다만 허울만이라도 당나라의 것을 만들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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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뜻하지 아니한 일을 당하고 불끈 일어나서 당나라의 세력을 쫓아내기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대동강까지는 신라의 땅을 만들기에 성공하였지마는, 거기서부터는 여러 가지 거북한 사단이 있어서 이내 나라 밖으로 버려 둘 밖에 없었다.
 
59
고구려 사람은 한때 집안끼리의 불화를 말미암아 도성을 빼앗기고 나라가 흔들리 기는 하였지마는, 북편에 있는 나라 땅은 그대로 남아 있고 백 성의 의기( 意氣) 도 꺾이지 아니하였음으로써, 그네들의 나라 찾으려는 운동이 퍽 활발하였다.
 
60
그러다가 一二五[일이오]○년쯤 전에 대조영(大祚榮)이란 그전 장수가 일어서서, 신라에 들어가지 아니한 모든 땅을 수합하고 또 시방 만주 저쪽에 사는 말갈(靺鞨) 백성까지를 집어넣어서 새로 발해(渤海)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시방 간도(間島) 북쪽의 동경성(東京城)에 두고, 고구려 그전만 못 하지 아니한 강성한 나라 노릇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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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조선 사람의 피를 가장 순수하게 지켜 오고, 이러한 겨레의 가장 많이 몰려 사는 데가 반도의 안이요 그 가운데서로 신라이었으매, 신라가 조선 반도를 통일함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62
그런데, 신라의 반도 통일이란 것은 대동강 이남에 그치고 그 바깥 고구려의 옛 땅이 많이 그대로 있으니, 조선 민족의 옳은 통일을 완성해야 할 신라의 책임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63
그런데 신라는 통일의 첫 계단을 올라선 뒤에 재물이 늘고 권력이 세어졌 음에 취하여 교만한 버릇이 상하에 차고, 또 당나라를 한집안같이 드나드는 동안에 당나라를 높게 보고 그것을 본뜨기에 마음이 팔려서 제 나라 본색을 지키는 정신이 약해지고, 또 나라 안의 쓸 만한 사람들이 글 배우는 길로 쏠리고 전같이 충용하게 나라 일을 짊어지고 나가려 하는 기개가 차차 적어졌다.
 
64
이리하는 동안에 민족의 통일을 더 내키려 하는 생각은 부지중 사라져 없어지고, 나라 온통이 부허하고 나약한 풍기 가운데 둥둥 떠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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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 뒤 이백여 년 동안의 신라는 훨쩍 다 핀 꽃이 차차 시들어 가는 모양과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문화가 찬란하고 생활이 풍성하였지마는, 그 국민 정신의 밑에는 좀이 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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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안에도 장보고(張保皐)와 같은 이는 시방 전라도 서남쪽 바다 목에 청해진( 淸海鎭)이라는 근거지를 만들고 큰 배를 많이 장만해 두고, 중국과 일본과 남쪽 먼 나라로 휘돌아 다니면서 해상 무역을 널리 경영하여 나라의 재물을 많이 불렸으며, 이밖에 개인으로 훌륭한 공명을 한 이가 더러 있었지마는, 전체로 옳은 정신을 잃고 바른 길을 비켜 나가는 신라의 앞에는 찐덥지 아니한 끝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5. 五[오], 고구려를 회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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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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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나머지 통일의 소임을 잊어버리고 한갓 편안함을 탐하는 동안에 나라 힘이 줄고 백성의 살림살이가 어려워졌는데, 진성(眞聖)이라는 여왕의 때에는 흉년이 거푸 들어서 백성이 굶주림에 울게 되었다. 이에 반역 운동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그 끝에 견훤(甄萱)은 전주(全州)를 웅거하여 후백제( 後百濟)라 일컫고, 궁예(弓裔)는 철원(鐵圓)을 웅거하여 태봉( 泰封) 이 라일 컬었 다. 그래서 옛날 같은 세 나라 한판이 다시 벌어졌다.
 
70
궁예는 북방에서 일어난만큼 나라 땅을 북으로 늘리지 아니하면 앞으로 우리나라의 기운과 백성의 살림을 시원하게 피어 볼 수 없음을 생각하여 자못이 방면에 힘을 쓰고, 잠시 동안에 나라 지경을 대동강으로부터 청천강에까지 내켜 놓았다. 그러나 얼마 뒤에 교만한 버릇이 생기고 또 진취( 進取) 하는 기운도 차차 움츠러들었다. 이에 그 부하로서 인망이 대단한 왕건( 王建) 이 민심 돌아가는 것을 살피고 일어나 궁예를 집어치우고 임금의 자리에 앉 았 다.
 
71
왕건은 조선 사람의 큰 소임이 북방으로 발전함에 있음을 깊이 알고, 그렇게 함에는 국민에게 분명한 목표를 주어야 할 것을 생각하여, 「 고구려의 옛날을 회복하자!」 하는 정신을 뿌리박기에 힘썻다. 이에 나라 이름을 고려( 高麗)라 하여 고구려의 뒤를 이어 일어났음을 밝히고, 또 도읍을 철원으로부터 송악(松岳)(시방 개성)으로 내어 와서 북방으로 나가기에 편리하게하고, 일변 평양을 크게 설비하여 개성 다음의 도읍을 만들고 언제든지 북방으로 기운 쓸 차림차림을 갖추었다.
 
72
한편으로 반도 내부의 통일을 바삐하여 먼저 외교 수단( 外交手段)으로써 신라를 어우르고, 이어 무력(武力)으로써 후백제를 멸망시켜, 시방부터 一[ 일] 천 년쯤 전에 둘 째번 삼국을 다시 통일하였다(신라가 나라 세운 지 九九二[ 구구이] 년 만의 일이다).
 
73
고려의 삼국 통일에 앞서기 一[일]○년에 발해 나라가 새로 북방에 일어난계단( 契丹) 나라에 멸망당하고, 그 왕공 대신(王公大臣)과 끼친 백성의 대부가 고려로 돌아왔다(발해는 나라 세운 지 二八二[이팔이]년 만의 일이다). 그러나 고려 태조 왕건은 미처 북방에 대한 큰 경륜을 이루지 못 하고이 소임을 자손에게 부탁하고서 세상을 떠났다.
 
74
이때 고려의 북경 밖에는 시방 평안도·함경도로부터 만주에 걸쳐서 우리가 「되」라고 부르는 여진(女眞) 사람이 헤어져 살면서, 한편으로는 고려에 복종하고 한편으로는 북쪽 계단 나라에 매어 지냈었다. 계단은 만주 서 북부에서 일어나서 중국에서 당나라가 쇠약하고 송(宋)나라가 대신하려 하는 어름에 크게 세력을 늘구고, 마침내 발해 나라를 집어먹어서 드디어 북방의 강국이 되어 요(遼)라고 일컬었다.
 
75
고려가 북방으로 발전하려 할 참에 맨 처음 앞을 가로막은 것이 이 요나라 이었다. 고려와 요의 사이에는 연방 충돌이 일어나서, 작으면 一[ 일] ○ 만, 많으면 八[팔]○만의 대군이 우리의 북방을 소란하게 군 일이 있으며, 어떤 때는 고구려의 옛 땅을 네가 내놓아라 내가 가지겠다 하고 욱신각신 말썽이 되 기도 하였다. 우리 서희(徐熙)·양규(楊規)·강감찬(姜邯贊)과 같은 명장이 용맹의 이름을 얻은 것이 이동안의 일이었다.
 
76
마지막 고려는 정치적으로는 고개를 숙였지마는 그 대신 요로부터 청천강 이북에서 흥주( 興州)· 통주( 通州)· 용주( 龍州)· 구주( 龜州)· 철주( 鐵州)· 곽주( 郭州) 의 여섯 성을 얻어서 북방으로 늘려 가졌다.
 
77
계단의 세력이 찌부러져 가매 여진이 대신 일어났다, 시방 만주에 금( 金) 나라를 세우고 천하에 호령을 하였다. 처음 여진의 일부는 시방 함흥 근처 를 경계로 하여 함경도 지방에 들어와 사니, 고려가 서북쪽에서 땅을 웬만큼 늘린 뒤에는 동북쪽인 여진 방면에서도 세력을 내뻗으려하여 고려와 여진의 사이에 가끔 충돌이 있고, 고려 예종(睿宗) 임금 때에 윤관( 尹瓘)이라는 장수는 여진 겨레를 함흥(咸興) 저쪽으로 멀리 쫓고서 성 아홉을 새 로만든 일도 있었다.
 
78
이리하는 동안에 만주 방면에 있는 여진 사람이 금(金)나라를 세워 고려와 금이 지경을 대게 되었는데, 금나라의 시조(始祖)는 본디 고려로부터 간 사람이라 하여, 그네들의 고려에 대한 감정은 그다지 언짢지 아니하였다.
 
79
여하간 이렇게 강대한 나라가 여전히 앞을 막고 있으매 고려의 북방 발전은 진실로 극난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앞서서는 요와 금이 상지하는 틈에 고려는 요로부터 내원(來遠)·포주(抱州) 두 성을 빼앗아 의주(義州)를 만들어서 북편 지경의 한끝을 압록강 가장자리에까지 내키고, 금나라 시절에도 기회 있는 대로 이 방면을 갉아 뜯어서 야금야금 언저리를 늘려 갔다.
 
80
고려 나라 선 지 三[삼]백 년쯤 된 때에 금나라는 찌부러지고 대륙 서쪽에서 몽고(蒙古)가 일어나매, 그 말굽이 가고 깃발이 가리키는 곳에 넘어지지 않는 나라와 굽히지 않은 백성이 없고, 오래지 않은 동안에 아시아와 유렵의 두 대륙에 걸치는 큰 나라를 만드니, 그 누르는 힘이 저절로 고려로 도미 쳐 와서 고려 고종(高宗) 임금 때에 그의 대군이 여섯 번 이리로 침노 하여 들어왔다.
 
81
이보다 앞서 고려에는 최(崔)씨가 정치의 실권을 잡고 국민을 지도하여 외국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취해 오더니, 몽고의 걱정이 시작되매 최씨가 임금을 데리고 강화로 들어가서 전후 합해 四[사]○년 동안 몽고의 압박을 대항하니, 이렇게 줄기찬 대항은 몽고가 군사 일으킨 뒤에 처음 당한 일 이었다. 이동안 몽고는 중국을 빼앗아서 나라 이름을 원(元)이라고 일컬었다.
 
82
고려와 원은 서로 겨루다 못하여 고려 임금이 원나라의 사위 노릇을 하여 한집안으로 지내기로 하고 싸움을 끝막아 버렸다.
 
83
고려가 원나라에 붙여 지내는 동안에는 옥신각신 여러 가지 사단이 많았었지마는, 한 백 년 지내고 원나라가 찌부러져서 대륙 서북으로 물러나갈 때에는 고려의 지경이 압록강 중류에까지 뻗어 나가고, 최영(崔瑩)이라는 명장은 대군을 움직여 요동(遼東)을 집어 들이려 하다가 부하의 이성계( 李成桂) 일파가 딴마음을 먹고 반기(反旗)를 들어서 뜻대로 되지 않고 말았다.
 
84
고려는 왕태조 이후 四七五[사칠오]년 만에 이성계 무리의 암수에 걸려서 나라를 내어 놓았다. 그러나 이동안에 다른 데서 같으면 나라가 몇 번 없어졌을 만한 큰 나라들의 무서운 압력을 박차 가면서 나라 땅을 압록강 방면 에까지 내켜서, 어느 정도 만큼 조선 사람의 북방으로 발전하는 소임의 일부를 능히 감당하였다.
 
 
 

6. 六[육], 있는 솜씨는 드러난다

86
고려의 문학
 
87
조선 사람은 남이 못하는 의사를 내고 남보다 뛰어나는 재주를 부리는 능력이 있어서 벌써부터 그 소문이 천하에 들렸으며, 또 그 실물이 시방 전해 내려오는 것도 적지 아니하다.
 
88
신라 서울 경주에 돌을 다듬어 지은 첨성대(瞻星臺) 받침이 남아 있으니, 옛날에는 그 위에 높은 집을 짓고 거기서 천문(天文)을 보던 자리로서, 이는 실로 시방 동양에 남아 있는 천문대의 가장 오랜 것이다. 또 경주는 실로 시방 동양에 남아 있는 천문대의 가장 오랜 것이다. 또 경주 동편에 토함산이 있고 산꼭대기에 돌로 굴을 짓고 그 속에 돌로 새긴 부처님의 형상을 그득하게 모시니, 이러한 석굴(石窟)로서 형체가 더 유착한 것은 타국에도 있으되, 새김질 솜씨의 교묘하기로 여기를 따를 것은 아무데도 없다고 이른다.
 
89
조선에는 옛적부터 질그릇 만드는 솜씨가 있어, 신라 시절에 만든 단단하고 보기 좋은 질그릇이 시방도 많이 남아 있거니와, 이 재주는 고려 시절로 내려와서 우리가 연구도 하고 남의 법을 배워 오기도 하여, 드디어 맵시 있고 물빛 곱고 굽기 잘하고 보기에 재미있기로 세계 각국에 뛰어나는 절등 한 질그릇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유명한 고려 자기( 高麗磁器)라는 것이다. 세계상에서 질그릇 잘 굽기로 유명한 중국 사람도 그전부터 고려자기는 천하의 일품이라고 찬탄하여 오는 터이다.
 
90
옛날에는 책을 한 장 한 장 손으로 써 가지고 볼 뿐이러니, 중국의 당나라 이후에 글자를 나무에 새겨 두고 거기 먹칠하여 여러 벌을 박아내서 쓰는 인쇄의 법이 나고, 송나라 때에 내려와서는 그 법이 크게 발달하여서 불교의 말씀을 기록한 <대장경(大藏經)> 五[오]천여 권도 처음 판에 새겨 두루 돌려 보게 되었다.
 
91
고려에서도 처음에는 송나라에서 판각한 <대장경>을 얻어다가 보더니, 얼마 뒤에는 이만 것을 남에게 비럭질하겠느냐 하고, 시방부터 九三[ 구삼] ○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그 판각을 시작하여 六[육]○여 년 공을 들여 마침내 六[ 육] 천 권 가까운 부질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이것만 해도 송나라의 四 [ 사] 천 七[칠]백여 권을 더 새겨 一[일]만 권이 넘는 전무 후무한 <대장경> 을 만들어 내었다.
 
92
이 대장경판이 고종 임금 때 몽고 병란 통에 불에 타 버리매, 고려의 군신 상하( 君臣上下) 가 한가지 원력(願力)을 내어 이것을 복구하기로 하고, 강화로 피난하여 들어가 있는 동안에 十六[십육]년의 적공으로써 드디어 六[ 육] 천 五[오]백여 권, 十六[십육]만 三[삼]천 쪽이 더되는 거창한 판각을 완성 하여 놓았다. 그런데 이 판각은 내용이 가장 정확하여서 시방 세계에 있는< 대장경> 판각 가운데 가장 오래고 많고 옳은 거으로 치는 것이니, 이제껏 경상남도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 고스란히 간수해서 있다.
 
93
고려 사람은 거창하기 짝이 없는 책판을 만들어 놓았을 뿐 아니라, 또한 옆으로는 책 박는 재주에 놀라운 새 의사를 내었다. 그전에는 책판이라 하면 반드시 커단 널판지에 책 한 장 한 장씩을 따로따록 새겨서 비록 여러 백천만 장 되는 큰 부질이라도 낱낱이 그렇게 하여 두고, 한 권을 박든지 여러 권을 박든지 그것을 죄다 추슬러야 하므로 책 하나를 만들거나 박기에 비용도 많고 수고도 크던 것이러니, 고려 사람은 이를 괴롭게 생각하여 책판을 한 장씩 새기는 대신 책에 쓰이는 글씨를 한 개 한 개 따로 새겨 가지고 무슨 책을 박으려 할 적에는 그 책장에 쓰인대로 새겨 둔 낱글씨를 골라 모아서 책장을 꾸미고 그것을 책판으로 하여 먹칠하여 박았으며, 다 박은 뒤에는 그것을 하나하나 도로 헤쳐 두었다가 다른 것 박을 때에 또 그렇게 하는 방법을 만들었다.
 
94
곧 보통 쓰이는 글씨를 얼마만큼 만들어 두면 무궁 무진한 책을 마음대로 박아 쓰는 편리한 법이었다. 이것을 활자(活字)라 이르니 곧 장마다 죽은듯 하게 누워 있는 책판이 아니라, 낱낱이 목숨이 있는 듯하게 두루두루 씌어지는 글씨라 하는 뜻이다.
 
95
활자만 하여도 장한 발명이라 하겠는데, 고려 사람은 흙이나 나무에 새기던 활자의 부서지기 쉬움을 불편하게 여겨서, 다시 의사를 내어 쇠붙이로 활자를 부어 만들어 쓰는 법을 마련하고 이것을 주자(鑄字)라고 이름 하였다. 주자라 함은 쇠로 부어 낸 활자란 뜻이다.
 
96
고려 사람이 처음 활자를 만들어 내기를 어느 때에 하였는지는 상고 하여 알 길이 없거니와, 고종 임금이 강화에 들어가 있을 시절에 주자로써 책을 박아 낸 증거가 있으니, 주자가 이미 七[칠]백 년 이전의 발명임이 확실하며, 서양에 비하여 수백 년 앞을 선 것이다.
 
97
활자와 주자의 재주는 이 뒤 갈수록 발달하여 고려를 대신한 이씨조선의 초년에는 구리로써 맵씨있는 활자를 만들어내어 책 박는 솜씨가 더욱 아름 다 와지고, 이 뒤에도 연구와 개량을 거듭하여 조선의 활자는 정묘하기 짝이 없게 되고, 드디어 큰 은덕을 여러 나라에 주기에 이르렀다.
 
 
 

7. 七[칠], 다듬는 조선의 얼굴

99
세종 대왕의 사업
 
100
고려 말년에 나라의 방향이 두 패로 나뉘어져서 최영(崔瑩)의 패는 대륙이 어지러워진 이때 우리가 나아가 천하를 다투어 보자 하는데, 이성계( 李成桂) 의 패는 작은 살림이라도 곱게 지켜 가자고 이를 반대하였다. 그래서 이성계가 최영을 죽이고 고려를 엎지르고 새 나라를 세워 옛날 조선이라는 이름을 끄집어 내어 쓰고, 서울을 뒤로 물려서 한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대륙에서 원을 대신하여 일어난 명(明)나라에 대하여 사이좋게 지내기를 힘썼다.
 
101
고려의 한 세상은 대륙에서 여러 강대한 민족이 겨끔내기로 들싸는 참에 당하고, 고려도 이 틈에 북방으로 내켜 보기를 생각하여 차근차근 나라 안의 일을 다스릴 겨를을 얻지 못하였다. 이씨조선은 대륙의 정세가 안돈 된 이즈음에 바깥에 대한 생각을 끊고 집안 살림살이나 깨끔하게 하려는 것으로써 나라의 방침을 삼았다.
 
102
그래서 태조(太祖) 이성계가 나라 세운 뒤 한 백 년 동안에 정치와 문화 모든 방면에 걸쳐서 큰 정리(整理)와 건설(建設)이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이동안에 태조 이하로 임금이 무릇 아홉 대를 갈렸지마는, 네째대 임금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시절이 건설 사업의 대마루턱이었다.
 
103
세종께서는 총명이 뛰어나시는데 또 부지런이 대단하시고 학문과 연구에 정성이 깊으시며, 또 당신 혼자의 잘난 것만 믿으시지 않고, 공부와 재주 있고 훌륭한 인물을 많이 뽑아서, 그네들로 하여금 각기 한 방면씩의 연구와 발명을 담당하게 하사, 그리한 결과를 거두어 모아서 나라와 백성에게 유조 할 사업을 장만해 내기에 갸륵한 능력을 가지셨다.
 
104
세종께서는 나라의 근본인 농사의 개략에 가장 힘을 쓰셔서, 학문 있는 신하로 더불어 흙의 성질, 때의 조만(早晩), 씨와 거름의 선택, 또 남북 각 지방 농사 잘하는 이의 경험을 죄다 모아서 조선에 적당한 농사하는 법을 책으로 하여서 백성에게 가르치셨다. 또 외국으로부터 새 곡식과 좋은 씨를 힘써 얻어 들여다가 여기저기 실험하여서 그것이 합당한 곳에 이것을 장려 하셨다.
 
105
농사함에는 철을 바로 알아야 하고, 그리하자면 천문의 도수를 차착 없이 살펴 알아야 하는 것이매, 총명한 신하로 더불어 수학의 연구에 힘쓰시고, 또 중국과 아라비아의 모든 법을 합하여 여러 가지 천문 보살피는 정묘 한 기계를 만들어서 실지에 쓰셨다.
 
106
그 여러 가지 가운데 자격루(自擊漏)란 것은 해와 달의 드나듦과 시간의 지나감과 춘하 추동의 바뀌어 감을 자동적으로 한꺼번에 나타내게 하여, 그 신 기함이 사람의 의사 밖에 뛰어났었다. 또 각 지방의 비온 분량을 똑똑히아실 양으로 똑같은 모양의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어서 팔도 관찰사 있는 곳에 나누어 주고, 비오는 대로 거기 괸 빗물의 옅고 깊은 분수를 빨리 나라에 보고해 오게 하였다. 이렇게 일정한 그릇으로써 비온 분수를 계량 하는 법은 세계상에서 이것이 처음이었다.
 
107
세종께서는 국민의 보건(保健)에 크게 정성을 기울이셨다. 그전에는 의술( 醫術) 과 약재(藥材)는 많이 중국을 힘입음으로써 창졸한 필요에 대한 수용이 마음대로 되지 못하는 한탄이 있어서, 벌써부터 조선에서 나는 약으로 조선 사람의 병을 고치게 하려는 연구를 나라에서 힘써 내려 오더니, 세종 때에는 더욱 이 방면에 힘을 들이고 중국으로 다니면서 약재를 비교 연구 하여 행여나 실수가 있을까 조심하고, 일변 우리나라의 옛 법과 중국 고래의 모든 방서를 말끔 모아서 <의방유취(醫方類聚)>라는 책 二六六[이육육] 권을 편찬하여, 이 책 하나를 가지면 이때까지의 의약 지식을 마음대로 이용 할 수 있게 하니, 이렇게 완전하고 거대한 의학 책은 그때 세계 어디고 생겨난 일이 없었다.
 
108
나라를 다스림에는 각 지방의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한다 하사, 특별히 만드신 관측 기계를 주어 학자를 백두산 이하 여러 표준되는 곳에 보내서 국토의 위치를 측정하게 하시고, 또 그 결과를 모아 정확한 지도를 만들게 하시고, 또 각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 곳의 산천·물산 이하 모든 사정을 낱낱이 조사 보고하게 하여, 그것으로써 구비한 <지리지(地理志)>를 편찬 하시니, 이는 실로 조선 그전에 없던 바이다.
 
109
세종 대왕의 건설하신 문화 사업 가운데 가장 고마운 것은 조선의 독립 한 글씨를 만드신 것이다. 대저 조선에서는 일찍부터 중국의 한문을 빌어다 가우리 글로 대용하여 나왔기 때문에, 우리 글씨를 따로 만들려는 생각이 매우 느지러졌었다. 그러나 세종께서는 나라마다 말과 소리가 다르니 남의 글씨를 빌어 씀이 될 말이냐 하시고, 신숙주 이하 여러 학자들을 데리시고 오랜 연구를 쌓으신 뒤에 탁월한 방법과 정밀한 조직으로써 조선의 독특한 글씨를 만들어 내시고,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이름하셔서 시방부터 五[ 오] 백년쯤 전에 이것을 천하에 반포하셨다.
 
110
세계 각국에 글씨도 허다하지마는, 이치가 분명하고 쓰기에 편리하기로 조선의 정음에 지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정음을 반포하심과 함께 이 글씨를 응용하여 여러 가지 문학 책을 만드시고 또 외국 책을 조선 글로 번역도 하시니, 조선의 국문학이 이로부터 와짝 발달하였다.
 
111
세종의 사업은 정치와 문화에서 뿐 아니라 다른 방면에서도 빛나는 건설을 많이 하셨다. 고려 시절에 국토를 개척한 것이 서북인 압록강 쪽에 그쳤더니, 조선에 들어와서는 동북인 함경도 저쪽으로 방향을 돌려 잡아서, 세종대왕 때에는 여진 겨레를 부쩍부쩍 북으로 내어밀고, 마침내 배두산과 두만강의 이쪽이 완전히 우리 땅으로 들어오니, 조선의 지도가 시방처럼 압록· 두만 두 강으로써 국경을 삼게 된 것이 대강 세종 때에 작정된 것이다.
 
112
조선에는 예로부터 뒤에는 되(野人[야인])의 걱정이 있고, 앞에는 왜인( 倭人) 의 근심이 있어, 조선 안이 조금만 허소하여지면 이것들이 고대 팔뚝을 치켜 걷고 들이덤볐었다. 더군다나 고려 말년으로부터는 일본 안에서 다수 한무 사들이 직업을 잃고 바다로 나와서 도둑질로 생화를 삼는데, 그것들이 많이 대마도를 중화참으로 하여 고려의 해변 지방을 침노하여 쌀 실어 나르는 배를 엄습하고, 뭍으로 올라와서는 촌락의 곡식과 성읍의 재물을 겁탈해 가서 나라의 큰 걱정이 되었었다.
 
113
세종께서는 여러 번 군사를 보내서 북방의 되와 남방의 대마도를 쳐서 도독의 소굴을 무찌르기도 하였지마는, 남방 해상의 이른바 왜구란것은 먹고살 수가 없어서 그리하는 것인즉, 다만 채찍으로 후려갈기기만 하여서 될것 아니요 반드시 먹을 길을 터 주어야 주저앉힐 것이라 하사, 경상도 해변에서 울산의 염포(鹽浦), 동래의 부산포(富山浦)(곧 釜山[부산]), 웅천의 냉이 포( 薺浦[ 제 포]) 세 군데를 왜인들의 와서 고기잡이하고 장사질하는 자리로 터 주었다. 과연 이렇게 한 뒤에 왜구의 걱정이 비로소 줄고 그 사나운 뱃머리는 명나라 쪽으로 돌려 가 버렸다.
 
114
세종 대왕 일대의 갸륵하신 여러 가지 공적은 이루 다 섬길 수 없거니와, 그 어른이 세상 떠나신 뒤에 아드님 세조(世祖) 대왕이 또한 특출하신 자격으로써 그 뒤를 받아서 모든 건설의 기초를 더 튼튼하게 만드니, 조선의 모든 것이 이 두 임금의 때에 비로소 자리를 잡고 또 빛이 나기 시작하였다.
 
 
 

8. 八[팔], 배우는 것이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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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포와 무명의 거북선
 
117
고려가 원나라와 화친하여 지낸 이래로 사람이 오랫동안 태평에 젖고 무비( 武備) 가 극히 허소하여졌다가, 갑자기 왜구가 성하고 그 형세가 사나우매, 고려의 해변 모든 고을이 골고루 그 독을 받고, 오직 최영과 이성계의 군사만이 능히 닥치는 대로 왜구를 무찔러서 위엄이 대단하였으되, 파리떼 같이 쫓으면 가고 버려두면 도로 모여드는 왜구를 이루 쫓아다니는 수도 없어, 한참 동안 나라의 한쪽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118
이리하는 가운데 최무선(崔茂宣)이라는 이는 왜구를 반드시 초멸( 勦滅) 하려면 뭍에 오른 뒤에 접전할 것이 아니라 바다 위에서 미리 그 떼를 무 찔러야 할 것이요, 그리하자면 수군(水軍)을 두고 전함(戰艦)을 짓고 또 대적에게 없는 화약(火藥)을 써야 하리라는 생각을 하였다.
 
119
그래서 물위에서 빨리 달리고 든든하게 견디는 배를 만들어 내는 한편으로, 중국에서 오는 배를 쫓아다니면서 화약 만들 줄 아는 사람을 널리 찾아서 오래간만에 겨우 한 사람을 만나 대강 그 법을 배우고, 정부에 이 법 쓰기를 건의하였다. 처음에 정부의 대관들이 이 말을 곧이 듣지 않고 도리 어비 웃기나 하더니, 무선이 조르기를 마지아니하니 여러 대관들이 그 정성에 감동하여, 드디어 화약을 연구하고 또 제조하는 기관을 베풀어서 무선으로 하여금 이를 담당하게 하였다.
 
120
이에 무선이 고심 노력하여 여러가지 소용에 맞는 화포(火砲) 수십 가지를 만들어 내고, 이것을 전함에서 쓰도록 절차를 마련하였더니, 시방부터 五六[ 오육] ○ 년쯤 전에 왜구의 배 五[오]백여 척이 떼를 지어 충청도 해변으로 달겨 들거늘, 무선이 준비하였던 전함을 거느리고 나가서 화포를 놓으니, 왜구의 배들이 죄다 불에 타고 도둑의 떼가 뭍으로 기어오르는 것을 그대로 도륙하여 전에 없는 대승을 거두었다. 무선이 화포와 전함을 만들어 놓은 뒤에 왜구의 형세가 갑자기 쇠약하여졌다.
 
121
무선의 법은 이씨조선으로 넘어와서 더욱 발달되고, 또 전함에 대하여도 각국의 모든 배를 비교 연구하여 가장 쓸모 있는 새 본새를 만들어 내 어서 조선의 수군은 동바의 해상에서 대적이 없었다.
 
122
세종 대왕 때에 왜구를 은혜로써 달래기 위하여 삼포(三浦)를 개방하여 왜인의 왕래를 허락하니, 왜인과 및 유구(流球) 사람들이 저희 나라 소산과 아울러 먼 남양 여러 나라의 물건을 가지고 와서 여기서 장사를 하는데, 그때 우리가 그네에게 주는 물건 값은 무명으로써 치렀다.
 
123
그런데, 이 무명이 조선에서 나게 되기는 과히 오래지 아니한 때의 일 이었다. 곧 최무선이 한참 화약을 만드느라고 애쓰는 한옆에서, 경상도 강성( 江城)( 뒤의 丹城[단성]) 사람 문익점(文益漸)이라는 이는 원나라에 갔다 오는 중로에서 목화 씨를 얻어 가지고 와서 그것을 고향에 심어 놓고 공을 들여서 열매는 맺혔으나 그것을 타고 뽑고 낳이할 줄 몰라서 애를 쓰다가, 강남의 장사배에 실려 온 인도의 중을 만나서 그에게 씨앗 틀과 물레와 무명 낳이하는 방법을 배워서 이것이 퍼져 조선 안에 무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124
그런데 이때는 무론이요 이 뒤 오래도록 일본·유구에서는 목화 심을 줄을 모르고, 조선으로부터 얻어 가는 것으로써 그 수용에 이바지하니, 조선에서는 우리 소용도 있거니와 또 일본·유구로부터 구리·은·유황과 기타 여러가지를 필요한 물자를 바꾸어 쓰기 위하여서도 목화 재배의 보급을 크게 힘썼었다.
 
125
조선에 일본이 가지지 못한 화포의 위력이 있고 또 일본이 쌀과 무명을 조선에서 얻어가야 할 동안에는 조선이 좀 방심하고 지낼 수도 있고, 일본이 아무리 강악스러워도 큰 걱정이 없으며, 간혹 감정의 충돌로 하여 중종( 中宗) 경오년의 삼포 왜변(三浦倭變) 같은 소동이 있을지라도 고대 저네를 굴복 시켜 다시 휘뿌릴 수가 있지마는, 한번 우리가 가졌던 위력과 혹 그보다 더한 것을 저네가 가지게 되고, 더 내켜서 우리에게 없는 것을 저네만이 가지게 될 것 같으면,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는 딴판 될 밖에 없다.
 
126
그런데, 얼마 뒤에는 일본에서도 목화를 심어서 무명을 낳이할 줄도 알고, 또 시방부터 한 四[사]백 년 전에 서양 사람의 배가 일본으로 드나드는 동안에 서양에서 새로 만든 총(銃)과 화약이 일본으로 들어왔으며, 이때 일본은 나라 안이 쪽쪽이 나서 서로 싸움박질을 하는 참임으로써, 이 새 무기( 武器) 가 금시에 나라 안에 보급되었다. 그런데 이 서양의 총은 그 위력이 옛날 ㅗ선 화포의 견줄 바가 아니었다.
 
127
또 서양의 총이 일본에 들어온 지 얼마 뒤에 일본에서 이것을 선물로 조선에 보낸 일이 있었건마는, 조선에서는 대단히 알지 아니하여 이것을 광 속에 깊이 넣고 잊어버렸다.
 
128
우리 선조(先祖) 임금 때에 일본에 수길(秀吉)이라 하는 걸특한 장수가 나서, 여러 세력을 다 집어치우고 나라 안을 통일한 뒤에, 그 남는 힘을 어디 다가 쓸꼬 하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예로부터 탐내는 조선이 당파 싸움에 다른 정신 없음을 보고, 이에 엉터리 없는 핑계를 만들어 가지고 선조 二五[ 이오] 년 임진, 시방부터 三五[삼오]○년쯤 전에 군사 二[이]○만을 움직여 부산으로부터 조선으로 쳐들어 왔다.
 
129
이보다 앞서 조선에서도 수길의 동정이 수상하다 하여 거기 대한 준비를 바삐 할 필요를 말한 이가 있었으되, 당파 시샘으로 어느 한편이 하는 말은 다른 한편이 덮어놓고 반대하는 판이므로, 이러한 말도 반대당에게 막혀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130
그래서 아무 준비 없이 큰일을 당하여 워낙 망단한 데다가, 총을 놓고 들어오는 대적을 활로 대항하는 싸움이니까 애초에 셈이 자라지 못하였다.
 
131
적군은 무인지경처럼 지쳐 올라와서 겨우 二[이]○일 만에 서울이 적군에게 떨어지고, 임금 이하 조정은 창황히 의주로 도망해 버렸다. 이에 적군은 두 길로 나뉘어서 한 패는 평양으로 올라오고, 한 패는 함경도로 들어갔다. 총을 배워서 쓰고, 배우지 않아서 쓰지 아니한 차이가 이렇게 심하였다.
 
132
임진 왜란은 엎칠뒤칠하면서 무릇 일곱 해를 끌었다. 일본이 그렇게 세차고 조선이 그렇게 가녀렸는데, 조선이 능히 오래 부지한 것은 기이한 일이다. 명나라에서 구원병을 얻어 왔더니 그 덕을 입었던가. 결코 그것이 아니었다. 실상은 총 때문에 지던 싸움이러니 총보다 더 무서운 무기를 미리 준비 하여 가지고 오늘을 기다리고 있던 영특한 장수가 조선에 있었다.
 
133
그는 조선 편의 수군을 거느리고 남방의 바다 목장이를 지키고 있는 이순신( 李純信) 이었다. 왜란 나기 전에 이순신은 전라도의 수군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오늘이 있을 줄을 짐작하고, 또 일본군을 바다 위에서 막는 수밖에 없 음을 생각하고서, 궁리궁리하여 일본의 군사 실은 배를 반드시 무찔러 버릴 방략을 정하였다. 여러 가지 새 무기를 만드는 가운데 특별히 배를 둥그런 궤짝 모양으로 만들고 사방에 구멍을 뚫어 대포를 걸고 사람이 속에서 이 것을 놓는데, 배의 거죽에 쇠 투겁을 뒤집어 씌우고 그 위에 굵은 못을 촘촘히 둘러 박아서, 우리는 마음대로 전직 중으로 횡행하되 적군은 우리 배에 범접하지를 못하게 만든 것이었으니 시속에 거북선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134
일본 군사가 물에서 평양까지 올라갔으나 거기서 더 쳐들어가려 하면 반드시 수군을 우리 남해로부터 서해로 돌려 내보내어서 병력을 보태 주어야 할사 정이어 늘, 이순신의 거북선 때문에 일본 수군이 나오는 대로 엎지름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그 수군 전부가 온통 섬멸되어서 수륙 두 쪽이 다 기운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가, 일곱 해 만에 수길이 죽으매 지리하던 싸움이 그만저만 끝난 것이었다.
 
135
이순신의 한 팔로 임진 이후 일곱 해의 전국(戰局)을 버틴 것이요, 거북선의 발명이 이순신으로 하여금 동서 고금에 짝이 없는 해전상의 대 공적을 세우게 한 것이었다.
 
136
모르던 것을 배우고, 없던 것을 만들어 냄은 언제든지 나를 보존하고 남을 이기는 힘이다.
 
137
조선 사람의 마음이 죄다 최무선 같고 이순신 같을 양이면, 나라의 힘과 영광이 얼마 만하였을는지 헤아리지 못하겠지마는, 조선 사람에게는 가끔 그 전 일을 잊어버리고 다음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버릇이 있어서 쓰라 던매를 맞게 되었다.
 
138
안에 준비가 없으면 반드시 밖에서 걱정이 옴은 여러 번 경험하여 아는 바요, 또 왜란보다 앞서서 만주 방면의 여진 겨레의 꿈적거림이 몇 번 있었으니까 마땅히 이에 대한 방비를 꾀했어야 할 것이어늘, 우리들은 병란이 지나가자마자 그동안에 일은 씻은 듯이 잊어버리고, 버릇 된 당파 싸움을 다시 버르집어 가지고 까닭 없이 임금을 갈아내고 죄 없이 쓸 사람을 죽여 버리느라고 다른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139
그러는 옆에서 칠 년 왜란에 조선과 명나라가 다 피곤하여진 틈을 타서 여진 사람들이 온 겨레의 힘을 모아 가지고 나라를 세워 청(淸)이라 이름 하고 명나라의 천하를 빼앗으려 덤볐다. 대세가 이미 기운 뒤에도 명나라를 위 한다 하여 청나라를 배척하다가, 인조(仁祖) 임금의 五[오]년 정묘와 十四[ 십사] 년 병자에 두 번 그 군사의 말굽이 조선의 북쪽 절반을 와서 짓밝고, 병자년에는 그투나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형편에 빠졌다.
 
140
대저 그때 청나라의 힘은 수십만 무리를 뭉쳤음에 지나지 못하고, 또 활과 칼의 유치한 무기를 가지고 다님에 그쳤거늘, 우리 조선은 임진 왜란 중간으로부터 이미 총을 만들기도 하고 총 놓는 재주도 매우 익숙하였었으니까, 왜란 뒤에 그 이용의 길을 넓혀 왔었으면 미개한 오랑캐 무리쯤은 우습게 물리 침을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할일은 하지 않고 놓지 못할 마음을 놓고있다가, 불과 二[이]○년 만에 다시 북쪽 오랑캐에게 이러한 봉변을 하는것은, 진실로 하늘이 꾸지람의 매운 채찍을 우리에게 먹여서 그 무심함을 경계 하신 일이었다.
 
141
인조의 다음 임금은 효종(孝宗)이니, 효종은 병란 뒤에 청나라로 볼모 살이를 가 있는 동안에 청나라의 내정을 자세히 알고, 돌아온 뒤에는 청나라에 대한 원수를 꼭 갚기로 하는데, 이제는 청나라에 없는 총 놓는 군대를 많이 양성하는 것에 제일임을 생각하고, 갖은 방법으로써 이를 장려하여 드디어 조선 총수대(銃手隊)의 날랜 이름이 외국에까지 들렸다.
 
142
그러나 준비가 다 되기 전에 효종이 세상을 떠나고 청을 치는 계획은 그만저만 뭉그러졌는데, 기이한 일은 청을 칠 양으로 길러낸 이 총수대가 도리어 청국을 위하여 다른 나라를 쫒는 데 소용된 것이다.
 
143
곧 청나라가 천하를 얻었을 그때에 아라사 사람이 유럽으로부터 시베리아로 나오고, 다시 남으로 꺾여 흑룡강(黑龍江)으로 내려와서 만주 땅을 침범하고 있었는데, 청나라 군사가 활로써 대적하여 번번이 패전하고, 하는 수 없이 조선에 향하여 총수대를 구원병으로 보내 달라는 청을 하였다.
 
144
그래서 조선에서 효종 五[오]년과 六[육]년의 두 번에 총수대 얼마씩을 흑룡강 방면으로 출동시킨 일이 있었다.
 
145
우리 총수대가 북으로 가매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어림에서 아라사의 무리를 만나서 솜씨있는 불질을 퍼부으니, 저쪽에서 뜻 아니한 포화를 받고 쩔쩔매는 가운데 화약고가 ㅓ져 배와 사람이 불에 타고 남은 무리가 머리를 싸매고 멀리 도망하여, 두번 다 아라사 살람의 동방으로 침략 하는 걸음이 한참씩 꺾였었다.
 
146
배우고 또 의사를 내어서 시대에 앞서는 연장을 가지는 이가 언제든지 그 시대를 거느리게 되는 것이었다.
 
 
 

9. 九[구], 밑에서부터 북받쳐 올라오는 힘

148
인민의 자각
 
149
임진왜란과 병자 혼란을 치르고 나라 일과 백성의 살림살이가 다 말이 못 되매, 나라에서 어떻게 하면 이 곤난의 구렁에서 벗어날까를 반성( 反省) 하기 시작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경제 방면으로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을 깨 달았다.
 
150
그래서 인조(仁祖)·효종(孝宗)·숙종(肅宗)의 삼대 동안에 수차( 水車) 를 장려하고 보(洑)를 수축하여 곡식의 생산이 늘도록 하며, 나라에 바치는 세를 가볍게 또 편리하게 하여 백성의 힘을 기르며, 조선 수천 년 동안에 무명을 돈으로 쓰던 것을 폐하고 새로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쇠돈을 만들어서 경제의 발달을 촉진하며, 서방의 의주(義州)와 북방의 회령(會寧)과 남방의 부산에서 하는 외국 무역을 적당하게 지도하여 이익이 나라 안으로 떨어지 기를 꾀하는 등의 필요한 시설을 하였다.
 
151
그러나, 한편으로 권세 다투는 벼슬아치들의 당파 싸움이 갈수록 심해져서, 숙종 일대 여러 십년 동안에는 피로 피를 씻는 화변이 뒤를 대어 일어나는 형편이매, 정치느이 개혁과 경제의 건설 같은 것이 그대로 잘되어 나갈 까닭이 없었다.
 
152
그래서 영조(英祖) 임근은 당파 싸움을 없애지 않고는 될 일이 없으리라 하여, 무엇보다도 이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심지어 반대당을 모아서 소목을 잡고 술잔을 주고 받게 하며, 원수된 집안끼리의 혼인을 임금이 스스로 중매를 들기도 하였다.
 
153
그러나 원박달 정칠할 기력이 이 노릇하는 가운데 많이 허비될 뿐이요, 개혁 사업의 실지 효과를 낸 것은 많지 못하였다.
 
154
나라와 정부에서 형식적으로 이런 일을 하며말며 하는 동안에, 민간의 나라 일 근심하는 이들 사이에는 조선의 실제 맞는 개혁 방법을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풍기가 일어났다.
 
155
효종 때의 유형원(柳馨遠)과, 정조(正祖) 때의 박제가( 朴齊家)· 정약용( 丁若鏞) 은 그런 이들 가운데 가장 드러난 이이다.
 
156
이네들의 의견을 휘몰아 말할진대, 조선의 모든 병통은 구차함에서 난 것이니, 모름지기 국내의 교통과 해외의 무역을 힘써서 먼저 재력을 장만 해야 한다 함이요, 몇천 년 외국 비단을 사다 입으면서 그것을 배워 짜 볼 생각을 아니하고, 바늘과 같은 대수롭지 아니한 물건까지도 매양 여러 천리 외국에 가서 사다 쓰면서 불편한 줄을 모르니, 모름지기 우리의 필요한 물건은 우리 손으로 만들어 내도록 설비를 할 것이라 함이요, 조선 사람의 살림살이 하는 방법은 켸켸묵은 옛 태를 벗지 못하여 불편 불리함이 크니 의식 거처와 일용 백물에 외국의 진보한 방식을 배워다가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 함이었다.
 
157
이네들의 의견에 취할 점이 많았었건마는, 지각 있는 몇낱 사람의 사이에서 이야기삼아서 옮기는 말에 그치고, 능히 세상을 움직여 단연히 실행 하기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158
나라에서 하는 일과 지식 있는 이의 생각하는 일이 하나도 되는 것이 없 음은, 국민 상하가 워낙 구습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하기 때문이니, 이 완고한 소견을 잡아 헤침에는 사상적(思想的)으로 일대 혁명을 일으켜야 할 것을 생각하는 이가 총명한 청년의 사이에서 생겨서 그 수가 차차 늘어갔다.
 
159
우리 임진 왜란의 좀 전에 서양으로부터 천주교(天主敎)가 명과 일본으로 들어와서 서양의 새 사상과 학문이 차차 번역되고, 그것은 조선으로도 흘러 들어와서 선비의 사이에 읽혀지고 있더니, 숙종 이후로는 천주교에 들어가서 새 희망을 붙이려는 이가 나오고, 영조·정조의 즈음에 이르러는 이 것으로써 흐리멍덩하고 고탑지근한 사회의 풍기를 개혁하려하는 무리가 생겨났다.
 
160
그래서 그네들은 천주교를 개인과 사상과 국가의 생명을 한꺼번에 새롭게 하는 유일한 길로써 맞아들여, 어떠한 희생이라도 마다하지 아니하였다.
 
161
대개 예수의 종교가 생겨난 뒤에 교인이 들어가서 전도하지 않고 그 백 성 스스로가 자진하여 교를 받든 실례는 이때까지 없던 일로서 이것이 크게 로마 법왕 이하 서양의 선교사들을 감동시켜 서양으로부터 교중들이 연방 위 난을 무릅쓰고 들어오며, 여기서도 교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점점 늘어서 그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두드러졌다.
 
162
그러나 이것이 또한 조정 벼슬아치의 당파 싸움하는 거리로 이용 되어서, 정조· 순조( 純祖) 여러 임금의 대에 가끔 교인에 대한 필박이 일어나서 교가 숨어서 행할 뿐이요, 감히 거죽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163
외국의 종교를 빌어서 사회 개혁을 하려 하던 계획이 그대로 되지 아니 할 때에, 민간에서 조정과 벼슬아치를 제쳐놓고 인민 스스로의 힘으로써 새 세상을 만들어내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경주의 최제우(崔濟愚)가 우리 옛날부터의 하느님 신앙을 줏대로 하고, 거기 백성들이 수군수군 우리의 앞에 「 남조선 」이라는 좋은 세상이 온다고 믿는 관념을 곁들여서, 사회 개혁을 목표로 하여 동학(東學)이라는 이름으로써 하층 인민의 사이에 편 새 교문( 敎門) 이 그것이다.
 
164
동학은 조선의 오랜 신앙에 뿌리를 박고, 시세의 요구에 맞추어 인민대중을 휘동하려 하는 운동이요, 사회의 맨 밑바닥에서부터 북받쳐 올라오는 힘 이기 때문에 그 장래에는 커단 문제가 들어 있었다.
 
165
여하간 인민은 이미 벼슬아치를 떠나서 자기네의 갈 길을 스스로 트 려고 하였다.
 
 
 

10. 一[일] ○, 제국주의 앞에 나선 조선

167
고종 황제 이후
 
168
조선 사회의 내부가 한참 뒤숭숭하여 가는 때에 열 두살 된 어린 임금 고종( 高宗) 이 들어서고, 그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실권을 잡았다. 대원군은 욱기도 있고 결단성도 있어서, 그전부터 나라에서 손대지 못 하던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용감하게 실행하였다.
 
169
임진 왜란에 불타서 쑥밭으로 있던 경복궁을 다시 이룩한 것이 그 하나요, 이 때까지 六○여 년 동안 안동 김씨(安東金氏)들이 줄곧 임금의 장인이 되어 나라 권세를 붙잡고 나오던 것을 단연히 끊어 버리고 왕후를 생자리 인민씨( 閔氏) 네에게서 골라 들인 것도 그 하나이다.
 
170
고종이 임금 되기 조금 전에 아라사가 청국으로부터 연해주(沿海州) 땅을 얻어서 우리 함경도와 접경이 되매, 차차 와서 조르는 일이 많고, 또 이 전후에 영국과 불국의 바다 측량하는 배가 뻔찔나게 우리 남쪽 서쪽 해변으로 드나들면서 이따금 서로 통상(通商)하자는 편지를 들어뜨리고 가는 일도 있 었다. 이는 다 숨어 있는 조선을 세계가 와서 불러냄이었다. 대원군은 세계의 대세에 깜깜함으로써 이것을 어떻게 수응해야 옳을지를 모르고, 다만 우리 대무을 굳게 닫고 그네의 발을 붙이지 말게 하는 것이 상책으로 생각 하였다.
 
171
그래서 정권을 잡자마자 서양 사람과 교통하는 천주교의 무리와 그 전 부터나라 안에 들어와서 선교하던 불국(佛國) 교사들까지를 모조리 잡아 죽였다. 이 소문이 중국에 있는 불국 함대(艦隊)에 전해 가매, 고종 三[ 삼] 년 병인에 불국 군함이 와서 강화(江華)를 습격하고 한강을 치올라서 서울을 엿보고 나갔다. 그러나 우리 군대와 싸워서 패전하고 그대로 물러가니 이 것이 병인 양요(丙寅洋擾)이었다.
 
172
또 五[오]년 무진에 미국 배 한 척이 밀물에 대동강으로 치올라 왔다가 물이 써매 내려가지 못하고 우리 인민과 충돌하여 배와 사람이 다 불에 타고만 일이 있더니, 八[팔]년 신미에야 미국의 아시아 함대가 이 ㅣ소문을 듣고 사실을 조사할 양으로 인천으로부터 강화까지 들어왔다가 우리 군대에게 쫓겨 나가고 이어 싱겁게 돌아간 일이 있으니, 이것이 신미 양요( 辛未洋擾) 란 것이다. 두 번 양요를 다 물리치매 대원군은 서양이 하잘 것 없다고 그릇 판단하고 더욱 쇄국 정책(鎖國政策)을 굳게 하였다.
 
173
이때 일본에서는 여러 백 년 동안 나라의 실권이 대장군(大將軍)이란 이에게 돌아가고 임금은 빈 이름만 가지고 있다가, 우리 고종 五[오]년 무진에 오래간만에 정권이 임금에게로 돌아오고, 서양의 진보한 정치 제도와 학술 기예를 열심으로 본받아서 동양에 유일한 개화국이 되고, 조선에 대하 여는 그 전 대장군 시절의 하던 관례를 폐지하고 임금의 이름으로써 새로운 외교관계 맺기를 청하여 왔다. 대원군은 이에 대하여도 거절하는 태도를 가져 서두 나라 사이에 큰 말썽이 되었었다.
 
174
그러다가 우리 조정에서 왕후 민씨편의 세력이 커지면서 대원군은 정권을 내어놓고, 거기 따라서 외국에 대한 정책이 고쳐져서 十三[십삼]년 병자에 이르러 조선과 일본 사이에 수호조약(修好條約)이 성립하여 서로 공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은 시초요, 이 결과로써 부산·인천·원산 세 속이 외국 통상의 항구로 개방되었다.
 
175
일본이 조선과 외교 관계를 튼 뒤에 그들은 조선의 하잘 것 없음을 보고 조선에 대하여 검은 야심을 품었다. 그러나 그때에 조선은 청국에 종주권( 宗主權)을 맡기고 있는 터임으로써, 그네의 야심을 부리려면 먼저 조선을 청국으로부터 떼어내어야 할 사정이었다.
 
176
이때 조선 안에도 시세가 전과 같지 아니하여 비록 형식일망정 주권의 일 부를 청국에 맡기고 있는 것이 잘못된 일임을 알고, 기회가 있으면 완전한 독립을 실현하려 하는 청년 정치가의 무리가 있더니, 일본은 그네를 부추기고 또 일만 만들면 일본이 뒷배를 보마고 꾀어서 그네로 하여금 청국 배척을 실행하게 하였다.
 
177
조선보다 일본의 야심을 잘 알고 있는 청국은 조선의 완고한 정치가들을 내 세 워서 청년들의 독립 운동을 방해하는 동시에, 국제의 세력으로써 일본을 억제하기 위하여, 조선을 권하여 구미 각국에으로 더불어 골고루 통상 외교 관계를 맺게 하여, 고종 十九[십구]년 임오에 미국과 통상 조약을 맺고 이어 영국·독일 이하 여러 나라와도 외교 관계를 만들었다.
 
178
제 힘은 장만하지 않고 일본의 꾐에 속은 청년 정치가들의 현상 타파 운동은 여러 가지 풍파를 일으켰다. 고종 十九[십구] 년 임오에는 일본식으로 새로 편제한 군대에 대한 구식 군인과 반동인 유월지변(六月之變)이 나고, 二一[ 이일] 년 갑오에 이르러는 드디어 동학의 무리가 「 제 포 구민( 除暴救民) 」― 못된 놈을 집어추고 백성을 건져내리라 하는 깃대를 내세우고 전라도에서 변란을 일으켜서 그 형세가 대단하고, 관군이 내려가서 진정하지 못하 매 청국에서 구원병을 데려다가 겨우 평정하였다.
 
179
그런데 지난 갑신 사변 뒤에 일본과 청국의 사이에 약조하기를, 조선에 일이 있어 군사를 보내게 될 때에는 서로 통기를 하자고 한 일이 있더니, 오래 두고 청국과 얼러붙을 기회를 찾던 일본이 옳다쿠나 하고 이번 청국의 몰래 출병한 일을 탄해 가지고 옥신각신하다가, 드디어 청·일 두 나라의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일본이 싸움을 이기고 그 구화 조약에서 조선이 청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함을 얻었으나, 이것을 일본편으로부터 말하면 청국에 거리낄 것 없이 조선을 주무르는 권리를 얻은 것이었다.
 
180
조선에서는 이 끝에 왕이 황제 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대한( 大韓) 이라고 고쳤다. 그러나 세계는 바야흐로 제국주의의 물결을 타고 나가고, 더욱 동양이 약육 강식(弱肉强食)의 좋은 미끼로 되어 있거늘, 대한 제국은 밖으로 이러한 시세를 모르고 안에서는 도깨비 장난을 일삼음이 시방 이 전과 같을 뿐이었다. 그러고 일본이 까다롭게 모든 일을 아랑곳하매 내가 잘하여 이 것을 막을 생각은 아니하고, 한갓 외국의 힘을 기대서 일본의 기를 죽 이기에만 정신을 썼다.
 
181
아라사는 그전 유럽에서부터 바다로 나다니는 구멍을 얻으려고 애쓰되 마음대로 되지 않다가 만만한 동양에 와서 어름어름하여서 청국으로부터 연해주를 얻어 태평양 방면으로 나오게 되기는 하였지마는, 그 해삼위( 海蔘威) 항구도 겨울에는 얼어서 소용이 적으매, 얼지 않는 좋은 항구를 조양으로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청일 전쟁 끝에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요동반도( 遼東半島) 를 얻음을 보고 아라사가 독일국·불국과 한가지로 일본이 요동 반도를 가짐은 동양 평화에 해롭다 하고 항의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요동 반도를 청국으로 돌려주게 하더니, 그 뒤 얼마 아니하여 저희가 요동반도를 빌어 가지고 그 여순구(旅順口)에 군사 시설을 하였다.
 
182
또 한국이 일본을 괴로와함을 보고는 일본을 제어하는 데는 아라사가 제 일임을 자랑하여서 한국 황제의 신뢰를 받고, 그러는 가운데 우리 남해의 진해만( 鎭海灣) 과 서해의 고하도(孤下島)를 빌리라고 하여 거의 성공 할 뻔하다가, 우리 독립 협회와 일본 사람들의 방해로써 실패하고 은근히 다음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183
그 뒤 아라사가 핑계 생기는 대로 만주를 저희 손아귀에 넣고 내켜서 한국의 북방을 엿보아 마지아니하니, 일본이 이 때문에 머리를 앓아서 누누 히 아라사로 더불어 서로 타협하기를 주선하고, 심지어 한국과 만주를 나누어 먹으려고 하기까지 하엿으나 다 여의치 못하고, 마침내 아라사와 일본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 아라사가 패전하고, 그 구화 조약에서 일본이 한국에서 무슨 짓이라도 마음대로 하게 둔다는 조건을 아라사가 인정하고 말았다.
 
184
저즘께 청국의 손을 조선에서 물리치고 이제 또 아라사의 손을 한국에서 떼어 버리매, 일본은 한국을 도마 위에 얹어 놓고 언제든지 필요한 대로 요리 할 수가 있게 되었다.
 
185
이에 이르러 한국의 지사들은 조국을 보존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 하였다. 그러나 교만한 일본의 눈에는 다시는 교계할 아무 것이 없엇다. 혹은 의정서( 議定書)라 하고 혹은 협약(協約)이라 하는 여러 가지 계단을 만들어가면서 한걸음 한걸음 한국을 집어삼킬 마당으로 가까이 갈 따름이었다.
 
186
드디어 융희(隆熙) 四[사]년 八[팔]월 二九[이구]일에 이르러, 조선의 오랜 전통(傳統)이 일본의 사나운 어금니에 잠시 끊기는 치욕이 왔다.
 
187
일본이 병자 수호 조약 때로부터 소리를 크게 하여 조선의 독립을 어디까지 보존하겠다고 외친 것은, 말하면 일본이 조선을 집어먹을 때까지 다른 나라는 손을 대지 못한다는 의미이던 것이다.
 
 
 

11. 十一[십일], 온 민족이 한 목표로

189
독립 운동
 
190
조선의 역사는 심히 장원하고 그동안에 파란도 많이 있었지마는, 어떻게 강대한 민족이 덤벼서도 조선의 전통(傳統)을 끊어 보지는 못하였다. 도리어 서뿔리 조선을 건드렸다가는 욕심을 채우기는새로에 저희들만 큰코를 다치고 물러남이 예사이었다.
 
191
이제 조선의 四[사]천여 년 역사가 처음 일본으로 말미암아 중등무이를 당하게 되매, 조선 민족의 통분절치(痛憤切齒)는 이를 길이 없었다.
 
192
더욱 일본이 七[칠]○년 동안 우리를 도와 독립을 지켜 주겠다고 맹세 하는 뒷구멍으로 가만가만 흉계를 꾸며 가지고 마지막 우리 복장에 칼을 꽂고 말았 음에 대하여, 그 무신 무의를 응징하지 않고는 말겠느냐 하는 결심은 온 인민의 사이에 새로이 굳어졌다.
 
193
저희 이른바 총독부의 정치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차별 대우( 差別待遇) 와 절대 압박(絶對壓迫)으로써 일관하였다. 우리의 의기를 꺾고 양심을 빼앗기에 필요한 모든 학정(虐政)이 궁흉 그악하게 실시되는 대로, 조선 사람의 반항 운동은 겉으로 속으로 안에서 밖에서 온갖 기회를 붙잡으며 온갖 형태를 만들어서 꿋굿하게 진행하였다.
 
194
그 주안(主眼)은 안에서는 실력을 양성함이요, 밖에서는 국제 정세를 이용 하여 놓치지 아니함에 있었다.
 
195
일본의 병합을 당한 지 五[오]년 만에 첫 번째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가 四[ 사] 년 뒤에 독일·오스트리아의 패전으로 끝이 나고, 승전한 연합국이 뒷일을 조처할새, 미국 대통령 윌슨의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의지하여 새 세계를 만든다는 것이 발표되었다.
 
196
조선 사람이 우리의 민족적 분한을 세계에 드러낼 기회가 왔다 하여, 나라 느이 안팎에서 민족 자결 방법에 대한 모든 준비를 갖추었다가, 구화 회의( 媾和會議) 가 불국 서울 파리에 열린 기미년(一九一九[일구일구]) 三[ 삼] 월 一[ 일] 일에, 조선 민족 대표 三三[삼삼]인의 이름으로써 독립 선언을 발표하고, 이어 국제적 활동에 편리한 상해에 대한국 임시 정부를 세웠다.
 
197
이 운동이 일어나매 구내는 무론이요 무릇 세계상 조선 사람이 사는 곳에서 독립 만세의 소리를 하늘에 사무치도록 높이 부르고 다 각각 있는 힘을 다 하여 이 운동을 추진하였다.
 
198
「베르사이유」의 구화 조약은 의연히 현상 유지(現狀維持)를  주하여 마침내 약소 민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말았지마는, 세계 민족 운동 역사상에 처음 있는 위력을 나타낸 조선의 삼일 운동은, 조선 사람의 열렬한 독립 정신과 일본의 조선에 대한 무도 불의함을 깊이깊이 세계 만인에게 인식 시켰다.
 
199
삼일 운동 이후로 일본의 조선 압박은 더욱 심하였지마는, 조선의 민족 항 전은 그러는 대로 불길이 높아서 점점 걷잡을 수가 없이 되었다.
 
200
이렇게 장기전(長期戰)으로 일년 또 일년을 지내는 가운데, 일본은 더욱 야심을 부려서 만주를 집어먹고 또 중국을 침략하다가, 마침 둘 째번 세계대전이 일어나매, 일본이 독일·이탈리아의 편이 되어서 미·영으로 더불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201
이동안 조선 사람은 중국에서는 항일전(抗日戰)의 한편을 담당하고, 태평양에서도 힘이 자라는 대로 연합군의 작전을 도와서, 우리 민족의 새로 살길을 찾기에 노력하였다.
 
202
일본이 힘 자라지 않는 두 쪽 싸움을 억지로 계속하다가 을유( 一五四五[ 일오사오]) 년에 들어와서는 세궁 역진하여 八[팔]월 十五[십오]일에 마침 내미· 영· 중· 소네 연합국에 대하여 무조건으로 항복하였다.
 
203
이보다 앞서 이탈리아·독일이 다 거꾸러져서 이에 여러 해에 걸친 유럽 대전과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일시에 끝나고, 세계가 새로와지는 가운데 조선의 독립이 三七[삼칠]년 만에 돌아오고, 삼일 운동 뒤 二七[ 이칠] 년 동안 민족 일치의 투쟁이 당연한 열매를 맺었다.
 
 
 

12. 十二[십이], 조선 역사에서 무엇을 배웠나

 
205
조선 역사는 통틀어 국민 생활에 대하여 큰 교훈을 주는 기록이어니와, 특별히 조선 인민의 이 뒤 몸가지고 마음먹음에 대하여 절대한 지도력( 指導力) 이 되는 것이다.
 
206
어느 국민의 역사든지 다 그렇지마는, 조선의 역사는 특별히 지리적 조건( 地理的條件)으로부터 큰 약속을 받아 나왔다. 더욱 그 위치가 동방 세계에 있는 여러 민족의 활동하는 요충(要衝)에 당하여 있기 때문에, 동양 역사 위에 민족적인 큰 변동이 있을 제마다 반드시 심각한 영향이 조선으로 미쳐 왔으며, 그러는 때에 국내 사정을 따라서는 국가 사회의 운명이 중대한 위기( 危機)에 다다른 적이 많았었다.
 
207
그리고 조선 국토의 북쪽 뒤와 남쪽 앞에는 언제든지 강악한 민족이 주먹을 부르쥐고 있다가, 조선 안에 조금만 허소한 틈서리가 나면 그만 달겨 들어서 못된 행티를 함이 상사이었다.
 
208
그러므로 조선에서는 언제든지 국력을 충실하게 하고 국민의 단합을 탄탄하게 하고 있어야 되었다.
 
209
조선 사람은 총명한 인민이요, 능력 있는 인민이요. 또 대적을 당하여는 싸움도 잘하는 인민이었다.
 
210
진실로 이네들이 상하 일심으로 나라를 빛내겠다고 덤비면 못할 일이 없고 당하지 못할 대적이 없을 뻔하였다. 그런데 그네에게는 편갈라 가지고 집안 끼리 싸움질하는 악습이 있었다.
 
211
무론 당파 다툼은 사람 사는 어디든지 없는 데가 없는 일이지마는, 지각 있는 백성은 집안끼리 싸우다가도 외적(外敵)이 있으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단합 일치하여 외적부터 물리치는 것이어늘, 조선 사람은 간혹 아가리 벌린 범과 같은 대적의 앞에서도 당파 싸움을 그칠 줄 모르는 일이 있으며, 갈리면 죽고 뭉치면 사는 마당에서도 사심 사욕으로써 서로 머리 끄 덩이를 꺼들고 놓지 못한 일이 있었다.
 
212
조선 역사가 언제 영광스러웠느냐 하건대, 국민 상하가 잘 단합하여서 전체 생활(全體生活)의 공동 목표로 줄달음질 하던 때에 있었다. 그 반대로 이유는 무엇이든지 국내가 분열하여서 저희 각각 혼자 옳고 잘났다고 하는 때에는 반드시 파측한 환난이 밖으로부터 덤벼서, 버티고 떼미는 두 편이다 한꺼번에 외적의 두드림 감이 되었었다.
 
213
조선의 지리적 위치는 언제든지 종요로우며 또 조선의 앞뒤 문에는 언제든지 도둑놈이 눈을 홉뜨고 틈을 보고 있다. 그전에는 가까운 도둑놈만 있었지마는 이 뒤에는 먼 데 도둑놈이 더 무지하게 덤빌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214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우리의 철없는 내부 분열이 어떻게 여러 번 쓰라린 고통을 불러 왔던 일을 생각하고서, 대외 관계에 있어서는 모든 것을 교계 하지 말고 다만 단결 일치하여 나를 남에게 내어주지 않겠다는 한 가지 작정을 할 것이다.
 
215
이것이 우리 민족과 국민의 모든 요구를 만족하게 하고, 우리의 역사적 발전을 추진시켜 줄 절대한 조건이다.
 
216
조선 민족의 문화를 건설하는 능력은 누구만 못하지 않았다. 다만 그 전에는 위대한 발명과 창작이 골방 속에서 생겼다가 골방 속에서 흐지부지해 버린 결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세계의 네거리에서 민족 능력의 경쟁을 해야 하는 때이매, 모름지기 우리의 의사와 솜씨를 세계적으로 부려서, 우리의 은덕이 온 인류의 감사를 받도록 우쩍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소임은 크고 할일이 많음을 생각할지라도, 우리의 귀중한 심력을 쓸데 없는 집안 싸움에 허비할 수 없음을 깊이 깨달을 것이다.
 
217
우리는 또 한 가지 민족의 앞길에 대한 역사의 가르침을 특별히 주의 해야 된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앞으로 발전하는 방향이 북방에 있다는 사실이다.
 
218
국토와 민족의 통일이 반도의 남방인 신라에서 시작하여서 신라는 겨우 대동강까지를 거두었는데, 그 뒤를 받아서 태봉(泰封)은 청천강까지 내 키고, 고려는 압록강까지 내키고, 이씨조선은 두만강·백두산까지 내켜서, 그렇듯 무서운 민족적 시달림 가운데서도 조선의 강토는 줄곧 북으로 북으로 늘기만 하여 나왔음을 우리가 역사에서 알지 아니하였는가.
 
219
최근에 이르러서는 그전같이 땅을 온통 우리나라로 거두어 들이지 못할 형편에 있어 오지마는, 여전히 민족 발전의 발길은 넌짓넌짓 북으로 나가기를 쉬지 아니하여, 북간도(北間島)·서간도(西間島)로부터 온 만주와 몽고와 연해주( 沿海州) 와 시베리아까지 조선 민족의 생활 마당이 나날이 확장 하여나가기만 함은, 우리 스스로가 시방 방재 만들어 나가는 새 역사가 아닌가.
 
220
우리 조상의 끼치신 살림이 북방에 있으며, 또 우리 영원 무궁히 늘고 붇는 자손을 연해 연방 세간낼 자리가 북방에 있다. 형식은 어떻게 차리든지 북방으로 발전해야 할 사실상의 요구는 조선 민족이 있는 동안 언제고 변개 될 리가 없는 것이다.
 
221
과거의 우리 조상들이 이 역사적 소임을 충실히 담당해 나온 것처럼, 우리와 및 우리의 자손들도 만족하게 이 절대한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222
세계에는 제가 저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민족도 있고, 그 반대로 번듯한 저 의 역사는 없이 항상 남의 역사 만드는 거리 노릇만 하는 민족도 있다.
 
223
당당하게 정치적 독립을 지키고 문화상 공적을 세우는 민족은 곧 역사를 만드는 이요, 그렇지 못하고 꿋꿋한 힘과 씩씩한 기운을 가지지 못하여 국제( 國際) 의 사이에서 남에게 쪼들려 지내기에 바쁘고, 또 솜씨가 없거나 마음이 게을러서 발명과 창작(創作)으로써 세계 인류에게 공헌한 아무 것이 없는 민족은 남의 역사를 만들어 주다가 마는 이이다.
 
224
조선 사람은 스스로 우리 역사를 만들어 나오는 민족임이 무론 이지마는, 한편으로 남의 역사 거리 노릇을 했다. 할 부분도 없지 아니하다. 이제부터의 우리는 정신 차리고 힘을 다하여 다만 온전하게 내가 내 역사를 만드는 민족 노릇을 할 뿐 아니라, 다시 우리의 탁월한 품질을 한껏 발휘하여서 세계 인류의 가운데서 가장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지게 되기를 굳이굳이 기약 할 것이다.
 
225
배우는 것이 힘이요, 하는 것이 장사임은 언제고 매한가지다.
 
 
226
<一九四七年[일구사칠년] 十一月[십일월] 東明社[동명사] 發行[발행]>
【원문】성인교육국사독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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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남선(崔南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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